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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만식은 한국의 풍자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고 하는데 사실 난 그의 작품을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사피엔스 한국문학 선집 중 그의 작품을 먼저 골라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치숙-
보통학교를 졸업한 평범한 청년이지만 완벽한 일본인이 되어 성공하기를 희망하는 이기적인 청년과, 동경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감옥살이를 하여 전과자가 되었고, 병까지 얻어 아무 일도 못하는 무능력자가 되어버렸지만, 여전히 사회주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아저씨가 등장한다. 어릴 적 고아가 된 자신을 거둬 준 아주머니와 아저씨에게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지식인이랍시고 아주머니를 고생만 시키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아저씨의 모습을 바라보며 화가 나고 급기야 그의 생활과 사상을 비난하고 조롱하기까지 한다.
읽어가다보면 아저씨가 거의 일방적으로 당하는 형국이다. 아저씨의 지금 형편을 보자면 그럴만도 하다. 하지만 청년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당시 일제 당국에서 권하는 모든 것은 좋은 것이라 여겨 받아들이는 것도 모자라, 자신의 근본인 조선을 업신여기는 도가 지나침을 보여준다.일본인에게 잘보여 성공을 꿈꾸는 청년은 기회주의, 황금만능주의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저씨를 비난하면 할수록 청년의 가치관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생각하게 되니, 이것이 바로 작가의 의중이었고 이야기의 묘미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그가 살았던 시기가 어느 때보다도 우리나라가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때여서일까... 혈실과 과거의 문제점을 파헤치고 깊이있게 드려다보며 비판하는 글들이 많았다. 하지만 비판으로만 그치지 않고 밝은 미래를 꿈꾸는 작가의 희망이 담겨있고, 읽는 이들로 하여금 올바른 가치관을 갖길 바라는 마음이 진하게 녹아있다. 채만식의 작품은 아이에게 조금 어렵게 다가가기도 한 작품인데, 읽고 또 읽다보면 옳은 가치관과 역사관을 갖길 바랐던 작가의 마음을 이해할 날이 오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좀 더 깊이 있는 책읽기를 통해, 몸이 자라가듯이 생각의 폭이 넓어지고 자라가는 아이들을 바라본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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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가장 힘이 되는 사람들은 뭐니 뭐니 해도 가족임이 틀림없다. 세상에 무조건 적인 내편 가장 가깝고 친한 사람이 바로 가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서로 상처 주고 힘들게 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가족이다. 가족이고 친척이라는 이름하에 남들보다 못한 경우도 없지 않다. 관계의 영역을 조금 더 넓혀 친척, 다소 먼 친척까지 확장하면 오히려 남보다 못한 애매한 관계가 되는 경우도 꽤 있다. 가깝지만 먼 묘한 관계가 친척이 아닌가 싶다. 이 단편의 제목인 <치숙>은 '어리석은 아저씨'라는 뜻의 친척 아저씨를 일컫는 말이다.
<치숙>이라는 제목만 보면 언뜻 그 의미를 가늠하기 어렵다. 치숙(痴叔)이라는 단어를 풀어보면, 어리석을 '치' 자에, 아저씨 '숙'자를 써 직역하자면 '어리석은 아저씨'라는 뜻이 된다. 이 이야기의 화자인 '나'에게 오촌 고모부가 되는 오촌 당숙, 오촌 당고모부를 일컫는 말이다.
화자의 아저씨는 일본으로 유학 가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고등교육을 받은 엘리트다. 그런데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져서 그런지 사회주의에 빠져 징역살이를 하게 된다. 게다가 역시 교육을 잘 받은 여자를 첩으로 구해 화자의 고모인 부인을 나 몰라라 하고, 이혼하자고 통보를 하여 친정으로 내쫓기까지 했다. 그런데 옥살이를 하다 나온 아저씨를 '나'의 고모는 병수발을 들며 뒷바라지한다. 남의 집 막일에 삯바느질로 먹여 살린다. 화자는 그런 고모부가 영 못마땅하다.
본문 중에 '막덕'이라는 표현은 마르크스 주의를 따르는 사람을 말하는 것인데, 화자는 배우기도 많이 배우고 특히나 경제를 전공한 사람이 돈을 못 벌고 사회주의 운동을 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사회주의는 일을 하지 않고 부자들의 것을 빼앗는 것이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고모부 때문에 자신을 어릴 적부터 살뜰히 거둬준 고모가 고생하는 것 같다. 영 마음이 안 좋다.
여기서 화자인 '나'는 일본인 상점에서 일을 하며 착실하게 돈을 모으며 주인 눈에 들어 심지어 일본인 여자를 소개해 줄 테니 결혼을 하면 어떻겠냐는 제의도 받는다. 화자는 이런 자신이 아주 대견하고 뿌듯하다. 그러다 보니 사회주의 운동을 하며 돈 한 푼 못 벌고 고모에게 기생하는 당고모부가 덜 꼴 보기 싫다. 사회주의 운동하는 사람들은 날강도요, 생 날부랑당 놈이다.
이 이야기 <치숙>은 사회주의에 빠져 적극적으로 운동을 펼치는 지식인 오촌 당숙 아저씨와 친일 주의에 빠져 일본 제일주의를 외치는 화자 '나'의 이야기다. 이 소설 <치숙>이 발표된 것이 1938년이니 일본으로부터 해방되기 몇 년 전이다. 이런 분위기가 결국 해방 이후 좌우 대립의 갈등으로 불거져 한국전쟁과 같은 비극이 도래하지 않았을까 싶다.
<치숙>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아저씨와 '나'가 설전을 벌이는 데 요즘식으로 보면 100분 토론을 보는 것 같은 팽팽한 설전이다. 아마도 이 작품을 통해 채만식 작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지식인'과 '친일로 제 한 몸 호사하려는 친일 주의자' 모두를 비판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내가 저 시대를 살았다면 과연 나는 어느 쪽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어느 한 쪽도 맹렬히 비난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그 상황에 처했을 때 저들보다 결코 나을 것 없을 듯한 불안감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짧지만 많은 생각거리를 담고 있는 이야기다. 어쩌면 자본주의의 양극화가 극에 달한 오늘에도 시사하는 바가 많지 않을까 싶다. 문학적으로도 시사적으로도 읽어볼 만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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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고 세상이 바뀌면 작가 및 작품의 선정 기준과 원칙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청소년과 일반 성인들이 갖고 있는 문제의식 및 취향에 부합할 수 있느냐이다. 정보의 홍수와 경쟁의 급류 속에서 문학은 자칫 잃기 쉬운 성찰의 기회를 제공해 준다. 시대와 호흡하면서 인간의 삶이 제기하는 다양한 문제를 다채롭게 형상화한 작품을 읽으며, 그 작품 속에 그려진 세상과 인물에 공감하면서 때로는 충격을 받고, 때로는 고민에 휘싸이며, 그 속에서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는 과정을 통해 청소년들이 깊은 생각과 넓은 마음을 키울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