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리뷰 (18)

한줄평
평점 분포
  • 리뷰 총점10 50%
  • 리뷰 총점8 39%
  • 리뷰 총점6 11%
  • 리뷰 총점4 0%
  • 리뷰 총점2 0%
연령대별 평균 점수
  • 10대 0.0
  • 20대 0.0
  • 30대 10.0
  • 40대 8.0
  • 50대 7.0

포토/동영상 (1)

리뷰 총점 종이책
(2016년 결산) 새들도 세상을 뜨는 구나
"(2016년 결산) 새들도 세상을 뜨는 구나" 내용보기
그것은 수평이 아니다 승강구 2단에 서서졸고 있는 너를 평면도로 보면아버지 실직 후 병들어 누움,어머니 파출부 나감,남동생 중3, 신물팔이生計는 고단하고 고단하다뻔하다빈곤은 충격도 없다그것은 네가 게으르기 때문이다 너의 아버지의 무능 때문이다 너의 어머니의 출신 성분이 좋지 않아서이다 네가 재능도 없고 지능이 없어서이지 악착 같고 통밥만 잘 돌려봐 그렇다고 네가 몸매
"(2016년 결산) 새들도 세상을 뜨는 구나" 내용보기
그것은 수평이 아니다 승강구 2단에 서서

졸고 있는 너를 평면도로 보면

아버지 실직 후 병들어 누움,

어머니 파출부 나감,

남동생 중3, 신물팔이

生計는 고단하고 고단하다

뻔하다

빈곤은 충격도 없다

그것은 네가 게으르기 때문이다 

너의 아버지의 무능 때문이다 

너의 어머니의 출신 성분이 좋지 않아서이다 

네가 재능도 없고 지능이 없어서이지 악착 같고

통밥만 잘 돌려봐 

그렇다고 네가 몸매가 좋나 얼굴이 섹시하나 

TIME에 실린 전형적인 한국인처럼, 몽고인처럼

코는 납작 광대뼈 우뚝 어깨는 딱 벌어져 궁둥이

는 펑퍼져 키는 작달

, 너는 욕먹는 한국 사람으로 서서

졸고 있다

일하고 있다

그런 너의 평면도 앞에서

끝내는 나의 무안함도, 무색함도, 너에 대한 정

치 경제 사회 문화적 모독이며

나의 유사 - 형제애도, 너에 대한 정치 경제 사

회 문화적 속죄는 못 된다

그걸 나는 너무 잘 안다

그걸 나는 금방 잊는다. ~ 95 청량리 - 서울대 중에서

 

이게 시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시를 읽으며 많은 생각을 했다. 세상은 예전보다 살기 좋아졌다고 하지만 이 세상에 사는 서민들의 삶은 변한 게 별로 없는 것 같으니까. 요즈음엔 뉴스를 보는 게 두렵다. 까도까도 새로운 것이 나오는 양파마냥 충격적인 사실들이 나온다. 그 사실 앞에 높은 자리에 있는 그들은 얼굴을 들고 표현한다. 내가 왜 이 자리에 있는지, 내가 잘못한 것은 없는 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는 얼굴. 그들은 양심도 없고 창피함도 모르는 인간인 것일까? 능력 있는 부모를 두지 못한 대다수의 서민이 잘못인양 말하는 그들.. 우리가 무능하고 우리의 부모가 게을렀기 때문일까? 그들은 과연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까 

 

대다수의 사람들은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하며 산다. 그러는 과정에서 실패도 하고 좌절도 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우리의 부모가 게을렀을까? 능력이 없었을까? 뭐든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사회적 분위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이 시인의 시집을 읽으며 답답했다. 왜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는지, 왜 점점 더 세상은 사는 게 힘든지...

 

시들은 모두 지금의 우리 모습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읽는 동안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시가 가진 매력이자 시가 가진 뭉클함. 이웃님을 통해 알게 된 시집이다. 그 이웃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

 

 

YES마니아 : 로얄 k*****3 2017.01.02. 신고 공감 7 댓글 12
리뷰 총점 종이책
황지우,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황지우,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내용보기
역사        영화(映畵)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群)을 이루며 갈대숲을 이륙하는 흰 새 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황지우,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내용보기

역사

 

 

 

