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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길. 운동권 물을 살짝이라도 먹은 사람이라면 이 이름 석 자를 모를 수가 없다. 한때 운동권의 필독서였던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시리즈의 저자인 그가 야심차게 준비한 책 <자본주의, 그 이후>가 출간됐다. 필자 역시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고 우리가 모두 어우러져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인지라, 저자 박세길이 <자본주의, 그 이후>라는 엄청난 제목으로 풀어낼 얘기들에 귀를 쫑긋 세우고 읽어 내려갔다. 그가 자본주의 이후 세상을 풀어내기 위해 이용한 사고의 틀은 다음의 두 가지 ‘이행의 법칙’이다.
첫 번째 이행의 법칙은 ‘주도적 생산요소를 지난 자가 궁극적으로 지배 권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주도적 생산요소를 지니고 있으면 부의 창출을 주도하면서 경제 잉여를 수중에 장악할 수 있다. 이는 곧 지배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물적 토대를 확보했음을 의미한다. 봉건사회에서는 토지를 소유한 지주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을 소유한 자본가가, 사회주의 사회에서 국가기구를 장악한 당 엘리트들이 지배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였다고 박세길은 얘기한다.
두 번째 이행의 법칙은 ‘주도적 생산요소의 속성이 경제 주체의 관계를 규정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봉건사회의 주도적 생산요소인 토지의 속성은 ‘순응’이다. 토지는 계절 변화, 날씨, 토질 등 자연 현상에 순응할 때 원하는 수확을 안겨다준다. 이러한 속성으로 인해 봉건사회에서의 경제 주체들 사이의 관계는 지극히 순응적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의 주도적 생산요소인 자본의 속성은 ‘독점’이다. 독점할 때 최고의 이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개별 기업 안에서는 자본가가 생산수단의 소유와 권력 행사, 이익 배분을 독점했고, 기업과 기업 간의 관계에서도 독점기업 체제가 수립되었다. 20세기 사회주의 사회의 주도적 생산요소였던 국가의 속성은 상명하복의 ‘관료주의’였다. 실제로 소련은 사회 전체가 관료주의를 바탕으로 움직이다시피 했다고 저자는 언급한다.
저자 박세길은 철저하게 마르크스 역사유물론에 기대어 ‘이행의 법칙’을 얘기하고 있다. 상부구조의 변화를 예측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토대의 변화를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입자에서 보면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를 예측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주도적 생산요소’와 그 생산요소의 ‘속성’을 파악하는 것이 결정적 관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저자가 새로운 주도적 생산요소로서 내세우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람의 ‘창조력’이다. 좀 뜬금없어 보이기도 하는 ‘창조력’을 왜 새로운 주도적 생산요소로 내세우는지 본문을 통해 살짝 맛보자.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하면 지식사회와 함께 열린 새로운 국면에서의 생산성은 다음과 같이 도식화할 수 있을 것이다. 생산성 = (지식+감성)×상상력 실제 생산과정에서 지식과 감성, 상상력은 별개로 움직이지 않고 함께 어우러진다. 말하자면 하나의 생산요소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식과 감성, 상상력을 하나로 묶어 표현하면 무엇이 될까? 이들의 공통적인 특성은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힘이라는 데 있다. 노동력도 새로운 것을 창조하지만 어디까지나 지식과 감성, 상상력의 도움을 받을 때 가능하다. 그러한 도움이 없으면 노동력은 기존의 것을 단순 반복해서 생산할 뿐이다. 결국 이 셋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사람 속에 내재된 ‘창조력’인 것이다.
창조력이라는 요소는 사실 예로부터 사람에게 존재해 온 것이 아닌가? 그걸 굳이 지금 새로운 주도적 생산요소라고 하는 것은 좀 억지스러워 보이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할 텐데, 이런 의문에 대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피력한다. 예를 들어서 노동력은 봉건 시대 농민에게도 있었고 고대 노예에게도 있었지만 노동력이 객관화된 생산요소로 등장한 것은 근대 산업사회에 이르러서였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창조력은 현재의 지식사회 이후 새로운 국면에서 비로소 객관화된 생산요소로 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창조력’이 새로운 주도적 생산요소가 되면서 새로운 시대를 이끌 계급은 기존의 사회주의에서 얘기하는 노동자 계급이 아니라 ‘창조자 계급’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왜냐면 항상 주도적 생산요소를 틀어쥐고 새로운 부를 창출하는 이들이 결국 그 사회의 주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사회,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에서는 더 이상 자본을 소유한 자본가 계급이 주인이 아니라 창조력을 소유한 창조자 계급이 주인이 될 것이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새로운 주도적 생산요소인 창조력의 ‘속성’은 무엇인가? 저자 박세길의 얘기대로라면 이 속성이 경제 주체의 관계를 규정하기 때문에, 창조력의 ‘속성’을 파악하면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에서 사람과 사람이 어떻게 관계 맺을지 짐작할 수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창조력의 속성으로 ‘상생’을 얘기한다. 본문을 통해 그의 주장을 들여다 보자.
참고로 주도적 생산요소의 속성을 알기 위해서는 무엇을 추구했을 때 최적의 결과를 낳는지 파악하면 된다. 최적의 결과가 나오기 때문에 그것을 지속적으로 추구하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속성으로 굳어지는 것이다. 가령 자본은 독점을 추구할 때 최적의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독점을 속성으로 갖는다. (중략)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새로운 주도적 생산요소인 창조력은 개방과 공유, 협력이 잘 이우러질 때 최적의 결과를 낳는다. 그런데 개방과 공유, 협력은 모두가 관계를 표현하는 것들이다. 서로에게 개방하는 것이고, 함께 공유하는 것이며, 서로 협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방과 공유, 협력을 추구하는 관계를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면 무엇이 될까?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상생’이다. 요컨대 창조력은 상생을 추구할 때 최적의 결과를 낳는 것이다. 이는 곧 창조력의 속성이 바로 상생임을 말해준다.
박세길의 책 <자본주의, 그 이후>는 바로 이 두 가지 이행법칙에서 나온 ‘창조력’과 ‘상생’을 통해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가 어떤 모습이 될 지를 그려나가고 있다. 예컨대 그는 창조자 계급은 자신들의 조직으로 직능조합을 구성할 것이라고 얘기한다. 농민은 농업협동조합을, 노동자는 노동조합을 결성해서 자신의 처지를 개선해 왔듯이 말이다. 직능조합은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창조자들의 수평적 연합체이며 1인 1표에 입각하여 민주적으로 운영된다. 그런 점에서 이중적 착취 가능성이 높은 인력 회사와는 본직적으로 다르다. 직능조합은 다양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데, 다음 네 가지고 있다. 첫째, 조합원들의 창업 활동을 다양한 형태로 지원하는 창업 인큐베이터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둘째, 개방적 협력 시스템을 바탕으로 기업들과 다양한 형태의 장·단기 업무 협력 관계를 맺는다. 셋째, 다양한 복지 기능을 수행한다. 그동안 국가와 시장에 기대했던 안정된 삶을 직능조합의 공동체적 상호부조를 통해 보장한다. 넷째, 조합원들을 지속적으로 교육하고 훈련시키는 기능을 수행한다.
