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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블친님의 포스트를 보고 다른 이에게 선물하려고 산 책이다. 당일 배송을 분명히 확인했는데 하루 늦게 도착해서 선물을 받았어야 할 사람은 떠나버렸다. 당시 그 사람을 생각하면서 선물할 책을 골랐던 설레는 마음만 남고, 받아야 했던 사람의 마음은 영원히 도착하지 못 해버렸다.
이미 출고되어 책이 오고 있는데 차마 그 수고로움을 원점으로 돌릴 수 없어 취소하지 않아 내 책이 되었다. 내가 또 읽는 수밖에, 그래서 그렇기에, 그래도 그렇지만, 시집은 충분히 가치 있다. 다시 우편으로 배송시킬 까 싶었는데 그 때가 지나니 문득 선물하는 일이 귀찮아져버렸다. 사람의 마음이란 이렇게나 간사하다. 나의 애틋한 마음의 순간은 이렇게나 짧다. 나는 순간 확 불처럼 타올랐다, 사그라져 버리는 사랑같은 것들, 빨리 가셔버린 그런 것, 오래 존재하지 못하는 마음들이다.
아직 다 읽지는 못했는데 쓰윽 훑어보다가 발견한 좋은 시가 많다. 이영광 시인은 그냥 읽어 가슴에 스며들고 몸이 반응하는 시를 쓰는 분인가 보다. 한편은 서러워서 누군가의 품에 기대 울고 싶고 한편은 환하고 빛이 나서 가리지 않은 민 낯이고 싶었다.
-무 릎-
무릎은 둥글고 다른 살로 기운 듯 누덕누덕하다
서기 전에 기었던 자국 서서 걸은 뒤에도 자꾸 꿇었던 자국
저렇게 아프고 부러지고도 저렇게 태연히 일어나 걷는다
다른 사람에게는 보여주고 싶지 않은 누덕누덕한 내 무릎을 사랑하는 그를 나의 무릎에 눕혀 놓고,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이런 주름진 무릎을 사랑한다고 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또 한번은 나를 위해 무릎을 꿇어 주었던 그 호소도 고마웠다고 말하고 싶다. 서로를 위해 무릎을 내어 주고 꿇어주자고 손가락도 걸어보았다. 그래도 말은 너무나 가볍기에 위로 떠올라 나를 비웃을 때가 많았다
- 연립들 2-
부서진 놀이터는 빛의 정거장
지구에 왜 現實이라는 병이 났지?
노인은 시체가, 아이는 벌레가 아니라고
세상에서 제일 느린 볕이 광속으로 내려와 적셔주는
슬로비디오, 정지 화면
-서울역-
역사에는 여행이 있고 광장엔 흔히 설교와 노동자 집회가 있다 종교는 정신없이 아프고 노동은 아파서 간신히, 정신을 가누고 있다 기차가 슬슬 똬리를 풀며 기적도 없이 울어대서 여행은 또 떠나야 하지만 종교는 멀리 하늘로, 노동은 땅끝까지 피 흘려 나아가야 한다 소주병 쥐고 앉아 노숙은 모든 떠남들을 지켜봐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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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광 시인의 시를 좋아한다. 사람 이야기가 많기 때문이다. 모든 텍스트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사람에게 들려주기 위한 방법을 직접적으로 하는가, 간접적으로 하는가는 표현방식을 선택하는 저자의 몫이다. 문학작품은 직접적이기 보다 애둘러 표현한다. 실제와 가상, 체험과 상상을 엮어서 형상화 된 이미지는 현실의 그 어떤 것과 똑 부러지게 대비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저런 가정을 섞어서 독자들 앞에 보여준다. 이영광 시인의 시들은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세계에 그다지 많은 덧칠을 하지 않아서 읽기 편하다.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시인이 본 세계를 함께 본다는 기분이 들어서 부담이 적다. 무엇보다 사람 사는 모습을 선명하게 보여주어서 이 시대를 함께 살고 있다는 동질감을 느낄 수 있다.
시집에서 '시인의 말'을 읽는 재미를 놓칠 수 없다. 첫 줄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마지막에 웃음으로 마무리하는 '시인의 말'이 재미있어서 소개한다. 시인 치고 웃기는 사람은 드문데 이영광 시인은 유머를 구사하려고 노력하는 시인일까, 궁금해진다.
