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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주는 기쁨 저자 : 알랭 드 보통 옮김 : 정영목 출판사 : 청미래 우리가 슬플 때 우리를 가장 잘 위로해 주는 것은 슬픈 책이고, 우리가 끌어안거나 사랑할 사람이 없을 때 벽에 걸어야 할 것은 쓸쓸한 도로변 휴게소 그림인지도 모른다. – p10 책을 집어 들 때 보통은 서문이며 목차 그리고 되도록이면 책의 내용도 살펴보고는 구매하는 편인데 작가의 이름만으로 그 모든 절차를 뛰어넘게 만드는 사람 중 한 명이 알랭 드 보통일 것이다. 이 책도 무심결에 서점에 들렀다가 사 놓고는 이제껏 읽지 못했던 책이었다. 아마도 드 보통의 다른 책들과는 달리 얇아서 금방 읽어 버리는 것이 아깝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핑계다) 알랭 드 보통의 이 얇은 에세이집은 펭귄 로고로 우리에게도 익숙한 펭귄 출판사가 창립 70주년을 기념하여 출간한 문인들 70명의 작품 선집들 가운데 한 권이라고 한다. 그리고 알랭 드 보통은 70번째라는 상징적인 자리를 차지하며 이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비록 한 출판사에서 펴낸 작가들을 중심으로 모은 것이라고는 하지만, 젊은 산문가로서 자신이 바로 이 책에서 인용하고 있는 플로베르나 울프와 나란히 그 명단에 올랐다는 것은 큰 영광일 것이라고 옮긴이는 적고 있다. 물론 드 보통의 펜으로서 무척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책에는 9편의 산문이 실려있다. 알랭 드 보통을 사랑하는 독자라면 이 책에 실려있는 산문들이 그가 이전에 출간 했던 책들로부터 가져온 글이라는 사실을 금방 눈치 챌 것이다. 물론 책의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닌 듯 보인다. 왜냐하면 느낌이 비슷해서 드 보통의 책들을 찾아보니 어떤 글들은 같은 주제로 새로운 생각을 제시하기도 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으며 세 번째 산문인 <진정성>과 같이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 동일한 내용을 살짝 각색한 글도 담고 있다. 그래서 같은 듯 다르고 다른 듯 유사한 느낌으로 그가 이전에 내 놓았던 다양한 책들을 함축해 놓은 느낌을 받았다. 마치 뷔페 음식을 맛보는 것 처럼 말이다. 이 책을 옮긴 정영목님은 이 책을 내가 뷔페음식으로 표현한 것과 비슷하게 ‘알랭 드 보통이 독자들에게 선사한, 작아 보이지만 꽤 푸짐한 선물’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기존에 드 보통을 읽었던 독자라면 그가 던진 화두를 통해 어떤 책과 연결이 될까 하는 윤곽을 짚어보면 좋지 않을까 하는 것과 드 보통을 처음 접한 사람에게도 그의 여러 책으로 나아갈 수 있는 관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예를 들어 <불안>이라는 내용을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불안>은 드 보통이 사회적인 문제로 시야를 넓히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이 지위와 관련하여 느끼는 불안을 설명하고 그 해결책을 나름대로 제시했다. 과연 드 보통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적 존재는 어떤 것일까? 본문에 네덜란드의 화가 피테르 데 호흐의 그림을 이야기 하면서 다음과 같이 평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러나 호흐의 세계에서 부르주아는 소박하지만 매력적인 옷을 입고, 너무 천박하지도 않고 또 너무 허세를 부리지도 않고, 자식들과 자연스러운 관계를 맺고, 방탕한 상태로 빠지지 않으면서도 감각적 기쁨들을 인정한다. 꼭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중용의 화신 같다.” 이 정도면 그의 생각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 p134 책을 덮으면서 얇지만 몰입도 있게 드 보통을 복습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언제나 생각하는 것이지만 그의 글이 주는 매력에서 빠져 나오는 순간은 아쉽게 느껴진다. 이 책을 옮긴 정영목님의 말 처럼 드 보통을 자주 읽었던 사람이든 처음 접하는 사람이든 다양한 맛을 내는 그의 텍스트를 한번에 맛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는 책이 아닐까 싶다. 첫 번째 산문인 <슬픔이 주는 기쁨>을 읽으며 정호승 시인님의 <슬픔이 기쁨에게>라는 시가 생각나 옮겨 본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 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 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 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길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 <슬픔이 기쁨에게>, 정호승 노래하는 멘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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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하고 외로움을 간직한 예술 작품을 보면서 나의 외로움을 치유한다. 자존심이란 상대적인 것이기에 나 보다 더 외로운 사람, 더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 더 가진 것이 없는 사람, 더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을 보며 그 자존심을 지킨다. 하지만 그렇게 얄팍한 심정으로 지키는 자존심이기에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 찾는 것이 예술 작품이지 않을까.
