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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대표작인 <분노의 포도="">를 다소 지루하게 읽은 탓에 다른 작품들에 쉽게 손이 가지 않았는데, 이 책은 분량도 적당하고 중간중간에 그림도 섞여 있어서 발견하자마자 단숨에 읽었다. 한번 잡으면 다 읽을 때까지 결코 손을 놓을 수 없는 명작이라고 써 놓은 뉴욕 타임즈의 평을 보았는데 정말 그러했다.
사건 보다는 레니와 조지라는 두 인물에 관심이 모아지게 된다. 레니는 덩치가 크고 힘은 무척 세지만 토끼와 강아지와 생쥐를 좋아하는 여린 마음을 갖고 있는, 지능이 떨어지는 인물로 묘사된다. 반면에 조지는 감성은 없지만 사리에 밝은 인물로 아둔한 레니를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한다. 어렵게 일자리를 얻어 개인의 소유지를 갖게 될 소망을 품고 열심히 일하지만, 레니의 본의아닌 실수로 비극적인 결말로 작품은 끝난다. 노동자들의 힘겨운 인생에 동정을 갖게 되지만, 그보다는 착한 성품을 지닌 레니가 타인과 어울릴 수 없는 현실과 자신의 손으로 친구를 죽여야 했던 조지의 처지에 깊은 슬픔을 느낀다.
생쥐를 호주머니에 넣기도 하고, 강아지를 쓰다듬는 것을 좋아하는 레니의 모습은 그의 죽음을 더욱 슬프게 하는 요소이다. 결국 그런 습관으로 여자를 붙잡다가 자기도 모르게 목을 조르는 장면은 본질적인 인생의 비극이 필연적으로 죄악된 행동에 의해서만은 아닌 것임을 보여준다. 존재 자체의 불완전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의지를 들여도 인간은 선한 행실만을 할 수 없고,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도 죄를 짓게 된다. 그 죄의 한 터럭도 희게 할 수 없으며, 그것을 이해하고 용서해주는 권세도 인간에게는 주어져있지 않다. 자신의 친구를 위해서 총을 겨누어야하는 것도 세상이 만들어 놓은 인간의 연약함이며, 이들에게 무자비했던 지배인의 모습도 인간의 추하고도 이기적인 본성을 보여준다. 조그만 땅을 사고 토끼를 기를 것을 기대하며 강 건너편을 바라보고 있는 레니의 마지막 모습을 생각하면서, 그렇게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과 그를 품을 수 있는 사회와 타락한 인간성의 회복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져본다.
원제는 <생쥐와 인간="">인데 <두친구>로 표현한 것은 레니와 조지의 우정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인 것 같다. 역사속에는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이 진실한 감동을 전해주고, 문학속에는 허클베리핀과 톰소여의 익살스런 우정이 동심의 세계로 초청한다. 여기에 레니와 조지의 또 다른 우정이 있으니, 외면적으로 결코 사랑스럽다 할 수 없는 대상을 향한 희생이 동반된 것이기에 진정 가치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개인으로서의 인간의 존엄성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관계의 소중함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보기 드문 명작이라 여겨진다. [인상깊은구절] 조지는 말했다. "아니, 레니. 나는 화나지 않았어. 나는 이제껏 자네에 대해 화가 났던 적이 없고, 지금도 화나지 않았어. 이것만은 알아 줘." 이제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아주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조지는 권총을 움켜쥔채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레니가 애원하듯 말했다. "곧 시작하세. 곧 그 땅을 사도록 하자구" "그래, 곧 해야지. 나는 곧 해야 해.우리는 곧 해야 해" 다음 순간, 조지는 권총을 들어 꽉 붙들고 총구를 레니의 뒤통수 가까이로 가져갔다. 손이 심하게 떨렸다. 그러나 곧 그의 얼굴이 굳어지고 손도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그는 방아쇠를 당겼다. 총성은 산을 감돌아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왔다.두친구>생쥐와>분노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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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사람들은 누구나 많건 적건 친구를 가지고 살아간다 요즘 영화 덕분에 친구라는 말도 유행어 처럼 더 많이 떠도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오랜 된 친구들이 문득 보고싶어지기도 하고. 이 책 속의 두 주인공은 이렇게 오래된 친구들이다.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두 사람의 이야기 속에서 인생에서 만나는 숱한 사람들의 의미를 새삼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 볼 수 있었다. 이 책의 제목 아래에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두 친구의 우정 이야기'라는 글이 읽기 전과 읽은 후에 참 다르게 가슴에 느껴져왔다. 덩치만 크고 힘만 좋지만 판단력이 없는 레니 스몰과 작은 체구에 똘똘하고 차분한 친구인 조지 밀튼은 이곳 저곳을 떠돌면서 농장에서 일을 하는 노동자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작은 소망은 소박하고 따뜻하다. 가족도 없이 떠도는 그들에게 그 꿈의 의미는
그들의 인생에 있어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보물과 같은 것이다. 이 책 속에는 아픔을
가지고 매일매일을 버텨내는 사람들이 여럿 있다. 인간 관계의 소중함이나 배려로 연결된 관계가
아닌 그들의 관계는 동료로서의 소중함이나 친구로서와 애착도 없어 보인다. 그래서 이 두 친구가
함께 다니면서 서로를 의지하는 모습이 기묘해 보일 정도다. 소외된 사람들의 서러운 얘기들과 이루기엔 너무 먼 꿈에 관한 여운이 가슴을 아프게 했다.
