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학생 때였던 걸로 기억한다. 단조롭기 그지없는 하나의 이야기를 다 읽고 나서는 ‘뭐 이런 게 다 있어’ 라는 생각을 했던 책이 있었다. ‘A. 까뮈’라는 이름이 왠지 모르게 정겹게 느껴져 집어 들었던 책이었는데, 그 책을 이해하기엔 내가 너무 어렸었던 것 같다. 그 때 나에게 소설은 글자 하나하나를 짜맞추어 놓은 것에 불과했었다. 읽고 재미있으면 좋은 책이고, 그렇지 않으면 시시한 책으로 분류했던 시절이었다. 대학 졸업 이후, 심란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어서일까. 학교 도서관을 바람막이 삼아 지내고 있는 요즘 난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듯한 느낌을 받고 있다. 현실과 불가능한 꿈 사이를 오락가락 하면서 변화무쌍한 감정을 다스리는 것이 요즘 나의 일과이다. 졸업과 함께 난 철저히 이방인이 되어 있었다. 세상의 어떤 것도 나에겐 아무 의미가 없는 듯이 여겨졌고, 당장에라도 무언가를 이루어야만 할 것 같은 조바심에 시달렸다. 그 심란함의 끝에 선 지금, 난 다시 까뮈를 꺼내들고야 말았다. 그리고 지독히도 모진 하나의 삶과 만났다. 어머니의 죽음. 지금의 그(뫼르소)를 가능케 한 존재가 무(無)로 변모하는 것을 대하면서 그는 굳이 울지 않았다. 아니, 울 수 없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어머니의 죽음은 그에게 그리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았다. 감정의 변화라곤 거의 없는, 그래서 인간적 따스함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을 듯한 ‘나’라는 존재는 신비감을 불러 일으켰다.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그것은 일종의 혐오감이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법한 보편적 정서가 결여된 인물에 대한 차디찬 냉대. 내 안에서 솟구치는 그 감정들을 추스리는 것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믿기 힘들었지만, 그에게 감정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라는 존재일 뿐이었다. 그랬기에 그에게 어머니의 죽음은 타인의 소멸에 불과했다. 어머니의 죽음은 그의 삶을 단절시키거나 파멸로 몰아넣는 요인이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장례를 마친 그에게는 오로지 편히 쉴 수 있다는 안도감만이 쏟아진다. 다소 무미건조한 듯싶은 일상으로의 회귀.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그는 행동한다. 새로운 여자를 만나 코믹 영화를 보는 순간에도 그에겐 어떠한 죄책감도 존재치 않았다. 그는 잠시 떠났던 일상으로 다시 되돌아왔을 뿐이었다. 그가 속한 세상 역시 그를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받아들일 뿐이었다. 늙고 병든 개와 씨름하는 살라마노 노인의 목소리, 레이몽과 여자가 욕지거리를 주고받는 소리 등,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는듯한 소리가 열린 창문 사이로 들려올 뿐이었다. 그는 이런 일상을 아무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이런 것들을 아무 의미도 지니지 않은 것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의 해석은 참으로 유별났다. 우연에 불과했던 그의 아랍인 살해는 이미 치밀하게 계획되어 있는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를 오로지 죄인으로 만들기 위한 검사의 노력은 실로 눈물겨웠다. 그는 어머니를 살해한 파렴치한 인간으로 전락해버렸고, 마리와의 만남, 레이몽의 존재 등은 온전한 정신을 가진 그의 살해가 치밀하게 설계되었음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강력하게 작용할 뿐이었다. 그에게는 아무 의미 없던 것들이 어느 한 순간 그의 존재를 구속하는 것들로 변모해 그의 목을 졸라대기 시작했다. 그에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기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자신있게 말하던 그, 하지만 이 한 마디는 그를 회생의 기회조차 없는 병든 양으로 만들어버렸다. 비좁은 감옥 안에 들어서 있는 그는 작은 소리 하나에도 민감함을 보인다. 그는 얼마나 더 지속시킬 수 있을지 모르는 삶의 마지막 끈을 붙들고 있었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싸이렌 소리와 함께 비로소 어머니를 떠올리는 그의 모습에서는 비장감 마저 엿보였다. 죽음을 직시하는 그 눈에는 눈물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죽음을 현재 존재하는 자신으로부터의 영원한 해방이라고 여기는 듯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그 해방을 보다 많은 이들이 즐겨주길 바라기까지 한다. 어쩌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은 항상 ‘죽음’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불안한 존재일런지도 모른다. 서로서로 맺고 있는 복잡한 관계에 의해 자신의 존재에 대해 좀더 고민치 못하는, 나는 나에게 있어서 영원한 ‘이방인’이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지만, 어쩌면 그 노력에는 일정 정도의 한계가 존재치 않나 싶다. 그리고 나는, 그 한계선을 침범하는 죄를 범했기에 오늘날 이토록 흔들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 생각 속에서 나란 존재는 나에 의해 수도 없이 죽음을 맞이했었다. 다시 태어나는 그 순간에는 부디 ‘이방인’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으로 나는 아무도 모르게 자살을 감행하곤 했었다. 하지만 ‘이방인’으로부터 벗어나는 행위가 금기시 되어 있는 만큼 나의 괴로움은 나날이 더해갔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 철든다는 것이 무엇인지 서서히 이해하고 있는 나는 말한다. 결국 우린 ‘이방인’인 상태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라고. 나는 누구일까? 어쩌면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내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끝이 보이지 않는 생각이 나를 괴롭힌다. 그리고 내가 아니면서 나인 척 행동하고 있는 ‘나’라는 존재를 인정하고 나니 온 몸에 소름이 돋는다. 