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 속에서의 메링은 전형적인 백인 식민지배자로서의 모습 그대로이다. 인종차별이 법적으로 보장이 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정치적 특수성을 이용하여, 그는 자신의 주말농장의 관리와 유지에 필요한 흑인 인부들을 고용하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으며, 또한 남아프리카의 풍부한 철광자원을 통한 선철사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인물이기도 하다. 메르세데스―메르세데스 벤츠는 독일제 차량으로서, 이것이 유럽에서 온 차량이라는 점은 작품 내에서 하나의 상징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를 자가용으로 소유한 그는, 도시의 사무실에서는 물론 사교모임이나 자신의 농장 그 어디에서나 ‘주인대접’을 받고 사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렇듯 표면적인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는 백인 지배계층으로서의 메링의 삶은, 실제에 있어서는 모순과 혼돈에서 비롯된 병적인 증상으로 가득하다. 아내와는 오래 전에 이혼했고, 열여섯살 되는 아들과는 대화가 원만하지 못하다. 또한, 아프리카의 자연을 즐기고 싶어하는 그이지만, 그의 직업은 남아프리카의 자연자원을 착취하고 훼손하며 곳곳에 산업 폐기물을 매립하는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에게 있어서의 여자는, 또 하나의 성적 노예나 마찬가지에 속한다. 연인 관계에 있는 안토니아가 있으나, 그녀가 그에게 던지는 직언’내지는 신랄한 비판의 순간에도, 그는 오히려 그러한 그녀로부터 성적인 흥분을 느끼는 변태적 증상을 나타내기도 한다. 작품 속에서의 그는, 이렇듯, 경제적인 부와 그로부터 파생되는 물질적 부를 제외한 나머지가 점점 피폐해져가는 상태로 묘사되고 있다. 그것은 가족 공동체의 부재이며, 동일한 문화를 향유하고 결속하는 동질 집단의 부재이기도 한 동시에, 또한 도덕과 양심의 기준이 될 만한 가치관의 부재이기도 하다. 즉, 그가 뿌리도 전통도 없이 안주하려고 했던 아늑한 중산층의 세계가 그도 모르는 사이에 허물어져 가는 것이다. 결국, 메링이 정신적으로 무너지는 것은 그가 안이한 인종차별이란 보호망 속에서, 또 지배계급인 백인들의 무신경과 도덕적인 경직성 속에서 냉철한 자기 인식에 실패한 것에 기인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는 주위 사람들과 거의 대화를 하지 않는다. 이러한 메링의 모습과는 반대로, 야코버스로 대표되는 흑인들의 삶은 오히려 자신들만의 가족·전통문화·종교적 정체성을 확고히 유지해감으로써 자신들의 유대감을 강화하고 있는 모습들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이 메링보다 열세한 것은 오직 경제적인 부와 상대적으로 낮은 사회적 신분뿐이다. 작품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야코버스의 삶의 방식이다. 비록 메링의 농장을 관리하는 하인의 위치에 있지만, 그는 항상 자신이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것을 적당히 과시할 줄도 알고, 또한 아첨에도 능하다. 이러한 그를 바라보는 메링은, 그의 교활함에 대해서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신을 존경하며 자신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우월감 섞인 착각에 빠져있다. 이러한 그의 오만함은, 어쩌면 노동력의 80%를 흑인 노동자로 채우고 있는 철강산업의 우두머리로서, 어쩌면 당연한 습관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메링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가 비록 수많은 흑인들을 부리는 ‘주인님’일지는 모르나 소수의 백인으로서 아프리카의 사람들, 문화, 자연 속에서 스스로 고립되어 가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Homi K. Bhabha가 지적하듯, 간극성의 문제가 저항적 성격을 띠는 것은 그것이 외부로부터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라고 여겨지는 내부로부터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타자성이 내부에서 발생하는 순간, 식민 지배담론은 혼돈에 빠지게 될 수 밖에 없으며, 그것이 곧 해체의 가능성의 순간이기도 하다. 야코버스로 상징되는, 메링의 주말농장에 관계된 흑인들의 삶의 모습이 이러한 간극성의 저항의 순간을 잘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이라는 ‘하나’ 안에서 백인 주인들 아래에 종속되어 있는 흑인들로서, 그들은 바바의 모방과 혼종의 개념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주인들을 점점 닮아가기 시작한다. 그들은 비록 서투르기는 하나 영어를 구사할 줄 알게 됨으로써 백인들과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백인이 입던 옷을 입으며, 트랙터와 픽업트럭을 운전할 줄 알게 된다. 메링의 삶의 패턴에 적응해 가면서 그로부터 신뢰를 얻기 시작하는 야코버스와 일행은 주인이 없는 틈을 타서 농장 내부에 있는 주인의 별장에 몰래 들어가서 자신들의 볼일을 보기도 한다. 그들이 간극의 위치에서 백인 주인 메링을 고립시키는 지점이 바로 이 지점이기도 하다. 그들은 필요에 따라 자신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아프리카어로 서로 대화함으로써 메링을 자연스럽게 소외시킨다. 이러한 언어적 저항성은 문화적 저항성과 결합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주인인 메링과 농장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야코버스는 단순한 일꾼들 중의 우두머리가 아니라 그 이상으로 자신의 동료와 가족들을 책임지는 존재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그의 존재의 특수성은, 똑같은 흑인 하인이라는 백인들의 이분법적 식민담론의 특성 아래 묵과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그의 특수성이 얼마든지 감추어질 수도 있다는 전략적 특징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듯, 자신들보다 미천하다고 여겨지는 흑인들로부터 서서히 고립되어가는 메링은, 과연 자신의 의지대로 자신의 모든 지배계층으로서의 막대한 재산과 농장들을 자신의 아들에게 물려줄 수 있을까? 제국주의적 식민주의의 확장을 생물학적 관점에서의 번식에 비유한다면, 그 해답은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모든 재산과 권력을 아들에게 세습하고자 하는 그의 욕심은 자신의 대를 이어 제국주의적 식민주의의 영속화를 꾀하고자 하는 지배담론의 욕망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메링이 여성을 단순히 성적 유희로만 생각하는 도착증적인 성향을 나타내는 것은 단순한 개인의 성적 취향이 아니라 그가 백인 식민지배계층을 상징하기 때문에 더욱 그 무게가 강하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아들이 동성연애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경악을 금치 못하는 장면은, 그러한 식민지배계층으로서의 특권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는 경고인 동시에 작가 고디머의 예견일 수도 있겠다. 메링이 실패한 것은, 결국 지배할 수 없는 것을 지배하고자 했기 때문에 발생한 필연이었으며 동시에 간극의 위치에 서있는 야코버스와 그 외의 흑인들의 무언의 저항과 아프리카의 대자연의 승리로 귀결 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