곁에 누군가 머물러 준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의미가 있다는 말에 공감을 하면서 지나온 세월 동안
혼자이지 않을 수 있었던 것에 새삼 감사의 마음을 가져보았다. 친구란 나의 잣대로 이리저리 재어
보고 그것에 맞추려 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주는 것이 아닐까.... 매일 마주하는 일상의 사람들에 무심하게 지나치기 보다는 그들의 장점을 발견하고 이해함으로 조금만 더 상처입는 사람들이 적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옮긴이의 글처럼 슬픈 영화 한편을 본 것 같은 여운이 가슴에 남았다. [인상깊은구절] 그는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저 두 사람을 위해 채소를 가꾸고 접시를 닦는 일을 할 수도 있었을텐데." 그는 풀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귀에 딱지가 앉도록 익숙해진 말들을 내뱉기 시작했다. "서커스나 야구 시합이 있으면..... 우리는 구경을 가지..... 일 같은 건 팽개치고 가는 거야. 누구에게 허락받을 필요도 없지. 거기에는 돼지도 있고 닭도 있어..... 겨울이 오면 조그맣고 통통한 난로를..... 비가 오는 날엔..... 우리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지." 그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뒤돌아서 맥없이 헛간 밖으로 나가면서 그는 잘린 팔뚝으로 뻣뻣한 수염을 문질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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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포도, 에덴의 동쪽으로 유명한 작가 존 어네스트 스타인벡이 세계적인 소설가로서 명성을 얻게 된 이 작품- 두 친구, 원제는 생쥐와 인간 -은 소박한 자작농이 되는 게 꿈이지만 결국 그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비극적 결말에 이르는 두 노동자의 슬픈 우정을 다루고 있다. 사실 아직 분노의 포도나 에덴의 동쪽같은 대작도 읽지 못했지만, 우선 접근하기 쉬운 이 책부터 읽어보게 되었다. 작은 체구에 침착하고 영리한 조지 밀튼과 거대한 체구에 착하긴 하지만 영락없는 바보인, 이름과는 완전 딴판인 레니 스몰이 등장하고 이들은 어릴 때부터 붙어다닌 둘도 없는 친구이다. 악의는 없지만 레니가 항상 말썽을 피웠기 때문에 그 뒤치닥거리는 조지의 몫이었고, 그래서 항상 조지는 레니를 챙기면서 행동에 대해서 항상 주의를 시켰다. 그래도 레니는 부드러운 것들을 만지기 좋아하는 성격 때문에 생쥐나 작은 강아지를 만지다가 죽여 버리기 일쑤였고, 그것은 레니가 힘이 쎄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일들 중 하나였다. 두 사람은 돈을 모아 작은 농장에서 여러 가지 과일 나무와 동물들-특히 레니가 무척 좋아하는 토끼-을 키우며 사는게 소박한 소망이었다. 마지막으로 도망쳐 온 집에서는 레니가 그 농장주인의 딸의 빨간 옷이 부드러워서 만지려고 하다가 딸이 소리를 지르길래 입을 막다보니 레니가 겁탈하는 것처럼 되 버렸고, 그래서 다른 곳으로 도망쳐 오게 된다. 조지는 또 한번 더 쫓기면 토끼를 키우게 하지 못할거라는 말로, 주의를 준다. 새로운 농장에 와서 적응을 잘 해가고 있는 도중, 농장 주인 아들의 아내가 항상 농장 인부들에게 접근하고 꼬리를 쳤는데, 어느 날 조지가 없을 때 다가온 그녀와 레니는 이야기하다 그녀가 자기 머리칼 역시 부드럽다고 만져보라고 해서 만지는데, 여자는 소리를 지르고 레니는 그녀의 입을 막다가 목을 꺿어서 본의 아니게 죽이게 된다. 또 다시 레니는 조지 말대로 숨게 되고, 조지 역시 돌아와서 그 사실을 알 게 되지만 레니를 죽이지 말아달라고 농장 주인 아들 컬리 및 주변 인부들에게 말하지만 그들은 소용이 없다. 결국 풀숲에 숨어있던 레니에게 다가가 조지가 분명 소박한 자신들의 꿈은 사라졌음에 분명하지만, 레니를 용서하겠다며 토끼를 키우게 해주겠다면서 레니 뒷통수에 총을 가누어 죽이게 된다. 