지금까지의 얘기를 읽으며 이미 눈치 챈 사람도 있겠지만 저자 박세길은 자본주의는 물론이고 사회주의조차도 더 이상 대안이 될 수 없다고 얘기한다. 자유시장이 주도하는 자본주의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듯이 국가 주도의 사회주의도 이미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로 그 한계가 명백하게 드러났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전향(?)’을 책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나는 수십 년간 내 사고를 규정했던 좌우 구도의 낡은 안경을 벗어서 조용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돌이켜보면 나는 꽤 오랫동안 좌파적 시각에서 대안을 찾고자 그 누구 못지않게 몸부림쳤다. 하지만 원하는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마지막 순간에 깨달은 것은 좌우 구도 속에 갇혀서는 역사발전의 추이를 제대로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와 함께 순수한 발견자의 입장에서 접근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대안을 만들어 제시하겠다는 지적 오만을 털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저자 박세길은 이 책에서 ‘상생의 인본주의’를 내세운다. 창조력과 상생이 주도하는 사회. 솔직히 내가 가진 세계관 입장에서는 그의 얘기들이 불편하다. 하지만 존중한다. 왜냐고? ‘상생’을 위해서! 어쨌든 우리는 모두 ‘사람’ 아닌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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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든 감정은 ‘박세길 씨, 왜 당신입니까?’ 였다. 대학시절 기억 때문인지 ‘박세길’ 하면 진보적 역사연구가라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물론 나는 NL을 진보라고 부르기 꺼리는 사람이지만, 크게 보아 보수에 반대된다는 의미에서 ‘진보적’이라고 치자. 그런 박세길 씨가 왜 이런 책을 썼을까 하는 의문이 초반에 들었다. 현장 가까이에서 치열하게 싸우다가 나이가 들면 다들 ‘큰 이야기’를 하고픈 욕망이 생기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런 ‘큰 이야기’를 하려다 보면 생각이 보수화되기가 쉬운 모양이다. 김지하, 박노해 등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았었는데, 이 책의 박세길에게서도 같은 느낌을 받았다. 20년 전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와 이 책의 표지는 무척 닮았지만, 내용은 딴판이다. 이 책은 사회 변화에 대해서 말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매우 보수적인 책이다. 그렇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NL 주류가 신봉하는 주체사상과 주체(이 책에서는 ‘창조자’)를 강조하는 이 책의 관점이 매우 친화력이 높겠구나 싶었다. 역사를 움직이는 힘이 구조보다는 주체에게 있다는 주체철학(‘주체사상’까지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의 관점에서 이 책은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가히 박세길씨가 다룰 만한 주제이다. 게다가 나이가 들면서 좀 더 ‘종합적인 사고’를 하게 되면 혁명적 변화보다는 진화적 변화에 더 생각이 쏠리기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자신이 신봉하는 철학적 관점을 잃지 않으면서 시대의 변화상을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게 보수처럼 보인들 무슨 상관이겠는가? 자신의 입장이 보수처럼 보일까 우려하기라도 한 듯, 저자는 있는 현상을 그대로 말하고 있을 뿐이라고 강변한다. 저자가 바라보고 있는 그 ‘현상’이란 바로 생산요소의 관계(자본과 노동), 경제 주체의 관계(국가와 시장)에서 현 자본주의가 겪고 있는 변화이다. 자본주의 경제학은 자본을 중심에 놓고 노동을 사고하며, 사회주의 경제학은 노동을 중심에 놓고 자본을 사고한다. 케인스주의 경제학은 국가를 중심에 놓고 시장을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신자유주의 경제학은 시장의 기능을 극대화하고 국가 역할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저자는 지식사회의 도래와 함께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는 완전히 낡은 것이 되어 버렸다고 말한다. 생산요소의 관계와 경제 주체의 관계에 어떠한 변화가 생겼는지 각각 한 챕터씩 할애하여 길게 서술한다. 이 챕터들을 논거로 삼아 마지막 챕터에서는 장차 올 상생의 인본주의 사회에서는 생산요소와 경제주체의 관계가 어떻게 변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런 사회를 빨리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해서 설명한다. 저자가 주목하는 사회 변화의 장소는 시장도, 기업도, 그렇다고 노동도 아닌 기업이다. 그리고 기업이라는 ‘장소’에서 변화를 이끌 주체는 사람, 즉 ‘창조자’이다. 저자는 기업이야말로 과도기의 모순이 가장 첨예하게 집약되어 있으며 미래 사회를 이끌어갈 최고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기업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상황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고 최근에 그렇게 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업에서(혹은 기업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사회로 나아갈 변화를 추동하는 것은 사람이다. 박세길은 산업사회에서와는 다른 오늘날 지식사회에서 노동자의 상태에 대해서 길게 설명한다. 탈산업사회의 노동자는 모두 어느 정도씩 지식을 갖추고 있으므로 ‘지식노동자’이며,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창조자’이다. “창조자는 다수가 대학을 나왔을 만큼 충분히 배웠고 새로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생산수단인 창조력을 보유하고 있다. 생산수단이 그들 안에 체화되어 있는 것이다.” 창조자는 현재 노동자일 수도 있고, 경영자나 자영업자일 수도 있다. 저자는 이들 ‘창조자’를 계급이라고 서슴없이 부른다. 그러나 어떻게 이들이 맑스가 말하는 대자적 계급이 될 수 있는지 별다른 설명은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창조자와 신세대를 결부시켜서 언급하면서 창조자들이 과거와 같은 계급적 속성을 보이지는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 같다. 그들의 계급적 속성은 직능조합의 역할에 묻혀 있다. 저자는 승자독식 논리가 자연 생태계와 사회 생태계를 모두 파괴해 왔다면서 창조력이 자연 생태계를 복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창조력은 물질보다는 비물질(콘텐츠)적 재화 생산으로 생산 활동의 중심을 옮기기 때문이다. 그는 현재 가장 창조적인 산업의 사례로 문화산업을 든다. 한류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한국의 대중문화가 그 창조성 덕분에 큰 수익을 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단순노동은 제3세계 노동자들이 대체할 수 있지만 창조적인 문화산업은 대체가능성이 적다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문화산업이 밥 먹여주지는 않는다. 문화산업과 관련된 극소수만이 떼돈을 벌 뿐이다. 문화산업이 창조성으로 돈을 버는 건 매우 극단적이고 제한적인 사례로 봐야 한다. 나머지 절대다수의 ‘창조자’들에게는 다른 나라 얘기나 다름 없다. 설령 ‘창조자’의 대다수가 문화산업에 뛰어들 수 있는 조건이 충족된다 해도 문화산업만으로는 경제가 지탱될 수 없다. 어느 사회에서나 여전히 물질 생산이 필요한데, 저자는 이 점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다. 박세길은 사회 변동과 관련하여 두 가지 이행의 법칙을 제시한다. 첫번째 이행의 법칙은 “주도적 생산요소를 지닌 자가 지배 권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탈산업화된 오늘날 창조자들의 창조력이 주도적 생산요소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이 어떻게 지배 권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인가? 창조자들의 혁명을 통해서가 아니라면, 창조자들에게 지배 권력을 쥐어주는 자는 누구인가? 창조자들에게 주어지는 권력은 과연 지배 권력인가, 아니면 약간의 떡고물인가? 저자의 해답은 직능조합이다. 직능조합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한다. 저자는 최근에 사람을 우선하는 기업이 급성장해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인가? 그것이 인본주의 사회로의 이행을 이끄는가? 아니면 적어도 예표하는가? 예컨대 구글이나 페이스북 같이 ‘사람을 우선하는 기업’이란 개인의 창의력을 존중하는 기업이고, 대기업 같은 이미 확립된 견고한 구조에서는 발휘할 수 없는 융통성을 좀 더 가지고 있는 기업이며, 정보사회에서 niche를 빠르고 파고들 수 있는 의사결정구조를 가지고 있는 기업이지만, 그러다 나중에 돈 좀 벌면 결국 대기업에게 지분을 팔아치울 기업에 불과한 것 아닌가? (예컨대 유투브와 안드로이드는 구글에 팔렸다.) 여전히 대기업이 ‘갑’ 아닌가?