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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사학사'라는 제목보다 외려 부제가 이 책의 성격을 더 잘 드러낸다고 할 수 있겠다. 저자는 단순히 지난 시대의 사학사를 소개하는 것을 넘어서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공세 속에서 '역사학은 끝났는가'라는 화두를 중심으로 지난 시대의 역사학을 고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19세기 랑케로 인해 하나의 전문 분과로서 출현한 고전적 역사학은 그 특유의 형이상학적 가정과 관념성, 정치위주의 서술, 그리고 무엇보다 랑케 스스로 '실제 그것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보여주는데 만족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어떤 역사가도 그 자신이 한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인 이상 '판단'하는 것을 회피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위기를 맞았고, 이러한 고전적 역사학의 위기는 당시 각광받던 사회과학에 의해 '구제'된다. 이러한 역사학과 사회과학의 결합은 독일의 사회경제학파와 미국의 신사학파에 의해 조악하게나마 그 모습을 보이다가 프랑스의 아날학파, 마르크스주의 사학파, 독일의 역사적 사회과학 학파에 의해 만개하지만 이는 60년대 말 크나큰 도전을 받게된다. 파시즘과 스탈린주의라는 야만과 이어진 베트남전의 부조리, 관료제의 모순은 계몽의 기획 자체에 의문을 품게 만드는 분위기를 조성했고 아울러 서구 중심, 근대적 합리주의 중심, 거대담론 중심의 사고의 부당함과 야만성이 재조명되면서 등장한 포스트모더니즘 사조는 역사와 문학의 경계를 불분명하게 만듦으로써 이전의 역사서술 방식 전반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역사적 분석과 이야기가 동일하며 언어가 실재를 반영하기보다는 구성한다고 보는 언어학적 고찰에 기반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장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내비친다. 역사학은 애초 그 대상자체가 존재하지 않기에 객관성을 지니지 못한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판에 대해 어찌되었건 역사가들은 사실과 관련하여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고,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은 결과적으로 정직한 학문과 선전, 선동을 구분하지 못한 '목욕물 버리느라 애까지 버린'우를 범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포스트모던의 역사학을 해체하고자 하는 극단적인 비판은 받아들이지 않지만, 포스트모던의 '역사학'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를 받아들여 지난시대의 역사학의 단선적 구성방식이나 협소한 문제의식에서 벗어나 역사학의 범위를 더 넓혀 더 풍요롭고 더 다원적인 역사학을 탐구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때문에 저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산물이라 할 수 있을 '신문화사'에 대해서는 의외로(?) 굉장히 호의적인 입장을 내비치는데, 이는 저자가 신문화사의 문제의식이 어떻건간에 결과적으로는 역사학의 틀안에서 역사학을 더 다양하고 풍요롭게 만드는데 기여했다고 보고있기 때문인 듯 싶다) 사실 따지고보면 포스트모던의 근본에 대한 문제의식은 '근본주의적'이고 굉장히 '관념적'이라는 데에서 랑케의 고전적 역사학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이는 포스트모던의 근간이 된 문학이론이나 랑케의 역사학이 애초 상아탑 속의 고답적인 문제의식에서 시작되어 실재를 보지 못한 점도 없지 않기에 그런 것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계몽이 그 이상적인 측면만큼이나 야만적인 측면을 갖고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러한 이중성은 인간이 하는 사유인 이상 포스트모더니즘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단적으로 '홀로코스트'마저 부인하고야 마는 포스트모던의 문제제기는 모더니즘보다 얼마나 덜 야만적인지 묻고싶다) 어찌보면 포스트모던은 인류(엄밀히 말하자면 '서구문명')의 숱한 실패에 대한 책임회피이고,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지적 유희는 아니었을까? 반성과 고찰을 넘어서 계몽을 '부정'해버리는 것은 무책임과 무능에 대한 변명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계몽의 단죄를 넘어 계몽을 부정하는 것은 야만일 뿐이라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지고보면, 역사학이야말로 철학과 함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의 근원을 해명해 줄 수 있는 몇안되는 학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 사학의 태동과 발전과정을 서술하고 현 시점에서 역사학을 복원하고 있는 저자의 시도는 매우 소중하다. 더군다나 포스트모더니즘이 '60년대 말의 사회적 운동에 의해 적극적으로 사유된 서구에 비해 '90년대 사상의 공백기에 수동적으로 수용되어-그 급진적인 언술에도 불구하고-보수적이고 다소 퇴폐적(?)인 색체마저 띠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 있어 저자의 계몽주의에 대한 '의지'는 다시한번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20세기'사학을 다루고 있다는 본서는 '21세기'우리 사회에 여전히 유의미하다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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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사학사』의 저자인 '조지 이거스'는 책을 읽는 내내 나를 놀라게 했다. 책제목에서도 느껴지듯이 '20세기 사학사'를 서술하였다는 자체가, 그의 방대한 지식과 식견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의 지식과 식견을 넘어 나를 더욱 놀라게 했던 것은 19세기 역사주의 역사학에서부터 20세기 후반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도전?)을 받은 역사학에 이르기까지의 역사학의 길고도 복잡한 물줄기를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차분하게 거슬러 서술하고 있는 것이었다.
'조지 이거스'가 이 책을 쓴 목적은 조각조각 흩어져 있던 그 동안의 역사학의 조류들의 파편을 모아 그 조각을 맞추는 속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과 과학적·합리적 객관성의 학문으로서의 역사학의 위기를 방어하기 위해서였다. 맺음말에서의 '계몽을 대체하는 것은 야만일 뿐이다'라는 구절은 '이거스'의 역사학에 대한 신념을 잘 드러내고 있다. 역사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논의가 가능한 공간이라는 것, 더불어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의 역사학에서의 공헌을 분명히 하는 속에서 계몽주의적인 유산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거스'가 이야기하는 내용의 반도 소화하기가 힘드는 것이 사실이기에 나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이 자신이 없다. 그러나 짧게나마 내 생각을 정리한다면, 여전히도 '합리적'이며 '실제적'인 역사학은 필요하며, 아니 역사학은 '합리적'이며, '실제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텍스트는 텍스트에 불과하다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이야기는 솔직히 말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텍스트에 담겨 있는 역사성과 물질성을 어찌 폄하할 수 있는가. 또 미시사도 좋고 생활사도 좋다. 그러나 역사는 분명히 구조가 있으며, 그러한 구조에 우리 인간과 역사는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인상깊은구절] 계몽주의에서 아우슈비츠에 이르는 길은, 아도르노나 푸코가 그려냈던 것보다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더 복합적이며, 근대주의의 적대자들이 지녔던 반근대주의에 많은 것을 빚지고 있었다. 20세기 역사는 우리에게 인권과 합리성에 대한 계몽주의 개념들이 지닌 애매성에 대한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포스트모더니즘 사고는 유토피아주의와 진보의 개념들에 경고를 보냄으로써 현대의 역사적 논의에 본질적인 공헌을 하였다. 그렇지만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계몽주의적 유산을 거부하고 폐기하도록 해서는 안 되며, 그 대신 그 유산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 이것 역시 이 책에서 검토했던 수많은 새로운 사회사와 문화사의 의도이기도 하였다. 비록 계몽주의는 단죄되었을지언정 그것을 대체하는 것은 야만일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