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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토비와 렌을 통해 인류의 미래를 예측한 캐나다 소설이다, 작가 마거릿 애트 우드는 어릴적 곤충학자인 아버지를 따라 매년 봄이면 북쪽 황야로 갔다가, 가을에 도시로 돌아오는 생활을 했다. 이 경험이 녹아나는 소설이다. 토비를 통해 이루어지는 자연에 대한 표현은 탁월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환경에 대한 걱정을 하면서도 매번 환경오염에 동참한다. 아름다운 우리의 환경과 인간의 이기심과 과학의 발전이 진화요 발전이라고 믿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마른 홍수를 통해 이야기를 만들었다. 작가는 기독교 신자로서 인간 종말을 노아의 홍수에서 마른 홍수를 빌려왔다. 마른 홍수란 인간의 삶의 영역이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자연 파괴는 더 이루어지고 그로 인해 동물멸종이 일어나고 발전이고 진화라고 믿는 과학 산업의 발전은 새로운 바이러스로 우리의 세계를 침범하여 인간을 파멸하게 하는 것이다. 책속의 글을 인용하면 ‘인간의 타락은 다차원적이다, 채식주의였던 선조 영장류는 나무에서 떨어지면서 고기를 먹는 버릇이 생겼다. 그런 다음 그들은 본능에서 이성 이성에서 기술로 옮겨갔다. 간단한 신호를 나누던 사람들이 복잡한 문법을 사용하면서 인간성이 나타났고 불이 없던 시절에서 불의 사용으로 그런 다음 무기 사용으로 거기다 계절적 짝짓기 가 끊임없는 성적 흥분으로 변해가며 추락을 거듭했다. 결국 그들은 순간순간 행복하던 삶에서 사라진 과거와 머나먼 미래를 근심 걱정하는 삶으로 타락했다.’라고 원인을 적었다. 환경에 대한 보고서는 많다.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화학제품이 얼마나 유해한지, 멸종하는 동물이 얼마나 많은지, 남극과 북극의 빙산이 얼마나 녹아내리는지, 지구의 사막화가 얼마나 집착하는지, 과학 발전이라는 이름아래 바이오산업이 얼마나 위험한지..... 이를 해결하는 것이 자연 친화적 생활이라는 것을 한권의 소설로 알려준다. 전반부는 홍수 후와 홍수 전을 교차하면 조금 느리게 진행되지만 뒷부분은 마치 한편의 영화를 보는듯한 묘사와 박진감을 주는 재미있고 환경의 인식과 자연에 대한 존중을 주는 놀라운 소설이다. 정말 물 없는 홍수가 올까? 지금 이대로 이익을 추구하는 과학 발전과 소비위주의 생활이 이루어진다면 종말로 갈듯도 하다. 사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길들여진 수많은 문명의 이기는 에너지에 의존하고 있다. 이런 문명의 이기는 에너지가 없으면 쓸모가 없다. 집안에 전기가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다. 우리의 이런 의존성은 하나의 문제만 발생해도 잠시 순간에 무너질 것이고, 자생적인 것만이 나를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는 자생적 물건들은 점점 쓸모가 없어지고 있는 이즈음 과학발전의 집착과 상업화에 끌려 다니는 우리 자신을 반성해야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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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보니, 이 세상에 의로운 사람이라고는 너밖에 없구나. 너는 식구들을 다 데리고, 방주로 들어가거라. 모든 정결한 짐승은 수컷과 암컷으로 일곱 쌍씩, 그리고 부정한 짐승은 수컷과 암컷으로 두 쌍씩, 네가 데리고 가거라. ...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 대로, 수컷과 암컷 둘씩 노아에게로 와서, 방주로 들어갔다. 이레가 지나서, 홍수가 땅을 뒤덮었다. 노아가 육백 살 되는 해의 둘째 달, 그 달 열이렛날, 바로 그 날에 땅 속 깊은 곳에서 큰 샘들이 모두 터지고, 하늘에서는 홍수 문들이 열려서, 사십 일 동안 밤낮으로 비가 땅 위로 쏟아졌다. ... 이렇게 주님께서는 땅 위에 사는 모든 생물을 없애 버리셨다. 사람을 비롯하여 짐승까지, 길짐승과 공중의 새에 이르기까지, 땅 위에서 모두 없애 버리셨다. 다만 노아와 방주에 들어간 사람들과 짐승들만이 살아 남았다. - <성서>, 창세기 7장 세 가지 목소리로 연주되는 종말의 카논(canon) 홍수, '물 없는' 홍수, 그것은 어떤 환경적 종말의 다른 이름이다. 표지 그림에서처럼 동물과 인간이 떠다니고 자동차와 건물이 잠기는 그런 홍수가 그려지지는 않지만, 인간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홍수의 이야기를 모티프로 하는 이 소설은 마치 두 가지 다른 성부의 주제의 윤창과 하나의 바소 콘티뉴오(basso continuo, 순환통주)가 표현해내는 하나의 완전한 바로크 스타일의 카논과 같이 어떤 종말과 남은 자들의 시작을 연주하고 있다. 종결부에 가까운 어느 시점으로부터 시작하여, 과거의 기억과 이후의 시점으로 향하는 시간 그리고 두 다른 시점의 목소리들의 전개, 그리고 어떤 시간의 전개를 마치 베이스 성부와 같이 규칙적으로 얽히고 풀리는 두 성부의 진행을 떠받치는 종교적 담화,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전형적인 카논의 구조를 띈다. 먼저 두 목소리의 주인은 이야기를 주로 끌어나가는 토비와 렌이다. 공적인 것이 완전히 무너져 버린 것으로 설정된 세계 내에서, 모친의 병으로 인해 부모의 경제적 지위가 무너지고, 더 이상 이전의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없게 되어, 평민촌의 험악한 삶으로 자신을 던져넣고, 그 속에서 발버둥치다 에덴의 정원사들의 종교 집단에 가입하게 된 토비, 그리고 자본에 의해 선택받은 삶으로부터 어머니 루선의 외도와 그에 이은 도피를 따라 같은 집단에 들어오게 된 렌, 이들은 어느날 갑작스럽게 찾아온 '물 없는' 홍수를 각자의 위치에서 - 토비는 블랑코라는 폭력배를 피해 숨어든 새론당신 스파에 마련한 은신처에서, 렌은 루선을 피해 취직할 수 밖에 없었던 비늘클럽의 격리실에서 - 맞이하게 된다. 