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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상문학상, 이상하다.
솔직히 충격이었다. 내가 읽어본 이상문학상 수상작중에서 가장 웃겼다.(우습다는 것이 아니고 정말 내용이 웃기다) 읽는 동안 자주 킬킬거리다가 설마 이렇게 끝나진 않겠다 싶을 즈음 ‘나는 옥수수가 아니’라니... 물론, 문학상 수상작이 늘 심각하고 어려워야 한다는 건 아니다.(어떤 의미에서 이 작품은 어려울 수도 있다) 이상문학상이 타 문학상보다 실험적이고 새로운 시도를 고급스럽게 펼친 작품에 돌아간다는 사실도 모르진 않는다. 우수상 수상작이 <옥수수와 나>보다 덜 문학적이어서 수상치 못하였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문학에 감동받는 것 또한 주관성을 배제할 수 없는 영역이므로 내 느낌이 일반적이라고 믿지도 않는다. 어디까지나 내가 읽어 본 문학상 수상작 중에서 그렇다는 이야기다. 김영하 식으로 말하자면, 문학상 수상작이 어렵든 쉽든 그게 도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 작품을 선정한 이유는 ‘인간이 추구하고 있는 육체적, 물질적 욕망이 삶의 진정성을 파괴하고 있는 현실을 환상적 기법으로 서사화’하고 있기 때문이라 말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환상적 기법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은 거의 한 페이지 분량이었고 그것도 ‘기법의 서사화’라 보기엔 너무 큰 확대가 아닐까 싶다. 마치 대단히 예술적인 고견을 가지신 분들이 일반인은 이해하지도 감동받지도 못하는 어느 예술작품을 앞에 놓고 뷰티풀, 원더풀, 환타스틱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유명한 화가가 선을 하나 그리면 예술이고 찌질한 연습생이 선을 그리면 낙서인 것과 같다고 까지 말하면 너무 비약하는 것일까. 늘 익숙하던 김영하식의 블랙유머에 가까운 옥수수 개념이 갑자기 거창한 문학사적 의미로 발견된 것 같아 좀 웃겼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 작품을 덮고 이상문학상은 1등을 선정하고 나서 확실한 이유를 말할 수 있는 작품을 결정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면에서 평론가 장두영의 <옥수수와 나>의 작품세계야 말로 (내가 생각하는) 이상문학상이다. 문학상은 작품집필이 아니고 작품해석이다. 훌륭한 해석을 할 수 있다면, 즉 문학적 성과가 높다기보다는 무언가 새로운 시도를 문학적 성과라 칭할 수 있다면 그 작품이 수상작이라는 생각이다. 나는 정말이지 장두영의 해석을 보고서 미처 그렇게까지 심오하게 생각하지 못한 내 자신의 수준을 한심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물론 한국문단을 이끌어 가는 대가 심사위원들의 생각은 (내가 무어라고)일개 독자에 불과한 나와는 퍽이나 의견이 다르실 것이다. 그러나 분명 나와 꼭같은 생각을 하는 분도 있을 것이라는데 감히, 오백원을 건다. 그동안 문학적 성과라 칭할 수 있는 새로운 시도를 한 것은 박민규나 공지영도 그러했다. 하지만 나는 박민규의 <아침의 문>이나 공지영의 <맨발로 글목을 돌다>에서는 웃다가 허탈하진 않았던 것 같다. 평론가의 해석과 심사평을 읽고 어느 정도 내가 엿본 공감의 요소를 발견하고는 했던 것 같다. 내가 이해하지 못한 것들이라 하여 불쾌하진 않았던 것 같다.
또 하나 올해는 문학사상이 창사 40주년을 맞아 표지와 판본 디자인을 바꾸었다. ‘권위와 전통, 그리고 재미있는 소설책이라는 느낌을 살리는 데 중점을 두었고 대상 수상 작가와 그의 작품이 한눈에 들어오게 디자인’하였다고 한다. 재미있는 소설책이라는 느낌은 충분했고 전보다 더 젊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렇기에 권위와 전통은 멀어졌다. 전에는 수상자의 자선대표작과 해설 등이 25프로 정도였는데 이번엔 <옥수수와 나> 자체 분량이 많은데다가 수상소감을 비롯해 중간에 자서전식의 소설과 염승숙 작가의 김영하 작가론까지 더해져 거뜬히 삼분의 일 분량을 넘어가는 구성이다. (만약 <옥수수와 나> 뒤에 수상소감이나 자선작, 자서전, 작가론, 평론이 더해지지 않았다면 무척 화가 났을 것이긴 하지만) 이른바 김영하 특집이다. 앞의 표지사진까지 역시 이긴 자가 다가지는 건 맞다. (다른 분이어도 그랬을까? 마케팅적 요소에 치중한 덕인지 내가 받은 책은 벌써 1판 8쇄였다. 이상문학상이 뜬 날 바로 문자 받고 주문했으나 그랬다......) 전에는 우수상도 수상작이라는 느낌이 들었는데 이번엔 김영하만 수상자고 나머진 후보작의 느낌이다.
나는 김영하의 작품을 비하하거나 그가 이룬 성과를 폄하하거나 절대 이상문학상의 권위에 먹칠을 하고 싶지는 않은데, 그저 내 느낌을 말하다보니 할 수 없이 이런 글이 되었다. 바로 전에 읽은 책에서 무언가를 비판하는 것은 모두 자기과시의 일환이라는 충언을 따끔하게 받았으면서도 또 내 자신을 이기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다. 그저 이 불편한 마음을 나름 해소할 수 있는 건 소설을 한 번 더 읽고 내가 느낀 김영하와 옥수수를 차분하게 자근자근 씹어 보는 수 밖에 없을 듯하다.
2. <옥수수와 나 >만 씹는다
먼저 수지라는 출판사 편집자와 이혼한 ‘나’, 박만수는 쫑이라는 호승심 강한 딸아이가 이혼할 때 제 어미를 택한 것을 인생의 행운으로 생각하는 40대 작가이다. 계약금만 먹고 세월만 보내고 있던 나에게 월스트리트 출신의 출판사 사장은 수지를 시켜 원고독촉을 한다. 참,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은 대부분 소주와 삼겹살이 아닌 와인과 치즈를 즐겨, 마신다. 박만수의 딸 쫑이는 미국의 유수한 대학에서 입학허가를 받아 놓았단다. 그러니까 글이 안되어서 뉴욕으로 날아가는 수준이다. 나는 솔직히 김영하의 작품에서 어떤 주인공이 절망을 한다해도 어떠한 인생의 패배감은 느껴본 적이 없다. 그들은 늘 찌질하고 돈없어도 수준만은 강남파이다. (나중에 언급할지 모르겠는데 이것이 김숨의 작품이 미끄러진 결과를 더 아프게 한다. 그냥 개인적으로 김숨이 꼭 다음번에 수상하기를...)
1) 킬킬거린 웃음지대
“비밀이라는 것 보니까 뭔가 괜찮은 거 쓰고 있나봐.”
김영하의 단편은 술술 넘어가는 탓에 쉬운 생각이 들지만 이면에는 늘 아는 사람만 알고 이해하라는 식의 농담이나 대사가 포진되어 있다. 나는 이 부분을 이렇게 상상해본다. 모든 심사위원들은 ‘자기 마음대로 스토리를 상상하기 시작하고, 곧 그것을 마음에 들어 한다’고. 김영하는 서사에 마술적 리얼리즘을 마술적으로 리얼하게 구사했기 때문이 아니고 (내가 옥수수로 변하는)이것도 마술적 리얼리즘이지 않느냐 반박했을 뿐인데 제대로 먹혀들었다는 생각이다. 김영하 작가는 ‘마술적 리얼리즘의 마술적이면서도 리얼한 힘’을 믿었고 심사위원은 그 힘을 느끼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그건 독자인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김영하는 절대 일부러 그럴 작가가 아니지만 이 작품은 무엇보다 기획력이 탁월한 듯하다. 2) 갸우뚱거린 물음지대 이상하게 수지를 만나면 나는 그 옛날의 철없던 시절로 돌아가 버리고 만다. 응석을 부리고 어깃장을 놓고 위로를 구걸한다. 나는 이제 옥수수가 아닌데, 정말 옥수수가 아닌데, 그런데 수지가 그걸 모르고 있으니, 내가 이제 더 이상 옥수수가 아니라는 사실은 아무 의미가 없다. -p21 작품 도입부에 ‘나’라고 추정되는 환자는 닭이 아직도 자신을 쫓아오는 것 같다고 그것이 무서워 죽겠다고 의사에게 말한다. 의사는 선생님은 옥수수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걸 이제 아시지 않느냐 반문한다. 그러나 나로 추정되는 환자는 답한다. “글쎄, 저야 알지요. 하지만 닭들은 그걸 모르잖아요.” (슬라보예 지젝이 즐겨 인용하는 동유럽의 농담이라는 주석이 달려 있다) 나는 더 이상 옥수수가 아닌 걸 당신도 알고 나도 아는데 저 닭들은 그걸 모르니 아무 의미가 없다. 여기서 중요한건 ‘나’가 아니라 ‘당신’과 ‘닭’이다. 그리고 그 해석은 ‘나’로 추정되는 작가를 알고 있는 당신과 나이다. 내 생각에 심사위원 입장에서 ‘닭’은 우리이고 우리 입장에서 ‘닭’은 우리만큼 김영하를 모르는 나머지이다. 이 작품은 옥수수를 말하고 있지만 실은 옥수수가 옥수수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닭을 조롱하고 있다. 누가 되었건 ‘닭’을 상상하는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점이 이 작품의 가장 짜릿한 쾌락인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무리 내가 무엇인지 말하여도 상대가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면 그 무엇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작가가 아무리 이렇다 떠들어도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에겐 글이 아무짝에 쓸모가 없다는 뜻 아닐까. 상대가 아느냐 모르느냐의 여부가 의미가 있느냐 없느냐의 기준이 된다는 건 철저히 내 중심이 아니고 그걸 인지하는 상대에 맞추어져 있다. (작가가) 아무리 혼자 방구석에서 피터지게 떠들어 본들 세상에 글로 나오지 못한 생각은 (작가 독자 모두에게)의미가 없다는 말도 된다. 이 화두는 결국 작품 맨 마지막에 의식의 안개를 뚫고 서서히 드러나는 하나의 문장, ‘나는 옥수수가 아니다’ 란 뜻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게임으로 귀결된다. 내가 아니라고 하는데 너는 그걸 아느냐는 최종질문이다. 안다면 내가 아니라는 걸 당신도 안다는 것이므로 퍽이나 다행이라는 말이고 설령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큰 의미는 없다는 뜻이다. 정말 웃다가 기분 묘해지는 의미심장한 결말인 것이다. 내가 모를까봐? 풋. 이정도도 모를까봐? 아니라는 거 안다구. 근데 뭐, 아니면 당신이 뭐가 좋은데? 내가 당신 아닌 거 안다는 거 그게 그리 중요한가? ......, 작가에게, 그것은 가장 중요하구나. 암것도 모른다면 공감은 커녕 반감만 들기 마련이지. 즉 자기가 아는 걸 독자도 알기를 바라는 마음이구나. 옥수수가 아닌 걸 알아달라는 건 반대로 옥수수였을 때도 이해해달라는 것이구나. 옥수수 아닌 나도 옥수수였던 나도 알아주길 바란 것이구나. 그러니 당신들이 닭이기를 절대로 바라지 않는다는 뜻이구나...