농장 인부들은 다가와서 잘했다고 하며 돌아가자면서 끝나 버리는데 조지의 마음은 참 착잡할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 작품은 1930년대의 미국 캘리포니아주를 배경으로 전혀 어울려 보이지 않는 두 사람의 끈끈한 우정과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인 줄 뻔히 알면서도 그 꿈을 가슴에 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회 현실과 인간 내면세계를 사실적이고 실감나게 그려낸 것 같다. "내겐 자네라는 혹이 딸려있지. 자넨 자네 밥그릇만 챙기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내 밥그릇까지 망가뜨리고 있어. 자네 덕분에 난 늘 이리저리 떠돌 수밖에 없지."라는 조지의 말을 통해서 레니의 본의 아닌 말썽으로 인해서 항상 뒤치닥밖에 할 수 없는 조지의 심정을 나타내고 있으며, 슬림이란 노새몰이가 "그는 좋은 친구야.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꼭 사려분별이 필요한 건 아니거든. 이따금 나는 그 반대라고 생각해. 정말 영리한 인간들 치고 좋은 사람은 없어."라고 조지에게 말하는 대목에서는 바보 레니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해줌을 알 수 있다. 또한 흑인이라고 천대받고 소외받는 마굿간에서 잠자는 크룩스라는 흑인이 "곁에 가까운 이가 하나도 없는 사람은 바보가 되지. 같이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건 중요하지 않아. 그저 같이 있어만 주면 되는거야."라고 레니에게 곁에 조지라는 친구가 있음을 부러워하는 듯이 말하는 부분을 통해, 레니와 조지의 우정을 엿볼 수가 있었다. 이 대사는 참 감동적인 대사라고 여겨진다. 결국 조지는 마지막에 레니와 도망치는 것을 선택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진한 우정'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리고 내 곁에 있어주고, 이야기 들어주는 얼마 안되는 친구들에 대해서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들로 인해서 내가 절대 바보가 되진 않을 테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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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누구나 현실의 세계에서 살고 있지만, 그 현실에 늘 만족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좋은 내일을 꿈꾸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바라는 더 나은 미래는 당장 현실에서는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비현실적인 세계에 속해 있다. 결국, 꿈꾸기를 통해 우리들은 현실에서 더 나은 비현실로 옮겨갈 수 있기를 바라는 셈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어서 우리가 비현실의 세계로 쉽게 이동할 수 있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비현실의 세계로 나아갈 수 없도록 곳곳에 보이지 않는 장애물을 설치한다. 현실의 그런 장애물때문에 비현실을 꿈꾸는 우리는 종종 길을 잃기도 하고, 상처를 입기도 한다. 그리고 현실에서의 고통이 계속되면 우리는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꿈꾸기를 포기하고 현실에서의 생활에서 만족을 얻으려고 한다. 꿈꾸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두 친구'의 주인공 조지와 레니는 꿈을 꾸고 있다. 그러나 두 친구의 꿈꾸기는 그 성격이 사뭇 다르다. 레니의 꿈꾸기는 이미 꿈의 형태가 비현실의 것과 맞닿아 있는 '완벽한 꿈꾸기'이다. 레니는 현실에 속해 있긴 하지만, 현실의 것들을 전혀 신경쓰지 않는 인물이다. 그는 현실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레니는 오직 자신의 꿈에만 열중하고 그것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애쓴다. 이런 레니와 현실이 충돌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당연한 결과지만, 레니가 현실의 것을 종종 기억하지 못함으로 인해 그 충돌에서 벗어난다.
