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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브그리예의 질투는 그의 대표작으로서 새로운 소설 기법이 잘 드러나는 책입니다 1인칭 관찰자의 시점으로 불륜을 암시하면서도 구체적인 사건 전개는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음으로서 독자들의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합니다 특히나 질투라는 감정을 중심으로 한 심리적 긴장감이 잘 드러납니다 독특한 문체와 질투라는 인간 감정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추천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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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상들, 응시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라고 했다 그러나 생각은 나의 의지로 하는것이 아니다. 생각은 되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근대철학에서는 "내가 생각한다는것은 (나의 응시로 인해) 인식하므로 존재한다" 라고 한다.
다시말해 감각, 정념, 정서 등의 지각들은 내 의지대로, 내가 하는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데이비드 흄은 이것을 인상이라고 한다.
화자는 인상을 서술함으로써 아내(A...)의 불륜에 대한 감정을 표현한다. 인상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순간순간 치밀고 들어오는 세세한 감정의 움직임과 섞인다. 그것은 주변의 사물에 대입되어 또는 대비되어, 감정의 동요와 이성의 합리화가 교차됨을 반영한다.
화자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서술하는것이 아니라, 인상이 그 자체로 주어지는것과 같이 그대로 묘사할 뿐이다.
-A...와 프랑크의 관계에 대한 추측 때문에 예민한 신경, ( 소리는 의심에서 비롯되는것이다.)
-A...와 프랑크가 사랑을 나누는 모습이 화자의 상상속에서 묘사되는 부분으로, 화자의 복잡하고, 초조함, 그리고 A...에대한 애정과 갈구가 교차되는 심적 변화가 A...와 프랑크의 애정적 유희속에 교차된다.
응시는 바라보기만 하던것에서 보여짐을 아는순간 일어난다. 바라보기만 하는 나가 아니라 보여짐을 당하는 나를 인식하는 것으로서, 주체의 객관화이다.
따라서 내가 보고있는 응시가 아니라 내가 타자의 장에서 "상상해낸" 응시이다. 곧, 주체는 상상하는 욕망에 의해 유지되고 만들어지므로, 응시 때문에 인간은 끝없이 욕망하고, 욕망하기에 삶을 영위시킨다. 보여짐. 즉, 응시로 인해 대상을 허구화시키는 욕망의 동인(오브제a)가 생겨난다.
'지네'는 화자를 상징한다. A...와 프랑크의 대화가 이루어지는 장소에서 지네는 나타난다. 그들은 지네를 본다. 화자는 그들을 바라보고, 그들은 '지네' 를 바라봄으로써 응시가 이루어진다.
2. 공간과 A... / 오브제 a 자크 라캉에 의하면 오브제a 는 욕망의 대상에 대한 주체의 환상, 실재를 만나지 못한 잉여, 결핍의 상징이며, 주체로 하여금 욕망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키는 허구적 대상이다. 퍼즐에서 빈공간이 있기때문에 퍼즐조각을 이리저리 옮길수 있듯이, 결핍, 간극에 의해 오브제a는 존재한다.
A...는 이웃의 프랑크와 오묘한 애정적 관계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감지한 화자는 그런 둘의 움직임을 관찰한다. 화자는 A...의 마음에 대한 실체에 대해서는 알수 없다. 다만 추측할 뿐이다. 공간은 결여, 상실, 간극을 상징하는것으로서, 충동의 주체로서 완전한 장소, 충만한 공백이므로 대타자가 지배할수 없는 장소이다.
그러므로 대타자(화자의 시선)은 A...에 닿지 못하고 화자의 생각안에서 맴돌 뿐이다. 그러다가 확신이 되는 순간 다시 허구가 된다.
즉, A...는 화자에 있어서 실체이지 못하고 허구로서만 맴도는 욕망의 대상, 결핍의 상징, 간극으로서의 주체, 즉 오브제a를 상징한다.
