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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에서 직면한 문제들을 붓다의 가르침으로 설파하다
가톨릭을 믿고 있지만 산사(山寺)에서 느낄 수 있는 고즈넉한 분위기와 마음을 울리는 풍경(風磬)소리가 좋아서 불교는 왠지 모르게 거부감이 없다. 절에서 들리는 반야심경은 들으면 들을수록 중독성이 있고, 스님들의 발우공양은 우리가 식사시 꼭 배워야 할 정도로 정갈하고 소탈하다. 거기에 스님들도 신부님처럼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가고 있으니 그 운명이 어찌 보면 애처롭고 가혹하게 느낄 수 있겠지만 그들이 선택한 삶이기에 그들의 선택 또한 존중해 주고 싶은 마음이다.
급속한 발전과 더불어 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에 따른 그 부작용들은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발전에 따른 이산화탄소 배출 증가로 세계 기후는 시시각각 변하고 있으며, 그 변화로 인해 지진, 해일, 태풍, 토네이도 등 인간이 만들어 논 덫에 인간의 발목이 잡히는 상황에 이르렀다. 부자들은 더 부자가 되기 위해 더 많은 돈을 원하고, 명예와 출세욕 때문에 자기 자신을 망가뜨리는 자충수를 두기도 하며,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로 미래의 상황은 암울하기만 하다. 전 세계에서 실업자들은 증가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을 즐기지 못하고 시간 안에 갇혀 있는 삶을 살고 있다. 또한 성(性)윤리가 급격하게 변하는 바람에 낙태는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기에 이르렀고, 이에 따라 타인을 해치지 말라는 불교의 계율을 많은 사람들이 어기고 있는 실정이다. 이처럼 현대사회의 병폐 속에서 불교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불교를 통해 이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을 해답을 우리에게 줄 수 있겠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이 책 『돈, 섹스, 전쟁, 그리고 카르마』에 들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고통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초기불교에서는 신체적.정신적 고통과 무상(無常), 즉 나에게 찾아온 기쁨이 곧 사라지고 말 것임을 아는 것과 우리의 모든 경험인 무아(無我)에서 나의 고통이 온다고 하는데 이 무아를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업(業)에 대한 부분적인 통찰을 얻을 수 있고, 더 나아가 나에게 찾아온 고(苦), 즉 탐욕, 악의, 망상, 곧 불선(不善)을 줄이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 동기들을 더 건전하고 포용적인 대안인 관대, 자비, 지혜로 바꿔야 할 필요가 있다고 이 책에서는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옛날부터 “착한 일 많이 하면 천국에 가고, 남에게 자비를 베풀면 그 자비가 곧 나에게 돌아 온다”는 말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꼭 실천해야 하는, 인간으로 태어나 고통을 최소화 할 수 있는 수학공식이라고 이해하면 편할 듯 하다.
영어 단어 퍼슨(person)은 라틴어 페르소나(persona, 가면)에서 온 것이다. 자아라는 느낌은 가면이다. 누가 이 가면을 쓰고 있는가? 가면(色)뒤에는 무(空)가 있다. 가면 뒤에 무가 있다는 것은 실제로는 문제가 안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페르소나는 그것을 모른다.(본문 38쪽 中)
이 이외에도 요즘 들어서 현대사회의 가장 큰 화두인 돈, 섹스, 전쟁, 그리고 불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업(業)에 대해서 불교의 가르침이 꼬일대로 꼬여버린 우리들의 인생을 어떻게 풀어줄 수 있는지를 여러 사례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특히 불교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업(業)에 대해 설명한 부분은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모든 것(dhamma)은 우리의 마음(mano)에서 나왔고, 마음은 모든 것에 앞선다. 그리고 모든 것은 마음에서 이루어진다. 나쁜 마음을 가지고 말하거나 행동하면 그 뒤에는 슬픔이 따라오기 마련, 수레바퀴가 마부의 뒤를 따르듯이......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에서 나왔고, 마음은 모든 것에 앞선다. 그리고 모든 것은 마음에서 이루어진다. 청정한 마음을 가지고 말하거나 행동하면 행복이 그를 떠나지 않으리. 마치 그림자가 몸을 떠나지 않는 것처럼...... (본문 97쪽 中)
세계는 시시각각 변하고 있고, 어제는 북한의 ‘광명성 3호’ 미사일 발사 소식으로 전 세계를 긴장시켰다.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골육상잔도 마다않는 현 시대에서 남에게 자비를 베풀고 관대하라는 붓다의 가르침이 어찌보면 +가 -로 바뀌어버린 수학공식일 수도 있겠으나 앞의 문장처럼 나쁜 마음을 가지면 슬픔이 오고, 깨끗한 마음을 가지면 행복이 온다는 진리 아닌 진리는 우리가 꼭! 머릿속에 넣어둬야 하는 아포리즘(aphorism)이라는 것을 명심하길 바라면서, 이 책에서 전하고 있는 붓다, 즉 불교의 가르침이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마음의 안식이 되어주길 바라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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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마(업業), 불교에서 말하는 심신의 활동과 일상생활을 말하는 것으로 중생이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선악의 소행을 말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민을 들라면 돈, 섹스, 전쟁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전쟁처럼 큰 고민이 아니더라도 왜 늘 돈에 쫓기고 시간에 쫓기는지에 대한 고민들은 모두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런 고민들에 대해 불교는 어떤 답을 줄 수 있을까?