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인본주의’와 ‘아이디어가 돈 되는 세상’이라는 속된 표현은 뭐가 다른가? 저자는 자본 소유에 기초한 권력 독점에서 탈피하여 기업 구성원 모두가 권력의 중심에 서는 수평적 조직문화로 전환할 때 기업이 최고의 가치를 생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런 이상적인 수평적 조직문화가 존재할 수 있는가? 요즘 자주 쓰이는 ‘수평적 조직문화’라는 용어는 정말 수평적인가? 그렇다면 어느 정도나? 이게 바로 인본주의 사회라는데, 과연 인본주의에 ‘사회’를 갖다붙일 정도로 이 사회는 이전 사회와 구별되는 사회일까? 아니면 변용된 자본주의에 불과할 것인가? 저자는 창조력이 주도적 생산요소가 되면 창조자가 지배력을 행사하게 되어 수평적 조직문화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박세길이 내세우는 두 번째 이행의 법칙은 “주도적 생산요소의 속성이 경제 주체들의 관계를 규정한다.”이다. 이에 따르면 앞으로 창조자가 주도적 생산요소가 될 것이므로 경제 주체들의 관계도 지금과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저자는 창조자가 점점 많아지고 있는 긍정적인 현실을 지적한다. 평생교육을 통해서 단순 노동자를 창조자로 전환하는 기업들의 노력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한 노력 덕에 생산성도 크게 높아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자본가가 노동자를 교육시켜서 생산성을 높이고 임금을 올려주면 ‘승자독식의 논리에서 상생의 인본주의’로 이행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상생’이란 결국 조금 양보하는 것을 말하는가? 아니, 자본가가 조금 양보하기는 하는 건가? 노동자에 투자하고 투자한 만큼 뽑아내는 게 양보인가? 백보 양보해서 노동자의 창조자화(化)가 테일러주의가 처음 나왔을 당시 테일러의 ‘선한 의도’에 버금간다고 하자. 그러나 지금은 누가 테일러주의를 칭찬하는가? 그저 노동력을 더 착취하기 위한 비인간적인 시스템으로 치부할 뿐. 노동자의 창조자화는 옛날 테일러주의의 ‘발명’과 다를 게 무언가? 분배의 문제는 여전히 저자의 관심밖이다. 물론 높아진 생산성 만큼 시간당 임금은 올라갔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분배의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맑스주의적 시각에서 여전히 가치는 노동자(창조자)의 노동(창조)에서 나오지만 모든 부는 일단 자본가(경영자)에게 돌아간다. 여기서도 또 다시 만병통치약처럼 등장하는 것은 직능조합이다. 저자는 기업 내부적으로는 수평적 조직문화를 만들고 기업간 관계에서는 상생의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미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니 그것을 더 밀고나가면 승자 독식의 자본주의와 구별되는 상생의 인본주의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애플의 아이튠즈 뮤직스토어와 앱스토어가 플랫폼 역할을 하면서 일종의 상생의 생태계를 구축했다고 말한다. 애플의 성공에 자극을 받아 구글을 비롯한 노키아, MS, 삼성, 그리고 전세계 24개 통신사들이 이와 유사한 생태계를 구축했다고 한다. 저자는 생태계 전략을 구사하지 못하는 기업은 도태될 것이기 때문에 그간 자본주의를 관통했던 독점구조가 상당 부분 상생의 생태계로 대체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게 왜 상생의 생태계인가? 플랫폼 소유 기업이 수익금의 70%를 개발자 몫으로 허용하면 상생인가? 독점보다 나으면 상생인가? 단지 IT 비즈니스의 속상상 수익구조가 좀 덜 독점적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플랫폼에 더 많은 중소기업을 이용하도록 만들어야 대기업에 더 큰 이득이 되기 때문에 ‘상생적 생태계’ 구축에 그렇게 열을 내는 게 아닌가? 백보 양보해서 설령 이걸 상생이라 친다 해도, 이러한 상생의 생태계 속에서 노동자(아니 그의 주장을 빌어 ‘창조자’)는 어떻게 되는가? 예컨대 수많은 앱 개발 창조자들 중에서 앱스토어가 열어 놓은 ‘상생의 생태계’에 진입해서 살아남는 자는 몇 이나 될까? 여전히 절대 다수는 먹을 거 못 먹고 입을 것 못 입어 가면서 앱 개발에 열중해야 하는 형편이 아닌가? 창조자 여러분, 다들 살림살이 나아지셨습니까? 설령 앨빈 토플러의 말대로 지난 30여 년간 새로 창출된 많은 일자리들과 기술혁신이 주로 중소기업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과연 그 일자리들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으며 과연 몇 개나 되는 중소기업들이 기술혁신을 통해 살아남았는가? 여전히 권력을 쥔 대기업들이 종국에는 이들 중소기업들을 쥐락펴락 하는 것 아닌가? 저자는 한국 젊은이들이 지나치게 대기업 취업을 목표로 삼고 있다고 개탄하면서 벤처기업이나 중소기업에 취업하라고 권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젊은이로한테 얼마나 진취적이고 멋진 일인지 웅변한다. 그러나 현재 한국에 2-3만 개나 되는 벤처기업들 중에서 5년이나 10년 뒤 과연 몇 개 기업, 몇 명의 직원들이 살아 남겠는가? 저자는 남 얘기라고 너무 쉽게 말하는 거 아닌가? 그뿐만이 아니다. 저자는 ‘창조자’들에게 창업하라고 권한다. 창업이야말로 ‘창조자’가 ‘피고용자’(저자는 ‘노동자’라는 말은 안 쓴다)의 위치에 있는 모순적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란다. 그러면서 창업에 유리한 현 상황들을 몇 가지로 추려서 열거한다. 저자의 바람대로 경제활동인구의 절대다수가 창업을 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 만약 그런 일이 정말 발생한다 치면, 그런 상황이 과연 얼마나 오래 지속될까? 지난 몇 십 년 간 금융자본은 실물경제보다 몇 배나 빠르게 증식되어 왔다. 저자는 최근 자본 수요가 줄어들고 있는 원인이 창조력 기반 경제로 이행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건 상관관계가 모호하다. 금융자본의 성장은 자본이 투기자본화하면서 가속화된 것이고, 저자가 말하는 ‘창조력 기반 경제’는 IT 기술의 발달로 활성화되고 있는 것인데, 이 둘 사이의 인과성을 주장하는 건 무리인 것 같다. 오히려 금융자본은 ‘창조력 기반 경제’화 덕에 이제 새로운 투자처를 찾게 된 것 아닌가? 제 아무리 창조력 기반 경제라 한들 자본 없이 무얼 이루겠는가? 창조력 기반 경제가 고도화되는 미래 사회에서는 더 이상 자본이 사람 위에 군림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지금까지는 성공한 창업자들이 결국 기존의 자본가들과 똑같은 행태로 옮겨가는 경우가 있었지만, 앞으로는 그러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기업 ‘구성원’(저자가 선호하는 표현대로)들 모두 ‘창조자’이므로 그들이 독립해서 창업하지 못하도록 묶어두기 위해서라도 창업자는 그들 위에 군림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누구나 창업이 가능한 조건에서는 모든 구성원에게 자본과 권력을 다수의 창조자들에게 골고루 배분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래서 고용-피고용 관계는 동업자 관계로 바뀐다고 한다. 창조자들도 자본을 소유하게 되므로 그들은 자본 소유자의 이익도 균형 있게 추구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제 대립과 갈등은 사라진다. 자본주의에 대한 적개심이 아니라 모두가 자본가가 되고 싶다는 소원이 성취됨으로써 결국 자본주의가 종식된다는 것이다. 이게 뭔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최근 소수의 IT 관련 창업기업들이 틈새시장에서 크게 성공하면서 보여준 행태를 지나치게 일반화하는 거 아닌가? 성공한 창업기업들이 과연 몇 %나 될 것이며, 그런 기업들이 다 고용-피고용 관계를 지양할까? 저자가 너무 오버하는 것 같다. 박세길은 결론에서 국가와 시장은 사회구성원의 삶을 책임질 수 없으므로 사회구성원 스스로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해답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국가와 시장은 협력하여 사회구성원을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참 이상적이기도 하지. 도대체 이런 세상은 어떻게 하면 이룰 수 있는 것일까? 저자는 창조자들간의 직능조합을 통해 그들의 계급적 이해관계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직능조합원들이 함께 창업에 참가하면 고용-피고용 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업 상시 인력의 수는 최소화되며(그들은 ‘동업자’의 지위를 획득할 것이다), 대부분의 경제 활동 주체는 직능조합원으로서 개방적 협력 시스템에 참여하는 ‘협력자’가 된다. 이미 웹 관리, 회계, 법무, 컨설팅 등은 외부 ‘협력자’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수평적 조직문화는 기업을 넘어 사회 전체로 확산된다고 한다. 이제 개인과 기업은 시장에서 선의의 경쟁을 벌이게 되는 것이다. 상생의 인본주의 사회에서는 사람들의 심성도 이타적으로 변할 가능성이 크고 수평적 리더십도 고양될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될까? 책을 읽다 보면 저자가 인간본성의 선함과 심성의 변화 가능성을 무척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 걸 알게 된다. 상생의 인본주의 사회에서 직능조합은 복지를 해결하는 주요 통로이기도 하다. 저자는 직능조합이야말로 소득재분배(‘1차원 복지’)나 사회보장 의료 및 교육(‘2차원 복지’)를 넘어 사회구성원 스스로 복지의 주체로 나설 수 있는(‘3차원 복지’) 통로라고 주장한다. 