있을 법한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한 예술 작품 속 인물들을 통해 위안을 받는다. 이는 현실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을 스스로와 비교하지 않아도 되고 또한 그들에게 감정적인 마음을 품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의 탈출구 이다. 문학 작품이나 그림, 음악 등으로 표출되는 외로움이나 슬픔은 그 작품 자체가 갖는 예술적 감정이지 내가 아는 누군가의 감정은 아니기에 보다 쉽게 나의 감정과 대조해 볼 수 있다. 슬플 때 더 슬픈 음악을 듣거나 더 슬픈 영화를 보며 나의 슬픔을 치유한다. 나의 슬픔을 치유하고자 나보다 더 슬픈 상황에 빠져있는 사람을 찾아가 위로받고 올 수는 없는 일이니...
역자의 후문에서 말하길, 이 책은 펭귄 출판사가 창립 70주년을 기념하여 출간한 문인들 70명의 작품 선집들 가운데 한 권이라 한다. 드 보통은 그 중 70번째 명단에 올랐다고 한다. 그동안 작가의 작품들 중에서 골라 선집을 낸 것이 이 작품이라고 하니, 짧은 에세이처럼 그려지는 각 단편들이 낯설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듯 하다.
체념한 듯 하지만 인정하는 것이고, 인정함으로 인해 얻어지는 것들을 표현하는 작가의 글들은 항상 나의 몸 어딘가를 긁어주는 듯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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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주는 기쁨, 책의 제목 자체도 뭔가 좀 다르다. 슬픔과 기쁨은 어찌 보면 상반된 의미이지 않은가. 하지만 이 슬픔은 외로움이나 고독 등을 상징하는 것 같다. 이 둘은 곧 슬픔으로 이어질 수 있지만 우리에게 매력과 즐거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뭔가, 작가가 색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을 에세이로 풀어낸 책이다. 에세이인 만큼 다양한 주제를 자유롭게 풀어냈는데 중간 부분에 나오는 '자존심=이룬 것/내세운 것' 이라는 공식이 인상깊었다. 저런 감정을 공식화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지만 저대로 다시금 생각해보면 다 맞는 얘기이질 않는가! 아무튼 누군가의 수필을 읽는다는 것은 그의 생각을 알게 되는, 재미있는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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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은 책 <슬픔이 주는 기쁨>에서 '취리히'와 화가 '페터 드 호흐'를 좋아한다고 고백한다. 두 가지의 공통점은 '따분함'에 있다면서, 그것이 지닌 매력을 설명한다. 취리히와 호흐의 작품들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특별하거나 화려한 멋은 없지만 지극히 일상적인, 그래서 따분하기까지 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점이 우리가 일상을 돌아볼 수 있도록 돕는다고 덧붙인다. 사실, 우리의 삶 대부분은 특별함보다는 일상적인 것들로 채워져 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수많은 시간들에 대해 좀처럼 고마워할 줄 모른다. 시간들처럼, 수많은 것들을 흘려보낸다. 어쩌면, 수많은 것들을 따분하고 별볼일 없게 만들어버리는 건 우리들의 시선 때문은 아니었을까? 책에는, 호흐의 그림에 대한 설명들과 함께 취리히에서의 작가 개인의 경험들이 나열된다. 호흐 그림들에 대한 설명들은, '일상성(따분함)의 매력'을 잘 보여준다.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페터 드 호흐를 깊이 사랑하기에는, 너무 깊이 사랑하여 시대를 막론하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화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기에는 뭔가 막연하게 창피한 구석이 있다. (중략) 그는 인간의 일 가운데서도 아주 진부한 것들을 찬양한다. 이를 잡거나, 안뜰 청소하기를 찬양하는 것이다. 그는 심지어 사람을 별로 잘 그리지도 못한다. 그가 그린 얼굴들을 자세히 보면 스케치보다 나을 것이 없다. 그럼에도 나는 취리히를 사랑하는 것과 아주 비슷한 이유들 때문에 호흐를 오랫동안 사랑해왔다.' ![]() '<학교 갈 준비를 하는 어린 소년과 함께 있는 여자>에서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빵에 버터를 바른다. 아이는 의무를 수행하듯 그녀 옆에 서 있다. 