저자는 불교의 핵심이 사람들의 고(苦)를 줄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불교가 의미 있게 현대 속에 자리 잡으려면 현대의 고(苦)를 줄이는 데 무언가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얘기하는데 돈, 섹스, 시간, 음식, 명성, 전쟁과 같이 우리 삶과 구체적으로 만나게 되는 것들 속에서 불교가 무언가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돈과 명성을 얻고싶어 하는 것일까? 사실 돈과 명성이라는 것이 행복의 척도 쯤으로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성적으로는 부가 행복과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않으니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부와 명성을 얻기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게 아닌가 싶다. 책에서는 그렇다면 많이가진 부자는 부와 명성을 가지지 않으려고 하는지 묻는다. 물론 가진 사람들도 더 가지기 위해 노력하는것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섹스또한 그를 통해 고(苦)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제약없이 섹스 하는 것은 안 된다고 얘기한다. 이는 충분히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지구촌 곳곳에서 크고작은 전쟁은 늘 일어나는 것 같다. 현대인들이 전쟁을 멈출 수 없는 이유를 권태와 공허에서 찾고 있는데 이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긴하지만 공감은 되기도 한다. 물론 권태와 공허함을 메꾸기 위해 전쟁이 지속되기를 원하지는 않겠지만 그런 심리가 내적으로 깔려있다고 본다면 이해가 되기도 한다.
책에서는 이런 고민들을 모두 내려놓기를 권한다. 그래야 모든 억압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조언하는데 현대인들의 내려놓음은 그리 쉽게 실천에 옮겨지지 않는 것 같다. 가진 것을 모두 내려놓고 자유롭기를 원한다는 것이 그리 쉬워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가진 것을 내려놓지 못하고 더 가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욕심이라는 말에 동의한다. 그래서 내려놓음 자체가 수행의 과정이 아닌가 싶다.
고라는 것이 사실 나의苦 따로 너의 苦 따로 있지 않다고 생각된다. 이는 모두 유기적으로 얽혀있어서 내苦가 해결되면 너의 苦도 해결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를 크게본다면 이 지구상에 더이상 전쟁도 필요없게 되는 것이다. 전쟁또한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위해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니 말이다.
욕심을 버리고 내려놓음을 실천할 때 비로소 진정한 불교의 가르침을 느끼게 되는 게 아닐까 싶다. 우리가 고(苦)에서 벗어나기위해 불교를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지를 책을통해 배운다. 업(業) 이론은 우리 삶의 문제적 상황을 수동적으로 수용하라고 우리에게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관대, 자비, 불이(不二)적 지혜로 그런 상황에 대처하여 우리의 영적인 삶과 세계의 상황을 개선하라고 우리를 격려하고 있다.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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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향한 진군은 우리 이웃, 사회, 나라와의 따스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유대감을 만들어냈고 소외와 혼란이라는 불편한 암류를 완전히 제거했다. 전쟁의 매력은 이것이다. 전쟁은 그 파괴와 대학살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인생에서 갈망하는 것을 줄 수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목적, 의미, 삶의 이유를 준다. 전장에 있으면 우리 인생의 대부분을 채우는 피상성과 권태가 뚜렷해진다. 전쟁은 우리를 고귀하게 해준다.” 9/11 사태 때 테러리스트들이 비행기를 몰고 돌진한 이유는 바로 그 ‘고귀함’ 때문이다. 테러리스트들은 영적 전쟁을 벌이는 것이라 저자는 말한다. “난민촌에서 미래에 대한 별 희망도 없이 점점 쇠약해지는 것이나 TV 채널 서핑에 빠져 있거나 상점에서 쇼핑하는 것에 비해 얼마나 의기양양한 대안인가? 영적 투쟁은 죽음조차 초월할 수 있는 영웅적 정체성을 부여한다. 위험하고 혼란스럽고 격렬한 바다(현대사회)에서 종교는 형안의 항구에 내린 닻이다. 깊고도 거의 초월적인 의식수준에서 그들(종교 테러리스트)은 자신들의 삶이 통제에서 벗어났음을 감지한다. 그리고는 그 혼란의 책임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느끼면서도 자신들 역시 그 혼란의 희생자라 생각한다. 그런 세계에서 종교로부터 버림받는 것은 개인의 정체성을 상실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종교적, 인종적, 국가적 공동체보다는 위험에 처한 자신의 개인적 자아에 주로 관심을 쏟는다.” 그들이 느끼는 무의미함은 성(聖)의 차원이 세속화된 이 세계에서 거세되었기 때문이다. “저 폭력적인 종교운동에도 일리는 있다. 그들이 공유하고 있으며 우리 또한 그들과 공유하는 기본 문제는 다른 종교들이 제기하는 위협이 아니라 이데돌로기가 아닌 체하는 이데올로기이다. 세속주의가 하나의 이데올로기인데도 마치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세계인 것처럼 가장ㄴ다는 점이다.” 세속주의는 아주 독특하고 특이한 현상이다. 성과 속이란 대립개념은 성의 증발 때문에 태어났다. “성속의 구별은 우리의 결핍감을 달래기 위한 더욱 개인적인 길이었다. 루터는 신앙을 내면화하고 신의 거룩한 영역을 세속의 저 높은 곳에 투사함으로써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이 서로 연속한다는 중세의 세계관은 무너졌다. 그, 둘 사이에서 새롭게 해방된 공간은 새로운 것, 곧 세속적인 것을 창조햇다.” 왜 이것이 문제인가? “세속세계에는 뭔가 중요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즉 세속세계에는 우리의 결핍감을 이해하고 해소할 효과적인 방법이 없기 때문인데 이는 근본적으로 영적 문제이다.” 그 결핍감을 기독교에선 원죄란 말로 설명했고 여러 종교들이 그것을 설명하고 처리할 방법을 제시했다. 