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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에 목숨을 건 까닭..
"무덤에 목숨을 건 까닭.." 내용보기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시제에 참석하곤 했다. 선산에 일가친척들이 모여 조상에게 지내는 제사는 한바탕 축제와 비슷했다는 기억이다. 그러다 사는 게 바빠서인지 어느 순간부터 건너뛰다가 지금은 거의 참석을 하지 않는다. 어쩌면 종손이 아니었기에 건너뛰고, 참석을 하지 않는 것이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또한 요즘은 대부분 화장을 하기 때문에 선산의 중요성이 예전과는 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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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시제에 참석하곤 했다. 선산에 일가친척들이 모여 조상에게 지내는 제사는 한바탕 축제와 비슷했다는 기억이다. 그러다 사는 게 바빠서인지 어느 순간부터 건너뛰다가 지금은 거의 참석을 하지 않는다. 어쩌면 종손이 아니었기에 건너뛰고, 참석을 하지 않는 것이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또한 요즘은 대부분 화장을 하기 때문에 선산의 중요성이 예전과는 많은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산과 관련된 분쟁은 요즘도 끊이지를 않는다.

 

그렇다면 선산과 관련된 분쟁은 언제부터 있었을까? 조선시대 민사소송을 사송(詞訟)이라고 한다. 노비소송, 전답소송과 함께 조선시대 3대 사송중의 하나인 산송(山訟)은 산과 관련된 소송이며, 조선시대 사람들에게는 묘지소송을 의미했다고 한다. 이런 산송은 여느 소송과는 달리 삼국시대나 고려시대는 물론, 중국과 일본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는, 오직 조선후기 시회만의 역사현상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선산, 달리 말하여 종산이 출현한 것은 유교이념과 관계가 있다. 16세기 성리학에 근거한 종법질서가 확립되면서 부계의식이 강화되고, 유교식 상장례가 확산되기에 이른다. 따라서 그때까지 사방에 널려있던 실전묘를 찾아 회복하고, 부계 조상의 분묘를 한곳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조상의 분묘를 단장하고 묘역을 조성하는 일에 관심을 쏟다 보니, 자연스럽게 묘지와 관련된 송사가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산송이란 명칭이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1664년 현종대 라고 한다. 흔히 우리들은 묘지소송을 떠올리면 명당자리와 관련된 풍수지리를 생각한다. 그러나 당시 사대부들에게 있어 택지는 자손의 명리를 바라는 측면 보다는 조상의 안거를 통하여 효를 실현한다는 의미가 강하게 작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의미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조선의 최고법전이라 할 수 있는 경국대전에는 직위에 따른 차등 보수가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16, 17세기 주자가례가 보급되면서 관직에 따른 차등의례 보다는 사대부 공통의례를 지향하게 되었다. 주자가례의 택지설은 동기 관념에 바탕 한 조상의 안거와 자손의 번성이라는 측면에서 풍수설과 결합하는 양상을 띠었고, 이는 유교의 효 관념이 풍수설과 결합하여 분묘의 화복론을 인정한 것으로 조선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좌청룡 우백호라는 지극히 주관적인 용호수호의 범위가 인정되는 바람에, 묘를 쓰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간의 합의는 쉽지 않았고, 따라서 분쟁의 범위는 확대 될 수밖에 없었다. 초기에는 사대부간의 위선의식과 가문의식에 따라 진행되던 산송은 18세기 후반 신분질서가 동요하면서 하층민에게 까지 확대되기에 이른다.