이방인… 죽는 그 순간까지 나를 규정지을 이 단어를 말하는 나의 입술이 떨린다. 결국 난 이방인에 불과한 존재였음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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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동안 한학기 다니던 대학에서 본서를 읽고 리포트를 써낸 적이 있다. 물론, 당시의 나는 대학을 다니는 것보다는 다시 치르게 될 입시에 온 정신이 쏠려 있었고, 때문에 지금까지 남아있는 이 책에 대한 기억은 뙤약볕 속에서 총을 쏘는 뫼르소의 모습과 이방인을 '레뜩항제(?)'라고 하시던 교수님의 발음 뿐이었다. 그리고 몇년이 지나 다시 이 책을 보면서, 내가 그 때 본 이방인은 도대체 무엇이었단 말인가 계속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시험때문에, 혹은 리포트 때문에 하는 독서는 오래 갈수도, 의미있을 수도 없다. 이 소설의 일반적인 감상이야, 인터넷을 검색하면 쉽게 찾아볼 수 있을 것이고 순전히 내 개인적인 감상을 쓴다면 : 뫼르소는 어머니의 죽음에도 울지 않았다. 왜? 슬프지 않았으니까. 아랍인을 총으로 살해한다. 왜? 뙤약볕을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에. 어쨌건, 외견상 나름 친절하고 나름 평범한 소시민이던 뫼르소는 이러한 살해사건 때문에 법정에 선다.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뫼르소의 살인행위 자체와 그에 응분한 댓가를 치르도록 하는 것에 관심이 있지 않다. 타인들, 즉 사회가 관심 있는 것은 그저 뫼르소가 '착한놈이냐 나쁜놈이냐'하는 것이다. 법정에서 수많은 증인들-뫼르소도 이전에 만난적이 있는 사람인지 기억을 할똥말똥한-이 뫼르소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 어느것도 진짜 뫼르소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는 그냥 평범한 살인자(이거 말이 좀 이상하군)일 따름이고, 행위에 따른 책임만 지면 될 사람이다. 하지만 '슬프지 않아서' 장례식날 울지 않았던 그는 이 이유로 희대의 악마가 되고 마는데, 이런 이야기들을 보면서 사르트르의 유명한 한마디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은 타인을 자신의 기준에서 규정지으려는 습성이 있다. 때문에 인간은 타인을 종종 괴물로 만든다. 어떻게 하면 이 악순환을 끊을 수 있을까? 타인도 나와 다르지 않음을, 인간이라면 누구나 미워할 구석만큼 좋아할 구석도 충분히 있음을, 우리 모두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인간임을, 그것을 진심으로 느끼는 것이 지옥에서 벗어나 인간다운 세상을 맞을 수 있는 시작이 아닐까. ps.카뮈는 스스로 실존주의자로 분류되는 것을 굉장히 꺼렸다고는 하지만, 본 작품만 놓고봤을 때 그는 실존주의자로 분류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은 든다. 허기사, 실존주의자로 '규정'되는 것마저 꺼렸다는 것을 보면, 그야말로 진정한 실존주의자가 아닐까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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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을 거부하는 사람, 뫼르소 이 책의 주인공은 뫼르소라는 젊은 청년입니다. 눈 앞에 있는 걸 가장 중요시하는 인물입니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의 생활신조를 가지고 있지요. 뫼르소는 거짓말을 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단순히 있지도 않는 것을 말하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과장된 감정의 표현까지도 반대합니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그는 자기 어머니가 죽고 난 바로 그 이튿날 해수욕을 하고 여자랑 섹스를 합니다. 함께 영화를 보러 가서 시시덕거리고, 그리고 또 '태양 때문에' 아랍인을 살해합니다. 결국 감옥에 들어가고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전에도 행복하였고 지금도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사행집행을 받는 날에는 단두대 주위로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맞아주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우린 이 사람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슬픈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슬퍼서 지중해의 찬란한 햇살 따위는 눈에 들어 오지 않아' 이렇게 느낀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뫼르소는 솔직한 사람입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어도 지중해 햇살은 여전히 좋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슬픔을 과장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 순간 자신이 하고 싶은 수영을 즐기고, 그 과정에서 여친에게서 성욕을 느끼자 자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애인이 뫼르소에게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묻습니다. 그 때 뫼르소는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이렇게 털어놓습니다. 그런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지만, 사랑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고 나는 대답했다. 마리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60쪽)
뫼르소는 왜 이방인인가? 보통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뫼르소는 순진한 사람이죠. 아니 철들지 않은 순수한 인격의 소유자라고 해야 할까요? 우리 모두가 말로서 대가를 치르려 하고 감정을 과도하게 표현하여 자신을 보호하려는 세상사람들에게는 이방인입니다. 사회는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을 필요로 하지만 뫼로소는 이걸 거부합니다. 그는 세상이 필요로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현재의 순간순간에서 삶의 실체를 느끼는 존재입니다. 그는 결국 사형선고를 받지만 자신의 실제 됨됨이나 느낌과 상치되는 외관과 언어를 거부합니다.
