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앞의 5장까지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 에피쿠로스) 읽을만한 책이다. 책의 나머지 뒷부분은 글쓴이의 설교를 듣는 듯하다. 가장 아쉬운 점은 칸트에서 그쳤다는 점. 왜 거기서 그쳐야 하는가? 그리고 다소 아우슈비츠의 일화를 무려 3페이지에 걸쳐 쓴 대목. 칸트를 빌어 글쓴이의 심정을 토로하고 싶었던 것인가? 가장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대목은... "선을 지향하는 자는 결국 신을 추구하게 된다. 인간 자신과 세계의 유한함에 절망한 선한 영혼은 신이라는 '참된 의미의 절대자'를 만나게 된다." 라는 부분... 이렇게 고쳐쓰면 어떨까? "선을 지향하는 자는 결국 회의에 빠지게 된다. 인간 자신과 세계의 유한함에 눈뜬 인간은 자신을 속이지 않기 위해 신이라는 '비약'에 빠지는 것을 거부하고 불완전한 세상에 남기를 선택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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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책은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을 읽는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나에게 이 책은 내가 소속되어 있는 <독서 클럽>을 통해 거의 '반 강제로' 읽게 된 책이다. 특히, 독서 클럽의 리더되는 분이 이 책의 글쓴이인 [김상봉] 선생님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는데 사실 젊은이의 호기로써 과연 얼마나 대단한 분이길래 이렇게 칭찬을 하실까하는 생각도 있었다. 결국 책을 읽게 된 경로로 거의 '반 강제적'이었고 또 이 책의 글쓴이에 대한 호승심도 있어서 굉장히 전투적이고 비판적으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은 [호모 에티쿠스], 즉 윤리적 인간이란 제목을 가지고 서양 철학사를 통해 나타난 [윤리학]의 흐름을 잘 소개하고 있다. 특히 이 책이 원래 강의 내용이었던 것을 묶은 것이라서 일반적인 철학서적과 달리 구어체로 쓰여져 있어 비교적 쉽게 접근이 가능하였다. 앞서서 읽은 칸트 철학에 대한 책에 비하면 하늘과 땅 차이로 이해하기에 별 무리가 없었다. 먼저 이 책은 모든 철학의 시작인 소크라테스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소크라테스는 과연 '좋은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 우리가 평소 '좋은 것'에 대해 대충 알고는 있지만 정확하게 알고 있지는 못한다. 이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답은 쾌락이 좋은 것이 아니라 영혼, 정신의 온전함이 좋은 것이며 이는 쾌락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나온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은 악은 오직 선에 기생해서만 악일 수 있으며 인간의 역사가 아무리 절망적인 것처럼 보여도 계속되는 것은 선과 정의불씨가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즉 이는 탁월함(Arete)의 윤리학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데 이것이 그리스 문명, 서양 문명의 힘이며 이에 비해 우리나라에는 탁월함에 매혹되기보다는 질투하고 시기하는데 익숙하다고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야말로 모든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축구하는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주장하는 현실주의자였다. 특히 그는 욕망을 채우는 것 또한 바람직한 일 다만 질서와 통일을 부여하는 일이 중요하며 여러가지 정신의 탁월함(행복) 중 과조적 삶 속에서 의 행복, 즉 정신의 활동의 순수한 사유와 관조의 활동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결국 그에게 있어서 정념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자연에 어긋나고 다만 우리가 정념과 어떤 식으로 관계맺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이에 '중용'(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것)을 강조하였는데 이런 중용의 길을 가기위한 도덕적 판단력을 가르켜 프로네시스(실천적 지혜)라고 부름으로서 일상의 삶이 도덕적 반성의 현장임을 강조하였다.
이제 유명한 스토아 윤리학과 에피쿠로스 윤리학이 소개된다. 스토아 윤리학은 개인과 전체가 충돌할 때 언제나 전체의 편을 드는 철학이며 전체가 먼저 있고 부분은 오직 전체의 지체로서만 존재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전체의 힘 앞에서 무기력하게 굴복할 수 밖에 없는 개인의 정신적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결국 스토아 윤리학은 행복한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은 오직 정신의 덕이므로 비이성적인 정념의 지배에서 벗어날 것은 요구하였으며 결국 정념 없는 상태 '아파테이아'를 추구하라는 것으로 결론 내릴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에리쿠로스 윤리학은 개인의 편을 들었던 철학으로 스토아 철학의 정반대편에 위치하였다. 즉, 세상의 일 따위는 잊어버리고 자기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것을 권유하는 은둔자를 위한 철학이 되고 말았다. 이는 서로 고통을 주지도 받지도 아는 것을 추구하며 결국 쾌락주의는 개인주의의 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무조건 쾌락만을 추구하지는 않았는데 어떤 일이 보다 순수하고 지속적인 쾌락을 얻는데 이바지한다면 그것은 바람직한 것임에 비해 그 자체로서는 쾌락을 주는 일이라도 그것이 순수하고 지속적인 쾌락을 손상시키고 도리어 한때의 코락보다 더 큰 고통을 낳는다면 그것을 피해야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즉 고통도 불안도 없는 영혼의 절대적 평온함(아타락시아)를 추구할 것을 요구한 철학이었다.
