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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나만 쉬었다. 10월 9일 한글날, 휴일이었는데. 쉬라고 해서 쉬었는데 마음이 불편 한 것 까지는 아니지만 시계를 자꾸 보게 되었다. 지금쯤이면 이걸 하고 있겠네. 이 시간이면 끝났겠네 하는 생각을 가끔 했다. 어묵국을 끓였는데 어묵 보다 무가 많았다. 무 다 건져 먹기. 점심의 미션이었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좋아하는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하는 게임에 눈길이 갔다. 깔아지나, 깔아져서 몇 시간 동안 게임을 했다. 너무 재밌어서 앱을 지웠다가(심지어 탈퇴 신청까지 했다) 다시 깔아서 저녁 먹고 또 했다. 게임 한 번 당 하트 하나가 필요했다. 하트가 필요한 게임이라니. 사랑을 마구 구걸하게 만들다니. 정신 차리고 윤성희의 『첫 문장』을 읽었다. 읽는 내내 나의 하루가 별 볼일 없는 건 아니었구나 위로가 되었다. 하루에 두 번 밥 먹기. 보일러 틀어서 샤워 하기. 자기 전 마음에 드는 책 골라 읽기. 귀여운 캐릭터의 유혹에 빠져 게임 하기. 윤성희의 소설 속 인물 같은 하루를 살아 내고 윤성희의 책을 읽는 것으로 나만 쉰 휴일을 마무리 했다. 『첫 문장』은 '어린 시절, 나는 네 번이나 죽을 뻔 했다'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작가의 말의 첫 문장은 '첫 문장은 중요하지 않다'이다. 두 번째, 세 번째 문장 역시 중요하지 않다고 밝힌다. 중요한 건 문장이 아니다. 인물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살아 오면서 네 번의 죽음을 맞을 뻔 했던 남자의 이야기는 어제의 나의 하루처럼 지나고 보니 별 것 아니고 대단한 것도 아니게 느껴진다. 그게 다 시간의 힘이다. 죽을 뻔 했던 그 순간에는 세상이 꺼지고 무너질 것 같은 감정이지만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보면 수긍이 된다. 이해가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유복자로 태어난 남자는 어머니의 재혼으로 성이 다른 형과 누나 사이에서 자란다. 눈이 먼 할머니는 성이 다른 손자를 배척하지 않는다. 달도 가는 세상에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라디오 뉴스를 듣는 할머니 곁에서 막걸리를 얻어 마시며 유년을 통과 한다. 어린 시절, 나는 네 번이나 죽을 뻔했다. 그중 두 번은 자살 기도라는 오해를 받았고, 한 번은 '행운의 소년들'이라는 제목으로 지역신문에 실렸다. 내가 죽으려고 다리에서 뛰어내렸다는 소문이 돌았을 때 나는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거짓말을 하려던 게 아니었다고. 그땐 어렸다고. 단지 겁이 났을 뿐이라고. 하지만 세월이 흐른 후, 아내가 떠나간 집에서 낮잠을 자던 토요일 오후에, 나는 내가 그 오해를 방패 삼아 사춘기 시절을 통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윤성희, 『첫 문장』中에서) 네 번이나 죽을 뻔 했던 남자는 살아 남아 결혼 하고 아이도 낳는다. 그 자신은 네 번이아 죽음을 피했는데 열일곱의 딸은 그러지 못했다. 소설은 딸을 잃고 아내가 떠난 집에서 혼자 남은 남자의 일상을 그려낸다. 일요일에 회사에 출근해 자리를 정리하고 경비아저씨에게 받은 사탕 두 알을 받는다. 남자는 회사 회장님의 자서전을 대신 써준 적도 있었다. 회장님이 요구하는 자서전의 마지막 문장에 단어를 고치기도 했다. 조카의 결혼식에 갔다가 문구점에서 산 수첩에 '나'로 시작하는 첫 문장을 적기 위해 고심한다. 집으로 바로 가지 않고 버스 터미널에서 가을을 보낸다. 전국의 버스 터미널은 셀 수 없이 많고 사람들은 다양하고 언제라도 표를 사서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다. 남자는 딸아이가 살아 있었으면 썼을 열일곱의 자서전의 문장들을 고르느라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딸과 함께 지냈던 추억을 떠올리면서도 그날 딸이 마지막으로 신은 양말의 무늬를 기억해 내지 못해 운다. 윤성희의 소설 속 인물들은 타인의 취향에 관대하다. 왜 그런 걸 좋아하는지 따져 묻지 않고 긍정해 준다. 예의 없는 말버릇에도 양말을 뒤집어 벗는 행동에도 웃어주고 받아 준다. 남자는 딸이 가진 특이한 말투와 행동을 나무라지 않았다. 농담을 하면 농담으로 받아주고 원하는 게 있으면 전부 들어주려고 했다. 그 자신은 네 번이나 죽음을 피해 놓고 딸에게는 운을 물려 주지 않았다. 남자는 딸의 자서전을 대신 쓰는 것으로 슬픔을 받아들인다. 우리는 모두 첫 문장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살아오는 내내 첫 문장을 쓰기 위해 노력했다. 첫 문장을 쓰기 위해 밥을 먹고 책을 읽고 시계를 보고 게임을 한다. 첫 문장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첫 문장이 필요하다는 말로 들린다. 대체로 삶이란 그런 것이다. 중요하지 않지만 필요하다. 게임 한 번당 하트 하나는 중요하지 않지만 필요하다. 어제는 나만 쉬었다로 시작하는 첫 문장을 쓰기 위해 오늘이 필요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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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문장은 힘들다. 어떻게 써야할지 모르겠다. 좋은 글을 쓰고 싶지만, 첫 문장부터 막힌다. 그래서 첫 문장을 맛깔스럽게 쓰는 사람이 부럽다. 자서전을 쓸 일은 없겠지만, 가끔은 생각한다. 내가 나를 표현할 때, 첫 문장은 어떻게 쓸까? 간결하면서도 나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문장. 그 문장은 뭘까
