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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높은 산중턱에도 아파트가 즐비하다. 조금의 공간이라도 허락되면 건물을 지어야 한닫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건 아닐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일종의 난개발의 결과물인지 주소 체계도 뒤죽박죽이다. 이를 바로잡겠다며 도로명 주소를 도입, 내년부터는 전면 시행한다는데 과연 제대로 정착할지 걱정이 앞선다. 균형을 고려하고 사회 전체를 내다 볼 여유가 없었다. 짧은 시간 동안 고도의 성장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래도 가난으로부터 벗어난다는 사실에 만족했고 내 집이 생긴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뒤늦게 산만한 도시의 모습을 보고 후회해 보지만 소용이 없다. 우리의 도시는 정신이 없다. 우리가 꿈꾸는 도시는 이런 모습이 분명 아니었다. 높은 건물도 좋지만 어느 정도의 녹지가 확보되길 바랐다. 유럽의 많은 국가들처럼 개성 넘치면서도 시간의 흐름이 묻어나는 멋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러나 잠깐의 여유를 풍성하게 만들어줄 공공의 공간이 있으면 좋을 거라는 생각은 실현되지 못했다. 숱한 갈등이 도시화의 과정에서 침묵을 강요 받았다. 보다 많은 것을 가진 자들에게 일종이 몰아주기가 이루어지는 동안 대다수는 그나마 지녔던 것들도 놓칠 수밖에 없었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재개발과 뉴타운 등의 굵직굵직한 사안으로 인한 갈등은 잠잠해질 겨를이 없다. 무엇보다도 돈 문제가 얽혀 있다 보니 모두가 쉬이 포기치 못한다. 이해관계를 가진 어느 누구도 탓할 수 없다. 그들이 양보하기 이전에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려는 절차부터가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도시공간의 사회적 공적 활용을 위해 노력한 사회주의자들과 환경주의자들이 투기성 도시개발을 방지하기 위해 상대 진영의 입장을 수용해가면서 상호 협력한 결과’ 오늘날의 프랑스 파리가 가능했다고 저자는 보았다. 파리는 우리의 서울보다 면적도 적고 인구수도 적지만 세계에서 행사하는 영향력은 상당하다. 그들의 역사와 문화가 우리와 다르다는 점은 물론 고려되어야 한다. 안타깝지만 우리에겐 사회주의자들과 환경주의자들이 성장하고 제 목소리를 낼 토양이 존재치 않았다. 정부의 정책에 반하는 움직임을 보이기가 무섭게 색깔논쟁에 의해 희생되는 일도 잦았다. 그래도 갈등을 다루는 그들의 방식을, 우리 사회에 사회주의자들과 환경주의자들이 존재치 아니 한다 하여도, 우리로선 받아들여야만 한다. 양보와 협력 없이 이루어지는 도시화는 끔찍하기 때문이다. 프랑스 파리의 이상적인 예와 너무도 대비됐던 것이 우리의 도시화였고 중국의 도시화였다. 두 국가 모두 제국주의 시대에 적잖은 희생을 감수해야만 했다. 타국에 문을 여는 것부터가 주체적이지 못했다. 그 이후의 과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주인이 되어야 할 이들은 아무런 목소리도 낼 수 없었고, 혹 힘을 발휘하려 들었을지라도 철저히 무시당했을 것이다. 그들만을 위한 개발이었고 그들만을 위한 성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공간과 우리의 공간이 필요에 의해 나뉘었다. 편의 시설들이 들어왔지만 결국 이는 군수물자의 이동과 제 나라 사람들의 편익을 위한 것이었다. 시설의 설치를 위한 과정에서 이루어진 보상 역시 씁쓸했다.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도시화를 양국의 도시는 경험했다. 문제는 그 때 이루어진 도시화가 오늘날 심화된 도시화의 기본 뿌리라는 점이다. 싹 다 지우고 새로이 시작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도시는 도화지와는 달랐다.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잃은 이들에게 우리만의 도시화를 시도할 테니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고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갈등의 증폭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운명일지도 모른다. 오늘날의 도시화는 많이 세련되어 졌다. 과거처럼 폭력적인 양상을 더는 띠지 않는다. 그렇지만 제 생활 터전을 잃고 자꾸만 서울 외곽 혹은 서울 밖으로 밀려나는 사람들로부터 과거와는 또 다른 형태의, 도시화가 지닌 폭력성을 엿본다. 왜 나는 서울에 거주할 수 없는가를 차마 묻지 못하는 이들의 마음 속 상처를 충분히 보듬지 아니 한다면 우리의 도시화는 다시금 갈등 증폭의 기제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