직능조합은 상생의 인본주의의 결과물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완성하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상생의 인본주의로 나아가는 데에 기득권세력의 저항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저자는 직능조합 안에서 보이는 ‘압축모델’을 사회 전체로 확산시키는 운동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즉 직능조합 기반의 개방형 협력 시스템을 중심으로 벤처 생태계를 업그레이드하여 다른 기업들을 압박하는 것이다. 요컨대 낡은 것을 전복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키워 낡은 것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박세길은 이런저런 책에서 인용을 많이 했다. 어떤 내용은 처세술에서 따왔고, 어떤 내용은 신 경영학에서, 또 어떤 내용은 맑스주의에서 따왔다. 처세술과 유사한 내용이 나올 때는 예의 값싸 보이는 성공철학이 나오며, 신 경영학은 어디서 많이 들어본 (사실 지난 몇 년간 ‘개나 소나’ 떠들던) 피터 드러커 류의 내용이 반복되며, 맑스주의는 대개 산업사회와 오늘날의 차이점을 부각시키기 위해서(만) 인용된다. 책이 다루는 내용이 이것저것 잡다하다. 그러다보니 중언부언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몇 년간 이런저런 책들을 많이 읽어온 저자가 그간 갈무리해둔 내용들을 이 책에서 아낌없이 다 풀어놓은 듯하다. 그래서 어떤 때는 글이 구성이 다소 산만하며, 제시되는 사례들이 다소 뜬금없거나 주제와의 관련성이 부족하다. 저자는 이 책을 쓰기 전에 생각은 참 많이 한 것 같지만 그의 상상력은 자신이 읽은 제한된 수의 책에서만 나온 듯하다. 말하자면 제한적 참고문헌을 갖고 깊은 성찰을 했다고나 할까? 그러다 보니 글을 읽어 보면 미진하고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논리적 비약이 종종 발견되고 가끔 문장의 표현력도 떨어진다. 저자의 관점이 우파 신경영학에 너무 많이 경도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과거 운동하던 시절의 시각을 폐기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여전히 운동의 관점을 갖고 있다고 믿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저자의 ‘주체철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여전히 크게 바뀐 건 없을 수도 있다. 여전히 ‘사람’이 중심인 관점을 유지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기는 해도 신경영학의 시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듯한 측면은 달갑지 않다. 굳이 그런 시각을 저자가 되풀이하는 것을 왜 읽고 있어야 하는 회의도 들었다(이 책을 석 달 가까이 붙잡고 있었던 이유다). 게다가 저자는 계속해서 주체(창조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주체가 어떻게 상생의 인본주의를 가져올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하지 못한다. 역사 변화의 매체로 직능조합을 들고는 있지만, 매우 추상적이고 공허하며 대기론적이다. 마치 ‘좋은 게 좋은 거니 다 좋게 될 거다.’는 식의 주장이다. 저자는 오래 전부터 견지하고 있던 주체철학을 한 손에 들고 있고 다른 한 손에는 최근에 그가 배운 우파 신경제학을 들고 외줄타기를 하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다. 두 입장 사이의 접점을 나름대로 찾았다고 생각한 모양인데, 내가 보기에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주체(창조자)에 대해서 열을 내서 떠들 때는 창조자가 모든 것을 다 이룰 듯이 말하다가도 직능조합에 대해서 말할 때는 창조자는 온데 간데 없다. 뭐랄까? 그의 주체철학에서는 주체가 실종되어버린 느낌이다. 그는 주체주의자인지, 구조주의자인지, 혹은 제도주의자인지, 오락가락한다. 그렇다면 이 책이 가진 ‘보수성’은 저자가 나이가 들었기 때문만도 아니고, 그가 우파 신경제학에 경도되었기 때문만도 아니고 , 어쩌면 그가 주체철학의 입장을 충분히 견지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주체의 현상태를 그대로 기술하는 게 주체철학인가? 왕년의 그였다면 주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도 제시하려 했을 것이다. 거대한 이야기를 하지만 그에 맞춰 책도 거대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미래를 내다보는 이런 류의 주장은 어차피 때가 닥치기 전에는 증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 말 저 말 갖다 붙인다 해서 증명이 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산에 틀어박혀 읽은 책들을 이 책 한 권에서 다 인용할 필요는 없다. 했던 얘기 또 하고 중언부언할 필요도 없다. 이 책은 두께에 걸맞게 좀 더 분석력을 보여주든가, 그렇지 않을 거면 좀 더 날씬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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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가 너무 즐거워 즐거워서 못살겠어요 달이 가는 게 해가 가는 게 행복해서 못 살겠어요 이제 겨우 ***일 남았네 이 고통이 끝나는 날이 조금만 더 웃으면서 견뎌내어요 좋은 날이 오고 말거야
설운도의 <원점>을 편곡한 것으로 들리는 ‘나꼼수’의 트로트 로고송(신곡)이다. 봉주 8회 마지막 부분에 등장한 이 노래가 오늘따라 슬프게 들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도대체 그 날까지 몇 일이 남았는지 까마득해서 일까. ‘나꼼수’에 출연한 MBC PD는 자신들도 매체가 있고 뉴스를 전달하는 어엿한 창이 있는데 거기서는 말 못하고 지하에 와서 떠들고 있으니 잠시 울컥하는 것 같았다. 사장이 퇴진하는 그날까지 끝장파업에 돌입한다는 PD의 목소리는 결연하다기 보다 서글퍼 보였달까.
이 책은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로 유명한 박세길의 신간이다. 500p 분량의 꽤 촘촘한 사회과학서이지만 대부분 쉬운 용어로만 단계적 논리를 펼치시는 덕에 에세이처럼 술술 넘어가는 기특한 책이다. 내가 무리 없이 모두 이해했으니 나 같은 아줌마들도 충분히 흥미롭게 펼쳐들 수 있을 듯 하다. 가장 훌륭하다 생각되는 건 궁극의 질문과 최종적 답안 사이에 치밀하게 펼쳐지는 논리의 향연이다. 아주 세세하게 쪼개어 그것을 항목마다 밀도 높게 분석했다. 각종 통계자료는 기본이다. 그리고 다시 조직적으로 완성했다. 완벽을 기울인 교과서의 느낌도 나는데 신기한건 지루하지가 않았다는 것.
쏟아져 나오는 서사와 위로의 책을 접고 이 책을 꼼꼼히 읽게 된 이유는 이게 최선인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다들 여기저기서 못 살겠다고 아우성은 치는데 이게 최선이 아니라면 그럼 다른 답은 있는 가였다. 적어도 내가 만나온 사람 중에 온라인이건 오프이건 자본주의가 좋다고 하는 사람은 하나도 보지 못했다. 돈이 많건 적건 지위가 높건 낮건 모두 다 이건 아니라고 했다. 계속해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 절망이고 살아갈 날이 암울하다 말했다. 분단국가인 이 땅 한국에 사는 한 달리 살아갈 방법도 없고 지금처럼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살아야 하는데 인생이 이렇게 살다가 끝나는 것인지 생각만 하면 서글프다 말했다. 좋은 날이 언제이고 어떤 날인지는 모르겠지만 - 저 노래에서 좋은 날이 온다는 건 그들의 바램대로 정봉주가 나오고 MB가 들어가는 날일까 - 그때라면 고통이 끝나는 것일까. 과연 정권이 바뀌고 대통령이 바뀌면 세상은 달라지는 것일까. 불행히도 우린, 그냥 웃고 말지요, 왜 사는지 알고 싶지 않아서요, 일 것이 틀림없다.
궁금했다.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 언제까지 인 것인지. 나는 돈이 있는 사람이었다가 망해본 사람이기 때문에 돈이 개인에게 어떤 실력행사를 하는지 잘 안다. 돈은 사람의 인격 수준까지 결정하는 위력이 있다. 돈이 많으면 보다 착하고 우아한 사람이 될 기회가 많다. 성격도 좋고 남을 배려하는 사람으로 보일 확률도 많다. 돈이 많으면 가만히 앉아 있어도 사람이 꼬인다. 어떻게든 돈 많은 자에게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 그 앞에선 자기도 모르게 말과 행동이 틀려진다. 돈이 없으면 친구도 없어지고 친척도 멀어진다. 사람들은 돈이 없다는 것이 확실시 되는 사람 곁에 본능적으로 가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망해보면 미처 몰랐던 세상을 알게 되는 뜻밖의 수확도 있다. 처음엔 돈이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돈 떨어졌음을 처절하게 깨우치는 순간은 돈 때문이 아니다. 별 생각 없이 매일 같이 하던 일을 못하게 되었을 때. 예를 들어 매일 마시던 커피가 떨어졌을 때, 머리를 감으려 하는데 샴푸가 떨어졌을 때, 눈가의 주름이 뭐 중요했다고 찍어 바르던 화장품이 떨어졌을 때, 휴지도 치약도 세제도 떨어져서 어제까지 잘 하던 일을 오늘부터 할 수 없게 되었을 때이다. 이런 것들을 생필품이라고 하던가. 선택이 아니고 필수라고 하던가. 아침에 일어나 기분에 따라 양치질을 안 해도 되는 게 아니고 치약이 없으면 이빨을 못 닦는데 돈이 없으므로 그 필수적인 생활은 할 수가 없게 되는 것. 그래서 돈이 생기게 되면 나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것부터 사게 되는 것. 내가 살아가는 일이란 거창한 도덕이나 희망이나 사랑 혹은 그리움 따위의 돈 없어도 떠올릴 수 있는 것들이 아니고 돈이 있어야만 가능한 아주 사소한 행위들로 이루어져 있구나, 사람이 참 별거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나를 사정없이 겁탈할 때 인 것이다. 즉, 돈이 없으면 그 없어진 돈 때문에 사람을 알게 된다. 돈 있을 땐 나부터 시작해 내 돈에 가려 잘 안 보이던 그들이 보인다.