 

산송의 주요원인은 투장이다. 투장이란 다른 사람이 수호하는 분묘구역 내에 주인의 허락 없이 분묘를 조성하는 일체의 행위를 말한다. 따라서 산송은 두 분묘의 위치와 선후관계 등을 따져 어떤 묘를 파낼지 말지를 결정하면 되는 명백하게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는 소송이었다. 그러나 산송은 이미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서, 가문간의 대립이었기에 한번 발생했다 하면 단기간에 해결되지를 못하고 체송되는 것이 다반사였다. 패소자는 판결에 승복하지 않고 재차, 삼차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고, 또한 유교사회에서 분묘는 살아있는 사람과 동일하게 취급되면서 타인의 분묘를 파내거나 훼손할 수가 없었기에, 판결이 내려지고 난 다음에야 소송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고 격화되기 일쑤였다. 산송은 때에 따라서 송송(松訟)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분산수호에는 양산금양권이 수반되었다. 양산금양권이란 분산구역내의 산림을 잘 기르고, 다른 사람들의 접근을 차단할 수 있는 권리이기도 했다. 따라서 분산수호자들은 나무에 대한 욕구를 어느 정도 해결가능 했지만, 분산을 확보하지 못한 이들은 목재를 확보할 수 있는 일이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투장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남의 분산에서 몰래 나무를 베어내기도 했으며, 이는 결국 송송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불교식 화장문화가 유교식 매장문화로 바뀌면서 분묘와 종산의 중요성에서 시작된 산송은, 오늘날에는 그 양상을 달리하고 있다. 다시금 화장문화로의 확산이 이루어지고, 종법질서가 해체되면서 분묘와 종산의 의미가 쇠퇴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아직까지 남아있는 유교의식은 무덤이 우리에게 봉분 이상의 의미를 주고 있다. 무덤, 어찌 보면 산 자와 죽은 자의 가교역할을 하지만, 우리는 산송을 통하여 조선후기 사회현상을 읽을 수 있고, 또 우리 선조들의 삶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단순히 무덤에 관한 소송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k*****1 2012.02.24. 신고 공감 13 댓글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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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송(山訟), 이것은 모범적인 사례
"산송(山訟), 이것은 모범적인 사례" 내용보기
소송은 한 사회를 읽는 정말 좋은 접근로이다. 한 사회의 '공식'적인 규정이, 어떤 식으로 '인용'(운영)되어, 어떤 공식 판결을 낳는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동시에 '공식 판결'에 대한 공적, 사적 반응까지 살필 수 있으니 여러 가지로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다. 이 책 『조선의 묘지 소송』 역시, 그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조선의 묘지 소송, 산송(山訟)은 조선 후기 사회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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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은 한 사회를 읽는 정말 좋은 접근로이다. 한 사회의 '공식'적인 규정이, 어떤 식으로 '인용'(운영)되어, 어떤 공식 판결을 낳는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동시에 '공식 판결'에 대한 공적, 사적 반응까지 살필 수 있으니 여러 가지로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다. 이 책 『조선의 묘지 소송』 역시, 그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조선의 묘지 소송, 산송(山訟)은 조선 후기 사회만의 특징적인 역사 현상이었다. 이 소송은 꽤나 요란했는데, 어지간하면 노비를 대신 내세우며 소송에 나서지 않는 양반 사대부들이 산송에서 만큼은 갓쓰고 도포입고 패싸움까지 벌이고, 심지어는 왕의 판결에도 불복해 다시 상언(上言)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니 가벼운 문제는 확실히 아니었던 것 같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건 산송이 조선 후기에 급증했다는 사실이다. 산송은 삼국시대 및 고려시대에도 찾아볼 수 없고 이웃하는 중국, 일본에도 없는 조선 후기 사회만의 독자적인 현상이었다. 18, 19세기 정도에는 분묘를 수호하는 양반 사대부가라면 산송을 겪지 않는 집안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부계 원대 조상에 대한 인식이 그리 강하지 않았다. 혼인 후 남성이 처가에서 거주하는 것도 흔했고, 사망 후에 처가 쪽 묘역에 묻히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부계 조상의 분묘가 여기저기 흩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16세기 들어 성리학이 안착하며 종법 질서(부계 중심)가 확립되면서 실전묘(잃어버린 부계조상의 묘)를 회복하는 움직임과 함께 부계 조상의 분묘가 한 곳에 집중되어갔다. 이 과정에서 '선산-종산'으로 쓰이게 된 산은 많은 경우 역설적으로 외가나 처가의 산이었다. 부계 조상의 분묘가 처가나 외가의 산에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선산-종산을 둘러싼 변화는 소유관계에 관한 분쟁을 불러오기 쉬운 것이었다. 조선 후기 산송이 급증한 배경에는 '성리학-종법'의 안착에 따른 분묘-분산 영역 재규정이라는 변화가 한 축으로 있었다.