-화자와 분리된 공간: 거리감 , 단절과 절망을 의미하기도 하고, 결여, 상실, 간극을 상징하기도 한다. (화자는 A...에 닿지 못한다.)
-불륜을 확신하지만, 그순간 다시 그것을 부정하며 이러한 사유가 반복된다. ( 환유)
- 6시 30분은 시침과 분침이 겹치는 시간이면서, 태양이 뜨고 지는 시간이다. 시침과 분침은 겹치자마자 다시 어긋나듯이, 아내와 프랑크의 불륜에 대한 의혹이 현실로 확정되는가 하면 그 순간 다시 어긋난다. 그리고 그것은 반복된다. 태양이 뜨고 지는 것이 반복되듯이.
3. 반복, 환유 대상은 결핍으로 인해 움직이며 결핍은 채워지지 않으므로 불완전하고, 끊임없이 변한다. 따라서 현재는 이렇게 계속 변하는것이므로 허구로만 존재한다. 허구는 차이로 인해 반복되고, 반복속에서 과거의 시간성을 내포함으로써 실재로 표상되는 것이다. 즉, 실재는 어떤 확정적인것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로 인한 끊임없는 반복속에서 표상되는 것이다.
화자의 심적 상태의 격동과 무관하게 일상은 동일하게 반복된다. 그러나 그 반복은 동일한것이 아니라 대상은 반복 속에서 과거의 시간성을 내포함으로써 현재로서 흘러간다.
저자는 동일한 상황에 미묘한 차이를 두어 반복함으로써 이것을 표현한다.
4. ... 데이비드 흄은 인과성은 인간의 경험에 의한 착각일 뿐이며, 그래서 세계는 인과적으로 있는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우연적으로 있는것이라고 한다.
저자는 사건과 관련없는 주변의 풍경등을 매우 자세히 묘사한다. 또한 사건과 관련되는 묘사도 매우 반복적으로 그려진다. 앞서 따져보았듯이 이런 묘사 하나하나에 의미가 있을수도 있다. 즉, 주변의 풍경은 화자의 심정을 대변한 묘사일수도 있고, 사건의 묘사는 화자의 추측대로 A...와 프랑크의 불륜의 현장일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주변 환경은 데이비드 흄의 말처럼 그냥 우연적으로 있는것이다. 나의 심경이 평온하든, 우울하든 자연은 그런 나의 심경과 무관하게 있는것이다. 마찬가지로 A...와 프랑크의 장면 또한 그냥 이웃관계, 또는 아는 사람 간의 관계에서 우연적으로 벌어지는 흔히 이루어질수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화자를 그 둘의 장면에 직접적으로 개입시키지 않는 것도 이런 인과성을 배제하기 위한것 일수 있다. ) 즉, 사건은 화자의 생각속에서 이루어지는것일 뿐인것이다.
저자는 이것을 표현하기 위해 풍경의 묘사를 사건의 묘사와 마찬가지로 세밀하게, 그리고 사유과 교차, 반복하여 구성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들은 특별한 의미나 상징이 아니라, 그냥 그 자체로 있는것일 뿐이다.