문제는 돈이 없으면 사람이 보다 잘 보인다는데 있다. 자본주의의 유혹은 어쨌든 우리 주변에서 돈 많은 사람을 본다는데 있는 것이다. 코스닥으로 떼부자가 되어 타워 팰리스로 이사를 가는 동료를 목격한다는 것이다. 절묘한 타이밍으로 부동산 시세차익을 챙겨 벤츠를 사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이다. 청담동 카페 골목을 지나다 보면 남편이 의사인 사모님들이 죄다 외제차를 발레파킹 하고 있는 장면을 본다는 것이다. 대기업 계열사쯤 되는 집안에 시집간 동창이 자주 간다는 (희한한 이름의)호텔은 식당이 회원제라는 사실을 듣게 된다는 것이다.(그래서 암 것도 아닌 나는 맛있다고 해서 갈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부모님이 재력이 좋아 결혼할 때 집이라도 장만해준 동료는 골프도 치고 해외여행도 자주 가는 꼴을 어김없이 보게 된다는 것이다. 기분이 씁쓸해 우연히 틀어본 TV에서도 일등한 사람에게만 상금이 왕창 몰아 터지는 서바이벌 게임을 두 눈으로 일주일 내내 보게 된다는 것이다.
다 같이 잘 살고 가진 거 나누는 나라가 될 줄 알았는데 이 놈의 엠비정부는 승자독식의 끝장판인 대기업 논리와 땅 파고 벽돌 쌓는 불도저식 개발과 등수에 집착하는 일등주의만 좇아가느라 나라를 다시 쌍팔년도 이전으로 되돌려 놓고 말았다. 원전은 일본을 의식해 수주되어야 했고 G20 의장 국가는 기어이 되어야 했고 평창은 삼수라도 해서 올림픽을 유치하는 나라가 되어야 했다. 어떻게든 어깨를 나란히 하여 선진국처럼 보이는 게 중요했기 때문에 공공디자인은 런던을 좇아가야 했고 김연아는 스케이트를 벗고 PT를 해야 했다. 유럽과 미국에 극심한 열등감을 갖고 있던 우리는 루브르 박물관 앞에서 프랑스 소녀들이 피켓을 들고 우리 아이돌 공연을 연장하라고 시위를 할 때 얼마나 짜릿했던가. 여기선 삼성 욕을 열나게 하다가도 뉴욕의 타임 스퀘어 광장에 하루 종일 빛나고 있는 삼성과 LG 로고는 그런대로 기분 나쁘진 않았던 우리. 부지런히 따라가고 숨차게 도망가느라 여튼 나라의 위상이 높아지긴 한 것 같다.
근데, 그럼 뭐하나. 겉으론 번지르르해도 우린 속으로 썩었는데. 미국의 일본의 안 좋은 점은 그대로 사이좋게 복제해 썩어가고 있는데. 우린 미국에서 금융위기가 터져도 휘청하고 일본에서 쓰나미가 닥쳐도 흔들리는데. 중국과 미국이 팽팽하면 우리가 더 긴장해 뒤돌아 호들갑인데. 우리나라는 지정학적 위치상 예부터 사대와 자주를 줄타기 해온 눈치 빠른 민족이었다. 물자와 자원은 적은데다가 성격은 조급했다. 강대국 사이에서 나름의 생존방식을 일찍 터득하느라 늘 그들의 동향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예민하게 반응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유달리 의식하고 그런 남들 눈에 나지 않으려고 자기검열을 하는 습관은 어쩌면 아주 오래된 우리 민족의 유전자일지도 모른다. 역사학자들은 우리가 전쟁이 적어 내부에서 ‘편가르기’에 치중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전쟁이나 내전이 많지 않았기에 임진왜란이나 일제침략, 한국전쟁에 제대로 대응을 못했고 그로인해 분단국가가 되었다는 것이다.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도 마찬가지다. 이분법 논리는 좁은 남한에서 다시 되지도 않는 이념싸움으로 확산되고 우리는 허구헌 날 좌와 우로 구분된 시각의 뉴스만 보고 산다.
우리나라는 어떻게 되는 걸까. 총선, 대선, 올해는 전 세계적으로 대통령이 물갈이 하는 해인데 미국은, 프랑스는 누가 대통령이 될까. 아니 박근혜는 대통령이 될 수 있을까. 경제는 어떻게 되고 집값은 어떻게 되고 물가는 교육은 언론은 ... 소녀시대는 언제까지 소녀로 살 것인가, 무도는 언제 방송되나, 정봉주는 언제 석방되나, 강호동은 언제 컴백하나... 아 봄은 오는 것인가. 나는 다시 재기 할 수 있는 것인가... 아무리 거창한 생각을 아니 아무리 시시콜콜한 생각을 해도 역시 지난 2년 동안 내가 고민하고 힘들어 했던 것은 지금의 추락한 내 처지가 아니었다. 그동안 내가 달려온 세월은 그럼 아무것도 아니었나 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거 그냥 공부 덜하고 일 좀 덜하고 남들 놀 때 놀고 여행이나 가고 살 것이지 뭐 하러 아득바득 열심히 살았을까, 였다. 그렇다. 나는 다시 일어서고 싶었다. 주저앉기 전에 열심히 살았던게 억울해서라도 꼭 재기 하고 싶었다. 이기는 놈이 다가지는 세상, 한 번 지면 땅 끝으로 추락하는 세상, 한 번 추락하면 인생 실패하는 세상, 돈 없으면 능력 있는 게 더 서러운 세상, 더 살아봐야 더 나을 것도 없어 보이는 세상은 끝이 나길 바랬다. 그런데 이 책은 그런 세상은 이제 끝난다고 말한다. 반드시, 확실히, 자본주의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고 외친다.
저자는 ‘자본주의 보다 더 나은 사회는 반드시 존재할 것이며, 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역사의 진보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했다. 2007년 홀로 나와 치악산 기슭에서 10만 페이지 독서를 하고 그는 좌우구도의 낡은 안경을 벗어야 했다. 오랫동안 좌파적 시각에서 대안을 찾겠다는 시각을 버리고 스스로 대안을 만들어 제시하겠다는 지적 오만을 버린 것이다. 저자는 이 책 말미에 과연 좌우 대결구도는 얼마나 타당하고 어느 정도의 생명력을 지닌 것인가 자문했다. 기실 좌우대결 구도는 역으로 기득권 세력의 기반을 강화하는 기반이 되어왔기에 이대로 가다간 결국 우파에게 유리한 국면으로 이어질 것이라 충언했다. 사실상 좌우 대결구도는 유통기한이 끝나가는 중인 것이다. 저자가 지적한 신세대 창조자 -디지털 문명의 세례를 받고 자라난 세대, 80년대 이후 출생하여 90년대에 10대를 보낸 세대 -들에게도 더 이상 좌우대결구도는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 좌와 우로 자꾸 이분법화 하는 것은 그렇게 좌우로 나뉘어야 자기들이 더 유리한 보수언론과 기득권층의 마지막 고집일 뿐이다. 나머지 중도자들은 좌와 우의 중간이 아니라 좌와 우가 모두 답이 아니라 생각하면서 새로운 답을 찾는 존재들인 것이다. 오죽하면 그냥 아무말도 안하고 서있기만 하던 안철수를 대안으로 보았겠나. 저자는 말한다. 이 시대 진정한 진보는 좌우구도 속에서 좌파 입장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좌우 구도 자체를 넘어서는데 있다고.
