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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마뉘엘 레비나스의 고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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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에 대한 철학책이다. 『전체성과 무한』 이란 저작을 갖고서 문성원 교수가 깨우친 것들을 담았다. 몇 년전에 슬라보예 지젝의 책 한권을 주제로 펴낸 책을 읽은 경험이 떠올랐다. 책은 200페이지가 안되는 얇은 두께이나 상당히 진지하고 때로 심오하다.   우선 에마뉘엘 레비나스가 누구인지를 알려준 뒤에 저자는 곧바로 전체성과 무한 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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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에 대한 철학책이다. 전체성과 무한이란 저작을 갖고서 문성원 교수가 깨우친 것들을 담았다.

몇 년전에 슬라보예 지젝의 책 한권을 주제로 펴낸 책을 읽은 경험이 떠올랐다.

책은 200페이지가 안되는 얇은 두께이나 상당히 진지하고 때로 심오하다.

 

우선 에마뉘엘 레비나스가 누구인지를 알려준 뒤에 저자는 곧바로 전체성과 무한 책의 논의로 들어간다. 다소 생소한 학자이고 60년대 책이긴 해도 어려운 내용이다 보니 그야말로 정독을 했다. 정독 중에도 가장 느긋한 태도와 천천한 속도로 읽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들이 계속 나오는데 문성원 교수는 그래서 반복적으로 책의 주제를 이야기했다. 사실 어떤 두 세가지 용어는 정말 이해하기 힘들었어서 문성원씨가 계속 반복해서 설명해줘도 체득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인내심을 갖고서 당장은 이해 못했어도- 읽어나가다 보니까 끝에 가서는 마침내 이해할 수 있었다.

 

전체성과 무한1960년 발표작이고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데리다같은 해체주의 로 흔히 분류된다. 레비나스는 1995년에 사망하였고 그래서 주 활동 기간이 70~80년대 였다.

1960년의 작품을 지금 끙끙대며 읽고 있다는 게 어떻게 생각하면 자존심 상하는 일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문성원 교수가 애정하는 레비나스의 사상은 충분히 그럴만한 매력 포인트가 분명 있었다.

 

서구에서 근대 modern는 개인의 자유의 부상이란 표현으로 대표된다. 일정부분 자유를 바탕으로 특히 유럽은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 그러나 1차대전과 2차대전을 겪으면서 문명이 처참하게 파괴되는 비극도 겪었다. 이 사태는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레비나스가 파악하기로 이는 근대의 사회적 자유가 변질된 것에서 비롯했다.

 

근대의 사회적 자유가 이윤 추구 중심의 계량적 지배로, 인간에 대한 자본의 지배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근대의 자유는 결국 자연과 사회 두 영역 모두에서 계량적 지배가 낳은 문제를 드러낸다. 환경 파괴와 인간 소외가 그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근대적 자유에 대한 반성을 촉구한다. 나로부터 출발하는 자유가 진정 근본적인 가치인가? 그러한 자유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지 않은가  타자와의 관계, 곧 타자에 대한 책임이 자유에 우선한다고 보는 레비나스의 주장은 여기서 힘을 얻는다. 내가, 나의 자유가 먼저가 아니라,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타자와 맺는 관계가 먼저다.

(30~31p)

 

 

20세기의 한복판을 치열하게 통과해온 레비나스는 그의 철학을 통하여 전체주의와 전체성을 반대하고 극복하고자 하는 철학을 했다.

 

레비나스는 타자라는 존재가 낯설되 위협적이지는 않다고 했다. 사물이나 자연,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지배를 하려하거나 지배를 받을 가능성을 철저히 배척한 개념이기도 하다.

타자와 만나고 관계할 때 어떤 영향력이 발생할 수 밖에 없는데 그러면 대안으로 무엇을 제시했을까. 그것은 관심과 돌봄, 그리고 향유 이다.

타자는 연약하고 헐벗은 자들로 나에게 다가온다. 이방인, 고아, 가난한 자, 병든 자 등이다. 그들은 강요가 아닌 호소력을 띄고서 나에게 명령한다. 이 호소와 명령은 강제가 아니며 나는 그것에 책임을 느끼게 된다고 레비나스는 주장한다.

 

향유는 즐긴다는 것으로 이는 지배한다는 것과 전혀 다른 개념이다. ‘어떤 것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장악해야 하지만, 즐기기 위해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35p)

타자는 동일자(자신과 같은 자)에 견줄 때 무한성을 갖고 있다.

우리는 타자를 그가 나를 해치려 하거나 하지 않는 이상은 환대로 맞아주어야 한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이 환대의 특성은 상호간에 갖는 책임성이며, 우리가 누군가를 환대하고 존중하면 할수록 책임감은 더욱 커지는 것이다.

 

흔히 개인주의의 온상지라 불리는 서양에서 나온 이론으로서는 특별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레비나스가 전체성과 무한을 통해 이러한 주장을 펼친 이유가 있었다. 타자에 대해서 개념을 재정립하고 그래서 서로간에 환대하며 관계를 향유하는 것.

그렇게 책임을 서로 지는 것만이 당대의 사회의 병페와 부조리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레비나스는 타자가 존재론적 개념이 아니라고 하면서 관계적 개념이며 윤리적 개념으로 강조했다.

오래전에 읽다가 말았는데 발터 벤야민 이야기가 나오는 부분은 흥미로왔다. 동시대 지식인이며 같은 유대인으로서 레비나스는 벤야민을 탐독하고 받아들였다. 두 철학자 모두 나치즘의 실질적인 피해를 입었고 저술로서 직접적으로 나치즘을 비판했다고 한다. 히틀러는 나치즘이 역사의 진보라고 주장했지만 레비나스가 보기에는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과오와 시행착오가 있는 역사에 대해서 우리들은 연대하여 책임을 져야한 한다고 레비나스는 말했다. 물론 이 책임감을 외면할 자들도 분명 있겠지만 그런 사람들로부터 평화를 기대할 수는 없다. 평화는 타자의 호소와 소환에 응답하는 자들을 통해서 성립한다는 것.

 

보통 개인의 영역이라고 간주되는 감성, 감수성도 레비나스에게는 타자에 대한 것이었다.

선함, 선한 행동이란 무엇인가? 낯선 얼굴의 호소에 응답하는 것이 책임이라고 앞에서 말했다. 그 책임이 레비나스가 말하는 선함 의 정의이다.

 

요즘 들어 인터넷에서 부쩍 눈살 찌푸리게 하는 댓글을 보는 기사들이 있다. 우리나라의 외국인 이주 노동자에 대한 기사들이 그렇다. 동남아시아인과 아랍 중동 사람들에 대한 뉴스에서 인격 모독을 넘어 정신을 살해하는 듯한 심각한 댓글이 난무함을 쉽게 본다. 접할 때 그때마다 신고 버튼을 매번 누르기는 하지만 숫자와 공감이 많아서 그런 혐오 의견이 대세임을 막을 수가 없다.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전체성과 무한의 이론을 읽으면서 타자에 대해서 우리의 현실을 자주 떠올려 볼 수 있었다.

 

많은 외국인들이 유입되어 같이 살아가는 한국의 지금에서 타자와 낯섦에 대한 관념을 다시 세울 필요가 있다고 문성원은 말한다. 그에 대해 참조할 철학자로 레비나스를 제시하고 있다.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잠재적 이웃인 오늘의 상황은 우리에게 낯섦에 대한 새로운 윤리를 요구하고 있다.

레비나스의 철학은 우리가 맞아들여야 할 낯선 자, 즉 타자의 특성을 한정해줌으로써, 어떤 섞임이 바람직한 섞임이고 어떤 섞임이 그렇지 않은가의 기준을 제공해준다.

(97 페이지)

 

 

타자에 대한 부분은 명쾌한 편인데 욕망에 대한 부분은 조금 더 어려웠다. 문성원 저자도 독자가 그럴 거라고 예상해서인지 쉬운 예를 들면서 해석을 펼쳐간다. 레비나스가 전체성과 무한에서 설명한 욕망은 욕망이란 단어 위에 방점을 콕콕 찍어서 차별화하고 있다.

레비나스는 형이상학을 욕망으로 정립했다고 선언한다. 원본 원어가 있으나 여기 옮겨적지는 않기로 한다. 나도 읽어도 명확히 와닿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타자와 욕망을 개방적인 마음과 기대감을 안고 읽어 나가면 책의 결론에 다다를 때쯤에는 무언가가 느껴질 거라는 사실만큼은 말할 수 있겠다.

 

현재 정치와 관련해서 작가가 예시한 이 부분은 욕망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어냈지만, 경제성장이라는 공통의 목표는 오랫동안 우리 사회를 지배해왔다. 억압과 부패와 불평등의 숱한 문제들을 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도성장의 경험은 우리의 욕망 구조를 그 틀에 맞춰놓았고, 이명박-박근헤 정권의 퇴행과 반동이라는 시대착오의 대가를 치르게 만들었다.

(116 p)

 

들뢰즈와 가타리는 레비나스가 활동을 시작한 한참 후인 10년 후에 등장한 철학자들이다. 그들은 68 혁명의 영향을 받았고 이후 욕망에 대해 심도깊은 이론들을 발표했다. 이들의 욕망에 대한 언어를 살펴 보면서 문성원은 레비나스의 욕망 개념을 비교하여 설명한다.