그러나 세속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더 이상 그런 처리는 가능하지 않다. “나는 종교 근본주의자들이 어떤 의미에서는 옳다고 말하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많은 사람을 오래 살게 하고 때로는 죽음을 육체적으로 덜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잇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개인적으로 집단적으로 괴롭히는 공허에 대한 해답은 갖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세상 안에 있는 어떤 것도 우리 줌심의 바닥없는 구멍을 메울 수 없기 때문이다. 전쟁은 우리가 갈망하는 의미를 우리에게 줄 수 있다. 왜냐하면 전쟁이라는 방식은 우리의 삶의 잘못되었음을 확실히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전쟁은 우리의 개인적인 결핍을 묶어서 그것을 외부의 적에게 투사하는 단순한 방법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쟁이 종식되기를 기대할 수 없다. 우리가 근본적인 영적 문제를 해결하는 더 나은 방법을 찾을 때까지는” 저자는 방법을 불교가 보여줄 수 있다고 말한다. “불교에서는 이런 결핍감, 뭔가 없다는 느낌, 내 인생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우리의 잘못된 자아 감각이 갖는 어두운 면으로 본다.” 즉 고(dukka)이다. “고의 요점은 돈이 많고 건강한 사람들조차도 근원적인 불만, 곧 부단히 괴로운 불편(dis-ease)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인도의 전통에서 고란 개념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요가도 자이나교도 그외 수많은 (불교의 입장에서) 외도들 모두 고의 문제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고를 자아감각과 연결시킨 것이 불교의 진정한 업적이엇다고 저자는 말한다. “불교에서는 자아가 바로 고이다” 연기란 말은 모든 것은 조건에 따라 구성된다는 말이다. 자아감각 역시 마찬가지이다. “자아에 대한 ‘나의’ 느낌은 습관적으로 지각하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그것이 전부이다. 그런 무상한 과정들은 다른 과정들과 상호작용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사물들로부터 분리된 자아감각을 발생시킨다. 만일 그 심리적이고 물리적인 과정을 모두 제거한다면 그것은 양파 껍질을 벗기는 것과 같다. 마지막에 이르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잘못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문제는 우리가 無가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의 중심에 나 있는 텅빈 구멍은 우리를 매우 괴롭힌다.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은 [우리 자신과] 일치시킬 것도 매달릴 것도 없다는 말이다. 즉 내가 ‘무’라는 건 구성된 느낌으로서의 자아가 근거 없는 것이고 그 근거 없는 자아가 비실재성과 불안전성(insecurity)이라는 근본적인 느낌의 출몰로 괴로움을 겪는단 말이다. 자아감각은 결코 안정적일 수 없다. 그것은 안정적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無我란 말의 요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비실재감을 ‘내게 뭔가 문제가 있다’는 느낌으로 경험한다.” 문제가 있다는 그 느낌, 그 불편함이 바로 고의 내용이라고 불교는 말한다. 우리는 그 불편함을 억압하려 한다. 결코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 불편함, 자신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느낌, 결핍감을 메우기 위해 뭔가에 매달리려 한다. 그 뭔가가 전쟁이 되고 돈이 되며 명성이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慾이란 결핍감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돈은 우리가 그것으로 어떤 것이든 살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집단 속에서 우리가 실재한다는 걸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기 때문에 중요하다. 명성 역시 비슷하다. 만일 내가 정말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다면 그만큼 나는 정말로 더 실재한다. 그러나” 아무리 돈이 많아도, “많은 사람들이 주목한다 해도 우리의 결핍감이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 권력욕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권력이 우리 실재의 가시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그것을 갈망한다. 히틀러와 스탈린 같은 독재자들은 자신들의 사회를 지배햇다. 르거나 그들은 실제로 안전하다고 느낄 정도로 상황을 통제하지는 못햇다. 권력을 가장 많이 요구하는 자는 가장 지독한 편집광이 되고 만다.” 내가 無라는 것을 인정할 수 없기에 우리는 不善하게 된다. 불교가 말하는 三毒, “탐욕, 악의, 망상은 나와 다른 사람들을 아주 곤란하게 만드는 문제 있는 동기들이다.” 그것을 불교에선 業이라 말했다. “나의 자아감각이 내가 습관적으로 지각하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으로 이뤄져 있다면 업은 내가 가진 어떤 것이 아니라 나의 존재 그 자체이다. 중요한 건 내 존재를 바꿈으로써 곧 내가 습관적으로 지각하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재구성함으로써 내 업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이다.” 왜 업을 바꾸어야 하는가? “내가 만일 탐욕, 악의, 망상에 따라 움직인다면 다른 사람을 조종할 필요가 있게 된다. 그런데 이런 행위는 다른 사람들을 소외시킬 뿐 아니라 나 역시 그들로부터 더욱 분리된 존재라고 느끼게 한다. 역설적이게도 나는 ‘나의 자아’라는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방어하고 띄우기에 바쁘다. 그러나 그런 행동은 잘못된 자아 감각을 강화한다. 내가 (삼독의 반대인) 관대함과 자비로 움직일 때 나는 여유를 갖고 마음을 열며 덜 방어적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들 역시 동일한 방식으로 반응하려 할 것이고 그렇게 우리는 모두를 위해 고를 줄이는 쪽으로 움직이게 된다.” 