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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주제는 자유주의 대가 존 롤스의 [정의론]비판이다. ‘의무론적 자유주의’ 의 비판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확할 것 같다. 존 롤스의 정의란 무엇이고 샌델은 존 롤스 정의의 무엇을 비판하였을까? 일반적으로 정의란 종교와 같은 초월적인 정신성과 선을 비롯한 윤리적 관념을 지닌 윤리성을 포함한 것을 말한다.
존 스튜어트 밀은 정의를 "모든 도덕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비교조차 안 될 만큼 가장 신성하고 강제적인 것.“ 이라고 했으면 존 로크는 ”인간의 자연권을 어느 국가도 넘어설 수 없는 매우 강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샌델은 정의의 관점은 한 시대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 안에 작동하는 불평등과 불의를 해결하는 데서 나타난다. 하지만 정의가 상대적인 것은 아니다. 도덕적인 가치가 토론되면서 도덕적주체의 반성대상이 된다. 때문에 정의 개념은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고 , 적용 시점에 따라 상이한 평가가 가능하다. 바로 그런 이유로 정의는 ‘한계’를 가진다.-p32 라고 한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통해 샌델을 ‘공동체주의’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전통적인 자유주의와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보수주의의 입장을 절충한 중도주의를 말한다. 즉, 고도산업사회화에 따른 도덕적 공동체의 와해와 이기적 개인주의의 팽배에 의한 원자화 등의 현상에 대한 불만의 이론적 표출로 볼 수 있다.)로 보는 시선에 대해 샌델은 ‘나는 공동체주의가 아니다. 나는 자유주의자’라고 한다. 이에 대해 정의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인권의 보편적 가치를 옹호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가치의 공동체적 차원을 강조했다고 해서 이들이 상대주의자이거나 공동체를 초월한 가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샌델이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자유주의다. 자유주의를 빼놓고는 샌델의 논의를 시작할 방법이 없을뿐더러, 잘못된 자유주의를 전제할 경우 그의 논의는 탁상공론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샌델의 자유주의 공격은 특정 형태의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일 뿐, 자유주의를 바라보는 샌델의 시선은 정치적으론 매우 우호적이다. 샌델의 부정적인 시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의무론의 형태를 위하고 있는 자유주의 정치철학에 맞춰진다. 무엇보다도 '의무론적 자유주의'의 철학적인 가정이 문제라는 것이다. 샌델은 잘못된 철학적 가정에서 비롯된 ‘공공 철학’은 결국 거짓 이론일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샌델의 표적은 롤스의 <<정의론>>에 나타난 자유주의다. 롤스의 <<정의론>>은 1989년 공산권의 붕괴로 유럽의 정치 철학 판도에 큰 변화가 생겼다. 정치적 이념으로든 주적으로든 정치적 변혁 주체 세력의 붕괴는 일종의 정치 철학 공황 상태를 초래했다. 이러한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이와 더불러 자유주의에 대해서도 논쟁이 일기 시작하면서 롤스의 이론을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또 하나의 시도로 해석하려 했다. 그 결과 , 유럽사회안에서 롤스의 정치적 자유주의와 그 대안으로 공동체주의가 활발하게 논의되기 시작하게 되었다.
이렇게 자유주의는 자본주의 체제의 침체 국면에서 벗어나게 할 대안적 정치 철학으로 자리매김한다. 이때 공리주의(19세기 중반 영국에서 나타난 사회 사상으로 가치 판단의 기준을 효용과 행복의 증진에 두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실현을 윤리적 행위의 목적으로 보았다.) 역할이 컸다. 그러나 공리주의는 개인이 아닌 사회적 효용의 극대화라는 문제로 인해 개인의 권리이상을 요구하게 된다. 생산의 극대화가 삶의 질을 향상시킬수 있었던 과거와는 '삶의 질'이 당면문제가 되면서 복지 국가 모델을 대안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은 자유주의가 자연스레 현실 정치의 대안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롤스의 정의론은 지금도 지배적인 공리주의 공공 철학에 대한 체계적인 반발이다. 무엇보다 공리주의, 자유주의가 토대하고 있는 가정을 거부하려 했다.
롤스에 대한 샌델의 비판은 자유주의가 전제하고 있는 인간관에 근본적인 오류가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자유주의자들이 틀렸다고 비판한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자기 이해에는 근본적으로 공동체적으로 형성된 가치가 이미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사회성을 근원적으로 초월하는 개인주의는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롤스의 정의론은 칸트의 옳음이 좋음보다 우선한다는 기본 테제에 있다. 1, 특정 개인의 권리는 아주 중요해서 일반 복지도 그 개인의 권리를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것. 2, 권리를 구체화하는 정의 원칙들이 좋은 삶의 개념과 무관하게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의와 좋음을 연결하는 하나의 방식은 정의 원칙의 도덕적 힘이 특정 공동체 혹은 전통에서 채택되거나 폭넓게 공유되는 가치에서 나온다고 주장하는 것이다.두 번째 방식은 정의 원칙의 정당화가 도덕적 가치 또는 활용된 목적의 본래적 좋음에 달려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롤스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평등 사회가 달성된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선 먼저 공리주의에 대한 체계적인 비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러면 두 정의 원칙을 쉽게 받아 들일 수 있는 논변이 필요했는데 ‘원초적 입장’이다. 원초적 입장은 두가지 정의관을 사회적 선택의 관점에서 비교해볼 수 있게 해준다. 자유롭고 평등한 각 개인이 사회적 선택을 할 수 있는 상황이다. 편협한 생각은 선택의 공정성을 훼손한다. 원초적 입장이 공정하려면 이러한 편협함을 극복할 수 있는 추가 조건이 필요한데, 롤스가 택한 방법은 개인 정보를 제약하는 것이다. 롤스는 이 같은 제약을 하나의 비유로서 ‘무지의 베일(장막)“이다.