당연히 여기에서 물 없는 홍수란 국가와 공적인 것이 사라지고 사기업들만이 남은 디스토피아적 설정의 어떤 미래적 세계 내에서 자본에 의한 공공연한 생물학적 기술의 남용의 결과로 도래하는 인간 종의 멸종에 가까운 절멸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성서라는 책 속에서 이야기 되는 홍수와 같은, 그러나 그와는 달리 물 없이 도래하는 홍수(이에 대해서는 이후에 좀 더 이야기 해보도록 하자), 그들 각각의 기억을 통해 디스토피아적 사회와 이로부터 도피한 '에덴의 정원사' 집단에서의 생활의 면면이, 때로 시차를 두고, 또는 때로 겹쳐지면서 이어진다.* [* 토비의 삶은 3인칭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렌의 삶은 1인칭으로 전개되는데, 이런 시점의 변동은 어떤 특정한 효과를 드러낸다. 말하자면, 토비는 사회적인 관계로 인해 정원사들의 집단에 가입한 경우이며 어떤 객관적이고 단단한 모습을 드러내는데, 이로 인해 그녀는 집단의 중요한 구성원으로 인정받게 된다. 반면 렌의 경우, 정원사 집단에 들어가게 된 동기는 물론 자발적인 것은 아니지만 어떤 개인적 관계로 인한 것이며, 이에 더해 사춘기 시기의 동요가 함께 더해져, 그녀는 일정 이상 주관적인 방식의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다. 토비의 3인칭 시점과 렌의 1인칭 시점의 서술은 이를 보다 더 확연히 드러내는 효과를 가진다.] 이 두 사람의 목소리와 함께 어우러져 이 어떤 장르적 음악과도 같은 구조를 지닌 이야기를 떠받치는 저음부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어떤 종교적인 담화, 즉 정원사 집단의 지도자 아담 1의 설교다. 종교, 자본에 대한 저항, 환경과 전통적인 생활 방식의 보존이 혼합된 이 설교자의 담화는 환경 운동가 및 저술가들 - 예를 들어, 지구를 하나의 생명체 혹은 어머니와 같은 것으로 그려내는 <가이아> 이론의 러브록이나 DDT 피해를 비판하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저술하여 환경 운동의 선구자가 된 레이철 칼슨 - 을 성인으로 삼는 기념일들로 하여 의례의 형식으로 전달되고 있는데, 어쨌든 이 성인들의 축일은 시간의 흐름의 기준이 되고, 이들의 축일에 맞추어 행해지는 지도자 아담 1의 혼합적 신학의 담화 - 기독교적 종교와 자연 또는 환경이 혼합되어 일종의 자연으로서의 신을 그려내는 - 는 이 매우 그럴 법한 허구를 필연적인 어떤 것으로 풀어내고 있는 카논의 구조에서 그 기반이 되는 순환통주의 역할을 담당한다. 어쨌든 창세기에 서술된 죄악이 넘쳐나는 세상을, 인간들을 물로 쓸어버리기로 한 신, 그에게 선택받은 의로운 자 노아, 그가 신의 명령으로 오랜 세월 동안 만드는 커다란 배, 그 배에 실린 동물들, 40일간의 비와 터져나오는 땅 속의 물, 아라랏 산 위에 안착한 배, 그리고 다시는 홍수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으로서의 무지개로 이어지는 이야기와 같이, 이 공상과학 소설(science fiction)이나 디스토피아 소설(distopia novel)이 아닌 사변적 허구(speculative fiction, [*역자는 이 문구를 '사색소설'이라고 번역])는 - 작가의 말에 따를 때 - 어떤 파국과 그 파국에서 남은 자들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 일종의 종말론적 배치로부터 우리는 어떤 정치적 차원이 있음을 보게 되는데, 이는 인류의 역사 속에서 현실을 부정하고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희구했던 종말론적 종교운동의 궤적이 항상 현실 정치와의 대립으로 치달았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닐 것이다. 토비와 렌, 그리고 그들과 함께했던 정원사들 모두가 처해 있는 허구적 현 상태(status quo) 속에서, 인간은 누구나, 국가의 소멸과 기업의 사회 지배가 공공연히 인정되고 있다. 군과 치안을 담당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시체보안회사, 주택 조합과 생물 과학 연구를 독점하고 있는 건강현인 조합, 쾌락적 욕구 충족을 자본화하는 섹스 마트 등으로 구성된 이 사회의 가장 높은 위계를 점하고 있는 대자본들은 배제된 자들을 양산하여, 평민촌이라고 불리는 울타리 바깥으로 내몰린 사람들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마치 'homo homini lupus(인간은 인간에 대한 늑대)'라는 홉스의 격언을 연상케 하는 삶, 공적인 것이 소멸되어 버린 사회 내에서, 인간은 인간을 잡아먹는다(예를 들어, 시크릿 버거에서 파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고기 패티). 공적인 것이 사라져버린 이 디스토피아적 배치 내에서, 이러한 자본의 지배는 기술을 통해 진행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과학에 대한 어떤 기술적 왜곡을 보게 된다. 과학은 새로운 것을, 이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지식의 장 속에 끌어들이는 노력이며 과정이다. 그러나, 이 세계의 배치 내에서, 과학이 행하는 작업에 찍히는 방점은 더 이상 모든 인간을 위한 '새로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특정한 기술들을 개발하여 더 많은 돈을 벌고, 시장의 약육강식적 경쟁구도 속에서 특정한 인간의 지배적 우위를 지키는 기술적 봉사에 찍힌다. 정원사들은 바로 이런 배경으로부터 등장한다. 물 없는 홍수를 기다리며 모든 기술적 지배에 저항하는 공동체는 한 때 이 체제를 위해 봉사하던 과학자들이다. 어쨌든 이 전직 과학자들이 어떤 이유로 종말론이라는 종교적 주제와 연결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소설은 그들을 기술적 생산도구로 종속시키고 있던 자본의 장치에 대해 이들이 반감을 품었고, 그래서 그로부터 빠져나오게 되는 정황에 대해서는 자세하지는 않지만 추정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지만, 이들이 굳이 종교에, 특히 터무니 없는 종말론에 대해 연관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의문. 