지중해의 찬란한 햇살을 맞이하듯 그렇게 순간을 소중히 살라는 뫼르소의 외침은 소설 마지막 부분에 극적으로 나타납니다. 그의 영혼을 구원한다는 이유로 신부가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하자 그는 불같이 화를 내며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으니,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조차 없지 않느냐? 나는 보기에는 맨주먹 같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157쪽)
뫼르소는 미래를 준비하면서 현재를 살아간다는 것은 현재의 순간에서의 삶이란 측면에서 보면 죽은 삶과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바로 이 순간을 소중하게 전력을 다해 살아가라는 카르페 디엠의 철학을 이야기하는 장면입니다. 이 소설에 있어서 또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그의 철학이 소설의 문체에도 반영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방인』을 보는 또 다른 재미 현재를 과거나 미래에 의지하지 말고 현재에만 집중해 현재의 문장들만 사용했다는 점입니다. 각 문장 하나하나가 독립적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보통 우리가 글을 쓸때 앞의 구절을 받아서 이어가지만 여기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실존적인 삶의 태도를 반영한다고 할까요? 그런 내용을 전달하는 형식까지 이렇게 통일한 점에 대해 사르트르까지 극찬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거나 주장하거나 정당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상황상황의 묘사를 통해 존재하고 바라보는 사물의 방식에 대해 문제의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어떤 영웅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서도 진실을 위해서는 죽음까지도 마다않는 한 이방인을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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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를 다닐 무렵에 우리동네에 '까뮈의 이방인'이라는 까페가 있었다. 작은 사거리의 모퉁이에 테이블 서너개 만이 놓여있는 그 곳에 나와 몇몇 친구들은 틈만나면 모여앉아 자욱하게 담배를 피워대며 커피를 홀짝거리는 낭만아닌 낭만을 즐겼던듯 싶다.고즈넉한 음악선율과 털보주인아저씨가 분위기를 더하긴 했지만 무엇보다 웬지 모르게 멋들어진 이름이 우리는 마음에 들었을게다. "이따 까뮈에서 봐." 라는 말이 접선암호같은 느낌으로 우릴 사로잡았지만 누구 하나도 이 책을 읽어볼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그저 우리가 모일 수 있는 장소가 있고 그 장소의 이름이 멋지다는 것이 마음을 뿌듯하게 하던 시절이었다. 수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 갔던 그 곳...
10여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 까페에 혼자 앉아 책을 읽고 있다. 아니 그런 느낌으로 책을 열었다.
어머니의 죽음앞에서 한방울의 눈물조차 흘리지 않는 냉소적인 주인공 뫼르쏘,그는 모든 것에 무관심하지만 자신의 욕망에는 충실하다. 그저 살아간다는 느낌의 생활들, 그 속에서 그는 외롭고 지루하다. 먹고 마시고 자고 배설하는 것 이외에는 모든것이 시시하다. 그러던 어느날 별다른 이유도 원한도 없이 그저 햇볕이 뜨겁다는 이유로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여기까지가 화자인 주인공의 입장에서의 서술이다. 그는 그저 그렇게 살았을 뿐이다.
감옥에 갇히고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겪는다. 사람들은 사회는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또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미워한다. 미워하기 때문에 그가 말하는 진실을 믿지 않는다. 그는 마치 사회라는 톱니바퀴가 쉼없이 맞물려 돌아가는데 혼자 부러져 빠져버린 바큇살 하나와 같은 존재이다. 결국 사형을 선고 받고 단두대에 올라갈 날만을 기다리며 그는 존재의 가치를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작가는 2부에서 드디어 주인공과 사회를 대립시킨다.한마디로 부조리한 상황에 직면한 한 인간이 좌절하고 또 반항하는 모습을 통해 사회속의 개인의 무가치함과 개인안의 내재된 삶의 가치을 동시에 투영한 듯하다. 사회는 나를 규정하고 나는 사회속에 나를 인식한다. 그 괴리에서 우리들은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나는 약간의 후회를 해봤다. 사회와 내 자신이 충돌하던 그 시절에 나는 그 까페에 앉아 이 책을 읽었어야 한다고... 끝으로 마지막 구절의 쓸쓸한 독백과 함께 이유를 알 수 없이 싫다고만 생각하며 방황하게 되는 그 시절에 있는 지금의 인간들에게 이책을 권하고 싶다.
