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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 1권을 철학자 고병권이 새롭게 해석하며 읽어간 <북클럽 자본>시리즈의 첫 번째 책이다. <북클럽 자본>시리즈는 열 두 번의 강의와 열 두 권의 단행본으로 채워졌다고 한다. 저자는 그 첫 번째 책인 이 책에서 [자본]의 제목과 부제, 서문, 후기를 중심으로 마르크스의 [자본] 전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다시 말해 저자는 [자본]의 본문을 읽기에 앞서 [자본]이라는 책의 제목과 ‘정치경제학 비판’이라는 부제가 의미하는 바를 살펴보고, ‘서문’과 ‘후기’등에서 마르크스가 말하는 [자본]에 대한 이야기를 자신의 시각으로 바라보며 앞으로 읽어나갈 [자본]에 대한 안내를 하고 있다.
나는 마르크스의 [자본]을 아주 오래전에 접했지만 정식으로 읽은 적은 없다. 대학시절 일어판 책 부분부분을 복사하고 누군가 번역한 필사본으로 된 유인물로 읽었다. 그것도 남의 눈을 피해 이해보다는 내용파악에 주안점을 두며 억지로 내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이 책에서 저자도 말하고 있지만 내 관점이 아닌 다른 이들의 관점으로 해석한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 후 시간이 지나고 국내에서 처음으로 [자본]이 번역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제대로 된 [자본]을 한 번은 읽어보아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수십 년째 마음만 먹고 있는 책이기도 하다. 가장 큰 이유는 아마 책을 읽어가면서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었다. 그러다 이 시리즈의 완결소식을 듣고 우선은 저자의 안내를 따라 [자본]을 읽어보겠다고 생각했다. 시리즈 한권 한권을 읽을 때마다 [자본]의 해당 편을 찾아 읽으려고 한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지만 일단 시작을 했으니 반은 읽은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먼저, 저자는 마르크스가 자본이라는 말에 어떤 의미를 부여했는지를 살펴본다. 자본이란 단어는 당시 상업세계에서 사용되고 있던 말이었지만 마르크스는 자본을 증식하는 가치, 끊임없이 잉여를 낳는 가치라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근대사회는 가치의 증식과 축적을 목표로 하는 사회, 즉 상품을 생산하고 판매하고 소비하는 시스템이 계속 돌아가는 이유가 바로 가치의 끊임없는 증식을 위해서라고 보았다. 이는 마르크스가 자신이 고발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을 먼저 개념적으로 정립한 것에 다름 아니다. 어떤 대상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에 대한 명확한 자기 이해가 필요하다. 우리가 마르크스의 [자본]을 오독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자본이라는 대상에 대한 정확한 개념과 이해 없이 그저 일반적인 수준에서 자본을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자본에서 가치를 끌어내고 잉여를 끌어낸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자본에 대해 배워온 내용에 포함되어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자본]의 부제인 ‘정치경제학 비판’에서 정치경제학도 마찬가지이다. 당시의 정치경제학이란 국가통치술로 확장된 가정관리술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즉 근대에 들어 사회가 생겨나면서 사적인 이해가 가정 내에 머물지 않고 공적영역으로 확장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경제학에서 모든 가치의 원천은 전통사회와 마찬가지로 노동이라 주장했지만, 그럼에도 부와 빈곤이라는 계급적 분화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는 정치경제학이 공적소유가 아닌 사적소유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외면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르크스는 가치를 생산하는 자가 왜 더 가난해지는지를 통해 노동의 소외된 현실을 고발한다. 그리고 착취를 메커니즘의 결과가 아니라 전제로 규정했다. 착취는 자본주의적 경제형태의 결과가 아니라, 그것이 작동하기 위해 전제되어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마르크스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저자는 이런 정치경제학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은 두 가지 측면, 즉 역사적으로 확보된(혹은 제한된) 시야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 계급적으로 제한된(혹은 확보된) 시야를 갖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먼저, [자본]은 역사적 사회형태로서 자본주의를 분석하고 비판하는 책이지 역사를 관통하는 영원한 법칙을 말하는 책이 아니라고 저자는 읽는다.