과연 자본의 지배라는 절대적인 것이 물 없는 홍수라는 필연적인 - 하지만 동시에 우연적인 - 장치를 통해 사라진 세계 내에서(여기에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를 떠올리는 것은 그리 무리한 상상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절대적인 것의 자리를 어떤 환경적 담론과 종교적인 것의 혼합적 형상이 채우고 들어온 세계 내에서, 과연 어떤 미래를 기대할 수 있을까? 환경 혹은 자연과 신의 융합, 신의 자연화, 혹은 자연의 신격화에서 말이다. 문제는 인간의 역사(history)가 결코 어떤 순수한 것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인간은 그 오염된 배경 속에서도 생존해왔다는 점이다. 인간 종 혹은 좀 더 적나라하게 말해서 인간이라는 동물은 어떤 의미에서든 오염된 혹은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도 적응하여(노아의 홍수 이야기에서,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육식을 하게 되었던 것처럼) 오늘날까지 그 이야기(history)를 이어왔으며, 또한 이어가고 있다. 어쩌면 문제는 결국 오늘날의 환경 담론이 지닌 어떤 회고적, 낭만적 성향에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말하자면 과거의 세계 혹은 지구는 오늘날과 달리 오염되지 않았다던가, 인간이 신과 같은 자연을 마구 훼손하여 더 이상 옛날과 같지 않으니, 이제라도 전통적인 삶으로 되돌아가 자연이 인간의 오염을 스스로 정화하도록 해야 한다는 그런 류의 태도에 말이다. 그것은 과거로의 회귀가 될 뿐이다. 마치 원래 어떤 순수한 것(에덴 동산)이 있었고, 인간은 그 상태로 되돌아가야만 한다는 그런 방식의 회귀의 욕구. 그런 절대적인 것(자본의 지배)을 다른 절대적인 것(신-자연)으로 대체한 세계 내에 남겨진 인간들은 어떤 내일을 맞이하게 될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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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작품 <홍수>는 큰 틀에서 보면 전작인 <인간 종말 리포트>의 후속편으로 인류가 겪게 되는 대재앙을 다루는 디스토피아계열의 작품으로 볼 수 도 있다. 그래서 <인간 종말 리포트>를 읽었던 독자들이라면 작품의 이해속도나 연관관계등을 서로 비교할 수 있는 재미가 한층 부각될 것으로 보인다. 등장인물들이나 정원사라는 사교적 종교단체, 총알기차를 비롯한 극히 과학문명화된 신도시와 과학기술들 그리고 이러한 테크놀러지로 탄생한 너크컹크, 사자양등의 새로운 동물종들 그리고 신의 위임자 역활을 부여 받았다고 오판한 끝에 탄생한 크레이크의 산물들... 일일이 나열할 수 없는 면에서 <홍수>는 <인간 종말 리포트>의 복사판으로 느껴질 수 있을만큼의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연관성이 농후한 측면도 존재하고 있지만 굳이 전작인 <인간 종말 리포트>를 접하지 않더라도 <홍수>만으로도 작가가 독자들과 공감하고자 하는 사유는 충분히 전달되고도 남을 정도의 독립적인 내러티브와 구도를 가지고 충분히 독자들에게 어필될 수 있다. 한편으로 들여다 보면 이번 작품은 시간과 공간적인 배경을 동일시 되면서도 서로 다른 화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또 다른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인간 종말 리포트>가 과학기술적인 정점의 산물인 또 다른 인간종(불멸과 순수의 상징)을 창조해 나가는 과정을 그리는 하드웨어적이고 남성 중심적인(지미/눈사람, 크레이트) 내러티브와 입장을 가지고 있다면 <홍수>는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차용한 신을 위한 정원사라는 종교단체(엄밀히 보면 환경과 종교과 결합한 형태라 볼수있을 것이다)를 통한 영적인 부분를 다루는 소프트웨어적이고 여성 중심적인(토비,렌) 내러티브를 견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측면들은 오히려 두 작품이 별개의 느낌이나 전작의 후속편적인 느낌보다는 양 작품이 상호보완적으로 다가온다는 느낌을 강하게 느끼게 하고 또한 그 내러티브를 들여다 보게 되면 이러한 상호연관성의 깊이를 알게 되기도 하는 유니크한 구도를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전작인 <인간 종말 리포트>의 보완적인 형식(전작에서 다하지 못했던 이야기의 꾸러미를 펼쳐 놓은듯한 착각)으로 비쳐질 수 있다. 내러티브속에 설치되어 있는 개연성을 빌미로 중복적인 이미지들이 색다른 흥미를 불러 일으켜 독자 스스로가 내러티브를 보다 더 풍요롭게 하는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이는 전작인 <인간 종말 리포트>가 한편의 이야기(절망적인 미래상)를 다루고 있다면 <홍수> 말하지 못했던 또 다른 이야기(절망속에서 또 다른 희망을 보는 미래상)를 다루고 있어 비로서 하나의 작품이 탄생하는 구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번 작품을 미래의 우울하고 암당한 상을 그리는 디스토피아소설로 분류하기엔 뭔가 어색함마저 들고 그렇다고 공상과학소설로는 어울리지도 않는다. 현재 우리는 엄청한 혁신과 발전을 거듭한 과학문명기술이라는 하드웨어와 신자유주의의 기치하에 자본이외에는 그 어떠한 논리도 정당화될 수 없는 소프트웨어를 장착하고 앞만 보고 돌진하는 브레이크없는 기차위에 몸을 담고 있다. 이 기차에는 이러한 양대축(과학문명기술과 자본)을 숭상하는 신도들 이외에는 합석할 수 있는 자석마저 없는 그러 기차이다. 