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 여름은 유난히 덥고 지치는 계절이었다. [연인]을 읽는 것은 이번 여름만큼이나 지치는 경험이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문장들은 몇 페이지를 넘기기가 힘들 정도로 부유하고 있었다. 뒤라스가 태어난 곳이자 그녀의 문학적 원천의 하나인 '다다를 수 없는 나라' 안남의 이미지가 순간 겹쳐진다. 타나토스적인 절대적 사랑에 대해서는 [모데라토 칸타빌레]에서, 어머니와 불모지에 관한 굴곡진 유년기의 에 대해서는 [태평양을 막는 방파제]에서 이미 다루어진바 있다. 이 두 작품에 이어, 뒤라스는 스스로 고백하기 주저해왔던 자전적 테마들을 마침내 한 권의 책으로 완성하는데 성공한다. 이 테마들은 뒤라스 본인에게는 문학 인생 전체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것들이겠지만, 모든 독자들에게도 같은 무게로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뒤라스의 팬이 아닌 독자들이 [연인]에 주목하는 이유는, 대개는 15세 백인 소녀와 30대(32세?) 중국인 남자와의 관계(이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에 대한 호기심 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그리고 내가 그들의 관계 속에서 본 것은 철저한 자기기만, 단지 그것뿐이었다. 자신이 소설을 100% 이해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뒤라스 스스로 흘러가는 '에쿠리츄르'라고 일컫는 이 소설은, 명확히 붙잡기가 힘든 작품이다. 여기에 번역마저 나쁘다. 편집도 마찬가지고.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92년에 여러 출판사가 이 책을 번역해 내놓은 걸 보면, 91년에 소설을 기반으로 나온 동명 영화의 성공 탓에 잠시 뒤라스 붐이 일었던 게 아닐까 싶다. 그 중에 읽어본 건 백만출판사에서 나온 책뿐이지만, 다른 곳에서 나온 책들 역시 과히 번역수준이 좋지는 않으리라 짐작된다. 십 년이 넘게 흘렀으니, 새 번역이 나올 법한 시점이다(김화영은 너무 딱딱하다. 황현산이라면 어떨까). (05-9-8, 필유) |
| 창 밖은 새까맣게 어두웠고, 방 안은 따뜻했다. 그리고 집어든 이 책은 더없이 잔잔했고, 격정적이었고, 아름다웠고, 슬펐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소녀는 그 누구보다 초라하다. 소녀의 어머니는 그녀에게 아름다운 드레스를 만들어주지 않는다. 그녀의 드레스는 커다란 푸대자루 같은 센스 없는 모양이다. 그녀는 하이힐을 신고 남자 모자를 쓰고 립스틱을 바르고 있다. 30세의 중국 남자는 그녀의 어디에 끌린 것인가. 만남, 그리고 섹스, 만남, 그리고 섹스. 남자는 사랑을 원하지만 이 조숙한 소녀는 비웃는다. 그리고 외친다. 당신이 방에 데리고 들어오는 다른 여자들처럼 날 대해달라. 남자는 흐느끼고, 그녀는 곧 떠나게 된다. 프랑스로 떠나는 배에 올라탄 그녀는 점점 멀어지는 그 남자가 있는 곳을 바라보며, 깨달았을까. 배가 뭍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한 그 때, 길고 검은 그의 승용차가 보이고 그 남자가 뒷좌석에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그녀는 난간에 몸을 기댄다. 그들은 서로 바라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이 장면을 생각할 때마다 슬퍼진다. 생활에 찌들어 그를 선택한 그녀였지만 그 장면만큼은 소녀의 남루한 차림새도, 남자의 사치스러워 약간은 천박하기조차한 취향도, 모순덩어리 소녀의 가족들도 모두 잊혀지고. 그 자리엔 둘의 시선만 남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