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분석하고 드러내는 법칙이나 경향들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부르주아적 사회관계가 지속되는 한에서만 적용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생산양식과 사회형태를 역사적으로 매우 특수한 형태로 보았고, 따라서 자본주의의 역사적 필연성이나 미래로의 영속성을 제거하고 오직 역사적 이행 속에서만 그것을 보고 있다고 한다. 또한 마르크스의 비판은 앎을 둘러싸고 있는 의지, 앎에 투여된 욕망에 대한 비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물질적 이해관계를 다루고 있는 정치경제학은 1848년 계급혁명으로 국민의 부라는 것이 결국은 계급의 부였음을 보여주었다고 마르크스는 생각했다. 즉, 어떠한 과학도 당파성과 무관할 수는 없으며, 마르크스는 단지 자신의 생각이 프롤레타리아의 입장임을 분명히 밝혔을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물을 보거나 대상을 이야기할 때 어떤 렌즈, 어떤 조명, 어떤 시각, 어떤 틀로 보느냐에 따라 보는 것과 볼 수 있는 것이 달라진다. 때로는 누구도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자신이 쥐고 있는 것조차 볼 수 없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프레임을 만들고 선점하기 위해 선전선동을 강화하고 있는 것 일게다. 저자는 그동안 우리는 [자본]을 너무 투명하게 읽어왔다고 말한다. 통상적인 조명아래서, 전통적인 시각으로, 권위자의 지도에 따라 독해를 했다는 것이다. 즉 마르크스의 [자본]이라는 책에 덧 씌어진 프레임 속에서 읽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이제는 당파성을 가지고 자신만의 렌즈로 읽어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본]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저자의 안내에 따라 읽으며 나는 어떤 관점에서 읽게 될지 궁금해진다. 물론 저자의 안내에 따르다보면 어쩌면 내가 가지고 있는 렌즈와는 다른 시선으로 읽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은 저자의 강의 시리즈를 따라 읽어보고 나만의 시선으로 정리해 볼 것이다. 수십 년째 마음속에 숙제처럼 남아있던 [자본]을 막상 읽기 시작하면서 맨 처음 이 책을 대했을 때와는 또 다른 긴장감이 생긴다. 잘 읽어낼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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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교육'을 받은 세대로서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접하기 힘든 책이었습니다. 그러다 대학시절에 잠깐 읽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은 없었습니다. 그동안 배운 지식과는, 아니 '이념'과는 사뭇 다른 논조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스승도 없이 '독학'으로 읽기에는 너무나 벅찬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자본론>은 내게 스쳐지나간 책들 가운데 한 권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다 '자본주의의 폐해'를 피부로 느끼게 되는 경험하게 됩니다. 알바와 취직의 '경계'에 머물러 있을 때쯤에 IMF를 겪게 되었습니다. 어찌하다 은행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어머님의 병원비에 보탬이라도 하려고 시작한 '비정규직의 삶'은 내리 8년동안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마침 취직한 곳이 '서울은행 본점'이었습니다. 1년 뒤에는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얘기도 들었지만, IMF 1년 만에 '정규직'들조차 명예퇴직을 당하고 '비정규직'으로 내몰렸습니다. 그러다 4년만에 은행이 '하나은행'으로 합병되고 말았습니다. 합병 당한 '서울은행 출신'이라는 꼬리표는 은근한 따돌림의 대상이었습니다. 같이 일하던 부서에서는 나이가 어린 편이었기 때문에 '경력' 많은 비정규직들 사이에서도 '수당'조차 차별을 받는 대상이 되고 말았죠. 그래도 딱히 오라는 곳이 없어서 박차고 나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나의 20대는 그렇게 그곳에서 빛을 내지도 못하고 서성이기만 했습니다.