모자를 들고, 말쑥한 회색 코트를 입고, 광택이 나는 구두를 신은 그 모습은 영락없는 작은 어른이다. 이 장면이 감상적이지 않으면서도 감동적인 것은 어머니와 아들의 이런 친밀함이 덧없음을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호흐의 작품들은 소박한 생활, 예컨대 저녁 식사, 집안일, 친구들과 한잔 기울이는 것의 재미와 가치를 일깨워주는 귀중한 임무를 수행하여, 평범한 일상에서 속물적으로 탈출하고자 하는 헛된 야망과 유혹을 진정시켜준다. 호흐는 벽돌로 지은 건물, 윤기 나는 문에서 반사되는 빛, 여자 치마의 주름의 아름다움에 관심을 기울여, 우리 세계 어디에나 있지만 흔히 무시해버리는 이런 것들에서 기쁨을 발견하도록 도와준다.' 일상성을 설명하기 위해, 드 보통은 몽테뉴의 글도 인용한다. '페터 드 호흐가 가장 위대한 작품들을 그리기 칠십여년 전, 미셸 드 몽테뉴는 <수상록>에서 호흐의 예술의 분위기 가운데 일부를 언어로 포착해냈다.' 적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외교를 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화려한 행위들이다. 그러나 꾸짖고, 웃고, 사고, 팔소, 사랑하고, 미워하고, 가족과 함께ㅡ또 너 자신과 함께ㅡ상냥하고 정의롭게 함께 사는 것, 늘어지거나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은 더 주목할 만한 일이고, 더 드물고, 더 어려운 일이다.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건 그런 한적한 삶에서 이행해 나가는 의무들은 다른 화려한 삶의 의무들만큼이나 어렵고 또 긴박한 것들이다. _몽테뉴의 <수상록> 중에서 드 보통이 정리하는 취리히와 호흐의 그림들이 지닌 매력이자 교훈은, 따분하고 부르주아적이기만 해도 우리의 삶은 충분히 인간미 넘치는 곳을 일러준다는 것이다. 더하여, 일상성을 '포착'해낸 호흐의 그림들은, 우리가 간과해버렸던 것들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함으로써 잃거나 줄었던 상상력을 자극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데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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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의 <슬픔이 주는 기쁨>에서의 첫 번째 장 '슬픔이 주는 기쁨'은, 고독과 쓸쓸함의 정서를 그려낸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들을 토대로 '슬픔의 위안'을 이야기한다. 이 장은, 세네카의 글로부터 시작된다. '삶의 단편들을 놓고 흐느껴봐야 무슨 소용 있겠어? 온 삶이 눈물을 요구하는걸.' 개인적으로 나는 우울과 고독의 정서를 좋아한다. 드 보통의 생각처럼, 우울과 고독이 오히려 나를 그 감정으로부터 벗어나는 데 도움을 줬던 경우가 더러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우울과 고독의 예술들과 처음 마주쳤을 땐 그것들이 내게 직접적인 위로를 건네진 않았다. 가령, 애인과의 이별 후 이별에 관한 노래말을 들을 때면 공감에 의해 의해 절절히 이별의 감정에 사무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 시기를 넘어서면, 이별을 극복한 나와 마주할 수 있었다. 때로는 힘겹다 여기는 상황을 '극단'으로 이끌어갈 때, 그 상황으로부터 해소되는 경우가 있다. 아이러니하지만, 이 생각에 공감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나는, 에드워드 호퍼의 화풍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림이 표현하고자 하는 사상은 좋다. 그림이지만, 영상을 보는 듯한 기분을 선사하는 호퍼의 그림들이다. 그의 그림들은 영상의 정지된 화면처럼 보여진다. 롱테이크로 잡힌 풍경들 속에 있는 고독한 사람들은 '툭' 건드리면 천천히 움직일 것만 같다. 드 보통은 말한다.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은 슬프지만 우리를 슬프게 하지는 않는다'라고. 그림 속 사람들은 무표정에 부동의 자세로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 그들은 홀로를 선택했을 수도 있고, 본의 아니게 홀로 남겨진 것일 수 있다. 내막은 알 수 없지만, 그들의 모습과 표정들이 왠지 낯설지 않다. 이유는, 그들의 모습이 '나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호퍼는, '나의 모습을 그림에 담아'낸다. "호퍼의 작품은 잠시 지나치는 곳가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마치 우리 자신 내부의 어떤 중요한 곳, 고요하고 슬픈 곳, 진지하고 진정한 곳으로 돌아온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호퍼의 그림 속 사람들을 보면서 감정이입을 하다보면, 그들은 결국 내가 된다. 따라서 호퍼의 그림들은 '나를 돌아보게' 만든다. 호퍼의 그림 속에는 모든 것들이 외로움의 정서를 갖추고 있다. 심지어 사물들도 그러하다. "휴게소를 보면 늘 호퍼의 <주유소Gas>(1940)가 떠오른다. 이것은 그보다 십삼 년 전에 나온 <자동 판매기 식당>과 마찬가지로 고립을 그린 그림이다. 곧 다가올 어둠을 기다리며 주유소가 홀로 서 있는 광경이 보인다. 호퍼의 손에서 이 고립은 다시 한 번 알싸한 매력을 발산한다."