'내가 외롭지 않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 이제 내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증오의 함성으로써 나를 맞아주었으면 하는 것뿐이다.' |
| 근래에 자주 동서양의 고전 작품에 손이 가는 것은 그 속에 담겨진 인간의 여러가지 몸짓을 확인할 수 있어서일 것이다. 고전을 읽다보면 생활의 지혜를 발견하기도 하고 또 다양한 인물군상을 살펴보면서 타인에 대한 이해도 그만큼 깊어지게 되는 것 같다. 아무튼 고전 작품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는 것은 고전이 인문학의 교양을 쌓는데 주는 일종의 마력 때문일 것이다. 카뮈의 이방인은 지난 겨울에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렇게 다시 살펴보게 되는 것은 학생들과 함께 토론을 하기 위함이다. 고등학생을 데리고서 좀 어려운 주제를 다루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한 한 방편이라고 생각을 해보았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 뫼르소는 일상생활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어머니의 장례식 날짜를 헷갈린다든지, 혹은 나이를 잊는다든지, 결혼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든지 주인공 뫼르소는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심각한 권태 속에 빠져있다. 물론 이것은 카뮈가 사용한 알레고리의 일부이다. 주인공 뫼르소는 실은 삶의 허무에 부딪힌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카뮈는 시지프의 신화에서 산에서 바위를 들어올리는 시지포스의 운명을 통해 인간의 상황을 설명해나간바 있었다. 아무리 욕망을 가지고서 어떤 성취를 하더라도 그것은 다시 바위가 산을 타고 내려가는 것처럼 언젠가는 허무에 부딪치게 된다는 것이다. 실컷 사랑을 나누고 결혼을 했지만 그 속에 싹트는 허무를 인간의 육체는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주인공 뫼르소는 바로 시지프의 신화 주인공이 되기도 하는 셈이다. 결혼, 장례, 우정, 사랑 등 뫼르소는 보통 일상 생활에서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가 진정한 것인가, 그리고 거기에 미래를 걸 수 있는가 의심한다. 뫼르소는 전혀 삶에 대한 의욕이 없는 인간인 것이다. 삶에 대한 의욕을 상실한 이들에게 남아 있는 선택은 죽음이다. 작가 카뮈는 그러나 뫼르소가 자살하게 두지는 않는다. 대신 해변가에서 알제리인을 살해하게 한다. 이 살해를 계기로 해서 뫼르소의 생에 변화를 생긴다?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뫼르소는 심문하는 재판장이나 변호사, 검사에게조차 자신의 무력함과 권태를 여과없이 보여주고 마지막으로 자신을 찾아온 성직자에게도 독설을 퍼부어 놓는다. 뫼르소는 그 순간 즐거움을 얻는다. 자신이 수감되어 있는 현재. 감방의 차디찬 냉기와 밖에서 들려오는 짐승의 울음소리. 감방으로 내비치는 달빛 등이 그에게 살아 있다는 느낌을 전달한 것이다. 이 역시 작가 카뮈의 알레고리로서 현재의 감각에 충실하는 것이 부조리한 인간의 운명을 극복하는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부조리한 현실을 지적한 데에는 널리 알려진 데로 2차 세계 대전 이후 신의 존재에 대한 의심을 통해서이다. 세계는 부조리하다. 신으로부터 기대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 가혹한 운명에 직면해서 그것을 명료히 의식하고 그 운명을 경멸하고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그 운명을 스스로 변화시키려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것. 그것이 이방인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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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사형을 선고 받은 이유는 두가지였다. 하나는 총알을 다섯발이나 쏘아서 아랍인을 죽였다는 실정법적인 이유였고, 또 하나는 태양이 따뜻하다는 이유로 죽였다는 말을 했다는 다소 감정적인 이유였다.
이방인을 이야기 할 때 빠지지 않는 이야기, 설사 이방인을 읽지 않은 사람조차 '태양때문에' 사람을 죽였다는 내용의 이야기란 사실은 알고 있다. 나도 처음 이방인을 읽을 때 도대체 그 부분은 언제쯤 나오는가라는 생각으로 그 무덤덤한 진술을 기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서도 살인의 이유는 '태양'이었지 라고 말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그것은 곧, 그가 비록 법정에서 사람을 죽인 이유에 대해 그렇게 진술하긴 했지만, 그리고 장내의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리긴 했지만, 그의 행동이 놀라운 이유는 그 이유 자체가 아닌 그의 태도였기 때문이다.
재판장은 ~~ 변호사의 말을 듣기 전에 내가 그런 행동을 하게 된 동기를 명확히 말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빠른 어조로 좀 뒤죽박죽이 된 말로, 그리고 우스꽝스러운 말인 줄 알면서도, 그것은 태양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장내에서 웃음이 터졌다. (본문 중)
제목이 '이방인'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가 우리가 만들어 놓은 기준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그 부적합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우리의 기준에 부합하고자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위험한 인물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위험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본인 스스로 그 위험한 상태를 벗어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면 슬퍼해야 하고, 그로 인해 정신을 잃을 듯한 고통 속에서 적어도 일주일정도는 밥조차도 제대로 먹을 수 없어야 한다. 또한, 사람을 죽였으면 그에 대한 죄책감으로 괴로워 하며, 자신을 위해 변호하는 모습이라도 보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울지도 않은 채 어머니의 시신도 확인하지도 않았으며, 담배도 피우고 다음 날은 여자와 영화를 보고 밤을 즐겼다. 또한, 그는 아랍인을 죽였다는 사실에 대해 조금도 뉘우치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의 삶 곳곳에 스스로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규칙들을 만들어 놓고 모든이가 그 완벽한 질서에 동화되리라 생각하고 또 기대한다. 그러나 '이방인'인 그는 그러한 규칙자체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두려워하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는 '질서 파괴'의 개연성을 충분히 내포하고 있는 상황으로 그가 단순히 사형을 선고 받을 정도까지의 잘못은 하지 않았다 해도 그의 행동으로 추가형량을 주기에 충분한 것이다.