60년대 사상이라서 그런지 지금 학계를 풍미하는 철학자들에 비해서 표현이 현란하지 않고 멋부림도 거의 없다. , 자아를 중시하는 일단의 풍토 속에서는 대척점에 있는 철학이라고 볼 수도 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레비나스의 타자와 욕망에 대한 주장과 성찰이 폐기되어야 할 고루함인 건 아니다. 현대의 인기 사상가들인 프로이트, 라캉, 보드리야르 등과 마찬가지로 레비나스의 철학도 중심에서 타당한 논리를 지니고 있다.

 

철학적 논의들이 언뜻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사태를 근본적으로 파헤쳐 숨어 있는 가능성들을 끝까지 사유해보려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사유 결과는 현실을 새롭게 조망하고 바꾸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형이상학은 현실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을 비추는 심원한 거울이다.

(131 p)

 

책을 좋아하고 즐겨읽는 이들이 문학을 소중하게 여기고 문예비평을 필요하다고 간주한다. 그렇듯이 철학이란 인문학 분야도 이해하기에 만만한 것은 아니지만 결코 현실과 동떨어진 분야는 아니다.

타자와 욕망은 문성원 교수의 안내로 레비나스의 주저를 일반 독자들에게 해설해 준다. 전체성과 무한부분 부분에서 중요한 핵심만을 뽑아서 다루기에 원전을 완전히 이해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왜 지금 에마뉘엘을 주목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전달해 주는 데는 성공하고 있다.

 

레비나스는 우리가 삶아감에 있어서 타자성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것을 경계하며 경고하였다. 타자성을 무시하려는 것이 바로 전체성이라고 보았다. 타자성을 없애려 고 시도하고, 누군가 강한 자, 가진 자- 가 타자들의 욕망을 누르면서 획일화 하려 할 때 갈등과 전쟁이 생겨난다고 했다.

오래전 목소리이지만 이런 여러 가지 철학들이 의미있게 다가온다.

 

저자는 곧 전체성과 무한을 번역해 내 놓을 거라고 한다. 같이 읽는다면 좀 더 선명하게 레비나스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묵직하고 진지한 고전 읽기 도서 타자와 욕망이다.

 

YES마니아 : 로얄 b********5 2017.06.25. 신고 공감 10 댓글 10
리뷰 총점 종이책
『타자와 욕망』 -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전체성과 무한』 읽기와 쓰기 by 문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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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여 페이지에 달하는 그다지 많지 않은 분량의 책 한 권을 받았다. 『타자와 욕망』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전체성과 무한』 읽기와 쓰기"라는 부제가 딸린 책이다. 부피가 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책을 펼친 지 보름을 훌쩍 넘기고 한 달이 다가와서야 마지막 책장을 덮을 수가 있었다. 그만큼 고되고 세심한 사유 노동이 집적된 흔적을 대거 발견할 수 있는 난해하고 복잡한 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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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여 페이지에 달하는 그다지 많지 않은 분량의 책 한 권을 받았다. 『타자와 욕망』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전체성과 무한』 읽기와 쓰기"라는 부제가 딸린 책이다. 부피가 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책을 펼친 지 보름을 훌쩍 넘기고 한 달이 다가와서야 마지막 책장을 덮을 수가 있었다. 그만큼 고되고 세심한 사유 노동이 집적된 흔적을 대거 발견할 수 있는 난해하고 복잡한 책이다. 더군다나 이 책이 나에게는 최초의 철학서인지라 더 큰 어려움이었을 것이다. 저자는 『전체성과 무한』이 읽기 어려운 책이라고 첫 머리부터 딱 잘라 말한다. 오죽하면 이 책을 두고, 클래식에 비유하여 기억의 문제가 아닌 이해의 문제라고까지 했을까. 분명 레비나스의 철학이 어렵기 때문에 저자가 쉬운 언어로 해설을 덧붙였을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십차례 갑갑함을 느껴가며 간신히 완독할 수 있었다. 오해하지 마시라. 여기서의 완독은 눈으로 활자를 다 읽은 것을 두고 한 말일 뿐이다. 저자 역시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십 년 이상의 강의 경력을 쌓을 무렵에도 어려웠다고 회고했는데 생초짜인 내가 머리에 쥐가 나는 건 지극히 당연할 일일 것이다.



난해함 자체가 가치일 수는 없다. 하지만 철학책이 어려워지기 쉬운 까닭은 있다. ...중략... 우리가 특정한 철학적 사유에 이끌리는 것은 그 사유가 우리가 봉착해 있는 문제들에 답을 줄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p16

후설과 하이데거, 베르그송은 레비나스에게 큰 영향을 준 철학자인 동시에 그의 주된 비판 대상이 된다. 그래서 그들의 선이해가 따라야 읽기가 수월하다. 레비나스는 "나의 삶의 대한 기록은 나치 공포에 대한 예감과 그에 대한 기억이 지배한다." (-p22)라고 술회했듯, 그의 철학은 20세기 서구 문명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 무엇보다 전체주의와 전체론을 반대하고 극복하려는 동기가 깔려 있다. 타인에게 고통을 가하고 살해했던 20세기의 비극적 상황에 대해 하이데거의 철학을 위시해 모든 철학이 무력하고 무책임했던 이유는 인간의 비참함에 대한 인간의 얼굴에 대한 외면에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로 레비나스의 철학에서 윤리는 존재론에 앞선다. 윤리란 타자와의 관계에서 성립하며, 우리의 삶은 타자에 응답하고 책임을 지며 환대하는 데서 성립한다. 타자는 무한하며 유한한 동일자인 나에 비해 높다. 하지만 타자는 강하고 위력적인 침탈자가 아닌 지극히 가난하고 약하고 헐벗은 자다. 타자는 낯선 자, 약한 자, 가지지 못한 자다. 이를테면 이방인, 고아, 가난한 자, 병든 자 등이 그들이다. 타자와의 관계는 지배의 관계가 아니다. 이들은 우리에게 얼굴로 호소하고 명령한다. 이 외면할 수 없음이 책임이고 윤리다. 타자와 동일자 사이의 차이(difference)는 무관심(indifference)이 아니라 무관심하지-않음(non-indifference)이다. -p32

욕망에서의 가치 기준 역시 내가 아닌 타자에 있다. 이 욕망은 무한하다. 내가 죽어도 내 자식을 통해, 다른 사람을 통해 욕망은 작용한다. 좋음에 대한 욕망, 우리가 욕망하기 때문에 좋은 것이 아니라 좋기 때문에 우리가 욕망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타자에 대한 욕망. 이것이 레비나스가 말하는 욕망이다. 레비나스는 들뢰즈나 가타리와 달리 우리 사회 내부에서 비롯하고 작용하는 내재적 욕망이 아닌 타자를 향한 초월적 욕망을 형이상학적 욕망을 내세운다. 그 욕망이 나아가는 곳은 동일자의 확장이 아닌 그것을 넘어서는 타자의 외재성이다. 낯설고 약한 타자의 호소에 귀 기울이고 응답하는 윤리의 지평이 참된 삶이다. 레비나스는 하이데거처럼 죽음과의 대비로부터 삶을 조망하는 것이 아니라 향유로부터 삶에 관한 논의를 시작한다. ~을 먹는 것이 이 향유의 기본 형태다. 향유의 관계를 세계의 요소 속에 잠긴다고 표현한다. 즐김은 타자적인 것과 관계한다. 레비나스의 고유한 특색은 낯섦에 대한 관심과 감수성에 있다고 하겠다.

d******7 2017.07.05. 신고 공감 9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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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마태복음 22장 3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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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게로 향하는 낯섦 낯익음  우리의 경쟁에는 전혀 다른 두 개의 캐릭터가 제시되어 있다. 하나는 강한 자존심과 욕망을 특성으로 하고 다른 하나는 겸손과 정의로 무장했다. 우리는 전혀 다른 이 두 개의 모델 혹은 그림 중에서 하나를 선택한 다음 거기에 맞춰서 자신의 성격과 행동을 빚어내면 된다. 이렇게 해서 나오는 결과물에서 하나는 색감적으로 화려하게 반짝거리고, 다른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마태복음 22장 39절" 내용보기
타인에게로 향하는 낯섦 낯익음

 

우리의 경쟁에는 전혀 다른 두 개의 캐릭터가 제시되어 있다.

하나는 강한 자존심과 욕망을 특성으로 하고

다른 하나는 겸손과 정의로 무장했다.

우리는 전혀 다른 이 두 개의 모델 혹은 그림 중에서 하나를 선택한 다음 거기에 맞춰서

자신의 성격과 행동을 빚어내면 된다.

이렇게 해서 나오는 결과물에서 하나는 색감적으로 화려하게 반짝거리고,

다른 하나는 더 정확한 윤곽으로 보다 절묘하게 아름답다.

-아담 스미스-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전체성과 무한읽기와 쓰기.

 

책을 읽기전에 생각을 해보았다.

나에게 타자란 나라는 사람의 인생 삶 경험에서 내가 찾은 하나의

도덕적 혹은 윤리적인 나에게 맞는 옷같은 존재로 선택되어져 버린 선택의 결과라고 느꼈다

 

타인이란, 다른사람.혹은 모르는 사람

내가 생각하는 타인이란... 내가 선택한 자기라는 캐릭터를 제외한

다른 형상과 성향 그 모든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나의 인생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이 그러했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

 

 

단풍 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더군요.

몸이 하나니 두 길을 다 가 볼 수는 없어

나는 서운한 마음으로 한참 서서

잣나무 숲 속으로 접어든 한쪽 길을

끝 간 데까지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또 하나의 길을 택했습니다. 먼저 길과 똑같이 아름답고,

아마 더 나은 듯도 했지요.

풀이 더 무성하고 사람을 부르는 듯했으니까요.