왜 나의 '노동'은 대접받지 못한 걸까요? 누구보다 성실히 일을 했는데도 '월급날'에는 고용주에게 고개를 숙이며 고맙다고 이야기해야만 했고, 같은 노동자들에게조차 '차이'를 느끼며 더 적은 금액이라더 더 어깨가 움츠러들기만 했습니다. 그렇다고 헐벗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돈도 차곡차곡 모았습니다. 그런데도 '행복'하지는 않았습니다. 성실히 일을 할수록 행복해지는 건 아닌 모양입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이런 생각조차 할 줄 몰랐습니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고용주와 노동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뉴스들을 보면서 막연히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꼈을 뿐이었습니다.
그 시절에도 '강성노조'의 파업은 매년 반복되었습니다. 노태우정부 때부터 뉴스를 장식하던 '노사분규'와 '노동자파업'은 매년 봄이 되면 시작하였고 해를 넘기기도 일쑤였습니다. 이런데도 '자본주의'는 잘 돌아간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 늘 의문이었습니다. 그러다 김대중정부 때에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고용해야 한다는 법이 통과되었습니다. 드디어 '비정규직의 삶'을 청산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었지만, 돌아온 건 매년 퇴사와 입사를 반복하는 '속임수'였습니다. 비정규직으로 한 직장에 2년을 근무하면 정규직으로 채용해야 하므로 1년이 지나면 '재계약'이란 편법을 쓴 겁니다. 그러나 이것이 부당하다는 목소리를 낼 수는 없었습니다. 고용주를 대상으로 고소를 한다는 것은 '회사를 그만두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노동자들은 억울해도 회사를 상대로 싸우는 일은 현실적으로 일찌감치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규직들은 '파업'이라는 카드를 내밀 방법이라도 있었지만 '노조가입'을 할 수 없었던 비정규직들은 '정규직의 선처'만 바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그마저도 외면받기 일쑤였지만 말입니다. 고작해야 '기본급'은 그대로이고 '수당'만 조금 인상해주는 것에도 감사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보너스는 받아도 받는게 아닐 정도였습니다. 정규직과 비교를 한다면 너무나도 적은 액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미생>에서 본 것처럼 정규직은 '스팸'을, 비정규직은 '식용유'를 받는 경험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비정규직의 설움'을 겪었고, 퇴사를 했습니다. 그동안 모아놓은 '자금'으로 새로운 삶을 꿈꾸었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논술교사'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물론 '현실의 벽'도 함께 따라왔습니다. '돈벌이'는 참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교육선생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폼 나는 일'만 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아이들을 '사랑'으로 가르치기 위해서는 '영업'을 먼저 해야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지식이 아닌 지혜를 가르치겠다는 포부를 실천하려면 돈을 들여서 '홍보'를 해야 했고, 마이쮸와 학용품을 담아 건내는 홍보지에 영혼을 먼저 팔아야 했습니다. 금전에 쪼들릴 지경이 되면 가르치는 아이들이 '돈'으로 보이기도 했습니다. <교육 vs 생계>의 대결에서는 항상 '생계'가 승리했습니다.
이제는 '자본주의'가 좀 보이기 시작합니다. 자본주의가 품고 있는 '모순'을 엿볼 짬밥을 먹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자본론>을 읽기 시작하려고 했습니다. 나의 삶이 빈곤하다고 내가 가르치는 제자들까지 '나와 같은 경험'을 반복하게 하고 싶은 생각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각성해야 할 내용을 꿰뚫어볼 수 있는 '안목'을 가르치지 위해서라도 내가 먼저 읽고 깨우치는 수밖에 없습니다. 내게는 '스승'을 따로 둘만한 여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독서는 '직업'이자 유일한 '취미'이기도 하니까요. 이 책을 시작으로 <자본론>을 섭렵하려고 합니다.