 영화(映畵)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을 이루며

 갈대숲을 이륙하는 흰 새 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 황지우,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영화관에서는 먼저 애국가가 울렸다. ‘동해물과 백두산이~’로 시작하는 애국가가 커다란 배경 화면과 어울려 자리에서 일어난 관객들을 향해 울려 퍼졌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않는 사람은 눈총을 받았다. ‘애국가라는 숭고한 노래가 울려 퍼지는데 일개 국민이 어떻게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군사문화가 지배하던 시기를 알려주는 이야기지만, ‘애국가는 지금도 여전히 태극기와 함께 국가에 대한 맹세를 이끌어내는 권력을 지니고 있다. 애국가나 태극기 자체가 권력은 아닐 것이다. 그런 대상들을 통해 권위를 세우려는 사람들이 권력을 행세한다고 보는 게 정확하겠다. 지금도 야구장에 가면 경기가 시작되기 전 애국가가 먼저 울린다. 선수들과 관객들은 태극기가 걸린 외야를 향해 서서 가슴에 손을 얹고 경건한(?) 마음으로 애국가를 듣는다.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는 시인의 말이 21세기 현실에서도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시인은 애국가는 듣지 않고 화면에 나오는 흰 새떼들에 주목한다. 흰 새떼들은 일정한 무리를 이루며 갈대숲을 이륙하고 있다. 보금자리를 떠나 그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새들은 자기들이 가야할 곳으로 일제히 날개를 편다. 하늘은 드넓다. 저 드넓은 곳을 날개를 펴고 나는 마음은 과연 어떨까? 새가 되고 싶은 시인은 그러나 지금 영화관 구석에 처박혀 애국가를 듣고 있다. 구석에 박혀 파란 하늘을 나는 새떼를 부러운 눈으로 보고 있다.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새들은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새가 날아가는 곳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니다. 새가 날아가는 곳이 이 세상 밖이라는 게 중요하다. 영화관처럼 비좁은 세계를 벗어나 드넓은 하늘을 날고 싶은 소망을 시인은 비상하는 새떼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하늘을 나는 저 흰 새떼를 스크린으로 보며 시인은 영화관 한 구석에서 세상 밖으로 나아가는 상상을 한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라는 시구에 나타난 대로, 시인은 일부러 과장된 몸짓을 내보인다. 이래저래 해도 영화관이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다. 하지만 몸은 구속되어 있어도 정신은 그럴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래, 시인은 우리들끼리 대열을 이루어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하는 꿈을 낄낄대고 깔쭉대며 표현한다. 새들도 날아간 세상을 우리 인간이, 이성을 지닌 인간이 못 갈 이유가 무엇인가? ‘가야 한다는 당위는 갈 수 있다는 희망으로 바뀐다. 엉덩이를 들썩일 정도로 희망이 부푼다. 그러나 이내 시인은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라는 애국가 끝자락을 듣는다. 애국가가 끝나면 자리에 앉아야 한다. 영화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러 영화관에 왔으니 사람들은 각기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라는 제목으로 시인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1980년대라는 타락한 시대 속에서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꿈을 꾸었다. 민주화를 향한 열망으로 똘똘 뭉친 이들이 6월 항쟁을 일으켰고, 그 결과 대통령 직선제라는 결과물을 낳았다. 6월 항쟁은 갑작스레 벌어진 일이 아니다. 가깝게는 박종철, 이한열이라는 열사들이 있었고, 멀게는 군사문화의 폭압 아래서도 하늘을 나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황지우가 쓴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는 이 세상을 뜨는 새를 보며 민주화의 꿈을 꾸었던 사람들의 내면을 에둘러 보여준다. 꿈을 꾼다고 그 꿈이 현실에서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당장 이 시에서 시인은 애국가가 끝나고 이내 의자에 주저앉는 존재를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꿈을 꾸었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로 해서 혹독한 대가를 받았다. 흰 새떼들이 자유롭게 하늘을 날 때 민주화를 외치던 누군가는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홀로 앉아 추위와 싸워야 했다. 누구보다 편하게 세상을 살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차가운 골방이 아니라 훈훈한 사무실에서 펜대나 굴리며 살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편안한 삶을 포기하고 그들은 하늘 아래 광장으로 나섰고 그곳에서 민주주의를 목 놓아 외쳤다. 새들만 하늘을 날란 법이 있는가? 인간도 하늘을 날며 제 꿈을 펼칠 수 있지 않은가? 한 사람이 꾸던 꿈이 시간이 지나 모든 사람이 꾸는 꿈으로 바뀌면 현실 또한 이에 따라 바뀔 수밖에 없다. ‘국민이라는 이름에 새겨진 거대한 힘은 바로 이 꿈을 통해 현실에서 펼쳐지는 셈이다.

 

2016년에 불길처럼 번진 촛불집회로 전임 대통령을 탄핵한 국민의 힘은 무엇보다 새로운 세계를 꿈꾼 이 사람들이 있기에 가능했다. 꿈을 꾸는 사람은 또 다른 꿈을 꾸는 사람과 끝없이 이어진다. 예전부터 꿈꾸던 민주화가 시나브로 실현되는 과정을 거치며 사람들은 더불어 꿈을 꾸는 마음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되었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은 힘이 약하다. 하지만 그 약한 힘이 모이지 않으면 촛불 집회의 거대한 힘은 나올 수 없다. 탄식으로 끝나는 이 시에서 나는 역설적으로 그 밑에 스민 이 거대한 힘을 본다. 꿈이 있는 자에게는 여전히 희망이 살아 있다. 그 희망으로 탄식하던 우리들은 지금에 이르렀다. 죄를 지은 대통령들을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처벌하는 사회를 만들었다. 이게 역사다. 역사는 언제나 꿈을 꾸는 사람들을 중심에 내세우는 것이다.

