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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사람이 되고파했던 곰과 호랑이가 있었다. 마늘과 쑥만을 먹으며 어둠과 싸워야 하는 모진 시간들을 견디어 낸 곰은 사람이 되어 우리 민족의 시조인 단군을 낳았다. 곰이 사람이 되어 사람을 낳았다는 이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단군왕검과 관련된 모든 이야기를 사람들이 허구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당시 사회를 이끌었을 토템사상 등에 기대여 사람들은 이야기로부터 일종의 의미를 읽는다. 곰과 호랑이라는 동물에 대해서는 해당 동물을 숭상하는 신앙을 가진 부족이라는 식의 해석을 함으로써 현대 과학과의 충동 부분을 최소화하고 동시에 고대인들의 사상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수용을 하는 식으로 말이다. 지금은 어느 정도 정형화된 이야기와 그에 대한 해석, 하지만 글을 사용해 무언가를 전수하는 게 이루어지기 전에는 아마도 입을 통해 이야기들이 내려왔을 것이다. 따라서 처음에는 이 이야기가 지금과 달랐을 수도 있다. 보통은 한 단계를 옮겨갈 때마다 변형되고 풍성해지는 것이 바로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많고 많은 이야기들이 과연 어떻게 변형되어 지금까지 이어져왔는지를 살펴보는 과정은 그래서 흥미롭다. 누의 입을 통해 발설된 이야기인지, 지금은 오랜 시간이 흘러 명확히 알 수 없는 것이 한계가 되겠지만, 이야기를 전수하던 사람들은 독특한 시선에는 그가 살아갔던 시대와 사회가 반영되었기 마련이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부터 시작하여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많은 이야기들은 유통되는 범위가 어마어마하게 큼에도 불구하고 알게 모르게 공통점들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학문 분야에서는 이들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기반하여 특정 신화나 설화 등을 특정 범주로 분류하는 일을 해왔다. 책의 초반을 장식하고 있는 이야기의 분류법에 대한 부분은 해당 분야에 대해 문외한에 가까운 나로서는 다소 지루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분류법이 보여주고 있는 이야기의 보편성으로부터 나는 지금은 전혀 다른 문화를 영위하며 살아가고 있는 인류가 알게 모르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무엇이 더 월등하고 열등하고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리라.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앞부분보다 확실히 흥미로웠다. 어린시절 동화책이나 어른들의 이야기를 통해 한 번 즈음 접해보았던 내용들이 품은, 그 당시에는 미처 알기 힘들었던 인문학적인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다. 오누이가 호랑이를 피해 동아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해와 달이 되었다는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이야기의 경우 일월의 결합으로 사람이 생겨났다는 옛 사람들의 인식이 반영되었다는 식이다. 근친상간이 현대인들에게는 편히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임은 분명하지만 비슷한 시선에서 인류의 기원을 해석하는 이야기는 가까운 중국을 비롯하여 여러 나라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보편성 속에서 은은하게 읽어낼 수 있는 차이점을 발견하는 일이 차라리 홀로 독야청청(?)하는 것보다 더 짜릿하단 생각을 해 본다. 아무래도 가장 큰 비중이 담긴 부분은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를 시작한 이성계와 중국 명나라 주원장 그리고 청태조 노라치에 관한 전설인 듯했다. 셋 모두 한 나라를 건국한 인물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소위 ‘급’이 다르다. 중국은 대륙이요, 조선이 위치한 지리학적 위치는 반도이니, 모든 문명은 대륙에서 흘러 들어오기 마련이라는 현대적인 해석에 입각할 때도 그러하거니와 중국을 아버지 모시듯 여겼던 당대의 입장을 고려한다면 더더욱 중국 대륙에서 발흥한 국가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무게감이 쏠릴 수밖에 없다. 한 가지 더, 청나라의 경우 명나라를 멸망으로 몰아넣고 대륙의 패권을 장악한 왕조이기는 하나 우리에겐 그저 오랑캐가 세운 나라라는 인식이 강했다. 전설에도 역시나 이와 같은 인식이 오묘하게 반영되어 있었다.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바로 조선의 왕이 중국 대륙의 왕과 일단은 동일한 움직임에 의해 간택을 당했다고 보는 전설의 구조였다. 바다 밑 명당이 있고 그 명당에는 구멍이 둘 있는데 한쪽 구멍은 조선의 왕이 다른 쪽 구멍은 중국 대륙을 호령할 왕의 탄생에 관여할 운명(!)을 가졌다. 물과의 친화력이 높다는 부분 역시 동일했다. 물개, 수달 등 사람이 아닌 동물로 아버지 되는 자는 그려진다. 그로부터 태어난 아이 역시 뛰어난 수영 실력을 갖추었다는 점에서 물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인물로 그려진다. 소위 야래자 설화의 서사단락을 고스란히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차이가 나는 점이 있었으니 바로 동물에 대한 처치 부분이다. 청나라 쪽 전설의 경우 아이 아버지에 대한 처단이 등장한다. 목을 끊었다, 때려 죽였다 등의 표현은 아마도 오랑캐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다분히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한 편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이성계와 중국 명, 청조의 시조가 한 이야기에 등장한다는 점은 해당 국가들과 조선이 간택이라 하는 동일한 구조에 의해 성립하였음을 주장하고 팠던 당대의 바람이 반영된 것이 아니겠는가 조심스레 짐작을 해본다. 청나라를 부인하고는 싶으나 엄연히 중국 패권을 장악하고 있는 강대국이기에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던 자의 비애랄까!
뒷부분은 권력과는 거리를 둔 민간 세계에서 전승된 다양한 민담에 할애되어 있었다. 투박한 이야기 속에 담긴 지혜는 해악과의 묘한 어우러짐을 통해 지금 읽어도 웃을 수 있게끔 구성되어 있었다. 형식에 구애 받지 않는 민중들의 입담이 지닌 생명력이 바로 해당 이야기들의 전승을 가능케 했을 것으로 보인다. ‘누구다’ 라는 명백한 지칭은 존재하지 않지만 우매하게 그려진 인물들을 다룬 부분에서는 무능하면서도 권력을 손에서 놓지 않는 당대 지배층에 대한 차가운 시선을 느낄 수 있었으니, 특유의 비꼼은 오늘날 민초들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최고의 무기가 아닐지 싶다. 물론 과거보다 더욱 정교해진 권력은 떠도는 이야기에도 소위 법과 과학의 잣대를 들이대느라 바쁘겠지만, 살아 꿈틀대는 이야기는 인위적으로 잠재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다양한 이야기들이 생성되고 유통된다. 사실 많고 많은 이야기 속에 담긴 의미를 일일이 해석하는 일은 쉽지가 않다. 현 시대를 살아가는 입장에서는 더더욱, 객관성을 가지고 특정 이야기를 바라보는 일이 어렵다. 하지만 쓸데없는 이야기는 없다. 모든 이야기는 해석 가능한 의미를 지닌다. 언젠가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의 이야기가 해석이라는 색다른 옷을 입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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