이제 종교적 관점에서 살펴본 윤리학의 대표주자로 아우구스티누스를 소개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이전의 고대 철학자들은 원칙적으로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행복을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행복에 이르는 길은 인간의 이성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는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참된 행복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모든 합리적 설명을 초월하는 근원적 비약으로서의 종교를 강조하였다. 이어서 스피노자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선악의 개념을 객관적이고 존재론적인 범주로 보기보다는 인간중심적이고 주관적으로 이해하였다. 이는 그의 철학이 근재성을 띈다는 것을 알려주는데 근대는 모든 것이 인간적 관점에서 이해되기 시작한 시대이므로 그의 철학으로부터 근대적 철학이 사작된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한편 흄으로부터 '나'가 철학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이렇게 '나'가 전면에 등장함으로써 근대를 가리켜 주관주의 혹은 반성의 시대라고 특징짓게 되었다. 고대적 윤리학은 객관주의적 윤리학이며 이성 중심의 윤리학인데 비해 18세기부터 더이상 도덕의 문제를 객관적 존재나 이성의 힘을 통해 이해하고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도덕은 어떤 당위에 관계되어 있으며 도덕의 본질 역시 '나'속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특히 그는 도덕적 능력을 이성능력과 구별하였으며 이성을 통한 정념의 지배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이성은 선도 악도 분별하지 못하는 가치중립적 능력에 불과하였다. 결국 흄은 동정심이랴말로 도덕성의 참된 근거라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동정심을 강조한 것은 새로이 등장하는 시민사회에서 사람들이 점점 더 고립되고 자기중심적이 되어가는 것에 대한 경고로서 등장하게 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칸트가 등장하는데 글쓴이가 칸트를 전공한 사람이기도 해서 자그만치 3장을 칸트에 할애하고 있다. 칸트 윤리학의 역사적 의의는 그것이 처음으로 도덕적 강제의 본질적 의미를 윤리학의 중심에 놓았다는 데 있었다. 그는 도덕을 행복의 원리를 통해 설명하려는 모든 시도를 비판하였으며 도덕은 그 자체로 숭고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칸트는 이런 모든 시도를 배척함으로써 도덕의 순수성을 확보하였으며 동정심은 자동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도덕덕인 가치를 가질 수 없다고 비판하였다. 결국 그는 제한 없이 선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선한 의지>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칸트에 따르면 준칙이 동시에 보편적 법칙이 되기를 네가 바랄 수 있도록 하는 그런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하라고 주장하였다.
비록 맨 마지막 장에 글쓴이의 윤리관이 잘 나타나 있지만 결국 이를 통해 글쓴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선을 추구하되, 내가 추구하는 선에 도취하여 나 자신의 악덕을 잊어버리지 말 것.
내가 행한 크고 작은 악을 늘 기억하여 겸손과 부끄러움을 잃지 말 것.
그리하여 선 때문에 도리어 악덕에 빠지지 않도록, 늘 깨어 있을 것
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밖에 이 책에서 높이 살 점은 외국어를 발음되는 대로 사용한 것이다. 예컨데 파이돈 = 파이드로스, 아테네=아테나이로 적었는데 이는 굉장히 긍정적인 면이다. 원칙적으로 외국어는 발음되는 대로 기록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과거 우리나라가 일본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많은 외국어가 발음과 동떨어지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글쓴이의 이런 노력은 굉장히 높이 평가할 수 있다.
