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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어렸을 때 아주 잠시 추리 소설 열풍이 불기도 했었지만, 애들 유행이 흔히 그렇듯 그게 오래 가지도 않았고 그저그런 인생들 두뇌에 어떤 항구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도 아니어서, '코난'이라는 단어가 연상하는 건 기껏해야 일본에서 수입한 장편 애니의 주인공이거나, 아니면 당시 워낙 인기가 좋았던 액션 배우가 연기했던 캐릭터 이름이었다. 켈트 신화의 영웅이라고는 하나 벌써 해협 하나만 건너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일 정도인데('아서 왕'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하물며 洋을 몇 건너면 그 마모도가 얼마일까? 따라서 코흘리개들이 이 아득한 이름을 그리도 친숙하게 입에 올린 건 순전히 대중문화의 변덕스럽고도 우연한 임팩트일 뿐, 해당 문명이 그 인문학적 코너에서 어떤 광폭의 인지도나 성취를 달성한 건 전혀 아니라는 게 타당한 결론이다. 어제 내가 '레이디호크' 리뷰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이 시기는 그닥 주목할 만한 촬영술의 발전상이 없었음에도 불구, 각종 신화적 상징을 스크린에 옮기는 데에 골몰한 특이한 양상을 보인 기간이었다. 기술적으로 세련되지도 못한 데다, 영화산업 전반의 침체 탓에 이전 황금기로부터 전해질 법도 한 장르적 전통이 내실 있게 계승된 것도 아닌, 이도저도 아닌 이상한 b급이 야리꾸리한 외설과 범벅이 되어 무방비의 관객 앞에 불량 식품마냥 위험히 방치된 그런 풍속이었는데(결국 무분별한 대중문화의 위험으로부터 사회 방위 수단이 필요하다는 컨센서스 하에 이즈음에 오늘날과 같은 등급제가 마련된 것임. 예술의 자유라는 기본권도 경우에 따라 이처럼 공동체적 정의 앞에 타협할 수밖에 없는 일), 아무튼 영화 속의 캐릭터로 다시 태어난 '코난'은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지대한 공헌에 힘입어, 무식한 대중에 대해 한 인문학적 아이콘의 존재에 대해 재삼 옷깃을 여미게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평해도 과언은 아니다. 몇 달 전 두 번이나 리뷰 소재로 삼은 '왕자와 거지(1978)'을 찍은 리처드 플레이셔가 메가폰을 잡았는데, 이 영화 뿐 아니라 그는 아놀드에 브리짓 존스를 함께 모셔 '레드소냐(1984)'라는 어설픈 판타지를 만들기도 했다. 주인공들의 압도적인 육체(고대 서사시나 신화를 소재로 한 작품에서 상투적으로 보는 표현, '그들은 마치 신들을 연상케하는 ...'이 이들을 통해 비로소 처음 시각화한 셈)의 과시적 파노라마란 지금 보면 차라리 헛웃음이 나올 뿐이지만(예컨대 '300'에서도 근육질 캐릭터가 잔뜩 나오지만 바뀐 시대의 관객에게는 단지 만화적 과장으로만 느껴질 뿐이다) 당시로선 그것의 공헌만으로도 스펙터클이 주는 전체 미학적 효과의 반 이상이었다. 아놀드는 이후에도 배우로서 활동을 이어가며 온갖 이미지의 부침을 겪은 터라 신비감이 남아 있지는 못하지만, 거의 그때 즈음에 활약을 멈춘 브리짓 닐슨이라고 하면 최소한 내 머리 속에는 아직도 여신의 위풍당당함 그것으로 군림하는 심상이다(이후 영락한 신세로 이런저런 막장 프로에 나온 건 내 모르는 바 아니나 애써 모른척하고 싶음). 이 영화는 전작이 누렸던 폭 넓은 호응에 크게 못 미치는, 형보다 못한 속편에 지나지 않았으며, 아놀드가 떴다 하면 웬만해선 호응하던 당시 한국에서조차 흥행 성적이 시원치 않았다. 그래도 이리저리 구수하면서도 유치찬란했던 지난 시절을 곱씹으며 제 방에서 플레이어에 디스크를 요리저리 돌리는 또래가 나뿐은 아니지 싶은데,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