시인의 말
우울은, 쓰게 한다. 명랑은 그걸 오래 계속하게 하고, 주름 없이 잘 웃지 않는 명랑은 말한다. 네 모멸의 기쁨, 겸손의 쾌락을 내려놓아라...... 다 내려놨어, 나는 거짓말하고. 명랑하고. 아야, 내 신세야......
이 시집에서 소개하고 싶은 시 단 한 편을 고르라고 하면 지금은 <외계인이 와야 한다>를 선택하겠다. 어제 서초동 대검찰청 앞에서 '검찰개혁'을 외치며 모인 사람들과 동대구역에서 조국파면을 촉구한다며 목청을 높인 삭발한 야당대표와 그 곁에 모인 사람들이 함께 이 시를 읽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쟁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결코 없는 것처럼 매번 싸우는 모습만 보여주는 정치인들도 꼭 읽었으면 좋겠다. 우리의 평화로운 시위 문화를 부러워하는 외국 사람들이 많다는데 여기에 더해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마무리로 같은 시를 낭송하며 마친다면 이런 시위야 말로 '해외토픽'감이 아닐까 생각해 본 시다. 길지만 시의적절한 듯해 전문을 소개해본다.
외계인이 와야 한다
콩가루 집안도 옆집과 싸움 나면 뭉치고 톡탁거리던 아이들도 딴 학교랑 축구하면 함께 응원을 한다 딴 동네 딴 도시 딴 지역과 다툼이 나면 한 동네 한 도시 한 지역이 된다
전라도와 사이가 틀어지면 경상도가 된다 경상도에 맞설 때면 전라도가 된다 북한과 다툴 때는 남한이 되고, 윌드컵만 열렸다 하면 아우성치는 대한민국이 된다
그러므로 외계인이 쳐들어와야 한다 성간우주를 안마당처럼 누비고 다니는 외계 우주선들의 어마어마한 공습 앞에서 미국과 중국이 손을 잡을 것이다 서방과 아랍이 연대할 것이다 아시아 제 국가들이 단결할 것이다
외계인이 와야 한다 모든 국경이 폐제되고, 기독교도와 무슬림이 형제가 될 것이다 모든 호모사피엔스가 하나가 될 것이다 인간과 사자와 뱀과 바퀴벌레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스크럼을 짤 것이다
더 큰 적이 나타나고 더 큰 싸움이 나는 수밖에 없나? 외계인이 와야한다 저 세계 모든 나라가 잿더미가 되지 않을까? 외계인이 와야 한다 전 지구 생명체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 않을까? 외계인이 와야한다
다른 별들에서, 지구촌을 전율에 빠트린 초호화 축구팀들이 공격해 와야 한다 부처나 공자와 예수보다 더 환상적인 외계 스타플레이어들이 와야 한다 은하계 별들이 두두둥둥! 자웅을 가리는 우주 월드컵이 열려야 한다
시집 한 권에 쌓인 이야기들은 사방으로 뻗어가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시인이 본 세계'라는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이영광 시인이 보는 쪽에는 사람이 있었다. 곁에 있는 노모와 지금은 떠난 사람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들. 그들이 겪은 부당한 일에 기꺼이 치뤄야 할 내 몫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는가 하는 성찰을 읽으며 같은 국민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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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가슴 긁히며 가는 저 배, 물에 상처입히지 않을 수 있을까
물은 흉터를 가지지 않을 수 있을까 흉터는 아픔을 물살에 지워낼까 비단 물낯, 비난 물낯 봄 바다엔 없는데
멀리 선 가슴들엔 꾹꾹 상처가 날까 마음은 상처를 찔러 앓을 수 있을까 흉터는 아픔을 몸에 달아 내릴까 감길 듯 감길 듯 졸며 다이빙 밸처럼
물비린내 턱턱 막히는 미궁 속까지
- <봄 바다> 전문
오늘은 딱 한편만 쓰는 걸로... 마음은 상처를 찔러 앓을 수 있을까. 상처를 찔러 앓을 수 있을까. 숨이 턱턱 막히는 어느 날엔, 감길 듯한 감길 듯한 어느 상처들처럼 앓지 말기를.
