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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만 봐서는 알기 힘들지만, 본 책은 헤겔의 엔치클로페디에 실린 '소논리학'의 번역서이다. 헤겔의 '대논리학'은 몇 년 전 새로운 번역서가 나왔지만 '소논리학'의 번역서는 현재로서는 이것뿐이다. '소논리학'을 한국어로 읽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지만, 그렇다고 이 책을 읽자니 번역의 질이 심히 좋지 않다. (도서출판비에서 새로운 번역이 나온 걸 모르고 있었다. 읽어보진 않았지만 그 책이 아무래도 낫지 않을까 싶다.) 번역이 상당히 오래되었다. 옮긴이 서문에 의하면 6.25 전에 번역해놓았던 것을 전쟁 때 잃어버리고, 20년이 지난 뒤 되찾아 출간했다고 하니 처음 번역으로부터 80년 정도가 지난 셈이다. 물론 오래 전에 번역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번역의 질이 나쁘리란 법은 없겠으나... 일단 용어가 매 단락마다 오락가락한다. 원서의 sein(being)이 어디에서는 존재, 어디에서는 유(有)로 번역되어있다. Dasein(being determinate)이 어디서는 특정존재, 어디서는 정유(定有)로 번역되어있다. 철학서적에서는 개념어를 통일적으로 일관적으로 번역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원어로는 똑같은 단어를 다르게 번역하려면 충분한 이유가 있어야 하고, 그 이유를 각주 등으로 독자에게 설명하고 원어가 무엇인지 뒤에 괄호 등으로 꼭 표기해주어야 혼동을 막을 수 있다. 이 책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자의적으로 용어를 바꾸어 사용한다. 단순한 오역도 눈에 띈다. 1편 존재론의 첫머리인 86절을 보자. 첫 문단은 순수한 존재가 단서다. 왜냐하면 순수한 존재라는 것은 순수한 사상이기도 하고, 또 아무런 규정도 없는 단순하고 직접적인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최초의 단서는 아무런 매개도 거치지 않은 것, 그리고 그 이상 더 무어라고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다. Reine sein을 소제목에서는 '순수존재'로 옮기고 바로 밑에 있는 문장에서는 '순수한 존재'라고 옮긴 건 넘어가도록 하자. 두 번째 문장과 세 번째 문장이 매끄럽게 이어지지가 않는다. 두 번째 문장과 세 번째 문장은 '그러므로'로 이어져야 하는 논리적 선후관계에 있지 않다. 원문을 보면 세 번째 문장이 오히려 두 번째 문장의 설명을 보충하고 있다. 최초의 단서(단초)는 이러이러한 것이어야하기 때문에 순수존재가 단초로서 적합하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역자가 "그러므로"라고 옮긴 접속사는 독일어 원문에서는 aber이다. 영어 번역에서는 이를 세미콜론과 and로 번역한 것처럼, 한국어로도 '그리고' 혹은 '그런데'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적당하겠다. 똑같은 86절의 마지막 두 문단을 보자. 역자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신은 모든 실재의 총체라는 것도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정의다. 즉 신이 모든 실재 중에서 유일한 실재 즉 가장 실재적인 것이 되려면, 모든 실재가 가지고 있는 제한성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재가 이미 그 속에 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은 야코비가 스피노자의 신에 대해서 한 말 중에 즉, 이것이 모든 존재 중의 존재의 원리라고 한 말 중에 단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야코비의 말 중 어디에 "실재가 이미 그 속에 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 표현되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독일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Indem Realität bereits eine Reflexion enthält, so ist dies unmittelbarer in dem ausgesprochen, was Jacobi von dem Gotte des Spinoza sagt, daß er das Principium des Seins in allem Dasein sei. 적절한 한국어 번역은 다음과 같겠다. 그러나 실재가 이미 그 속에 반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야코비가 스피노자의 신에 대해서 한 말이 더 무매개적이겠다:스피노자의 신은 모든 현존하는 존재의 원리이다. 전혀 다른 의미의 문장이 되었다. 영어 번역은 조금 더 의역하여 다음과 같은 문장이 되었다. Or, if we reject reality, as implying a reflection, we get a more immediate or unreflected statement of the same thing, when Jacobi says that the God of Spinoza is the principium of being in all existence. 외에도 오식이 굉장히 많다. 따옴표가 한 쪽만 있고 닫혀있지 않다든가, 이상한 곳에 쉼표와 마침표가 들어가 있다든가... 그리스 철학자들의 이름을 이상하게 써놓은 것도 눈에 띈다. 파르메니데스를 팔매니데스, 헤라클레이토스를 헤라클레이도스라고 적은 건 옛날이니 그렇다고 치더라도, 필레보스를 피테보스로, 제논을 체노라고 적은 건 당최 이해가 가지 않는다. 출판사에서 이 정도는 검수를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80년 전 열악한 환경에서도 이 책을 번역한 역자의 노고에는 감사드리는 바이지만, 조금 더 나은 번역서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