 

 

o*****s 2019.01.08. 신고 공감 5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환멸의 기록- 大腦(대뇌)와 性器(성기) 사이에서 흔들리는
"환멸의 기록- 大腦(대뇌)와 性器(성기) 사이에서 흔들리는" 내용보기
환멸의 기록- 大腦(대뇌)와 性器(성기) 사이에서 흔들리는      이런 것도 시가 될 수 있는가. 황지우의 시를 처음 접한 스무 살 무렵 느낀 당혹을 기억한다. 그 시절에 황지우의 첫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는 생경함, 그 자체였다. ‘아름다운 비애’와 ‘달콤한 우울’, ‘삶에 대한 희망’을 서정적으로 그려내는 것이 시라고 여겼던 순진한 생각은 황지우의 이 시집으
"환멸의 기록- 大腦(대뇌)와 性器(성기) 사이에서 흔들리는" 내용보기

환멸의 기록- 大腦(대뇌)와 性器(성기) 사이에서 흔들리는

 

 

 이런 것도 시가 될 수 있는가. 황지우의 시를 처음 접한 스무 살 무렵 느낀 당혹을 기억한다. 그 시절에 황지우의 첫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는 생경함, 그 자체였다. ‘아름다운 비애’와 ‘달콤한 우울’, ‘삶에 대한 희망’을 서정적으로 그려내는 것이 시라고 여겼던 순진한 생각은 황지우의 이 시집으로 무너졌다. 광고와 신문기사, 수첩에 적은 낙서들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두서없는 단어들의 나열, 모호한 숫자와 기호들의 조합들은 '장난'처럼 여겨졌다.

 

 이런 것도 시가 될 수 있는가. 스스로 답하기까지는 세월이 더 필요했다. 몇 번의 사랑이 '장난'처럼 끝난 후 나는 학교 도서관 구석자리에서 시집들을 읽으며 내면에 고인 마음들을 정리하는 연습을 수없이 해야만 했다.

 

 황지우를 다시 읽은 것은 그 시기였다.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라고 시작되는「뼈아픈 후회」라는 시. 그 시를 거듭 읽으며 하루를 보냈던 그 날, 나는 당혹스러웠던 황지우의 첫 시집을 다시 펼쳤다. 난해했던 황지우의 첫 시집을 다시 해석해보고 싶었던 것. 그러나 다시 읽은 시 속에는 복잡한 분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삶’이 있었다.

 

 신문기사와 광고, 극장의 대한 뉴스를 보며 읊은 황지우의 시들은 아픈 삶과, 그것을 살아내야만 했던 시인의 나약함과 오기, 시대에 대한 불만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시인은 “1972년: 대학에 입학” 했고, “최루탄과 화염병이 강림하던 순간”들을 겪으며 20대를 보낸다. 감옥과 군대로 뿔뿔이 흩어졌던 친구들은 “1979년: 대통령이 죽고”, “모두, 한꺼번에 돌아”(「활엽수림에서」)온다. 80년대를 맞이하며 그는 시인이 되었지만(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광주에서 시작된 어둠은 시인을 ‘침묵’(「묵념, 5분 27초」: 실제로 이 시는 빈 칸 뿐이며, 5, 27 이란 숫자는 광주항쟁이 진압 당한 날짜와 같다)으로 몰아간다.

 

 80년대는 더 짙은 어둠이었지만 사람들은 어둠에 조용히 익숙해져 간다. 여전히 학살의 현장에서 실종된 사람들을 찾는 광고가 나오지만 그것을 읽는 화자는 “쭈그리고 앉아/ 똥을”(「심인」)눈다. 사람들은 대한뉴스가 나오는 극장에서 “애국가를 경청”하고 “각각 자기 자리에 앉”(「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고, 남루한 회사원은 “미스 리와 저녁식사하고 영화 한 편”(「한국생명보험회사 송일환씨의 어느 날」)을 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다. 시인의 눈에 세상은 비극과 기만으로 직조되었으며 사람들은 “大腦(대뇌)와 性器(성기) 사이에”(「이준태의 근황」)에 흔들리는 저울추와 같이 다가온다.

 

 자의식 없는 자들의 기만적인 삶. 자신도 예외가 아니라는 자학 때문일까. 시는 시종일관 어둡고 냉소적이며 서정시의 문법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형식을 파괴한다. 황지우의 첫 시집은 환멸을 통과한 자의 읊조림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흑백복사기와 흡사하지 않을까. 시인의 내면에 비친 세상과 인간은 한없이 단조롭고 우울하다.

 

 그러나 나는 이 시집에 박힌 풍경들을 희망의 다른 이름으로 명명한다. 환멸을 토한 언어의 나열을 읽으면서 나는 갈 곳 잃은 마음을 시에 담아 정리하려는 부질없는 생각을 ‘정리’ 했으므로. 나는 이 시집을 읽으면서 나를 구속했던 풍경에서 벗어났다. 정직한 환멸의 기록은 낯선 풍경을 환기시킨다. 그 낯설음은 지금-여기의 삶이 기만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심어주며 자신과 풍경 사이에 ‘거리’를 형성시켜준다는 사실을, 나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이런 것도 시가 될 수 있는가. 망설이지 않고 답하리라. 이것도, 아니 이런 것이 좋은 시라고.