역사의 진행방향은 궁극적으로 새로운 세대의 선택에 의해 좌우된다. 나는 사실 이 책에서 말하는 신세대라 말하기엔 늙었고 기득권 세대라 하기엔 아직 젊다. 우린 언제나 낀 세대였다.(우리가 언제 제대로 뭔 세대를 주도하긴 했나) 그러나 역사의 변곡점을 통과하고 있다는 사실은 신세대와 기득권 세대와 마찬가지로 같다. 이 책을 좀 근사하게 리뷰를 해보려고 정리를 하면서 책을 읽었는데 다 요약하고 보니 A4로 19장이었다.(그래서 근사하고 설득력있는 리뷰는 포기한다) 이틀 동안 내가 한 일은 무슨 교양 리포트를 써내는 것처럼 사뭇 진지하고 흥분된 시간이었다. 그가 말하는 ‘상생의 인본주의’는 자본주의 이후 새로운 사회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이 책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일어난 변화가 마침내 자본주의를 멸하게 하고 전혀 새로운 가치로 이행하는 과정을 빠져나갈 수 없는 논리로 펼쳐 보인다. 저자는 이 책에서 절대다수가 공감할 수 있는 자본주의의 문제점인 승자독식의 대항가치로 상생을 내세웠고 ‘사람을 모든 것의 근본으로 삼고 상생을 앞세우는 것’을 목표로 삼는 시민운동을 구체적으로 제안하고 있다.
한 가지 개인적으로 희망으로 느낀 것은 지식근로자의 정체성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처럼 생산수단이 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계급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인 것이다. 고용, 피고용의 관계에서는 생산수단을 갖고 있지 못한 노동자가 결국 파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창조력기반의 경제에서 생산수단이 창조력이 된다면 그 자체가 영구 파업을 상징할 수 있다. 더 이상 노동자는 통제 대상이 아니고 협력관계의 파트너가, 나아가서는 주총의 권력자가 될 수 있다. 지배 권력은 생산요소를 가진 창조자들에게 이동할 것이고 이는 역사의 필연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좌파혁명가는 자본주의 체제의 전복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삼성의 힘은 이미 국가를 능가한지 오래다. 국가가 기업을 통제하는 것도 다시 언젠간 규제를 해제하는 것의 전 단계일 뿐이다. 국가는 자신을 지양하고 시장은 스스로 초월하고 구성원은 국가와 시장이 아닌 자신에 의지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 시장에 의지하는 ‘쫓기는 삶’이 아니고 국가에 의존하는 ‘기대는 삶’도 아닌 스스로 변화의 주체가 되는 삶으로 모두 이동하는 것. 물론 이는 상당히 추상적으로 들린다. 상생의 인본주의 사회에서의 보편적 인간형은 ‘자유와 평등, 개인과 집단, 경쟁과 협력 등 근대 이후 분리, 대립되었던 가치들을 조화롭고 균형 있게 추구하는 사람’이니 이상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사람은 결국 ‘51%의 이기심과 49%의 이타심’이 조화를 이루는 아주 균형적인 인간형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믿는다. 결국 차이는 2% 안팎인데 역사의 변곡점은 그 2%의 변화로 공멸이냐 상생이냐의 기로에 선 듯하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것은 저자가 해답을 어떤 해외의 역사나 새로운 이론이 아니라 우리 농업사회에서 찾았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를 찾는 과정에서 농업관련 책 <우리 농업, 희망의 대안>을 쓰면서 생태계의 무한한 잠재력을 깨달았다고 한다. 논은 같은 땅에서 똑같은 작물을 반복해 재배하므로 토양이 황폐화 되어야 하는데 왜 수천 년이나 이어져 올 수 있었을까. 저자는 논이 인공습지로서 상생하는 복합 생태계의 일부로 기능해왔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바로 전통사회에서 논은 지속가능한 농업의 표본이었고 논농사는 상생의 가치를 자연스럽게 체득하는 학습의 장이었던 것이다. 우리의 훌륭한 전통 중 지역가치 공동체로서 ‘향약’은 상생의 가치를 생활문화로 정착시켰으며 그 토대가 다름 아닌 논농사였다. 국사책으로 잠시 기억을 돌이켜 보면 ‘환난상휼’의 가치는 공동체 성원들이 어려움을 나누는 원칙이다. 지금 내가 쌀이 떨어졌는데 우리집에서 연기가 안나니 이웃이 알아서 한바가지 퍼다 주는 형국이다. 그러나 논의 생태계가 파괴됨으로써 상생의 가치도 사라졌고 자연에 대한 인간의 태도가 상생이 아닌 정복으로 바뀌자 지속가능한 삶의 조건도 사라진 것이다. 나는 이 부분에서 오래전부터 인간의 학명을 ‘호모 사피엔스’가 아닌 공생인이라는 의미의 ‘호모 심비우스’로 거듭날 것을 호소해온 통섭학자 최재천을 떠올렸다. ‘호모 심비우스’ 정신은 지구 생태계에 함께 사는 모든 생명과의 공생을 우리 삶의 최대 목표로 삼자는 것이다. 저자는 논의 생태계, 즉 상생의 원리가 사회문제 해결의 일반적 원리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이는 결국 혼자만 다 가지는 게 아니고 자본도 권력도 나누자는 것이다. 손해를 보자는 것이 아니고 나누어서 성공과 결실이 더 커지고 오래가는 자연의 원리를 믿어보자는 것이다. 과학은 물론 경제도 사회도 생태계로 이어지고 통한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했다.
저자는 말미에 역시 이 모든 흐름의 장애요소로 단연 기득권에 대한 집착을 지적했다. 나누자고 하는데 극도로 싫어할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자기처럼 가지게 될까 두려워 하는 이는 누구인가. 가진 사람은 가진 게 많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해야 하는데 사람은 욕심의 동물이므로 자기 가진 것을 쉽게 내려놓지 못한다. 그래서 무언가 가졌다 생각하면 더 이상 모험이 힘든 것이다. 가진 게 없어야 잃을 것이 없기 때문에 도전하기가 쉬운 것이다. 다행히 나는 가진 게 없고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다. 자본주의, 그 이후는 가진 자나 못가진 자나 두 쪽 모두에게 모험이 되는 것은 틀림없다. 다만 어떤 쪽이 더 즐겁게 모험에 뛰어 들지는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을 듯하다. 이 책의 결론이 내게 아주 기쁘게 들리는 것을 보면. 마지막으로 사람과 제도와 권력의 본질을 꿰꿇은 저자의 의미심장한 몇마디를 옮겨 본다. 어느 한 명의 왕을 없애고 새로운 왕이 되기 보다는 모두가 왕이 되면 자연 한명의 왕이 사라진다는 논리는 퍽이나 마음에 든다. 모두 왕이 되려 하지 말고 평민이 되어 평등하게 살자는 불가능하고 위선적인 주장보다 훨씬 인간적이고 현실적이다. 나누어 달라는 것도 실은 나도 한번쯤 왕이 되고 싶었던 속내에 대한 보상일지 모르니까. 다 같이 왕이 되어서 혹시나 또 거기서 쟁탈이 일어날지는 그때 가서 확인해도 늦지 않겠다. 일단 모두가 왕좌에 오른 다음에 둘러보아도 될 일이다. 아니 내가 왕이라면 새삼 둘러보지 않아도 되지 않을지 모르겠다. 어차피 다들 왕인데 누가 나보다 더하고 누가 나보다 덜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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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은 책이다. 추천은 커녕 중고책으로도 팔지 않고 벽장 깊숙한 곳에 숨겨두고 싶은 책이다. 그만큼 별 볼일 없을 뿐더러 거의 500쪽에 달하는 책을 읽는 시간도 아까운 책이다.
저자의 견해에 동의하는 부분도 있다. 한 시대가 격변하고 있다는 점,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 좌우대립의 이분법만으로는 21세기의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점, 지식과 창조성이 중요하다는 점, 기업에게도 나름 장점이 있다는 점, 대결이 아니라 상생이 필요하다는 점, 인본주의가 요구된다는 점 등이다. 하지만 저자의 주요 개념이나 논리 전개, 방향에 대해서는 수긍하기는 커녕 공감하기도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저자는 엄청 '헤매고' 있는 것 같다.