불교가 말하려는 것은 단순하다. “우리가 텅 비어 잇다는 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우리가 그것을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다. 그것을 피하려고 노력하는 방식이 문제를 키운다.” 무아의 요점은 “자아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자아가 처음부터 존재한 적이 없었기에 제거는 불가능하다.” “고는 일반적으로 고통으로 번역되지만 기본적인 불편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 낫다. 고란 무언가를 성가셔하는 깨닫지 못한 마음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불교의 가장 근본으로 불교에서 강조하는 바는 고와 자아 사이에 연관관계가 잇다는 통찰이다. 내가 살아가고 잇는 세계로부터 분리되어 잇다고 자아가 느끼는 것, 바로 여기에서 가장 깊은 좌절이 발생한다. 그러나 이런 분리감은 환상이며 실제로 우리에게 가장 위험한 망상이다.” 그러나 불교의 통찰은 새로운 질문으로 바꿀 필요가 잇다고 저자는 말한다. “나는 지옥에 좌선만 하는 사람을 위한 특별 장소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들은 지옥으로 치닫는 바깥세상에 무관심한 채 자기자신에게만 빠져서 방석에 앉아 좌선을 한다.” 저자는 이런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고 말한다. “삼독 역시 집단적으로 작동하는가? 집단자아가 있다는 말은 집단적인 탐욕, 집단적인 악의, 집단적인 망상이 존재한다는 의미인가? 이런식으로 질문을 던지면 답을 깨닫게 된다. 우리의 현재 경제제도는 탐욕을 제도화하고 군사주의는 악의를 제도화하며 기업화된 대중매체는 망상을 제도화한다. 이와 같은 제도화된 삼독의 본성을 깨닫는 일을 우리가 영적 수행의 결과로 얻은 개인적 깨달음만큼이나 중요하다. 실제로 방석 위에서 좌선하여 얻는 개인적 깨달음은 그러한 ‘사회적 깨달음’으로 보완될 때까지는 불완전하다. 보통 개인 차원에서 달성하는 확장된 의식을 수행의 목표로 떠올리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집단 망상을 걷어내어 사회, 경제, 생태에 관한 이분범에 감춰진 실체를 폭넓게 이애해야 한다. 개인의 고와 집단의 고가 같이 간다면 오늘의 거대한 사회, 경제, 생태적인 위기는 동시에 영적인 도전이며 그러하므로 그에 요구되는 대응에도 영적인 요소가 들어있다는 결론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불교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최상의 것이라 저자는 본다. 내면을 바라볼 때 나는 내가 무임을 본다. 그것이 지혜이다. 바깥을 바라볼 때 나는 내가 모든 것임일 안다. 그것이 사랑이다. 이 둘 사이에서 내 인생은 맴돈다. 나사르가다타 마하라지 평점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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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불교학자 마스다니 후미오(增谷文雄)에 의하면 불교의 역사는 기독교의 역사가 그렇듯 이단(異端)의 역사이다. 물론 기독교적 뉘앙스를 지닌 이단이라는 단어로 불교를 규정하는 것이 어색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불교를 이단과의 관계 아래에서 본 논자가 마스다니 후미오만은 아니다. 박노자씨가 그 주인공인데 그에 의하면 불교는 이단인과의 종교 전쟁을 하지 않았지만 대승이든 상좌부이든 국가의 폭력을 그대로 인정해주고 국가를 보호자로 삼았다. 불교 역시 폭력의 종교라는 점에서는 기독교와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마스다니 후미오는 기독교가 이단을 단죄하고 말살시켜온 반면 불교는 이단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는 말을 한다. 이 새로운 생명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동양철학을 전공한 데이비드 로이의‘돈, 섹스, 전쟁, 그리고 카르마’를 보며 마스다니 후미오와 기독교, 그리고 새로운 생명을 이야기하는 것은 저자가 강조하는 개혁을 새로운 생명으로 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저자는 새롭게 부상(浮上)하는 불교가 개인적 고(苦)와 집단적 고(苦)를 가장 잘 다루는 것이 핵심 관건이라 전제한다. 그에 의하면 불교는 제도화된 고(苦)에 도전하는 대신 상품화의 길을 걸을 경우 자기중심적 스트레스 해소 프로그램에 흡수되어 우리가 고(苦)에 적응하도록 변화할 수도 있다. 저자가 말하는 근본 처방 즉 불교가 제도화된 고(苦)에 도전하는 것은 우리와 사회를 더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고 도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저자는 기독교와 불교의 역사를 이단의 역사로 규정한 마스다니 후미오처럼 기독교와 불교를 또 하나의 닮은 꼴로 규정한다. 유랑 탁발승의 공동체로 출발한 불교 승가(僧家)가 많은 기부 덕분에 상당한 부와 영향력을 지니게 된 것이 중세 유럽 교회에서 일어난 일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의 세계는 붓다의 세계와는 아주 다르다고 말한다. 그리고“붓다가 만일 오늘을 살았다면 무엇을 했을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가 쉽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수도 없다.”는 말을 한다. 이 말은 다시 한번 마스다니 후미오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후미오는“불교는 붓다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지만 동시에 붓다에서 끝날 수 없다.”는 말을 했었다.
저자는 돈, 섹스, 전쟁, 카르마 등을 불교가 풀어야 할 현대 사회의 딜레마로 규정한다. 그런데 이것들이 현대 사회에서 불교인들을 딜레마에 빠지게 하는 것들의 전부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들은 핵심적인 사안들일 뿐이다. 그것들은“제도화된 고(苦)”의 눈으로 보면 탐욕(貪慾), 진에(瞋恚), 치심(癡心)이라는 삼독(三毒)의 집단적인 형태 즉 탐욕을 제도화하고 있는 경제제도, 악의를 제도화하고 있는 군사주의, 망상을 제도화하고 있는 대중매체(28 페이지)이다. 저자는 불교는 우리에게 해답을 줄 수 있는가라는 도입부 형식의 글에서 기후 문제를 세 번이나 거론한다. 현대의 난제 가운데 하나인 기후 문제는 불교도들 뿐 아니라 인류의 책임이고 인류를 희생자로 만드는 첨예한 문제이다.