그리스도교을 비롯한 인간이 만들어 낸 종교틀에서 보면 신의 위임자 혹은 대리인 자격으로 전 지구의 모든것을 신탁통치해왔다고 그나마 자부했던 우리들도 이제는 과학기술과 자본이라는 새로운 대리인 앞에서는 명함도 내밀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면들이 작가가 언급했듯이 그러그러한 디스토피아계열의 작품보다는 많은 사유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사색소설이라고 봐야 더 합당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작가의 작품들을 대면한 독자들이라면 작가의 종교와 신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와 달리 이번 작품에서는 상당히 우호적인 견지를 발견하게 된다. 각각의 챕터 서두에서 목사나 사제의 설교을 연상케 하는 부분이나 찬송들을 독립된 구도로 배정하여 종교적인 색체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는듯 하여 고개짓을 하게 하지만 결국 이러한 구도의 설정은 내러티브 중간 중간에 배정한 등장인물들의 생각과 독백등을 통해서 종교와 신에 대한 생각을 재정립하게 함으로써(큰 프레임은 성경의 홍수와 노아방주을 연상케 하지마 결국 내러티브의 중점은 인간 외부적인 힘의 작용보다는 인간이 자처한 위기상황과 그리고 이를 극복해 나가는 인간의 또 다른 희망적인 부분을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종교와 신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를 보여준다) 작가 나름대로의 사유를 들어내고 있는 장치적인 역활을 할 뿐이지 종교와 신에 대한 냉철한 비판과 사유는 변함이 없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결국 신의 정원사들과 이들의 신념은 종교적인 차원을 넘어선 인류애 그 자체를 표방하면서 물질문명에 찌든 현세에 대한 일종의 경고 메세지로 들여온다. 종교적 의미에서 떠난 영혼의 중요성 (크레이트에 의해 재 탄생하는 새로운 인류종의 순박함과 순수함이 바로 깨끗한 영혼을 상징하듯이)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이번 작품은 우리 인류의 미래의 모습을 재현하고 예견하는 디스토피아 장르의 작품으로 인식될 수 도 있지만 왠지 소설속에 나오는 씬들이 왠지 낯설지 않고 지금 우리의 현재 모습을 그리고 있는것 같아 절로 가슴한켠을 쓸어내리게 한다. 작가는 독자들이 원하는 미래상을 제시하는 것보다 오히려 현재 이러이러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정신과 육체에 관한 이야기라는 사실에서 오히려 더 큰 공감을 일으키고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가져본다. 그동안 작가는 소설가의 의무가 독자들에게 믿을만한 거짓말을 하는것이라고 공표했지만 왠지 이번 작품만은 그동안 작가가 피력해온 믿을만한 거짓말과 사뭇 다른 진실의 한 모습을 담고 있는것 같아 오히려 씁쓸함을 지울수 없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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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지구는 항상 암울하게 그려지고 있다. 무분별한 자연해손과 고도로 발달하는 과학기술, 유전자 변형, 여기에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기적인 마음과 행동들은 미래가 어둡게 그려지는게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홍수' 역시 앞으로 인류 앞에 놓인 대재앙을 예고하고 있는 작품으로 고도의 과학 기술의 발전은 곧 사람들간의 사랑과 정이 사라지는 사회 모습을 보여준다. 홍수의 저자 마거릿 애트우드는 20세기 캐나다를 대표하는 여성작가로 평론, 드라마 각본, 동화까지 다양한 방면에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홍수'는 인간 멸종에 대한 이야기지만 다분히 종교적인 색채가 강하게 풍기고 있다. 스토리를 이끌어 가는 두명의 여성인 토비와 렌은 낙원이라고 불리우는 에덴절벽 옥상공원에서 같이 생활을 하기도 했으며 토비와 렌이 옥상공원으로 오게 된 사연은 다르다. 토비는 완고하고 고집이 센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아버지의 땅을 사고 싶어하던 시체보안회사의 제의를 무시한 아버지는 계속된 실직과 어머니의 병으로 인한 금전적 타격 끝내 어머니가 죽자 결국 아버지는 스스로 자멸하고 만다. 공부도 포기하고 여러가지 일을 전전하다 들어간 시크릿버거 체인점 그곳에서 그녀는 말할 수 없는 수치심과 모욕감을 참아내며 일을 하다 우연히 보게 된 환경론자인 아담1과 옥상공원으로 오게 된다. 처음 토비가 가졌던 불편한 감정들은 여전하지만 신의 정원사라고 불리우는 아담들과 이브들의 모습을 통해서 토비는 안정을 찾아간다. 렌은 그녀의 어머니가 집착하던 남자 젭.. 세상과의 소통을 맡고 있는 그는 미친아담으로 불리운다. 옥상공원에서 생활하던 렌의 마음속에 공허하고 허한 마음을 평민촌에서 생활하던 아만다와의 만남으로 그녀는 우정이 무엇인지 배워간다. 어머니의 돌발 행동으로 옥상공원을 나오며 진짜 아버지와 함께 생활하게 된 렌... 그녀는 아만다와의 이별과 거짓으로 일관된 모습을 보여주는 어머니와의 생활을 통해서 변해가는데...
인류에게 들이닥친 물이 없는 홍수로 인한 파멸... 토비와 렌이 과거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끄집어 내면서 스토리를 이끌고 있는데 처음에 한동안은 이야기들이 뒤죽박죽 헷갈리는 면도 없잖아 있었다. 이브 6인 토비와 첫사랑에 대한 집착과 아픔을 간직한 렌이 '새론당신스파'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암울하고 부정적인 미래사회를 그려내는 디스토피아 소설로 기독교의 인류 멸망에서 묘사된 모습들이 담겨진 이야기들이 새로운 단원이 시작할때마다 아담1은 목사님처럼 설교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유전자의 결합으로 새롭게 나타난 기이한 형태의 잡종 동물들은 섬뜩한 느낌을 받게 한다.