죽을 뻔한 고비를 4번이나 넘긴 남자. 자살을 시도했거나 신변을 비관해서 이런 일이 생긴 건 아니다. 의도치 않은 상황이 남자를 그렇게 죽음에서 삶으로 돌려놓았다. 그래서였을까? 남자는 죽음은 그냥 빗겨 가는 것이지 자신과는 상관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열일곱 딸 아이가 죽음을 맞이하고 남자는 죽음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딸 아이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아내는 처형의 집으로 가버렸고, 남자는 회사에서 정리해고 당했다. 남자는 터미널을 돌며 노숙자 아닌 노숙 생활을 하며 수첩에 끼적이게 된다. 만약 딸아이라면 첫 문장을 뭐라고 썼을까
30년 후, 나는 나를 뭐라고 부를까? 어떤 첫 문장으로 시작할까? 그런 상상을 하다가 주변을 둘러보면 지금 이곳이 현실인지 과거인지 미래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아내는 자서전의 첫 문장을 뭐라 적을까? 그리고, 딸은, 만약 살아 있다면 딸은 뭐라고 했을까? 어떤 첫 문장을 생각해냈을까? (58)
자신은 죽음을 비켜 갔지만, 딸은 그렇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는 자서전의 첫 문장에 집착했던 것일까? 자신이 아니라 딸의 자서전 첫 문장. 아직 한참은 더 살았어야 할 딸아이. 자신처럼 죽음이 비켜 갔어야 했는데, 왜 딸에게는 그런 기운이 없었던 것인지. 어느 곳보다 사람들이 활발하게 지나다니는 터미널. 그곳에서 남자는 사람들의 삶의 기운을 느끼고 싶었나보다. 노숙자도 아니면서 노숙자처럼 사람들을 관찰하고 말을 듣고 생활하니까.
부모가 되어 보니 아이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 키울 때는 힘들어서 죽을 것 같았는데, 이젠 아이들이 없다는 걸 상상하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 같은 게 바로 아이들이다. 남자의 마음을, 공허한 그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 감히 남자의 마음을 다 안다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그런 일을 겪어보지 않았으니까. 쓸쓸하고 외로운 소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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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 무엇이든지 처음이 중요하다. 시작한다는 것...소설은 한 남자의 과거를 회상하는 내용에서 시작한다. 어릴 적 다리에 떨어졌는데 이를 자살로 오해한 가족과 동네 사람들. 하지만,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아마 이런 오해가 의식하지 못한 진실이 아니었을까? 친부는 자살로 죽고 재혼한 엄마로 인해 배다른 형제까지 있지만 늘 관심 밖이었다. 그랬는데 자살이라는 오해로 새아버지의 성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이번 뿐만 아니라 초등학교, 고등학교 등 무려 네 번이나 죽음을 겪게 된다. 물론, 죽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수첩 맨 앞장에 딸의 이름을 적었다. 그리고 한 장을 넘겼다. 딸은, 이라고 썼다가 두 줄을 그었다. 어릴 적 정연은, 이라고 썼다가 또 지웠다. 그리고 한참을 생각하다 이렇게 적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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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건의 경중, 감정의 근원, 욕망의 정체 따위를 투명하게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 (작품해설 137)
호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크기의 소설, 큰 기대는 안했다. 편혜영의 소설에 이어 두 번째 만나는 핀 시리즈인데 그냥 빠져들었고 일순 모든 게 끝나 있었다. 이야기꾼 윤성희 작가를 잊고 있다가 되찾았다. 작가는 나와 또래인데 왜 한참 위로 인식되었던 걸까. 구성진 입담과 해탈한 정서가 그리 작용되었나 보다.
남자, 여자 나눠 운운하는 게 우습지만 남성 화자를 매끈하게 잘 그린다. 추석 연휴를 앞두고 ‘가족’이라는 단어가 무겁게 느껴질 수 있는데 오히려 우리에게 가족이 있음을 굉장히 애틋하게 여기도록 이끈다. 이 세상에 과연 다복한 가정이 있을까 싶을 때, 청천벽력 같은 생이별을 겪고 깨져버린 가족을 계속 말하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따스해진다. 그녀만의 필력과 작가정신이 스민 결과인 듯싶다.
읽는 사이사이 닫아걸고 덮어두었던 마음을 열어 환기시킨다. ‘만약에 말야’ 지금 여기 없는 딸과 곁을 떠난 아내가 함께 한다면 주인공의 시외버스 투어와 노숙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삶의 ‘목적지’, 즉 돌아갈 집을 잃은 그가 버스터미널을 떠도는 행위는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의 충동적인 여정을 보는데 행색이 남루하다는 이유로, 특히 대합실에서 구걸하거나 노숙의 기미를 가진 사람을 매섭게 대했던 내 태도가 떠올라 부끄러웠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사연이 죄다 있다. 윤 작가는 언제나 그런 후미진 곳까지 햇빛을 골고루 비춘다.