옥수수를 무엇으로 볼 것인가도 이 작품을 읽어가는 재미의 하나인데 만약 옥수수를 작가가 제시하는 작품의 총체라고 본다면 어떠할까. 알알이 촘촘하게 박혀있는 옥수수를 받아든 독자는 과연 처음부터 끝까지 옥수수를 깨끗하게 먹어치울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옥수수를 좋아하지 않거나 치아가 좋지 않거나 먹다가 맛이 없어진다면? 나는 작가가 의도한 바가 꼭 독자에게 그대로 전달되는 것은 아님을 인정하는 김영하의 고민을 슬쩍 엿보았다. 바로 월 스트리트 출신 출판사 사장이 작가의 데뷔작에서 최근작까지 모두 초판에 사들여 책 갈피마다 빼곡이 메모를 적어 놓은 것이다. 그 초판 책에 사인을 해달라고 내밀었을 때 작가 박만수는 자신의 옥수수가 한 알도 남기지 않고 다 소화된 것으로 기대한다. 사장은 동시대에 박선생 같은 작가가 있다는 게 삶의 위로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고 '나'는 그 말에 얼마나 감동했던가. (쎄씨봉 윤형주의 팬이 그랬다지, 나와 동시대에 살아주셔서 죽도록 감사하다고...) 여기서 김영하는 옥수수를 알아보고 먹지 못하는 상대(독자)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아니 상대의 태도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사장은 자신이 읽은 내 책에 대해서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작가라고 자기가 쓴 책의 내용을 전부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독자 역시 잊어버리거나 엉뚱하게 기억한다. 따라서 작가와 독자가 만나서 책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언제나 다소 뜨악한 분위기로 흘러가게 된다. 이렇게 어긋나는 일에는 익숙해져 있었지만 사장과의 대화는 유독 많이 엇갈렸다. 내 책의 여백에 자기 나름의 대안적 스토리를 자꾸 적어 넣다 보니 마치 그것이 원래 스토리였던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면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이제 나는 그런 일에 별로 개의치 않는다. 독자가 어떻게 기억하고 있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28p
내가 옥수수였던 것과 지금은 아닌 것을 알아주길 바라지만 몰라줘도 어쩔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끝까지 ‘나는 옥수수가 아니다’, 부르짖는 것은 제발 이 작품을 읽는 사람만은 알아달라는 역설의 호소 인 것이다. 혼자서 대안적 스토리를 만들고 그것에 감동해 놓고 자기 작품에 칭찬하지 말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돈벌이엔 동물적 감각으로 일가견이 있는 월스트리트 출신 출판사 사장같이 굴지 말고. 3) 육체적 깨달음지대
‘나’에게는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며 시를 쓰는 친구와 시를 쓰며 카페를 운영하는 친구가 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모두 섹스 파트너가 있다는 것이고 나처럼 문학을 하는 것이다. 철학과 카페사이에 교집합을 시로 정한 것도 의미심장하다. 철학은 관념을 카페는 현실을 반영한다고 보여 지며 ‘나’는 소설을 그들은 더 고결해 보이는 시를 쓴다고 말한다. 그런데 문학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이들 모두는 각자 자기 논리대로 불륜을 정당화하는 위선자로 느껴졌다. 철학은 카페의 아내를 만나고 카페는 여군장교를 만나고 ‘나’는 출판사 사장의 아내와 자게 된다. 아내였던 수지도 철학을 만난다. 어찌 보면 가장 부도덕할 줄 알았던 자본가, 출판사 사장만 깨끗하다. 왜? 단순하고 정확하고 효율적이니까. 그에 반해 시쓰는 친구나 평론을 자처하는 수지나 모두 자기 해석을 덧붙이며 자신을 변호하는데 여념이 없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소설은 그런 게 아냐. 매우 육체적인 거야. 심장이 움직이며 마음은 복종해. 우리는 시인이나 평론가와 다른 몸을 갖고 있어. 문학계의 해병대, 육체노동자, 정육점 주인이야.” -p23 이 대답이 잠시나마 뭉클했던 건 소설가는 머리나 손으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엉덩이로 쓴다는 어느 작가의 말이 생각나서였다. 그리고 갸우뚱 했던 건 꽤나 도시적이고 효율적으로 보이는 김영하도 같은 것일까 새삼 놀라웠기 때문이다. ‘인간이 추구하고 있는 육체적, 물질적 욕망이 삶의 진정성을 파괴하고 있는 현실’은 환상기법이든 무엇이든 소설이라는 육체적 과정을 거침으로써 더욱 숙연해 지는 것이었다. 아무리 환상과 마술을 앞세워도 결국 몸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지 누구를 가르치거나 평가하는 것은 다른 몸이 한다는 것이다. (육체노동자라고 했기 때문에 ‘나’는 후반부에 육체를 엄청나게 운용하는 것이 아닌지...)
'나'는 자본가에게 이용당하지 않고 외려 곤경에 빠트리고자 ‘어지럽고 음란하고 실험적이면서 해체적인 소설’을 쓰기로 결심하고 있지도 않은 곡마단 마지막 생존자를 핑계로 뉴욕으로 떠난다. 그러나 월 스트리트는 아무나 가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뉴욕의 아파트를 선뜻 제공한 출판사 사장의 음모 또한 대단히 육체적이었다. 작가 박만수는 뉴욕에서 미모의 출판사사장의 아내와 조우하며 쾌락에 내몰리고 그 열정으로 예술작업에 미친 듯이 몰두하게 된다. 사장이 불시에 침입해 소설이 진지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저급한 쓰레기라고 비난하자 나는 반박한다. “쓰레기라니요? 이해가 잘 안되네요. 물론 이 소설의 창작동기가 불순, 아니 불명확했던 것은 저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막상 쓰기 시작하자 신비스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모든 작가들이 어느 정도는 겪는 현상입니다만 작품이 작가 자신을 배반해버리는 것입니다. 이번 경우에는 저 작품이 저 자신을 초월해, 저의 비천한 문재와 사상을 훌쩍 뛰어넘어 저 홀로 놀라운 지경으로 가버린 겁니다. 그러니까 이 원고는 작가 박만수가 아니라 저의 손을 빌려, 아기 예수가 성모마리의 몸을 빌려 이 세상에 오셨듯이, 이 세상에 지금 오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식으로 말씀드려 기분이 나쁘실 수 있는데, 그렇죠, 선승들 같았다면, 한 소식을 했다, 뭐 그런 식으로 말들 했겠죠“ -p59
작품이 작가를 배신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무리 초기 구상이 완벽하더라도 글을 이루는 과정상에서는 그렇지 않으며 전혀 다른 이야기로 발전할 수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그리고 대단한 구상보다는 일단 써야 한다는 현실을 강조하는 문법이다. 남의 아내와 밤새 뒹굴었건 밤새 잠을 잤건 어쨌든 처절하게 육화된 원고를 써 내었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이며 그러므로 누구도 쓰레기라 할 자격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작가들이 소설 쓰는 과정이나 안 써지는 과정을 말하는 작품들을 보면 결국 마지막에는 그 작품이 끝남과 동시에 작가자신도 소설을 끝냈다는 사실에 감격스러워 하는 뉘앙스를 발견하게 된다. 육체의 사력을 다해 힘겹게 써내었으니 더 이상 나는 옥수수가 아닌 것이다. 당신도, 그런 줄 알으란 뜻이다. 아니, 제발 당신만은 좀 알아 달라는 것이다.
김영하는 작품 전반에 자기 목소리를 싣는데 있어 조크와 냉소를 이용하는데 능숙했다. ‘나는 언제나 내 인생이라는 난해하고 음란하고 해체적인 책의 저자’였다고 문학적 자서전 <나쁜 버릇>에서도 주장하고 있다.(이 소설 골때린다) 실패자들이 골방에 모여 퇴폐적인 글을 전파하여 젊은 영혼들을 타락시킨 죄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작가를 평가하는 집단이 재판하는 나쁜 버릇이다. 그러나 그는 위대한 작품을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글을 쓰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글을 쓴다고 부연한다. 작품성의 평가에 개의치 않는다는 말로 들렸다. 다시 말하면 당연히 고맙긴 하지만 이 상도 크게 생각하지는 않는다로 해석할 수 있다. 이 말은 역으로 이 상이 글쓰는 작가에게는 누구에게나 당연하다는 뜻으로 뒤집힐 수도 있다. 다만 ‘해야만 한다고 믿는 그 일로’ 돌아가는데 이보다 더 좋은 약은 없다고 여기는 듯 하다. 작품 말미에 출판사 사장이 권해준 약은 아마도 그 앞으로의 더 지난한 고통과 세월을 이기라는 극약 처방은 아닐까 싶다. 약 먹은 후 달라진 세상에서 쓴 첫 문장이 말해준다. '나는 옥수수가 아니다'는 절규는 그것을 깨달은 작가 자신의 믿음은 아니었을지...
3. 옥수수 그 나머지 이야기
이 소설집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 아니어도 재차 옥수수와 닭의 의미를 해석하고 김영하의 작품세계로부터 감탄 혹은 비판을 할 것이다. 우수상 수상작은 뭉둥그릴 확률이 많다고 본다. 그런데 나는 옥수수 나머지 우수상 수상작도 나가수나 오디션 프로의 영향 때문인지 순위를 매겨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편 심사위원들의 변을 보면 하나같이 마지막까지 김숨과 김영하를 놓고 고민을 했다고들 하는데 수록 순서는 그와는 상관이 없는 듯하다. 그렇다고 가나다 순도 아니고 서사의 흐름을 배려한 편집자의 순서도 아니고 무작위 제비뽑기 순서도 아닐 것이다. 읽을 땐 순서가 의미 없었는데 정작 우수상작만 따로 글을 써보려 하니 불현듯 순서의 의미가 궁금해지는 것이었다. 아마 등단연도 순인 듯한데 나는 내 맘대로 순위를 정해보았다. 순전 내 기준이고 내 기분 대로이므로 이야말로 의미는 없다.
