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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의 희망을 담지한 바르트 입문서
"글쓰기에의 희망을 담지한 바르트 입문서" 내용보기
이 책은 옮긴이가 말하듯이 글쓰기란 왜 '변태'인지, 글쓴다는 행위란 왜 '자동사'인지, 텍스트란 왜 '사랑스런 함정'인지 등을 잘 보여주는, 바르트 문학의 입문서라 할 수 있다. 바르트를 처음 대하는 나로서는 상당히 흥미롭게 읽었다. 매개 지식인 모리스 나도가 대담으로 풀어낸 이유도 있지만 바르트의 이야기 자체가 문학이론(사실 여러 분야에 걸쳐 있는 그의 성찰은 문학이론이
"글쓰기에의 희망을 담지한 바르트 입문서" 내용보기
이 책은 옮긴이가 말하듯이 글쓰기란 왜 '변태'인지, 글쓴다는 행위란 왜 '자동사'인지, 텍스트란 왜 '사랑스런 함정'인지 등을 잘 보여주는, 바르트 문학의 입문서라 할 수 있다. 바르트를 처음 대하는 나로서는 상당히 흥미롭게 읽었다. 매개 지식인 모리스 나도가 대담으로 풀어낸 이유도 있지만 바르트의 이야기 자체가 문학이론(사실 여러 분야에 걸쳐 있는 그의 성찰은 문학이론이라고 단정짓기 어렵다)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흡인력있게 다가왔다. 구조주의가 언어학, 정신분석학, 인류학 등 여러 학문들이 각자의 분야를 다루어가는 도중에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서서히 형성된 사조이기에, 구조주의의 산물이랄 수 있는 텍스트론은 문학에만 국한되는 이론이 아니라 언어 자체에 대한 사유의 변화를 촉구한다. 바르트는 먼저 문학의 사회성 문제를 제기하여 문학의 핵심적 성격을 점진적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그는 문학에서 흥미로운 것은 하나의 소설이 하나의 사회 현실을 반영한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언어의 보편적 모방을 실천한다는 데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문학 작품이 하나의 문학적 글쓰기로서 주어지는 한 그 작품들이 모방하는 것은 결국 그에 선행했던 문학적 글쓰기라는 걸 의미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오늘날 상호 텍스트―하나의 텍스트 생산에 있어 그것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모든 다른 텍스트들―라고 불리는 것 속에 자리잡는다. 그에게 있어 문학이란 '변태', 말하자면 주체를 뒤흔들고 분해하는 것이며 상호 텍스트성를 강조하는 것도 이와 관련된다. 문학의 사회성이란 진실로 우리가 문학은 내용이나 재현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무엇보다 언어라고 생각할 때 포착된다는 것이다. 바르트가 문학의 위기를 진단하는 부분은 신선하면서도 섬찟하다. 그는 문학의 위기가 책이 예전보다 덜 생산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작품을 단순히 반복할 때 있다고 지적한다. 우리가 읽기 쉽게 쓰려 할 때, 우리는 자기 고유의 언어의 일정한 추락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참여의 입장과 글쓰기의 실천을 동시에 내포하는 생산이 창출되는 이 시점에서 바르트는 다원적인 행동과 실천의 가능성을 단호히 지지한다. 글쓰기의 실천이 있는 순간부터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완전히 문학만은 아닌 그 어떤 것에 위치하게 되며, 바르트는 이를 텍스트, 말하자면 장르들의 전복을 내포하는 실천이라 부른다. 텍스트는 항상 의미를 함유하고 있으며 의미는 오고 가고, 또 다른 층위로 다시 지나가고, 계속해서 움직인다. '글쓰기'는 독자에게 작가의 메시지를 담은 완성된 '산물'로서의 '작품'이 아니라 무한한 '생산'으로서의 '텍스트'를 넘겨준다. 바르트는 하나의 유토피아를 상상한다. 즐김―즐거움과는 구별되는, 좀더 내밀하여 우리의 온 마음을 관통하는 좀더 지속적인 감정―속에서 씌어진 텍스트들이 상업적 차원과 무관하게 유통될 수 있는 유토피아말이다. 그는, 문제는 작가와 독자 대중의 분리, 그러니까 읽는 사람은 쓰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바르트에게 있어 글쓰기와 글읽기는 마치 연애처럼 결합의 꿈을 실현시켜주는 행위이고 이런 면에서 텍스트는 작가와 독자가 서로 사랑을 나누는 관능적인 만남의 공간이 된다.

[인상깊은구절]
그렇지만 읽기 쉬운 무엇인가를 쓰기를 받아들이는 것은 곧 일정한 아첨을 전제로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언어란 결코 순진하지 않아요. 우리가 읽기 쉽게 쓰려 할 때, 우리는 자기 고유의 언어의 일정한 추락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런 아첨, 우린 그걸 이럴 때만 받아들일 수 있겠죠. 우리가 정녕 일종의 은밀한-이렇게 표현해도 좋다면-책략 정신, 내밀한 속임수 정신, 한마디로 우리가 저술로써 하고자 하는 것과 관련하여 아주 뒤틀린 목표를 가지고 있을 때만.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읽기 쉬움의 차원에서 일정한 양보를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여러분들의 눈에 중요해 보이는 어떤 것들을 그냥 흘려 보내고자 하기 때문일 겁니다.
r****3 2002.02.06. 신고 공감 1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