원초적 입장의 정보 제약은 인간의 자유가 어떤 것으로도 침해받을 수 없는 최상의 가치라는 점을 전제한다. 여기서 공리주의의 정의 원칙과 롤스의 정의 원칙이 비교될 수 있다. 소수의 희생을 인정하는 정의 원칙보다 어떤 희생 원칙도 용납하지 않는 정의 원칙이 더 우월한 것도 이 때문이다.바로 그런 관점에서만 롤스의 정의 원칙은 공리주의 정의 원칙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본다. 사회 제도는 가진 자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형성하는 모든 이에게 똑같은 이익을 보장해야 한다. 공동체를 형성하는 모든 이에게 똑같은 이익을 보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현재 가지지 못한 자의 이익이 먼저 도모되어야 한다. 도덕이 살아있는 한 실현가능하다고 보았다. 롤스가 주창한 자유주의는 이런 도덕적 관점의 승리를 선언한 것이다.그러나 롤스의 정의 이론 가운데 하나이지만, 원초적 입장의 도덕적 관점을 만족할 때만 보편적인 정의 이론으로 작동한다. 롤스의 정의이론에 깔린 이러한 보편주의 관점이 비판의 대상이 된다.
정의의 근원성 테제에 대한 공격, 사회계약 논증의 타당성에 대한 공격, 소유 개념에 대한 공격, 국가의 중립성 테제에 대한 공격, 각 장마다 배열된 사례들은 롤스 정의 이론의 주춧돌이다. 롤스가 상정하는, 정당화가 가능한 단일적인 보편성이다. 원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가치는 기껏해야 현실의 도덕적 관점을 추상화해서 얻어낸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정의관은 다수일 수 밖에 없다. 정의관 각각은 도덕적인 가치를 포함하고 있으며, 상황에 따라 관점의 차이를 드러낸다. 따라서 모든 것을 포괄하는 절대적인 정의 원칙은 없다. 옳음이 좋음보다 앞서기 때문에 주체도 그 목적에 앞선다. 진정한 자기 이해는 단순히 권리를 향유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교섭하면서 공동의 관심사를 이끌어내는 데 있다. 진정성은 처음부터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과정에서 달성되어야 한다.
샌델의 논의는 정치적 주체로서 개인과 집단의 정체성에 주목한다. 자유주의 정치 철학 비판에서 분명히 나타나듯, 개인은 태어나면서 추상적인 권리를 가진 게 아니다. 권리는 타인과 교류하면서 스스로 쟁취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정치는 인간과 뗄 수 없는 것이며,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공공철학은 인간이 자기를 이해하고, 타자를 이해하고, 인간을 둘러싼 공공 세계를 이해해야 한다는 ‘자기-타자-공공세계의 이해’를 주창한다.결론적으로 샌델은 자유주의 정치 철학은 이 시대의 대안적 ‘공공 철학’일 수 없다고 한다. 자유주의 철학이 이 시대의 공공 철학이 될 수 없다면, 이 시대의 '공공 철학'으로 샌델은 공화주의를 제시한다. 공화주의는 개인의 참여권을 보장하고, 시민적 덕성을 함양할 공동체 공간을 활성화한다. 그것은 <<정의의 한계>>에서 찾아낸 자아, 연고를 가지고 있는 자아, 더 나아지려고 노력하는 자아, 그 가운데 정체성을 찾고 타인과의 교류를 모색하는 자아, 배려와 헌신을 배우는 자아가 완결될 수 있는 체제다. 이러한 체제 없이는 모든 개인은 힘을 발휘할 수 없는 고립된 자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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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열풍의 주인공인 센델의 새 책, 사실 오래된 책이지만 “정의의 한계”라는 한글제목 원제는 “Liberalism and the limits of Justice”,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 최근에 경제부분이나 사회에서 자유주의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한다. 여기에다 신자유주의도 자주 언급된다. 자유주의는 서구근대사회의 산물이기에, 우리에게는 조금은 생소한 개념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보통 자유스럽다는 그냥 좋다는 느낌과 개인의 자유(기본권)을 중시한다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철학적 사고는 깊은 곳의 의미를 파헤친다. 자유주의 이념의 이해와 비판과 공동체 주의,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가치나 다수의 의지에서 당신은 어느 쪽을 더 중요할까. 분명 둘 다 필요한 것 같은데, 개인 없는 사회나 사회 없는 개인은 어떤 상황일까