슬픔을 말하는데도 청량하다. 지긋지긋한 가족을 시력(도수)을 낮춰 바라보게 한다. 일일이 문제 삼고 피곤하게 굴지 말자고. 지금 함께하는 평화로운 일상이 뼈저리게 그리울 때가 곧 온다고. 딸과 아내는 그의 삶 밖으로 나갔지만 그는 그들과의 관계를 꺼뜨리지 않고 연장한다. 아내와 딸이었다면 뭐라고 했을지, 혼자서도 불러내 묻는다.
주인공은 가족을 잃었을 즈음 회사에서도 자리를 뺀다. 그의 빈자리에 관심 갖는 사람은 누나뿐이다. 그의 가정이 와해된 상태에서 역설적이게도 조카는 가정을 일군다. 노숙을 하던 어느 날 그는 둘째형을 떠올린다. 혼자가 된 엄마의 재가로 맺어진 인연들이지만 할머니와 누나의 넉넉한 품이 있어 주인공은 엇나가지 않는다. 어두운 가정사를 뒤로 하고, 몇 번의 구사일생을 겪고 일궈낸 가정이 딸의 죽음으로 하루아침에 붕괴돼 버린다.
저녁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마트에서 산 물건들이 배달되었다. 달걀을 입혀 소시지를 부치고, 바싹하게 만두를 구워 맥주를 마셨다. 한 캔. 그리고 또 한 캔. 맥주를 마시며 아내가 꾸었다는 그 꿈이 내게로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35)
자취를 감췄던 감각과 욕구와 충동이 책장을 넘길수록 서서히 깨어났다.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이 없고 술도 안 마시는 내게도 침샘을 폭발시키는 장면이 여럿 있었다. 화려하지 않고 소박한 음식들로 하루를 이어갈 기운을 얻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딸을 잃은 아버지가 큰조카의 쌍둥이들을 위해 문구점으로 뛰어갈 때 나도 동참하고 싶었다.
비통한 시간 속에서도 그는 자신이 가진 것을 주변과 나눈다. 회사에서 맨몸으로 나올 때도 막내 사원의 저금통을 채우고, 구걸하는 할아버지에게도 지폐를 건넨다. 빈 지갑을 ‘불쌍하다’고 타령해 딸과 같이 아내에게 용돈을 더 받아낸 일화는 슬픔 가운데 미소를 허락한다. ‘쫄딱 젖어서 쫄딱 망했지’ ‘목이 메어 목을 매다’ 식의 허술한 말장난을 혼자하며, 문방구에서 산 천 원짜리 분홍색 노트를 꺼내 드는 화자는 아재 캐릭터를 새로이 쓴다. 딸의 목소리로 노트를 채워나가는 아버지. 이외에도 훌쩍 떠나고 싶은 충동이 제일 누르기 힘들다.
삶이 무너지는 대로 두면서 동시에 시간과 분투하며 움직이는 주인공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괜찮은 척 일상을 유지하려 들지 않고, 그렇다고 방문을 닫고 유폐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다. 길 위를 떠돌며 맹렬하게 기억을 붙든다. 걸음을 디딜 때마다 추억이 살아난다. 어릴 때 불면증을 앓던 딸의 상상력과 감정이입을 애써 호출해 기록한다. 어쩌면 그가 밤마다 천장에 쏘는 손권총은 그 자리에서 죽고 싶은, 새날을 맞이하고 싶지 않는 바람을 담은 행위인지도 모른다. 하루를 산 게 아니라 죽은.
주인공과 함께 이야기의 시작점을 맴돈 독자는 딸을 비롯해 사라진 생명과 흔적을 눈여겨보며 모든 생명은 종국에는 꺼지게 되어있음을 확인한다. 다만 누군가의 회상과 이야기로 남을 수 있음을, 그 쓸쓸하고 허무해 새털 같은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그의 손에 든 열기구 모양의 펜(터키에서 딸이 사온 ‘기념품’)으로, 사랑했으나 떠나보낸 존재에 대해 무어라 써나갈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어두운 욕망인 타나토스에 맞선 삶을 향한 에로스로서의 글쓰기가 빛을 낼 때이다. 주인공의 글로, 봉우리로 남은 딸의 생이 비로소 꽃으로 피어난다.