또한 호퍼는 '여행'하는 자를 자주 그렸다. 그들의 이동수단은 자동차와 기차다. "호퍼는 또 자동차와 기차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는 우리가 여행을 할 때 빠져드는 내향적인 분위기에 끌렸다." ![]() "정신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생각뿐일 때는 제대로 그 일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마치 남의 요구에 따라 농담을 하거나 다른 사람 말투를 흉내 내야 할 때처럼 몸이 굳어버린다. 그러나 정신의 일부가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는 외려 생각도 쉬워진다. 예를 들어 음악을 듣고 있을 때나, 줄지어 늘어선 나무들을 눈으로 좇을 때. 우리 정신에는 신경증적이고, 검열관 같고, 실용적인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은 의식에 뭔가 어려운 것이 떠오를 때면 차단해버리곤 한다." 위 글을 읽을 땐 '박수갈채'의 욕망에 사로잡혔다. 나는, '멍'하게 어떠한 풍경을 마주했을 때, 예상하지 못한 생각이 섬광처럼 떠오르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여행할 때, 드 보통의 생각처럼, 자동차나 기차를 타고 가면서 풍경을 멀리 보낼 때 그런 경험이 많았다. 그 풍경들은 내가 떠올려야 할 생각들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게 여러 차례 영감을 주곤 했다. 또한 호퍼는 호텔 그림을 무수하게 그려냈었다면서, 낯선 공간으로부터 오는 영감에 대한 생각도 언급돼 있다. "호텔 역시 정신의 습관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비슷한 기회를 제공한다. 따라서 호퍼가 호텔을 반복해서 그린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호텔 방Hotel Room, 1931> <호텔 로비Hotel Lobby, 1943> <관광객들을 위한 방들Rooms for Tourists, 1945> <철도 옆 호텔Hotel by a Railroad, 1952> <호텔 창문Hotel Window, 1956> <웨스턴 모텔Western Motel, 1957>." 슬픔이 주는 기쁨. 대립되는 관념이 이렇게 조화로울 수 있다는 걸 명백히 보여주는 글이다. 하지만 드 보통의 생각은 내가 직접 경험한 것들과 어우러져, 완벽한 공감대를 선사했다. 나는 슬픔이 주는 기쁨을 잘 안다. "성심성의껏 소외를 시켜놓은 환경에 나 자신의 소외를 풍덩 빠뜨리는 것은 실로 위안이 되었다. 마치 기분이 푹 가라앉았을 때 쇼펜하우어를 읽는 듯한 느낌이었다." 바로 저거다! 드 보통이, 슬픔이 주는 기쁨을 말하기 위해 호퍼의 그림들을 활용한 이유는 아래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오스카 와일드는 휘슬러가 안개를 그리기 전에는 런던에 안개가 없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물론 안개야 많았겠지만, 우리의 시선을 인도해주는 휘슬러의 그림이 없었다면 그 독특한 특질을 보는 것이 약간 더 어려웠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와일드가 휘슬러를 두고 한 이야기는 호퍼에게도 할 수 있다. 에드워드 호퍼가 그림으로 그리기 전에는 우리 눈에 보이는 주유소, 리틀 셰프, 공항, 기차, 모텔, 도로변 식당의 숫자가 지금보다 훨씬 적었다." 우리가 스쳐지나는 모든 것들을 예술가들은 그들이 지닌 '발견의 재능'을 통해, 사람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알려준다. 그래서 예술가들은 우리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인물들이다. 슬픔이 어째서 기쁨을 줄 수 있느냐, 며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용한 환경 속에서 호퍼의 그림들을 찬찬히 살펴보자. 그림 속 인물들과 함께 호흡하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공감의 힘'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다. 사랑의 슬픔을 또 다른 사랑으로 극복하듯, 외로움과 슬픔을 극복하게 만드는 힘이 되어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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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의 <슬픔이 주는 기쁨>의 두 번째 장 '진정성'에서는, 그의 소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의 일부를 만나볼 수 있다. '클로이'를 사랑하는 '나'의 진정성은, 나를 침묵과 어줍은 사람으로 만드는가하면, 결국 '불구'로까지 만들어버린다. 이렇게 사랑의 진정성은 비참함으로 변모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나는 클로이 때문에 자아와 욕망을 잃는다. 그렇지 않으면 클로이를 잃을 것 같기 때문이다. 자신을 잃는 것보다 사랑의 대상을 잃는 게 더 섬뜩한 것. 이것이 '사랑의 진정성'인 동시에 '잔혹성'이다. 5. 진정한 자아는 누구와 같이 있든 안정된 동일성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전제한다. 