결국 윤리학에 대한 입문서로 이 책의 내용과 구성은 굉장히 성공적이다. 게다가 잘 팔리지도 않는 철학서를 이렇게 출판한 [한길사]에 대해서도 높게 평가하고 싶다. 요새 과연 '선'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한 번 읽어보는 것이 어떨까? 덧붙여 이 책의 글쓴이인 '김상봉'선생에 대해서도 잘 알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이다. 하지만 한가지 충고하자면 이 책의 근본은 '철학' 서적임을 명심하고 도중에 읽다가 어려워도 포기하지 않으면 뭔가 생각할 거리가 남아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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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적 인간의 탄생'이라는 부제를 단 <호모 에티쿠스>는 선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화두로 소크라테스로부터 칸트까지 윤리학의 역사를 되짚어 간다. 그 물음이란 자연 속에 속한 인간이 왜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선을 행하며 살아가야 하는가 라는 것이다.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이 당연시되는 인과적 자연 세계에서 우리가 선을 행해야만 한다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왜'라는 물음을 던지는 것이 자연스럽다.
현재 우리의 삶을 돌이켜 볼 때 '선'이라는 주제는 너무도 생경하다. '선'보다는 '이'나 '욕'이 새로운 보편성을 띠고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조금 진지해 지려 하면 썰렁한 사람이 되고, 또 조금 마음을 늦추기라도 하면 금새 과거의 사람으로 남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윤리나 선은 어떤 장식품으로 전락된 듯 하다. 그러나 이런 부유하는 기표들이 본질에 앞서는 삶일수록 우리의 의식은 깊은 곳에 닿아 있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호모 에티쿠스>의 문제의식은 고맙기까지 하다. 그것이 개론서의 수준을 벗어나 저자의 삶에 대한 나름의 해석을 덧붙이고 있어서 더욱 그러하다. 현 상황에 대한 예를 통해 우리에게 선에 대한 노력이 왜 절실하지를 실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생각은 플라톤과 아우구스티누스에 이어 칸트에 와서 전면적으로 드러난다. 이는 저자가 책의 서론에서 밝힌 수단으로서의 선을 지양하고, 선 그 자체의 신성함을 깨닫는 것이다. 이는 종교에 대한 바른 자세와도 상통하면서 저자가 궁극적으로 이 책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깨달음이다.
칸트는 동정심도 선의 근원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동정심이란 수동적인 정념의 하나이므로 그 자체가 선에 대한 필요충분조건일 수는 없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그동안 맹목적으로 받아들여져 왔던 칸트의 윤리학 용어들과 마주하게 된다. 고등학교 시절 윤리시간에 접했던 수다한 용어들이 비로소 칸트라는 한 철학자의 정신을 담지한 채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저자는 칸트가 말하는 보편적 합법칙성의 원리나 정언적 명령법이 어떠한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를 평이하면서 친절하게 제시한다. 이런 저자의 미덕은 이 책의 전편을 통해 유지되는 것이다.
칸트에 와서 우리는 선에 대해 '왜'라는 물음이 무의미할 수 있음을 혹은 불가능한 것임을 알게 된다. 아니 그 보다는 왜 칸트가 그런 선을 정초하려 했는지를 통해 한 철학자의 삶에 대한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칸트가 말하는 선이란 자연계 속에 속한 것이 아니다. 어차피 선의 완성은 이 세상 속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칸트는 선은 자기원인이며 자기목적이라고 규정하고 선을 수단시하는 모든 행위를 선하지 않은 것으로 해석한다. 바로 이 부분에서 우리가 현재 삶 속에서 뼈저리게 느끼게 되는 도덕적 상대주의와 허무주의의 위험을 재음미해 볼 수 있다. 자기원인과 자기목적인 선은 현실 세계에서는 무근거성을 띤 것으로 보여지게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선한 행위의 결과가 자신에게 치명적이며 세상 속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슬퍼하게 된다. 그러나 칸트를 통해 이런 상황은 그 자체로서 자연스러운 선의 한 특성이 된다. 따라서 이제 중요한 것은 그런 선의 본질을 알고, 나 자신이 현실 세계 속에서 어떻게 행위해 나갈 것인가 이다.
적어도 우리는 선의 결과를 통해 선을 규정하는 오류는 범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도덕적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고, 삶을 삶 그 자체로 인식하고 비극적 세계 속에서 자기긍지를 잃지 않으려 힘쓸 것이다. 이 책은 이런 호모 에티쿠스의 탄생을 바래는 마음에서 쓰여진 것이다. 보다 많은 사람이 이러한 인식의 과정에 참여하기를 책을 먼저 읽은 사람으로서 간절히 바랜다.