결국,'사형선고'는 그의 무감각한 죄의식에 대해 사람들이 느끼는 두려움의 표현이다.
나는 이 책을 대학교 때 한 번 읽고 최근에 한 번 읽었다. 모든 책이 그렇지만 이 책은 언제 읽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매우 다르게 느껴진다. '언제'라 함은 시간의 경과를 통한 의식이 성숙되는 자연스러운 '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환경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 내가 그를 처음 보았던 대학생 시절 나는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상태였으며, 세상에서 한 발 떨어져 나와 세상을 철저히 격리시키던 때였다. 그러한 시절의 이방인의 행동은 의심의 여지없이 납득할 만한 당위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나를 이해 하지 못하는 것들은 외부의 환경의 탓으로 모든것을 돌릴수 있도록 나에게 위안을 주었다. 물론, 지금은 그 때보다 다소 나아진 나의 환경이 그의 무감각한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우게 하고 있지만, 여전히 그는 나의 이해 범위 안에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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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여전히 좀 피곤한 표정으로 내가 한 행동을 후회하고 있느냐고만 물었다. 나는 잠깐 생각을 하고 나서, 진정한 후회라기보다는 차라리 일종의 귀찮음을 느낀다고 대답했다. –p99
다시 만난 이방인은 이방인이 아니었다.
십 수년 만에 이방인을 다시 읽는다. 내게 이방인은 세부적인 줄거리는 이미 오래 전에 잊어버렸지만, ‘살인을 한 것은 눈부신 햇살 때문이었다고, 나의 사형식엔 부디 많은 사람이 구경 왔으면 좋겠다’는 어처구니 없는 스토리로 기억되는 소설이다.
그런데, 두 번째 읽는 이방인은, 확실히 느낌이 다르다. 아…이렇게 군더더기 없이 완벽한 소설이 있나. 뫼르소가 어머니 장례식에 냉정했던 이유, 큰 상처 후 모든 것이 귀찮아지는 생체리듬, 그리고 어머니 장례식 장에서 느꼈던 뜨거운 햇살이 트라우마처럼 그를 공격했다는 것도, 그가 재판 과정에서 남의 일처럼 무덤덤했던 것도 무척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
뫼르소는 어느 날 양로원에서 요양중이던 어머니의 부고를 접한다. 장례식을 위해 이틀간 휴가를 신청하자, 상사는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뫼르소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은 자신의 탓이 아니라고 쏘아붙인다. 그는 양로원, 어머니의 시신 앞에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문지기에게 담배를 권하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문지기가 밀크 커피를 권하자 맛있게 마신다. 날은 찌는듯이 덥고, 뫼르소는 끝없이 피곤할 뿐이다. 관습에 따라 어머니의 양로원 친구들이 함께 밤을 지새우는 것을 보게 되지만, 뫼르소와 그들은 이렇다할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다음날 벌어지는 장례식. 여전히 날은 덥고, 묘지로 가는 길이 멀기만 하다. 어머니가 죽기 전 양로원에서 만났다는 애인이 힘겹게 장례 행렬에 따라 붙는 것을 목격한다.
장례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주말이 이어졌다. 뫼르소는 알고 지내던 여자친구와 코미디 영화를 보러 가고, 수영을 즐긴다. 평소 생활을 즐긴다. 그리고 이웃집 남자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아랍계 애인에 대한 복수를 위해 편지를 써준다. 그리고 주말 이웃집 남자의 초대를 받아 머문 해변가에서, 뫼르소는 아랍계 남자들과의 싸움에 연루되게 되고, 이웃집 남자의 총으로 아랍인을 죽이고 만다.
모든 것이 기우뚱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바다는 무겁고 뜨거운 바람을 실어 왔다. 하늘은 활짝 열리며 불을 비오듯 쏟아놓는 것만 같았다. 나는 온몸이 긴장하여 손으로 피스톨을 힘있게 그러쥐었다. 방아쇠가 당겨졌고, 나는 권총 자루의 매끈한 배를 만졌다. 그리하여 짤막하고도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나는 땀과 태양을 떨쳐버렸다. 나는 한낮의 균형과, 내가 행복을 느끼고 있던 바닷가의 예외적인 침묵을 깨뜨려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나는 그 굳어진 몸뚱이에 다시 네 방을 쏘았다. 총탄은 깊이, 보이지도 않게 들어박혔다. 그것은 마치,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린 네 번의 짧은 노크소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p88
뫼르소는 형무소에 수감되어 재판을 받는다. 검사는 남자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냉정했던 것, 다음날 여자친구와 코미디 영화를 봤던 것 등 뫼르소를 잔인한 인간으로 내몰고, 살인 또한 계획된 살인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사형을 언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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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르소는 기존의 사회적 가치에 적응하지 못하는 남자다. 그리하여, 재판에서도 웃음거리가 되고 만다. 배심원들의 동정은커녕 분노를 산다. 카뮈는 <이방인>에서 그를 통해 ‘부조리’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콜필드가 학교에서 내쳐지는 것처럼 그는 사회에서 거부당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뫼르소 같은 남자가 있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작가 신경숙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이나 카뮈의 <이방인>을 읽으면서 시점의 변화를 느껴간다고 했다. 나 또한 십 수년 만에 만난 이 작품이 예전의 뜬근없는(?) 이야기에서, 공감이 가는 소설로 돌아온 것 같아 반가웠다. 예전 이 책을 읽을 때, 그때 그 무덥던 D 도시의 내 방 창문 또한 또렷이 떠오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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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절반 분량이 작품이고 절반이 작품 해설이다.