그러나 그날 저녁 나는 클로이의 욕망을 찾아내고 그에 따라 나 자신을 바꾸려는, 진정성이 결여된 시도를 되풀이했다. 7. 어쩌면 침묵과 어줍음은 욕망의 애처로운 증거로서 용서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 상대에게 무관심한 사람은 능란한 유혹 솜씨를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가장 어줍게 유혹하는 사람이야말로 상대를 향한 진정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관대하게 봐줄 수도 있다. 정확한 말을 찾지 못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정확한 말을 의도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다[말로 표현하지 못할 뿐]. 14. 몸에 맞지 않는 작은 양복을 입은 뚱뚱한 남자가 어떻게 자연스러울 수 있을까? 옷이 뜯어질까 두려워 숨을 죽인 채 가만히 앉아, 무사히 저녁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사랑 때문에 불구가 되었다. '나'가 자아를 잃어가는 것은 거짓말로 표현된다. 나는,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것을 클로이가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좋아한다'고 거짓말한다. 상대의 욕망에 부합하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것, 상대의 선호에 몸을 끼워 맞추는 노력. 사랑받기 위해 거짓말을 감수해야만 한다면, 이 사랑. 과연 괜찮은 거 맞을까? 18. 불가피했던 만큼이나 수치스러웠던 나의 거짓말 때문에 나는 두 가지 종류의 거짓말의 차이에 주목하게 되었다. 피하기 위한 거짓말과 사랑받기 위한 거짓말. 개인적으로 앞으로 등장할 글들은, 내가 가장 공감하고, 따라서 인정하는 것들이다. 21. 우리는 계획보다는 우연에 의해 목표에 이르는 경우가 많다. 세상 모든 일들은 우연으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과정에서 계획이 동반된다면 결과의 질은 달라질 수 있겠지만, 모든 일들이 계획에 의해 시작되거나 계획대로 진행되지만은 않는다. 특히나 이 부분은 사랑에 있어서 두드러진다. '계획된 사랑'의 끝이 반드시 행복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나의 계산이 상대의 마음을 녹일 수는 없다. 타인을 유혹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을 거다. 22. 사랑의 올무는 저마다 특이하기 짝이 없으며, 모든 논리적 인과법칙에 도전하는 것처럼 보인다.가끔 여자들이 나를 유혹하려고 적극적인 행동을 하기도 했지만, 내가 그런 행동에 매력을 느꼈던 적은 거의 없다. '나'는 클로이를 사랑하지만, 클로이는 나에게 큰 관심이 없어보인다. 어쩌면 나는 클로이의 그 무심한 듯한 것에 끌렸을지 모른다. 이처럼, 인간관계는 아이러니하다. 우리는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싫어할 때, 똑같은 질량대로 그 감정을 품지 않는다. 사랑의 질량을 저울질한다면, 어떠한 경우에서든 수평일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저울의 기울기 방향은 달라질 수 있으나, 그 어느 때도 수평을 유지하는 때는 거의 드물 것이다. 나를 거부하는 사람에게 되레 끌리는 경우. 한 번쯤은 경험해봤을 것이다.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그의 소설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아직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못 읽은 독자라면, <슬픔이 주는 기쁨> '진정성'을 통해 '맛보기' 해봐도 좋을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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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주는 기쁨>, 알랭 드 보통이 추구하는 삶을 읽어낼 수 있는 포트폴리오 Written by. DdAm* 책<슬픔이 주는 기쁨>은, 알랭 드 보통의 저작들을 읽어낸 독자들이라면 기시감에 의해 새로움의 묘미는 느끼지 못하겠지만, 드 보통과 조금 더 친근해지리라는 느낌은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일상을 사랑'하는 작가 드 보통의 글들이 모인 에세이집 <슬픔이 주는 기쁨>에서는 유독 그의 작품들 중 '일상성'에 초점을 둔 글들만이 모여있다. 가령, 에드워드 호퍼와 네덜란드의 화가, 호흐의 작품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일상성의 묘사를 극찬하는 데에서 드 보통이 추구하는 삶을 엿볼 수 있다. 한편, 그의 고향인 스위스 취리히에서 느낄 수 있는 '보통의 풍경'들을 칭찬하는가 하면, 동물원에 가서 인간사의 덧없음을 느끼고 돌아오는 그의 모습에서 순박한 철학자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기차를 타고 사색의 시간을 마련하고, 비행기에서 하늘 아래를 관조하면서 삶의 피로에서 벗어나려는 드 보통의 통찰력은 이 책에서 한번 더 깔끔하게 정리된다. 유독 '사랑'에 면밀한 관찰력을 뽐내는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슬픔이 주는 기쁨>에서는 '진정성'으로 재구성된다. 