2*****h 2009.04.21. 신고 공감 5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시는 역시 획 하나하나 곱씹어야 제맛이 난다. 마른 오징어다.
"시는 역시 획 하나하나 곱씹어야 제맛이 난다. 마른 오징어다." 내용보기
내년에 학교를 인문계 고등학교로 옮기려고 지원을 해두었다. 지역이 바뀌니까 그게 내 마음대로 되진 않겠지만, 4년이나 공부에 손을 놓고 있었다보니 마음의 부담이 참 크다. 지금 학교에선 한 학기에 시 예닐곱 편에 다른 작품 한두개를 수업하는 게 고작이고 그나마도 내용 이해 정도에 머무를 뿐 나머지는 맞춤법이나 영화보고 이야기나누기 정도를 했을 뿐이라서, 인문계 고등학교
"시는 역시 획 하나하나 곱씹어야 제맛이 난다. 마른 오징어다." 내용보기

내년에 학교를 인문계 고등학교로 옮기려고 지원을 해두었다. 지역이 바뀌니까 그게 내 마음대로 되진 않겠지만, 4년이나 공부에 손을 놓고 있었다보니 마음의 부담이 참 크다. 지금 학교에선 한 학기에 시 예닐곱 편에 다른 작품 한두개를 수업하는 게 고작이고 그나마도 내용 이해 정도에 머무를 뿐 나머지는 맞춤법이나 영화보고 이야기나누기 정도를 했을 뿐이라서,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이렇게 수업했다간 그 학교에서 한해 받을 학부모 민원을 일주일이면 다 받고야 말 것 같아서 그렇다. 그래서 요즘 시집이나 소설도 의도적으로 읽으려고 그러고 수능시험에 대한 감도 다시 찾기 위해서 EBS 강의도 뒤적뒤적 하고 있다.

 

문학 관련 강의를 좀 보다가 황지우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가 등장했다. 참 좋아하는 시이자, 많이 가르쳤던 시다.(대학 1학년 과외할 때부터 시작해서 교단에 선 지금까지 백 번은 가르쳤을 거다.) 작년에(헐! 2014년이 작년이라니. 어색하여라.) mind3na님께서 내가 쓴 리뷰에 인용된 이 시 구절 가운데 '갈대밭을 이륙하는'이라는 부분이 틀렸다고 하시며 '이룩하는'이 맞다고 가르쳐 주셨던 일이 기억났다. 무릎을 탁! 쳤다. 그렇게 많이 가르치고 읽었어도 그 부분에 대한 고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획 하나로 시에서 환기하는 이미지가 완전히 달라지는 데도 말이다.

 

획 하나라고는 해도 '이룩하는'과 '이륙하는'은 시상이 완전히 달라진다. TV방송이 끝날 때쯤 나오는 애국가의 배경 화면을 상상하면 시상을 떠올리기 쉽다. 불그스름하게 노을이 지는 강 하구를 배경으로 갈대밭이 쫘악 펼쳐져 있고 그 위로 흰 새떼들이 우루루 이륙하는 장면이다. 시에서 제시된 부분은 이렇다.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을 이루며 갈대 숲을 이륙한다'고 하면 새들이 떼거리로 우루루 갈대 숲 속에서 튀어나와 날아간다는 뜻이다. 한치의 의심도 없이 그렇게 가르쳐왔다. 그런데 '이륙'이 아니라 '이룩'일 경우에는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을 이루며 갈대 숲을 이룩하는' 즉, 을숙도에 서식 또는 잠시 거주하던 새들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습이 마치 '갈대숲' 같다는 뜻이 된다. 

 

'이륙'이라는 단어가 연상시키는 비행기 혹은 비행하는 행위 자체에 의미가 머물러 있다가, '이룩'이라는 단어로 말미암아 마치 갈대숲처럼 새들이 모여 있는 군집성, 집단성으로 의미가 전이된다. 햐! 대단하다. 획 하나 뺐을 뿐인데 시의 이미지가 이렇게나 달라지다니. 처음 해 보는 경험이었다. 최인훈의 <광장>이라는 소설은 수십여 년에 걸쳐 두세번의 각색을 통해 내용 자체도 많이 달라졌다더라만 처음부터 완전 개정판을 읽어서 차이를 잘 몰랐더니 이 시를 통해서 말의 묘미라는 것을 정말 감동적으로 체험한 좋은 경험이었다.  

 

작년 12월 26일에 마침 서점에 갈 일이 있어서 이 시집의 해당 페이지를 한 번 찾아봤다. 그런데 으잉? '이룩'이 아니라 '이륙'이다. 혹시나 옛날에 발행된 거라 오타가 난 게 아닌가 싶어 출판일을 찾아봤다. 2013년 8월 23일, 일년 조금 넘었네. 게다가 33쇄이니...... 오타라고 보기에는 좀 어렵다 싶었다. 음... 이 상황 자체가 정말 아이러니컬 하게도 이 시의 마지막 부분과 비슷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 앉는다.'