센델은 자유주의 특히 의무론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자유주의 정치절학을 비판하고 있다. 또 잘못된 가정에서 출발한 공공철학을 거짓이론이다라고 한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기본권을 옹호하는 서구근대사회의 유산으로 한때의 시대의 대안으로 각광을 받았지만, 지금은 퇴조분위기이다. 이런 시대에 센델은 사회협력을 중시하는 공화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이런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현대자유주의 사상의 이론적 근거(롤스의 정의론의 토대가 되는 주제)에 대한 해체와 반박이 이 책인 것 같다. 샌델은 자신의 글의 핵심을 논증의 진행방식을 제시할 뿐이라고 한다. 이 책의 부록의 처음에 “가장 근본적인 단계의 철학 문제들은 보통 결정적인 논증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어떤 이에겐 명확하고 근본적이지만, 다른 이에게는 이해하기 힘들 수 있다.” 너무 우리의 스스로의 무지를 자책할 필요가 없다.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 받아들이면 된다. 단지 오해는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 책에서는 자유주의와 정의한계를 다루지만, 무엇보다 무엇이 자유주의이고, 무엇이 정의인가 그리고 자유주의의 대안은 무엇인가에 관한 글인 것 같다. 센델은 공동체주의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이 책을 읽으면 이해가 더 쉬울지 모르겠다. 과연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롭다라고 말하지만, 그 기준은 무엇일까? 시대에 따라 변하는가 아니면 진리에 가깝기에 항상 일정한 개념을 가진고 있는 것일까? 알 것 같기도 하지만, 말하라고 하면 말하기 힘든 것, 일상에서도 흔히 사용하는 단어 그리고 분배, 평등이라는 단어가 연상되지만 명확하게 콕 집어 말하기는 쉽지가 않다. “자명한 이치를 입증하는 일이 휠씬 더 어렵다.” 정의를 느끼는 자아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에 대해서도 탐구를 계속한다. 과연 자기인식이 타당성을 가질 수 있는가? 나는 경험의 대상(감각의 세계)이며 한 주체로 이해(예지계 또는 추감성 세계) 된다. 그리고 여러 나들이 모여 사회를 형성한다. 정의는 조건적으로 사회제도의 제일 덕목이다. 정의는 무엇보다 사회적이다. 그러기에 모든 사회덕목 가운데 최상의 것으로 다른 것보다 앞서고, 반드시 부딪쳐야 할 가치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타주의나 자비와 같은 협동적인 덕목을 고양하고자 하는 가능성도 있다. 정의원칙은 좋아하든 싫어하던 상관없이 적용된다. 옳음은 좋음보다 앞선다. “옮음이 어떤 목적을 진척시키는 도구라면 누군가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은 타인의 우선적인 선이라는 미명하에 정당화될지 모른다.”, 여기서 등장하는 최소선의 개념, 공정성의로서의 정의, 인간은 서로의 운명을 공유하는 데 동의한다는 점에서 현재의 바램과 이해관계에 좌우되지 않는 판단점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 정의의 여건과 행동 등 다양한 접근이 시도된다. 정의는 단지 한 사람이 존재하는 세계에선 적용되지 않고 여러 사람 또는 집단간의 관계에 적용된다고 말한다. 사회 속에서의 정의, 사회의 선이 그것을 향유하는 개인의 이득에 내제한다. 그러기에 공동체 개념은 정의의 한계를 지시하고, 불완전한 자유주의의 이상을 찾아낸다. 무엇보다 정의에 대한 숙고된 우리의 확신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사회에서의 정의. 하지만, 무엇보다 정의 개념이 각 사회에서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고, 다양하게 정의될 수 있고, 그 적용시점에 따라 다른 평가가 있을 수 있기에 ‘정의는 한계’를 가진다고 본다. 왜 정의가 중요한가? 간단히 말하면 우리의 지금처럼, 분명 발전을 많이 한 것 같은데, 더 살기가 어렵고 힘들어진 것을 느끼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에 대해 정의로운 체계가 뒷받침 하지 않는 성장은 양극화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보통 우리는 중립성을 향한 자유주의 열망에서 나온 종교적 자유와 자유일반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정의는 무엇을 원하든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바라는 것이어야 한다. 공정성, 분배, 자신과 타인 그리고 계약과 선을 통해서 정의를 바라본다. 