드 보통이 그려낸 이야기는 우리도 충분히 겪었을 법한 지극히 일상적인, 어찌 보면 따분한 소재들이다. 하지만, 그는 그 속에서 자신만의 통찰력과 위트로 삶을 '재발견'한다. 이 '관찰'과 '발견'이 드 보통의 재능이다. 이 발견의 묘미는 '글쓰기(와 송어)'에서 명쾌하게 드러나는데, 작가들은 우리 모두가 느끼지만 표현해낼 수 없는 것들을 글로 나타내는 재능을 지니고 있음을 명시한다. '많은 글쓰기가 그런 식이다. 맞춤법은 시간이 가면 정확해지지만, 우리의 의도를 제대로 반영하도록 단어들을 배열하는 데는 꽤 고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보통 글로 쓴 이야기는 사건의 거죽만 훑고 지나간다. 석양을 본 뒤, 나중에 일기를 쓸 때는 뭔가 적당한 것을 더듬더듬 찾아보다가 그냥 "아름다웠다"고만 적는다. 우리는 사실 그 이상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은 글로 고정시킬 수가 없어 곧 잊고 만다.(p.113-114에서)' 우리가 여지껏 드 보통의 '작품'들을 읽어냈다면, <슬픔이 주는 기쁨>은 드 보통이라는 '작가'를 읽어낼 수 있는 책이다. 다시 말해 이 책은, 그의 작가정신을 확인할 수 있는 포트폴리오다. [ 본문에서 ] 눈은 자신이 보는 것을 머릿속에 있는 지식과 일치시키려고 한다. 새로운 언어로 익숙한 책을 판독하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 p.33중에서 사랑받기 위한 거짓말에는 비뚤어진 가정이 수반된다.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사랑받을 수 없다. 이것은 자신의 모든 개인적 특징들을 비워버려야만 상대의 사랑을 얻을 수 있으며, 자신의 진짜 자아는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완벽성과 화해불가능한 갈등관계에 있다고 판단하는 태도이다. - p.56중에서 근대 세속 사회를 바라보는 한 영향력 있는 입장에 따르면, "남들처럼" 되는 것만큼 창피한 운명은 없다. "남들"이란 평범한 사람들과 순응적인 사람들, 따분한 사람들과 교외에 사는 사람들을 아우르는 범주이기 때문이다. - p.102중에서 다른 사람들이 쓴 책을 읽다 보면 역설적으로 나 혼자 파악하려고 할 때보다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게 된다. 다른 사람의 책에 있는 말을 읽다 보면 전보다 더 생생한 느낌으로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의 세계는 어떠한지를 돌아보게 된다. (중략) 그러나 위대한 책의 가치는 우리 자신의 삶에서 경험하는 것과 비슷한 감정이나 사람들의 묘사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보다 이들을 훨씬 더 잘 묘사하는 능력 또한 중요하다. 독자가 읽다가 이것이 바로 내가 느꼈지만 말로 표현을 못하던 것이라고 무릎을 쳐야 하는 것이다. - p.115-116중에서 농담은 비판의 한 방법이다. 오만, 잔혹, 허세 등 미덕과 양식으로부터 벗어난 것들을 비판하는 방법인 것이다. 농담이 비판에 특별히 효과적인 것은, 겉으로는 즐거움만 주는 것처럼 보이면서 은근히 교훈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중략) 농담은 겉으로는 순진해 보이기 때문에 위험하거나 직접 말하기 힘든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궁정에서 왕에게 직접 이야기하기 힘든 심각한 사안들을 적절하게 전달할 수 있었던 사람은 어릿광대였다. - p.127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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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슬픔이 주는 기쁨>, 드 보통이 추구하는 삶을 읽어낼 수 있는 포트폴리오 Written by. DdAm* 책<슬픔이 주는 기쁨>은, 알랭 드 보통의 저작들을 읽어낸 독자들이라면 기시감에 의해 새로움의 묘미는 느끼지 못하겠지만, 드 보통과 조금 더 친근해지리라는 느낌은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일상을 사랑'하는 작가 드 보통의 글들이 모인 에세이집 <슬픔이 주는 기쁨>에서는 유독 그의 작품들 중 '일상성'에 초점을 둔 글들만이 모여있다. 가령, 에드워드 호퍼와 네덜란드의 화가, 호흐의 작품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일상성의 묘사를 극찬하는 데에서 드 보통이 추구하는 삶을 엿볼 수 있다. 한편, 그의 고향인 스위스 취리히에서 느낄 수 있는 '보통의 풍경'들을 칭찬하는가 하면, 동물원에 가서 인간사의 덧없음을 느끼고 돌아오는 그의 모습에서 순박한 철학자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기차를 타고 사색의 시간을 마련하고, 비행기에서 하늘 아래를 관조하면서 삶의 피로에서 벗어나려는 드 보통의 통찰력은 이 책에서 한번 더 깔끔하게 정리된다. 유독 '사랑'에 면밀한 관찰력을 뽐내는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슬픔이 주는 기쁨>에서는 '진정성'으로 재구성된다. 드 보통이 그려낸 이야기는 우리도 충분히 겪었을 법한 지극히 일상적인, 어찌 보면 따분한 소재들이다. 하지만, 그는 그 속에서 자신만의 통찰력과 위트로 삶을 '재발견'한다. 이 '관찰'과 '발견'이 드 보통의 재능이다. 