사람이 밟은 흔적은

먼저 길과 비슷하기는 했지만,

 

서리 내린 낙엽 위에는 아무 발자국도 없고

두 길은 그날 아침 똑같이 놓여 있었습니다.

, 먼저 길은 한번 가면 어떤지 알고 있으니

다시 보기 어려우리라 여기면서도.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

나는 한숨 지으며 이야기하겠지요.

"두 갈래 길이 숲 속으로 나 있었다, 그래서 나는 -

사람이 덜 밟은 길을 택했고,

그것이 내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라고

 

- 정현종 교수 번역본

 

시가 내포한 이야기처럼 사람이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함으로 나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것처럼.

나라는 인간이 선택하지 않은 캐릭터가 나의 운명이 아닌 영원한

타자로 남아있다는 생각으로 오랜시간.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 오랫동안. 지금부터

영원히 만나지는 곳이 없는 수평선으로 그 길을 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책에서 찾은 타자는 내가 읽기전의 타자와는 아주 많이 다른. ‘존재였다.

 

세상에 만능은 없어요 p.10

 

전체성과 무한을 다루는 책을 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이궁리 저궁리하고 있을때도 그랬다

...

그 말이 내 처지와 아울러 이 책의 의도와 특성을 설명할 수 있는

궁색한 출발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p.10-11

 

글을 쓰려는 입장에서 늘 고민은 첫문장에 대한 고민이다.

그것에서 시작하기 좋은 글이 남겨주는 이야기의 상관관계 혹은 유의미한 연결성

자유로운 사고가 나오는듯하다. 출발점에서 자신의 경험에서 찾은 이야기가.

어떻게 유의미하게 연결이 되는지. 기억해볼 것은.

 

철학책이 어려워지기 쉬운까닭은 있다.p.16

기존의 상식적이고 일상적인 견지에서는 잘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풀어 나가려다 보니

그렇게 되는 것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면 굳이 애써 궁리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아예 철학적 문제로 성립하지도 않을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특정한 철학적 사유에 이끌리는 것은 그 사유가 우리가 봉착해 있는 문제들에 답을

줄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그런 기대가 난해함을 극복하는 데 드는 수고마저 무릅쓰게 하는 것이다.p.16

 

 

 

 

1980년대 후반 동구의 사회주의권 붕괴.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의 한계를

목도한 젊은이들이자본주의 사회에서 신자유주의의 전횡을 비판할수 있는

시각과 논리를 얻기위해

찾게된 레비나스의 철학.이라고 저자 문성원은 소개한다.

 

나의 주요한 관심사는 자유주의 비판이었다.p.14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반성과 아울러 시급하게 여겨졌던 것은

신자유주의의 전횡을 비판할 수 있는 시각이고 논리였다p.15

 

레비나스의 철학이 눈에 들어온 것이 이러한 배경에 있다고 하였다.

 

정의가 자유보다 우선하며

그 정의는 타자에 응답하고 책임을 지며 타자를 환대하는 데서 성립한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으로 보였다.

그래서 나는 레비나스를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p.15

 

저자는 말한다 레비나스의 전체성과 무한읽기와 쓰기

즉 생각을 이해하고 소화하기에 큰무리가 없다고 .

저자에게 입력된 내용을 압축과 편집 출력 인코딩하여 나름의

사회철학적 대역의 주파수는. 일정수준 이상의 선명함을 보여줄 수 있다고 자신한다.

 

그러나 저작 자체를 대신할 수 없다고 토로한다.

원작에 접근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으나.

직접 원작의 깊이와 무게를 찾는 이들에게서 얻는 성과를 대신할 수 없다고

고전에 대한 읽기와 쓰기가 고전을 읽는데 깊고 풍부하게 들을 수 있는 통로

저마다의 울림으로..그러나 만능이 아닌 통로로서 제시한다.

 

 

엠마뉴엘 레비타스의 생애를 돌이켜보면.

그것은 89세 약 90여년 가까이[1906.01.12.-1995.12.25] 살면서

1900년대 100년의 근간을 이야기 함에 있어서 시대의 목격자이자

자신과 자신의 가족은 겪었던 유대인학대의 피해자로서

관찰되어진 시대를 현상학자로서의 그는 철학으로서

시대를 포용하고 용서하려는 자신의 의지를 반영하려고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전체주의와 전체론을 반대하고 극복하려는 동기가 그의 철학에 깔려 있다.p.25

 

이전까지의 존재론을 물리치고 윤리를 제1철학으로 내세운 철학으로

서구의 근대적 이성이 세계를 통일적 원리로

환경에 대한 지배력을 넓히는데 위력을 발휘했다.p.25

 

전체론에 대한 회의와 해체론적 발상을 더욱 부추긴 것은

마르크스주의에 따른 현실 사회주의 기획의 실패였다고 할 수 있다.p.27

 

레비나스 철학의 강점.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과 새로운 변화를 추구할 수 있는 방향을 일깨운다.

p.27

 

 

 

윤리는 존재론에 앞서기에

윤리란 타자와의 관계에서 성립하는 것.

타자와의 관계는 모든 이해나 해석을 우선한다.p.27

 

우리의 삶은 어떤 인식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 관계하는 데서 비롯된다.

주체 자체가 타자에 의해 형성되고 성립된다는 것이 레비나스의 생각이다.p.28

 

우리의 삶은 타자와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그 만남이 우리를 주체로 분리시키고 자리잡게 한다.

내 삶에서조차 내가 먼저일 수 없는 것이다.

나의 삶은 타자의 호소나 명령에 응답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진다.p.28

 

레비나스에 따르면

타자는 또 하나의 나와 같은 것일 수 없다.

타자는 다른자이지 같은자가 아니다.

같은 자인 동일자는 한정된 자, 다른 자인 타자는 한정되지 않은자.

 

타자는 내게 익숙한 틀과 파악 방식을 벗어나 있으며, 그래서 낯설다.p.29

 

타자와의 관계

, 타자에 대한 책임이 자유에 우선한다.p.30

 

=역사적으로 볼 때 사회적이고 문화정신적인 발전은 분화의 기나긴 역사적 과정을 거쳐 점진적으로 발전해왔다.

 

타자는 무한하다.p.31

타자는 연약하고 헐벗은 자들로 나에게 다가온다.

이방인, 고아, 가난한자, 병든자. 그들이다.

 

이들은 내가 가진 것드의 밖에서 내게 호소하고 명령한다.

이 호소와 명령은 지배나 강제가 아니자만,

나는 이 호소와 명령을 외면할 수 없다.

이 외면할 수 없음이 책임이고 윤리다.p.32

 

레비나스가 내세우는 환대는 무조건적 환대다.

나는 이방인이고 헐벗은 자이기에 그 호소에 응답하여 타자를 환대할 따름이다.p.37

 

 

 

 

방문객/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앞서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를 번역한 이가 정현종 시인이셨는데

그의 방문객환대를 이야기하고 있다.

  

환대는 폐쇄성을 열어젖히고 타자를 내 집에 맞아들이는 행위다.

낯선 이를 기꺼이 받아들여 자리를 내주는 일이 환대다.p.36

 

레비나스가 내세우는 환대는 무조건적 환대다.

나는 타자가 이방인이고 헐벗은 자이기에 그 호소에 응답하여 타자를 환대할 따름이다.p.37

 

 

타자와의 관계는 판단과 인식에 앞서는 것.

 

무조건적인 환대는 언제나 조건적 환대의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

그래야 조건적 환대도 그 한계 너머와 연결될 수 있다.p.40

 

 

이즘에서 레비나스의 철학은 전통적인 종교의 유효성이 사라져가는 시대에 윤리라는 이름으로 종교적 사유를 되살리려는 시도가 아닐까?p.55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태복음‬ ‭22:34-40‬ ‭KRV‬‬
http://bible.com/88/mat.22.34-40.krv

 

    

 

책을 읽기전에 내용보다 중요한것은 언제나 타이틀이다.

 

부제가 에마뉴엘 레비나스의 전체성과 무한읽기와 쓰기.라고 적혀있는게

보이기는 하나. 언제나 하나의 책은 부제보다. 제목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으로 가늠하게 되는 책이 보이기 때문이다.

 

책을 접하는 여러 장르중에 대략난감의 형태는.

세가지 정도가 있다.

첫째, 책의 분량이 상당히 많다. 실질적인 책의 두께가 아닌 책이 다루는 무게감 주제들

둘째, 책을 다 읽지 못하는 경우다. 스피드하게 읽어도 끝까지 읽지 못하는.

셋째, 책의 분량이나 읽기가 완독,정독, 회독 해도 책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타자와 욕망은 내게 그러한 과정에 해당하는 책이 되었다.

여전히 새롭게 읽히고 있다.

 

 

지금보다 먼 미래에.

 

그러다 문득. 스치듯, 새벽 아침 일어나자마자 눈을 비비며 읽기시작한

다시 읽기에서 [레비나스의 전체성과 무한 읽기와 쓰기]가 레비나스에 가있지 않고

타자와 욕망으로 옮겨가게되는 기운을 얻었다.

 

그렇게 어느 날 문득. 나는 알게 되는 것이다.

