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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에 다닐 때 자신의 진로를 결정한 학생은 드물다. 나 또한 특성화 고등학교에 다녔지만 대학은 전공을 달리하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몇 권의 책을 읽으며 키운 동경이었을 뿐 제대로 된 근거를 가지고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마음먹은 대로 잘 되지 않았다. 어쩌면 고등학생일 때는 다양한 경험을 하며 가고자 하는 길을 찾는 시기가 아닐까 싶다. 학생에게 맞는 조언을 해 줄 선생님이 있다면 더없이 좋겠지. 일본 나가노 후지미초의 후지미고등학교에 입학한 치하루 역시 원예과에 입학했지만 어려서부터 땅이 친숙할 뿐 막연한 기대만 있었다. 장래에 무엇을 하고 싶은지 전혀 모르는 처지였다. 그런데 치하루를 지역으로 끌고 다니며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스스로 찾게 이끈 선생님이 있었으니 기타하라 선생님이다.
후지미초는 이름으로 알 수 있듯 남쪽으로 멀리 후지산을 바라보고 있다. 오랜 역사와 풍요로운 자연에 둘러싸인 후지미초에 자리잡은 후지미고등학교는 90년 가까운 전통의 학교이다. 해발 967미터. 일본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학교이기도 하다. 한 학년마다 보통과 두 반, 원예과 한 반이 있다. 전교생이 300명쯤 되는, 나가노 현에서는 작은 축에 든다. 실습 담당인 기타하라 선생님은 어릴 적부터 자연 속에서 노는 것을 좋아해서, 봄이면 집에 가는 길에 가재를 잡고, 여름에는 장수풍뎅이를 잡았다. 가을에는 산에 들어가 버섯을 따고는 했다. 선생님에게 자연은 또 하나의 교실이었고 그것을 지켜온 마을 사람들은 위대한 인생 선배였다. 선생님이 치하루를 현장실습에 대려간 것은 그런 까닭이었다.
치하루는 기타하라 선생님의 안내를 받으며 현장실습을 계속한다. 2학년 봄에는 분봉을 알게 되고, 2학년 여름방학 때는 아예 양봉 농가로 닷새 동안 일자리 체험 연수를 간다. 거기서의 경험은 치하루로 하여금 학교에서 꿀벌을 키워 보자는 꿈을 갖게 한다. 양봉 동아리를 만들어 부원을 모은 뒤 학교 뒤뜰에 벌통을 놓고 꿀벌을 친다. 뿐만 아니라 벌을 무서워하는 이들에게 보여 줄 연극을 만들어 올리기도 하고, 꿀벌의 천적 말벌을 쫓아 보겠다고 머리를 맞대며, 벌꿀을 넣은 맛있는 먹을거리를 만들어 경연대회에 나가 보기도 하고, 꿀벌이 찾아드는 마을을 만들겠다며 ‘벌들의 뜰’을 가꾸기도 한다. 치하루와 아이들은 벌을 통해 자연과 만나고, 지역의 면면을 발견하고, 마을 사람들의 삶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간다.
치하루는 천천히 벌통으로 다가가, 벌들을 놀래키지 않도록 조심조심 뚜껑을 열었습니다. 벌통 내부, 벌집 틀과 틀 사이 3센티미터쯤 되는 공간에 천천히 손을 넣었습니다. 그러자 포근한 공기가 치하루의 살갗에 닿았습니다. “따뜻해!” 지금까지 치하루에게 곤충은 어딘지 차가운 이미지였거든요. 그런데 그 벌통 안은 정말이지 따뜻했습니다. “그게 바로 꿀벌의 온도, 생명의 온도란다.” (39 - 40쪽)
치하루는 양봉부 활동을 살려 신슈 대학교 농학부에 입학한다. 지역과 아주 가깝게 얽혀 있는 학부로 지역에 대한 책임감도 깊다. 게다가 학교 안에 연습림이 있어 배움터 환경도 좋다. 기타하라 선생님의 조언을 받아 진학한 뒤에도 치하루는 양봉부에 계속 관심을 둔다. 양봉부는 일본 농업학교 학생들의 고시엔이라 불리는 경연 대회에 나가 최우수상을 거머쥐기까지 한다. 이러한 양봉부 덕분에 양봉부 아이들은 자신감을 갖데 되고 자신의 길을 찾는다. 대부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태어나 자라온 고장에 남아 지역을 지키는 삶을 선택한다. 