이 발견의 묘미는 '글쓰기(와 송어)'에서 명쾌하게 드러나는데, 작가들은 우리 모두가 느끼지만 표현해낼 수 없는 것들을 글로 나타내는 재능을 지니고 있음을 명시한다. '많은 글쓰기가 그런 식이다. 맞춤법은 시간이 가면 정확해지지만, 우리의 의도를 제대로 반영하도록 단어들을 배열하는 데는 꽤 고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보통 글로 쓴 이야기는 사건의 거죽만 훑고 지나간다. 석양을 본 뒤, 나중에 일기를 쓸 때는 뭔가 적당한 것을 더듬더듬 찾아보다가 그냥 "아름다웠다"고만 적는다. 우리는 사실 그 이상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은 글로 고정시킬 수가 없어 곧 잊고 만다.(p.113-114에서)' 우리가 여지껏 드 보통의 '작품'들을 읽어냈다면, <슬픔이 주는 기쁨>은 드 보통이라는 '작가'를 읽어낼 수 있는 책이다. 다시 말해 이 책은, 그의 작가정신을 확인할 수 있는 포트폴리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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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이 말하는 '글쓰기'와 '희극' 이번 글은, 책 <슬픔이 주는 기쁨>에서의 마지막 두 챕터 '글쓰기(와 송어)', '희극'에 대한 것이다. 두 챕터는 각각 작가(책)의 가치와 만화가(만화, 유머)의 가치를 설명한다. 먼저, '글쓰기(와 송어)'에서 필자가 인상깊게 읽은 부분을 옮겨보겠다. '위대한 책의 가치는 우리 자신의 삶에서 경험하는 것과 비슷한 감정이나 사람들의 묘사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보다 이들을 훨씬 더 잘 묘사하는 능력 또한 중요하다. 독자가 읽다가 이것이 바로 내가 느꼈지만 말로 표현을 못하던 것이라고 무릎을 쳐야 하는 것이다.' 아마 많은 독자들이 공감했을 것이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다양한 인간상을 만나기 위해서일 것이다. 따라서, 그 다양성 속에서는 '나의 삶'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무수한 상황을 우연(혹은 계획)적으로 만나게 되지만, 그 상황을 글로 표현할 방법이 없다. 글로써 그 상황들을 기록하고 싶지만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한데, 우리가 어떠한 책을 접할 땐, '신기하게도' '나의 경험을 그대로(아니, 그 이상으로 상세하게)' 표현한 글을 만나볼 수 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작가와 나는 일면조차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래된 친구 같은 느낌'을 나눈다. 책을 통한 소통이다. 작가는 글로썬 나의 삶을 표현해냈고, 나는 그 표현력에 감탄한다. 이것의 '책의 힘'이자, '작가의 역량'이다. 알랭 드 보통의 글을 읽으면서도 '무릎을 탁 친' 나는, 그래서 그를 좋아한다. 다음은, '희극'에서 공감한 글들이다. 이 챕터에서 다뤄지는 건 유머와 만화 등이다. '만일 유머가 단지 장난에 불과하다면 루이필리프는 그런 식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인식한 대로, 농담은 비판의 한 방법이다. 오만, 잔혹, 허세 등 미덕과 양식으로부터 벗어난 것들을 비판하는 방법인 것이다. 농담이 비판에 특별히 효과적인 것은, 겉으로는 즐거움만 주는 것처럼 보이면서 은근히 교훈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유머는 높은 지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는 데 유용한 도구일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지위에 대한 불안을 이해하고 조절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만화는 권력의 불의와 더불어 사회 체제에서 우리보다 높은 곳에 있는 자들을 향한 우리의 지나친 선망도 교정하려 한다. 만화도 비극과 마찬가지로 가장 딱하게 느껴지는 인간 조건에서부터 출발한다. 만화가들의 밑바닥에 깔린 무의식적 목표는 유머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그런 식으로 조롱할 일이 조금이라도 줄어드는 세상을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만화와 유머를 즐긴다. 심지어, 중독된 사람들도 더러 있다. 희극들을 즐기는 목적을 단순히 오락성에 두는 사람들도 있지만, 작품을 감상한 후에는 단순히 유희성만 남는 건 아니다. 유희성이 전면을 장식하지만, 깊은 곳에는 '교훈'이 있다. 오히려 희극들은, '고도의 교훈성을 지닌 작품'들이다. 조롱으로 사회를 비판하면서 오히려 비판받아 마땅할 현실을 '더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추락시킨다. 이것이 희극작가들이 지닌 고도의 역량(천재성)이다. 진지한 사안을 진지하게만 그려내는 것보다, 그것과 반대되는 관점으로 보여줄 때 우리는 '이상한 기분'에 휩싸이게 된다. 그 이상함은 의구심으로 이어지고, 사안을 '한번 더 생각'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진짜 중요한 사안'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희극의 '겉'은 아이들조차 순진무구하게 즐길 정도로 '포장'되어있다. 따라서, 검열도 제법 쉽게 통과될 수 있다. 같은 사안을 희극적으로 풀어내게 되면, 상대적으로 '안전한 작품'이 된다. 