조지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서 있는 인물로 비현실의 세계에 있는 레니의 손을 잡고 그와 같은 꿈을 꾸고는 있지만, 냉철한 이성때문에 현실의 장애물을 레니처럼 쉽게 보아넘기지 못한다. 따라서 조지의 꿈꾸기는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미완의 꿈꾸기'인 것이다. 그리고 '두 친구'의 작가는 현실에 속한 조지의 꿈꾸기가 레니와 같이 완벽한 꿈꾸기가 될 수 있느냐에 작품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한마디로 조지는 영리하고 레니는 바보이다, 조지는 이성적이고 레니는 유아적이다, 조지는 판단이 분명하고 레니는 순수하다, 그리고 조지는 현실적이고 레니는 비현실적이다. 조지는 그런 레니를 귀찮아 한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방해만 되는 레니를 조지는 차마 버리지 못한다. 레니의 완벽한 꿈꾸기와 그가 가진 순수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샐리너스 강가에서 두 친구의 사소한 말다툼 끝에 레니가 조지를 떠나려고 하자, 조지가 그를 말리는 장면에서 이 사실은 그대로 드러난다. 그리고 조지의 이런 태도는 현실에서 꿈을 버리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닿아 있다.
우리는 현실에서 꿈꾸기가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를 알면서도, 레니를 버리지 못하는 조지처럼 꿈꾸는 것을 버리지 못한다. 오직 꿈꾸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희망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지도 레니의 꿈을 비웃으면서도 혹시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는 희망때문에 자신도 레니의 꿈을 가슴에 품는 것이다. 흑인 마부 크룩스와 레니가 마굿간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통해 우리는 꿈꾸는 것을 억압하는 현실의 벽이 높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이 장면에서 레니는 크룩스에 의해 조지와의 관계를 끊임없이 의심받게 된다. 크룩스의 이러한 의심은 표면상으로는 친구들 사이의 우정을 의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현실이 조지와 레니와의 사이를 단절시켜 그들의 꿈을 소멸시키려는 장애물과 같다.
이 대화에서 레니는 일관되게 조지와 자신과의 관계가 확고하다는 것을 크룩스에게 인식시키지만, 크룩스는 그 둘의 관계가 상화간의 관계가 아닌 조지만의 일방적인 관계임을 환기시킨다. 이 장면을 통해 우리는 현실에서 꿈꾸는 것을 억압받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꿈은 변함없이 저기에서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지만, 정작 우리는 현실의 고통으로 인해 꿈의 목소리를 못 들은 척 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꿈과 멀어진다.
조지는 레니의 손을 놓아 버렸다. 조지가 그렇게 하도록 만든 것은 현실이었지만, 조지가 레니의 손을 놓음으로해서 레니는 영원히 비현실에, 조지는 영원히 현실의 세계에 귀속되었다. 레니 대신 캔디가 조지의 손을 잡으려 하지만 조지는 그것을 거부한다. 자신과 레니의 꿈이 얼마나 찬란하고 소중한 것이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조지는 캔디에게 이제부터 자신은 철저하게 현실적으로 살아갈 것이라는 얘기를 한다. 조지의 꿈꾸기가 현실에 의해 억압당하고 좌절된 후에 조지 스스로 꿈꾸기를 포기한 것이다. 마치 지금의 우리처럼.