리뷰는 언제 할거냐고요? 음...이 책을 한 번 읽고는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이 책 또한 <자본론>에 대한 내용보다는 글쓴이가 생각한 <자본론>에 대한 '개론'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정작 <자본론>은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른바 본론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1권을 마친 셈입니다. 그럼에도 무언가 뼈를 때리는 묵직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비판하였지, 비난하지는 않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궁극적으로 '자본주의'를 부정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다만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해서는 극렬한 비판을 가했다고 합니다. 물론 이 '다음책'부터 그런 내용이 나올 겁니다.
그런데도 이 책을 온전히 다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무언가 '비교할 대상'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자본론>을 해석한 '다른 사람의 책'이 필요합니다. 비교를 하려면 '공통점'과 '차이점'을 분석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책의 시리즈와 더불어서 다른 책들도 함께 섭렵할 작정입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겠네요. 그래도 즐거운 독서일 겁니다.
[학문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오직 피로를 두려워하지 않고 학문의 가파른 오솔길을 기어 올라가는 사람만이 학문의 빛나는 꼭대기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마르크스가 프랑스어판 <자본론>에 실은 문구라고 합니다. 자신의 책을 너무 어려워할 '노동자'들의 이해를 돕고 격려하기 위해서 직접 써넣었다고 합니다. 저도 '피로'해지지 않고 <자본론>을 제대로 읽기 위해 그 가파른 오솔길을 가보려 합니다. 뚜벅뚜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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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시대인 만큼 '고전 읽기'를 생활화해야 때가 도래했다. 바야흐로 대한민국은 세계 최강대국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기회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그 시발점은 '촛불혁명'이었다. 부패했던 과거를 청산하고 새롭게 거듭나야하는 '새 시대의 숙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온국민이 '교양쟁이'가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논쟁할 것은 논쟁하고 타파할 것은 타파하고 새로운 몸과 마음으로 갈고 닦을 '기회'가 바로 지금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했고,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칠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서 새삼스럽게 <자본론>을 꺼내들었다. '임승수'의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을 시작으로 '임승수 편'을 일단 마무리했고, 이제 '고병권'의 <북클럽 자본>을 읽을 차례가 되었다. 마침맞게 <북클럽 자본> 시리즈도 올해 12권 완간을 '목표'로 잡았다고 하니 부지런히 쫓아갈 생각이다. 그래서 새삼스럽지만 1권을 다시 읽고 시작하려고 했다.
역시, 책은 한 번 '완독' 하는 것보다 두 번이 훨씬 낫다. 처음에 보지 못했던 내용도 '다시' 보니 보이는 것들이 있긴 있었다. 많지 않아서 문제지만...암튼, <자본론>은 교양인의 '필독서'라는 말로 시작하련다. 한때는 집에 고이 모셔두는 것만으로도 '국가보안법'에 저촉이 되는 '금서'였지만, 이젠 '합법적 출간'이 가능하다. 아니 출간이 합법인 것은 이미 오래전이었단다. 다만, 시절이 하수상하니 쉬쉬한 경향이 더 큰 문제였던 셈이다. 하지만 <자본론>은 '공산주의 체제'를 찬양한 책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한 책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는 <자본론>을 반드시 읽어야만 한다. 그런데도 아직껏 오해와 불신으로 가득 찬 시선으로 곱지 않게 보고 있다면, 이번 기회를 통해 풀길 바란다.
더구나 대한민국의 90%는 '노동자'다. 그런데도 참 신기한 것이 '노동자'들이 '자본가'를 편들면서 자신들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노동탄압을 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노사분규'가 일어나면 사업주는 양복을 쫙 빼입고 테이블에 앉아 있고, 노동자들은 거리로 뛰쳐나가 시위를 벌이는 장면만 보여주는 언론에 대해 아무런 비판도 없이 그냥 수긍하고 있는 모습이다. '종부세'나 '상속세' 같은 문제도 대한민국 1%가 겁을 내야 하는데, 99%가 더 겁을 내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들이다. 지금 당장은 안 내도 앞으로 '재벌'이 되어서 내야하니 지레 겁을 먹고 '반대'를 하는 걸까? 도대체 왜들 그러실까? 강남에 살고 있는 '서민'들을 위해서 전국의 노동자들이 '반대운동'이라고 해줘야 한다는 말인가? 도대체 이 나라의 '언론'은 썩을대로 썩어서 도무지 믿을 것이 못 된다.