미래의 우리 사회를 보는 듯해서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공상과학소설이라기보다 사색소설이라고 말하는 저자... 그녀는 우리에게 현재 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는 생태 환경의 대재앙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과 사유를 요구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지금도 세계 여기저기서 이상 기후 변화나 재난이 일어나고 있다. 여기에 여러가지 사회현상 역시도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는데 그럼에도 여전히 희망을 놓지 않고 사랑을 외친다. 스토리가 술술 잘 읽혀진다기보다 끊어서 읽으면서 음미해 보아야할 소설이다. 한동안 페이지가 잘 넘어가지 않아 나름 힘들었으며 스토리도 뒤죽박죽 헷갈렸다. 책에서 그려진 미래의 인류의 모습처럼 변하지 않기 위해 현재를 되짚어 보고 생각해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색다른 스토리와 흥미를 유발시키는 소설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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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은 무려 페이지수가 700페이지에 가까울 정도로 아주 두꺼운 책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기까지의 여정은 결코 쉽지가 않았던것 같다 그리고 흥미로운 주제와 작가만의 상상력으로 독자를 이끄는 힘은 크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어느 새 나도 모르게 꾸벅꾸벅 졸았던것 같다 봄이라서 그런가 춘곤증으로 인해서 좀체 책에 집중할수가 없었던것 같고 결코 쉽지만은 않은 주제를 다룬 책이기에 몰입보다는 피로감이 먼져 몰려왔던것 같다
이책은 미래의 재앙을 경고하는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읽다보면 우울해진다 ㅋ 하지만 미래의 재앙에 대한 경고에 지금의 우리들이 반성하고 깨닫는다면 멸망해 가는 지구를 구할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이책은 자연재해나 미래의 재앙에 대한 이상향을 다룬 어두운 암흑세계를 그린 디스토피아 소설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는 조금 비현실적이 기도 한것 같다
하지만 인간의 이기심과 과학문명의 발단 환경파괴 이상기온 충분히 지금 현실세계에서도 야기되고 있는 문제를 등한시 한다면 미래사회에 우리들에게도 충분히 일어날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에 이 책을 읽아보면 경각심이 생기는것 같고 환경과 자연에 대해서 반성하고 되돌아보게 되는것 같다
이책을 쓴 마거릿 애드우드는 현존하는 현대문학의 거장이라 칭할수 있을만큼 이미 20세기의 문학에서 수 많은 업적은 남긴 사람이며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 앨리트다 그리고 21살때 처음 시집을 발간한 천재이기도 하다 또한 평론 비평 드라마 각본 동화 순문학 에서도 월등히 자신의 분야에서도 최고의 권위자가 된 캐나다를 대표하는 여성작가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이 책을 보면서 작가가 가진 재능과 겸비해서 마거릿 애트우드만이 가진 상상력과 창의력 그리고 글에 대한 재능이 부럽기도 했던것 같다
마거릿 애트우드는 도둑신부 눈먼 암살자 고양이 눈 을 비롯해 시녀 이야기 까지 인간의 심리묘사에서 부터 우리들이 반성하고 각성해야될 문제까지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쓴 작가만의 책들도 주변에서 쉽게 구해볼수 있기 때문에 이 작가가 가진 작가로써의 자질과 능력 그리고 작품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꼭 마거릿 애트우드가 쓴 책을 찾아서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으며 토비와 렌의 여정을 그린 이 책을 읽고 멸망하지 않을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 지금 현재의 우리들이 뭘 해야 하는지 되돌아서서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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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홍수 – 멸망의 끝에서 외치는 사랑
처음 “홍수”를 받았을 때의 인상: 여성작가 (마거릿 애트우드의 소설을 그전까지 한번도 읽어보지 않았습니다) 라는 사실과 핑크색 그라데이션 디자인의 두툼한 책, 그리고 뒷면에 친절하게 쓰여진 문구 “세상이 사라져도 사랑은 남는다” – 종합해보자면 아마도, 희망이 모두 사라져버린 세계에 덩그러니 남겨진 주인공들이 서로를 의지하면서, 또 사랑하면서 새로운 소망을 시작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이런 선입견 때문에 첫 장이 더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확실히, 다른 때와는 달리 몇번이나 반복해서 읽어야 했으니까요. 그렇게 몇번 읽기를 반복하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면서, 이 소설이 제가 생각하고 기대했던 소설과는 전혀 다른 소설이라는 것을 점차 깨달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마거릿 애트우드의 작품세계나 “디스토피아 소설”의 의미를 미리 알고 읽어나가기 시작했더라면 이러한 반전은 없었을텐데요!