1) 김숨 <국수>
김숨은 작년에도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밤>으로 우수상을 수상했다. 그녀의 소설엔 유난히도 국이나 탕을 끓이거나 생선을 튀기고 굽는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물론 풍성한 식탁이 아니고 가난과 질병, 죽음과 생계의 고통에 시달리는 인물들의 반복되는 일상의 편린 속에서. 그녀의 소설을 읽고 있다 보면 아무리 하찮은 생명도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에는 삶의 의지가 살아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서늘하게 깨우치게 된다. 그럼으로써 누구나 이 숨 막히는 현실과 숨 쉴 틈 없는 일상 속에서도 우리 생명의 맥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끈질기고 더 위대한 것은 아닐까를 조용히 느끼게 된다. 이번엔 국수 밀가루 반죽을 하는 시간이 고통스럽게 전개되는 서사를 다루었다.
마흔셋의 석녀가 재취로 들어와 자기 속으로 낳지 않은 의붓자식을 기르면서 수없이 치대던 밀가루 반죽의 의미는 이미 맏딸이었던 야박스런 화자가 계모의 레시피를 그대로 재현하면서 비로소 원망의 국수가 아닌 화해의 국수로 변모한다. 화자는 밀가루를 양푼에 개고 간을 하고 반죽을 하고 숙성의 시간을 보내고 양념장을 만들고 국숫발을 뽑고 끓여 국수 한 그릇을 완성하는 동안 한 많은 한 여인과 자신의 일생을 연결 지으며 가슴속 응어리를 달래고 푸는 시간을 가진다. 뽑아놓은 국수 한 가닥이 꼭 ‘저기 당신과 여기 나 사이에 놓인 연줄’만 같아서 도로 뭉쳐버리고 싶지만 시간을 견뎌내고 제대로 먹을 수 없는 어머니 앞에 국수를 내놓는다. 이야기의 속도감이 부족하고 서사의 긴장감이 없다는 것이 단점이라 하였지만 기껏해야 멀건 국수 한 그릇 만들어 내놓는 일을 이렇게 끔찍하고 디테일하게 그리고 서글프고 아프게 묘사할 수 있을까 싶어 가장 많은 공감이 갔던 작품이다. 아마 한번이라도 국수를 끓여 본적이 있는 여성이라면 당연히 그러 할 것이다.
반죽의 시간이 당신에게는 혹 가슴속 응어리를 달래고 푸는 시간이 아니었을까요. -p244
오래전 젊었을 때 생선을 갈아 어묵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한 적이 있어 절대로 그 어떤 어묵도 안 드신다는 어르신이 생각난다. 어떤 한 가지 음식의 공정을 아주 긴 시간 반복해서 기술적으로 완성하는 세월을 가진 사람들은 달인처럼 아마도 그 음식의 자타공인 전문가가 되고도 남을 것이다. 그런데 그 세월이 그 음식만을 하도록 만드는 시간이었다면 아니 그 음식만이 그 세월을 견디는 시간이었다면 그는 세월이 원망스러울까 음식이 원망스러울까...... 김숨은 세월도 음식도 소중한 자기 생의 일부분이었고 그렇기에 국수를 지겹게도 만들어준 그분의 일생도 소중했다고 회상한다. 늘 그렇듯 그 고마움을 느낄 때란 그를 잃고 나서이다. 아직 삼십대 후반인 그녀가 무에 그리 깨우친 삶의 이치가 많은 것인지 나는 그것이 소름끼친다.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다음번엔 당당한 대상의 수상 소식을 기다린다.
2) 조현 <그 순간 너와 나는>
이 작가는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라 생각했는데 어느 소설집에서 아주 난해한 단편을 읽었던 기억이 있다. 찾아보니 <라 팜파, 초록빛 유형지>라는 단편인데 현장비평가가 뽑은 2010 『올해의 좋은 소설』(2010, 현대문학)에 수록 되어 있다. 그때도 김숨, 박민규, 권여선, 김경욱 등과 같이 선정된 것이었는데 내 기억으로 그들 소설 중에서 전혀 서사자체가 기억이 나지 않는 소설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어느 정도 작가의 어린 시절이 반영된 듯한 느낌을 주는 이 작품은 단연 이야기가 탄탄한 구성이 재미난 소설이구나를 느끼게 해주었다. 심사위원은 쓸데없는 에피소드가 많아 다소 구성이 산만하다 하였지만 분량도 그렇고 외려 장편으로 구성한다면 좋지 않았을까, 나름 상상을 해보았다. 나이 상으로도 같은 연배이고 나 역시 비슷한 시기 지방에서 서울로 상경한 어린 시절에 처음 보았던 서울의 삼십년 전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지라 공감도가 더 컸던 것 같다. 이 소설의 마지막은 시골에서 상경해 80년에 왕십리역 근처로 이사 온 화자가 삼십 년이 지난 오늘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믿고 싶은 대로 가고 싶은 대로 가겠다는 각오로 끝맺는다.
살아 남아야 생을 바꿀 수 있고, 정말로 간절한 무언가를 찾아 낼 수 있다. - p367
왕십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화자는 다 가진 것으로 보여 늘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친구 민혁의 부음을 듣고 장례식장에 가면서 당시 미래를 엿볼 줄 알았던 무당집 딸을 떠올린다. 이상하게도 무당집 딸과 친분이 있었던 친구들은 나를 포함해 모두 불행의 사연을 간직하게 되는데 그중에 죽지 않고 살아남은 나는 살아남는 것이야 말로 어떻게든 운명을 바꿀 기회에 노출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무당집 딸의 예언대로 내일 죽는 운명일 지라도 오늘을 포기할 수는 없는 것이 우리네 서글픈 운명이라고 들려왔다. 우수상 수상 작가들 중에는 가장 늦게 등단한(2008) 작가로서 아직 장편이 없는 듯 한데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3) 김경욱 <스프레이>
이 작품은 읽는 내내 하성란의 <곰팡이꽃>을 연상시켰다. 아파트 단지에서 쓰레기를 수집하며 소통 불가한 이웃들을 이해해보려는 한 남자의 집착이 겹쳐졌기 때문이다. 쓰레기 봉투가 이번엔 택배상자로 바뀌면서 단순한 실수가 어떻게 돌이킬 수 없는 사고와 연결되어 가는지 서사를 흥미롭게 구성하였다. 다만 그 구성이 흡사 기술자가 조립해 만든 레고 작품처럼 딱딱 들어맞도록 너무 완벽했다는 것이 주제가 약하다는 식의 심사평을 불러온 것은 아닐까 싶었다.
인상 깊었던 것은 주인공이 백화점 구두잡화매장에서 일하는 점원이었다는 것. 단골가게의 점원이 하도 손님의 발을 만지면서 늘 ‘죄송합니다’ 를 연발하다 보니 집에서도 어머니가 차려준 밥상을 받으며 죄송합니다, 라고 했다는 일화가 기억났다. 화자이며 주인공인 구두점원은 감정을 다스리는 것에 우월감을 느끼며 실수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스트레스의 탈출구로 남의 택배상자를 택했다.
잘못 들고 온 택배상자를 뜯을 때의 쾌감을 잊을 수 없었다. -p182
이 작품의 매력은 도대체 끝이 어떻게 될지 결말을 향한 매순간마다의 긴장감인 듯하다. 김경욱은 다른 문학상 수상 후보에도 꾸준히 오르는 작가이다. 장편 <동화처럼>에서 실망한 기억이 있어 예리하다는 소설집을 아직 넘겨보지 않았던 터였다. 페이지의 가독력이야 김영하 못지 않았는데 결말이 좀 새롭지 않아서 였을까. 개인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결말보다는 신선하지 않은 결말을 더 선호한다. 그런데 거장들은 대부분 차라리 새로울 수 없다면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도록 결말을 맺으라고 했던 것 같다. 독자들은 결말에서 만큼은 마음이 열려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라 말한다. 그런데 난 결말을 택하고 결론짓는 것은 모두 작가의 한계치를 상징하는 역량이라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새로움만을 지향할 수도 없고 또 새롭다 예상하여도 작가의 생각만큼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새로움은 원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보다는 이럴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무게를 둔 듯하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어쩌면 조금 덜 소설적이지 않았나, 감히 판단해본다. 그런데 또 난 이런 짜 맞추어진 소설이 늘 즐겁고 짜릿한 독자였다. 기대한 대로 끝나주는 것도 좋더란 말이다. 어떤 이야기를 누가 하느냐에 따라서. 결국 나는 어디서 생겼을지도 모를 작가에 대한 기대감으로 김경욱에 대한 기대치가 높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4) 최제훈 <미루의 초상화>
김경욱과는 반대로 이야기의 구성은 퍽이나 흥미로와 좋았는데 너무 소설적이어서 좀 그랬던 작품이다. 최제훈은 어쩐지 이야기를 경영한다는 느낌이 가끔, 든다. 그것도 굉장히 효율적으로. 결과적으로 높아 보이는 완성도가 소설의 신비감을 떨어트린다고나 할까.
이야기는 기인의 풍모를 하고 대학로에서 초상화를 그리는 어느 화가의 고백과 그 초상화에게 여자 친구의 그림을 부탁한 대학생의 사연이 평행선을 그리며 이어지다가 마지막 초상화 그림에서 합쳐지는 구성이다. 화가의 궤변과도 같은 예술 사랑과 인간 사랑의 의미를 읽어가다 보면 예술과 사랑의 합일을 이루었다 생각하는 화가의 일생이 위대해보이기는 커녕 한없이 비루하고 이기적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마지막 여자 친구의 초상화에서 화가가 발견한 생의 진리(?)를 똑같이 발견해 내는 주인공의 착각은 왜 화가 나는 것일까......
나는 솔직히 예술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예술 하는 것의 의미를 죽는 날까지 정립하고 그것을 세상에 인정받기 위해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돈을 벌든 못 벌 든 자기예술의 의미를 스스로 정립하고 그것을 자기 정체성으로 삶는 일은 생존만큼 중요하다. 아니 어쩌면 그것이 생존의 이유일지 모른다. 최제훈은 자신이 글 쓰고 싶은 이유를 알고 싶어서 글을 쓴다는 대답을 한 적이 있다. 작가는 '내가 왜 글을 써야 하는지'를 오래 생각해 온 것 같고 글을 쓰는 이유를 밝히는 것이 (늦게 시작한)작가 자신의 정체성을 정립하는 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작가는 다름 아닌 이 소설을 쓰는 이유와 이 소설의 의미가 분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작가가 말하려고 했던 '미루의 초상화'는 예술과 사랑, 이상과 현실이 모두 담겨있는 자기중심적인 예술의 총체, 즉 예술가의 인생이 응집 축약된 유기적인 결과물인 듯하다. 예술은 어쩌면 무언가를 죽여서 녹여낸 신비하고 야릇한 생명체 일지 모른다. 비록 생과 사라는 폭력을 녹여낸 것이지만 또 다른 생명을 위무하고 살아갈 수 있게 할 뿐인 것이다. 소설가 역시 어떤 말 안 되는 죽음과 기가 막힌 고통을 빚어낼 지언정 이야기로서 누군가에게 희망을 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버려선 안 될 것이다. 최제훈은 그것이 자신에게 소설 쓰는 소설가임을 이해시키는 방편은 아닐까.