이런 문제는 마르크스가 살던 시절에도 그랬다. 이른바 '고전주의 경제학(17~18세기)'에 따르면 '부'란 돈의 많고 적음을 따지고 있었지만, '근대적 경제학(19세기)'이 태동하면서 '돈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돈의 가치'를 따지는 것이 더 실질적인 내용이 되었다. 그러면서 마르크스는 '자본'을 증식하는 가치로 규정하였고, 끊임없이 잉여가치를 추구하는 사회를 '자본주의'라고 명명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변화를 빠르게 캐치한 이들이 바로 '부르주아지'였고, 이들은 일찌감치 '자본가'로 변신하여 새로운 형태의 부를 창출하게 된 것이다. 허나 이들은 자신들만을 위한 '이윤 추구'만 할 뿐, '인류복지'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열심히 일했지만 점점 가난해지기만 했고 자본가는 저절로 부유해지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극심해진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를 '노동착취'라고 분석했고, '자본주의'에 대해 냉엄한 비판을 가했으며, 자본주의 체제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해'를 시킨 유일한 철학자가 되었다.
하지만 당시의 사회분위기는 '잘 살고 못 사는 문제'를 가정의 문제, 또는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고 있었다. 왜냐면 당시의 '정치경제학'은 새로 신설 된 강좌에 불과했으며, 국가는 '정치'와 '경제'를 별개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가 변화하면서 '정치와 사회'가 밀접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정치경제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지만, 초기의 학문이 늘 그렇듯 '권력자'와 '부자'의 편을 드는 경향이 매우 강했다. 그래서 '부의 규모'가 점점 커져가는 '자본가'를 규제하기보다 자유롭게 시장을 형성하는 것이 '최선'으로 생각했고, 이런 허술한 상황속에서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이 열심히 일을 해서 생산한 '잉여생산'까지 착취하며 더욱 많은 부를 쌓게 되었다.
그러다 1857년~1858년 사이에 유럽 자본주의는 심각한 공황상태에 빠지는데, '정치경제학자'들도 비로소 노동자들에게 끼치는 해악을 제거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래서 마르크스처럼은 아니어도 당시의 '정치경제학'에 비판을 가하며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늘어나는 빈곤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르크스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지만, 조지프 타운센드처럼 '빈곤의 사회적 효용가치'를 옹호하는 나쁜 학자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타운센드는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어느 무인도에 선원들이 염소를 풀어놓고 갔다. 그런데 염소가 너무 많아지자 사나운 개를 풀어놓았다. 그러자 염소의 개체수는 조절이 되었으며, 도리어 건강한 염소들만 살아남았다"고 말이다. 여기서 염소는 '빈민'으로, 사나운 개는 '빈곤'으로 말을 바꾸면, '늘어나는 빈민을 더욱 가난하게 만들면, 게으른 빈민들은 죽고, 부지런한 빈민들만 살아남아서 '빈민이 늘어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언뜻 들어보면 맞는 이야기인 것도 같다. 허나 이는 '늘어나는 빈민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일 수는 있어도 '빈곤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은 절대 아니다. 마치 '감염병'이 유행하고 있는데 '집단면역'을 하겠다며 '감염병'에 스스로 걸려서 죽을 사람은 죽고 살 사람은 살자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마르크스는 타운센드 같은 작자들을 정말 싫어했다.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비판>이라는 자신이 쓴 책에서 당시의 정치경제학을 신랄하게 비판했는데, 주요골자는 두 가지다. 하나는 '시간적(역사적) 비판'으로 당시의 '정치경제학'이 자본주의 체제는 역사적으로 불변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각각의 시대는 자기 시대의 인구법칙을 갖는다"로 마르크스가 주장하며 비판의 포문을 열었다. 이를 테면, 고대 노예제 사회에서는 노예가, 중세 봉건제 사회에서는 농노가 '생산주체'이지만, 이들이 생산한 내용물은 자신이 갖지 못하고 각각 '주인'과 '영주'에게 갖다 바쳐야만 했다. 그래서 노예와 농노는 '생산주체'가 아닌 '생산수단'으로 전락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근대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노동자가 생산한 것은 '노동자의 것'이므로 비로소 '생산주체'가 된 셈이다. 그런데 '노동자의 것'을 자본가가 착취하는 것이 문제라는 얘기다.