또한 이 책에서 우리가 저자를 통해 칸트를 만난다면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그의 삶에 대한 깊은 애정이며, 또 우리가 칸트를 통해 저자를 만난다면 그가 자기배반의 역사 속에서 존립하는 우리 사회의 폐부에 얼마나 깊이 그물을 드리울지 하는 기대와 바램도 함께 전해 받게 된다. [인상깊은구절] 모든 비판의 깊이는 이해의 깊이에 다름 아니다. |
| <호모 에티쿠스>는 서양윤리학에 대한 윤리학 개론서라 할 수 있다. 현재 서양철학사만을 놓고 본다면, 램프레히트의 서양철학사, 버틀란트 러셀의 서양철학사 두권, 요한네스 힐쉬베르거의 서양철학사 두권, 코플스톤의 합리론과 영국경험론, 그리스로마철학사, 중세철학사 등이 있고, 우리나라 서양근대철학학회에서 따로 엮어 만든 서양근대철학이 있으나, 윤리학이라는 독립된 학문으로서의 철학사는 부재한 것이 사실이었다. 최근 윤리학 분야에서도 윤리학만을 따로 다룬 윤리학사들이 출간되고 있는데, <호모 에티쿠스>는 그중의 하나이다. 이 책의 저자 김상봉씨는 일간신문을 통해서도 자주 이름을 접한 분이다. 연대 철학과와 대학원을 나온 뒤 독일의 괴팅겐, 프라이부르크, 마인츠 대학에서 서양철학, 서양고전문헌학, 신학을 공부하고 칸트연구로 마인츠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한다. 한국에 돌아와 그리스도신대학대의 종교철학과 교수로 임용되었지만, 학교측의 일방적인 통보로 다른 세명의 교수와 함께 쫓겨나게 되었다. 학계 풍토상 쫓겨난 경우 다른 어느 학교에서도 교수나 강사로 받아주질 않아 사실상 주류 철학계에서는 밀려난 분이시다. 이후 학벌없는 사회 모임을 꾸리고 있으며, 철학자라는 명칭으로보다는 학벌없는 사회 사무총장이라는 이름으로 일간 신문 칼럼란에 자주 오르내리신 분이다. 김상봉씨는 지금 소개하고 있는 <호모에티쿠스>뿐만이 아니라 그 외에도 철학에 관한 많은 책을 썼다. <나르시스의 꿈>,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자기의식과 존재사유> 등이 그러하고, 역시 학벌반대모임 사무총장 답게 <세 학교 이야기>라는 책도 썼다. 그의 저서들은 순수 학술적인 부분에 기반을 두고 있다기 보다는 철학의 언저리를 다루고 있다고 보는 편이 맞겠다. 그러나 그 언저리가 철학에서 많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으나 자기사유를 통해 재생산된 철학이라는 의미에서 언저리다. <호모에티쿠스> 역시 마찬가지다. 단순히 서양윤리학사의 이론적인 부분만을 엮어서 낸 것이 아니라 자기사유를 통해 우리의 현실과 연관하여 재생산된 윤리학사라고 볼 수 있다. 이 책의 중간중간 윤리학 이론 사이에 우리네 과거에서 현재까지를 아우르는 현실이 녹아들어 있다는 것은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꼈을 것이다. 이 책은 서양윤리학의 시초인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 이어,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 중세의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스피노자, 흄, 칸트에 이르기까지 윤리학의 핵심 철학자들을 뽑아서 엮었다. 그중에서도 칸트에 대해서는 세 장에 걸쳐 할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김상봉 자신이 칸트윤리학에 심취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해보게 한다. 다만 이 책에서 조금 아쉬운 부분은 홉스, 버틀러, 헤겔, 벤담과 밀, 니체, 그리고 이후의 윤리학에 대한 부분이 빠져있다는 점이다. 서양철학사를 모르는 초보자가 보기에도 쉽게 설명해서 부담없이 읽을 수 있지만, 이 책의 부족한 부분들을 다른 책에서 보충해야한다는 단점이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그 부족한 부분은 서광사에서 나온 <서양윤리학사>을 추천해주고 싶다. |
| 철학은 왜하나? 대학을 다니면서도 도대체 철학과는 왜 가는 걸까? 이렇게 생각했던 내 자신이 얼마나 초라해 보이던지..... 이책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청소년기의 가치관 정립은 일생을 살아가면서 정말 아주 큰 도움이 된다고 말입니다. 그시절이야 수많은 고민들로 밤도 지새운다는데..저도 한때 그런 고민들을 했었지만 고민의 친구가 이미 세상을 떠난 수많은 척학자들이지는 못했습니다. 지금 와서 약간의 후회가 되는것은 이러한 철학자들의 생각들을 그저 아주 지겨운 윤리로만 배우게 되었던 나의 고등학교 시절 윤리라는 교과서가 원망 스러울 따름입니다. 입시의 그늘에서 이렇게 중요한 삶의 이야기들을 느끼지 못하고 그저 어떻게 하면 잘 외울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야 했던 우리나라의 입시제도가 안타까울 따릅입니다. 내가 후에 아이를 낳아 기른다면 이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그 느낌들을 느끼게 해주고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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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의 문제란 의지의 자기정당화의 문제일 뿐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오직 내가 나 자신한테 떳떳할 수 있느냐는 것뿐입니다. 