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자마자 한숨이 나온다.
상당한 수의 초, 중등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학원에 가느라 바쁘다.
내가 가르쳤던 한 초6 학생은 학원을 19개나 다니기도 했다.
적게는 2개 정도에서 평균 5개 정도,
많으면 10개 이상의 학원이나 과외지도를 받는다.
애당초 놀 시간 자체가 있던가....
논다고 해도 이미 여기저기 학원을 다니며 피곤해진 몸이 놀이터로 향할 리가 없다.
집안 침대에서 뒹굴거리면서 핸드폰을 보는 게 아이들의 작은 소망일 것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냐면, 다들 알 것이다.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서.
그런데 공부를 잘하면 좋은 대학에 갈수 있고,
좋은 대학에 가면 좋은 직장을 구할 수 있다는 이 논리가
과연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가?
정말 1980~90년대까지만 해도
좋은 대학을 입학해 졸업한다는 그 자체로 좋은 직장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96년 12월의 IMF 구제금융으로 대표되는 자본의 신자유주의 물결이
급격히 사회 곳곳의 시스템을 재편하기 시작했고, 대학 역시 자본에 잠식당해왔다.
사명 없는 사업적 차원에서 벌이는 교육적 효력을 신뢰하기 어려운 신생 사립 대학들의 난립과
강사들의 지위가 시간제 강사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은
대학 수업의 질을 현격히 떨어뜨리고 대학의 존재 자체에 대한 의문을 들게 하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기존에 명문이라 일컫는 대학들 역시 문제가 많기는 마찬가지다.)
한 해 대학을 졸업하는 학생 수가 몇 명인가!
이미 사회 구조적으로 기존의 일자리 자체가 줄어가고 있는 상황은
좋은 대학을 나온 것만으로 쉽게 취업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충분히 예상하게 한다.
게다가 최근 이루어진 AI 기술의 급격한 진보는
좋은 대학 = 좋은 직장이라는 공식을 완전히 부숴뜨리지 않겠는가.
놀이터의 탄생에서 중요한 것은
당대의 어린이들(청소년들)을 둘러싼 사회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한 시민들의 존재였다.
지금 한국의 교육 현실에서 이것의 문제의식을 느끼고 바꿔나가야 하는 주체가 누구인가?
바로 그 초등, 중등 학생(어린이, 청소년)들의 부모들이어야 한다.
최소한 부모들의 의식이 내 아이가 초등, 중등 때만이라도
맘껏 놀고, 주체적으로 무언가를 하고, 하지 않을 수 있도록
그들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고, 그 선택을 책임지는 훈련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주기로 결단해야 한다.
문제는 그 부모들이 아이가 선택을 통해 할 수 있는 실수를 예방하기에 너무나 열심을 낸다는 점이다.
내 아이를 자신의 말만 잘 듣는 수동적 아이로 키우면서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아이가 되길 원하는 아이러니를 매일매일 살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