 

 

 

 

 

 

 

 

 

 

 

r********0 2017.07.03. 신고 공감 2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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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 존재보다 타자와의 관계가 먼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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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우리에게는 낯선 철학자이다. 내가 처음 레비나스라는 이름을 접한 것도 레비나스라는 저자의 책을 읽으면서가 아닌, 데리다라 들뢰즈에 관한 책들을 읽다가 이들과의 관계에서 레비나스라는 이름을 접하게 되었을 뿐이다. 레비나스의 철학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있다가 이번에 그의 대표적인 저작인 [전체성과 무한]이라는 책과 관련된 해설서가 출간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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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우리에게는 낯선 철학자이다. 내가 처음 레비나스라는 이름을 접한 것도 레비나스라는 저자의 책을 읽으면서가 아닌, 데리다라 들뢰즈에 관한 책들을 읽다가 이들과의 관계에서 레비나스라는 이름을 접하게 되었을 뿐이다. 레비나스의 철학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있다가 이번에 그의 대표적인 저작인 [전체성과 무한]이라는 책과 관련된 해설서가 출간되어서 읽게 되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레비나스의 사상을 20세기라는 시대적인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 20세기는 전체주의와 함께 세계대전의 광기가 세상을 휩쓴 시기였다. 이런 시기에도 철학은 시대적인 요청에 응답하지 못하고 시대와 동떨어진 존재의 문제만을 추구했다. 레비나스는 존재론적인 철학대신 타자와의 관계를 주목한다. 그리고 어떻게 자아중심적인 20세기 문화에서 타자와의 관계를 윤리적으로 설정할지를 자신의 철학의 주제로 삼는다.

 



 

레비나스는 20세기의 철학자와 사상들이 전체주의에 이용된 것을 그들의 사상이 존재론을 중점으로 두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 대표적인 사상가가 레비나스의 스승이자, 레비나스가 가장 비판하는 하이데거이다. 그는 존재론은 태생적으로 전체주의에 이용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존재론은 세계의 근본적인 됨됨이를 통일적 원리로 파악해내려는 시도다. 그럼으로써 암묵적으로 노리는 바는 그러한 원리를 통해 세계를 장악해 보겠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론을 앞세 우는 철학은 지배를 지향하는 자기중심적 특성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레비나스의 생각이다. 존재론이 어떤 형태를 취하든, 이를테면 니체처럼 고정된 상태를 깨뜨리는 '힘을 향한 의지'를 내세우든, 하이데거처럼 존재자들의 규정에 앞서 차이를 가능케 하는 '존재'를 내세우든, 결국 동일성의 철학이 되고 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러한 파악 뒤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동일성의 확장과 지배이며, 다양한 개념들과 사유 방식들은 거기에 봉사한다." (P 26)

레비나스는 이런 존재론을 극복하기 위해 윤리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 윤리는 관념적인 윤리가 아닌, 타자와의 관계에서 윤리이다. 레비나스에게 있어서 개인의 주체성은 타자와의 관계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타자와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그 만남이 우리를 주체로 분리시키고 자리 잡게 한다. 내 삶에서조차 내가 먼저일 수없는 것이다. 나의 삶은 타자의 호소와 명령에 응답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진다. 모름지기 삶이란 어떤 반응과 더불어 성립하지 않는가. 인식이 먼저가 아니라 반응이 먼저다. 또 그 반응은 내가 아닌 타자와의 관계를 전재하기에, 타자를 받아들이는 감성이 계산하고 판단하는 이성에 우선한다." (P 28)

결국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레비나스 철학의 핵심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욕망을 어떻게 윤리적으로 다룰 것인가 하는 주제이다. 레비나스는 근대 이성과 자본주의가 만든 욕망은 실현 불가능한 욕망이고, 이 욕망은 끊임없이 인간을 자극한다.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관계에서 이 욕망을 어떻게 설정하느냐를 다룬다.

"레비나스의 [전체성과 무한]에서 우리가 타자를 향한 욕망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 욕망은 어떤 결핍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고 그 결핍이 채워지면 만족되는 그런 욕망이 아니다. 이 욕망은 채울수록 오히려 더 커지는 욕망이다. 무한을 향한 욕망이기 때문에 그렇다. 윤리란 바로 이런 욕망과 관련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윤리적 관계는 결핍을 채우려는 행위로도, 보상이나 보답을 기대하는 행위로도 구현될 수 없다. 그런 행위들의 기준은 모두 동일자적 견지에 속한다." (P 34)

20세기와 자본주의의 윤리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타자를 욕망의 대상으로 보고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라고 말한다. 레비나스는 우리가 이룰 수 없는 타자와의 관계에서 욕망하는 대신 타자를 환대할 것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 환대는 조건적인 환대가 아닌, 무조건적인 환대이다.



 

이 책은 레비나스의 철학을 저자의 경험과 쉬운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 접하지 못한 레비나스의 철학을 타인의 해설로만 이해하기에는 조금 어려움을 느낀다. 이것이 레비나스의 철학을 직접 접하고 싶은 이유이다. 저자는 이 책이 레비나스의 [전체성과 무한]의 출간을 염두에 두고 쓴 글이라고 언급한다. 아직 [전체성과 무한]이라는 책이 출간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 책이 먼저 출간되었다고 한다. [전체성과 무한]이라는 책과 함께 레비나스의 책들이 더 많이 우리 사회에 알려지기를 바란다.

i*******3 2017.06.21.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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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의 [전체성과 무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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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합격하고 신입생이 되어 자신감과 의욕이 넘치던 시절, 그 시기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나는 대학 생활의 자유로움과 새로움에 이끌려서 이제껏 내가 몰랐던 분야와 주제에 의기양양하게 뛰어들려는 기세가 충천했다. 그래서 나는 이젠 성인이 되었으니 거기에 걸맞게 다른 사람들이 보면 지적인 문제로 고민하는 모습이 조금은 폼 나고 멋있게 보일 것이라고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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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합격하고 신입생이 되어 자신감과 의욕이 넘치던 시절, 그 시기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나는 대학 생활의 자유로움과 새로움에 이끌려서 이제껏 내가 몰랐던 분야와 주제에 의기양양하게 뛰어들려는 기세가 충천했다. 그래서 나는 이젠 성인이 되었으니 거기에 걸맞게 다른 사람들이 보면 지적인 문제로 고민하는 모습이 조금은 폼 나고 멋있게 보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약간은 겉멋스럽게 철학에 관심을 가졌고, 지금 생각하면 정말 부끄럽지만 레비나스를 알기 위해 패기 좋게 덜컥 덤벼들었다.

 

하지만 철학적인 기초가 부족한 내가 이런 충동적인 동기로만 레비나스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고 역부족이었다. 지금과 달리 그때만 해도 레비나스의 작품들에 대한 번역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레비나스를 소개하는 책들도 부족한 편이어서, 한글로 된 자료를 읽고도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이것은 단순히 자료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철학적 소양이 전무한 초심자였던 내가 별다른 준비 없이 레비나스를 파고들고자 했으니,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그렇게 무참한 좌절을 경험한 후, 레비나스는 기억 저편으로 멀리 사라졌다.

 

그렇게 학창 시절이 지나고 사회생활을 한 지도 제법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아픈 추억의 흔적인 레비나스를 다시 만날 수 있는 책을 읽게 되었는데, 그 책은 바로 문성원 교수가 쓴 『타자와 욕망』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레비나스의 대표작인 『전체성과 무한』의 내용을 중점적으로 소개하면서, 레비나스에 대한 독자의 전반적 이해를 돕는다. 레비나스에게 접근하고자 도전했던 나로서는 참으로 반가운 책이 아닐 수 없다. 비록 지금도 철학이란 분야는 여전히 탐구와 도전의 영역이지만, 나도 이제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예전의 오만과 무모함을 벗고 겸손과 분별로 철학을 대할 자세가 조금은 갖춰져 있으니, 저자의 도움이면 안심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내가 이 책을 읽고 나서 보니, 저자가 정한 책의 제목이 대단히 적절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왜냐하면 레비나스의 『전체성과 무한』에서 가장 핵심적인 개념이 바로 ‘타자’와 ‘욕망’이기 때문이다. 이 두 개념만 제대로 이해해도 레비나스의 『전체성과 무한』의 전체 내용에 대한 핵심을 이해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저자에 따르면, 레비나스가 『전체성과 무한』에서 일차적으로 추구한 것은 존재론에 대한 윤리의 우위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친숙한 서구 철학의 가장 기본적 바탕은 존재론이다. 다시 말해, 인식의 주체가 이성적인 사유를 통해 만물의 통일적 원리를 규명하려는 시도가 바로 존재론이다. 이런 존재론의 입장에서는 인식 주체의 존재가 일차적이고 가장 근본적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이런 존재론을 가장 핵심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관계에서 성립되는 윤리를 제일원리로 제시하는데, 레비나스가 제안하는 바에 따르면 그 이유는 타자와의 관계가 이런 인식 주체의 이해나 해석보다 우선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삶은 어떤 인식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 관계하는 데서 비롯되며, 주체 자체도 타자에 의해 형성되고 성립된다. 레비나스의 이런 생각에는, 인식 주체로서의 우리가 유한한 반면에 타자는 무한하고 우리가 지닌 잣대로는 규정할 수 없고 한없이 높고 고귀하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따라서 유한한 인식 주체가 자신의 경계를 끝없이 계속 확장한 결과물로서의 ‘전체성’도 결국은 유한성을 드러내므로 타자의 특징인 ‘무한’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것이다.

 

이렇게 윤리를 제일원리로 제시하는 레비나스의 입장에서 자연스럽게 귀결되는 것이 바로 ‘욕망’에 대한 재조명이다. 왜냐하면 욕망이란 관계인데, 욕망에는 욕망하는 자와 욕망되는 것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비나스가 염두에 두는 욕망이란, 인식 주체가 동일자로서 자신의 경계를 무한히 넓히고 전체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현상학적 욕망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서 자아로부터 출발해 타자로 나아가는 형이상학적 욕망이다. 이런 형이상학적 욕망이 나아가는 곳은 동일자의 확장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타자의 외재성이다. 낯설고 약한 타자의 호소에 귀 기울이고 응답하는 윤리의 지평이다. 레비나스에게는 이것이 ‘참된 삶’이이며, 여기에 이르는 길이 바로 형이상학적 욕망이다.