다른 하나는 '위상적 비판'으로 신분차별에는 성공했지만 계급차별에는 성공하지 못한 '노동자'들이 '자본가'와의 싸움에서 공정하지 못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으므로 마르크스가 스스로 '노동자의 편'을 들겠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서 자본가에게 맞서 싸울 수 있는 '무기'가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자본론>이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노동자의 무기가 되어야 할 <자본론>이 가난하고 많이 공부할 수 없는 '노동자'들이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책이 되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에게 '공부를 하라'고 당부한다. 왜냐면 세상은 이미 불공평하고 '한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노동자들에게 불리해졌기 때문에 당신들이 자본가와 '이론적'으로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다루기 어렵지만 강력한 무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자본론>의 서문을 웬만해선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렵게 쓸 수밖에 없었으니, 제발 '서문'이라도 이해하기 위해서 공부를 해달라고 당부한 것이다.
그리고 고병권은 독자들에게도 당부한다. <자본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열 번은 읽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리고 누군가의 '권위'에 기대어 읽지 말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읽어야 제대로 읽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 말이 좀 매력적으로 들렸다. 그래서 어려워도 좀 참고 끝까지 읽어보려고 한다. 또한, 헤겔과 마르크스의 차이점에 대한 설명을 하는데, 이게 좀 애매하다. 고병권의 말을 따르면, 분명 비슷한 점도 있지만 전혀 다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뒤이어진 책에서 더 자세히 다룰 것으로 믿고 넘어가려한다.
이 책의 마지막으로 고병권은 마르크스를 '탐정'으로, <자본론>을 '추리소설'에 빗대었다. 그러면서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탐정이 범죄자를 찾듯 범죄현장을 누비고 다니지만, 마르크스는 '범인'으로 특정한 개인이 아닌 '사회 구조적인 문제점'을 범죄를 일으킨 원흉으로 지목한다. 왜 누구나 알고 있는 '자본가'가 범죄자가 아니란 말인가. 그건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본가'와 '노동자'는 필수 구성요소이기 때문에 '누구의 잘못'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자본가'는 자본가의 일을, '노동자'는 노동자의 일을 제대로 할 때, '자본주의'가 제대로 굴러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착취'는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그건 '사회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앞으로 읽을 책에서 자세히 다루는 내용도 바로 이 '구조적 문제점'들을 심도 깊게 다룰 것이리라. 이게 2권이 기대되는 그럴듯한 변명이 될 수 있을까? 2권에서 계속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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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을 읽자> 자, 서막을 여는 글을 일단 인용해 보죠!
