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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어떤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가? 여러 답변이 있겠지만 지금이 '음모론의 시대'라는 말도 제법 호소력이 있는 답변 가운데 하나다. 지금 음모론의 유령이 세계를 배회하고 있다! 가령 미국의 9·11 테러나 한국의 천안함 사태를 그 나라 정부가 대중을 기만하기 위한 자작극으로 보는 음모론에 우리는 낯설지 않다. 음모론은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불확실성을 매우 싫어하고 항상 어떤 사건의 단일한 원인을 찾는 인지경향에서 기인한다.
영국의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에러너비치는 음모론을 "우연의 일치이거나 의도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은 일이 발생했을 때 그 책임을 계획적인 정부기관의 탓으로 돌리는 것" 또는 "어느 일방의 좀 덜 은밀하고, 좀 덜 복잡한 행동으로 설명했을 때 훨씬 더 무리가 없을 비밀행동의 책임을 다른 일방 탓으로 돌리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일반적으로 음모론 신봉자들은 개인의 마음과 사회전체를 장악하려는 의도를 숨기고 있는 불가사의한 비밀세력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가령 유대인, 제국주의,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바티칸, 군수업체, CIA, 마피아 등과 같이 흑막에 가려진 세력 말이다.
음모론은 이처럼 사건 배후의 파워엘리트의 담합이나 빅브라더의 통제를 미리 설정하고 있다. 음모론을 전파하거나 신봉하는 당사자들은 정부나 미디어, 재벌처럼 진실을 감추는 세력들이 억지로 주입시킨 왜곡된 사실과 새빨간 거짓말을 타파하는 선지자 역할에서 일말의 종교적 도취감을 맛보곤 한다. 국내에서 한때 인기몰이를 한《화폐전쟁》의 대박 행진도 '부자들의 음모'라는 전형적인 음모론 시나리오 덕분이다. 소수의 국제적인 재벌집단이 국제정경질서를 농락하고 있다는 경제 음모론은 유대인이 세계정복을 도모한다는 《시온 장로 의정서》와 마찬가지로 합리적 근거가 부족하고 세계정세를 너무 단순하게 재단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음모론이 일반 대중들에게 잘 통한다는 사실이다.
음모론이 항상 갈등과 충돌을 조장하고 다소 선정적이고 편집증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면 이와는 정반대로 매우 무신경하고 만사태평인 사고방식도 있다. 이른바 상황론(contingency theory)이 그러한데 이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물리나 철학에서 말하는 우연성 이론이나 경영관리학의 정황이론을 말하는 게 아니다. 여기서 상황론은 오직 음모론의 대척점을 이루는 또다른 극단적인 사고방식으로, 음모론이 흔히 상정하는 막후세력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고 세상만사가 제법 잘 돌아가고 있다고 여기는 안이한 사고방식을 가리킨다. 그런데 음모론이든 상황론이든 모두 비이성적이다. 객관적 합리주의의 대명사 '오컴의 면도날'에 입각해 본다면 양자 모두 해롭고 게으르고 미신적이고 대중영합적인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음모론은 상황론보다 더 해롭다. 음모론은 우리의 역사관을 왜곡시켜 결국 현재를 바라보는 관점까지 왜곡시킴으로써 널리 퍼지면 재난으로 이어질 결과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시온 장로 의정서》로 나치즘의 발호와 홀로코스트에 커다란 기여를 한 위작이다. 다시 말해서 날조된 음모론 이야기가 전쟁이나 종족말살의 역사적 비극을 조성하거나 합리화하는 손쉬운 구실이 된다. 이처럼 음모론의 역사에서 한 발짝만 더 나가면 곧바로 광기의 역사로 넘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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