5) 조해진 <유리>
이 작품은 이름이 한유리인 한 대학강사의 유리같은 인생을 위태롭게 조망하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유리로 상징되는 상처의 표상을 너무나 강렬하게 묘사한 덕분이지 서사가 묻히는 느낌을 받았다. 즉,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는 알겠는데 그것을 남에게 전달하기는 곤란한 심경이다. 남는 것은 상처의 내용이 아니고 상처의 외면, 즉 상처의 형상이 제시하는 이미지였기 때문이다. 다만 읽는 내내 사방 유리에 찔리고 유리를 밟는 것과 같은 ‘통증의 촉수’를 세심하게 감지할 수 있어서 독서 후 불쾌한 느낌만은 최고로 생생했던 것 같다.
K대에서 글쓰기 강의를 맡고 있는 강사 한유리에게는 열 네 살 이전의 기억이 모두 유리로만 이루어진 도시에서 살았던 기억으로 점철되어 있다. 어린 시절 불우한 가정환경과 학교폭력에 시달렸던 주인공이 유리도시에서 깨달은 삶의 진리는 아마도 ‘자신이 깨지지 않으려면 상대를 깨트려야’ 한다는 잔인한 현실인 듯하다. 그러나 유리에 짓밟히면서 얻은 교훈도 그녀를 유리보다 강하게 만들어주진 않은 듯했다. 그녀는 강의 전담 계약직 교수를 채용한다는 학교 공고에 불안을 느끼고 시답지도 않은 한참어린 제자와 도피의 여행을 떠나고 만다. 그녀에게 현실은 여전히 ‘입구도 출구도 없는 밀폐된 유리알 속’인 것이다.
짓밟히지도, 짓밟지도 않으면서 그 모든 곳들을 통과하려 했으나 돌이켜보니 세상은 늘 상처 다. -p284
이 소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유는 소설 전반을 은밀하게 흐르던 여성의 피해의식이 지나치게 과하게 심층화되었기 때문이다. 가장 논리적으로 이해가지 않았던 것이 한유리의 어린시절 상처가 너무 특수화(?) 되었다는 것인데 그것은 유리의 아픔과 주인공의 아픔이 일체되지 않는 괴리감을 제공하기 충분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녀의 장편 <로기완을 만났다>는 한번 읽어보고 싶다. 중간 중간 ‘통증의 촉수’를 자극하는 문장들이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다.
6) 하성란 <오후, 가로지르다>
이 작품은 거의 대상을 수상할 뻔(?) 하고도 마지막 서사의 한 자락에 어떤 작가의 고집 때문에 급격하게 서사가 흩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다 된 밥에 코 빠트린 격으로 화가 나는 구석이 있다는 이야기다. 심사위원 중에 여자가 뺨을 맞은 이유가 무엇인지 끝까지 설명하지 않은 것을 지적한 분이 있었는데 나 역시 그 이유를 왜 언급하지 않았는지 그것이 가장 짜증이 났다. 무언가 대단한, 아니면 어이없는 이유는 있겠지 하고 끝나는 느낌이 배심의 클리세 처럼 느껴진 이유는 무엇일까. 가끔 하성란의 작품에서는 독자와의 소통, 이해보다는 자기만의 주제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는데 무언지 모르게 이 작품이 그랬다. 작가의 이유야 너무나 분명하게 있겠지만(큐비클은 원인 따위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 이유가 내게는 아픔이었네... 하듯 이번엔 그렇다는 이야기다.
주인공은 80년대 상사의 분위기를 기억하는 사십대 중반의 미스 김, 이제는 갱년기를 앞두고 신입사원들과의 세대 차이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말단 회사원이다. 작가는 신도시와 구도시의 경계를 확연하게 구분 짓는 이미지를 큐비클로 조형화하고 이를 삼면이 칸막이로 막힌 사무실내 구조와 동일시한다. 그리고 직원들이 폐쇄적인 구조 속에서 자신을 알릴 유일한 방법으로 내세운다. 큐비클 속에서 싹트는 동지의식을 면밀히 투시한다. 그 비인간적이면서 별다를 것 없는 조직의 에피소드가 이 소설을 이루는 큐비클의 조각들이다.
맞습니다. 저는 길을 잃었고 헤매고 있었습니다. -p220
현실의 큐비클은 너무나 쉽고 너무나 분명하고 단순해서 삶의 길을 잃었다는 역설이다. 이는 바닷가에서 사람이 빠져서 찾지 못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는 논리이다. 바닷속은 그 컴컴한 물길이 들여다보이지 않기라도 하는데 큐비클은 고개만 들면 훤히 속이 내다보이는데도 그렇다는 이야기다. 이 소설은 초반, 중반의 기대감이 후반부에서 지속되지 못한 점이 가장 아쉽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일을 밀착 취재한 듯한 느낌의 하성란식 치밀 묘사는 소설은 결국 여러 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꿋꿋하게 알려준다. 올해는 제발, 에이와는 다른 소설을 만나고 싶다. (A도 독자를 배려하는 소설은 아니지 않나......)
7) 함정임 <저녁식사가 끝난 뒤>
오래된 지인들을 초대해 자기 집에서 식사를 하고 난 후의 소회를 담담히 적어 내려가는 류의 소설은 주로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의 교수나 의미 있는 직책에 오른 여성작가들에게서 많이 볼 수 있는 이야기이다. 식사를 준비하며 과거를 회상할 것이고 반드시 사연이 될 만한 누군가가 표면에 등장할 것이고 그와의 인연에 놓인 지인들이 하나둘 나타날 때 화자의 심경변화는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불같은 청춘의 시기를 지나 어느 정도 보상을 받을만한 지위에서 자신과 비슷한 이력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떠드는 자리는 누구를 위한 모임이며, 무엇을 위한 대화이며, 어떤 이를 위한 시간일 것인가.
내 기억으로 이들은 대부분 이제는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지인들의 위선과 가식에 실망을 하곤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으로 끝이 났던 것 같다. 인상적이었던 건 화자인 순남씨가 여행지에서의 사진이나 은촛대, 괘종시계, 색소폰 등의 소품과 관련된 자기 사연을 간간히 믹스하였다는 것인데 초반부 무언가 큰 비밀이 있을 것 같았던 은촛대가 나중에 힘을 받지 못하고 유야무야하게 사라진 것이 서운했다고 할까. 이야기는 갑자기 나만 몰랐던 이야기로 끝이 나는 것이 반전이라면 반전이겠지만 그렇다고 앞부분에서 페이크인척 하였던 자기 집중의 서사가 결말을 위한 설득을 가지진 못했다는 점에서 좀 뜬금없다는 기분이었다.
또 하나 이 소설은 순번 상 마치 나가수 1번 가수의 노래가 7번 가수의 노래를 듣고 나면 대단치 않을 경우 기억에 가물가물한 이치와도 같았다. 무언가 진부하다는 느낌도 서사가 갈피를 못 잡았다는 느낌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아 우수상 수상작 중 꼴찌를 주었다. (아...어쩐지 인순이가 꼴지한 느낌은 무엇인가...)
아쉬운 게 있다면 지난번까지 우수상 수상작도 (뒤편에)따로 평이 더해졌지만 이번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더욱 김영하에 치중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묘한건 평가식으로 글을 모두 적고 나니 또 대상은 김영하가 적절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일등은 일등의 실력 때문이 아니고 일등을 할만한 이유가 있을 뿐...) 나가수 식(자문위원식)으로 말하자면 함정임과 하성란은 주제를 상징화하는 무대의 관록을 엿볼 수 있었고 김경욱과 최제훈은 치밀한 구성으로 무대의 완성도를 높였고, 조해진은 섬세한 감성의 표현이 돋보이는 묘사의 절정을 보여주었고, 조현은 서사에 본인의 이야기가 녹아든 한편의 뮤지컬을 보는 느낌이었고, 김숨은 소름끼치는 가창력으로 관객을 압도하는 감동을 선사했다. 모든 작가에게 진심어린 박수를 보낸다.(마치 심사위원이나 된듯이 우쭐하구나 ㅋ) 좋은 소설, 좋은 작가가 무엇인지는 잘 모른다. 분명한 건 내가 그들로부터 어떤 영감을 받고 그저 그런 오늘, 어제와 달라질 것 없는 오늘을 보내면서도 새로운 내일을 기다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에겐 당신들이 피할 수 없는 문학의 ‘큐비클’이고 안 먹을 수 없는 ‘옥수수’이고 매번 기다려지는 ‘국수’이고 입출구 없는 ‘유리’알 속이고 30년 전 ‘왕십리’이고 기다려지는 ‘택배’상자이고 살아있는 ‘초상화’이고 일 년에 한번 있는 ‘만찬’이다. 이상으로 다소 빚진 심정이었던 이상문학상의 리뷰를 마친다. 나의 이상은 언제쯤 날개를 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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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뉴욕에서 공연보는 재미에 빠졌다고 멘션을 올린 트위터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 주인은 다름 아닌 김 영하였다. SNS의 세계란 참으로 명료하면서 몽환적이란 생각을 했던 것도 바로 그 시점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한날한시 경쾌하게 쏟아낼 수 있다는 데 기술적인 명료함이 돋보이고 나와 다른 타인의 일상을 그림그리듯 들여다본다는 점에서 몽환적이었다. 지루한 일상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찌질하게 뒹굴다가 목욕탕 창문을 통해 보이는 밤별이나마 올려다보는 여유로 감지덕지 살아가는 삶인데 남들은 저리 사는구나 싶은 동경과 부러움이 터치하나로 교차하는 세상이다. 셀러브리티에 버금가는 인사들도 많은데 하필 김 영하를 언급한 이유는 단 하나, 그가 2012년 제36회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했기 때문이다. 뉴욕에서의 일상을 잠시 들여다보며 영하작가가 그 곳에서 작품구상을 하겠구나 생각도 했었다. 독자는 작가에 대해 그런 상상을 하게 마련아닌가. 그렇게 시간이 한참이나 흘렀는데 어느 날 대중의 뇌리속에 박혀있던 눈을 내리깐 그의 얼굴사진이 보였다. 왼편에 <옥수수와 나>라는 제목과 함께 그가 돌아왔다.