그러면서 하나씩 '자본'이 우리 한국 사회에 드리워온 인상들, <자본>이 왜 처음 '정치경제학'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는지, 자본은 어떤 특정한 사회적 조건과 더불어 출현했는지, 그 역사성과 당파성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변증법적 운동의 중요한 개념인 '모순과 역설'에 대해서도 '표준노동일'을 예로 들어 설명해주니까 잘 이해가 가더라고요. 자본가는 구매자의 권리 운운하며 주말에도 일할 것을 주장하고, 노동자는 판매자의 권리를 내세워 쉬어야 한다고 주장하겠지요. 하지만 이것은 '옳음과 옮음'의 대결이기 때문에 이율배반일 수 밖에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논리적 추론이 아니라 투쟁의 결과-힘의 논리-가 적용될 수 밖에 없음을 알아야 한다는 거죠. 그렇게 당시 학자들이 놓친 것-혹은 보지 않으려 한 것-과 마르크스가 알아 챈 것의 차이가 단지 더 보고 덜 보고의 산술적 차이가 아니라 '다르게 보기'라는 관점의 차이였다는 것, 그 이면에는 '앎'을 둘러싼 의지가 있다는 것, 니체를 다시 환기하는 그런 설명들도 참 좋았던 거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자본'을 읽는 나도, 내가 서 있는 지금 이 곳에서 나만의 방식으로 다시 읽어내야 하겠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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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고 깊게!! 얼핏 모순되 보이는 표현이지만 이 책을 읽으면 결코 쉽고 라는 표현과 깊게 라는 표현이 서로 모순되는 말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너무 아쉽네요 bbb 이제야 이런 책이 나오다니!!!!!! 이 책을 읽으면서 예전에 자본을 붙잡고 씨름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도 물론 아무 생각없이 소설처럼 읽었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bb 하지만 그때 아쉬웠던 것은 자본을 누군가에게 함께 읽어보자고 하기엔 부담스런 내용이었다는 점입니다. 후배들과 함께 독서모임을 꾸릴 때도 그랬었고, 공장에서 동료들과 함께 읽을 책을 고를때도 그랬습니다. 그때 이 시리즈가 나왔었다면!!!! 하지만 가장 늦을 때가 가장 빠를 때라는 말을 살아오면서 더욱 실감하듯이,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세상에 던져 주신 고병권님께 너무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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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고병권 작가가 니체가 아니라 마르크스와 함께 왔다. 살짝 시간의 더께를 입은 채로 내 서가에 소중히 꽂혀 있던 3권의 고병권표의 니체 연작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언더그라운드 니체> <다이너마이트 니체>를 최근에 연달아 다시 한번 더 읽을 기회가 있었다. 우리 시대에 이런 작가 이런 책을, 독자로서 만날 수 있다는 건 어찌 보면 큰 행운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마르크스다.
‘자본(주의)’에 대한 이야기는 다들 잘(!..?) 알고 있는데 뭘 공부까지 해야 하나 생각했었다. 자본주의안에 살고 있고 자본주의형 인간들 사이에 살고 있고, 나 조차도 그 자본의 가치법칙으로 온전히 살아가고 있는데 뭘 굳이 머리 싸매고 공부씩이나 해야 할까 하는 의문을 가졌었다. 그게 문제라고 한들 대체 어쩔꺼냐 세상이 그렇고 내가 그렇고 내 주위 사람들이 그런데 뭐 어쩌라고. 내가 죽기전에 세상은 변하지 않을텐데. 그러면 대체 왜 나는 자본을 다시 읽어야 하는가. 마르크스의 원저 ‘자본’은 물론 자본을 (자본 형성의 역사와 자본 현재 전개의 역사) 설명하지만 그건 자본을 넘어서기 위한 철저한 비평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미래를 향해 있다.
언젠가 푸코가 자신의 마지막 저작 <진실의 용기>에서 실존의 미학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런 말을 했었던게 어렴풋이 기억난다. 동일한 세상에 다른 삶이 가능하다고. (푸코의 문장은 참 멋있었는데 정확한 표현이 기억나지 않는다^^;;) 여튼 그것과 연계해서… 고병권 작가의 표현대로라면 니체식의 ‘조명(perspective)’일거 같다. 세상과 삶과 인간을 바라보는 이 ‘조명’이 바뀐다면, 감각이 바뀐다면, 다른 세상을 그래서 다른 삶에 대한 가능성을 만들어 가는 것 아닐까. 그러나 그건 이 조명 저 조명 하는 식의 대책 없는 상대주의는 아닐 것이다.