달리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정확한 문장을 완성해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어떤 문장들을 상상하고 적어보는 시간만이 우리를 살게 한다면. (작품해설 1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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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러지 땡
내가 무엇을 할 때, 언제 행복( 감)을 감각하는지 깜박하곤 한다. 오롯한 에너지 씀과 공들임을 알아서일까, 알면서도 거리를 둘 때가 있다. 이동진 평론가의 말도 그랬듯 행복과 해피니스happiness 사이 어감 차이가 난다. 다행이고 복된 마음 幸福, 영국식 고독과 우울:멜랑콜리 뺀 미국식 명랑 밝음:치어풀 간극에서 멈칫 할 때면 나는 프랑스어 bonheur 행복:좋은 마음을 꺼내든다. 불행은 영어는 un-을 붙이나 불어는 mal- 이라 병균처럼 전염성이 붙는다. 누가 그랬다. 당신이 원하는 착한 사람은 본디 좋은 사람을 가리킨다고. 좋은 마음과 좋은 사람, 가까이 더 가까이 정준희의 해시티비 속 책 코너, 서유미의 서재를 시청했다. 이번 소설가를 포함해 세대가 주는 편안한 매트리스가 있나보다. 알지 안락의 눈짓. 이웃집 언니 같은 이야기꾼 윤성희 작가, 성별을 논할 만큼 알려지지 않았다니 좀 충격이다. 핀 시리즈의 출현과 후담이 곁들어진다. 책 표지나 디자인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던 내가 좀 달라진 것 같다. 공산주의도 아니고(저스트 키딩~) 물성을 지닌 책을 공공재로 여겼을까. 눈치나 힌트를 줘야 겨우 알아봄에도 가급적 보려 한다. 고백하자면 독서 토론을 표지 얘기로 시작하면 애먼 소리한다며 눈에서 총알 발사하던 나였다. 이상하다. 출간 당시 ‘첫 문장’을 읽었음에도 기억이 아예 없다. 주인공이 김근식이라고? 불호하는 교수이자 정치인과 동명이라 두고두고 기억나겠다. 딸을 잃은 아빠의 심경이라는 복원 얘기를 들으니 고통스러워 통으로 덜어냈구나 싶다. 기억 삭제. 우산을 쓰고 오래 걸으며 든 생각이 어디 김근식만 네 번의 죽을 고비가 있었을까 였다. 보통은 다음 시간으로 이행하며 별일 아니도록 넘길 뿐 아닌가. 멈춰선 어떤 시간에서야 꽂힌 화살촉이 보여 뒤늦게 뽑아내거나 그마저 못하고 끝나는 것이 삶의 총체성(질)이 아닐까 한다. 이런 생각들 때문인지 김만권 정치철학자의 말이 내말처럼 포개졌다. 반환점을 돌아 계속 되기를 묵묵히 기원하게 된다. 앞이 아닌 돌아 걷기도 진행형의 삶이라는 응원 같다. 중강도 운동 아니라 효과 좀 떨어지면 어때, 살 가치worth living 같이 부여해본다. 아들 등신(딸바보와 페어링이랭)이 된 만권 박사의 말에서 조승연 교육 커뮤니케이터의 말이 재생된다. 애아빠가 되니 비로소 세상의 폭력과 안전에 민감해진다고 했다. 이게 다 호르몬 분비 변화라지만. 추가로 주간채권의 3세 남아를 둔 변호사의 4세 고시반이 드드득 박힌다. 귀한 생명체들이니 누구처럼 저소득층 ‘아이’와 고소득층 ‘자제’ 갈라치기 언어관 씌우지 말자. 세비 들어간 정책 광고만 후진 게 아니라 타고난 우월 맹신의 인종주의와 별반 사고 구조가 다르지 않다. 지인이 서울시장을 정치판에서 영구 퇴출해야 한다고 말해 “서울시민이 과연?” 의문이었는데 3일 구 구라미터/ 현 진실미터에 따르면 가능할 듯싶다. 결혼도 출산도 별도의 용기가 필요한 세상이다. 살아본 사람은 얘기하지, 혼자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책임 응함responsibilty이 다른 가족들에게 분산돼 무게가 경량되는 측면도 있다고.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일구고 자녀를 둥지에서 내보냄을 거친 후일담이다. 절믄 사람들에게 통할지, 무엇보다 머나먼 정산의 의미를 견딜지 선택 여부는 알 수 없다. * ‘해시티비’보다 먼저 본 장동선의 궁금한 뇌 방송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다. 보면서도 내용이 좋고 흥미가 샘솟아 <스위트 스팟>을 담았다. 디저트만 팔리는 상권과 맞물리는 듯해 웃프다. 세상에나 요지경 속에서도 좋은 책은 계속 나온다. 84년부터 한국을 지켜본 집필자는 한국인의 개인주의는 여타 다른 나라와 다르다고 분석한다. 팀으로서 연결됨connection as a team에서 위안을 얻는 정서가 깔려 있다. 낭만적 사상 전체 홀whole을 팀으로 전환해 시장 경제 개념을 살렸다. 꿈틀대다가 필요시 뭉치고 하늘 높이 펄럭인다. 쓰다보니 응원봉도 베끼더니 깃발은 왜 안 따라하나, 극우 전팔이 매국인들 메롱- - 일본 유학 중에 탄핵 집회에 목소리를 보태고자 바로 날아온 여학생이 생각난다. 헌재도 국회처럼 도서관이 있다는데 신성, 아니 지성의 존엄 영역을 망가뜨리는 산(으로 가는)당 멧돼지 들. 여조에서 보수 과응집과 질문 조항 건드리기 등 아무리 여론전 펼쳐도 투표 선거로 말할 대기 중인 민주 시민들이 많다. 동동 떠올라 뜰채로 걸러낼 내란 선동 세력을, 지나갈 감기 정도로 앓고자 결기한다. 