최근 한국소설에 목말라 있던 터라 부조리한 구성이나 밑도 끝도 없는 정신세계만 아니라면 어떤 소설이든 소화할 것 같은 심정이었다. 이처럼 따끈따끈한 신간을 받아보게 되는 행운을 얻다니.... 블로그생활 밑천이 3년여 되다보니 내 글을 그나마 이해해주는(?) 애틋한 친구님이 새우깡과 함께 보내준 눈물겨운 책이다. 확실하게 읽고 재미있게 글을 정리해봐야지 하는 심정으로 꼼꼼이 읽어 보았다. 그러니까 내가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처음 만난 시기는 1991년이었다. 조 성기님의 <우리 시대의 소설가>를 시작으로 해마다 작품집을 사서 읽고 책장에 진열해 놓는 걸 즐겨했다. 2004년 김 훈님의 <화장>을 마지막으로 -개인적으로 김 훈님의 이 작품, 기막혔다-나의 매년 이상문학상 작품집 읽기는 끝이 났다. 작년 수상작까지도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는데 올해 눈길을 끈 이유는 그간 이상문학상의 본질이 독자의 감상력을 탐하는 길이 아니었는데 올해는 그 심사를 고스란히 드러낸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단 김 영하라는 네임밸류가 그렇고 그가 끄집어낸 글의 소재가 그렇다.
작가 현실을 대담하게 건드리는 작법, 제임스 조이스의 서사 <율리시즈>에서 농염한 녹색마녀-고전영화속 배우 실바노 망가노의 초록빛이 생각나서-의 마력적인 쾌락에 허우적대는 율리시즈처럼 자신의 허상을 닭의 먹잇감인 옥수수로 묘사하고 있다. 주인공은 작가다. 작가의 현실은 원고독촉의 압박과 끝없는 상상력을 생산해야 하는 의무감에 사로잡혀있다. 나는 옥수수이고 나를 쫒는 그들은 닭이다. 날카로운 부리로 옥수수인 나를 찍어 삼키면 끝나고 마는 숙명적 존재! 장편에서만 가능할 것 같은 시공의 이동이 단편안에서도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구성력과 현실인지 허상인지 구별이 안되는 공간,뉴욕에 있는 출판사 사장의 아파트에서의 몇날며칠 행해지는 짜릿한 밀애는 질펀한 글쓰기의 원동력이 된다. 물질이 최고의 가치인 사회분위기속에서 글생산의 에너지는 말초신경을 건드리는 육체적 쾌락에서 나오고 거짓된 신뢰는 착각과 오인의 결과를 가져온다. 소설을 읽어보면 주변인물들과의 관계가 나오는데 이는 앞글의 의미를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대상 수상작을 필두로 김 영하 작가의 단편들이 두어편 더 소개가 되고 수상작에 대한 논평과 해설이 꽤 묵직하게 페이지 할애를 하고 있다. 세밀한 설명은 작품을 이해하는데 분명 도움은 되지만 독자는 독자의 방식대로 읽기를 하면 될 것 같다. 어떻게 생각하든 자유아니겠는가. 대상 작품외에 일곱편의 우수작들을 읽는 재미도 놓칠 수 없는 소설읽기의 묘미이다. 함 정임의 <저녁식사가 끝난 뒤>, 김 경욱의 <스프레이>, 하 성란의 <오후, 가로지르다>,김 숨의 <국수>,조 혜진의 <유리>,최 재훈의 <미루의 초상화>, 조 현의 <그 순간 너와 나는>-이 중 내 눈을 번쩍 뜨이게 하고 벌에 쏘인 듯 강렬함을 안겨준 작품은 김 경욱님의 <스프레이>였다. 일전에 그의 소설 <위험한 독서>의 리뷰를 읽고 반드시 읽어야겠다고 속으로 무척 안달을 냈던 적이 있는데 <스프레이>를 읽고나서 이제는 그의 작품을 모조리 찾아봐야겠다는 욕망이 앞선다. 김 숨님의 <국수> 또한 아름답고 섬세한 묘사가 돋보였지만 개인적인 아쉬움이랄까, 왜 이런 소재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지..... 우수작들의 대부분은 다양한 관계의 부재를 이야기하고 있는 듯했다. 소통과 관계가 화두인 시대에 연결고리를 찾는 인간의 몸놀림에 갈증이 인다. 이 목마름을 해소하는 길은 무얼까, 한 권의 책, 그래서 오늘도 다른 날처럼 한 줄의 글을 읽고 한 페이지나마 어렵사리 넘기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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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를 판 사나이 ㅡ김영하 (수상작가자선작) 넘쳐서 주체를 못하겠다 . 뭘 ...좋음이 ! 막 주정뱅이를 끝내고 리뷰 는 등진채 내버려두고 이러다 못쓸까? 살짝 걱정도 되지만 읽은 기억 이 어디 가진 않겠지 ..더구나 빠른시간 안에 사라지진 않을게다 . 김영하의 자선작을 읽다말고 아..순간 답답해서 거실의 간이 탁자를 접어 내가 뒹굴 거릴 자리를 넓혔다 . 딱 혼자 누워 다리도 팔도 활개 치긴 부족한 공간였는데 며칠을 그걸 견디다 오늘 그냥 확 하고 치워 버렸다 . 탁자야 다리만 접힌걸 펴면 또 되니까... 어제 땡볕에 베란다의 환한 창을 눈이 부셔서 있는 종이를 모두 주워 모아 다닥다닥 붙여서 그림자를 만들어 놨는데 저녁나절의 돌풍에 제 풀에 허약했노라며 풀썩하고 그 덕지덕지가 내려 앉는 걸 봤는데 오늘 다시 하자니 어쩐지 맥이 빠져서 임시론 뭔가가 대신이 안된다는 것쯤을 깨달아 버린듯하다. 그렇게 살다가는 아무것도 안되는구나, 를 대용품은 진짜를 대신 할 수가 없는 거구나 .이런 감정이 어제의 그 돌 풍처럼 난데없이 (?)불어오듯 제자릴 맴돈다 . 아마 그게 이 소설 속의 하늘을 날며 그림자를 슬쩍 덮고 지나가는 서늘한 순간 쯤이 될까... 모르겠다 . 정말 모르겠다 . 그냥 내 감정이 이렇다고만 쓰자 . 그림자를 판 사나이에 엄마는 결혼을 집이나 차를 갈아치우듯 세번이나 해대고 네번도 다섯번도 더하지 않하고 죽어버린 이유가 뭘까 ...이모같던 그 엄마는 살아있다면이란 전제 속으로 사라진 이유. 세실리아 미경에게 대체 무슨일이 생긴걸까. 왜 허깨비같아서 그냥 불타 죽었나 ...그 여자 미경의 남편은 ...대체 심장어디에 불을 심어 놓고 살았 기에 자연발화라는 기이한 모양으로 세상과 작별하나 ... 그건 대체 무슨 일인걸까...팔다리는 두고 얼굴도 두고 몸판이 화르륵 타버릴 정도로 그를 애태운 건 뭘까 ... 정식은 미경의 남편이고 그림자를 판 사나이 , 그러니 극중 소설가인 이 작자의 친구인데 멀쩡히 잘 살다 그 냥 타 죽어버렸단다 . 그러면서 원래 바오로라는 부제와 고등학교때 이 작가를 사이에 두고 오랜시간 삼인행을 만들다 바오로가 사제가 되기로 하면서 애인에서 그냥 친구로 남고 , 또 자신과 친구였던 정식의 아내가 되게 끔 내버려 둔 것과 무슨 상관이길래 ...흐흣 ~ 미경과 살 상상을 해보는 작가 . 원래 그랬어야 했는데 그렇게 될 거였는 데 자릴 못 찾아 빙빙 돌다 이렇게 ( 허약하게도 그냥 이 표현 밖에 달리 대안이 없네) 될 거였구나 . 그런 거였어 하게 되는 이상함을 그냥 난 또 이해해 버린다 . 이런 걸 김영하식 신파라고나 해버려야할까 싶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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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습관처럼 이상문학상작품집을 구입해서 읽는다. 그러다보니 책장 맨 아래쪽에 수집품처럼 일렬로 꽂혀있는 책의 행렬을 바라보는 일은 어느 한편으론 마음을 뿌듯하게도 한다. 이 한 권의 책을 통해 일 년 동안의 단편소설을 다 읽는다는 느낌으로 읽는다. 이 말은 단편소설에 대한 지식이 크게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고 이것은 또한 어느 작가에 대한 편견 없이 읽으니 그 느낌만은 가장 솔직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올해 이상문학상 대상수상자인 김영하 작가에 대해 잘 모른다. 이 작가의 작품인 ‘검은 꽃’을 읽은 듯도 하고, 너무 유명해서 읽은 듯이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해서 김영하 작가의 작품을 읽은 것은 이 책에 수록된 대상 작품과 그가 대표작으로 뽑은 ‘그림자를 판 사나이’가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우선 두 작품 모두 잘 읽히는 장점이 있다. 김영하 작품이 다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 작가의 작품은 세련미를 그 바탕에 두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무한한 자신감으로 독자를 좌지우지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만한 필력이면 한국의 대표작가임에 분명할텐데 그동안 책좀 읽는다고 생각한 내가 너무 그의 책을 읽어보지 못했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할 만큼 그의 작품들은 노련했다. 대상작품인 ‘옥수수와 나’를 읽을 때는 과연 이 작품의 어떤 점이 권위 있는 이상문학상의 대상을 수상했을까하는 궁금증이 생겨 집중해서 읽었다. 옥수수 한 알을 두고 닭 두 마리가 서로 차지하려고 노려보고 있는 순간을 말하는데 이 옥수수 한 알은 작가가 될 수도 있고 노동자가 될 수도 있고, 혹은 모두에게 먹잇감이 되기 쉬운 민초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옥수수 한 알을 두고 다투는 닭 두 마리는 작가를 윽박질러 상업적 이익을 취득하는 출판인들이나 노동을 착취해서 개인적인 부를 축척하는 경영자들 등을 말하고 있다. 이런 주제를 놓고 작가는 세부 내용을 별 무리 없이 작가가 의도한 대로 시점과 장소를 옮겨 가며 독자를 자신의 편으로 이끌어 나간다. 이렇게 자신의 작품을 자신의 뜻대로 주물러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끄는 힘이 대상을 받지 않았나 생각한다. 읽고 나면 금방 읽은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 하는 직품들이 있는데 김영하의 두 작품은 모두 읽고 나서도 한참을 생각에 잠기게 했다. 이것이 그가 가진 작품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독자로 하여금 어떤 생각에 잠기게 하는 것. 그것이 어떤 방향이든 상관없이 독자가 나름대로 자신의 지식을 배경으로 이런 저런 생각을 해 보게 하는 것. 물론 내용면에서 세련미를 추구하다보니까 현실감이 떨어지는 장면도 있었고 뻔하다싶을 만큼 작위성이 느껴지기도 했는데 그런 거조차 가독성을 위한 장치려니 여기게 되는 것이 대상작이라는 위엄 같은 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수작으로 선정 된 일곱 작품들을 읽으며 작년 한 해 동안 이런 작품들이 문학세계를 일궈나갔구나 짐작했다. 함정임의 ‘저녁식사가 끝난 뒤’는 단편 소설의 전형처럼 조용히 시작되어 조용히 끝이 났다. 김경욱의 ‘스프레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재미와 긴장을 주었다. 그러나 그 결말이 별로 유쾌하지 않았고 긴장감 끝에 뭔가 해소되는 느낌이 없어 풍선을 불다 만 느낌이 들었다. 하성란의 이름은 익숙하다. ‘오후, 가로지르다’는 사무실 칸막이를 뜻하는 “큐비클”을 소재로 그 안에서 살아가는 직장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너무 잘 짜여져서 독자가 쉽게 내용을 다 알아버리는 단점이 있었다. 김숨의 ‘국수’는 너무 치밀해서 읽긴 읽었는데 작가가 쓴 치밀함을 다 읽어내지 못한 거 같아서 후딱 읽어버린 것이 미안할 정도였다. 