 

한편 산송이 급증한 또 하나의 원인은 이중적인 법체계에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분산의 규모와 경계를 법제로 명확히 규정하고 있었다. 『경국대전』「예전」에는 관직에 따라 보수(步數)를 차등하여 규모를 규정하였다. 대략 오늘날의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영의정의 경우 사면 각 124.74미터 정도, 관직없는 일반 사족은 55.44미터 정도라 한다.  

 

그런데 16, 17세기 조선 사회에서 분묘의 중요성이 커져간 것과 동시에, 『주자가례』가 본격적으로 보급되면서 유교적 택지관에 근거해 분묘의 풍수를 중요시하였다. 사대부들은 경국대전의 보수규정을 지키지 않고, 좌청룡과 우백호를 확보하기 위해 분묘의 영역을 넓게 잡기 시작했다. 이같은 변화를 반영해 1676년 3월 숙종은 "사대부 묘산의 용호 내 양산처는 타인의 묘 쓰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교하였다. 이는 영조 대에 간행된 『속대전』에 정식 법 조항으로 수록되었다.

 

이는 사회적 갈등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풍수에 근거한 택지는 매우 주관적인 개념이었기 때문에, 용호(청룡백호)를 어디로 설정하느냐에 따라 수호범위도 천차만별로 달라졌다. 이는 곧 묘를 쓰려는 자와 이를 막으려는 자 간의 합의가 쉽지 않음을 의미했다. 또한 『경국대전』의 보수 규정 또한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기에, 이중적인 법체계는 그 자체로 분쟁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후 투장(남의 분묘영역에 묘를 쓰는 것)과 금장(타인의 매장을 막는 것)으로 인해 산송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가문의 위신과 연계되면서 국왕의 만류에도 아랑곳하고 소송을 이어가는 사태도 발생하였다. 굴거(남의 묘를 파헤치는 것), 야장(밤에 몰래 남의 분묘영역에 묻는 것), 평장(남의 분묘 영역에 봉분없이 평평하게 몰래 묻는 것) 등 온갖 사례들이 나타나면서 소송은 끊이지 않았다. 

 

사족층은 분산 수호를 위해 친족 단위의 자체적인 결속을 강화하고 조직 활성화를 통해 족적 연대를 강화하며 향촌 공동체와도 협력하였다. 가문이 총결집해 산송에 대응했으며, 묘지기라는 직업도 이 과정에서 생겨났고, 마을사람들에게 분산의 땔감 채취권 등을 주면서 계를 맺어 분산을 수호했다. 뿌리 깊어 보이는 '종가'(宗家)의 위세도 사실 18, 19세기에 들어서야 기세등등할 정도의 결속력을 갖춘 셈이다.

 

하지만 겨우 이삼백년이 흐른 지금 세상은 달라졌다. '가문'을 중심으로 사고하던 사람들은 개별 '가계'를 중심으로 여기고 있으며, 더 나아가 '개인'에 의미를 두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이런 사회 변화를 읽기 위해 훗날의 사람들은 어떤 소송에 주목하게 될까. 이혼소송, 자식들 간의 재산상속분쟁 기록이 사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훗날의 역사가들은, 아니 이미 당대의 현대사 연구자들에겐 읽어야만 하는 너무 많은 사료가 쌓여있다.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못하는 사료가 더 많을 것이다. 그래도 누군가는 분명히 소송기록에 주목하고 있을 것이다. 버림받지 않을 만큼 충분히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과연, 오늘날 가장 많은 유형의 소송은 어떤 것일까? 한 2,30년 뒤엔 그런 책을 읽어보고 싶다. 너무 시간을 촉박하게 준 건 같지만. 

c*****9 2012.03.12.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