 

철학적 사유, 특히 레비나스의 사유에 친숙하지 않은 나와 같은 독자의 경우는 저자의 이런 친절한 설명이 단번에 쉽게 납득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저자가 고백하듯이, 이 책이 레비나스의 『전체성과 무한』 전체 내용을 완전히 다루고 있지 않아서 이 책만 읽고서는 레비나스와 관련해서 자칫 용두사미식의 이해에 그칠 우려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저자의 도움 덕분에 나는 내가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레비나스의 『전체성과 무한』을 대체적으로 파악하고 레비나스에게 한층 더 큰 친숙함을 느끼게 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레비나스의 철학 사상에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다는 희망과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은 이 책을 읽고서 얻은 큰 수확이라 하겠다. 저자가 번역한 레비나스의 『전체성과 무한』이 하루빨리 출판되기를 기대한다.

 

사족: 36페이지 각주 10에서 ‘환대’를 나타내는 독일어 단어 중간에 오자가 있는데, 출판사에서 참조하면 좋겠다.

n******n 2017.06.20.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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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와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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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와 욕망    이 책은    이 책, 저자가 말한 것처럼 “애써 읽어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 대목이 숱하게 많”다. “책을 한번 훑어보고 나서도 마음에 드는 몇 몇 구절들과 막연한 인상만이 머리에 남아”있다. (15쪽)   그래서 별 수 없이 참고할 만한 책을 옆에 가져다 두고, 컴퓨터를 켜서 검색창을 열어 대기상태로 두고 읽었다. 요즘 말로 ‘열공’모드로 이 책을 읽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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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와 욕망 

 

이 책은 

 

이 책, 저자가 말한 것처럼 애써 읽어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 대목이 숱하게 많. “책을 한번 훑어보고 나서도 마음에 드는 몇 몇 구절들과 막연한 인상만이 머리에 남아있다. (15)

 

그래서 별 수 없이 참고할 만한 책을 옆에 가져다 두고, 컴퓨터를 켜서 검색창을 열어 대기상태로 두고 읽었다. 요즘 말로 열공모드로 이 책을 읽었다. ‘타자라는 개념을 한번 정리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아보자는 각오도 함께 장전한 채 말이다.

 

이 책은 에마뉘엘 레비나스 잘 모르는 사람, 이름은 여기저기서 들었던 철학자- 의 책 전체성과 무한을 텍스트로 삼고 강독(?)하는 식으로 쓰여진 책이다. 그래서 내 딴에는 지금껏 알고 있던 타자욕망의 연결 상태를 깨트리고 다시 재정립할 좋은 기회로 삼고 읽기 시작했다.

 

타자, 지금껏 읽어왔던 책에서 만났던 타자에 대하여 우선 정리해 보기로 했다.

먼저 제목인 타자와 욕망이라는 두 개의 개념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이 있다.

 

자크 라캉이 한 말이다.

"우리는 욕망의 대상을 발명하지 않고, 타자로부터 지정받는다.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그게 전부다. 그래서 타자라는 말과 욕망은 항상 ‘결핍 – 충족의 이항관계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타자란 나에게 욕망을 집어 넣어주는 또는 욕망을 인식시켜 주는 제 삼자로 개념지어져 있는 단어다.

 

이 책의 내용은 

 

먼저, 레비나스는 누구인가 

 

프랑스 철학자, 1923년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수학했고, 1928~1929년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후설과 하이데거로부터 현상학을 배운 뒤, 1930년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후설 현상학에서의 직관 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저작은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존재에서 존재자로>(1947)

시간과 타자>(1947)

전체성과 무한>(1961)

 

이중에서 전체성과 무한은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그러니 이 책은 레비나스의 책 중에서 아직 번역되지 않은 책을 (지금 번역하고 있는) 번역자의 강의로 들어보는 셈이다.

 

해서 이 책의 텍스트가 되는 전체성과 무한은 이 책에서 소개하는 정도로만 읽어야 하는 것이다,

 

전체성과 무한의 목차

 

해서 책을 몇 번 읽으면서 전체성과 무한의 얼개를 추려보았다.

 

서문

1961년 서문

1987년 독일어판 서문 (47)

1, ‘동일자와 타자

2, ‘내면성과 경제’ -향유, 거주, 노동, 작품 등의 개념 등장. 소외.

이 부분에 대하여는 특히 헤겔, 마르크스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3, ‘얼굴과 외재성’ - 얼굴

4, ‘얼굴 너머’ - 에로스, 번식성, 자식성, (87)

 

전체성과 무한의 내용

 

저자는 이 책에서 전체성과 무한의 부분, 부분을 여기저기 인용하고 있는데 그 중 일부만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1961년 서문 (60)

서문 말머리 우리는 도덕에 속기 쉽지 않을까? 그 여부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데는 누구나 쉽게 동의할 것이다.”(60)

(X ) 철학이 어리석음에 맞서듯, 정치는 도덕에 맞선다.(61)

(X~XI ) (66쪽 참조)

(XI ) (69)

(XII ) 레비나스는 이 종말론을 통해 콘텍스트 없는 의미 작용의 가능성”(XII)을 내세우기 때문이다. (72)

(XII ) 평화에 대해서는 종말론 밖에 있을 수 없다. (63)

(XIII ) (73)

 

1부의 첫부분

<“참된 삶은 부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 속에 있다. 형이상학은 이런 알리바이에서 출현하고, 이러한 알리바이 속에서 자신을 유지한다. 형이상학은 다른 데, ‘다르게, ‘다른 것으로 향한다.>(109)

 

(4~5) <이 욕망은 절대적 타자에 대한 욕망이다. 우리가 만족시키는 허기, 우리가 해소하는 갈증, 우리가 가라앉히는 감각 바깥에서, 형이상학은 만족을 넘어선 타자를 욕망한다. ... > (126)

 

(10), <우리는 전체성을 구성하지 않은 채 동일자와 타자 사이에 수립되는 유대를 종교라 부르고자 한다.> (57)

 

(82) <우리는 맛좋은 수프와 공기와 빛과 풍경과 노동과 생각과 잠 등등으로 산다.>(143) 레비나스가 묘사하는 삶의 원래 모습이다.

 

(281) 마지막 장의 마지막 절 첫 단락.

우리는 형이상학을 욕망으로 정립했다. 우리는 욕망을 어떠한 도달점도, 어떠한 만족도 중단시키지 못하는 무한의 척도로 묘사했다. 세대의 비연속성 즉 죽음과 번식성- 은 욕망으로 하여금 자신의 고유한 주체성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며, 주체성의 동일성이 지닌 단조로움을 멈추게 한다. 형이상학을 욕망으로 정립하는 것은 존재의 생산 욕망을 낳는 욕망-을 선함으로 해석하는 것이고, 행복 너머의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존재의 생산을 타인을 위한 존재로 해석하는 것이다.> (105)

 

타자 

 

우리의 삶은 타자와 관계하는 데서 비롯한다. 주체 자체가 타자에 의해 형성되고 성립된다는 것이 레비나스의 생각이다. 레비나스에게서 무게의 중심은 동일자로사의 주체가 아니라, 타자에게 놓인다.

우리의 삶은 타자와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그 만남이 우리를 주체로 분리시키고 자리잡게 한다. (28)

 

욕망의 정의

 

좋음에 대한 욕망, 우리가 욕망하기 때문에 좋은 것이 아니라 좋기 때문에 우리가 욕망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타자에 대한 욕망이것이 레비나스가 말하는 욕망이다. (103)

 

레비나스는 타자를 향한 초월적 욕망을, 형이상학적 욕망을 내세운다. (125)

 

레비나스의 욕망은 결핍 충족의 틀을 벗어난다. (127)

 

그래서 저자는 욕망에 대해 이런 결론을 내린다.

이런 형이상학적 욕망에 대한 주장이 우리가 욕망의 문제를 더 깊이 있게, 그리고 더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해준다고 생각한다.>(132)

 

다시, 이 책은 

 

이 책이 텍스트로 하고 있는 전체성과 무한이 아직 미출판이기에 이 책 읽기가 어렵다. 물론 그 책이 눈앞에 있다하더라도 별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철학의 기본이 잡혀 있지 않은 마당에, 게다가 레비나스에 대한 사전 이해가 없는 터라, 그 책을 옆에 두고 있었어도 이해 정도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번역본이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그 책의 내용이 무얼까, 마치 괄호 속의 빈칸을 채워보려는 노력을 하는 것처럼, 저자가 띄엄띄엄 소개한 전체성과 무한의 내용을 탐구하면서 읽게 된 것도, 위에서 옮겨놓은 부분이라도 이해하려 애써서 읽었던 것도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그래서 이제 그 책이 번역되어 나온다면, 다시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책을 읽어본다면 이해의 정도가 조금은 나아질까?