이렇게 다르게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추측건대, '이룩'이 원본이라는 가정 하에 세월이 흐르면서 우연히 생긴 오타를 원본으로 착각해 그대로 이어져 내려온 게 아닐까. 이 구절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런 경우도 많으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이 시의 주제의식처럼 자조적으로 빠진 것은 절대 아니다. 시를 읽을 때 이마만큼 꼼꼼하게 읽어야 시의 껍질을 벗기고 그지없이 달콤한 속살을 만날 수 있다는 교훈, 이 시를 가르칠 때 나눌 수 있는 재미난 이야기도 덤으로 얻었으니 전혀 안타깝지 않다. 오히려 지적해주셨던 mind3na님께 감사드릴 따름이다. 

s*************k 2015.01.05. 신고 공감 1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새들도 세상을 뜨는 그런 세상.
"새들도 세상을 뜨는 그런 세상." 내용보기
나는 80년대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이 시집을 읽으면 블랙홀 같이 나를 빨아 들인다. 처음에는 도서관에서 읽고 다시 한번 더 빌려서 읽다가 결국엔 사버린 묘한 책이다. 이 시집은 매우 전위적이고 황당하다. 처음 읽는 사람들은 이게 뭐야? 라고 생각하고 닫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내심을 가지고 계속 읽으면 전위적인 내용들이 점점 다가오기 시작할것이다. 만화를 그대로 삽입 하
"새들도 세상을 뜨는 그런 세상." 내용보기
나는 80년대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이 시집을 읽으면 블랙홀 같이 나를 빨아 들인다. 처음에는 도서관에서 읽고 다시 한번 더 빌려서 읽다가 결국엔 사버린 묘한 책이다. 이 시집은 매우 전위적이고 황당하다. 처음 읽는 사람들은 이게 뭐야? 라고 생각하고 닫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내심을 가지고 계속 읽으면 전위적인 내용들이 점점 다가오기 시작할것이다. 만화를 그대로 삽입 하거나,설문지를 그대로 시에다 옯겨 놓고,....하여튼 아주 파괴적이다. 그리고 신선하다. 하지만 이 시를 읽기전에 오규원 같은 사람의 시를 먼저 읽어 보시기 바란다. 이 시집은 매우 낯설고 당황스럽다. 그래서 같은 맥락에 있지만 좀더 친근한(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오규원 시를 먼저 읽고 나서 읽어 보시기 바란다. 현대시의 고전으로 뽑겠다.

[인상깊은구절]
여기는 초토입니다 그 우에서 무얼 하겠습니까 파리는 파리 목숨입니다. 이제 울음 소리도 없습니다. 파리 여러분! 이 향기 속의 살기에 유의하시압!
YES마니아 : 골드 p*****c 2003.08.27.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80년대를 뛰어넘은 현대시의 고전
"80년대를 뛰어넘은 현대시의 고전" 내용보기
내가 황지우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를 처음 읽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쯤이다. 황지우의 이 시집은 당시 많은 젊은이들을 매료시켰고,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여서 이 시집의 연장선에 놓인 그의 두 번째 시집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민음사)도 읽게 됐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를 읽으며 엄청난 문화적 충격을 경험했다. 신문 만화나, 화장실에서 볼 수 있는 낙
"80년대를 뛰어넘은 현대시의 고전" 내용보기
내가 황지우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를 처음 읽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쯤이다. 황지우의 이 시집은 당시 많은 젊은이들을 매료시켰고,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여서 이 시집의 연장선에 놓인 그의 두 번째 시집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민음사)도 읽게 됐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를 읽으며 엄청난 문화적 충격을 경험했다. 신문 만화나, 화장실에서 볼 수 있는 낙서(음담패설) 또는 광고의 문구가 등장하는 황지우의 시는, 우리가 알고 있던 이전의 어느 시와도 달랐다. 장난 같기도 하고 때로는 비속하기도 하고 또 어떤 시에는 냉소와 자학적 반성이 담겨 있는 그의 시는, 낯설고 파괴적이어서 나를 당황하게 했으나 한편 통쾌하기도 했다. 그의 시는 우리의 거짓된 모습을 송두리째 까발리기도 하고, 80년대의 어둠을 뒤틀린 언어를 통하여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또는 우리의) 유약함과 소심함이 시를 통해 그대로 드러났을 때, 나는(또는 우리는) 한없는 부끄러움과 함께, 감추고 싶던 비밀이 밝혀졌을 때 차라리 느끼게 되는 시원함을 맛볼 수 있었다. 1980년 광주의 아픔으로 시작한 80년대는 침묵이 강요되는 시대였고, 안정이 강요되는 시대였다. 그의 시 곳곳에서 80년 광주의 비극에 대한 고발과 그것에 침묵하고 있는 자신의 무기력함에 대한 반성을 발견할 수 있다. '벽·1'은 실제의 벽을 연상하게 만든다. '예비군편성및훈련기피자일제자진신고기간 / 자:83.4.1∼지:83:5.31'라는 시 전문을 작은 활자로 우리의 눈높이에 맞춰 실어 놓음으로써 우리를 옥죄고 있는 보이지 않는 벽을 시각적으로 재현해 낸다. '묵념, 5분 27초'라는 시는 제목뿐 텅 비어 있다. 뒤에야 이 시의 제목이 5월 27일 광주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다만 그들의 죽음 앞에 고개 숙여 묵념할 수밖에…. 표제시인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는 군사 정권하에서 맹목적인 삶을 살아야 했던, 죽음과 절망으로 가득찬 80년대에 대한 풍자와 야유이다. 또 그것은 새들처럼 '한 세상 떼어 메고 /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가'고 싶은 우울한 소망에 대한 역설이다. 황지우는 전통 서정시의 문법을 해체함으로써 80년대라는 시대의 모순과 아픔을 충격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는 전통적인 시 양식의 파괴를 통해서 우리의 무감각을, 우리의 불신을, 우리의 무책임을, 우리의 기만을 비판하고 야유하고 반성한다. 1월 중순경 한 일간지에서 황지우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이성복의 "남해금산",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을 소개한 적이 있다. 문학과지성사에서 각각 83년, 86년, 89년 초판이 발행된 세 시집은, 이제는 현대시의 고전이 됐으며 광고나 홍보 없이도 꾸준히 독자들을 끌어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90년대를 지나 새로운 세기에 접어든 지금도 황지우의 시를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즐겨 읽고 있다는 것은 그 시들이 이룬 문학적 성취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와 동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 그의 시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경험이다. 다만 그의 시가 뿌리내리고 있는 80년대의 회의와 절망만큼은 결코 다시 와서는 안 될 것이다.