공정성으로서의 정의, 정의의 여건은 인간사회에 널리 퍼져있는 조건이다. 우리의 사회는 서로의 이해관계 때문에 충돌하고 통일, 상호협동하고 모두에게 이익이 되게 나아간다. 여기에 공정성을 통해 부정을 타파하고 도덕을 향상시킬 수 있다. 인간은 얼마나 자율적인 존재일까? “자신을 노예로 파는 것은 타인을 노예로 삼는 것과 도덕적으로 같은 의미다.” 자율의 이상은 계약을 의지행위로 보고, 그 의지 행위의 도덕성을 거래의 자발적인 특성에서 찾는다. 자아는 정체성 자체에 개입할 가치와 정서를 넘어서야 도달할 수 있는 어떤 애착(몰입)과 가능성을 배제한다. 공동체의 의미도 단지 속성이지 결코 질서정연한 사회의 구성요소가 아니다. 공동체의 개념은 정의의 한계를 지시하고, 불완전한 자유주의 이상을 찾아낸다. 좋은 삶의 개념은 광범위한 동의를 얻어내거나, 깊이 생각해보면 광범위한 동의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공정성으로서의 정의에서 인간은 서로의 운명을 공유하는 데 동의한다. 우리는 소유자가 아닌 여러 형태의 자산과 속성의 보호자 또는 저장소일뿐이다. 누가 무엇을 소유하는가? 그러나 나는 소유자, 보호자, 내가 낳은 자질의 보관소이다. 공적토대에 적합한 소유는 자원분배에 대한 사회적 요구를 사회제도에 기반을 둔 정당한 기대에 따른 소유자격으로 주장된다. 우리사회에서 정의의 공정성은 분배의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과연 분배의 정의가 실현되고 있는가? 분배의 정의는 사회 속에서 얼마나 정의로운가를 판별하는 중요한 수단이 얼마나 분배가 공정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가일 것이다. 분배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개인 “모든 인격을 단지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우하라.”, 그러나 공정한 기회는 운과 같은 임의성에는 너무 약한 도전일수밖에 없다. 현실적으로 “사회적, 문화적 조건에서 발생하는 불평등을 근절하기 위해 완벽한 기회를 제공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 사회자체가 어쩌면 불공정한 사회이기에, 이 사회를 바꾸어야 한다. 롤스는 재능과 속성의 분배를 개인의 소유물이 아닌 공동자산으로 간주하고, 샌델은 지능에 가치를 두는 권리 자연적 자산과 공동자산, 인격이 아닌 인격의 속성만이 타인의 복지수단이라고 말한다. 계약의 공정. 어떤 사회 속에서 존재하는 것은 그 사회의 규율에 대한 암묵적 동의일 것이다. 계약의 도덕, 자율의 이상은 계약을 의지행위로 보고, 그 의지 행위의 도덕성을 거래의 자발적인 특성에서 찾는다. 호혜성의 이상(계약의무) 계약, 상호이득의 도구, 공정성 등 무엇보다 공정한 결과를 산출했기 때문에 계약을 준수한다. 정의원칙은 제도원칙(제도와 사회관행의 정의로움)과 개인원칙(개인들의 약정을 구체화)으로 이루어진다. 인간은 목표가 주어지기보다 선택하는 존재이다. 공정성으로서의 정의(다수성과 개인의 구분을 강조한대서 공리주의와 다르다.)는 전통적인 계약이론과 다르다. 우리의 동의는 특정 도덕원칙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계약은 토론처럼 다수의 인격을 요구하고, 무지의 베일이 내려졌을 때 이 다수성은 소멸되기 때문이다. 원초적 입장에서 일어난 일은 상호주관적인 존재로서 자기의식에 이르는 것이다. 정의원칙은 좋아하든 싫어하던 상관없이 적용된다. 공리주의는 공유의 윤리다. 롤스는 공동체의 선은 오로지 개인들의 사적목적 추구과정에서 협력을 통해 얻어낸 이득이라고 한다. 인간은 서로의 운명을 공유하는 데 동의한다는 점과 무엇보다 한 인격의 가치가 정의와 충돌할 때는 정의가 우세해진다. 개인적인 정서 혹은 1차적 정서나 느낌과는 달리 자비와 사랑은 욕망이고, 그 욕망의 대상은 타인의 선이다. 인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불분명하게 남아있고 그 이상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선이나 인류의 사랑처럼 고귀한 덕목에 직면해서도 정의의 근원성은 우세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투명하지도 않고 타인에게 불투명하지도 않다.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렇기에 사회 속에서 완전해지기를 추구하는지도 모르겠다. 마무리. 정의에 의해 지배 받는 시민들은 의무론에서의 해방을 여건이 허용하는 대로 완전히 실현할 수 있게 한다. 정의는 근원적인 인격일 수 없고, 또 차등원칙의 정의원칙인 인격일 수 없다. 무엇보다 자아(나), 나의 욕망의 시선과 내 정체성의 반성이 필요하다. 내가 소중하면, 타인의 선에 대한 제약된 접근이 필요하다. 또 공적(정의의 근원상이 지배)으로서 전적으로 연고를 갖지 않아야만 한다. 자유주의는 자아를 정치적 영역 밖으로 몰아냄으로써 인간행위능력을 지속적인 주의와 관심의 대상보다 신앙의 항목으로, 불안정한 달성보다 정치의 약속으로 넘긴다.