내 생각에 저자가 헤매는 이유는 먼저 저자가 적용하는 개념이나 단어가 좌충우돌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저자는 지식이나 창조력을 생산요소로서의 자본, 노동과 동일한 기준이나 반열에서 비교, 적용하고 있다. 산업사회 내에도 지식이 당연히 포함되지만 저자는 산업사회와 지식사회를 별개로 다룬다. 탈산업사회와 탈자본주의를 구분하지 못한다. 좌와 우, 자본과 노동, 국가와 시장 등의 대립개념의 이분법적이고 대결적인 성격을 강조하면서 두 가지가 동전의 양면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지식과 창조력이 자본과 노동, 국가와 시장의 내부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중요성이 늘어나는 것을 마치 대체할 수 있는 것이라고 오해한다.
공부모임 참석자들 역시 겉으로는 나처럼 심하게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내심에는 나보다 더 큰 실망감이나 상처를 입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한 참석자는 "박세길이 피터 드러커에게 말렸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왜 파터 드러커 이상의 애기를 하지 못하는가?"라고 반문했고 다른 참석자는 "창조력 역시 일반인들 중 극히 일부분에게서 강하게 드러나는 요소이기에 승자독식 구조에서는 마찬가지다."라고 비판했다. "기업이 이윤을 지상과제로 삼는 한 어떤 표현을 하더라도 노동자는 이윤을 위한 수단일 뿐이고 그것이 한국에서 노사갈등의 핵심이지 않은가?"라는 반문도 있었고 "지식기반사회가 되어도 농업과 제조 등 산업사회는 오랜동안 계속될 것이다."라는 반론도 있었다. '박세길'이라는 이름은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라는 책을 통해 알고 있었다. 대학시절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읽은 이후 다른 여러 책들 속에서 한국현대사에 대해 읽었기 때문에 여러 지안들에게 '잘썼다'고 추천받았음애도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를 읽지는 못했다. 그래서 조금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딸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으니 늦기 전에 읽고 아이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 중 하나다. 공부모임에서 박세길씨의 최신작인 이 책을 세미나 교재로 삼자는 제안이 나왔을 때 주저없이 동의하였다. 최근들어 자본주의가 세계경제와 각국 경제에, 전세계인들의 삶애 온갖 몹쓸 나쁜 결과를 가져오고 있고 많은 학자들이 자본주의 이후의 세계경제체제에 대한 담론들을 제기하고 있다. 국내 학자, 그것도 역사를 전공하는 학자가 자본주의 이후의 세계를 어떻게 생각하고 예상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처음 책을 접한 후, 제목 아래에 달린 부제가 '승자독식 논리에서 상생의 인본주의'라고 달려 있어 나에게 흥미도 유발시키기도 했다. 책의 서문을 읽어보나 저자가 현실 자본주의로 인한 많은 이들의 고통에 가슴아파하고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세상'에 대해 오랫동안 많은 열망과 연구를 거듭했음을 알 수 있었다. 저자는 1990년대 10년 동안 새로운 사회를 탐색하면서 원고지 1만 매를 넘는 글을 썼다. 2000년대 초반에는 직접 다양한 실천적 접근을 통해 새로운 사회의 단초를 찾으려고 연구단체를 설립하였고 사회단체 상근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이론적 기반이 취약함을 느끼면서 스스로의 한계를 절감하고 '성찰과 탐구'를 위해 2007년 가을 홀로 치악산 기슭으로 들어갔다. 저자는 치악산에 들어가면서 두 가지 결심을 했고 모두 이루어냈다고 한다. 하나는 '10만 쪽'의 책을 읽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두 가지 종류의 역사책을 쓴 것이다. 10만 쪽이면 300쪽의 책 300권을 읽은 셈이다. 그는 2008년 6월 <혁명의 추억, 미래의 혁명>을, 2010년 4월 <미래를 여는 한국인사(상,하)>를 출간했다. 그리고 그 이후 저자는 어느날 문득 좌우 구도의 낡은 안경이 자신의 사고를 규정했다는 것을 깨닫고 좌우 구도의 낡은 안경을 벗어 내려놓은 후 '편견 없는 어린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실마리를 찾으려고 노력'하다가 드디어 영감이 샘솟기 시작해 이 책을 집필하게 된 것이다.
저자는 계속하여 서문에서 두 권의 신간을 집필하면서 얻은 결론을 소개했다. 10개나 되지만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두 소개하는 것이 필요하다. "첫째, 전지구적 관점에서 접근하지 않으면 자본주의 이후 새로운 사회를 찾을 수 없다. 둘째, 자유와 평등은 분리되는 순간 둘 모두 불구화된다. 둘은 조화롭게 통일되어야 한다. 셋째, 사회주의를 지배했던 국가만능주의와 자본주의를 지배했던 시장만능주의 둘 모두 답이 아님이 분명해졌다. 국가와 시장의 위상과 상호관계에 대해 근본적인 전환을 모색해야 한다. 넷째,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정점이며 필연적으로 몰락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의 몰락과 함께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기 시작할 것이다. 다섯째, 생산 활동을 주도하는 요소가 자본에서 지적이고 창조적인 능력을 지닌 사람에게로 이동하고 있다. 이는 지배권력의 원천이 자본에서 창조적 능력을 지난 사람에게로 이동할 수 있음을 예고하는 것이다. 여섯째, 대중이 주역으로 떠오름에 따라 수직적 위계질서가 무너지고 수평적 소통과 협력이 모든 영역을 지배할 것이다. 일곱째, 한반도 분단의 역사는 진보와 보수가 '공존'을 바탕으로 경쟁해야 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여덟째, 새로운 패러다임을 바탕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신세대는 새로운 사회를 창조할 풍부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아홉째, 국가의 절대우위가 사라진 조건에서 국가권력 장악을 바탕으로 한 위로부터의 변화에 의존해서는 세상을 제대로 바꿀 수 없다. 말하자면 아래로부터의 변화가 기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열째, 기업 경영은 매우 창의적이고 역동적인 영역으로서 그로부터 새로운 사회로 이행하는 고리가 형성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한 '새로운 결론'에 기초하여 저자는 책의 본문에서 21세기 세계는 "산업사회에서 지식사회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고 "따라서 산업사회를 지탱하던 자본과 노동은 더 이상 주도적 생산요소가 될 수 없게" 되었고 "권력의 원천이 자본에서 지식으로 이동"하면서 지구촌이 "탈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에게 지금 세계적인 경제위기는 '역사의 변곡점'인 것이다. 이에 따라 이 세계의 패러다임은 대전환 중이다. 그것은 인간과 기술의 관계에서의 패러다임의 변화(놀라운 가술적 진보를 바탕으로 사람이 주도적 위치를 되찾고 개인의 삶이 복원되고 있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바탕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신세대의 등장, 근대 경제학의 해체에 따른 새로운 패러다임의 설정이다.
저자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3부 인본주의 사회로의 진화'에서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을 해명하는 데서 핵심 개념이 주도적 생산요소'이며 역사적으로 토지, 자본과 노동이 최근까지의 주도적 생산요소로 작용했다면 앞으로는 '창조력(지식 + 감성 + 상상력)'이 주도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창조력은 생산요소이면서 동시에 생산수단'이고 따라서 '창조력은 자본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독자적으로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제 지식으로 무장하고 감성을 구현하면서 상상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경제활동의 중심에 서기 시작한 것이다. 역사상 최초로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생산수단인 창조력이 주도적 생산요소로 떠오르면서 일어난 현상이다. 중요한 것은 창조력은 오직 사람 속에만 존재하며 다른 작업수단에 의해 대체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는 곧 사람을 모든 것의 근본으로 삼는 새로운 사회가 열릴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을 암시한다."(p.214) 저자의 관점에서는 새로운 계급인 '창조자 계급'이 출현하고 기업권력도 구성원 모두가 권력의 중심에 서는 수평적 조직문화로 전환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부터 자본주의 이후 새로운 사회는 사람을 모든 것의 근본으로 삼는 인본주의 사회이며, 인본주의 사회로 나아가는 중심 고리는 기업에서의 '수평적 조직문화의 정착'임이 밝혀진다"(p.253)
그는 '4부 상생의 생태계'에서 세계가 산업시대의 일반적 모습이었던 돈과 기계의 예속으로부터 인간의 본성을 되찾고 이를 중심으로 경제를 운영하고자 노력이 강화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승자독식을 지양하고 동반자 관계의 연쇄사슬인 '상생의 생태계'를 구축해야 함을 이야기한다.