다만 책임의 몫이 다르고 희생의 폭이 다르다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불교인들의 딜레마를 논하는 자리이기에 불교를 중심으로 이야기 하자면 기후 문제야말로 불교계가 적극 대처하지 못하는 사안 중 하나라는 말을 할 수 있다. 그러면 불교가 사회 문제 해결에 적극 참여하지 않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나는 불교 역시 자본주의적 양태에 속속들이 속박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는 교리 외적인 차원이고 교리적으로 보면 불교가 중도의 종교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불교는 선과 악 대신 선과 불선이라는 완곡한 표현을 쓴다. 불교가 중도의 종교인 것은 이런 점으로 드러난다. 저자 역시“불교는 선과 악 사이의 이분법을 강조하는 대신 건전한 성향과 불건전한 성향을 구별한다”는 말을 한다.(136 페이지)
저자는 불교가 사회 문제 해결에 적극적이지 못한 것은 보고 듣고 느끼는 것만을 수행으로 생각하고, 생각하는 것은 수행으로 생각하지 않는 경향 때문(126 페이지)이며 자신이 먼저 해탈에 이르러야 다른 이에게 봉사할 수 있고, 최고의 깨달음의 경지에서 보면 생명 있는 존재란 없고 만물은 공(空)하기에 타인들의 운명이나 생물권의 운명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128 페이지)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불교가 적극적이지도 실천적이지도 못한 것은 불교가 단일한 하나의 종교가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마스다니 후미오가 불교가 이단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는 말을 했지만 나는 그런 유연성이, 전파된 지역과 받아들이는 사람의 지식 및 부(富), 성향 등에 따라 각기 다르게 불교를 수용하게 했다고 생각한다.
이런 논의는‘불교학과 불교‘를 통해 불교학자 권오민 교수가 일관되게 주장한 바와 문제의식이 같다. 저자는 불교도들은 우리를 둘러싼 위기를 지체 없이 정면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말을 하지만 구체적 사안에 대해서는 원론적인 답만을 들려줄 뿐이다. 물론 지체 없이 정면에서 바라보라는 말도 원론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저자에 의하면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거대기업들은 사회적 책임을 지려 해도 주주들에 의해 제한을 받게 되며(135 페이지) 증권시장이 윤리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작동하는 것은 투자자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 체제가 어떤 다른 책임감도 권장하지 않기 때문이다.(137 페이지) 저자의 관점은 개인보다 체제 차원에서 사태를 바라보아야 함을 알게 한다.
저자는 그럼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는가. 돈은 공(空)하며 사회적으로 구성된 상징으로 보면 세상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현명하고 자비롭게 이용할 수 있으며(55, 56 페이지) 업은 정신적 발전의 문을 여는 열쇠이며(101 페이지), 섹스야말로 우리를 참으로 행복하게 만드는 길이며 상대가 나를 완전하게 만들 수 있고 그래야 한다고 여긴다면 우리는 기대를 너무 많이 하는 셈이며,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낭만적 사랑과 섹스가 우리의 결핍감을 메우기를 희망하지만 그것들은 그렇지도 않고 그럴 수도 없다(122 페이지)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돈은 사물이 아니라 과정이며 내 것도 아니고 네 것도 아닌 에너지이다. 그리고 섹스는 항상 자연의 속임수이며 낭만적 사랑이란 그 속임수 위에 덫칠해 놓은 정서적 광택이다.
저자에 의하면 우리는 오랫동안 계속 진행해온 우리 자신과 어머니 지구 사이에 벌어진 균열을 치유하는 과업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의미를 발견하며 이 치유는 생물권을 변화시키는 것만큼 우리를 변화시킬 것이다.(170 페이지) 또한 저자에 의하면“만일 전쟁이 결핍에서 오는 집단 문제에 대한 반응이라면 우리는 전쟁이 종식되기를 기대할 수 없다. 우리가 근본적인 영적 문제를 해결하는 더 나은 방법을 찾을 때까지는.”(208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우리 사회의 군사화, 그리고 경제가 생태계에 끼치는 영향은 다룰 필요가 있는 문제들이다. 그리고 그런 중에도 불교는 더욱 더 불교적인 것을 제공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집단의식이 덫에 걸리고 조작당하게 된 방식(경위)에 대해 내재적 비판을 하는 것이다.(229 페이지)
로이가 명쾌한 대안을 제시한지 못한 것은 아쉽다. 하지만 오늘날 근본적 대안을 제시한다는 것은 난제 중의 난제임을 감안하면 내면에 호소하는 원론 수준의 처방이 그리 큰 흠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더구나 정치인도 아닌 종교인인 저자에게 정치사회적 함의를 강하게 지닌 대안을 요구하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 될 수 있지만 아쉬운 것은 사실이다. 오늘날 불교도든 기독교도든 종교가 가르치는 개인 차원의 믿음과 지침을 잘 간수할 수 있지만 직장 생활을 하고 정치적 선택을 하고 사회적 이슈를 지닌 문제에 부딪히는 과정에서 그 믿음과 지침을 견지(堅持)하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그렇기에 종단 차원의 이론 및 실천 지침을 논의하는 것이 시급해 보인다. 완성품 형태의 답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모색, 논의 활성화를 원하는 것이다. 로이의 책은 이런 점을 생각하게 하는 미덕을 지녔다. 분석과 비판을 넘어 현실적인 대안까지 제시하는 것은 지난한 과제임을 로이의 책은 실감하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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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할머니 손을 따라서 절에 자주 다녔던 기억이 났다. 그 때는 절에 가면, 떡도 먹고 또 좋은 풍경을 볼 수 있어서 절에 가는 것을 매우 좋아했던 것 같다. 절의 풍경소리, 스님들의 차분한 발자국 같은 것들이 아직도 하나의 수채화처럼 기억에 남아 있다.
