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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신입생이었던 스무살의 봄, 과방에 모여 선배들을 따라 삼삼오오 가야했던 곳은 학과 폐지를 반대하는 시위장이었다. 입학하자마자 신정아 사건으로 학교가 뒤숭숭하더니 대학 생활 좀 누려볼까 하는데 하루가 멀다하고 악에 받친 메가폰 소리가 영 분위기를 해쳤다. 대학이란 곳이 어떤 곳인지 느껴보기도 전에 퇴출당하는 기분, 심사숙고 끝에 배우고 싶어 낭만을 갖고 온 학과가 뿅 사라져버릴 위기에 처한 기분, 그건 당하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취업률이 낮다는 이유로 폐지될 뻔한 나의 철학과는 매년 통폐합의 위기에 놓였다가 가까스로 목숨만은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2학년이 되던 해에 철학과가 아닌 철학·윤리문화학부로 이름을 바꿔 신입생을 받아야 하게 됐다. 이 때 독어독문학과는 폐지되어 재학생들은 다른 학과를 선택하여 전과하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또한 등나무가 감싸안은 운치 있는 벤치가 바로 앞에 있어 수업 전후에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던 철학과 전공 강의실은 로스쿨 유치를 위해 법학관 건물을 리모델링 하면서 옮겨온 불교대학 학과실에 밀려 사라졌다. 낡은 책걸상과 삐걱대는 교탁과 녹색 칠판이 있던 곳이었어도, 이후 문과대 각종 과들이 돌아가며 사용한 번쩍거리는 새 강의실 보다 훨씬 사랑스러웠는데.
내가 졸업한 현재의 동국대는 내가 재학 중이던 때보다 훨씬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다. 해마다 철학과 너네 없애버릴거라는 협박이 교수님들에게 떨어지고 있는 건 물론이다. 심지어 문예창작학과와 국문과의 통폐합이 추진됐다. 이 중요한 시기에 북한학과도 매번 위기의 학과로 오들오들 떨고 있다. 갈수록 납득할 수 없는 방향으로 학제개편이 진행되자 학생들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는데, 이런 학생들의 움직임에 학교측은 퇴학 등의 지나치고 강경하고 부당한 대응을 보이고 있다. 그것도 아주 뻔뻔한 얼굴로 배라도 쩨라는 식으로. 예전에는 이러다 내가 나온 학과가 사라지는 뿌리의 실종을 겪겠다는 미래에 대한 불안만 있었지만, 요즈음에는 미래까지 갈 것도 없이 지금 당장 괴롭다. 내가 저 곳에 부모님의 피땀과 나의 등골을 뽑아다 박은 게 수치스러울 지경이다.
남들이 다들 등록금 동결할 때 기세등등하게 등록금 인상을 한 게 동국대다. 이제 다시 개강 시즌이니 또 등록금 때문에 한바탕 소동이 일겠지. 이 즈음 이 책이 나온 건 아주 적절한 타이밍이다. <대학에 저항하라>는 영국의 진보 석학들이 쓴 글을 엮은 것으로, 영국의 대학이 기업화 되는 현실을 비판하고 학생들이 보이고 있는 저항의 움직임을 짚어보며 여러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현실과 꽤 비슷한 것처럼 보이는데, 언급되는 내용들을 보면 이건 비단 우리와 영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학에까지 스며든 신자유주의 논리는 이미 전 세계에 퍼져있으니 이상할 것도 없다. 하지만 우리나라 학생들이 처한 상황은 적어도 영국의 경우보다 더 암울하다. 책의 추천사를 쓴 프레시안 기자가 말하고 있듯 영국 학생들은 이미 지원되고 있던 정부의 보조금을 삭감하는 것에 반발하는 것이지만, 우리 학생들은 지원을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국 학생들은 누리기라도 해보았던 것을 우리 학생들은 누린 적조차 없다.
