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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가 필요해서 집어 들었다. 한국은행조사부 자료가 알려주지 않는 것들이 필요해서. 1969년 서울 청계천 판자촌 일대, 마장동, 숭인동, 창신동, 현저동, 하월곡동의 인류학 보고서다. 당시 이렇게 촘촘하게 판자촌 일상을 적어둔 자료가 드물어서 매우 귀한 자료다. 1969년 농촌 이주 연구를 하던 하버드대학교 브란트 박사가 서울에 9개월 간 체류하면서 판자촌 일대를 조사했다. 함께 연구를 수행하던 당시 서울대 인류학과 대학원생과 사회사업 조사자가 하숙생 신분으로 거주하면서 매일 일지를 썼다. 미국에 영어 번역이 되었던 최협의 마장동 조사 일지(한국어본 분실)가 다시 한국말로 번역 되어 생자료로 그대로 실렸다. 농촌이주자가 대부분. 호남 출신이 많았고 그들은 '연줄'을 잡고 올라와 판자촌에 자리를 잡았다. 1960년대 중반에 호남에 극심한 가뭄 이후에 이촌 현상에 가속도가 붙었다. 농촌 문제와 도시 문제가 바짝 붙어 있다. 서울의 판자촌 생활이 농촌생활보다 나을 것도 없었지만 끊임없는 브란트 박사는 매스미디어(라디오)와 외부 자극(친구, 친척, 군대경험 등) 을 통한 도시 생활(소비 생활)에 대한 대상만족(vicarious satisfiaction)의 문제를 당시에 제기했다. 이촌향도의 문제를 너무 경제적 맥락에서만 해석했을 때 연구에 빈약함이 있을 것이다. 사람은 밥만 먹고 살지 않는 아주 복잡한 존재니까 말이다. 여하튼 숫자를 좀 적어둔다. 1969년 당시 마장동 일기에는 15세 미숙련, 미성년자 소년 노동자의 월급이 3,000원 (근무 일수가 나오지 않지만 아마 격일 휴무가 아니었을까.), 미숙련 여성 성인 노동자 월급 4,000원. 숭인동(창신동 포함) 일기에는 숭인동 봉제공장 미스강(경력 4년) 봉급 7,000원(15시간 근무), 미숙련 여성 노동자 옥이와 순자 월급 4,000원, 매달 방세가 1,500원. 야경비(당시 세금을 이런 식으로 통반장이 걷어감) 매달 20원(세입자는 10원), 배달 물값 15원 (배달 하지 않으면 2원) 권투경기 있는 날 텔레비전 시청료 어른 10원 어린이 5원. 평소엔 어른 5원 아이들은 2원 생선장수 : 생선 1마리 10원, 12마리에는 100원, 80마리 한 상자 도매값 400원에서 500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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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적어도 한 번은 청계천을 찾는다. 지난해에도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던 11월 등 축제 관람을 위해 청계천을 거닐었다. 곳곳이 연인이어서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어려움이 많았던, 하지만 청계천이 처음부터 젊은이들이 낭만을 노래하고 직장인들이 도심 속 여유를 찾아 방문하는 장소는 아니었다. 현 대통령이 서울시장 재직 중이던 시절에 청계천은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났다. 그 전에는 흉물스럽던 고가도로가 존재했었다. 지금은 ‘흉물’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청계천이 복개되던 1977년 무렵으로 돌아간다면 복개는 피할 수 없는 선택과도 같았다. 서울 한복판에 즐비했던 판자촌은 나날이 발전하는 국가 경제와 영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청계천이 서울이 아닌 다른 지역이었더라면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하필이면 서울, 그것도 중심부여서 정부는 어떻게 해서라도 청계천을 변화시키고자 힘썼다. 지금은 인위적이나마 물이 흐르는 공간으로 재탄생한 청계천이 한때 사람들의 보금자리였음을 뒤늦게 기억해본다. 그렇다면 그 때 그 사람들은 다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사람을 가장 먼저 바라보아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다. 특정한 정책 등을 수행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어쩌면 사람을 배제했기에 청계천 복개가 그토록 쉬웠던 것일 수도 있다.