700쪽에 달하는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서 사실, 첫 1/3은 작가와 씨름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애트우드는 마치, 그녀의 문학관과 서술하고자 하는 세계에 대해서 독자가 이미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듯, 설명과 묘사를 극히 아끼고 있는 듯 했습니다. 애초부터 별도의 설명 없이 아담1, 신의 정원사, 물 없는 홍수 등의 새로운 개념들이 쏟아져 나오는 초반부는 마치 작가를 상대로 (혹은 그의 진술을 토대로) 나름 추리하며 이해해가야 하는 느낌이 들더군요. 답답하기도 했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것이 “홍수”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긴장감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애트우드는 어떠한 “의문” 혹은 “궁금증”을 유발시킨 후에 그것을 더 궁금하게 하여 애간장을 태운다거나 속시원하게 풀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궁금하다는 것 자체를 계산하지 못한 것처럼 그녀의 페이스대로 이야기해 나갑니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분명히 작가가 “키스톤 (key stone)” 처럼 제시한 논제가 더이상 발전되나가지 않게 되면 의아해지기 마련입니다. 분명 이어질 것 같은 내용인데도 한동안 “방치”되어 그 인과관계나 연계성마저 모호해지게 되죠. 이것은 마치 우리의 실제 삶과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영화나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예를 들어, 어떤 수상한 사람이 나와 만나게 되면, 그 사람에 대한 에피소드가 등장한다거나) 전개가 아닌 그저 의미 있는 일과 의미 없는 일들이 차별없이 연속되며 이어져나가는 시간. 어쩌면 그것이 비현실적인 “홍수”에서의 인류멸망을 더욱 더 현실적으로 묘사하는 방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세계가 종말로 치닫고 있을 때, 세상에는 여러 극단적 종파들이 생겨납니다. 애트우드가 서술하는 이런 광신교 집단의 대부분은 성경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그녀가 특정 종교를 비방하거나 비판하기 위해서 성경을 인용하였는지는 불분명합니다. 주목할만한 점은, 홍수에 등장하는 광신교 집단의 행동들이 기존의 극단적 종교집단들의 행위와 일치하는 점이 많지만, 그들의 이념에 있어서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외부와의 접촉을 피하고 외부인들로부터 자신을 스스로 격리시키거나, 단체 내의 새로운 법과 강령을 만들어 강요하는 것에서는 세간에 알려진 일부 사이비 종교 단체의 성향과 비슷합니다만, 자신들의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 생물의 유전자를 조작해 사자양을 만든다던가 (p.151. 이것은 이사야 11장 6절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를 염두에 둔 발상인 것 같습니다. 사자양을 만들어낸 사이비 종교집단의 이름 역시 “사자 이사야파” 입니다), 영원히 살 수 있는 완벽한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을 추진합니다. 이 “완벽한” 인간들은 마치 감정을 배제한 순한 초식동물처럼 서술되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세계의 멸망은 이 인간들의 유전자를 창조해내기 위한 과정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홍수”를 읽으면서 감탄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애트우드의 풍부하고 구체적인 상상력이었습니다. 모든 소설의 작가들이 그렇지만, 그들이 소설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하나의 세계와 세계관을 창조해낼 때에 그 세계가 얼마나 신빙성있게 다가오느냐에 따라 작가의 역량이 판단되기도 합니다. 애트우드가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이 소설을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녀가 인류에게 어떠한 경고를 보내고 있기 보다는, 마치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서술한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홍수”의 인류의 멸망이, 세계의 종말이 더욱 더 섬뜩하게 다가오는 것이죠. 그런 면에서 “뉴욕 타임즈”의 “아무것도 예언하지 않지만 무서울 정도로 사실적”이라는 평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자신의 의도하는 바를 전달하기 위한 세계를 창조하고 메세지를 넣은 것이 아니라, 실존하는, 직접 본 세계를 담담하게 증언하는 듯한 그녀의 문체는 오히려 예언서라기보다는 계시록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홍수”에서 애트우드가 말하고자 하는 “사랑”은 우리가 흔히 접하는 애틋하고 따뜻한 개념의 “사랑”과는 차이를 보입니다. 홍수에서 말하고 있는 사랑은 쉽게 말해 “인간에게 남은 마지막 인간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류의 멸망이 가까워져오면서 세상은 끔찍하게 변하기 시작합니다. 한 사람이 더이상 사람으로서의 가치를 가지지 않으며 생명의 존엄성은 사라집니다. 단지 “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하기 때문에” 강자는 약자를 약탈할 수 있고, 그가 내키는 대로 행동할 수 있게 됩니다.
“(고통공 감옥의) 어떤 팀들은 자신들이 죽인 대상을 나무에 걸어 놓았고 다른 팀들은 사체를 훼손했다. 머리를 잘라 내고 심장과 신장을 꺼냈다. 상대 팀을 위협하기 위한 행위였다. 음식이 모자라거나 그저 자신이 얼마나 비열한 인간인지 보여주기 위해 신체 일부를 먹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면 경계선을 넘는 것뿐만 아니라 경계선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잊는다고 토비는 생각했다.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상관없이 그런 짓을 하게 된다” (p. 158)
수퍼바이러스가 전세계에 퍼지면서 사람들은 좀비처럼 녹아들어갔고, 그들 중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이 인간의 마지막 모습 – 주변 사람들을 돌보아주고 생각하는 마음 – 을 가진 것입니다. 자신의 식량을 약탈하던 돼지를 총으로 쏘아 죽이고 난 뒤 죄책감을 느끼는 토비나 친구 아만다를 구하기 위해 부상당한 몸으로도 기꺼이 적진으로 들어가는 렌은 우리가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는 (홍수에서 등장하는) 유일한 윤리적 요소입니다. 또한 토비를 돌보아주고 걱정해주는 레베카, 어릴적 친구를 위해 위험을 무릎쓰는 섀키와 크로제 역시 마찬가지죠. 반면 토비에게는 어머니같았던 필라는 살아남지 못하는데, 수퍼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죽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불치병에 걸린 것을 알고 스스로 죽음을 택합니다. 렌을 돌보아주었던 모디스 역시 그녀를 지키는 과정에서 고통공 탈옥수들에게 비참하게 살해당해 생을 마감합니다.
상반되는 모습은 절대적 선의 역할을 맡았던 아담1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철저한 이상주의자로서 신의 정원사를 이끄는 사람이었고, 결정적으로 토비를 죽음으로부터 구합니다. 또한 실용주의자였던 잽과는 달리 그는 이념을 중요시하며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사람이었고, 타협하지 않는 원칙주의자였기 때문에, 신의 정원사의 리더로서, 혹은 멸망 앞에 놓인 인류를 이끄는 지도자로서 손색이 없어보입니다. 하지만 “물 없는 홍수” 가 일어나기 얼마 전 신의 정원사들이 거주하던 “에덴절벽”은 함락되고 그들은 순식간에 도망자 신세로 전락하게 됩니다. 도피 중에도 아담1은 매 장마다 연사를 계속하는데, 평화주의자였던 그의 모습은 점점 자신의 이상을 보존하기 위한 자기합리로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여행길에 멜린다, 대런, 퀼, 이 세 동반자를 기쁘게 환영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은총, 즉 신의 정신을 발휘하는 겁니다. 그들은 신의 섭리로 인해 격리될 수 있었기에 기적적으로 물 없는 홍수를 모면했습니다.” (p. 572)
“아울러, 여행길에서 우리는 우리 곁을 떠난 사람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대런과 퀼은 질병에 굴복했는데 그들이 보인 초기 증상에 대해 우리는 크게 우려했습니다. 그들의 부탁 아래 우리는 그들을 남겨 두고 떠났습니다. 우리가 건강을 유지할 수 있도록 그들이 보여 준 배려는 칭찬할 만한 것이었고 우리는 그들의 희생정신에 감사드립니다. 멜리사가 그토록 뒤처지도록 내버려 둔 것은 어쩌면 착오였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야생 개 떼를 통해 그녀는 동료 동물들에게 최고의 선물을 선사했고 신의 위대한 섭리를 따라 단백질 대순환의 일부가 됐습니다.” (p. 627)
이러한 아담1의 변화는 그가 “인간의 타락은 다차원적이다”라고 정의한 것 (p.295) 과 연계되는 것 같습니다. 앞서 그는 필라의 죽음을 왜곡하면서 토비에게 “뻔히 드러날 거짓말을 해야 할 때도 있어. 하지만 그건 더 큰 대의명분을 위해서란다” (p. 289) 고 말하면서 그의 이런 변질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했습니다.