하나의 동아리가 아이들을 살리고, 마침내 시골 마을을 살리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학생들을 성심으로 믿고 이끄는 선생님, 열정의 소녀 조합으로 시작한 양봉부가 이룬 쾌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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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푸른책시렁 152 《꿀벌과 시작한 열일곱》 모리야마 아미 정영희 옮김 상추쌈 2018.8.18. 눈을 감기고 하고,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하고, 두 팔을 크게 펼쳐 보기도 합니다. 꽃냄새, 뺨을 간질이는 바람, 물이 흐르는 소리. “아! 여기라면 살아 보고 싶어.” 부원들은 저마다 그런 생각이 드는 장소를 찾아 자기가 만든 벌통을 놓았습니다. (55쪽) 30분 정도 지나자 그릇에 꿀이 잔뜩 모입니다. 손가락으로 먹어 봅니다. “달콤하다.”는 말과 더불어 “따뜻해!”라는 탄성이 터져나옵니다. (92쪽) 일본에는 372개에 이르는 농업계 고등학교가 있습니다. 그 학교들에서 9만 명의 학생이 농업에 얽힌 것들을 배우고 있지요. (151쪽) 우리가 사는 동네에 어떤 꽃이 피고 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양봉부원들은 길거리에 피어 있는 꽃을 관찰하고 꿀벌이 어떤 꽃을 찾는지 살피며 천천히 거니는 것을 ‘벌꿀 산책’이라고 불렀습니다. (225쪽) 한국에는 농업 고등학교가 몇 곳이 있을까요? 농업 중학교나 농업 초등학교는 있을까요? 오늘날 한국은 농업을 다루는 고등학교가 몇 곳쯤 남았을까요? 홍성, 청주, 충주, 홍천, 여주, 이렇게 다섯 곳쯤은 ‘농고’란 이름을 씁니다. ‘생명과학고’란 이름으로 고친 곳이 여럿 있습니다. 그러나 다 더해도 열 곳이나마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시골이란 이름인 고장에서 마을 어린이가 마을 푸름이로 자랄 즈음 ‘농업을 익히며 펴는 길’보다는 ‘도시 노동자나 회사원’이 되도록 하는 길을 가르치려 합니다. 《꿀벌과 시작한 열일곱》(모리야마 아미/정영희 옮김, 상추쌈, 2018)이란 책을 읽으며 놀란 대목은 ‘372곳에 이르는 농업 고등학교’ 이야기를 적은 한 줄입니다. 9만이란 숫자는 일본에 사는 사람을 대면 매우 작다고 할 테지만, 이 작은 숫자를 줄이지 않으면서 땅이며 들이며 숲을 건사하는 길을 익히거나 나눌 수 있구나 싶어요. 비록 일본 우두머리는 핵발전소에서 쌓인 방사능 쓰레기를 바다에 함부로 버리는 짓을 하려 들지만 말이지요. 열일곱 푸름이는 고등학생으로서 일본 꿀벌을 돌보면서 손수 꿀을 얻는 길을 익히려 합니다. 열일곱 푸름이를 지켜는 열넷이나 열다섯 푸름이는 ‘나도 저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꿀벌 동아리에 들어가서 언니들하고 꿀벌을 아끼는 길을 배워야지’ 하고 다짐한답니다. 줄거리만 살핀다면 《꿀벌과 시작한 열일곱》은 대수롭지 않습니다. 꿀벌 동아리를 연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마치기 앞서 동생들한테 동아리를 물려주고, 동생들은 어느덧 언니가 되어 새로운 동생을 맞이하는데, 저마다 다른 고비를 맞닥뜨리고 보람을 누리면서 ‘벌 한 마리가 마을이며 숲을 지키는 살림’을 온몸하고 온마음으로 느낀다고 해요. 이 단출한 줄거리를 책 한 자락으로 담을 뿐입니다. 한국에서 푸름이는 무엇을 바라볼까요? 시골이란 고장에서 학교를 다니는 푸름이는 제 고장하고 얽힌 어떤 흙살림이나 들살림이나 바다살림이나 숲살림을 배우고 익혀서 제 고장을 새롭게 사랑하는 길을 닦을 만할까요? 꿀벌하고 여는 열일곱처럼, 갑오징어하고 여는 열일곱을, 고사리랑 여는 열일곱을, 염소하고 여는 열일곱을, 돼지이며 닭하고 여는 열일곱을, 보리이며 밀하고 여는 열일곱을, 들꽃이며 무화과하고 여는 열일곱을, 갖가지 다른 열일곱을 온나라 작은 고장 작은 배움터에서 이제라도 처음부터 다시 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서울하고 똑같은 교과서만 쓰는 시골 초·중·고등학교가 아니라, 시골에 남다르게 짙푸른 숲이며 바다이며 들을 고이 품는 ‘싱그러운 길잡이’를 푸름이가 즐겁게 맞아들이도록 이끌기를 바라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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