어떤 내용인지도 모르고, 작가의 이름은 한번쯤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부담감 없이 여러 권의 주문한 책들 중에 끼워넣은 고전작품이다. 읽어나가면서 어떤 상황들은 잘 연결이 되지 않아, 스스로의 독해력 탓인가 하고 다시 앞부분을 보고는 상황을 이해해 갔던 부분이 많았다.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읽었는데, 몇 문장 읽어내려가다 보면 지금 배경이나 바로 전 인물의 행동 등을 기억하지 못해서 다시 거슬러 올라가는 반복이 자주 있었던 것이다. (해설을 읽어 보면, 독해력도 독해력이지만 작가가 의도한 글의 스타일이 그렇게 만들었던 것 같다.)
작품을 읽고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여름이었다. 하지만, 작품의 해설들, 많은 사람들의 '이방인'에 대한 해석, 그리고 독자들의 리뷰들을 읽은 후에는 초점이 '이방인' 그리고 작가 '알베르 까뮈'에게로 옮겨졌다. 무언가 커다란 것을 놓친 기분이 들었다. 제목이 '이방인'. 어쩌면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배경이나 상황의 분위기만 기억에 남겼던 것 같다.
책의 절반 분량이 작품 해설로 담겨진 것을 보면 그렇게 만만히 여길 작품은 아니라 생각한다. 어느새 나의 시선과 생각은 '이방인'을 따라가고 있었다. 작품의 미국판 서문에서 작가가 언급한 이야기가 그제서야 눈에 들어왔다.
"우리 사회에서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사형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 (p.7 미국판 서문 중)
그러면 '이방인', 그것은 지금 내가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작가는 '유희'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처음엔 그 뜻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저마다 말로 대가를 치르려 하고, 감정을 과장되게 표현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하려 드는 세계에 대하여 그는 이방인 이다. 뫼르소는 이중인격자가 되는 것을 거부한다. 그는 자신의 실제 됨됨이와 상치되는 외관과 언어를 거부한다. 뫼르소가 유죄선고를 받은 것은 바로 언어의 코미디를 연출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p231, 카뮈와 <이방인> 피에르-루이 레의 해설 중)
다시 작품 서문의 작가가 언급한 말을 보면,
나는 다만, 이 책의 주인공은 유희애 참가하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죄선고를 받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p.7 미국판 서문 중)
비로소 '유희'에 대한 의미를 발견한다.
뫼르소는 사회적 관습에 대하여, 법률의 규칙에 대하여, 이방인이다. ......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이방인이다. (p.227, 카뮈와 <이방인> 피에르-루이 레의 해설 중)
과연 뫼르소는 용기가 있었던 것일까? 그런데 용기로는 보이지 않는다. 뫼르소는 용기를 보이지 않지만, 작가는 그를 통해 자신의 말을 외친 것으로 보인다.
읽을 수록 새롭고 흥미로운 작품이다.