센델은 무엇보다 공정성에 주안점을 두는 것 같다. 교양서보다는 학술서에 가까운 이 책, 부피와 담긴 내용은 철학적 사고와 추론을 멀리한 나에게는 새로운 정신적 사고(고문)였다. 아주 근본적인 질문 정의란 무엇인가? 무엇이 정의롭게 하는가라는 어쩌면 단순한 질문을 던지지만. 그 질문의 파급효과라고 할까? 의문은 계속 이어 이어진다. 하지만, 무엇보다 역자가 해제를 통해 잘 요약하고 정리해주지만, 센델의 글은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무엇이지? 하는 의문이 더 커지는지도 모르겠다. 왜 우리나라에서 정의의 열풍이 불었을까? 그것은 우리 사회가 “정의의 도래는 더 고귀한 덕목, 하지만 매우 드문 덕목의 부재를 뜻하기 때문이다.” 정의롭지 못하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기에 더 관심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스스로 정의로운가 라는 질문에 그렇다라고 답할 사람은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분명 정의는 사회적 개념인지 모르지만, 개인 없는 사회는 존재할 수 없기에, 개인적인 개념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센델의 정의도 오랜 시간의 산물이기에 그 과정 형성의 토대가 되는 많은 책, 그 중에서도 이 책 “정의의 한계”는 그의 젊은 날의 철학이며, 그의 철학을 완성해가는 주춧돌 같은 책이 아닐까 한다. 완벽이란 것이 존재할까? 한 시대의 문제를 찾아내고, 왜 이런가를 분석하고, 그 속의 불공정, 불평등, 불의를 제거해나가는 것이 정의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 책의 부록에서 낙태와 소수민족우대와 국민주권문제들 풀어가는 과정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부족한 부분이 이런 것 아닐까 생각해본다. 현실적인 정치를 비난하고 혐오하면서 참여를 하지 않는 현실 속의 우리들에게 낙태, 특례입학 등 다양한 논쟁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정치라고 말한다. 이런 자유주의의 대안으로 사회협력을 통한 공화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상호존중 개념, 숙고의 개입의 존중은 자유주의가 허용하는 것보다 더 광범위한 공적 이성을 제공한다. 한마디로 센델의 철학의 철학을 요약하면 “인간가능성에 대한 확신” 이라고 할 수 있다. ------------------------------------------------------------------------- * 책 본문에 강조를 한다고 이태릭체로 표시한 부분이 읽는데에는 상당히 불편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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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마이클 샌델의『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커다란 울림을 느꼈다. 정의라는 말조차 생소했던 나는 이 책을 읽은 뒤 좀 더 나은 삶을 살아가려면 인문서적을 정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인문도서 쪽으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저자인 마이클 샌델은 정의로운 사회는 좋은 삶을 함께 고민하고 으레 생기기 마련인 이견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문화를 가꾸는 것이라고 했다. 또 공동선을 위해서는 희생과 봉사가 필수적이며 시장의 도덕적 한계를 극복하려고 노력하고 불평등과 연대 의식, 시민의 미덕에 대해 고민하며 도덕정치를 펴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가 이 책을 쓰게 된 이유는 모든 사람들이 책 속에 나오는 수많은 사례를 통해 언제든 좀 더 나은 결정과 선택을 할 수 있는 정의로운 시민들이 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재미있게 읽은 나는 마이클 샌델의 『정의의 한계』라는 책 제목을 만났을 땐 이 책이 내게 또 어떤 놀람을 주며 인문서적을 읽는 즐거움을 맛보게 할까 은근히 기대하며 책장을 펼쳤다. 『정의의 한계』는 마이클 샌델이 만 29세 때 쓴 책이다. 존 롤스의 자유주의에 대항해서 논쟁을 벌인 책으로 이후 존 롤스가 자신의 책 ‘정의론’을 수정하고 발전시키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이 책도 1997년 수정판을 내놓았는데 그 번역본이 이 책이다. 『정의란 무엇인가』가 수많은 사례를 통해 쉽게 독자들을 이해시킨데 반해 이 책은 저자의 사상을 심도 있게 표현한 학술서이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읽기에는 어렵기 짝이 없다.『정의란 무엇인가』가 우리나라에서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며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이해하기 쉬운 내용과 첨부된 동영상으로 인해 독자들에게 쉽고 재미있게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책 속에 들어있던 풍부한 사례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새 저자가 말하려고 하던 사상이 무엇인지 이해가 되었다. 이 책에서도 그런 즐거움을 기대했던 나는 책을 펴보고는 두꺼운 벽을 마주 한 것처럼 막막하기만 했다. 책에서도 밝혔듯이 이 책은 마이클 샌델의 책 중에서 가장 어렵다고 했다. 나는 막막한 마음으로 이 책의 서문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1982년에 초판 되어 마이클 샌델 교수를 공동체주의의 중심인물로 부각시킨 이 책은 1971년 출간 된 존 롤스의 『정의론』의 중심 내용을 비판하고 있다. 롤스의 『정의론』은 공리주의 공공철학에 대한 체계적인 반발이다. 공리주의는 어느 정도 소수의 희생을 내포하고 있는데 롤스는 어떤 형태로든 희생 원칙을 받아들이는 것은 정의의 원칙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 이런 공리주의를 비판하기 위해서 “원초적 입장”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것은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이 사회제도의 원리를 선택할 수 있는 상황에서 사회 제도를 규제할 정의 원칙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이때 공정한 원초적 입장을 만들기 위해 롤스가 제시한 방법은 바로 개인 정보를 제약하는 ‘무지의 장막’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사회제도는 가진 자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형성하는 모든 이에게 똑 같은 이익을 보장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샌델은 이 책에서 의무론적 자유주의가 빠질 수밖에 없는 철학적 한계를 비판하고 있다. 