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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유혹 - 2
"최후의 유혹 - 2" 내용보기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 갈라티아서 2:20,   이제 예수는 가르침과 기적들을 행하며, 아픈 이들, 소외받은 이들, 이민족들을 껴안는다. 하늘나라가 왔다는 그의 외침에, 사람들은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 기적을 보이라고 외친다. 그러면 당신을 믿겠노라며. 부자들에게 가진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하늘나라가 오기
"최후의 유혹 - 2" 내용보기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 갈라티아서 2:20,

 

이제 예수는 가르침과 기적들을 행하며, 아픈 이들, 소외받은 이들, 이민족들을 껴안는다. 하늘나라가 왔다는 그의 외침에, 사람들은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 기적을 보이라고 외친다. 그러면 당신을 믿겠노라며. 부자들에게 가진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하늘나라가 오기 전에 부자들에게 먼저 불의 나라가 먼저 올거라는 그의 가르침은 서서히 그들로 부터 분노를 사기 시작한다.
로마로 부터 무력을 통한 이스라엘의 해방을 기대하는 유다에게, 그리고 로마인이 없는 것이 하늘나라라고 하는 유대인들의 대화들에, 로마 장수의 딸을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려내는 예수의 기적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암묵적으로 ‘사랑’(형제애)으로써, 로마인(지배자)과 유대인(피지배자)이, 소외받은 이와 소외하는 이가, 부자와 가난한 이가 서로를 껴안는 것이 예수가 말한 하늘나라임을 그의 수난 전의 여정속에서 암시하고 있는 듯 하다. 


한편, 카잔차키스는 예수의 여정 속에서, 평생 메시아를 기다려온, 죽음을 앞둔 늙은 랍비를 등장시켜 그 랍비가 죽기 전까지의 예수와의 대화를 통해서, 예수의 행위와 이제는 신성의 정체성에 흔들림이 없는 예수의 모습이 기존 유대종교지도자들에게 신성모독으로 비춰지고 있음을 말한다. 
예수는 랍비에게 그가 행하는 기적와 예언과 가르침은, 인간 예수로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그를 통해 행하고 있음을 얘기한다. 

예수 : "내가 나라고 말할때는 흙이나 마찬가지로 내 육신을 얘기하지 않고 역시 작디 작은 불꽃을 지닌 흙덩어리에 지나지 않는 마리아의 아들을 뜻하지도 않습니다. 내 입을 통해 <나>라는 말은, 랍비님, 하느님을 의미합니다."

랍비 : "그건 더욱 끔찍한 신성모독이야!"


그토록 도망치려했던 그의 신성과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인간의 삶에서의 아련한 행복과 사랑의 미련을 버려야 했던 예수가, 다시 그것으로 인해, 신성모독을 함으로써 그가 향하는 수난의 길에서 예수의 아이러니한 삶의 고통을 보여주는 듯 했다. 한편, 이러한 과정 속에 하느님에게 더 다가간 예수에게 아직 인성이 여전히 남아있음을 카잔차키스는 죽은지 삼일이 된, 라자로를 부활 시킨 기적에 대해 예수와 늙은 랍비의 대화를 통해 보여준다.

“그것은 내가 원한 일이 아니었어요”. 예수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아버님. 나는 그가 묘석을 들어올리는 걸 보고는 겁이 났어요. 나는 도망이라도 치고 싶었지만, 너무 창피했죠. 나는 그 자리에 서서 그냥 덜덜 떨기만 했어요.”

                     

[ 카라바조의 “라자로의 부활”, 왼쪽에 강렬한 빛을 등지고 예수가 라자로를 가르키며 서있고, 사람들은 예수를 보는 듯 하기도 하고 그뒤의 더 강렬한 빛에 끌려 있는 듯하기도 하다. 이제 막 무덤에서 나온 (시체 썩은 냄새가 나는)  라자로를 그의 누이들 마리아와 마르타가 얼굴을 묻고 있다. 예수는 빨강 옷에 파란 겉옷을, 여인은 파란 옷에 빨강 겉옷을 입혀놓으므로써, 신성안에 인성을, 인성안에 신성에 대한 믿음을 교차시키는 듯 하다.] 



성경 속에서는 베드로가 예수가 메시아임을 고백한다. 하지만, 카잔차키스는 그 동안 예수와의 대화를 통해 예수가 신성모독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늙은 랍비가 그의 죽음 전, 예수가 메시아임을 고백한다. 수난을 이해하고 배반으로써 도운 유다의 놀라운 설정외에도  카잔차키스는 야고보와 마태오와의 (둘다 열두 제자에 속하나 성경에는 그들의 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히 나오지 않는다. 마태오는 4대 신약 복음, 마르코, 마태오, 루카, 요한 복음 중에 마태오 복음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수와의 대화를 통해서, 다음 두가지 메세지를 던지는 듯 했다.
먼저 마태오는 예수와 함께 하며, 조금씩 조금씩 복음을 적어가는 모습으로 나오는 데, 구약의 이사야서의 예언을 예수 탄생과 연결시켜가며 적는 부분은 성서학자 Marcus Borg의 책, “Reading the Bible for the first time again”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구약의 예언서에, 예수님의 탄생을 예언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Borg는 구약의 예언서의 인물은 예수가 아닌 다른 상징적인 의미를 나타내고 있으며, 구약을 잘 알았던 유대인이였던 그의 제자들이 연결시켰을 거란 얘기를 한다.) 카잔차키스는 예수의 행적을 기록하는 마태오의 모습에 분노하는 예수를 통해 이런 얘기를 하고 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당신은 저런 얘기를 쓰고 당신 글을 읽는 사람은 또 다른 뜻으로 이해하죠! 내가 십자가, 죽음, 하늘나라, 하느님이라고 말하면...당신은 무엇을 이해하나요? 여러분은 저마다 자신의 고통과 관심사와 욕망을 이런 성스러운 어휘들에다 결부시킵니다. 내 말은 사라지고, 내 영혼은 길을 잃어요. 나는 더 이상 못 참겠어요.”