동양 철학, 문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부터 '불교에 대해서 알아보고 싶다'라는 호기심은 꾸준히 나를 자극해 왔다. 그러나 대학 강의에서 (시험을 위해서) 외워야만 하는 불교 교리보다는, 내가 스스로 책을 읽으며 깨우치는 지식을 갈망했다. 그러던 와중에 이 책을 만난 것은 어쩌면 필연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현대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와 욕망을 불교적으로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책이다. 우리는 왜 전쟁을 하는가? 돈은 얼마나 모아야 풍족할까? 불교는 모든 것이 무상(無常)하다고 설명한다. 무엇이든 고정적이고 불변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이 되고 싶어 한다. 그러기 위해서 돈을 모으고, 악착같은 욕심을 부리며 산다. 바로 인간의 세속적인 욕망이 고(苦)를 창출하는 것이다.
또한 괴로움은 비단 '나'만의 괴로움 혹은 '너'만의 괴로움으로 구별되어 지지 않는다. 모든것이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괴로움 역시 상호적으로 작용한다. 나의 슬픔과 너의 슬픔은 결국 하나로 이어져 있다. 그것이 자연의 섭리인 것이다. 내가 하나를 빼앗으면 반드시 빼앗긴 사람도 있는 법이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깨달음을 가진다면 삶이 조금은 수월해 질 지도 모른다.
불교의 가장 매력적인 점은, 바로 유연성에 있다. 불교 철학은 인도, 대만, 중국 등 지역에 따라 자신의 모습을 변신시켜 갔다. 딱딱한 교리로서 사람들을 (위에서 아래로) 누르거나 강압하지 않고 (아래에서 위로) 천천히 자신만의 영역을 넓혀 갔으며 각 지역의 특수한 풍습을 녹여갔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의 삶과 습관에 자연스럽게 투입하여 삶과 종교적인 가르침이 일체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지침이 되어 주는 종교로서 사랑을 받은 불교. 현대 사회에서 주는 가르침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지는 우리의 몫이다. 다만 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자그마한 위로를 받고, 따듯한 지침을 받을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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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현대사회의 딜레마에 대해서 불교의 가르침을 내세운 책이다 돈 섹스 전쟁 그리고 카르마 책 제목에서도 알수 있듯이 모두 인간이 가진 욕망과 욕심을 나타내주고 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돈이란 결국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 하지만 돈으로 인해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돈의 진정함을 알지 못한채 돈에 속박 당한채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돈으로 인해서 오는 무수한 사건사고들을 접하다 보면 도대체 돈이 뭐길래 돈 앞에서 사람이 저렇게 까지 행동할수 있으며 어떻게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의 탈을 벗고 인간이기를 포기할 만큼 자기 자신을 놓아버릴수 있을까 라는 생각도 가끔씩 들기도 한다 돈으로 인해서 생명을 사고 돈으로 인해서 사람을 사고 무수히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되는 불법적인 행동들을 볼때마다 결국 사람보다 돈이 우선시 되는 사회에 구토가 유발되고 사회에 염증이 생기는것 같기도 하다 돈이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삶을 살아나가는데 아무런 불필요한 점은 없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필요한 만큼 자급자족 해서 살아가면 되니까 그리고 돈은 자기가 관리할수 있을만큼 만 가지고 일상생활에 불편함 없이 살아가는게 더 현명하다고 생각하지 자기가 관리도 못할만큼 재산을 쌓아두고 사는 건 인생을 살아가면서 선택하는 무수한 선택속에서도 가장 비루한 선택으로 별로 라고 생각하며 삶을 완성할 마지막 단계에서는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게 삶을 잘 마무리 짓는 방법중에서도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돈을 쫓는다 정작 자신의 꿈은 잊어버린채 하지만 되돌아 생각해 보면 돈 보다 더 소중한 것들이 물질적인 것보다 내면적으로 쌓아나가야 할 행복이 우리 주변에 는 많기 때문에 꼭 돈을 쫓기 보다는 지금 나에게 정작 중요한게 무엇인지 좀더 크게 생각해서 자신의 정말 원하는 인생의 로드맵을 찾았으면 좋겠고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섹스 ㅋ 인간의 종족번식력과 욕망 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단어 섹스 인간이기에 욕망을 다 저버릴순 없지만 무분별하게 하는 섹스 보다는 자신이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그 사람의 인생을 책임져 줄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과의 섹스가 더 아름답지 않을까 ???????
성을 돈을주고 사는 사람들도 있지만 돈을 주고 하는 섹스에서 과연 얼마만큼의 오르가즘을 느낄수 있을지 궁금하다
섹스를 하면서도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을까 ???????
전쟁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과 눈에 띄는 전쟁 아주 작게는 타인과의 나와의 전쟁에서 부터 국가와 국가간의 전쟁 우리들은 어쩌면 늘 끊임없이 전쟁중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 전쟁이란게 되돌아 생각해 보면 내 자신의 이기적인 생각과 타인과의 잘못된 소통결여로 이뤄지는게 아닌가 생각된다
이 땅위에서 자행되는 전쟁을 모두는 없앨수는 없지만 전쟁으로 인해 아무런 죄가 없는 사람들이 입는 피해를 생각하면 정말 전쟁만큼 사람이 살아가면서 업을 쌓는일도 없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평화롭고 안정된 사회에서 불행하지 않고 행복할수는 없는걸까 ??????????