다시말해, 화자가 A...와 프랑크의 관계에 대해서 "의미를 만들어" 내듯이 이 책을 읽는 독자도 저자의 '우연적으로 있는것들에 대한 무의미한 묘사'에 대해서 "의미를 만들어" 내려고 하는것일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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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문학적 실험을 했다고 해서 이 책 로브그리예의 질투를 구매했습니다. 도대체 로브그리예의 질투를 읽은 사람이 말하는 낯선 세계란 무엇일까. 사실 질투라는 감정은 인간에게 가장 원초적인 감정이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아내와 이웃집 남자를 의심하는 남자의 심리 상태는 정상일리 없다. 아내를 향한 질투는 성인 이후에 느끼는 질투다. 그건 아이는 느낄 수 없다. 하지만 질투란 감정은 아이만이 자유롭게 드러내므로 어른들은 그 감정을 부인한다. 그 감정을 읽어날갈때 나는 무엇을 보게 될까? |
| 인간이 질투하는 내용을 관찰하는 것이고 영화같은 반복된 이야기를 하고 관찰자의 객관적인 심리상태를 나타내고 지속적인 이야기를 하고 거기서 작가의 새로운 기법이 글쓰기에 나타나고 재미있고 새로운 내용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좋고 작가의 묘사와 서술이 나타나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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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평 : 메마른 사막에서 견뎌내는 읽기의 괴로움 일체의 감정이나 은유 없이 사물의 표면만 비추는 카메라 기법을 소설에 처음 적용한 프랑스 작가 알랭 로브그리예의 소설 <질투>는 난해하다. 낯설다. 이걸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건조하고 삭막하다. 하필 소설의 배경도 바나나 나무 가득한 숲속에 위치한 아프리카 어느 농장이다. 자신의 아내를 A... (점점점) 으로 지칭하며 끊임없이 지켜보기만 하는 화자의 눈으로 책은 그저 따라가기만 한다. 일체의 작가적 개입이 없다. 이웃집 남자 프랑크와 같이 외출을 자유롭게 다니고, 자동차가 고장 났다는 이유로 외박도 일삼는 이 A를 끊임없이 좇기만 하는 카메라. 그것이 이 소설의 전부다. 심증이라고 할 것도 없다. 굳이 심증을 해야 한다면 그것은 독자의 몫이다. 심증조차도 작가는 가볍게 허용하지 않는다. 그나마 어렵게 찾은 구절이 있다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 반대의 가정을 해보는 것은 아무 소용없다. 세상은 있는 그대로다. 현실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57) 그리고 이야기 중간중간 계속 등장하는 '지네' 수많은 발이 달린 지네를 통해 작가는 무엇을 전달하려고 했을까? 무슨 심오한 메시지가 있을 것 같은데 밝혀내기가 쉽지 않다. 지네는 계속 나타나고, 애인처럼 보이는 프랑크는 간단하게 지네를 죽인다. 지네는 벽에 화석처럼 흔적을 남기고 죽는다. 그래서 벽 이곳저곳에 지네의 흔적이 남아 있다. A... 여인은 남자의 이런 행동에 화들짝 놀라거나 하지 않는다. 아무런 행동의 변화가 없다. 부엌문은 닫혀 있다. 그 문과 복도 쪽으로 활짝 열린 입구 사이에 지네가 있다. 커다란 놈으로 이 지방에서 볼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큰 축에 든다. 더듬이를 뻗치고 거대한 다리를 쫙 펴면 보통 크기의 접시 표면을 거의 가릴 정도로 크다. 여러 가지 부속 기관의 그림자가 희미한 페인트 칠 위에 안 그래도 많은 다리 등속의 수를 두 배로 늘어나 보이게 한다. (109) 박이문 선생님이 번역을 했고, 내가 좋아하는 한국 소설가 하일지 작가가 극찬을 했다. 하일지는 이 책을 가리켜 '잔혹한 치밀성의 미학'이라고 추켜세운다. 하지만 나는 동의할 수가 없다. 너무 어려웠고, 읽어내기에 급급했다. 또 다른 번역자 박희원에게도 이 소설은 쉽지 않았나 보다. 로브그리예의 작품이 선보이는 이 낯선 세계, 인과적 의미가 침범할 수 없는 텅 빈 공간과 무한히 순환하는 '지금, 여기'의 세계는, 그러나 필연적으로 수많은 의미를 불러들일 수밖에 없다. 독자들이 자신의 독서 체험에 따라 작품의 내용을 해석하고 그 의미를 발견할 때, 독자는 어느덧 작가의 일부가 된다. (161, 번역자 박희원) 아무튼,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시작으로 프랑스 3대 소설을 읽어보려 시도했으나 두 번째 소설에서 맥이 탁 풀렸다. 그래도 세 번째 소설, 르 클레지오의 <조서>로 넘어가려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