어느 물밑같이 조용한 오후에 이 작품은 천천히 되새김질 하며 읽어야 될, 그런 생각이 든 작품이었다. 나머지 작품들도 잘 읽히면서 뭔가 메시지를 주는 내용들이어서 작품 선정이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이상작품집을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작품들이 있어서 나의 낮은 독서력을 한탄하고는 했는데 올해 작품들은 그래도 작가가 대략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되어서 내 기준으로는 잘 된 선정이었다고 생각한다. 가장 이상한 것이 대상작인 ‘옥수수와 나’였는데 친절하게도 작품론이 잘 나와있어서 내가 읽어내지 못한 것은 그 해설을 읽으며 어느 정도 해소가 되었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이 한 권의 책으로 일년치의 단편소설을 다 읽은 느낌으로 사는 내가 과연 이러쿵저러쿵 할 자격이 있는 가 싶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잘 모를 때가 가장 솔직하게 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며 이 책을 읽은 소감을 적었다. 올해만큼은 이상 문학상이 그렇게 이상하지 않고 평이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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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작가 지망생들은 년초 신춘문예 당선작 발표를 기다리겠지만, 그에 못지 않게 독자가 기다리는 건 누가 이상 문학상을 받느냐가 아닐까 싶다. 2012년에도 어김없이 이상 문학상 수상작이 결정되었고, 김영하의 <옥수수와 나>가 대상을 수상하였다. 어떤 문학상이든 모두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건 대상작일 것이다. 나 역시 그러했다. 한데 언제부턴가 대상이 아닌 우수상에 더 관심이 간다. 한국문학의 미래를 짊어질 이들이 바로 그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이란, 어쩌면 다음 수상 작가를 미리 만나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 이유로 올해 이상 문학상 작품집에서 먼저 읽은 소설은 조해진의 <유리>와 김숨의 <국수>였다. <유리>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녀는 오래전, 유리로만 이루어진 도시에서 산 적이 있다.’ p. 266 유리로만 이루어진 도시를 상상하자니, 눈의 여왕 같은 순정 만화가 떠올랐지만 소설에서 유리는 상처의 또 다른 말이었다. 조해진은 아주 작은 힘에도 쉽게 부서지고 깨져는 유리의 성질을 상처에 비유한다. 지방 대학에서 강의를 맡고 있는 주인공은 어린 시절 집단 폭행을 당한 상처를 안고 산다. 상처는 잠재의식 속에서 그녀를 짓누른다. 유리에 찔리고 밟혀 난 상처에서 스스로 벗어나려고 하지만 쉽지 않다.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뒤엉킨 유리들 쪽으로 다가간다. 여자아이만이 그녀를 알아보고 그녀 쪽으로 손을 뻗으려 하고 있다.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세 명의 남자아이들이 뒤를 돌아본 순간, 그녀는 온 힘을 다해 벽돌을 내리친다. 영문도 모른 채 벽돌을 맞은 연약한 유리들은 신음 한번 제대로 내지르지 못하고 순식간에 깨진다. 부서진다. 가루가 된다. 이미 형체를 잃고 조각났는데도 단박에 사라지지 않고 질리게도 꿈틀거리는 파편들을 짓밟고 선 채 천천히 여자아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도망가서도, 포기해서도 안 된다. 단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벽돌을 휘둘러야만 이 장면 속의 여자아이는 완벽하게 망각될 수 있을 것이다.’ p. 290
과거 누군가에 손을 내밀었지만 아무도 그 손을 잡아주지 않았기에 그 폭력의 기억으로부터 자신을 구해낼 수 있는 이는 오직 그녀 자신 뿐이었던 것이다. 상처를 준 이도, 상처를 받은 그녀 자신도 모두 유리가 되어 처참하게 부서지고 가루가 되어 사라지기를 바라는 간절함에, 읽는 이도 어느덧 유리에 베인 통증을 느끼고 만다.
말기 암 진단을 받고 아무 것도 먹을 수 없는 계모가 있는 친정을 찾아 국수를 만든 딸의 이야기인 김숨의 <국수>는 밀가루로 국수를 만드는 아주 단순한 과정을 통해 새어머니에 대한 화해와 애정에 대해 말한다. 그러니까 이 소설에는 맨 처음 밀가루로 국수 반죽을 하는 과정부터 국수를 삶아 낸 모습까지 나온다는 말이다. 어떤 한 과정도 건너 띄지 않고 모든 과정을 아주 섬세하게 다룬다.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계모가 될 수밖에 없었던 여자와 결혼 후 아이가 생기지 않아 오랜 시간을 고통 속에서 보낸 여자의 내밀한 감정들이 그 과정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차마 말하지 못한 말들이, 밀가루 덩어리에서 국수 가락이 되듯 조금씩 늘어난다. ‘반죽 덩어리가 웬만한 얼굴만 해서일까요. 국숫발을 뽑기 위한 반죽이 아니라, 그 어떤 형상을 빚기 위한 반죽만 같아요. 조몰락조몰락 아무 형상이라도. 반죽으로 그 어떤 형상을 빚는다면 당신의 얼굴이 아닐까요.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 등 다양하고 상반되는 감정들이 뒤섞여 그 어떤 감정도 좀처럼 읽히지 않는 체념적이고 단순해진 얼굴…… 반죽을 그대로 놔두기만 해도 당신의 얼굴을 똑닮은 형상을 띨 것만 같아요. 그러니까 반죽이 저 스스로 조금씩, 조금씩 당신의 얼굴 형상을 띠어갈 것만 같아요.’ p. 245
차오르는 슬픔을 담담히, 쌓여 있던 아픔을 차분하게 풀어 놓는, 참으로 아름다운 소설이다. 이제, 수상작을 이야기할 시간이다. 자신을 옥수수라고 생각하는 소설가가 주인공인 김영하의 <옥수수와 나>는 무척 재미있다. 전처인 편집자, 미국에서 성공하여 출판사를 인수한 사장, 계약금만 받고 소설을 쓰지 못하는 주인공을 통해 소설가로서 갖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 글쓰기에 대한 작가의 고충을 엿볼 수 있다. 동시에, 자본과 문학이 상충하는 시대에 대해 깊이 생각할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작가라고 자기가 쓴 책의 내용을 전부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독자 역시 잊어버리거나 엉뚱하게 기억한다. 따라서 작가와 독자가 만나서 책 이야기를 하다보면 언제나 다소 뜨악한 분위기로 흘러가게 된다.(중략) 이제 나는 그런 일에 별로 개의치 않는다. 독자가 어떻게 기억하고 있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p. 27~28
조현의 <그 순간 너와 나는>, 최제훈의 <미루의 초상화>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전개와 함께 몽환적인 분위기로 독특한 소설이다. 이국적인 느낌이 강한 함정임의 <저녁 식사가 끝난 뒤>, 소외된 현대인의 고독한 자화상을 마주할 수 있는 김경욱의 <스프레이>와 하성란의 <오후,가로지르다>도 나쁘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을 만나는 일은 즐겁다. 해서 2013년 이상 문학상 수상작은 누가 될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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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와 나 ㅡ 김영하 오래동안 자신이 옥수수라 생각하던 남자가 스스로 옥수수가 아니 란 생각을 받아들이고 정신병원에서 귀가조치가 되었는데 , 며칠 되 지 않아 헐래벌떡 다시 찾아와 한단 말이 '닭들이 자꾸 쫓아다닙니다.' 의사는 '선생님은 옥수수가 아닌 사람이잖습니까?!'하니 남자의 말 '저는 그걸 알지만 닭들은 모르잖습니까!!' 란다.....슬라보예 지젝이 즐겨쓰는 유럽식 농담이라는데 어째 나는 신을 보며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있습니다' 라며 간절히 무지의 사람들을 향해 구원 을 바라던 이의 목소리를 동시에 듣는다 . "나는 알죠..다만 그들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 " 그렇지만 정말 나는 알까? 아는 걸까 ...! 철학하는 친구와 카페하는친구가 있는 글 속 작 가인 박만수 씨의 이야기를 읽자니 , 정작 자신이 빠진 딜레마가 자 신도 발담그고 있으나 미쳐 모르는 상황의 이면이란 기분에 빠지는 건 나만 그런게 아닐거다 . 이혼남인 박작가는 전처가 일하는 출판사의 계약금을 받곤 글을 못 써 원고를 넘기라는 강압을 듣고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자릴 피하지 만 별수없이 며칠 후엔 그 출판사 사장과 한자리에 앉아있게 되고 그 의 왕팬이라며 그간 저작한 모든 책을 들고와 싸인을 해달란 말에 기 꺼우나 한편으로 이 작자가 나의 전 부인과 그렇고 그런 사일거란 의 심에 자기가 글을 써 잘되면 이들을 배불리게 되는셈이라며 어떻게 든 피할 궁리만하다 결국 말이 씨가 된 것처럼 미국의 차이나타운 같 은 (?)브라운 스톤 의 고색창연하게 낡은 아파트로 입주해 글을 쓰게 되는데 그 것이 상상의 일인지 , 우화적인 방법으로 작가의 꿈을 깨는 현실속 일인지 알 수없게 되고 말았다는 이야기 ... 자신은 퍽 괜찮은 글을 썼다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온통 옥수수가 아니란 외침만 써댔다 는 이야기로 들려서 퍽 이 조롱 같은 말에 클클대며 웃은 시간 . 김영하 작가는 개그를 아는 작가임에 분명하다 . 개그콘서트를 인문 콘서트보다 잘 할 거란 생각은 내 착각일까 ...? 애초에 일제강점기의 곡예단 얘길 대충 지어 전처에게 이런 스토릴 구성중이라 떠드는게 아니었는데 ...곡예단 이야긴 쓰지 않았지만 결 국자신이 곡예단 같은 시간을 살고 있었을 뿐이란 말도 같이 느끼는 건 나도 닭을 피할 수 없는 옥수수인 모양여서 그런가 ? 하게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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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내가 마지막으로 구입한 이상문학상 작품집이다... 예전에는 자주 이 책들을 구입했었는데... 어느 해 부터인가 점점 구입을 하지 않게 되고... 결국 이 책이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구입한지 거기 일 년이 되어서야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금 예전에 느꼈던 문학에 대한 감동을 찾을 수가 있었다.