[인상깊은구절]
시장 바닥을 오르내리면서 며칠 전, 나는 따뜻한 봄날의 볕을 받고 있는 병아리 두 마리를 1백원씩 주고 샀다. 아이들에게 나는 '살아 있는 장난감'으로서의 自然을 선물했다. 노란 솜털이 보송보송하게 돋은, 이 살아 있는 물체를, 그런데 나의 아이들은 손도 못 대고 무서워한다. 내가 아이들의 손을 잡고 억지로 병아리의 부리와 발톱에 대 주어도 나의 아이들으 그 비공격성에도 불구하고, 살아서 꿈틀대며 마구 삐약거리는 이 물체를 소름끼치게 싫어했다. 라면 박스 속에 넣어 하룻밤을 내 방에 재운 뒤, 아침에 일어나 들여다보니 병아리 두 마리는 두 다리를 꼿꼿하게 떨고 목을 길게 늘어뜨리고 죽어 있었다. 병아리의 사체를 들어올리면서 그때야 나는 거기에, 아주 작은 날개가 달려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제1한강교에 날아든 갈매기'의 詩作 메모·1―

j***g 2003.02.19.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신선한, 그러나 시대의 아픔이...
"신선한, 그러나 시대의 아픔이..." 내용보기
난 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그저 평범한 일상인이다. 다소 어렵고 난해하고 많이 생각해야 하고... 하지만 내가 황지우의 시를 만난 건 내 인생의 커다란 축복이다. 그의 시는 부조리한 한 시대를 살다간, 혹은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신선하지만 가슴 서늘한 아픔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시이다. 또한 작가의 살아온 이력이 나타나 있는 것 같아 그의 솔직함과 절망스러움이
"신선한, 그러나 시대의 아픔이..." 내용보기
난 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그저 평범한 일상인이다. 다소 어렵고 난해하고 많이 생각해야 하고... 하지만 내가 황지우의 시를 만난 건 내 인생의 커다란 축복이다. 그의 시는 부조리한 한 시대를 살다간, 혹은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신선하지만 가슴 서늘한 아픔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시이다. 또한 작가의 살아온 이력이 나타나 있는 것 같아 그의 솔직함과 절망스러움이 느껴져 마음이 아프기까지 하다. <참을 수="" 없는="" 것="" 무릎="" 꿇을="" 수="" 없는="" 것="" 그런="" 것들을="" 나는="" 인정했다="" 나는="" 파드득="" 날개쳤다="" 명부에="" 날개를="" 부딪치며="" 나를="" 호명하는="" 소리="" 가="" 들렸다="" 나는="" 무너지겠다고="" 약속했다=""> 이 시를 읽는 데 눈물이 핑 돌았다. 누군가가 내게 그 이유를 물어본다면 7-80년대의 한국사를 한번 돌아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j*****s 2003.01.11.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그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그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내용보기
시인 황지우는 73년에 유신 반대 시위에 연루되어 강제 입영되었고, 80년에 광주민주화운동에 가담하여 구속된 전력이 있다. 단순한 경력 사항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지만 70-80년대 격동의 현대사를 거쳐오면서 그가 선택했던 사회적 판단의 일면으로 비추어 볼 때 그의 작품이 그가 속해있던 사회에 대해 다루고 있음을 어느 정도 예감할 수 있다. 그의 첫 번째 시
"그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내용보기
시인 황지우는 73년에 유신 반대 시위에 연루되어 강제 입영되었고, 80년에 광주민주화운동에 가담하여 구속된 전력이 있다. 단순한 경력 사항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지만 70-80년대 격동의 현대사를 거쳐오면서 그가 선택했던 사회적 판단의 일면으로 비추어 볼 때 그의 작품이 그가 속해있던 사회에 대해 다루고 있음을 어느 정도 예감할 수 있다. 그의 첫 번째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는 이육사나 윤동주 등 일제 저항 시인의 시집만큼 ''맞선다''라는 개념이 눈에 띄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는 사회와 인간의 대항보다는 비극적인 사회에서 인간이 얼마나 비루해지고 유약한 존재가 되는지 관찰하고 탐구하는 것 같다. 「그날그날의 현장 검증」에서는 ''어제 나는 내 귀에 말뚝을 박고 돌아왔다 / 오늘 나는 내 눈에 철조망을 치고 붕대로 감아 버렸다''라며 사회가 일으키는 비행에 눈을 감는 개인을 묘사하며 ''나의 증거 인멸을 위해 / 나의 살아 남음을 위해''라며 저항보다는 생존을 위해 고개를 돌리는 인간의 유약함을 풍자하고 있다. 이 시에서 ''그날그날''이라는 제목이나 ''어제 -> 오늘 -> 내일''로 이루어지는 시적 시간 과정으로 봐서 사회적 비행이라는 것이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이 시와 같이 무기력한 개인을 묘사하는 시는 시집에 가득하다. 