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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정문에 새겨진 조형물의 의미를 아느냐?” 대학 시절, 수업 도중 교수님께서 던지신 질문이다. 글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사실 정문에 어떤 조형물이 있는지 누가 보고 다닌단 말인가. 이런저런 구차한 이유들 때문에 그저 지나치기 바빴을 뿐. 대학 정문은 그저 나에게 ‘보는 것’이 아닌, 눈에 ‘보이는 것’일 뿐이었다. 다행(?)인 것은 강의실에 앉은 학생들 모두가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듯 했다. 그 누구도 선뜻 손을 들거나 입을 떼지 못했다. 정적. 착잡한 정적의 끝에 입을 뗀 사람은 결국 다시 교수님이셨다. 하지만 기다리던 대답 대신 귓가로 날라든 것은 새로운 질문이었다.
“유레카를 외치던 날, 목욕탕의 물이 넘쳤던 경험은 아르키메데스에게 처음이었을까? 남들은 왜 같은 것을 보고도 부피와 연관 지어 생각하지 못했을까?” 섬광이 머릿속을 스쳤고, 명쾌함이 그 뒤를 밝혔다.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매번 드나드는 정문을 유심히 본적도, 반복되는 일상에 깊은 관심을 가져본 적도 없었다는 것을. 창의성은 가까이에 있었다. 무심코 지나치는 것에 대한 관심, 당연시 여겨지는 것에 대한 호기심이 창의성의 시작이었다. ‘발견’이 창의성의 시작이었던 셈이다.
창의성에 한 걸음 다가갔다는 기쁨도 잠시, 보다 구체적인 고민거리들이 나를 찾아왔다. 발견을 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주변을 잘 봐야 한다는 건 알겠다만 무엇을 어떻게 보는 것이 잘 본다는 것이란 말인가. 나에게만 창의적인 것을 넘어 모두에게 창의적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주변의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한 창의성도 창의적이라 할 수 있는가. 창의성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등등.
위와 같은 고민의 과정 속에서 ‘인문학으로 광고하다’란 책을 접한 것은 일종의 행운이었다. 내 궁금증에 대한 명쾌한 해답이, 때로는 비유적 단서가 책 여기저기서 튀어 올랐다. 창의적이기 위해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 방안이 여러 가지 눈에 띄었고, 내게 최적화된 방안을 그 중에서 채택할 수 있는 영광도 누렸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소통법은 그야말로 보너스였다. 그간의 고민에 보상이라도 받듯, 창의성과 연관된 지식의 풍년은 책장을 넘기는 내내 나를 미소 짓게 했다.
그렇게 창의성에 대해 고민하고, 처음 ‘인문학으로 광고하다’를 읽은 지도 어느새 몇 년이 흘렀다. (금번 책의 구매는 지인 선물을 위함이다) 그래서 과연 나는, 이 책을 읽고 창의적이 되었나? 글쎄, 저자 박웅현과 같은 대답을 고수할 수밖에 없겠다. ‘간절히 바라기는 하되 알 수는 없다.’ 무책임한 대답회피가 아니다. 아직 불가해한 양자역학의 원리를 ‘알 수 없다’고 하는 것과 동일한 맥락의, 고심 끝에 내뱉는 ‘알 수는 없다’이다. 허나 한 가지 사소한 변화는 있다. 바로 이전보다 내 인생의 시간이 천천히, 그리고 느리게 흐른다는 것. 여기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어느 심리학자의 말이 틀리지 않다면, 즉 나이 들수록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이유가 익숙함에 파묻혀 세상의 신비로움을 더 이상 발견 못하기 때문이라던 그의 말이 틀리지 않다면, 이는 창의성을 향한 긍정적 변화가 아닐까. 세상의 신비로움에 경탄할 줄 아는 ‘발견의 능력’ 이야말로 창의성의 원동력이니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