이 책은 흥미로운 시간 여행을 나에게 허락했다. 1969년 저자는 하버드 대학 인류학 연구자였던 브란드 박사의 조교로 청계천을 찾았다. 당시 그가 행한 것은 참여관찰이었다. 마장동 22통의 한 판잣집에 방을 얻어 일정기간 동안 살면서 같은 공간에 거주하는 이들을 관찰하고 직접 대화를 나누며 기록으로 남겼다. 따라서 기록 속에는 상당히 많은 인물들이 등장했고, 그들의 삶 세세한 부분이 담겼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판잣집에 기거하는 이들의 대다수는 타 지역에서 서울로 이주해온 경우에 해당했다. 도시화가 격렬히 진행되고 있던 시점에서 서울은 모든 꿈을 이룰 수 있는 환상적인 공간처럼 비추어졌을 터. 자신들보다 먼저 서울로 이주했던 이들이 보여주곤 했던 금의환향은 변화하는 삶에 대한 그들의 욕구에 불을 붙였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가 않았다. 좁고 짧은 통로를 사이에 두고 열악한 집들이 즐비했다. 공동으로 사용하는 변소 앞에는 아침이면 긴 줄이 생성되었다. 농사를 짓다 도시로 올라온 이들에게 마땅한 일자리가 주어질 리 만무했다. 시골에서는 제법 공부를 했으며 재산을 가졌던 이들도 판잣집에 몸을 들인 후로부터는 그저 그런 인생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도시가 농촌보다 낫다는 평을 아끼지 않았다. 대부분이 다시 농촌으로 돌아가지 않겠노란 응답을 했고, 돌아가겠다 말을 한 이들도 일단은 도시에서의 성공을 기반으로 농촌에 정착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도시는 농촌보다 빈부의 격차가 컸다. 그로 인한 좌절도 물론 컸겠지만, 자신보다 월등히 잘 사는 사람들의 삶은 자신도 달라질 수 있다는 희망을 선사했다. 그리고 도시는 농촌보다 확실히 활기찬 곳이었다. 비록 안정적인 직장을 가지는 데엔 어려움이 있었지만, 번 돈을 사용할 만한 곳을 찾는 데엔 어려움이 없었다. 판자촌은 일종의 회색지대였다. 농촌 사람들이 옮겨온 탓에 아직은 정이 남아 있었다. 누군가가 어려움을 당하면 사람들은 십시일반 모금을 벌였다. 시시콜콜 제 살아가는 이야기를 털어놓는 일도 잦아 서로의 삶에 대한 비밀이 없어 보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들은 도시민의 냉정함도 받아들였다. 고향에서라면 쌀집 바로 옆에 쌀집을 개업하는 일은 차마 못했을 것인데,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뭔들 못하겠느냐는 사고에 익숙한 그들은 금기를 어겼다. 또한 너무 깊이 관여했다가는 자신에게 화가 미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곱씹기라도 했던 건지, 관심을 가지는 듯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외면했다. 일종의 과도기적 단계에 고착되어 버린 풍경. 정부에서 힘을 가해 복개하지 않았더라면 이도저도 아닌 모호한 삶을 통해 그들은 도시와 농촌 양자의 문화를 아우르는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청계천을 복원하면서 정부는 과거에는 그토록 외면하고 억눌렀던 판자촌의 기억도 복원하려 들었다. 궁핍한 삶은 현재의 번영을 부각시키는 데에 이용할 수 있는 좋은 소재였다. 의도에 따라 청계천 판자촌엔 각종 부정적인 이미지가 덧입혀졌다. 그렇지만 판자촌은 ‘무능하고 게으르고 더럽고 병들고 범죄에 찌든’ 공간이 결코 아니었고, 그 곳의 삶 역시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놀라울 만큼 정상적’이었다. 하나의 문제를 평가함에 있어 언제나 우린 타자의 시선을 고수해왔다. 청계천 문제도 마찬가지여서, 정비해야만 하는 곳이라는 관점을 강력히 피력해왔고, 그에 따라 지금까지의 도시계획이 전개되어 왔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더 이상 청계천에는 판자촌이 존재치 않는다. 30년도 더 되는 시간이 훌쩍 흘러가버렸기에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을 찾는 일도 쉽지 않다. 그렇지만 부정과 그리움만으로는 청계천이라는 공간에 대한 복원은 이룰 수 없다. 사람이 빠지면 모든 이야기는 공허하기 마련이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희망과 불안을 가지고 있던 보통사람들의 목소리야말로 청계천 판자촌 복원을 완성시킬 수 있는 열쇠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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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에 미국의 인류학 학생이 와서 청계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조사한다. 글구 미국에 돌아가 이 내용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인류학 교수가 된다. 이 내용은 당시 조사알바를 하던 학생이 세월이 지나가 그 기억을 찾아, 원고를 모아 책을 냈다.
내용은 매일매일 의 청계천, 숭인동에 살던 서민들의 생활을 기록했다.. 약간의 사진, 일본인,한국인이 찍은...과 함께.
청계천 무허가 판자촌에 살던 대부분은 사람은 지방에서 상경해서, 청소부,목수,미용사, 작은 가게,좀약판매,채소장수,생선장수 등을 하며 살아 간다. 막걸리집과 화재로 집이 불타기도 하고, 상이군인...
막 70년대 6/25이후 막 경제성장이 시작될려던 찰라. 가발과 봉재,합판,수산물수출이 전부이던 시절.. 당시의 생활상과 물가수준으로 짐작할 수 있다. 목수는 하루 700원 벌고 좀약팔면 300원, 배추 띄어다 팔면 500원 등등.. 장씨,양씨.. 지금은 판자촌이 철거 되면서 봉천동,상계동등으로 흩어졌다.. 당시 생활상을 차분히 짐작하게 한다. 당시 생활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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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68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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