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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폭력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살림터, 2012.
우리의 교육현장은 부모, 사회와 교사들의 무책임한 방치 속에서 일진들의 폭력과 왕따, 자살로 얼룩져 있다. 우리 학교현장은 우리 사회의 축소판으로 아이들까지 봉건적인 신분계급과 위계질서를 이루고 있다. 과거의 불우한 불량학생으로 치부되던 잘 나가는 아이들, 노는 아이들은 예전의 불량학생들이 아니다. 폭력과 왕따, 상납 등의 범죄 행위를 일삼는 일진이라 불리는 학생들 사이에서 권력집단을 형성한 아이들은 부와 지위를 가진 사회적으로 파워를 지닌 부모의 자녀들로 잘 교육받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진과 교실현장은 집단역학의 구조로 움직인다. 특히 모험이행 단계의 청소년기의 일진들은 집단사고, 책임감 분산, 방관자 효과, 조직화와 광역화라는 커뮤니케이션체계 등의 집단역학의 메카니즘을 가지고 있다. 출구를 찾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일진은 두려움의 대상인 동시에 선망의 대상이다. 이들의 집단역학구조를 깨는 열쇠는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는 것이다. 2011년 겨울에 자살한 대전의 한 여고생이 일진 아이들이 괴롭힌다고 상담을 요청하자, 상담교사는 "이건 친구들 끼리 문제니까 내가 개입할 일이 아닌 것 같다. 너희끼리 해결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고 했고, 그 여고생은 곧바로 목숨을 끊었다.
우리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적절한 개입과 보살핌이다. 우리 아이들은 일진이든 아니든 부모와 사회, 교사들로부터 방치된 상태이다. 우리의 아이들은 어디에서도 청소년기의 질풍노도의 시기에 돌봄을 받지 못하고 있다. 어디에서도 자기를 보호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약육강식의 집단역학이 일진과 왕따, 학교폭력이라는 문화이다. 이 병든 자연상태에서 어른들이 먼저 협동적 연대를 만들고, 교사들이 피해학생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고, 힘의 균형을 만들어주며 아이들이 스스로 서로 돌볼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가야 한다.
수준별로 돌봄과 보살핌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은 좋은 대안이다. 하지만 본래 아이들을 방치했던 어른들이 갑자기 시간과 자원을 투자해 협동적 연대를 만드는 의식의 전환과 책임감을 가질 수 있겠는가? 이 어른들도 과도한 사회적 생존비용을 개인과 가계에 전가한 우리 사회에서 생존을 위해 싸우고 있느라 자신의 인생 전부를 소비하고 있지는 않은가? 아이들의 연대적으로 서로 돌보는 것도 협동의 경험 부족에 힘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할 지 모르는 아이들에게 일진의 하부단위나 또 다른 일진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닌가? 우리 사회의 축소판으로 지역사회의 힘의 구조가 그대로 투영되는 학교현장에서 교사들은 행정업무에 시달린다. 내가 아이들 문제까지 왜 파워게임에 희생자가 될 위험을 감수하며 개입해야 하는가 반문하는 대다수 무책임한 교사들에게 이 방안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병든 구조가 그대로 폭력, 왕따, 자살로 드러나는 학교현장에 아이들을 밀어 넣어 생존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그래도 책임있고 지혜롭고 올바르다고 주장하는 목소리들을 소위 의식있고 교육운동을 한다는 분들에게 듣는다. 그것이 자연농법이라는 것이다. 그럼 대안학교나 대안교육은 무책임한 선택이란 말인가? 지역공동체가 살아 있고 마을이 살아 있다면 협동적 연대는 효과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는 아이들을 책임질 마을도 없고 지역공동체도 없다. 이 상황에서 성적을 기준으로 잘못된 보상비료와 입시경쟁이라는 무한경쟁의 농약을 처가며 좋은 대학이라는 학벌과 스펙을 쌓아 시장경제의 열매를 얻으려는 공교육/사교육의 적대적 공생관계의 교육관행농법에 대한 치유책이 없는 한 근본적인 대책이 아니다. 우리 아이들은 책임지는 어른들이 모인 마을 안에서 자연스럽게 때를 기다리며 실컷 뛰어놀고 스스로의 언어와 결을 찾아가는 공동체 전체가 함께 자연농법, 생명농법, 태평농법으로 길러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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