학교 바닥이 번쩍거리는 것으로 바뀌고 기숙사가 호화판으로 바뀌고 식당이 럭셔리해진다고 해서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기업은 시장을 넓혔을 뿐이고 학교는 돈을 벌었을 뿐, 학생들은 기업과 학교의 배를 불려주기 위해 끊임 없이 울려대는 공사 소리에 방해받으며 돈을 바친다. 대학에 다니는 내내 동떨어진 두 군데의 교내 열람실에서 생활하다시피 했는데, 중앙도서관은 기숙사 공사로 늘 쿵쾅거렸고 사회과학대 열람실은 엘리베이터와 주차장 공사로 진동 속에서 책을 봐야 했다. 선배들이나 친구들과 학교에 가면 "와, 학교 진짜 달라졌네." 라고 말할 뿐 아무도 좋아졌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 달라졌다는 말에는 그렇게 난리를 치더니 드디어 끝났냐는 비꼼이 늘 섞여 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학교인지 이해할 수 없는 지금, 변화가 필요하다. 이런 말을 하기 부끄럽지만 나는 교내 시위에서도 전혀 열성분자가 아니었고, 대규모 촛불집회에 참여한 적 또한 한 번도 없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 무언가 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여느 때보다 많이 들었다. 평소 현대의 대학에 대한 문제의식을 지니지 못했던 사람이어도, 이 책은 아마 생각을 정리하고 행동을 이끄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독자적 연구 학과에서 한껏 배양되었던 창의성과 독창성, 깊이 있는 연구 풍토는 지금 대학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가치를 추구하는 행위는 그 동안 대학에서 체계적으로 사라져 갔다. 1990년대 이후에 심화된 이 경향은 21세기 들어 더욱 가속화되었으며, '경영'이라는 단일한 가치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대학은 '신 공공관리론'과 이에 따른 '혁신'이라는 명목 아래 대학의 숭고한 핵심 목적을 부정하고 투명성, 경쟁력, 물질 만능주의를 기치로 내걸었다. 이는 그 동안 변화를 완강하게 거부하던 대학들에서 세계적인 '근대화 과정'이 뒤늦게 시작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시장 지배주의가 대학이라는 가장 어울리지 않는 영역까지 부당하고 왜곡되게 팽창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대학은 시장 지배주의가 가장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곳이다. (28~29쪽, 데스 프리드먼, 교육 개혁과 저항의 시작)
학교 밖에서 수입된 경영자들은 정당한 책무를 다한 납세자에 대한 책임을 점점 더 재정적인 것으로 바꾸었고,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관료주의의 엄격한 감시 아래 이 책임을 이행하였다. 철학자 조나단 울프의 지적대로, 미들섹스 대학의 철학과 폐쇄도 이런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이 학과는 현재의 '단결된 정부 보조 정책 아래 1인당 소득이 낮았으며, 따라서 비경제적인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울프가 또한 예언한 대로, 이제 이 정책은 바뀌었다. 미들섹스의 계산은 완전히 잘못되었다. 철학자가 없는 대학, 인문학 없는 대학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35~36쪽, 존 K. 월튼, 대학이란 무엇인가?)
만약 학생들의 점령이 전국으로 확산되면, 워릭 대학에서처럼 윤리적 범죄행위가 드러나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하지만 이런 상황이 발생하면, 대학은 학생들의 무책임한 행동을 비난하며 학생들을 무너뜨리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이다. 실제로 학생들의 반대가 심해지면서 정부가 여러 이데올로기 기구들을 이용하여 사태를 '진압'하려는 불길한 징후가 이미 보이고 있다. 몇 달 전에 '공공연한 부당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학생들에게 가혹한 제재를 가할 가능성도 크다. 사실 학생들은 미래의 커리어가 위험해지는 것을 감수하며 행동하고 있다. 대학이 대단히 중요한 '사회적 공공기관'이며, 이러한 대학의 개념을 지켜야 한다는 확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학생들과 똑같은 헌신과 용기를 저술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행동을 통해서도 보여주어야 한다. (132~133쪽, 애이클 베일리, 학자는 진실을 말하는 사람)
이미 여러 면에서 기업화되긴 했지만, 대학은 아직도 공공 기관이며, 인문학과 예술, 사회과학 학과들은 우리의 삶이 경제적 유용성에 따라 규정되어야 한다는 원칙에 도전할 수 있는 마지막 장소이다. 이런 비판을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런 학과들이다. 우리는 이런 학과에서 이 원칙의 역사를 추적하고, 그 힘을 이론화하고, 그 파괴력을 계산하고, 예술과 영화와 시에 대한 관심을 표현할 수 있다. 이 분야들이 가장 많이 공격 받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는 않다. 하지만 공공의 선과 공익을 위해 고등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사회정의로 가는 길에 고등교육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고등교육이 이해를 증진시키는 소중한 수단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고등교육의 공공 유산과 사고할 권리를 끝까지 지켜야 한다. (144쪽, 나탈리 펜튼, 가난해진 교육학, 민영화된 교육)
텍사스 A&M 대학교 교무총장 프랭크 애슐리는 이렇게 보수적이며 기업적인 인사고과 기준이 텍사스 사람들에게 학계가 '자신의 책무를 다 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때문에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마이클 맥키니도 소비자 중심주의 접근법을 준용하여 수업을 학생의 만족도에 따라 평가했다. 그는 학생들에게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 교수들에게 보너스로 1만 달러를 지급한 다음 '이것은 고객 만족이다. 학생이 훌륭한 선생을 구별하고 금전으로 보상할 기회를 갖는 것이다'라는 말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이런 연구에 따르면 학생들의 평가는 교수의 성과를 측정하는 신뢰할만한 지표이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학생이 '서비스의 대가를 지불하는 소비자'라는 신자유주의 인식을 강화하며, 대학 수업을 일종의 오락으로 만든다. 미국 대학교수 협의회 의장 캐리 넬슨은 이것을 '박수 계량기'라고 불렀다. 학생들이 원하는 것만 제공하는 이런 교육 환경에서, 상식적인 가정에 도전하고 독립적이며 비판적인 사고를 하도록 권장하는 '교육'(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공부하고 성찰해야 하기 때문에 일부 학생들로서는 불편하고 힘겹게 여겨지는 교육이다)은 설 자리가 없어진다. 시장이 주도하는 보상은 편협한 개인적 보상과 만족이라는 탐욕스러운 본능에 영합하기 때문에 윤리적 상상력과 사회적 책임감, 진실을 말하는 교육학적 책무를 일축해버린다. 이것이 악당의 교육학이 아니라면 자기기만이다. (200~201쪽, 헨리 지루, 기업화된 대학의 기만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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