이책은 돈 섹스 전쟁 카르마에 대해서 불교의 가르침을 전수 받는 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가진 욕심과 욕망에 대해서 생각할 문제와 그 문제들을 해결할 고민들로 스스로 를 반성하게 만드는 책인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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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마(karma, 業)'는 네이버 백과사전에 '불교에서 중생이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선악의 소행을 말하며, 혹은 전생의 소행으로 말미암아 현세에 받는 응보(應報)를 가리킨다. 산스크리트 Karman의 의역으로, 음역하여 갈마(羯磨)라고도 한다.'라고 설명된다. 그에 덧붙여서 일상을 통하여 선악의 업을 쌓으면 그것이 업인이 되어 업과를 받게 된다고 나온다. '뿌린 대로 거두리라'라는 구절과도 같은 뜻이겠다. 선이든 악이든 이런 카르마를 쌓는 것에는 인간의 욕망과 감정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오욕칠정(오욕 - 수면욕(睡眠慾), 식욕(食慾), 색욕(色慾), 명예욕(名譽慾), 재물욕(財物慾); 칠정 - 희(喜, 기쁨), 노(怒, 노여움, 화냄), 애(哀, 슬픔), 락(樂, 즐거움), 애(愛, 사랑), 오(惡, 미움), 욕(欲, 욕망, 두려움))이 생기는 원인으로 돈, 섹스, 전쟁을 꼽아도 틀린 말은 아니겠다.
<돈, 섹스, 전쟁 그리고 카르마> (2012, 데이비드 로이 지음, 불광출판사 펴냄)는 '현대사회의 딜레마들에 불교는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저자의 대답이다. 저자는 철학 박사 학위를 받고 일본에서 선 수행을 하여 법사 인가를 받았으며, 일본과 미국에서 대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그런 학문적인 바탕과 실제 선 수행 등의 경험을 통해 저자는, 불교가 전파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서양 사회를 공간적 배경으로 하여, 불교가 현대 사회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한다. 소비 지향적 사회에 살다 보니 한정된 재화는 가치를 지니게 된다. 그중에서도 돈과 명성, 시간, 성 따위는 상대적으로 더 많은 의미가 부여된다. 불교에서는 위에 적은 오욕칠정을 버리고 해탈할 것을 권고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그렇게 하기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므로 저자는 '다르마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적합한 형식에 대해 말하는 것'이며, '다르마는 적합한 형식을 통해 새로운 시간과 공간에서도 언제나 꽃을 피워야 한다'(18쪽)고 말하고 있다. 그런 '적합한 형식'이 이 책의 각 꼭지에서 제시된다. 예를 들어 제2장 '부자가 계속 돈을 원하는 이유는?'에서 저자는 교환 수단, 가치 저장, 투자를 위한 자본, 실재 상징으로서의 돈의 기능을 설명한 다음, 돈에 의해 쌓게 되는 업을 이야기한다. 돈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할수록 그 돈은 우리를 평가하기 위해 사용됨을 알게 되고, 돈을 쓰면서 메우려고 했던 결핍감은 해소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돈을 사물이 아닌 과정으로, '공(空)하며 사회적으로 구성된 상징'으로 이해하라고 권한다.(55쪽) 더 많고 좋고 비싼 물건을 향한 끝없는 쳇바퀴에서 내려오라는 권유다. 생각해 보면 절대적인 필요보다는 체면이나 과시욕 때문에 소비한 적이 더 많았다.
이런 공(空)의 사상은 돈, 명성, 시간, 언어, 섹스, 주의력결핍장애 같은 비교적 개인적인 문제와 더불어 경제와 군대, 대중매체, 생명의 다양성, 전쟁이라는 거시적인 문제 전반에 놓인 결핍감을 없앨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만한 노력과 수행을 통해서 말이다. 저자는 격언, 심리학 이론, 역사적 사실, 과학 실험 결과 등을 다양하게 사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그리고 책 말미에 실린 '역자의 말'은 이 책의 내용을 우리나라의 상황에 적용하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개인의 해탈을 좇는 소승 불교에서 벗어나 이제는 사회적 변화에 발맞추어 이를 선도할 필요가 있다. <돈, 섹스, 전쟁 그리고 카르마>는 현대 사회의 딜레마에 불교를 대입하여 답을 들을 수 있는 책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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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 힘든 일을 당하더라도 그로 인해 자살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그 고통을 기억하며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노력하고자 결심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것을 보면 "네 성격이 네 운명이다"라는 글귀가 참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살면서 고통이 없는 사람도 없고, 즐거움만 계속되는 사람도 없다. 어려움을 피하려고 해도 가깝던 멀던 누구나 어려움을 만나게 되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결국엔 그 어려움을 만났을 때 내가 어떻게 대처하느냐를 생각해두는게 가장 훌륭한 삶의 방법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그러한 상황에서 내가 대처하는 방법에 대한 어드바이스는 어디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일까를 알아야하겠는데, 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이들은 기독교, 불교, 유교 등의 종교에서 지침을 찾고자 할 것이고, 어떤 이들은 부모님이나 성인의 가르침을 찾아볼 것이고, 어떤 이들은 철학과 심리학에서 이야기하는 바를 알고자 할 것이다. 찾고자 하는 이는 결국엔 찾을 것이지만, 문제는 그것이 항상 모든 상황에 들어맞는 것도 아닌데다, 내가 찾은 것이 가장 훌륭한 방법이 아닐 수도 있다는 함정은 언제나 있을 것 같다.