마지막 '5부 새로운 사회의 한복판으로'에서 저자는 "상생의 인본주의 사회로의 이행은 필연적 가능성"이지만 그이행의 경로와 속도를 규정하는 요소는 사상문화적 동향, 정치사회적 환경, 기술적 조건, 경제적 변화 등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 중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치는 것은 사상문화적 동향임을 주장한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사상과 문화, 기술을 체화한 새로운 인간형이 등장하면서부터 열리기 시작한다. 거꾸로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인간형을 창조하기도 한다"(p.445)
책 전체에서 저자는 피터 드러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하고 있고 실제 기업과 경영의 가치와 긍정성, 지식과 창조력에 대한 그의 과도한 강조하면서 드러커의 글을 자주 인용한다.
[ 2012년 6월 17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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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그 이후』는 『다현사』를 집필했던 박세길 작가가 2008년 세계 주가 대폭락, 2011년 유럽의 금융 위기와 및 반(反)금융자본주의 시위 이후 자본주의의 미래에 대한 구상을 그린 책이다. 사회과학 서적으로 조금 두껍고 딱딱해보여서 겁부터 났지만, 차근차근 읽다보니 생각보다 재밌고 흥미로운 부분들도 많았다.
최근 잇따른 중동 반정부 시위에 따른 아랍의 봄, 월가 시위, 영국 대학생들의 등록금 관련 시위... 이러한 글로벌 현상들을 보면서 알 수 없는 불안감도 느꼈고,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1%에 대해 99%의 시민들이 변화를 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 읽게된『자본주의, 그 이후』는 승자독식 논리인 지본주의에 대한 경종을 울리고 있다.
이 책은 총 5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2부는 미국 금융자본주의 붕괴를 중심으로 변화를 맞은 자본주의 문명의 변화를 거시적으로 살펴본다. 자본주의가 미국을 중심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어 3~4부는 저자가 새롭게 제시하고 있는 새로운 사회의 주요 개념들을 본격적으로 살펴보는데, 인본주의가 어떻게 전환기의 자본주의로부터 태어나 진화하고 있는지, 승자독식의 자본주의가 어떻게 소멸되고 상생의 생태계가 조성되는지를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5부에서는 상생의 인본주의 사회에 빠르고 확실하게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면서 새로운 사회상을 구체적으로 그려본다.
세계적인 경영 구루들조차 앞으로 어떤 시대가 펼쳐질 지 장담하지 못하는 지금,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도발적인 주장을 펼친다. 공산주의가 자본주의의 대안이 될 수는 없었지만, 공산주의의 몰락이 자본주의의 실패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며, 자본주의보다 더 나은 사회는 반드시 존재할 것이라고 말한다. 승자독식이라는 논리로 인해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는 지식사회의 도래라는 외적 환경의 변화로 더 이상 버티기 힘든 상황이라고 설명한 저자는 새롭게 상생과 인본주의라는 두 핵심 개념을 끄집어 낸다. 상생의 인본주의. 그가 이 책에서 말하려는 핵심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그 이후』에서 저자는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의 모습을 모색하기 위해 이처럼 대담한 제안을 하고 있다.
저자는 서문에서 안철수 현상을 언급하고 있다. 기성세대들은 신세대들이 자신들이 구축해놓은 질서에 편입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고 있지만 이는 오산이라는 것이다. 기성세대들이 생각하는 진보와 신세대들의 생각은 확연히 다르다. 이 때문에 신세대들은 자신이 만든 새로운 길을 걸러갈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역사의 진행 방향은 예나 지금이나 새로운 세대의 선택에 의해 좌우됐다고 꼬집는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 안철수라는 인물이 등장했다. 정치인으로서 적합한 인물인지 아직 판단하기 어렵지만, 『자본주의, 그 이후』에서 말하는 상생의 인본주의에 상당히 부합된다고 말한다.
저자가 『자본주의, 그 이후』에서 주장하는 가장 핵심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 상생의 인본주의. 그는 승자독식이 자본주의 체제가 야기한 가장 비판하고 극복해야 할 것이 승자독식이며, 이에 대한 대항 가치로서 상생을 이야기한다. 인본주의는 인간을 세계의 중심에 놓고 사고하는 사상 흐름을 통칭한다. 즉 자본주의의 자본의 자리를 사람이 되차지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보더라도 기술의 변곡점에서 다음 국면을 여는 힘은 기본적으로 상상력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전문가들은 미국 영화사상 가장 중요한 영화의 하나로 <스타워즈>를 꼽는다. <스타워즈>는 28년 동안 모두 6부작이 만들어졌는데 1977년에 개봉된 첫 작품 <스타워즈 에피소드4-새로운 희망>은 그때까지의 역대 영화 흥행 성적에서 1위에 오를 만큼큰 성공을 거두었다. <스타워즈>는 특수효과에서 영화사의 한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미국 액션 영화의 패러다밈을 서부영화에서 SF영화로 바꾸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가희 미국 영화사의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203~204쪽) 『자본주의, 그 이후』는 새로운 시대가 새로운 사상과 문화, 기술을 체화한 새로운 인간형이 등장하면서 부터 열리기 시작한다.(445쪽)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인간형이 상생의 인본주의 사회를 주도한다는 것인가? 조화로운 통일을 추구하며, 수평적 리더십을 발현하는 리더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상생의 인본주의 사회에 맞는 새로운 인간형은 매우 광범위하게 형성되고 있다. 우리는 앞서 신세대의 가치관에서 나타나는 일반적 특징을 살펴본 적이 있다. 그에 따르면 신세대는 냉전 시대를 살면서 흑백논리에 익숙해진 기성세대와 달리 그동안 분리, 대립됐던 가치들을 조화롭게 추구한다. 신세대의 가치 체계는 그들이 의식하든 못하든 상생의 인본주의 사회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신세대에게서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449쪽)
앞으로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이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다만 이를 예측하고, 추측해 볼 따름이다. 『자본주의, 그 이후』를 읽으면서, 책을 읽기 전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짐을 느꼈다. 앞으로 어떤 세상이 올지는 모르지만, 신세대들이 이끌어갈 미래가 어둡지만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렵고 딱딱할 것만 같았던 경제, 정치, 사회 이야기들이 이렇게 흥미롭게 다가올 줄은 미처 몰랐다. 책장을 덮으며, 앞으로 한국 사회를 이끌어갈 리더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할지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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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그 이후 - 박세길 / 돌베개 산업사회의 성공으로 인해 놀라운 속도로 성장을 이룩한 덕에 세상은 어느새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중시하기 보다는 자본을 우선으로 하는 자본만능 주의가 팽배해 지게 되었다. 저자는 자본만능 주의의 수만은 폐해들 그리고 무엇보다 승자독식을 벗어나 앞으로 어떠한 방 향으로 나가야 할지 그것을 위해 지향해야 할 것들에 대해 설명한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수평적 위치에서 존재하는 상생의 인본주의 이다. 책은 과거 산업사회에서 점차 지식사회로 변화해가는 변곡점에 위치한 현실로 부터 시작해서 새로운 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어떠한 것들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으로 끝을 맺는다. 저자는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데 있어 기존의 시스템에 대한 분석 그리고 향후 전개될 인본 주의를 뒷받침 할 근거를 단순히 하나의 관점에서 본 것이 아니라 문화에서 경제 그리고 체제 에 이르기 까지 모든 관점에서 분석하였다. 책의 가장 뒷 페이지에 나와있는 참고문헌을 보면 이 책을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과 정보를 습 득했는 지를 알 수 있다.
새로운 이론에 대한 주제를 바탕으로 한 도서이다 보니 무조건 적인 수용보다는 '왜?' 라는 물 음을 머리속에 넣고 책을 읽어 나갔다. 주장하는 바에 대한 저자의 정리가 납득이 되야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진정으로 이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부분에 있어 아쉬운 부분이 조금 많았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저자의 논리를 입증하기 위한 타당한 근거들이 제대로 뒷받침 해주지 못 했던 것 같다. 대안을 선택하는데 있어 선택의 폭이 적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으며, 저자의 의 견을 정리하는데 있어 반대되는 입장에 대한 내용이 이해하기에 상대적으로 많이 부족했던 것 같다. '상생의 인본주의'는 이미 기존 체제에서 조금씩 진화해가고 있는 중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