우리는 성경을 너무나 임의적으로 해석하고 있지 않을까?


그리고 최후의 만찬에서의 야고보를 통해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과 우리 스승님의 뜻을 거역하면 안 돼요. 선지자들이 우리에게 말했듯이, 랍비님. 죽음은 당신의 의무이고 당신이 전한말이 사라지지 않도록 전파하며 살아가는 일은 우리의 의무입니다. 우린 그 말들을 새로운 성서에서 건실한 자리를 차지하도록 하겠으며 율법을 만들고 우리 자신의 희망을 지어 우리 자신의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선택하겠습니다.”

예수는 겁이 났다. “당신은 혼을 십자가에 매달려고 하는 군요. 야고보” 그가 소리쳤다 “아니예요. 아니에요. 내가 바라는 바는 그게 아니에요.”

모세의 율법을 부수고 마음에 새로운 율법을 만들겠다는 예수의 말을 야고보는 예수가 죽은 뒤의 예수의 가르침으로 이전의 유대교처럼 그들이 지배할 수 있는 종교를 만들겠다는 얘기에 예수는 식은 땀을 흘린다.  현재의 기독교와 가톨릭이 한번쯤은 뒤돌아봐야 되지 않을까?


겟세마니 동산에서의 기도가 끝난후, 예수의 지시에 의한 유다의 배반으로 예수는 빌라도에게 끌려가 십자가 형을 받는다. 


그리고 매달린 십자가 위에서의 마지막 순간, "엘리 엘리 레마사박타니"라고 외칠때, 그 사이에 그는 마지막 유혹을 받는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말에서 그는 유혹에 빠지는 데, 마지막 말,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라고 외치지 못한 채 받은 그 유혹은,  아버지에게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외침속에 나타난 그 버림이 그가 겪어내야 했던 모든 고통과 고뇌 보다도 더 받아들이기 힘들었음을 얘기하는 것일까? 성부를 사랑했고, 인류를 사랑했던 그가 죽음보다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은, 이루어지지 못한 채 버림받아야 했던 그의 사랑이였으며, 마지막 순간 자신을 이 곳으로 보낸, 아버지의 침묵이였을 지도 모르겠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 윌램 데포 주연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보다, 맬깁슨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의 스틸 사진을 올렸다. 앞에 것은 보지 못했으므로]

예수는 마지막 유혹의 꿈 속에서 라자로의 누이들 마르타와 마리아와 함께 행복함 삶을 누린다. 모진 육체적 고통에서 그의 꿈은 얼마나 달콤했을까? 하지만, 그의 꿈 속에 그를 깨우기 위해 제자들이 나타난다. 카잔차키스는 사도 바오로와 (성경 속의 사도 바오로는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을 박해하다가,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의 부름을 듣고(예수 승천후), 빛을 보고 눈을 먼다. 나중에 기도를 통하여 눈을 다시 뜨게되는데, 그 후 크게 회개하여 사도가 된 사람이다. 가톨릭 신약 성경 27권 중 13권의 저자라고도 알려져 있다.) 모든 것을 잊고 꿈속에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예수와의 대화 속에서 마지막 예수 자신도 부활조차 없는 죽음, 그 절대절명의 버림을 의심하는 그의 인성을 보여주는 것 같다.
바오로 : "틀림없이 당신도 그 사람에 관한 얘기를 들었겠지만, 나자렛 예수는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이었어요. 그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인간의 몸을 갖추고 땅으로 내려왔어요. 사악한 제사장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그를 붙잡아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십자가에 매달았죠. 하지만 사흘째 되던 날 그 분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소생하시고 승천하셨어요. 죽음이 정복되었고, 형제들이여, 죄는 사함을 받았으며 천국의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예수 : "당신은 나자렛 예수라는 부활한 사람을 봤어요?" 예수가 소리쳤다. "당신은 눈으로 그 사람을 똑똑히 봤어요? 그 사람 어떻게 생겼던 가요?"
바오로 : "번갯불의 섬광, 말씀을 하시는 번갯불의 섬광이었어요"
예수 : "거짓말!"


아마도 카잔차키스는 신성속에서 부활하리라며 제자들에게 수난을 예고하고 수난을 받아들였지만, 마지막 부활을 믿을수 없었던 그의 인성이, 부활조차 없는 믿기 어려운 수난속에서 자신을 받쳐야 했던 마지막 예수의 고뇌를 상상했던 듯 하다. 그렇기에 그가 가야했던 수난의 길이 더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하나의 역설이 아닐까 한다. 카잔차키스의 가정은 예수가 진정으로 인간의 모습으로 온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인간이 느껴야 할 나약함과 회의와 고뇌와 유혹을 끝까지 고스란히 겪어내야 하지 않냐는 것이 아닐까 한다. 카잔차키스의 예수가 마지막 "레마사박타니"라고 외칠때, 고스란히 자신을 바치는 그 용기가 나약한 인성에서 나온 승리인지, 그안의 신성의 외침인지는 읽는 이들의 각자의 선택이지 않을까 한다.

YES마니아 : 로얄 o******4 2011.04.03. 신고 공감 6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