샌델이 문제 삼고 있는 것은 롤스의 『정의론』에 나오는 의무론적 자유주의다. 의무론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자유주의 정치 철학이 잘못된 철학적 가정에서 비롯된 거짓이론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올바른 것을 찾아내려면 올바른 철학에 토대를 두어야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그릇된 철학을 가려내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샌델은 의무론적 윤리는 초월적 주체를 전제로 하는데 과연 초월적 주체가 도덕적인 주체일수 있는가라고 묻는 것이다. 샌델은 의무론 관점의 근본 전제인 초월적 주체를 거부하고 우리가 눈으로 확인 할 수 있는 자아 정치적 주체로 자리매김하는 가능성을 찾고 있다. 다행히 책 속에는 각 장의 요약이 들어있다. 제 1 장 경험론자든 칸트주의자든 인간 사회에서 정의가 필요하다는데는 동의한다. 경험주의자들이 인류의 복지 증진이라는 이유로 정의를 요구한다면 칸트주의자들은 초월적인 관점에서 정의를 연결시킨다. 정의와 의무론이 연결되는 것은 칸트주의 관점이고 샌델 비판의 지점이다. 샌델은 정의가 다수의 인격들을 상정하기 때문에 정의 원칙은 사회적 가치이며 자아가 목적보다 먼저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의무론적 자유주의 정의 이론은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자아들과 다르고 이 같은 특성이 샌델이 문제 삼고 있는 점이다.(170~171쪽) 제 2 장 정의의 원칙은 평등 원칙과 직결된다. 의무론적 자유주의 정의 이론의 장점은 분배 문제의 해결에 있다. 각 개인은 자기 선택을 통해 무언가를 소유한다. 이 같은 소유가 어떻게 정당화되고 양도될 수 있는가? 실력주의 사회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차등적인 보상이야말로 공정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롤스는 이 같은 보상이 차별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차등원칙을 제시한다. 차등 원칙은 개인의 자질이나 능력차이가 아니라 그들이 처한 환경의 차이를 교정하려는 원칙이다. 롤스는 개인의 자산과 능력은 결국 인류의 공동자산이어야한다고 본다. 이런 롤스의 주장은 개인의 것을 배제하기 때문에 초월적 주체에 해당한다고 보면서 일상생활에서 나타나는 개인차를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샌델은 롤스의 주장에 대해 반박하는 것이다-234~235쪽 제 3 장 롤스의 원초적 입장은 실제의 계약이 아닌 가설적인 계약이다. 롤스가 원초적 입장을 서술할 때 ‘무지의 베일’이라는 단서조항을 굳이 단다는 것은 원초적 입장을 성립시키는 절차가 공정하다는 것, 더 나아가 선택 상황이 공정하므로 그 절차의 결과 또한 공정함을 보증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샌델은 일상의 사람들은 선택과정에서 반성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나서기 때문에 일상적인 선택도 존중하고 갈등이 생겼을 경우 그 안에 있는 도덕적 관점의 차이를 조정해야하는데 롤스의 주장은 이것을 간과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282~283쪽 제 4 장 롤스의 주장 역시 정의 원칙을 선택하기 위해서 공정한 절차를 확보하려한 것이고, 일단 정의 원칙이 선택되면 그 원칙은 일상생활의 좋은 삶, 선과 합치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샌델은 진정한 합치는 개인의 선택과 그 선택에 대한 반성, 개인의 선택을 더 높은 가치로 함양시킬 공간을 필요로 하는데 이때 타인의 인정이 요구 된다고 보았다. 정체성은 진정한 자신을 찾는 일이고 이 같은 정체성은 공동체를 필요로 하는데 개인의 선택이 존중받고 비판 받을 공간으로 ‘구성적 공동체’를 제시하고 있다. 이 공동체 안의 개인은 초월적 주체가 아닌 일상 삶을 선택하는 사람으로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반성할 수 있는 주체인데 반성 능력은 초월적인 게 아니라 인간의 역사성 안에서 얻어낼 수밖에 없다고 한다-348~349쪽 결론 자기 인식의 주체는 정치적인 주체다. 정치적인 주체는 목적과 선택의 순환 구조 안에서 자신의 인격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타인과 다양한 관계를 맺는다. 정치적인 주체는 정치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정치는 성원들의 일상 삶의 방향을 결정하기 때문에 정치는 성원의 선택에 좌우된다. ‘정치의 열정과 가능성’을 확인해주는 정치 철학이 바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정치 철학이다-366~367쪽
결국 샌델은 플라톤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올바른 철학의 토대에서만 정치적인 문제이든 개인 삶의 문제이든 모든 문제에서 올바른 것을 가려낼 수 있다” 내게는 너무나 어렵기만 한 이 책을 통해 샌델이 말하고자 한 것은 우리들의 삶이 어차피 사회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서로의 공동체에서 잘 살자는 것이다. 우리는 매순간마다 우리들 앞에 선 문제를 해결해야하는데 그 기준을 잘 세워 모두가 만족하는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올바른 기준을 만들어야하는데 샌델이나 롤스는 그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고 우리는 그들의 철학을 통해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도록 노력해야하는 거라고 생각하며 책을 덮었다. 나는 왜 이렇게 딱딱하고 어려운 인문 도서를 읽으며 좌절하고 있을까? 이 책을 읽는 동안 나 스스로에게 한 질문이다. 좋은 책을 읽고 내 생활과 행동에 변화를 가져오게 해서 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라고 애써 답을 찾아본다. 어떤 딜레마에 빠졌을 때 보다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며 이 책을 읽었지만 실은 읽었다고 하기에도 부끄럽다. 책을 덮고 나서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기 때문이다. 내게는 독서에 대해 좌절감을 안겨준 어려운 책이었지만 많은 독서가들에게는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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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읽었던 책들 중에서 가장 어려운 책이 아닐까 생각한다.