인류학자 저자의 읽기처럼 한국은 문이 닫힌 듯하나 결국 새로운 문을 열 테니 리브 풀리 하자. 한국다움을 말하는 부분은 문화 차이를 솔솔 풍긴다. 한국인은 개인에게 책임을 묻고 사과를 요구한다. 참사에 대해서 국가적 집단 애도 기간을 치른다. 이것이 낯선가본데 우리는 법적 처벌의 공정 공평 정대를 믿는 체계가 아직 아니다. 공적 시스템을 제대로 갖춰보지도, 아니 실행해( 실효성을 맛)보지 못했다. 검찰과 언론과 정치가 권력과 재력 앞에서 한몸으로 붙어 분리 수술이 시급하다. 마지막 판결이 내려지고 원인 규명이 깔끔하게 될 거라는 기대가 소원한 가운데 굴곡지나 지금 하는 중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민주 시스템 구축이나 과거사 청산을 한번도 끝까지 해내지 못했다. 그 역사성에서 울퉁불퉁하게 그 (초행)길을 가게 생겨먹었다. 이것도 관상이 과학, 운명인 셈인가. 물론 누구보다 도둑질을 싫어하는 민족이고 크리에이티브하게 생성해내는데 뛰어나서 미래는 달리 쓸 것이다. 흑마술에 혼탁하나 이채양명주는 그냥 넘기지 않는 민족이다. 가리려 해도 특검 찬성 민심(폭발)이 말해준다. 강유정 의원의 해석처럼 요상한 수식어로 말을 오염하는 무리도 있다. 비소 같은 독극물을 말 배설하여 세상을 뒤엉키게 한다. 애들이나 할 유아적 거짓말과 사후적으로 덕지덕지 붙이는 변명문에 기존 의미가 뒤바뀔 일 없다지만. 공산전체주의 반국가세력이나 경고성/계몽용 계엄이라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공통 상용어로 쓴다. 어느새 멍들고 곪는 공동 감각, 상식이 얄궂어 괘씸하다. 법문 오독과 짜깁기 편집증으로도 모자라, 국어사전이라도 손댈 듯 굴더니 제왕인 줄 착각이 지나치다. 자기 정의 없이 타주는 대로 원샷 (기)술이 술을 부르고 꽐라 되는 배배 꼬인 유사체들이나 혹한다지만. 자석에 들러붙는 핀들 꼭 있다. 고대로 딴데 가져다 음소거하면 좋겠다. 강 대변인은 형용사의 형용모순을 지적했는데 나는 일루전illusion 환상 괴리도 경계하던 정신세계에서, 딜루젼delusion 망상 전염 사태로 홀랑 병리화가 너무나 안타깝다. * 중편소설 ‘첫 문장’의 표현대로 애꾸눈을 다래끼리로 승화하는 해박하고 해학적인 민족, 즉 한국다움Koreanness이 건재한다. 존재함이 드러난 키세스단 우주 시간 유니버스다. 지인짜 케이genuine K를 알아가고 다시 세우는 건축 학 짓기 시간을 치르고 있다. 헌재 인용 후 파면. 말이 좋아 공사 중Under construction이지 앞놈이 싼 똥 치우는 고생길이 열렸다. 그마저 일할 생각에 힘내는, 아니 빛나는 그가 있어 다행이다. ‘첫 문장’ 소설에 대입해서 마수 카오스 궤도 그만 돌고, 어둠 말세에서 빛으로 만세~ 터널 출구 찾게 그놈의 로터리 나와라_오바 주문을 건다. 개인적으로 그냥 책을 읽을 뿐인데 독후 감상을 나누다보면 4인이 2:2 매치가 된다. 세대 차이인지, 성향 차이인지.. 드라마틱한 크게 한방, 극화 발화점을 원하는 부류와 뭔들 자잘한 재미와 일화에 끌리고 의미((이론화 조각발견))를 두는 부류로 나뉜다. 후자는 삼십대 초반의 어리석음까지는 애교스럽게 넘긴다. 뇌리에 박힌 성화같은 인물 하나 있어 정신 없이 살아지는 삶vie, be이라며. 영 포에버! 예술이 기술 독술을 넘어서는 지점이니 와락 허하라. 내 삶과 면밀히 얽히지 않는 한, 국가 존립을 위해하지 않는다면 남의 인생은 그냥 보아 넘긴다. 요건 나중에 찬찬히 말하겠다. 뉴공의 동네사람들( 코너)을 통해 12.3 계엄이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의 소속과 정체?를 수면 위로 올렸다는 지인의 해석이 신박하다. 내심 반가웠는데 3일도 코너를 방송해 놓쳤던 부분을 재고했다. 하물며 그럴진대 우리? 안의 분열과 혼돈은 당연한 빚음 현상이고 감수하고 검토할 부분이 아니겠는가. 낭만주의도, 제국주의도, 종교도 스펙트럼이 넓다. 어떤 부분은 끝에서 끝일 정도다. 통칭하고 묶어 라벨링하는 것을 멈추거나 푸는 작업을 창작이 한다. 겨우 만져지고 눈에 들어오는 폭의 한계(에 갇히지 않게)를 감안토록 이끈다. 다음 책은 정보라의 소설인데 전자의 반응이 쎄하다못해 쌔앵 한다. 그래도 멤버들은 성실히 꼼꼼히 읽고 비판한다는. 난 뭐임도 아니고 걍 뭐잉, 분발하자. 몰라도 분위기 챙김이 우선, 감싸고 보기 오지라퍼 답게 ‘편집자 K’의 서재에서 문화사회학자 김홍중 교수가 추천한 책들을 메모해뒀다. 낯선 이름들이 아니라서 (코로나19 여파?) 이론 번역 번영에 덩달아 신났던 것이다. <해러웨이 선언문>에 반려견 파트가 추가되었다고 하고, 과학공상소설가이자 그 분야 평론가라 할만한 마크 피셔를 곁들여 읽음직하다. 그 외에도 ‘연루됨’Implicated 책 제목이 신랄하다. 이런 책들 어려워하고[녹인 재인용 정도만 앎] 독서력 떨어지는 나를 고려해 꾹 참고 김홍중 교수의 신작만 담았다. 지난 삼년 간 쟁인 책들의 눈총이 서늘해 책칸은 외면 모드이다. 정치 고관여 삼년 만기 제대를 선언했는뎅 샘말대로 누구맘대로! 짝나겠으~ㅎ 샘표 유시민 작가의 ‘질문들’ 클린 버전 + 천신만고 끝에 이재명 하나 건졌다는 백낙청 교수님의 말씀 = 섬유질 텍스처 유연제 >< 고맙쇼 매불쇼>> 옹씩이나 ㅎㅎ 계몽되었다는 피동(형)이 말이 되냐는 지인의 말에 ‘빛으로’ 이동 enlighten(ed) ♡빛의 혁명 성립을 머금었던 1인은, 패러디 참회들에 눈물 훔칩니다. 