이 책은 2012년도 이상문학상 작품집이다. 대상은 김영하 작가이다. 생소한 이름이었다. 작가 소개란을 읽고서야 오래 전에 내가 읽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책의 저자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책까지 다시 꺼내어 읽게 되었다.
대상 수상작인 '옥수수와 나'라는 작품은 예전의 저자의 작품처럼 몽상적이고 비현실적이었지만... 예전과 같은 파괴적이거나 날카로움은 없었다. 한층 더 세련되어지고 부드러워졌지만, 평범한 세상을 향한 야유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수상작가에게는 조금 미안한 이야기지만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충격적으로 읽은 소설은 다른 소설이었다.
조현 작가의 그 순간 너와 나는 이란 작품이었다. 거이 젊은 날의 김영하 작가를 보는 듯한 날카로움과 반전, 완벽에 가까운 플롯으로 구성된 작품이었다. 소설 결말에서는 등줄기가 섬짓한 느낌까지 들기도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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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옥수수와 나'.. 2012년 제36회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
작품의 1장이 잊혀지질 않았다. 순간적으로 피식, 실소를 머금게 만들기도 했던 소설의 시작이 작품을 읽어가는 내내 머리에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머리 한구석에서는 의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우화적 요소가 덧붙여진 환상적인 모티프는 소설 속 이야기의 맨 앞에 배치되어 있다.
한 정신병원에 철석같이 스스로를 옥수수라 믿는 남자가 있었다. 오랜 치료와 상담을 통해 자신이 옥수수가 아니라는 것을 겨우 납득한 이 환자는 의사의 판단에 따라 귀가 조치되었다. 그러나 며칠 되지도 않아 혼비백산 병원으로 되돌아왔다. 닭들이 나를 자꾸 쫓아다닙니다. 무서워 죽겠습니다. 의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안심시켰다. 선생님은 옥수수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거, 이제 그거 아시잖아요? 환자는 말했다. 글쎄, 저야 알지요. 하지만 닭들은 그걸 모르잖아요?
'나'라는 화자는 자신이 옥수수가 아닌데도 닭들이 자기를 옥수수라고 쫓아오는 망상에 시달린다. 여기서 '나'의 직업은 소설가로, 출판사에 다니는 이혼한 전처로부터 원고 독촉을 받는다. 월 스트리트 출신의 출판사 사장은 '나'에게 자신의 미국 아파트를 빌려주며 그곳에서 집필 작업을 하라고 권하고, '나'는 미국에서 그 사장의 부인과 육체적 관계를 맺게 된다. 결국 현장에서 사장에게 들킨 '나'는 사장으로부터 약봉지를 전해받고 그것을 삼키자마자 자신이 옥수수가 되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마지막. 같은 화자의 이야기였으니 당연하겠지만, 처음 시작의 황당한 이야기는 마지막에 다시금 봉인을 푼다. 두렵다. 너무도 두렵다. ..마침내 아득한 의식의 안개를 뚫고 하나의 문장이 서서히 형체를 드러낸다. 나는 그 문장을 소리내어 읽는다. 나는 옥수수가 아니다. 나는 옥수수가 아니다. 나는 옥수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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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 사이에 있는 이야기 역시 꽤나 흥미로웠다. 소설가인 '나'. 물론 그게 '김영하' 본인이 아니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작품을 읽는 동안 그의 얼굴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소설가의 소설에 대한, 소설쓰기에 대한, 책을 출간하는 편집자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인간이 추구하고 있는 육체적, 물질적 욕망이 삶의 진정성을 파괴하고 있는 현실을 환상적 기법으로 서사화하고 있는 작품이라 소개되는 이 소설은 조금 독특하게 구성되어 있다. 뜬금없이 독자를 키득거리게 만들었던 작품의 시작은 그다지 별 의미가 없는 짤막한 대사들의 나열로 이루어져있는 본격적인 소설 속 이야기로 이어진다. 하지만 의미가 없기에 지루하거나 산만하지 않고, 오히려 그 덕분에 꽤나 속도감 있게 휘리릭 읽힌다. 작가가 말하고 싶은게 무엇인지 좀처럼 알아차리기엔 까다롭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있어 계속해서 읽어가게 되는, 김영하 식 소설의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것들의 관계는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과거에는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는 존재였지만 현재는 그럴 수 없은, 혹은 그래서는 안되는 존재로 변화했다는 것. 이러한 관계의 틀에 끼워넣을 수 있는 건 소설가인 '나'를 중심으로 맺어진 모든 관계에 적용된다. 과거에는 부부였지만 현재는 이혼한 엑스와이프 수지, 과거에는 데뷔작의 영관 이후 열세 편의 책을 낸 인정받았지만 현재는 계약금만 받고 원고를 안넘긴 필자의 관계인 출판사, 과거에는 자신의 모든 책 초판을 소장하고 있는 팬이었지만 현재는 그의 작품을 이윤이 발생하는 무엇으로 대하는 출판사 사장, 과거에는 수지가 만나는 남자에 대한 자신의 의심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였지만 현재는 자신의 전처가 만나는 남자가 되어버인 '철학'.
소설가 김영하는 이러한 관계와 작품의 시작에 등장하는 소설가 '나'의 착각을 대비시킨다. '나'가 자신이 옥수수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더라도, 그걸 모르는 닭들이 그걸 알기 전까지는 '나'가 살아가는 세계와 그가 맺어가는 관계의 변화는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쉽게 드러낸다. 그래서 '나는 옥수수가 아니다' 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 확신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자의로 이루어지지 않은 삶의 서글픔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또한 작가의 수상소감과 이 작품의 이야기가 묘하게 겹쳐진다는 생각을 했다. 소설가라고 불리는 김영하가 고민했던 무엇이 소설가 '나'를 통해 형상화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고민들을 뛰어넘을 수 있게 만들어준 것이 바로 자신의 작품들이고, 격려해주는 동료들이라는 그의 소감은.. 그래서 당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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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나쁜 버릇'.. 문학적 자서전
칠순의 김영하. 그리고 변해버린 시대. 문학적 자서전이라는 '나쁜 버릇'은 1968년생 소설가 김영하가 맞이할 2038년 1월 10일을 배경으로 진행되는 작품이다. 교정 담당관 이우리나의 조사로 이야기의 창작이 금지된 시대, 계속해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그를 교정하기 위한 349호 면담실이 공간적인 배경이다. 24년 후. 요즘은 24년 이상의 나이차이를 극복하고 부부가 되기도 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데 그가 묘사하는 2038년의 세계는 창작을 인정하지 않는 시대로 변모해 있다. 창작을 불필요한 낭비로, 이해할 수 없는 글로, 영혼들을 타락시키는 마약과 같은 것으로 인식하는 등장인물은 무척이나 낯설다.
그 필요를 간단하게 설득할 수가 없는, 이 지상의 몇 안 되는 지적 산물입니다. 라고 주장하는 소설가 김영하와 국가 경제와 국민 복지에 도대체 문학이 무슨 역할을 했습니까? 라고 묻는 조사관 이우리나의 대립은, 이야기를 이야기로 즐기지 못하고 현실성만을 추구하는 현재.. 점차 어떤 계기나 목적이 있어야만 책을 읽는 지금 우리들의 세태가, 어쩌면 멀지 않은 미래에 이런 부자연스러운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될 수도 있다는.. 두려운 메시지를 담고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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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임 '저녁식사가 끝난 뒤'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광장으로 가는 길'이 당선되어 등단.
P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P선생과 인연이 있는 몇 명이 순남 씨 집에서 저녁식사를 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작품. 더이상 쓰지 않게 된 '전직 소설가'인 순남 씨가 손님들을 초대하는 날 저녁 식사를 위해 궤에서 은촛대를 꺼내면서 시작되는 이 작품은 너무 빨라져 버린 시대에 어쩌면 한없이 오랫동안 머리에서 구상한 것들을 느리게 이야기로 풀어내는 소설가라는 직업을 가진 그녀가 기다리다가, 놓쳐버린 소설쓰기에 대한 시각을 풀어내고 있다. 모두 당신처럼 기다리다 놓친 거라고 생각하지 않소? 그리고 기다리다 놓치기도 하는 거요. 그게 무엇이든.. 난 그게 더 나을 때도 있다고 생각해요. 라는 남편의 한마디가, 왠지 짠하다. ..........................................................................................................................................
김경욱 '스프레이' 1993년 작가세계 신인상에 중편 '아웃사이더'가 당선되어 등단. 한국일보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수상.
109호로 배달된 택배를 709호에 사는 내가 잘못 들고 오면서부터 사건이 벌어지는 이 작품은.. 언제나 날 감탄하게 만드는 작가 김경욱의 단편이다. 작년에 역시 이상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던 그는 의도치 않았던 한 번의 실수가 가져온 큰 파장을, 그가 받아들이는 혼란스러움으로 이야기에 녹여내고 있다. 작가는 단순한 일상에서 벌어진 실수, 별 의미없어 보이는 작은 행동들이 욕망과 결합해 우연하게 연결되면서 우연이 가져오는 결과로 인해 다시금 혼자만의 세계로 숨어들어야 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우연한' 과정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2010년 세계문학상 수상작인 임성순의 '컨설턴트'의 발상과 묘하게 겹쳐진다. ..........................................................................................................................................
하성란 '오후, 가로지르다' 199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풀'이 당선되어 등단. 동인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이수문학상, 오영수문학상, 현대문학상 수상.
'큐비클'이란 소재를 인상적으로 풀어내고 있는 작품. 큐비클이란 칸막이 용도의 자재를 총칭하는 말로 파티션에 비해 프라이버시를 지키는데 좀더 큰 효과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저자는 현대인들의 직업 공간을 분리하는 일상적인 소재에 타인과의 소통과 교감을 단절시킨다는 의미를 부여하고 그로 인해 폐쇄적이 되어가는 현대인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 타인의 어떤 행위가 자신과 맞딱뜨리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막막한 삶의 행태를 묘사한다. ..........................................................................................................................................