 

일단, 이 책으로는 타자라는 개념과 욕망이라는 개념을 결핍 충족의 틀로 바라보던 기존의 태도에서 벗어난 것만으로 만족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달의 사락 s***h 2017.06.19.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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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마뉘엘 레비나스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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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와 욕망>은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대표 저서인 <전체성과 무한>에 대한 문성원 교수의 철학적 사고를 담은 책이다. <타자와 욕망>은 이 시대의 젊은이들과 지성인들이 시대의 고민에 함께하고 타자의 호소에 응답하는 것이 사회적 책임임을 떠올리게 한다.에마뉘엘 레비나스는 누구인가?에마뉘엘 레비나스는 1906년 구소련 지배하의 리투아니아에서 태어난 유태인이다. 후에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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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와 욕망>은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대표 저서인 <전체성과 무한>에 대한 문성원 교수의 철학적 사고를 담은 책이다. <타자와 욕망>은 이 시대의 젊은이들과 지성인들이 시대의 고민에 함께하고 타자의 호소에 응답하는 것이 사회적 책임임을 떠올리게 한다.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누구인가?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1906년 구소련 지배하의 리투아니아에서 태어난 유태인이다. 후에 가족들과 함께 우크라이나로 이주했고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크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그곳에서 레비나스는 베르그송 철학을 비롯한 프랑스의 철학과 후설의 현상학을 배운다. 그래서 문성원 교수는 레비나스를 현상학자로 인식하고 있는듯 하다. 레비나스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으로부터 큰 감동과 영향을 받는다. 


하이데거는 레비나스의 정신적 스승이면서 동시에 넘어서야 할 존재로 강하게 작용한다. 특히 유태인이면서 프랑스 군인으로 2차대전에 참전했다가 독일군에게 붙잡혀 포로생활을 했으며 이 시기에 가족들을 모두 독일군에게 잃은 레비나스에게 하이데거의 철학은 독일의 파시즘과 같은 전체주의에 이론적 배경을 제공한 것이라는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하이데거의 철학이 당시 시대의 호소에 응답하지 못하고 주목하지도 않았다는 비판을 서슴치 않았다. 


본 회퍼가 칼바르트를 비판했던 것과 비슷한 논리라고 볼 수 있다. 칼바르트의 신학이 히틀러의 파시즘을 정당화하는 재료로 사용되어 히틀러가 마치 인간 그리스도인양 찬양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2차 대전을 통해 유럽을 할퀴고 지나간 학살과 전쟁의 상흔이 철학과 신학 그리고 문학등에서 각성과 반성의 반향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레비나스가 어느정도 성공을 거둔 후에는 하이데거의 대한 비판도 잠시 수그러들었다. 그러다가 다시 한 번 유럽의 철학적 배경을 송두리 채 뒤흔드는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독일의 통일과 구소련의 몰락이다. 



전체론에 대한 회의와 해체론적 발상을 더욱 부추긴 것은 마르크스주의 에 따른 현실 사회주의 기획의 실패였다고 할 수 있다. .... 그러나 이렇게 해체 지향적인 분위기는 우리에게 적극적인 삶의 방향과 의미를 제시해주기 어렵다. 여기에 비해 레비나스 철학이 지니는 강점은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과 새로운 변화를 추구할 수 있는 방향을 일깨운다는 데에 있다. .... 우리의 삶은 어떤 인식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 관계하는 데서 비롯한다. 주체 자체가 타자에 의해 형성되고 성립된다는 것이 레비나스의 생각이다. " p. 27-28


레비나스가 하이데거를 공격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사실 레비나스의 철학은 하이데거와 많은 부분에서 닮아있다. 레비나스는 시대석 상황속에서 하이데거를 극복해야만 했고 또 하이데거의 아류라는 비평을 의식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도 레비나스를 읽다가 하이데거와의 친화성을 문득 문득 느끼곤 한다. 사상의 흐름이라는 견지에서 보면 기본적으로 같은 줄기를 타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때가 많다. 다음과 같은 레비나스의 술회를 읽었을 때에도 그랬다. "1928년/29년에 나는 처음으로 하이데거를 읽었는데, 그때 그건 하나의 신학적 반향이고 울림이었지요. 이 책무Schuld........ 그것은 신학의 세속화 같았어요. 셸러의 말 알죠? '그것은 천재성과 주일 설교의 혼합물이었다'. 그 울림이 꼭 그랬어요."

  내가 레비나스를 처음 읽었을 때도 유사한 느낌을 받았다. 레비나스의 철학은 전통적인 종교의 유효성이 사라져가는 시대에 윤리라는 이름으로 종교적 사유를 되살리려는 시도가 아닐까. 또는 종교적 사유에 힘입어 윤리적 과제를 제기하려는 시도가 아닐까  p.54-55



저자에 의하면 레비나스는 타자를 향한 초월적 욕망 즉 형이상학적 욕망을 내세운다. 그렇기에 이러한 욕망은 철학을 넘어서 신을 향하는 종교적 분위기까지 느껴진다. 



레비나스는 들뢰즈. 카타리와 달리, 우리 사회 내부에서 비롯하고 작용하는 내재적 욕망이 아니라 밖을 향한다. 욕망의 혁명이란 차라리 이렇게 방향을 완전히 전환하는 데서 찾아질 수 있지 않을까? p.121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와의 관계를 정리해보자.


레비나스에 의하면 타자는 우리에게 호소하고 명령하며, 우리는 거기에 응답하고 책임을 진다. 그는 이런 관계를 '대화'discours라고 부르지만, 이것은 상호적인 관계가 아니라 비대칭적 관계다. 이때 우위에 서는 것은 타자 쪽이다. 레비나스에게서 타자는 무한하고 우리는 유한하니까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p.127-128


문성원 교수에 따르면 <전체성과 무한>의 1부 "동일자와 타자"는 '전체성과 무한'에 어울리는 전체 주제가 잘 제시되어 있으며 책의 독자적 특성을 잘 드러내준다. 


타자와의 관계에서 타자는 무한하고 대화의 우위에 서 있다. 타자가 우리에게 호소하고 명령하면, 우리는 거기에 응답하고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타자를 환대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는 약한 자와 헐벗은 자이기 때문이다.


레비나스가 2차대전과 구소련의 몰락의 시대를 살아가며 타자의 호소와 명령에 우리가 응답하고 책임을 질것에 대한 철학을 연구했다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타자의 호소와 명령에 어떻게 응답하고 책임을 져야 할까.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고 청년 실업자들이 시대의 뒷자리로 밀려나야만 하는 비참한 시대에 우리는 타자의 호소와 명령에 응답하며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는 철학적 사고와 결합할 때 가능하다. 레비나스가 전체주의적인 괴물의 탄생을 경계하고 우려했던것처럼 우리 사회는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상대방의 희생을 강요하며 쌓아올린 바벨탑을 경계해야 한다. 


상대방에 대한 경청을 통해서 경제 정의가 이루어지고 상호 합의를 통해 타자를 더 배려해하는 사회로 한 단계 더 성숙해져야 한다. 우리 사회가 이러한 과정을 생략한 채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려고 하는 조급증에 만연되어 있기 때문에 스스로 한계와 태두리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보아야만 한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 클럽을 통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b*******k 2017.06.20.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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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의 가장 대표 저서인 '전체성과 무한'을 이해하기에 가장 좋은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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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에마뉘엘 레비나스 강의를 들었다. 전공은 아니었지만 당시 철학 관련 잡지들을 많이 탐독했는데 가장 많은 관심을 받고 있던 철학자 중 한 명이라서 마침 그에 대해 강의를 한다기에 듣게 된 것이었다. 원서 강독이었는데, 물론 불어는 아니고 영어로 번역된 것이었지만, 어쨌든 교재가 된 책이 바로 레비나스의 가장 대표적인 저서라고 할 수 있는 '전체성과 무한'이었다. 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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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에서 에마뉘엘 레비나스 강의를 들었다. 전공은 아니었지만 당시 철학 관련 잡지들을 많이 탐독했는데 가장 많은 관심을 받고 있던 철학자 중 한 명이라서 마침 그에 대해 강의를 한다기에 듣게 된 것이었다. 원서 강독이었는데, 물론 불어는 아니고 영어로 번역된 것이었지만, 어쨌든 교재가 된 책이 바로 레비나스의 가장 대표적인 저서라고 할 수 있는 '전체성과 무한'이었다. 레비나스는 유태인이고 그 자신 독일 나치의 피해자였다. 그는 2차 대전 때 독일과 싸우기 위해 참전했다가 포로로 잡혔고 그의 가족은 나치에 의해 학살당했다. 그 누구보다 파시즘의 잔혹성과 괴물성을 몸으로 체험한 자였다. 


 그는 철학자였기에 어째서 인류에게 이런 괴물 같은 파시즘이 생기게 되었나에 대해 감정적으로 반응하기 보다 이성적으로 다가갔다. 그것을 만든 문명 근원에 있는 것을 파악하려 했던 것이다. 그는 이미 전쟁 전에 히틀러에 대해 철학적으로 고찰한 바가 있었고, 참전은 보다 본질적인 차원으로 그를 다가서게 했다. 그래서 그는 포로로 있던 중에 하이데거 존재론을 비판하는 '존재에서 존재자로'를 썼다. 하이데거는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에게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레비나스는 그 책에서 존재가 아니라 존재자가 철학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썼다. 그에게 존재란 개별적 존재의 소중함을 쉽게 지워버릴 수 있는 전체주의의 장막으로 보였다. 존재자 너머에 있는 존재에 신경쓸수록 존재자는 시야에서 멀어지고 그만큼 무시하기 쉬운 대상이 되어버릴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독일의 나치와 그들이 일으킨 2차 대전은 그런 존재론 중심이 가져온 비극이었다.