이런 스톱 더 스틸^^ 바르고 유능한 성과주의로 중진 다선 수박고구마와 낙지 부동, 원로 시나리오 치우고 민주주의 메카 가보자♡이름대로 빛나리 더살롱~ 비커밍 엿. 하다하다 엿팔이 문법 파괴자. 하얗게 잘리거나 녹거나. 거 쫌 Be simple, direct, and not fancy하게 미래를 말하라. 아몰랑2 플랫플랫 징글 헬 법기술자 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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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 일기를 쓰거나, 서평을 쓰거나.. 처음을 여는 글은 언제나 나에겐 힘든 일로 느껴집니다. 어떻게 시작을 할까 하는 고민은 항상 있는 것 같아요. 그동안 살아왔던 내 삶을 돌아보며 자서전을 만약 내가 쓴다면 나는 처음 어떤 문장으로 시작할지 이 책을 보면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첫 문장> 속 주인공은 딸을 위한 문장을 생각합니다. 열일곱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소중한 딸아이를 생각하면서 말이죠.
어린 시절, 네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긴 한 남자가 있습니다. 두 번은 자살 기도라 오해를 받았고, 한 번은 '행운의 소년들'이라는 제목으로 지역신문에 실리기도 했는데요.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투신자살한 아버지로 인해 어머니는 자식 3명이 있는 새아버지와 재혼을 했죠. 두 번이나 죽을 뻔 하자 아버지는 박영무라는 새 이름을 지어 줍니다. 비싼 이름이니 이름값하며 살아야 한다면서 말이죠. 이미 3남매를 둔 아버지와 재혼한 어머니, 그들 속에 제대로 속하지 못했지만 죽을 고비를 넘기고 받은 아버지 성의 이름.. 느낌이 남달랐을 것 같네요. 임신중독증으로 고생했던 아내는 딸이 세상을 떠나고 난 후 처형의 집으로 떠나버렸습니다. 홀로 남겨진 남자는 누나의 초대를 받아 간 조카 결혼식 이후 터미널을 떠돌며 여행을 시작합니다. 큰 조카의 쌍둥이 아이들을 위해 선물을 사러 문방구에 갔다가 구입한 핑크색 다이어리와 함께 말이죠. 터미널을 이리저리 떠돌며 그는 딸을 생각합니다. 열일곱 살의 딸은 어떤 문장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할까 생각하면서요. 직장 생활을 하며 회장의 신년사, 주례사, 거기다 자서전까지 쓴 남자지만 딸아이를 위한 첫 문장은 쉽게 쓸 수가 없네요. 부모를 잃으면 땅에 묻고 자식을 잃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죠.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부모의 심정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평생.. 겪지 않았으면 하는 고통이기에.. 죽음이 네 번이나 비껴갔던 남자 박영무는 가까이에 찾아온 죽음의 그림자를 눈치채지도 못했을 겁니다. 우리가 알 수 없게 조용히 찾아왔을 테니까요. 그렇게 딸에 대한 그리움을 충분히 느끼고, 충분히 아파하고.. 같은 아픔을 가진 아내와 다시 잘 지냈으면 하는 마음으로 책을 덮은 <첫 문장>이었습니다. 도서관 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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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죽을 뻔한 고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횡단보도 앞에서 기절하거나, 부다페스트에서 폭설로 갇히기도 하고, 영국에서 타고 있던 버스에 불이 나기도 하고, 경유하던 도하 공항 근처에 폭탄이 떨어지기도 하고, 바다에서 조류에 휩쓸려 가기도 하고, 암 수술도 받았다. 운이 좋아 늘 누군가가 구해주었는데, 그러고도 종교도 없고 신비주의자도 못 된 것 또한 신기한 일이다.
이 책의 남자는 어린 시절 네 번이나 죽을 뻔했고, 살아남았으니 죽음에 무심해졌다. 행운의 남자라 여겨지기도 하고 결혼을 하고 직장도 다니며 살았는데... 딸이 죽었다. 괴로워하던 아내는 떠나고 남자는 권고사직을 당한 후 노숙자 생활을 한다. 늘 무언가를 적는데, 남자의 글쓰기에는 질문이 하나 있다. 딸이 쓴다면 ‘첫 문장’은 무엇일까.
“딸은, 이라고 썼다가 두 줄을 그었다. 어릴 적 정연은, 이라고 썼다가 또 지웠다. 그리고 한참을 생각하다 이렇게 적었다. ‘나는’ 나는……. (...) 딸이 살아 있다면 어떤 첫 문장을 생각했을까? (...) ‘나는 열일곱 살.’ 딸이라면 그렇게 담백하게 시작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열일곱 살.’ 그렇게 적은 다음 나는 수첩을 덮었다.”