김숨 '국수' 1997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느림에 대하여', 1998년 문학동네 신인상에 '중세의 시간'이 각각 당선되어 등단. 2006년 대산창작기금 수혜.
이 작품은 밀가루 반죽에서부터 한 그릇의 국수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한 여자의 고백에 의해 서정성 깊게 들려준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주인공이 자신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역시 아이를 낳지 못해 쫓겨나 자신의 집에 재취로 들어온 새어머니에게 국수를 끓여주는 이 이야기는 치밀함과 밀도가 돋보인다. 대상 작품과 끝까지 경합을 벌였다는 김숨의 '국수'는 꽤나 단순한 서사로 이루어져 있다. 밀가루를 반죽하는 순간부터 한 그릇의 국수가 만들어지기 까지의 과정이 전부인 서사의 흐름은 국수 한 그릇이 완성되기까지 함께 흘러가는 한 여인의 삶으로 그 흐름을 유지한다.
특별한 긴장감이나 속도감 없이 그저 담담하면서 때로는 격정적으로 풀어내고 있는 한 여인의 속내가 그 흐름의 빈틈을 메우며 삶의 무게를 유지하고 있는 이 작품은 계모와 의붓딸이라는 섞일 수 없는 관계가 한그릇의 국수 안에 오롯이 담기게 되는, 상호 이해의 과정을 국숫발을 끊어내는 다른 의미를 통해 묘사하고 있다. ..........................................................................................................................................
조해진 '유리' 200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2010년 대산창작기금 수혜.
어렸을 때 성폭행을 당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주인공 한유리, 그녀는 그 옛날 자신이 살았던 세계를 유리로 만들어진 세상으로 비유하며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상처입은 한 인간만이 보고 느낄 수 있는 세상의 붕괴. 선택이 아닌 그저 주어진 시간을 견딜 수 없어 삶을 걸어가는 사람이 바라보는 세계가 작은 충돌로 인해 깨지고 부서지는 유리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조금은 아프게 다가온다. 세상을 밀폐된 유리알 속 세계에 내가 아닌 나로 살아가는 그녀의 마음을 조금은 위로해주고 싶다가도, 어쩌면 그런 생각을 하는 누구나 실체없는 고통을 마음에 품고 유리처럼 위태한 삶을 살아가는게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
최제훈 '미루의 초상화' 2007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2011년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
작가는 미루라는 여자와 그 여자의 초상화를 그린 남자의 이야기를 두 가지 시점으로 들려준다. 화가인 남자에게 자신을 그려달라 말한 미루는 결국 그림 속으로 들어가버리고 그 후 그 남자가 그리는 그림은 모두 미루의 초상화로 변해버린다. 꽤 혼란스러운 이야기다. 남자와 화가의 시점 역시 교차되면서 진희와 미루가 묘하게 겹쳐지기도 하면서 이야기 역시도 다시 읽으면 뭔가 다른 이야기가 될 것 같은, 몽환적인 느낌이 계속해서 전해진다. ..........................................................................................................................................
조현 '그 순간 너와 나는' 200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종이냅킨에 대한 우아한 철학'이 당선되어 등단.
이 작품은 무당집 딸 '미설'과 '나'의 이야기다. 어머니의 신기를 물려받아 미래가 보이는 미설과 미설의 이야기를 믿고 운명을 바꾸려 결심하는 '나'’가 그려내는 신비한 이야기가 읽는 내내 재미를 불러일으킨다. 이야기의 전개는 독특하다. 1980년대 왕십리에서 성장한 소년과 소녀가 그 과정 속에 숨겨져 있는 어떤 '의미'를 30년이란 삶 속에서 찾아가는 과정은 의외의 분위기로 진행된다. 읽기에는 다소 어렵다. 갑작스러운 시점들과 시간적인 배경의 변화는 작품 안의 묘한 분위기에 빠져드는 걸 약간은 방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살아남아야 생을 바꿀 수 있다는 마지막 메시지는, 차분하게 놓여 있다. ..........................................................................................................................................
김영하 작가의 '그림자를 판 사나이'라는 자선대표작이 함께 수록되어 있기는 한데.. 이는 소설집 '오빠가 돌아왔다'에 수록되었던 작품이라서 따로 남겨두지는 않았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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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혔다. 어떤 작품이 수상을 했는가 못했는가에 대해서는 개의치 않았다. 내게 이 책은 2011년 우리나라를 읽는 방편이었으니까. 해마다 이맘 때쯤 이상문학상 수상집을 읽으면서 더러 만족스러워하고 더러 불만을 느끼고는 했는데, 이번에는 '만족' 쪽이다. 읽는 내내 첫인상이 그랬다.
하나같이 서글픈 주인공들. 청춘이든 아니든 살아가는 일이 고단한 사람들. 물론 사는 일에 좋은 일만 있다면, 하는 일마다 잘되기만 한다면 좋기야 하겠지만 현실은 절대 그럴 수 없는 노릇이고, 또 기본적으로 결핍의 속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문학으로서는 그렇게 좋기만 한 일들을 다루기가 힘들 것이다. 고통은 부각시키면 줄어들까 더 커질까, 답을 모르겠다.
수상작품도 읽고 수상평도 읽고 수상소감도 읽어 보았는데, 내가 작품을 통해 읽어낸 것보다 더 많은 정보를 보면서, 사람들은 참 복잡하게도 사는구나 생각도 했다. 단순한 것은, 단순한 생각은, 단순한 삶은, 죄가 되는 걸까, 책을 읽으면서 좀 무안해졌다. 내가, 내 삶이 너무도 평이하구나, 평이해서 민망하구나, 다른 사람을 이렇다저렇다 나무랄 자격은 없겠구나....
소설가들이, 나아가 청춘을 보내고 있는 우리의 소중한 사람들이 지금보다 조금 더 살맛 나는 세상에서 살았으면 좋겠다. 그들에게 스스로 만들어 나가라고 부추기에는 이제 부끄럽다. 우리 세대가 잘못한 부분이 의도했던 그러하지 않았든 계속해서 드러나고 있고, 그로 인한 곤란함은 고스란히 젊은 사람들의 짐으로 얹히고 있는 탓이다. 이 책 한 권을 사 읽고, 이 책에 실린 작가들의 책을 한 권씩 사 읽으면, 용서받을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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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얼마 전에 아는 분과 차 한 잔 하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어쩌다보니 이상 문학상 작품집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학교를 다닐 때 참 좋아했던 책이라, 매해 모아서 책장에 고이 꽂아두었다고. 일년에 한 권, 나이를 한 살 씩 먹어갈 수록 늘어나는 책 권수를 바라보는 기분은 어땠을까? 그때 물어볼 수 없었지만, 짐작이 가지 않는 건 아니다. 나 역시 그렇게 쌓여가는 책이 있고, 잡지가 있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그 수집은 몇 해 전에 흐지부지해졌다고 한다. 일에 쫓기고 생활에 바쁘다보니 그리하였을까? 아니면 내가 그동안 읽어왔던 소설들과 다른 색과 형태를 지닌 소설들이 등장했기 때문에 관심이 시들해져버린 것일까? 그 역시 물어볼 수 없었다. 몹시 꺼내는 어려운 질문이 있지 않은가. 그 질문이 그 당시 그 상황에서 그러하였다. 왠지 그 질문을 던지면 분위기가 쓸쓸해질 것만 같았달까. 그렇게 이상 문학상 작품집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어서일까. 올해 읽는 이 작품집의 여운이 평소와는 달랐던 것 같다. 책을 읽는 동안, 십년이 지난 후에도 나는 이상 문학상 작품집을 읽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고, 그때가 되면 지금과 또 어떻게 다른 소설이 등장할까 궁금하기도 했었고, 십년 전의 이 작품집에 있는 소설들이 읽고 싶어지기도 했으니까. 그렇게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이 책이 조금 특별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한 권의 책으로 여러 개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건 역시 멋진 일이지 않은가 싶다. 거기다 그 이야기들이 모두 각자의 색깔을 지니고 있고, 각자 독특한 소재와 감성으로 무장하고 있다면 더 그렇지 않겠는가. 이 책이 그랬었다. 각각의 이야기를 읽으며 그때마다 그 이야기에 각각의 모습으로 매료되었던 것 같다. 대상 수상작인 '옥수수와 나'는 재미있었다. 작가가 그리는 작가의 삶에 호기심을 느꼈고, 작가의 삶이란 이런 모습일까 슬핏 궁금해지기도 했다. 전부는 아니겠지만 비슷한 일부가 존재하지 않을까 싶긴한데... 아무튼 그 남자가 꿈을 꾸고, 옥수수가 되고, 닭에게 쫓기는 것만큼 이 소설 속의 작가의 삶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책을 덮고 이 소설이 어땠더라 잠들이 전에 잠깐 생각해보았을 때 작가도 자신의 작품을 전부 기억하지 못한다... 등등의 소소한 작가로서 살아가는 일상의 편린들이 떠올랐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것만 재미있었던 건 아니다. 대상이 아니더라도 소설 하나 하나를 읽으며 무척 흥미로웠다. 소설들에게도 1등, 2등 같은 게 따라붙었다는 게 섭섭해졌을 정도로 그 소설들을 빠져들어서 읽었던 것 같다. '스프레이'는 다른 사람이 배송받는 물건들을 뜯어보기로 결심한 한 남자가 겪게 되는 일을 그리고 있다. 타인의 택배물을 탐하지 말라는 교훈을 얻었다면 억지겠지만, 타인의 택배물이 궁금해지는 그 순간을 포착해서 쓰여진 이 소설을 읽으며 일상에서 지나치는 수많은 것들이 소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만들어 주었던 것 같다. '오후, 가로지르다'는 작은 공간 큐비클에 갇힌 사람의 이야기였는데,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답답함을 느꼈었다. 마치 좁은 공간에 몸을 구겨 넣은 것처럼. 큐비클의 생태학을 읽은 듯 한 기분이 들었다. '국수'는 국수를 매개로 자신과 자신의 새엄마의 삶을 되돌아보는 한 여자의 이야기였다. 국수에 얽힌 그 특별한 사연을 읽으며 이상하게도 국수가 먹고 싶지는 않았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그처럼 의미있는 음식이 있는 것일까에 대해 이 소설을 읽으며 생각해보았었다.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의 위안을 얻을 그런 음식 말이다. 이상 문학상 작품집은 이전에도 그랬듯이 내년에도 읽을 것이고, 그 다음 해에도 읽게 될 것 같다. 십년 후에는 어떨까? 다 읽고나서 이 책을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모았다던 이에게 선물할 생각이다. 그 선물을 계기로 다시 책장에 이상문학상 작품집이 다시 나란히 줄을 서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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