오늘도 조금은 여유로운 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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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건너 옆 나라의 도시 오사카에 바람 난리, 물 난리가 났다. 남의 일 같지 않은 남의 일로 여기기 십상인데, 그 순간 거기에 아내가 있었으므로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머물고 있는 호텔이 흔들렸다고 하고, 정전으로 엘리베이터가 멈췄으며, 크게 무서웠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전해왔다. 이와 함께 일정에 딱 맞춰 가져간 속옷이 바닥났다며 이 또한 큰 일이라는 투로 말했으므로, 나는 조금 안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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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움 에는 여러 의미가 있습니다. 무게의 의미에서, 내용적인 측면에서, 생각 등에서 우리는 가벼움을 생각하게 합니다. 시를 읽으며 가볍다는 인상은 사실 좋은 의미로 쓰이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작품의 내용적인 측면에서 가벼운 느낌을 받는다는 것은 작가의 치열한 자기성찰을 통해 나온 작품이 아니라 감각적으로 쓰여진 작품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영광의 시집 끝없는 사람을 읽으며 개인적으로 가볍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시들이 마치 우리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놓은 느낌으로 일상에서의 쉽게 느끼는 감정들을 풀어 놓았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시 시인의 시작의 근간을 이루는 힘은 무시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 이런 가벼움은 작품의 소재적인 부분에서의 느낌이고 좀 더 작품 속으로 들어가 시들을 드려다 보면 상당한 무게감을 느낄 수 있는 묵직한 무게 추들이 시어들 곳곳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쉽게 읽히지만 그런 가벼움은 표면적인 모습일 뿐이고 그 껍질을 벗겨내면 숨 막히는 치열한 자기반성과 날카롭게 세상을 비판하는 문제의식이 숨어 있어 이를 눈치 챈 순간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엄청난 구조의 작품들임을 알 수 있는 것이 이번 끝없는 사람에 담긴 시들인 것 같습니다. 가벼움 속에 무거움이라는 느낌이 무척 인상적이었던 끝없는 사람, 역시 이영광의 시들은 만만치 않은 힘이 있는 작품들이며 읽으면 읽을수록 인상적인 작품들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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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직시하는 작품들, 특히 세월호 관련한 작품에서는 마음이 아파옵니다. - 움막 : 새는 새 속에서 날고 강아지도 강아지 속에 들어가 졸고 있다. 세상에, 바람은 허공에 숨은 채로 돌은 어떻고, 돌 속에 들어가 누워 잘 잔다. 할머니는 무덤가에 할미꽃 예쁘게 피워 올리고 아버지도 영정이 편안하게 웃고 있으니, 화 많고 한 많았지만 할머니 단잠, 아버지 웃음. 한 많고 화 많아서 할머니 꽃, 아버지 그림. 숙주가 불안정해 자식 인간은 뒤척인다. 들어가려는 듯 나오려는 듯 움막 문을 닫지도 않고, 이불을 걷어차며 거칠게 잔다. - 사실은 : 비 오는 날 찻집에 혼자 앉아 있어봐도 별로 쓸쓸하지 않다는 것. 쓸쓸한 척 들킬 진짜 쓸쓸이 없다는 것. 책을 읽고 있지만 사실은 열중하지 않는다는 것. 술집으로 옮겨 낮술을 마셔보지만 환자가 오만상 쓰며 약을 먹듯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글을 쓴다지만 사실은 꼭 할 말이 있지도 않다는 것, 사실은 꼭 할 말이 없어지는 순간이 오지도 않는다는 것 … 아픈 시간들은 그걸 온통 썩게 하고 썩은 시간들은 다시 그걸 낱낱이 아프게 한다. - 가을 : 여름을 용서하는 가을이 없고, 가을을 용서하는 겨울이 없고, 겨울을 용서하는 봄이 없고, 봄을 용서하는 여름이 없지만. 겨울을 용서하지 않는 가을이 없고, 봄을 용서하지 않는 겨울이 없고, 여름을 용서하지 않는 봄이 없고, 가을을 용서하지 않는 여름이 없다. 여름에 자꾸 용서를 빌다가는 겨울을 용서할 길 못 찾아 허둥거리는 희끗희끗한 가을이다. - 파랗게 : 갓 진 십일원 은행잎들은 죽으면 뭐 하나 하다가도 살면 또 어떡하지? 하며 노랗게 거리를 죽여주고. 갓 핀 사월 은행잎들은 살면 뭐 하나 하다가도 죽은들 또 무슨 소용 있나 하며 파랗게, 거리를 살려낸다, 파랗게. 진흙 논에 드리운 백일홍 그림자, 봉선사 범종 소리는 범종을 버리고 절을 버리고 세상 끝 지평선을 무너뜨리고 있는데. 사자후는 멀어라, 진흙 논에 드리운 백일홍 그림자, 찬물을 벌겋게 데우는 이 세상 군불. 홍조를 띄우고 그대 내 곁에서 갱년기로 웃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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