딸, 정연... 아버지인 남자의 글에서 관계와 대상으로 떠오르던 딸은 마치 자신이 쓰는 글인 양 ‘나’가 되었다. 왜 눈물이 날까. 내가 자기중심성을 벗어나는 일을 힘들어하고, 실은 거의 시도도 하지 않고 살아서인가. 언제나 ‘나’에서 출발해서 그들로 가는 시선에 자그마한 이해와 해석을 달아둘 뿐.
그래서 나는, 무엇을, 어떻게, 언제 결심할 것인가. 출구가 다섯 개나 되는 로터리에 도착한 남자가 잠시 부럽다.
매번 요약도 감상도 못 하고 읽기만 하는 윤성희 작가님의 작품, 이번에도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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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박쥐로 존재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박쥐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고 상상해보려는데 그게 잘 안 돼." 딸을 잃는 느낌은 어떨까? 죽을것 같겠지? 나에게도 딸이 있다. 그것도 둘이나. 그 중 어느 하나를 하늘로 먼저 보낸다는 상상을 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생각조차 하기 싫다. 작품속 남자는 열일곱살 딸을 먼저 보냈다. 아내도 도망을 갔다. 왜 죽었는지, 왜 도망갔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다만 상실 이후에 남자가 겪게 되는 일상을 vj카메라가 따라가듯이 세밀하게 포착해낸다. 인상 깊었던 점은 터미널 순례 부분이다. 중간 이후부터 등장하는 이 장면은 이 소설의 백미다. 한번도 생각해보지못한 기행. 언젠가 나도 꼭 시도해 볼 참이다. 정처없이 도착한 터미널에서 가장빨리 출발하는 버스를 잡아타고, 또 거기에서 몇일 머무르다 가장빨리 떠나는 버스를 타는 방식. 삶의 공간에 그 누구도 나를 기다려주지않고, 나역시 누군가를 찾지 못하는 단절의 영속. 슬픔을 표출할 방법조차 생각하지 못하는 무기력함을 벗어나기 위해 그는 문장들을 만들기 시작한다. 내가 아닌 딸의 생각으로 써내려가는 분홍색노트의 문장들 첫문장. 팟캐스트를 듣다가 윤성희 작가의 목소리로 이 책 마지막 부분을 낭독하는 것을 들었다. 목소리와 책의 분위기는 많이 달랐지만, 윤성희 작가가 삶을 바라보는 시선은 충분히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대놓고 이거다 하지 않아도, 응 그래 그게 뭔지 알아 하는 느낌 말이다. 짧은 분량이었지만, 남자주인공과 나는 서로 잘 아는사이라도 되는냥 공감하고 슬퍼하고 웃었다. 삶의 비애가 묵묵히 묻어나는 소설이다. 충분히 감동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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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살의 어린 딸을 잃은 아버지의 이야기. 어린이날에 읽는 <첫문장>은 뒷맛이 참 시고 아린 소설이었다.
근식의 별거 없는 이력 중에 그래도 독특함을 꼽자면 어린 시절 네 번이나 죽을 뻔한 일이었을 것이다. 다리 위에서 구름 구경을 하다 떨어져 죽을 뻔한 처음엔 고작 아홉살이었는데도 자살이란 오해를 받았다. 새아버지 밑에서, 의붓 형제들과 함께 크는 게 쉬운 일은 아니리라 어른들이 저마다의 오해로 떠들어대는 말에 변명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오해해 주어 좋기도 했던 것 같다. 냇가에서 뱃놀이를 하다 떠내려오는 수박을 끌어 안고 구사일생한 적도 있었다. 중학생 때는 학년이 바뀐 걸 까먹고 2층을 1층이라고 착각해 창 밖으로 뛰어내린 적도 있다. 네 번째로 죽을 뻔 했을 땐 공장에 근무하다 생일 케이크를 사러간 때였다. 운동화 끈이 풀려 잠깐 묶는다고 앉은 사이 코 앞으로 간판이 떨어졌다. 그 후로 취업에서 대학 진학으로 진로를 바꾸었고 아내를 만났고 결혼을 했고 딸을 낳았다. 죽음을 이겨낸 다음의 삶은 꼭 좁은 모퉁이를 비집고 나간 다음처럼 숨통이 트이곤 했다. 그러나 딸의 인생은 그렇지 못했다. 죽음이 빗겨가기만 했던 근수와는 달리 딸은, 아마도, 곧장 죽음을 대면한 모양이다. 단 한번의 미수도 없이. 예스를 답할 땐 캭!!을 노를 답할 땐 개실망!을 외쳐 버릇없다고 엄마한테 혼나던 딸도 버릇없는 딸을 을러 혼내키던 아내도 이제 더는 근식의 곁에 없다. 죽음과 이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걸까? 조카의 결혼식을 치르고 하룻밤 누나집에서 묵고 나온 근식은 계획없이 터미널 여행을 시작한다. 아니 터미널 방황이라고 해야 옳을까. 직장에서 해고되어 시간은 많고 할 일은 없으니까.. 그냥.. 또 그냥.. 누나한테 변명하자면 이런 얘기를 하게 될텐데 근식은 누나의 전화를 받지 않는다. 원주, 횡성, 춘천, 경주, 거제, 통영, 김해, 군산, 부여, 인천, 순천, 여수를 도는 내내 꺼진 휴대폰을 충전하지도 않는다. 쭈욱 연락을 못했으니 가족들은 또다시 동생의 자살을 걱정하고 있을지도. 그러나... 걱정 마세요. 잘 먹는다곤 할 수 없지만 끼니는 거르지 않고 세 끼 챙겨 먹고 있습니다. 잠귀신이 붙은 듯 잠도 많이 자구요. 오며가며 사람들과 얘기도 많이 나눠요. 두 번쯤 아이를 구한 적도 있습니다. 어쩌면 딸의 자서전이 될 글의 첫문장을 찾아낸 것도 같아요. 빙글빙글 출구를 찾지 못한 로타리를 돌고 있지만 지금 이곳은 오거리. 