 그 비극의 양산과 반복을 막기 위해서라도 존재가 아닌 존재자 중심을 지향할 필요가 있었다. 그가 존재론 보다 개별 존재자들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윤리를 더 우위에 둔 것은 그 때문이었다. 현실의 비극이 가지게 만든 신념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또한 그리스 이후 오래도록 굳건히 정립되었던 형이상학 전체에 대한 저항이자 도전이기도 했기에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1961년, 그의 나이 55세에 그는 비로소 존재자와 윤리를 중심으로 한 자신의 철학 체계 전반을 확립하는데 바로 그것을 보여주는 책이 '전체성과 무한'이었다. 그러므로 '전체성과 무한'은 그의 대표작이 아니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의 모든 철학적 개념을 허물고 새로운 의미로 다시 정립하는데, '타자와 욕망'의 저자 문성원도 누누히 강조하는 바이지만, '전체성과 무한'은 난해하다. 무한이 나오고, 타자가 나오며, 향유와 욕망이 등장하는데 지금까지와는 다른 차원으로 접근해야 하기에 쉽지가 않은 것이다. 강의를 들었을 때도 힘겨웠던 기억이 난다. 강의를 듣고나서 그것을 제대로 소화하기 위해 거기에 대한 책들을 많이 찾아 읽었던 기억도. 그래도 뭔가 신선한 접근이라 흥미를 잔뜩 불러 일으켰다. 거기다 올바른 접근으로 여겨져 더욱 빠져들게 되었었다. 이제 다시 가 볼 수 없는 과거의 기억이 되어버렸지만.


 '타자와 욕망'이 발간되었을 때, 반가웠던 것은 이 책이 바로 '전체성과 무한'을 해설해주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내겐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는, 그렇지만 한 번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전체성과 무한'에 대해 쉽게 설명해준다니 관심을 갖고 읽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다 문성원이라는 저자는 '전체성과 무한'을 번역한 장본인이 아닌가. 저자에 대한 신뢰도 있기에 당장 찾아 읽었다. 분량 또한 모두 163페이지로 부담이랄 게 없었다.


 어려운 '전체성과 무한'에 대해 설명하고 있지만 아주 쉬운 책이다. 대중의 눈높이에 딱 맞췄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저자 자신의 경험까지 풀어서 레비나스란 철학자가 철학사에 있어서 어떤 의미인지 왜 그가 존재 보다 윤리 그리고 타자에 대한 책임을 우선 강조하는지 그리고 그의 철학은 과연 어떤 것인지 아주 잘 설명하고 있었다. 덕분에 나라는 존재 중심이 아니라 타자라는 관계 안에서 그것에 윤리적 책임을 지는 주체가 어떻게 형성되고 자아를 사회에 더 길들이게 만드는 욕망을 보다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켜 타자와의 공존 속에서 무한의 미래를 열어갈 수 있도록 할 수 있는지 원활히 이해하게 되었다. 이런 내 경험에 기대어 더욱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레비나스에 대해 관심이 있고 그의 철학 전반에 대해 어느 정도 체계를 잡고 싶으면 '타자와 욕망'부터 잡는 게 좋을 것 같다고.






l****1 2017.06.24.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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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타자의 공존을 위한 레비나스의 철학 쉽게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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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마뉘엘 레비나스는 1906년 리투아니아에서 태어나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여기서 그는 하이데거와 후설의 철학을 배우고, 모리스 블랑쇼를 만나 교류했다. 이어 1930년 프랑스에 귀화하였고, 2차 대전에 참전하여 포로 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때의 경험은 그의 철학과 사상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레비나스는 “나치에 대한 공포와 기억이 나를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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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마뉘엘 레비나스는 1906년 리투아니아에서 태어나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여기서 그는 하이데거와 후설의 철학을 배우고, 모리스 블랑쇼를 만나 교류했다. 이어 1930년 프랑스에 귀화하였고, 2차 대전에 참전하여 포로 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때의 경험은 그의 철학과 사상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레비나스는 나치에 대한 공포와 기억이 나를 지배한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1961년 그에게 명성을 안겨준 전체성과 무한이 출간되었다. 전체성과 무한은 크게 4부로 구성되어 있다. (동일자와 타자, 내재성과 경제, 얼굴과 외재성, 얼굴 너머)

레비나스가 말하는 욕망은 자크 라깡이 말한 욕망과 다르다. 라깡에 따르면 자아는 타자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면서 자아를 소외시키지만, 레비나스의 욕망은 자아를 뛰어넘어 타자와 관계를 맺고 나와 타자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다. 이는 곧 자아의 한계, 폐쇄적 '전체성'을 극복하는 길이기도 하다.

 

 

레비나스는 인류가 전체주의와 전쟁으로 맞이한 폭력의 시대를 극복한 철학적 대안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가 말하는 타자는 나를 지배하는 강자가 아니라 연약하고 헐벗은 자들이며, 낯선 ‘얼굴’로 다가오는 ‘무한’한 존재이다. 그래서 우리는 폐쇄적인 울타리(전체성)를 뛰어넘어 타자를 환대하고 껴안아야 한다는 것이다.

 

부산대 철학과 문성원 교수의 해제는 레비나스의 전체성과 무한을 새롭게 읽게 해준다. 독자는 이 책을 통해 인간성이 상실되는 물질 문명의 시대를 맞아 나와 타자가 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위한 철학을 세우고자 했던 레비나스의 깊은 매력에 흠뻑 빠져들 것이다.

YES마니아 : 로얄 h*******c 2017.06.17.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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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남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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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와 욕망>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전체성과 무한> 읽기와 쓰기 문성원 지음 | 현암사   철학은 어렵다. 하지만 왜 어려울 것일까.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아서 일 것이다. 우리가 사용해본 적 없는 ‘사고의 근육’을 써야하기에 서투른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나이가 들어가면서 체력이 달리는 것을 느끼게 되지만 동시에 내 삶의 경험치가 늘어나면서 과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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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와 욕망

에마뉘엘 레비나스의전체성과 무한읽기와 쓰기

문성원 지음 | 현암사

 

 철학은 어렵다. 하지만 어려울 것일까.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아서 것이다. 우리가 사용해본 없는 사고의 근육 써야하기에 서투른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나이가 들어가면서 체력이 달리는 것을 느끼게 되지만 동시에 삶의 경험치가 늘어나면서 과거에 이해되지 않았던 것들이 수긍할만하다는 생각이 드는 일들이 늘어난다. 철학도 마찬가지 것이다. 우리의 삶이 녹녹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 나의 보잘것 없음을 느낌과 동시에 내게 익숙하지 않은 철학서를 만나도 조바심을 내지 않는 덤덤함이 생기는 것은 분명 나에게만 해당하는 점은 아닐 것이다.

     이번에 읽게 타자와 욕망 다르지 않은 것같다. 책이 다루는 책은 나에게도 생소한 에마뉘엘 레비나스라는 철학자의 1961 출간 서적이며 그의 번째 주저라고 불리는 전체성과 무한이다.  그리고 저자인 문성원 교수 또한 레비나스의 책은 읽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레비나스의 원전을 읽고 저자의 관점에서 이해한 레비나스 것이므로 타자의 욕망 또한 나에게 쉽게 다가오지 않을 있겠다. 너무 기대와 조바심은 잠시 제쳐두고 레비나스는 어떤 삶을 살았는지 우선 궁금해진다. 인간이란 무릇 어느 특정 장소와 시기에 살았던 배경이라는 맥락을 제외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우선 레비나스의 삶을 간단히 따라가본다.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1906 리투아니아의 유대인 집안(책방 운영) 장남으로 태어났다고 한다. 10 후반인 1923년에 가족을 떠나 프랑스에서 철학공부(프랑스 철학, 후설의 현상학 ) 시작하게 되는데, 20세가 되는 1926 평생의 친구가 되는 작가이자 사상가인 모리스 블랑쇼를 만나게 된다. 70년에 가까운 지기를, 그것도 친구가 모두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거목을 오랜 친구로 지낸다는 것만 해도 크나큰 자산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후 레비나스는 1928 독일로 가서 후설과 하이데거의 강의를 직접 듣게 된다. 철학의 거장은 레비나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철학자라고 하며, 특히 하이데거는 레비나스에게 있어 거대한 존재이자 넘어야할 산이었다. 그만큼 평생을 하이데거의 영향으로부터 온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 유학시절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 레비나스는 1933 프랑스 군인으로 2 세계대전에 참전하기도 한다. 포로가 되어 수용소 생활을 하게 레비나스는 이후 전쟁을 통해 살아남게 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리투아니아에 있던 남동생을 비롯한 가족이 나치에 의해 학살을 당하고 만다. 레비나스에게 기억은 평생 지워지지 않고 지녀야만 했을 깊은 상처였을 것이다.

 

나의 삶에 대한 기록은 나치 공포에 대한 예감과 그에 대한 기억이 지배한다.”(29)

레비나스의 말을 살펴보더라도 말로는 형용하기 힘든 충격과 두려움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리는 타자에 응답해야 한다. 응답해야 함이 우리의 책임을 이룬다.”(28)

라는 그의 말은 어쩌면 우리에게, 나아가 인류에게 절실히 요청하는 레비나스의 강렬한 호소이자 부름이 아니었을까?

     레비나스의 저서에 대한 문성원 교수의 책만을 통독하고 레비나스의 철학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는 것은 스스로 위험한 일인 것을 안다. 하지만 레비나스가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했을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고 그의 책을 읽기만 하는 것은 또한 얼마나 다양한 오독의 가능성을 내포하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신중하면서도 결국 스스로 나아가야하기에 대상을 제한하여 시도해보려고 한다.