아담1과 그를 따르던 무리들이 결국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 알 수 없지만, 아담1의 마지막 연사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은 자신들이 한 때 머물던 에덴절벽으로 돌아가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보입니다 (즉, 마지막에 렌 일행을 향해 온 무리들은 아닐 것입니다). 토비는 마지막으로 신에게 묻습니다. 만약에 신이 존재한다면, 어째서 우리같은 사람들을 남겨놓은 것이냐고. “홍수” 세계의 신은 결국 대답하지 않지만, 앞서 설명한대로 그들이 “사랑을 간직한 자들이기 때문”이라면 결국 세계의 멸망 후에는, 사랑이라는 본질을 간직한 만신창이의 인간들과 감정을 배제한 튼튼한 조작된 인간들이 양분화되어 살아가게 되는 것이겠죠. 소설의 마지막 주인공 일행을 향해 노래하며 다가오는 무리가 어떤 사람들일지 알 수 없지만 (사실, 그것이 진정 일어난 일인지 아니면 죽음에 가까이 다다른 그들이 마지막으로 보게 되는 환상인지 알 수 없지만) 결국 토비와 렌 일행은 멸망해버린 지구에서 노아의 가족들처럼 다시금 인류의 번성을 꿈꾸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마지막 남은 진짜 인간들 가운데서 일어날지, 아니면 새로운 만들어진 인류와 합쳐질지는 알 수 없겠지만요.
애트우드는 이 소설이 공상과학소설(Science Fiction)으로 분류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합니다. 그녀에 따르면 “홍수” 는 사색소설(Speculative Fiction)이라고 하는데, speculative 라는 단어에는 사색, 공론 등의 뜻이 있습니다. 인류의 멸망이 유전자 조작과 성욕의 충족을 추구하다 벌어진 일이라는 이론을 생각해볼 때, 애트우드가 생각했던 “최고악”은 아마도 성(sex)이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홍수”에서는 금전적 갈등이 크게 부각되지 않으며, 성을 사고 팔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홍수”는 그 두께만큼이나 난해한 부분이 많아, 철학에 능통한 사람이라면 애트우드가 묘사한 사물, 서술 하나 하나에 개별적 해설과 철학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과연 아담이나 이브가 “된다”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으며, 아담은 어떤 신을 향해서 기도하고 경배하는 것인지, 그들에게 순교자는 어떤 의미인지 등등… 하지만 애트우드 자신은 끝까지 이러한 의문들에 대해 침묵하고 있기 때문에 해석은 결국 독자의 몫이 되는 것 같습니다.
홍수를 읽는 내내 가슴 한편이 답답하고 불편해지는 것은 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홍수”에 등장하는 반인류적인 행위들이 우리 사회에서도 볼 수 있기 떄문일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이익과 관심사만을 추구하고 싫증났거나 방해되는 것들은 모조리 잔인하게 제거해버리는 블랑코의 모습에서도, 신도들에게는 철저히 외부문화를 금지하면서도 자신들은 비밀리에 컴퓨터를 사용하는 아담과 이브들의 모습에서도, 그것들과 우리 사회와의 평행성이 느껴질 때마다 “홍수”는 더욱 더 사실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죠. 이 난해하고도 거대한 소설을 결국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개개인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수”를 대단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이 장편 소설을 치밀하고도 훌륭하게 이끌어나가는 애트우드의 능력 때문일 것입니다. 기발한 신조어와 합성어에서도, 탄탄한 세계관과 설정에서도 그녀는 그녀의 기량을 마음껏 발휘한 듯 보입니다. “홍수”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녀의 소설 “인간 종말 리포트” 를 거쳐와야 한다니, 여러 궁금증과 의문들은 “인간 종말 리포트”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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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릿 애드우트의 소설 홍수.. 이 소설은 물없는홍수 즉 미래의 슈퍼바이러스로 인해 살아남은 두 여자주인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하다 제목에서도 알다시피 신학쪽을 아는분들이라면 이책을 더쉽게 이해할수도 있다 홍수라는것부터가 노아의 방주에서 따왔고 성경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기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떠나서 이것이 멀지않은 우리의 미래가 될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물없는 홍수라는 재앙이 일어나기전부터 무분별한 개발 ,쾌락에 빠져든 사람들, 폭력 DNA변형등으로 인해 재앙의 절차를 밟아가고 있다 현재 우리도 그렇지 않을까...?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산이 깍여서 비가 조금만 많이 와도 산사태등... DNA복제등을 연구... 이렇게 많은 연구와 개발은 우리들의 삶을 확실히 편하고 퀄리티 높은 삶을 영위시킨다 이 책에서 나오는 아담1이라는 인물은 아마 마거릿 애트우드가 만든 노아가 아닐까...? 마거릿 애트우드는 아담1로써 우리들에게 미래의 벌을 책으로나마 일깨워 주는것이 아닐까...? 현재 우리들도 타락한 생활에 빠져 자연으로부터 벌을 받을려고 하지만 우리는 깨닫지 못하고 있는게 아닐까... 이상기후 북극곰등... 자연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나는 아프다고... 이제는 못참을것 같다고... 살려달라고.... 우리들의 삶을 위해 그것을 무시하고 있는게 아닐까 개발과 연구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고 어떻게 발전시키는게 중요하지 않을까 혹자는 이렇게 말할수도 있겠다 그러면 연구를 어떻게 하고 발전을 어떻게 시킬꺼냐고 우리들의 삶의 질을 높여야 하지 않겠냐고 나도 이것에 반대하지는 않는다 단지 너무 한방향만 보는 개발이 아닌 두루두루 둘러보는 그런 상호보완적인것이 되면 안될까 멀지 않은 미래일수도 있고 먼 미래일수도 있는 물없는 홍수... 