당장 길을 찾지 못한대도 빠져나갈 길이 다섯개는 됩니다. 예전과 다름없이 살아 돌아가겠습니다... 통화가 됐다면 근수는 이렇게 얘기하지 않았을런지. 좋은 날이니까..불행을 상상하고 싶진 않아서.. 오래 비워졌던 집에서 곰팡이가 쓴 냄비를 버리고 냉장고를 비우고 집을 청소하고 휴대폰을 충전하고 김근식을 박근식으로 바꾸는 개명신청서를 접수하고 누나와 매형에게 혼이 나고 그러다 어쩌면 아내와 통화하고 앵두나무를 보러 다시금 터미널로 향할지 모를 근식을 상상하며 책을 덮는다. 김근식을 덮고 박근식으로 시작하는 인생의 첫문장을 써내려갈 남자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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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자살을 시도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평생을 살아간 남자가 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어린 시절, 나는 네 번이나 죽을 뻔했다.'(p.9) 고 시작한다. 이 담담한 문장은 결코 무용담이 아니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어떠한 흥미도 드라마도 끌어내지 못한다. 그는 알맹이가 쏙 빠진 조개껍데기를 늘어 놓듯 무심히 이야기를 계속한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엄마의 뱃속에 있는 동안 밀린 월급을 받으러 갔다가 공장 옥상에서 투신 자살을 했다. 엄마는 평생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았고, 곧 재혼했다. 그에게는 누나와 두 형이 생겼지만 그들은 그를 자전거에 태워주지 않았다. 걸어서 40분이나 가야하는 학교를 혼자서 걸었다. 처음 죽음을 만난 곳이 바로 그 길에 놓인 다리 위였다. 다리 위에 가지런히 운동화를 벗어놨기 때문에 '자살'이란 소문이 돌았지만 그는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단지 다리 위에 앉아 발을 흔들며 놀고 있었을 뿐이었다고. 하지만 데려온 자식이란 사실은 여러 정황들과 융합해 이상한 소문을 만들어냈다. 아버지가 술만 먹으면 그를 혹이라고 부른다는 얘기가, 둘째 형이 학교 운동장에서 그를 밀치며 형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다는 말이. 동네 노인들은 그의 얼굴이 아이답지 않게 음침하다고도 했다. 새 아버지는 사건 이후 그의 손을 잡고 동사무소로 간다. 성을 바꾸려 했지만 법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신 그는 도장집으로 가 자신의 성을 붙인 도장 두 개를 파준다. 그는 이 '오해를 방패삼아 사춘기 시절을 통과했다(p.10).' 그는 나이를 먹고 결혼을 해서 딸을 낳았다. 그리고 그녀는 열일곱살이 되던 해 죽음을 맞는다. 대화가 사라진 부부는 이혼을 했다. 이후 그는 회사에서 권고사직을 당한다. 인생 깊숙이 묻어놨던 죽음의 씨앗이 다시 발아를 시작한다. 그는 조카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원주에 갔다 그 길로 전국 유랑에 나선다. 정해진 목적지도, 이유도 없이 터미널 노숙과 모텔을 전전하며 전국을 떠돈다. 뭔가가 쫓아와 집어 삼키기라도 한다는 듯, 그는 멈추지 않는다. 그는 재직 시절 회장의 자서전을 쓴 적이 있다. 그 경험을 살려 딸의 자서전을 쓴다면 어떤 문장으로 시작할지 고민한다. 처음에 3인칭이었던 문장은 어느 순간 1인칭으로 변한다. 그는 자서전 속의 나(딸)가 되어 딸을 느낀다. 하지만 그 '나'는 정말로 딸을 의미할까? 그는 자신의 이야기로 이 소설을 시작했지만 그건 핵심이 빠진듯한, 귓 속에 들어오지만 이내 흘러가 버리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그는 한 번도 자신의 속마음은 내비치지 않았고, 울지도 웃지도 않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쓸데없는 얘기를 늘어 놨다. 그는 '나'가 되어 자서전을 써보지만 좀처럼 이야기는 흐르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아직도 진짜 '나'의 이야기를 꺼내들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같은 로터리를 빙빙 돌며 해야할 말을 찾는다. 로터리는 오거리였다. '그 말은 빠져나갈 길이 다섯개란 뜻이었다(p.135).' 그러나 그 길은 그가 자신의 어둠을 직시하지 않는 이상, 그가 진짜 자기 얘기를 할 준비가 되지 않는 이상, 절대로 열리지 않을 것이다. <첫 문장>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건지 모를 정도로 겉도는 소설이다. 뚜렷한 줄거리도 없고, 마음을 끄는 문장도 없다. 그러나 남자의 속내를 곰곰히 헤아리다보면 이 알맹이 없이 겉도는 얘기가 더할나위 없이 완벽한 형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작가는 이야기의 이유를 설명하고 싶은 욕구를 참고 또 참아야 했을 것이다. 윤성희는 끝까지 시치미를 뗀채 마지막 문장을 적어 넣는다. 그 인내심이 존경스럽고, 또 존경스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