「에프킬라를 뿌리며」에서는 사람을 파리로 묘사하는데 거리낌이 없으며, 「심인」에서는 온갖 사회적 비극 앞에서 그저 1평 공간인 화장실에 쭈그리고 앉아 똥이나 누는 무기력함을 묘사한다. 보통 소시민이라기에는 제법 교육을 받은 가방끈 긴 사람이 등장하는 「이준태(1946년 서울 生, 연세대 철학과 졸, 미국 시카고 주립대학 졸)의 근황」에서도 교육의 정도와 상관없이 개인은 무기력한 존재이다.「호명」에서도 볼 수 있듯이 황지우가 바라본 현대 사회에서 개개인은 ''이름 없는 그대''일 뿐이고, ''익명''이라는 것은 존재가 없다는 뜻의 다른 말이다. 그가 노래하고 있는 것은 결국 개개인의 존재 가치를 말살해버리는 사회의 부조리함일지도 모른다. 개인의 무기력함과 존재 없음을 묘사하는 시들 사이에는 그 부조리한 사회를 지탱하고 유지하게 해주는 존재들에 대한 비아냥거림과 풍자가 있다. (물론 어떤 시는 전자에 어떤 시는 후자에 명확히 속하지는 않는다. 모든 시가 두 가지 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숙자는 남편이 야속해-KBS 2 TV·산유화(하오 9시 25분)」를 보면 ''친구 누나의 벌어진 가랭이를 보자 나는 자지가 꼴렸다.''라며 얼굴이 화끈거리는, 시적 언어로 적당하지 않은 시정잡배들의 말을 끌어와 매스미디어의 통속성과 저질성을 비난하고 있으며, 「벽·2-낯선 시간 속으로」에서는 ''이 벽은 신문이다, 보다시피 / … / 금이 가고 / 애매모호하다 / 냉담하고 / 덮어도 덮어도 다 덮여지지 않는 세속이다''라며 언론의 황색 저널리즘을 비꼬고 있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에서 특이할 만한 점은 이런 풍자와 비판과 인간 관찰을 독특한 시적 형식에서 이루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 독특한 시적 형식이라는 것은 기존 詩형식의 파괴에서 시작한다. 「의혹을 향하여」에서는 ''????????????''를 반복하고, 「벽·1」은 ''예비군편성및훈련기피자일제자진신고기간 / 자 : 83.4.1.∼지 : 83.5.31.''가 이 시의 전부이다. 「徐伐, 셔 , 셔 , 서울, SEOUL」에서는 음표가 등장하기도 하고, 「묵념, 5분 27초」는 제목만 있고 아무런 내용이 없으며, 「한국생명보험회사 송일환씨의 어느 날」은 신문만화까지 사용하고 있다. 시적 형식의 파괴를 통해서 오히려 시적 의미를 찾으려는 이러한 창작 과정은 다른 현대 예술가들의 예술적 도전과 그 궤를 같이 한다. ''예비군편성및훈련기피자일제자진신고기간 / 자 : 83.4.1.∼지 : 83.5.31.''라는 평범한 문구에 ''벽''이라는 제목을 닮으로서 독자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백남준이 1963년에 브라운관에 가로로 한 줄만 뜨는 고장난 TV를 주워와 세로로 세워놓고 「TV 참선」이라는 제목을 단 비디오 아트를 연상케 한다. 평범한 문구와 고장난 TV에 하나의 단어를 접목시킴으로서 수많은 해석을 가능케 하는 동일한 시도인 것이다. 아무런 내용 없이 제목만 붙어있는 「묵념, 5분 27초」는 현대 음악가 존 케이지(John Cage)의 퍼포먼스인 「4분 33초」와 청자/독자를 이끄는 방법이 동일하다. 존 케이지가 4분 33초 동안 피아노 앞에 앉아서 청중들의 웅성거림을 유도했듯이 황지우도 시에 제목만 붙이고서는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다. 존 케이지의 「4분 33초」를 훌륭한 피아노 곡이라고 할 수 없듯이, 황지우의 「묵념, 5분 27초」를 훌륭한 시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시도와 발상 자체가 예술이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을 한 뼘 넓힌 것만은 사실이다. 또한 「묵념, 5분 27초」는 바로 앞의 시인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잉게 숄著·박종서譯·靑史·188면·값 1,900원」에서 암시하는 죽음 혹은 실종과 큰 연관을 지니며 생각할 수 있는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예술품이 부조리한 사회 비판이나 풍자에 골몰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그 결과물은 대부분 단순하고 1차원적인 비난에 머물기 마련이다. 반대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마치 구름 위에 앉은 듯 도도한 자세를 유지하는 예술작가들은 비록 유려한 문장을 써낼지 몰라도 사람의 마음에 크게 와 닿지 않는 예술품을 만들어 내기 십상이다. 황지우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는 분명히 80년대라는 시대 상황에 고개를 돌리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 시대상황에 현미경을 들이대고 시대가 어떻게 개인을 황폐화시키는지 묘사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시로서의 문학적 향취를 잃지 않고 있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에서 날아가는 새들과 주저앉는 개인을 연결하는 솜씨를 보면 찬탄만이 나온다. 거기에다가 그의 시에는 실험성과 파격성까지 덤으로 있다. 문학적 향취를 잃지 않으면서 사회에 현미경을 들이대는 것도 놀라운데 거기에 문학적 실험까지 행한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확대 해석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는 시에서 퍼포먼스 예술의 특징을 도입한 하나의 예로 봐도 무리가 없을 듯 하다.