작품과 관련된 해설들이 오히려 작품 보다 시선을 당기는 것이 흥미롭다. 작품을 보는 시선을 더욱 다양하게 만들어 준다. 책에 있는 내용을 많이 언급하고 내 말은 줄일 필요가 있겠다. 그러한 해설들에 버금가는 시선과 표현이 더욱 자라길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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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오늘 <이방인>을 펼쳤다. 아, 이 순간을 얼마나 고대했던가. 두근두근. 한 구절도 놓치지 않았다. 이해 안되면 다시 보기까지 했다. 다 봤다. 중편인데. 반 나절 만에 그리고 단 번에. 그리고 쓴다. 뭔가 써야 될 것 같다. 지금 안 쓰면 놓칠 것 같다.’ 한 달여 전에 <이방인>을 일독하고는 곧바로 위의 문단을 포함하여 A4 한 장 분량의 글을 썼었다. 한 번 더 읽으려고, 대충 적고 말았다. 한달 동안 이 책을 묵혀두었고, 요번에 재독을 했다. 여전히 흥미로웠고 재미있었다. 책을 펼치면 어느새 주인공 뫼르소의 말과 행동에 집중하게 된다. 하여간 책을 두 번 읽었으니 제대로 생각을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지난 번에 쓴 글에 좀 덧붙여 감상을 써본다. 진정한 자유인 ‘표현하지 않는 마음은 마음이 아니다’라는 구절은 내가 연애 신조로 삼고 있는 구절이다. 여자친구와 함께 길을 걸어갈 때면, 갑작스레 애정표현을 하고픈 마음이 불쑥 솟곤 한다. 그런 감정이 드는 순간, 나는 주저하지 않고 슬며시 웃으며 포옹 또는 버드키스를 한다. 이렇게 감정을 즉각 표현하면 내 마음도 흡족하고 여자친구도 흡족해한다. 좀 과장하면, 감정이 두 배로 증폭되는 듯한 느낌이랄까. 하지만 몇 년 전에는 이렇게 감정을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왜 주변의 눈치가 보였기 때문이다. 괜히 눈살을 찌푸리거나 한마디 하는 어른들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그냥 해버린다. 어른들의 인식이 제법 완화된 덕분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런 시선에 얽매여서 내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나는 욕구의 충족과 감정의 표현을 제한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못마땅하다. 보다 본질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의 시선이 비롯된 통념, 즉 내면의 도덕과 윤리가 못마땅하다. 이 소설의 주인공 뫼르소는 사회의 도덕과 윤리에 완전히 무신경하다. 그는 나와 조금은 다른데, 나는 도덕과 윤리를 의식하고 거스르는데,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거스른다. 내가 의식하는 까닭은 나의 관념에도 도덕과 윤리가 뿌리 깊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뫼르소의 내면에는 도덕과 윤리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듯 하다. 그래서 그는 가식과 허위가 없다. 그는 인간 본연의 감정에 철저하게 정직하다. 그는 욕망에 솔직하고, 곧바로 행동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다음날 바다에 수영하러 가고, 희극 영화를 보고, 여자친구와 관계를 가질 정도면 뭐. 타인의 영향을 받지 않는 진정한 자유인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뫼르소를 뽑으리. 도덕과 윤리를 검토하다 근대 이후에 한 사회의 구성원들은 가족과 친구, 이웃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그리고 제도권 교육을 통하여 그 사회에 적합한 도덕과 윤리를 배우며 점차 내면화한다. 내면화된 도덕과 윤리는 한 인간이 자신이 속한 사회의 구성원들과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자기 검열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군대가 이러한 역할에 일익을 담당한다. 그 곳은 남자들을 강력하게 사회화하는 공간이다. "군대 다녀와야 인간된다"는 말은 그 사회의 도덕과 규범을 처절한 경험을 통해 충분히 내면화 했다는 뜻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바로 사회화이다. 즉 사회화의 의미는 ‘국가체제와 사회제도에 반하지 않는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이 사회화는 사회의 한 성원이 되기 위한 필수요건이다. 사람은 사회에서 인정을 받을 필요가 있기 때문에, 이런 과정은 외부의 요구와 자발적 복종의 상호작용으로 급속하게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우리의 의식에는 이런 사회화의 산물이 산재하고 있고, 따라서 감정과 행동은 한번 검열을 거쳐서 나오곤 한다. 느끼는 대로 표현하고, 생각하는 대로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쁘게 말하면 허위와 가식을 떤다고도 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뫼르소는 허위와 가식이 전무하다. 곧, 다시 말해, 뫼르소는 도덕을 내면화하는 사회화의 특징이 발견되지 않는다. 그는 진정 사회화 과정을 거치지 않은 것인가? 하여간 이런 점 때문에 그의 행동과 생각은 사회에 위협이 된다. 실제로 사회화가 된 인간들은 자신들과 달리 습속과 통념에서 벗어난 인간들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직접적으로 압력을 가하기도 한다. 비난ㅡ노인들의 ‘말세다’ㅡ하고 억압ㅡ학교나 군대에서의 벌과 구타ㅡ하며 도덕과 윤리를 지킬 것을 강요한다. 아마도 공동체의 결집에 위협이 되기 때문이리라. 모든 사람들이 뫼르소처럼 산다면 사회의 규율이 무너지기 십상이고, 나아가 사람들의 도덕관에 혼란을 가져올 수 있으니까. 다른 사람들은 그에게 불안감을 느끼고 억압을 가한다. 느끼는 것 이상을 표현하고, 생각하는 것 이상을 말하기를 요구한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요구를 이상하게 여기고, 전적으로 거부한다. 그는 그런 표현을 요구하는 사회의 억압에 저항한다. 압력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는 사람들의 위험인물로 낙인 찍힌다. 그리고 그런 신념을 굴하지 않았기에 안타까운 결말을 맞이한다. 자유인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여! 본능과 욕구에 충실하게 사람들의 시선은 도덕과 윤리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옭아매고 구속한다. 이런 도덕과 윤리는 청소년기에 철저히 내면화되었기 때문에, 꼭 지켜야 하는 당연한 것이라 여기기 쉽다. 그런데 관념적으로 검토해본다면, 한 사회의 도덕과 윤리에는 비합리적인 것들이 많다. 