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수식이 난무하고 알 수 없는 외국어로 서술된 책도 아니고, 번역서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한글로 기록된 책인데도 불구하고 머리가 나쁜 관계로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이 폭주하였다. 개인적으로 대형 서점의 인위적(?)인 베스트셀러 선정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지난 2010년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베스트셀러로 널리 알려지면서 읽어볼까 하는 호기심도 발동했지만 남들 다 읽는 책은 나중에 읽어야지 하는 생각으로 미뤄두었었다. <정의의 한계>를 펴 보았다. 두꺼운 편에 속하는 이 책의 두께는 큰 부담이 없었다. 하지만 본문이 나오기 전까지 등장하는 번역자의 해제와 재판 서문을 읽으면서 이미 기가 죽어버렸다. 이 책을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 이해는 둘째치고 이 책을 완독조차 할 수 있을까. 이 책에서 센델이 이야기하는 기본 소재는 ‘자유주의’이다. 좀더 범위를 좁히면 의무론적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그 비판의 구체적인 표적은 롤스의 <정의론>에서 나타난 자유주의이다. 롤스는 정의론을 통해 공리주의 공공철학에 대해 반발했다. 현대 공리주의의 중심 문제는 사회 선택 이론이며, 생산의 극대화 지점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 공리주의는 생산성의 극대화가 국가의 부를 키우고 그 성원들의 삶의 질이 향상된다는 가정을 깔고 있다. 하지만 이 가정에는 두 가지 의문을 가지게 된다. 첫째, 무한성장이 가능한가에 대한 의문과 둘째, 부의 증가가 곧바로 성원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이와 같은 의문에 대해서 롤스는 ‘원초적 입장’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p.120부터 설명되는 이상적인 가족 상황의 사례가 흥미롭다. 정의의 여건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정의의 여건이 미미하게 나타나는 상황으로 공정한 내 몫을 요구하지 않아도 될 만큼 너그러움이 퍼져있어서 어떤 문제도 제기되지 않는 상황이 있을 수 있는데 이 상황은 정의의 반대인 부정의가 팽배해 있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이러한 이상적인 가족의 상황에서는 소유와 공평의 문제가 전체 맥락에서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화목한 가족이 이견으로 싸우게 되고 이해관계가 대립되는 상황으로 변화한다면 정의의 여건이 더욱 커져갈 것이며, 이전의 애정과 자발성을 시들고 공정성과 권리를 강조하는 상황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샌델은 이러한 상황에서의 정의와 선의 합치 문제를 논의하면서 공동체주의를 지향한다. 정의와 선의 합치는 자아의 개인과 집단의 삶 속에서 표출된 도덕적 가치들의 조화를 필요로 한다. 이 조화는 타인의 인정을 요구한다. 따라서 이 정의로움과 옳음의 경계에서 필요로 한 것은 개인의 정체성과 자아관의 확립이다. 그 정체성은 바로 내 말과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는 정체성이다. 하지만 샌델이 비판했던 의무론적 자유주의에서는 초월적 주체를 상정하여 선택하고 책임지는 주체보다 도덕적인 강제력을 강조했다. 법적인 토대나 권리를 중시하다보니 선택하는 주체의 다양성을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샌델의 철학에서 마음에 드는 부분은 바로 이점이다. 개인의 선택은 인간의 정치적인 이상인 민주주의를 성숙시키기 위한 기본전제라는 점이다. 바로 그 점에서 샌델은 정의의 한계(limits)라는 제목으로 우리에게 이 책을 선물한 것이다. 즉 선택을 해야만 하는 주체는 현실의 땅을 벗어날 수 없으며, 그 주체가 소속되어 있는 공동체 안에서의 정의로움을 규제받고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샌델은 이러한 철학적 지향점을 정치 철학으로 확대시킨다. 정치는 조직구성원들의 선택에 의해서 좌우되며 그래서 올바른 정치철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책은 상당한 철학적 기본지식을 요구한다. 즉 칸트, 밀, 로크 등 철학자들의 주요 저서들과 논문들을 통해 그들이 주장하는 바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또한 각 학자들의 저서에서 인용된 부분 역시 난해하기 짝이 없다. 좀더 면밀한 사고와 이해가 필요한 대목이다. 본문을 읽기에 앞서 일단 해제를 읽게 되면 이 책에서 센델이 주장하고자 했던 바를 간략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다. p.14에 따르면 최근 우리 사회에 정의가 화두가 된 이유가 ‘경쟁’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성장은 경쟁을 촉매제로 삼으로 경쟁을 부추긴다. 경쟁에 거세지면서 패자가 늘어나게 되었고 승부에 승복할 수 없는 부정과 불의가 판을 치면서 자연스럽게 사회 제도의 정의로움을 열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책 내용의 전부를 이해할 수 있는 배경지식이 없기 때문에 100% 이해했다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 그의 ‘정의’라는 요즘의 화두, 거기에서 더 나아가서 개인의 '자율'과 '자유의지', '선택', '도덕', 그리고 '올바른 정치'에 대해서 고민하게 된 계기를 제공하였다. 최근에 출간된 샌델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그리고 샌델의 비판대상이었던 존 롤스의 <정의론>으로 관심의 영역을 넓혀볼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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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에 우리나라에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출판되고 얼마 되지 않아 그 책은 전국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었다. ‘정의 열풍’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인문서가 불티나게 팔려나가기 시작하더니 책의 내용, 저자, 그리고 ‘정의’라는 개념 자체 그 모든 것이 화제가 되었다. 대학생들, 성인들에게 불붙은 그 열풍은 지난해에는 중학생들이 읽고 있는 것을 발견할 정도로 널리 퍼져나갔다. 그 책의 열풍으로 인문학의 희망을 봤다는 기사도 나오곤 했지만 그 책의 열풍 속에는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 대한 염증이 담겨 있었음을 모두 안다.