이것이 '희극의 기술'이다. 위 두 챕터는, '글'과 관련된 것들로 볼 수 있다. 훌륭한 작가는 냉철한 시선을 지닌 묘사력으로 독자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는 역량과 위트를 갖춰야 한다. 드 보통은 그에 해당되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그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글 뿐만 아니라, 여행과 예술, 사회적인 문제 곳곳을 탐구하려는 자세가 좋다. 그보다 '더' 좋은 건, 사랑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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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은, 알랭 드 보통의 <슬픔이 주는 기쁨>에서의 '일과 행복' 장에 대한 것이다. 드 보통은, 일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자 삶의 목표와 결부되어있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어쨌든 '노동자는 불안'하다고 말한다. 대개, 일에 대한 글들은 독자들로 하여금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쪽이 많지만, 드 보통은 '현실을 직시'시킨다. 다시 말해, '현실은 녹록지 않다'는 걸 직설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일은 '해야만' 한다고 강조한다. 왜냐,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며 동시에 자기 욕망(목표)이 반영된 것이므로. 더불어, 그로 인해 경제력의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하고자 하는 목표가 반영되고, 경제력의 수단이 되는 일은 '행복'을 채우기 위한 요소 중 하나임에 틀림 없다. 하지만 반드시 행복'만' 가져다주는 건 아니라는 게 드 보통의 생각이다. 이 장을 다시 한번 분류하자면, 필자는 '(1)일과 행복' '(2)일(노동자)의 현실'로 하고 싶다. 장의 전반부는 일의 정의 및 일로써 얻을 수 있는 행복의 요소(자기만족, 자기표현 등)들이 나열된다. 후반부는 일터(환경)에서 노동자들이 느낄 수 있는 현실들이 나열된다. 필자가 발췌한 다음 글들을 읽어보면, 필자의 생각을 이해하리라 본다. 따옴표 안의 글은 본문 발췌이고, '-' 다음 글은 필자가 간단히 정리한 글이다. (1)일과 행복 벤저민 프랭클린, 디드로, 루소 등과 같은 부르주아 사상가들의 글에서 일은 단지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는" 방법으로 다시 규정되는 것을 볼 수 있다. - 일은, 돈의 수단인 동시에 자기 자신이 되는 방법 중 하나다. "능력주의는 일자리에 새로운 특질, 마치 도덕적인 것처럼 보이는 특질을 부여했다. 이제 존경받고 보수가 좋은 자리는 지능과 능력을 갖춘 사람에게만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따라서 내가 하는 일은 나라는 사람에 관하여 직접적으로 의미 있는 말을 해줄 수 있었다. 이제 자리가 내적인 자질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거나, 부유하고 권력 있는 사람들이 반드시 부패한 수단으로 그런 자리에 올랐다고 주장할 수가 없었다." - 능력주의자가 됨으로써 지능과 능력을 갖춘 사람이 될 수 있다. 즉, 일을 '잘' 함으로써 자존감을 높일 수 있다. 윌리엄 제임스는 행복과 기대의 관계에 관하여 예리한 주장을 한 적이 있다. 그는 우리가 노력을 기울이는 모든 영역에서 성공을 거둔다고 해서 반드시 자신에게 만족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또 어떤 일을 못했다고 해서 늘 수치감을 느끼는 것도 아니다. 주어진 일의 성취에 자존심과 가치를 투자했을 때에만 그 일을 하지 못했을 때 수치감을 느낀다. 우리가 무엇을 승리로 해석하고 무엇을 실패로 여기는지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목표라는 이야기다. - 일은, 자존심과 가치 투자의 장이다. (2)일의 현실 "그러나 노동 조건의 향상과 고용 관련법에도 불구하고, 생산 과정에서는 노동자들의 행복이나 경제적 복지가 여전히 부차적인 자리를 차지할 수밖에 없으며, 노동자들은 기본적으로 도구 노릇에 머물게 된다. 고용자와 피고용자 사이에 어떤 동지애가 이룩된다 해도, 노동자가 아무리 선의를 보여주고 아무리 오랜 세월 일에 헌신한다 해도, 노동자들은 자신의 지위가 평생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 그 지위가 자신의 성과와 자신이 속한 조직의 경제적 성공에 의존한다는 것, 자신은 이윤을 얻기 위한 수단일 뿐이지 감정적인 수준에서 늘 갈망하는 바와는 달리 결코 그 자체로 목적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결국 노동자는 늘 불안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중략) 일이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는 쪽이 일을 견디는 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두는 것이 좋겠다. 그래야 우리의 슬픔을 그나마 다독일 수 있을 테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