'두 친구'의 작가는 독자에게 자신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인물들의 대화나 행동을 통해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작품에 대한 작가의 그런 태도는 독자를 더욱 쓸쓸하게 한다. 조지나 레니에 대한 동정이나 위로의 말도 없이 여전히 저기에서 그들을 묵묵히 지켜보고만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가는 또한, 꿈꾸기를 잊어버리고 있는 우리들을 그렇게 묵묵히 지켜보고 있다. [인상깊은구절] 조지가 조용히 말했다.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그것이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그 녀석이 하도 그 이야기를 듣고 싶어해서 이야기를 해 주다가 나도 차츰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 거지." |
| 1930년대 미국은 자본주의의 모순과 결함이 첨예하게 나타나던 시기였다. 시장 붕괴에 잇따른 세계적인 경제 공황은 무더기 실업자들을 배출해 냈고 극심한 인플레 현상으로 대다수 국민들이 고통과 절망의 나날을 보냈다. 가족간의 공동체 생활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던 봉건 사회의 몰락은 가족의 해체로 이어져 인간들을 고독과 소외의 한가운데로 몰아 넣었다. 소외가 인간을 얼마나 황폐하게 만드는지,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당시의 미국 사회에서 어떠한 비극적 결말을 맺는지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소설이 바로 '두 친구'이다. 하지만 스타인벡의 관심은 모순된 현실을 파헤치고 고발하는 그 자체에 있지 않다.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나타내고자 하는 부분은 바로 인간 내면의 솔직한 노출이다. 인간의 내면 세계를 실감나게 드러내는 데에는 현실의 대립적인 구도가 한층 효과적인 면이 있다. '두 친구'에 나오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소외되고 버림받은 존재이다. 농장을 떠돌며 막노동꾼으로 살아가는 조지와 레니는 물론이고, 한쪽 팔을 잃고 청소부로 살아가는 캔디 노인, 검둥이 크룩스, 신뢰가 밑받침되지 않은 채 살아가는 컬리 부부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해 줄 누군가를 끊임없이 갈망한다. 그들의 몸부림은 가학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환상과 허상을 좇아 헤매다 자포자기로 수그러들기도 한다. 조지와 레니가 선택한 방법은 둘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자유로운 공동체 생활이었다. 하지만 소박한 자작농을 꿈꾸었던 이들의 소망은 레니의 죽음이라는 비극으로 끝을 맺고 만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토끼의 털을 쓰다듬어 주거나 맥주 한 잔을 마실 수 있는 것이 전부였던 그들의 소박한 꿈조차 인정해 주지 않는 사회에 대한 작가의 냉정한 고발이다. 주제의 무거움에도 불구하고 '두 친구'에는 아름다운 풍경과 인간 심리에 대한 섬세하고 따뜻한 묘사가 들어 있어 잔잔하고 깊은 감동을 이끌어낸다. 특히 두 친구로 나오는 조지와 레니를 개성이 뚜렷하면서도 살아 움직이는 인물로 그리는 데 성공하고 있다. 조지와 레니가 자신들의 꿈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은 이 책의 압권이라 할 만하다. 현실의 도피처로, 레니를 달래기 위해 조지가 시작한 이 이야기는 어느새 레니와 조지 둘 다에게 유일한 희망이자 이상이 되어 버렸다. 레니가 조지를 무조건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레니는 조지에게 삭막하고 황량한 인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 주는 존재이다. 언뜻 바보와 정상인으로 보이는 이들의 기묘한 우정은 이렇듯 서로를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고 미래에 대한 꿈을 키울 수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레니는 정상인이 아니다. 좀 바보스럽고 모자란 친구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해타산이 없는 무조건적인 믿음과 사랑이 가능하다. 또 스스로 자기를 내세우거나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상대방의 존재가 그대로 투영된다. 크룩스나 컬리의 아내가 레니에게 자신들의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크룩스나 컬리의 아내가 필요로 했던 것은 단지 그들의 옆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존재였다. 하지만 레니의 이런 순수함만으로는 인간 사회에 적응하며 살아갈 수 없었다. 레니가 그 동안 방패막이가 되어 왔던 조지도 해결할 수 없는 살인 사건 속으로 빠져들자 조지는 스스로 이 순수한 친구 레니의 죽음을 선택한다. 레니의 죽음은 곧 조지의 꿈이 깨어지는 걸 의미한다. 이제 조지에게는 다른 노동자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삭막하고 황량한 인생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조지는 그것이 레니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늙고 힘없는 캔디의 개를 고통스러운 삶에서 해방시켜 주기 위해 누군가 총대를 멘 것처럼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