게다가 이것들은 사회 안정의 기제로 작동하기 때문에, 기득권층의 지배에 도움이 되는 관념들이 부지기수다. 부패한 자들이 전통을 지킨다는 미명으로 보수를 자처하기 쉬운 이유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검토해보면, 이런 통념들은 인간의 본능과 욕구를 억누른다. 억눌린 욕구는 음성화된 문화와 만나 안타까운 방식으로 분출된다. 삶을 온전히 경험하지 못할뿐더러, 스트레스까지 쌓아가는 슬픈 현대인들. 그에 반해 뫼르소는 진정한 자유인이다. 타인의 인정이나 승인을 요구하려고 내키지 않는 행동을 하지 않기에, 자신이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지 않는가. 그는 감옥에 갇혀서도 자신이 진정으로 살아있다고, 존재한다고, 행복하다고 느낀다. 실존의 무한긍정! 나 역시 본능과 욕구대로 표현하고 행동하고 싶건만, 사회로부터 억압을 당하지는 않을지 의문이다. '본능과 욕구에 충실한 삶'이 내 삶의 모토인데, 온전히 내 욕구대로 사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느끼는 것만 표현하면서 자신의 삶을 온전히 누릴 수는 없는 것인지 의문이다. 뫼르소처럼 코너에 몰리지 않으려면, 어디까지 사회의 통념을 의식하고 행동해야 할까? 나는 그 경계선을 아슬아슬하게 줄타기 하는 재주꾼이 되리라. 이름마저 매력적인 뫼르소.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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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의 소설 『이방인』은 그것이 비록 소설의 형식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실존철학이 스며있는 思想的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확신을 준다. 이 책은 1942년 처음으로 세상의 빛을 본 이후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읽었고 또 읽고 있는 책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만큼 이 책은 일상에 젖어있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큰 깨달음을 준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가?
『이방인』의 외로운 주인공 '뫼르소'는 이 시대의 가장 솔직한 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솔직함이란 거짓이 없다는 말이다. 그는 자신의 부조리에 대해 아름다운 언어로 치장할 줄 모르며, 자신의 생명을 구걸하기 위해서 변명이나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룬 바로 그 다음날 해수욕을 하고, 여자와 관계를 갖고, 극장에 가서 희극 영화를 보는 '뫼르소'를 통해서 '카뮈'는 사회란 개인에게 실제로는 아무런 의미를 줄 수 없다는 것과 인간 관계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말해주고 있다.
'뫼르소'는 자기 친구를 단도로 찔러 상처를 입힌 한 아랍인을 살해하게 된다. 그러나 '카뮈'가 그의 소설에서 이 살인사건에 관해 초점을 맞추는 부분은 매우 인상적이다. '카뮈'가 말하는 '뫼르소'의 살해동기는 햇볓의 강렬함을 이기지 못한 이유이다. 즉, 그 아랍인이 나의 친구에게 상처를 입혔다는 지나간 원한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현재 나에게 강렬하게 내리쬐는 햇볓이라는 것이다. '뫼르소'에게 유일하게 무한까지 가치를 느끼게 하는 것은 '바로 현재 지금'의 '나' 라는 존재이다. 그에게 있어서 어제나 내일이라는 시간 개념, 아니면 많은 사람들이 즐겨하는-그의 思考안에서나 가능한- 공간의 확장같은 행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카뮈'는 이 소설을 통해서 '분리'의 아름다움과 가치로움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에게는 각각이 확보할 수 있는 영혼의 영역이 존재한다. '뫼르소'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이러한 영혼의 영역에 대한 분리를 인정하지 못한다. 아니 느끼지 못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인과율의 법칙을 따르고 있다. 모든 현상에 대해서 원인과 결과를 따지고 延長의 속성을 부여한다. 따라서 모든 것들은 관계를 맺고 있고 설사 누군가 진실을 말하려한다면 그것의 본질-基源이 아닌 실체로서의 본질-을 밝히려고 하지 않고 그것에 관련된 副次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관계들에 집착한다.
'뫼르소'는 죄인이다. 하지만 그의 영혼은 그를 죄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카뮈'는 자신의 어머니가 죽어도 별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뫼르소'에 빗대어, 자신이 아끼던 개를 잃고 슬픔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살라마노' 영감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카뮈'가 날카로운 눈으로 현실을 파고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관습보다 더 중요하고 진정으로 실체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뿐인 자기 내면의 표출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카뮈'의 실존철학은 이와 같은 솔직한 '자기 표출'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스스로 약간의 죄책감을 느낄 수도 있다. '뫼르소'는 포장과 꾸밈을 싫어한다. 그에 反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관계들 속에서 얼마나 많은 얼굴들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도 '뫼르소'와는 다른 의미에서 죄인인 것이다. [인상깊은구절] 나는 온몸이 긴장하여 손으로 피스톨을 힘있게 그러쥐었다. 방아쇠가 당겨졌고, 나는 권총 자루의 매끈한 배를 만졌다.그리하여 짤막하고도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나는 땀과 태양을 떨쳐 버렸다. 나는 한낮의 균형과, 내가 행복을 느끼고 있던 바닷가의 예외적인 침묵을 깨뜨려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나는 그 굳어진 몸뚱이에 다시 네방을 쏘았다. 총탄은 깊이, 보이지도 않게 들어 박혔다. 그것은 마치,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린 네번의 짧은 노크소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