우리의 삶은 타자와의 만남에서 시작된다.”(28)

     나는 문장이 레비나스 철학의 중요한 출발점이자 전제가 되지 않을까 감히생각해본다. 내가 아닌 존재에 대한 인정과 인식은 평범한 인간에게 하나의 크나큰 사건일 있을 것이다. 결국 서양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기독교에서도 결국 이웃’, 타자 나와 동등한 자격을 지닌 대상으로서 인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레비나스는 그러한 서양 사상의 맥락에서 나와 타자의 접점(만남) 매개로 우리의 삶이 비롯된다고 말하는 것일게다.

     그렇다면 우리는 타자 응답해야 한다. 응답해야 함이 우리의 책임을 이룬다.”(28)라는 레비나스의 언급은 어쩌면 우리에게, 나아가 인류에게 절실히 요청하는 레비나스의 호소이자 부름일 것이다. 레비나스에게 있어 타자 나와 동일한 차원에 있지 않은 오히려 연약하고 헐벗은 ’(32)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성원 교수는 연약하고 헐벗은 원형으로서 예수를 언급하기도 한다. 바로 서양 사상에서 기독교가 얼마나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지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레비나스의 경우, 그는 20세기 초에 태어나 20세기 말에 사망하여, 20세기의 수많은 비극을 몸소 겪은 장본인이기도 하다. 유럽에 거주하던 유대인에게 20세기 전반의 시기가 갖는 의미는 지대하다. 나치의 시대를 관통한 잔혹의 시기를 목도하고 경험한 레비나스가 타자 동일자 대해 우위와 우선성을 강조한 이유는 충분히 수긍할 있을 같다.

     동일자를 우선시하고 확장하고자 하는 경향이 동일자적 내부에서는 가혹한 경쟁을, 동일자 외부에 대해서는 동일화에 따른 복속 아니면 배제와 제거라는 폭압을 낳았다는 것이다.”(34)    

     우수한 아리안들만의 국가 건설하려했던 나치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집단의 전체주의적 특성과 타자 유대인에 대한 학살도 설명해줄 있는 진술이다. 레비나스에겐 아마도 남동생을 포함한 자신의 가족이 나치에게 할살당하게 되었는지 이유를 절실히 묻고 대답을 구하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저자인 문성원 교수는 이에 레비나르스를 읽을 놓쳐서는 안될 초점을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타인을 살해하고 타인에게 고통을 가했던 20세기의 비극적 상황, 거기에 대해 하이데거의 철학을 위시한 당시까지의 철학이 무력하고 무책임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레비나스는 이유가 인간의 비참함에 대한, 인간의 얼굴 대한 외면에 있었다고 생각했다. ”(53)

     레비나스는 인간의 얼굴을하고 호소하는 타자에 반응하는 것은 우리의 당면과제이자 책임이라는 것이다. 결국 그는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윤리 존재 우선하는 1원리로 삼는다고 이해해볼 있다. 달리말하면 문성원 교수의 표현대로 레비나스의 철학은 자아중심적 한계성(동일자의 확장 욕구) 벗어나 타자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라고 이해할 있겠다. 좀더 순화하여 표현해보면 우리는 어떻게 남과 더불어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윤리 레비나스는 중심 화두로 삼고 있다. 레비나스에게 윤리란 타자와의 관계에서 성립하며, 타자와의 관계는 모든 이해(理解) 해석에 우선하는원리가 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레비나스에게 윤리 시대적 명령이자 호소였을 것이다. ‘ 존재는 타자와의 관계에 의해 비롯되고 의미를 가질 터인데, 이는 저자가 레비나스 철학의 고유한 특색으로 낯섦에 대한 관심과 감수성 언급하는 근거가 된다고 있다. 이는 이성에 기반한 인식 이전에 타자를 받아들이는 감성(감수성) 우위에 두는 인식이 먼저가 아니라 반응이 먼저다.”(28)라고 하는 표현에서도 재확인되고 있다.

 

영화 샤인 Shine’에서 보이는 타자’, ‘환대’, 그리고 동일자의 확장

     며칠 국내에 개봉한 20년이 영화 샤인 어느 극장에서 다시 보면서 레비나스 철학의 기본 개념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영화는 오스트리아의 어느 구역에 살았던 유대인 가족(헬프갓 가족)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 ‘다음에 일은 우승하는 일이다.라는 신념에 가까운 고집으로 아들 데이비드의 피아노를 가르치는 아버지 피터는 레비나스가 사용한 용어로 표현하자면 동일자의 확장 꾀하는 존재이다. 피터의 이러한 고집은 영화에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유럽에 사는 20세기 초의 유대인으로서, 나치의 그림자와 이로부터 생존한 정황을 암시하고 있다. 고집스러운 아버지의 신념과 절박한 생존본능 그리고 음악을 하지 못한 자신의 과거에 대한 오랜 결핍으로 인한 욕망을 아들에게 폭력적으로 투사하면서 문제는 생겨난다. 자신의 욕망을 아들에게 투사하며 유지되는 아들과의 인간적인 관계는 동일자를 우선시하는 역학관계의 구조를 그대로 보여준다. 주인공 데이비드의 아버지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아들에게 결국 동일화에 대한 복속을 강요하며, 이에 따르지 않고 런던의 영국왕립음악원으로 유학을 가버린 아들에 대한 배제와 제거의 기작을 아울러 보여주고 있다. 틈날 때마다 자신만큼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는 없음을 주지시키는 데이비드의 아버지는 명목상 안정을 의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안전지대 놓이지 못한 아들(타자)’에게 동일자의 폭력은 아들에게 있어 죄책감과 수치심을 평생토록 유발하며 트라우마를 남긴다. 우리 사회의 인간 관계, 특히 안락하게 보이는 가족이라는 제도와 테두리 속에서 유지되는 건강하지 못한 인간관계가 있는 파괴적인 결과의 모습을 찾아볼 있을것이다.

안정과 안락을 위해 쳐진 테두리들이 배타적인 것으로 공고해질 동일자의 폭력은 일반적인 것이 된다.”(36)     

   책의 저자인 문성원 교수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 또는 예방할 있는 윤리로서 환대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환대에 대해 칸트가 사용한 조건적, 계산적 환대 비해 레비나스의 환대 무조건적 환대임을 구분하여 설명해주고 있다. 달리 말하면 나는 타자가 이방인이고 헐벗은 자이기에 호소에 응답하여 타자를 환대할 따름이다.’(37)라는 것이다. 20세기의 가운데서 인간성의 극적인 스펙트럼을 목격한 철학자로서 레비나스의 생애를 책을 통해 이해하고나니, 이런 무조건적인 환대의 호소를 조금은 수긍하게 된다.

     영화 샤인에서 아버지라는 울타리로부터 배제된 주인공 데이비드는 정신병원에서 일정기간 보낸 병원에 방문한 과거 데이비드의 팬의 도움으로 병원을 나오게 된다. 어느 비를 맞으며 돌아다니다가 들어간 레스토랑으로부터 받은 환대 데이비드에게 새로운 삶을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라고 해석해볼 수도 있겠다. 데이비드를 옆에서 돌봐주는 사람을 만나고, 데이비드의 재능을 알아보고 인간적인 돌봄을 제공하는 이들은 어떤 점에서 보면 무조건적인 환대 행위를 실천한 사람들이 아닌가. 데이비드가 중년의 나이에 결혼을 하게되고, 다시 재기하여 연주무대에 서는 장면은 그래서 더욱 감동을 주는 같다. 있을 법하지 않은 실화에 바탕을 타자에게 마음이 따뜻한 이들이 제공한 무조건적인 환대 새로운 사람의 삶을 꽃피게 했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을 돌아볼 , 있을 법하지 않은 환대행위가 가능했다는 데에 더욱 감명을 받게 되었다. 

 

책을 덮으며

    문성원 교수의 타자와 욕망 읽으며 처음으로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철학에 조금 가까워진 같다. 책을 읽으며 순간 순간 들었던 느낌과 불안정한 나의 이해를 다시 돌이켜보면, 레비나스의 철학은 자아중심적 한계성(동일자의 확장 욕구)’ 벗어나 타자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라고 이해할 있다. 달리 표현해보면 레비나스의 철학은 결국 우리가 어떻게 남과 더불어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윤리 고찰하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흔히 도덕이라고 하는 것과 구분지어 타자와의 관계에서 고려되는 윤리 전통적인 철학에서 중요시되는 존재론 앞선다는 것이다.

윤리란 타자와의 관계에서 성립하는 것인데, 타자와의 관계는 모든 이해(理解) 해석에 우선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레비나스에게 있어 윤리 시대적 명령이자 호소였을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피할 없는 책임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달리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이 우리에게 호소한다.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레비나스의 철학은 라는 존재가 타자와의 관계에 의해 비롯되고, 여기에서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는 점을 다시 분명히 일깨워주는 철학이다. 내가 이해한 바가 틀리지 않다면 문성원 교수도 책에서 레비나스 철학의 고유한 특색으로서 낯섦에 대한 관심과 감수성 언급하는 대목이 바로 점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믿는다.

     책을 다시 덮으며 익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처음 지나쳐버린 페이지의 문구를 다시 음미하면서 마무리하겠다. 우리의 삶이 신자유주의적인 맥락에서 더욱 공고히 파편화, 원자화되어가는 지금, 각자의 가슴에 심어볼 만한 씨앗으로서 레비나스의 호소를 기억해둘만하지 않을까.

  

우리가 알고 가진 것이

바깥의 무한과 닿아 있음을 깨닫고

타자성과 외재성에 귀를 기울이는 욕망 필요하다.

이것이 진정한 욕망의 혁명이다.

  

    

YES마니아 : 로얄 n****o 2017.06.20.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