d******e 2003.04.02.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새들마저 세상을 뜬다.
"새들마저 세상을 뜬다." 내용보기
난 극장에서 애국가를 경청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 책이 이렇게 가슴 아프게 다가올까? 시대가 바뀌어 나는 극장에서 핸드폰 광고를 보고, 화장품 광고를 본다. 이제는 대한 뉴스도 없고 애국가는 더더욱 흘러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무언의 애국가는 여전한 것 같다. 우리를 짓밟는 억압, 그것이 독재에서 돈이라는 것으로 바뀌었을 뿐.... 우리의 상황은 황지우님
"새들마저 세상을 뜬다." 내용보기
난 극장에서 애국가를 경청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 책이 이렇게 가슴 아프게 다가올까? 시대가 바뀌어 나는 극장에서 핸드폰 광고를 보고, 화장품 광고를 본다. 이제는 대한 뉴스도 없고 애국가는 더더욱 흘러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무언의 애국가는 여전한 것 같다. 우리를 짓밟는 억압, 그것이 독재에서 돈이라는 것으로 바뀌었을 뿐.... 우리의 상황은 황지우님이 이 시을 지을 당시의 상황과 크게 바뀐 것 같지는 않다. 우리를 억압하는 모든 것들, 그것이 돈이든, 권력이든... 우리는 아직도 그 억압에서 벗어나 새가 되기를 원한다. 어딘가 다른 세상으로 날아갈 수 있는 날개를 가지고 있는 새처럼 도피하고 싶고, 자유로워지고 싶은 열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자유로워 보이는 새마저 세상을 뜬다. 그 새는 날 수 있는대로 불구하고... 그래서 세상은 슬픈 것이다. 하지만 나는 슬퍼하고만 싶지는 않다. 결국은 주저앉을 지언정 한번쯤은 날고 싶다. 내가 날 수 있는 세상 속에서 내가 어떤 것을 만나든... 그것이 설령 지금보다 더럽고 비참한 세상일지라도 한 번쯤은 날아올라 그곳을 가 보고 싶다.
s*****7 2000.05.31.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읽으면 괴롭지만 그래도 읽어야 하는 시가 있다.
"읽으면 괴롭지만 그래도 읽어야 하는 시가 있다." 내용보기
먼저 시인에게 미안함을 표한다. 천상병 시인의 시집으로 착각하고 사버렸으니... 하지만 잘못 산 책에서도 기대하지 않은 즐거움을 발견할 때가 있고 잔뜩 기대하고 샀다가 엄청 실망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 잭은 전자에 속한다. 여기저기 황지우 시인의 이름은 많이 봤지만 정작 그의 시를 읽지는 못했었다. 아마 실수가 아니었다면 영영 못 읽었으리라. 어떤 시를 읽으면 눈물이 나고
"읽으면 괴롭지만 그래도 읽어야 하는 시가 있다." 내용보기
먼저 시인에게 미안함을 표한다. 천상병 시인의 시집으로 착각하고 사버렸으니... 하지만 잘못 산 책에서도 기대하지 않은 즐거움을 발견할 때가 있고 잔뜩 기대하고 샀다가 엄청 실망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 잭은 전자에 속한다. 여기저기 황지우 시인의 이름은 많이 봤지만 정작 그의 시를 읽지는 못했었다. 아마 실수가 아니었다면 영영 못 읽었으리라. 어떤 시를 읽으면 눈물이 나고 어떤 시를 읽으면 속이 후련해진다. 어떤 시를 읽으면 유치하지만 입맛에 맞기도 하고 어떤 시는 아무 생각 없이 술술 잘 읽히기도 한다. 스물이 넘었을 때 시가 예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누군가 이 시는 이렇다고 평한 것을 읽지 않으면 무엇을 뜻하는 지 알기 어려운 시는 아직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런 공식에 어떻게도 맞지 않는 시는 이 시집이 처음이다. 쉽게 읽히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고, 가슴 아프기도 하고, 약간 아리송하기도 하면서도 어떻게 평가할 수 없는 작품. 물론 내가 어떻게 시인의 작품을 평가할 까 만은 생각이 있는 이상 평가 없이 지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과적으로 그의 시는 재미있다. 재미있고 씁쓸하다. 입맛이 쓰지만 입에 쓴 게 몸에 좋다고 하지 않던가 이 뜻을 안다면 괴로워도 또 읽어야만 하리라...

[인상깊은구절]
"그날그날의 현장 검증" 중에서 어제 나는 내 귀에 말뚝을 박고 돌아왔다 / 오늘 나는 내 눈에 철조망을 치고 붕대로 감아 버렸다 / 내일 나는 내 입에 흙을 한 삽 처넣고 솜으로 막는다
d*****g 2000.08.23.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