그러다보면 이것이든 저것이든 하나의 지침을 정해 평생 믿고 따르겠다고 결정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손쉬운 삶의 방법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인간은 본디 의심을 하도록 만들어진 존재가 아닐까. 그리고, 꼭 의심이 아니더라도 내가 정한 지침이 과연 지금의 현실에서도 적합한가를 한번쯤은 비교해가며 살아가야 제대로 사는 것같은 느낌도 든다. 그러다보니 이리저리 고개를 들이밀고 다른 이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알아보고자 하는데, 그러한 때에 만난 <돈, 섹스, 전쟁 그리고 카르마>는 마침 딱 맞는 훌륭한 책이다.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현대사회의 갖가지 딜레마에 대해 불교에선 어떠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또한 궁금했는데, 이 책은 그에 관해 훌륭한 답을 주는 책이다. 종교에 관해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여기서는 이러이러하게 이야기한다는 것을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것이 오히려 읽는 이의 마음에 부드럽게 스며든다. 가끔 특정 종교를 바탕으로 한 책을 읽다보면 계단을 뛰어넘어 답을 제시하거나 이것만이 옳다는 식의 단정이 거슬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 책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느낌이다. 책에서 다루고자 한 주제도 흥미롭고, 그에 대해 풀어가는 경로도 적절하고, 가독성이 좋은 책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에 남을 내용이라고 생각되어 기쁘게 읽은 책이다.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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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2주동안이나 들고 다니며 살피고 다시 읽기를 반복해도 나의 머리속으로 들어오는 건 왜 별 거 없었을까요? 어쩌면 나는 이미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답을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이나 생각을 바탕으로 불교든 기독교이든 그 종교를 받아들이기 나름은 아닌지도 말입니다. 알아차려서 비워내는 고통에 대한 생각이나, 자신을 들어내기 위한 방법으로 돈을 모으는 사람들이나, 익명과 유명의 사이에서 명성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변하는 시간이 항상 지금이라는 것, 진리에 대한 높낮이, 업에 대한 생각, 불교적 과거 섹스와 선, 전쟁에 관한 불교가 가진 생각?,복잡한 세상에서 집중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생각, 생명에 대한 경시현상이나 유전자에 대한 사고들..모두는 업을 바탕으로 한 윤회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고 있는 답에서 그닥 멀지 않은 선에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편안하게 익숙해지지 않는 설명이 조금 더 난해하게 만드는 역효과를 준 것만 같아 아쉬움이 크다.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노트같지만 해결책을 준다기보다는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싶은 느낌이었다. 어쩌면 나의 고정관념이 저자의 생각과 늘 일치할 수 없어서 빚어진 결과일 수도 있겠지만 명쾌한 답이 없다는 것은 종교적 해석을 표현함에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하는 생각도 해본다. 내가 기대했던 이 책에 대한 관심도 이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조금 실망을 안겨준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긴 시간 함께 했지만 제대로 이해 못하고 활자읽기에 매달렸을지도 모를 내가 문제일 수도 있다. 나는 늘 더 나은 미래를 꿈꾼다. 그래서 늘 부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가지고 노력하고 있다. 현대에 와서 그 오래전 상황과 똑같은 상황에서의 현명한 판단을 내리기란 어려울 수도 있지만 우린 그 속의 참 뜻과 진리를 찾아서 해답을 얻어낼 수 있을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돈, 섹스, 전쟁 그리고 업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부처님의 이야기가 분명 곳곳에 머물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을 것이다. 언제가 읽었던 불교와 섹스에 대한 이야기도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결론적으로 이야기를 하자면 모든 일은 업이라는 윤회의 굴레가 작용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으로 판단. 그 윤회의 틀에서 지금을 어지 살아가느냐는 내 다음 생을 더욱 현명하고 튼튼하게 키워낼 수 있는 지금 삶을 잘 살아야한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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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의 딜레마, 문제점들을 불교의 사상과 결합하여 해법을 제시하고 있는 책이다. 불교의 기본적인 원리에서부터 출발하는데 쉽게 읽히기도 하지만, 다시 돌아 생각해보면 무척이나 어렵기도 하다. 글로는 끄덕이며 단순하게 읽히기도 하지만, 그 개념 자체가 무척이나 어렵고 난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만 읽고 덮기에는 생각을 많이 해야하는 책인듯하다. 책 자체의 내용보다는 불교의 사상을 이해하는 점이 쉽지는 않았다. 익히 알고 있는 '고', '공', '업' 등의 개념은 머리로만 이해를 했던지라 (자세히는 모르고) 글로 눈으로 알던 개념을 접목해서 현대 사회의 문제점의 해법을 찾기에는 나의 불교에 대한 지식이 무척이나 미흡하다는것을 느꼈다. (편중된 독서취향에 대해서 다시 한번 반성을 하게 되었다. 앞으로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섭렵해봐야 겠다.) 우리 나라에서도 경제적 양극화는 심각해지고 있는데, 왜 부자는 더 많은 돈을 원하는지, 명성을 얻으려고 매달리는지, 섹스가 무슨 잘못이 있는지, 왜 사람들이 전쟁에 매혹되는지 등등... 흥미를 끄는 주제와 내용들이 무척이나 많다. 불교의 사상과 개념에서 제시를 하다보니 여태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알게 되고, 다른 관점에서 문제들을 다시 볼수 있어서 좋다. (다만, 바로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문제가... 책의 내용이 어려워서라기 보다는 기본 지식이 부족하다보니 어렵게 느껴졌다.) 나날이 돈이 더 중요해지고 돈으로 인한 문제들이 많이 생기고 있는데, 돈 자체는 아무것도 없는 무라는 것이다. 돈 자체에 대한 것이 있는게 아니라 집단환상에 의해서 돈에 의해, 돈으로 지배할수 있게 만들수 있다는 서로, 모두 용인한 환상에 의한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고보니 돈은 그냥 숫자만 적혀 있는 종이일 뿐인데, 이러한 것때문에 서로 피흘리고 상처받고 욕심이 많아지는 것을 보면, 불교에서 보면 한낫 부질없는 것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돈 뿐 아니라 섹스, 전쟁 등도 그 본질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만들어내는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지금 가장 힘들어하고 고민하는 것들도 실제는 없는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니 그렇게 힘들어하지 말고 스트레스 받지 말자는. ㅎㅎㅎ 이렇듯 생각의 관점을 바꿔주기에 이 책은 읽을만한 가치가 있어보인다. 다만 불교 사상을 좀 더 잘 알고 읽으면 좋을듯하다. 관점을 바꿔주기보다 다른 각도에서 볼수 있게 해주는 그 점 자체만으로도 읽어볼만 하다.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