도덕이란 누군가를 손가락질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오직 나 자신일 뿐입니다. p.293 자연의 법칙(이를테면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에 연연하지 않고 도덕 법칙 그 자체의 원리만을 따르는 ‘선한 의지’가 가능할까? 칸트에 따르면 선한 의지가 생겨나고 행위로 옮겨지는 것은 선한 의지 자신에 대한 존경때문이란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순수한 선’으로서 ‘최상의 선’이란 이념으로 존재할 뿐이다. 아무리 자기 자신에게만 떳떳하면 된다고 위로를 해도 자기 자신에게만 떳떳한 도덕적 행위란 있을 수 없다. 당대의 자연 법칙은 선형적이고 결정론적이었다. 억압하는 강자가 있고 핍박당하는 약자가 있다. 약자가 아무리 선한 의지를 가져도 그 현실이 뒤바뀌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필연적인 자연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약자는 ‘선한 의지’를 포기해야 하는가? 이런 비극적 세계를 인식한 칸트는 행복을 얻기 위한 수단이나 정념의 반영에 불과하던 도덕을 그 자체가 목적인 피안의 세계로 이전시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직 자연의 법칙에 독립적인 강고한 의지로서의 도덕 법칙만이 ‘피범벅이 된 이빨과 발톱red in claws and teeth’의 자연 속에서 인간을 구원할 수 있으리라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칸트가 만약 도킨스나 해밀턴과 같이 자연 법칙의 인과적 맥락에 도덕을 끼워 넣으려는 시도를 알았다면 어떠했을까? 도덕이 유전자의 보존과 발전에 종속된 수단이며 이타성이야말로 진화론의 부산물에 불과하다면 그나마 세계가 덜 비극적으로 느껴지지 않았을까? 그러나 진화론(이기적 유전자론)이 설명하는 도덕은 일부분 타당성이 있을 뿐 완전하지는 않다. 이타성이 진화론의 부산물이라고 했다면 우리는 과거에 비해 더 ‘도덕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칸트가 도덕을 성찰했던 시대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도덕이 자동적으로 행복을 가져다 주지는 못한다. 칸트의 설명을 빌리면 어쨌든 도덕의 법칙이 자연의 법칙을 초월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리라. 무엇의 수단이 되지 않는 그 자체가 목적인 보편적 선을 칸트는 ‘최상의 선’이라고 불렀다. 그 무엇의 수단이 아닌 자체가 목적인 선만이 도덕적 가치를 가진다고 보았기에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이 ‘최고의 선’이 아닌 ‘최상의 선’이란 칸트의 말은 여전히 현세적 서글픔을 위무하는 위력이 있다. 그것은 또한 목적한 결과물에 의해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교사에게 여전히 부족함 없는 실천적 강령이 된다. 우리는 처음부터 현실세계에 대해 절망하는 법을, 기대하지 않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다시 말해 참으로 선하게 살기 위해 우리는 추수에 대한 희망 없이 선의 씨앗을 뿌리는 법을, 희망 없이 인간을 사랑하는 법을 그리고 보상에 대한 기대 없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다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런 비극적 세계관 속에서도 언제나 기뻐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p.3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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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도대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갔단 말인가? 원숭이, 처음이 그것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변형이 되었단 말인가? 자신에 대해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래서 많은 책 중에서 김상봉 님의 철학이야기를 고르게 되었다. 낯선 용어들로 나를 사로잡았다. 단순히, 돌을 모아 불을 집히는 인간이 아닌, 생각하며 함께 살기 위해 공동체 생활을 했던 인간이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여러학자들이 인간에 대해 정의를 내렸고, 그 속에서 우리가 원하는 이상향, 쾌락등 모두 자세히 설명되 있다. 단순한 육체적인 쾌락 이 아닌 정신적인 쾌락을 추구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간은 사회를 살아가며 많은 것을 배워가는 알게 되었다. [인상깊은구절] 영혼이 자기보다 못한것을 사랑할때 그는 짧은 쾌락을 얻겠지만, 결국 그에게 남은 것은 깊은 좌절과 고통입니다. 왜냐면 영혼이 사랑하는 대상이 켤고 영속적으로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