정의가 아닌 부정이 득세하고 기득권을 잡고 있는 현실의 모습에 염증을 느끼면서도 난 그 책을 잡지 않았다. 지난 3년간 한창 공부하고 있던 내용이 있어서 여력이 없었기도 했지만 과거 경험상 베스트셀러라고 읽으면 실망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관심 자체가 생기지 않는 편이었다. 나중에 관련 전공자에게 이 책에 대해 물어보니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 특별히 새로운 내용은 없다는 대답을 들었기에 더더욱 책에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작년에는 이 책이 반년 넘게 주변에 있어서 언제든 빌려 볼 수 있었음에도 책에 손이 가지 않았다.
그러다 이 책을 잡게 되었을 때 기대감과 함께 막막함을 느꼈다. 나름대로 대중 인문서라고 말할 수 있었던 [정의란 무엇인가]에 가까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책은 대중서가 아닌 전문 학술서라는 것을 책의 서두에서부터 명확히 밝히고 있었고, 자유주의와 정의의 근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서론에서 나오기 시작하는 여러 철학자들의 이름과 그들의 정의는 서양 철학에 대해서는 일종의 두려움에 가까운 기피 증상을 보이는 나에게는 이 책이 쉽지 않을 것임을 경고하고 있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이 책은 저자의 저서 중 가장 난해한 저서라고 한다. 맙소사!
센델이 비판하고 있는 의무론적 자유주의가 어떻게 성립되어 있는 것인지에 대해 센델은 자유주의는 인간의 자유를 토대와 기본 권리로 인식하기에 이를 훼손하는 어떤 행위나 제도도 용납할 수 없는데, 의무론적 자유주의자들은 이런 의무를 인간의 자유에서 찾고 이것이 어떤 가치보다 근원적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롤스의 정의 이론 역시 이런 토대에 있다고 하며 그를 비판하다. 때문에 자유주의 정의 이론의 한계가 있으며 그 대안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 책이 그가 20대 말에 쓰여졌다는 점을 명두에 둘 때, 그에게 ‘정의’라는 개념은 평생의 연구 주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정의에 대해 접근해가며 센델은 칸트주의자와 롤스의 입장이 지닌 문제점을 비판한다. 센델이 주로 비판한 롤스에 따르면 원초적 입장은 우연적이고 역사적인 상황에 좌지우지되지 않아야 하며, 개인의 이해관계로부터 멀어져야 하는데, 도덕적 관점을 수행할 수 있는 주체 없이는 어떤 의무론적 체계도 성립될 수 없다. 이런 설명은 자아의 우선성과 사회적 가치의 우선성을 지니기에 우리가 일상적으로 알고 있는 자아와 다른 자아의 정의를 가지게 된다.
롤스는 개인의 자산과 능력을 인류의 공동 자산으로 보았다. 하지만 이런 롤스의 견해는 개인차를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여러 의문점을 드러내기에 센델에 의해 비판 받는다. 또한 롤스의 사회 계약도 비난 대상이 되는데 자유주의와 사회 계약이 우연이 아니라 공정한 계약을 통해 책무나 의무가 성립할 수 있다고 보는 샌델은 책무와 의무를 산출하는 것은 특정 절차만이 아니기에 롤스의 이론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럼 정의와 선을 합치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정의와 선의 합치는 자아의 정체성에 영향을 받는다. 이 정체성은 개인의 선택이 존중받고 비판받을 구성적 공동체 속에서 성립되어야 하며, 반성 능력이 중요하다. 이런 반성 능력이 있는 도덕적 주체야 말로 정의와 선을 합치할 수 있는 것이다.
읽으며 머리가 가끔 머리가 마비되는 듯 했다. 이웃분에게 간혹 토로했듯 건강 상태가 극도가 안 좋아진 상태에서 읽다보니 머리가 멍했기에 더 힘들었다. 책을 읽어도 서평을 쓸 수가 없는 상태가 이어지기에 스트레스도 상당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각 장의 뒤에 요약본이 함께 하기에 헷갈리며 읽은 내용이 조금이나마 정리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본문의 내용을 모르면 역시나 마찮가지일 뿐이기에 효과는 오십보백보에서 그나마 오십보로 줄여주는 역할이었다고 할까? 아무래도 대중서들을 먼저 찾아 읽어야 이 책을 제대로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