이것을 막는것 예방하는것은 오로지 우리들의 손에 달려있다 그것을 막을수 있다면 우리들은 막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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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회상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인간종말 리포트의 주인공들이 등장하고 있으며 그 이후에 일어난 일도 담고 있습니다. 인간 종말 리포트에서 총을 들고 세상으로 나간 눈 사람이 어떻게 되었는가의 답이 여기 있고,. 지미 말고 다른 사람들도 살아남았는가? 에 대한 답도 여기 있습니다. 그러니 홍수를 읽고 인간종말 리포트를 읽으면 상당히 맥이 빠지죠. 거기다 인간 종말 리포트가 과연 이 세상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밝히지 않고 시작해 중후반부 에 밝히는 책이다보니 인간종말 리포트의 스릴감도 즐기기 나쁘구요. 홍수의 전염병을 누가 어떻게 왜 발생시켰는가를 알기 위해서도 인간 종말 리포트를 읽어야 합니다. 두 책은 따로 떨어져도 빛이 나지만 함께 있으면 더 빛이나죠. 인간 종말 리포트에서 화자의 목리 뒤로 사라진 인간들이 바로 여기서 등장하거든요. 그리고 인간 종말 리포트에 등장하는 인간들의 이면을 여기서 파악가능합니다. 전적으로 전작은 지미의 시선에 기대있고, 인물들은 지미의 눈에 밎지고 있거든요. 그러니 지미를 이해하려면 홍수가 필요하지요. 인간 종말 리포트가 종말의 날을 맞은 한 남성, 혹은 두 남성에 대한 이야기라면 홍수는 종말의 날을 맞은 두 여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두 이야기는 서로 맞물려 돌아가고 특정한 지점에서 합쳐집니다. 바로 지미와 글렌의 등장에 의해서요. 40대의 여성 토비, 20대의 젊은 렌. 토비는 새론스파에서 렌은 비늘클럽에서 각각 전염병을 피합니다. 그러나 전염병이 지나가도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하죠. 굶주림 말고도 둘은 많은 위협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야기는 전염병에서 살아남은 둘로부터 시작하여 둘의 과거를 추적합니다. 그들이 지낸 삶을 정밀하게 따라가죠. 정원사로서의 삶, 그 후의 삶. 지미와 만나고 글렌과 만나는 이야기, 대홍수가 지나가고 살아남으려 하는 이야기. 두 여자의 고통기이자 극복기입니다. 이야기는 쫀쫀하고 사색적입니다. 미래의 이야기라지만 미래 같지도 않죠.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일이 대부분이니까요. 오늘 일어날 수도 있고 내일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이야기도 재미있고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카피에서 내내 타령하는 사랑이야기는 왜 나왔는지 모르겠어요. 심지어는 해석에서도 사랑이야기나 나오는데 여기서 사랑이야기가 그렇게 중요하든가요? 물론 범의미적으로 인류애적 사랑을 포함한다지만 그렇게 사랑을 강조할만큼 중요한지는 모르겠어요. 사랑도 이성도 필요없는 연대의 중요성이 훨씬 두드러지던데. 카피빼고는 참 좋은 책이었습니다. 아, 그리고 푸른 괴물들이 참 잠시 등장할 뿐더러 토비와 렌은 그들을 적대시 하지도 않는데, 무슨 그들과의 만남이 서사의 큰 줄기인듯 써놨네요. 사실과는 다릅니다, 하지만 확실한 건 뛰어난 소설이고 참 좋은 소설이라는 사실이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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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렛 애트우드의 소설은 이번이 두번째네요. 첫번째로 만난 작품은 '도둑신부'였는데요, 사실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그 책이 처음이었습니다. 캐나다의 소설가로 페미니즘적인 색채가 강한 작가라고 하는데요, 첫작품인 '도둑신부' 역시 페미니즘 소설로 볼 수 있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도둑신부'는 상당히 제 취향의 작품이었습니다. 플롯도 좋았습니다만 서술상의 섬세한 묘사가 제 취향에 맞았던 것이죠. 평을 보니 그 부분을 지루하게 느끼는 분들도 적지 않던데요, 대체로 여성분들이 좋아할 수 있는 서술방식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이 작품 '홍수' 역시 '도둑신부'를 연상시키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우선 둘 다 여주인공들의 우정이 중요한 축을 차지한다는 점이 있겠고요, 섬세한 인물 묘사가 돋보인다는 점도 유사합니다. 하지만 차이점도 많군요. '홍수'는 디스토피아적 SF소설에 가깝거든요. 슈퍼 바이러스로 인해 인류가 멸종의 위기에 처한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서사적인 면이 적고 대신 상징적인 요소를 다수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SF라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디스토피아적 배경의 역할이 그다지 크지 않게 느껴지는 것이죠. 그래서인지 분량이 더 적음에도 불구하고 '홍수' 쪽은 수월하게 읽기가 어렵습니다. 제목으로도 알 수 있듯 성경으로부터 인용되는 상징도 적지 않아 보이는데요, 그런 다수의 상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인지도 모르겠네요.
애초에 기대도 안했습니다만(!) 예상대로 한번에 읽고 대부분을 소화해낼 수 있는 소설은 전혀 아닙니다. 다만 주제의식이 명확한 편이고 좋은 주석이 달려 있어서 다시 읽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 다행이군요. 아무튼 그녀에 대한 호기심을 꺾는 작품이 아니라는 점이 고맙고요, 조만간 그녀의 대표작이라는 '눈먼 암살자'에 도전해볼까 싶군요. 그리고 민음사의 모던클래식, 지금까지 만난 책들은 수준 이상의 만족감을 줬어요. 앞으로도 기대해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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