니체에서 마르크스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고병권표의 해석의 방향은 일관 된다. 그 일관성에서 나는 고병권 작가의 세상과 삶에 대한 감각을 느낄 수가 있다. 그래서 나는 항상 그의 글에 매혹 당한다. 무슨 보물처럼 야금야금 천천히 읽는다. 버릴 거 하나 없이 잘 익은 알곡처럼, 단단하게 쓰여진 문장 하나 하나 단어 하나 하나를 산출하기 위해 들인 작가의 노력과 시간을 생각하면서. 터무니 없이 짧겠지만 그러나 최대한 내 나름의 긴(!...?) 시간을 두고 읽고자 한다.
정치경제학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 그것은 도덕과 신앙 진리에 대한 니체의 비판과 결을 같이 한다, 전도한다. 뒤집는다.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사실을 진리로 알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것을 진리로 등극시키는 그 충동을 그 의지를 읽고자 한다. ‘다시 자본을 읽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신성한 노동 운운하며 ‘일 하지 않은 자 먹지 말라’식의 언표 안에 숨은 자본(가)의 충동을 자본의 의지를 본다. 고병권 작가의 ‘다시 자본을 읽자’ 시리즈가 총 12권으로 나온다고 한다. 나는 벌써부터 그 다음이 기다려진다. 고병권 작가의 몸을 통과해서 나온 책은 언제 출간 된지도 모르게 비둘기 걸음처럼 사뿐히 다가오지만, 얼떨결에 읽고 나면 언제나 거대한 망치질에 다름 아니였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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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이비에스에서 저자의 마르크스 자본 강의를 들은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1편만 들어보고 계속 시청할지 말지 결정하자고 가볍게 마음먹고 듣게 된 방송인데 이렇게 책까지 시리즈로 구매하게 될 줄은 몰랐네요 ㅎㅎ 세상에 그것도 12권이나 되는데 현재 11권까지 출간된걸 확인하고 현재 10권까지 구매한 상황입니다. (나머지 한권은 다음주에 주문예정입니다만..) 거의 동일한 내용이지만 (물론 책이 훨씬 상세하겠지만) 굳이 방송과 책을 비교하자면 저는 방송내용쪽에 좀 더 후한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책이 뒤처진다는 뜻이 아니라 방송을 통해서만 전달되는 저자의 목소리와 진솔한 표정의 어우러짐 때문입니다. 저자의 말 그대로 도대체 무엇이 저로 하여금 이 어려운 코로나 시대에 10권이나 되는 책을 한방에 구매하도록 만든 것일까요? ㅋㅋ 뭐 물론 저자가 말한 그런 두려움은 없었습니다. 제게 있어서 두려움과 매혹과 긴장을 느끼게 한 책은 마르크스 책이 아니라 다른 책이었지만 저자가 주장하는 책읽기의 의미에 대해서는 저 역시 전적으로 동의하며 비록 다른 책에서나마 저자와 동일한 경험이 수차례 있었기에 마르크스와 관계없이 저자의 강의에 빠져들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평소에 만남이란 것이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 혹은 타생명과의 만남 뿐만이 아니라 사물과의 만남이나 다른 시대와의 정신적 접촉 역시 엄연한 만남이라고 생각하며 그 만남을 소중하게 여기고있는 한 사람으로서 저자를 응원하고 싶습니다. 저자의 겸손하면서도 따뜻하고 깊은 목소리에는 저자의 그간의 삶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어떤 것이 살아있었고, 그 살아있는 무엇인가가 스크린을 넘어 제 가슴으로까지 전해져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긴 시간이 걸리겠지만 시리즈 마지막 12권까지 마음을 열고 함께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