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르멘>에는 <카르멘>과 뿐만이 아니라 <콜롱바>가 실려 있다.
내가 상상하던 <카르멘>과 달리 책 속의 카르멘은 팜므 파탈이었지만, 그 느낌은 내가 이전에 카르멘에 대해 품고 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그것은 아마도 카르멘에게 푹 빠지다 못해 그녀와 자신의 사랑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그녀를 죽일 만큼 열렬했던 돈 호세의 시선에서 그녀를 바라보았기때문이 아닐까 한다. 돈 호세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카르멘은 무척이나 자유롭고 또 내게 있어서 이국적인 매력을 지닌 여성이었지만 돈 호세의 편향된 시선임을 감안한다면 과연 그녀가 사랑에 의해 죽임을 당할 정도로 매력적인가에 의문이 생긴다. 아니, 그녀는 정말 사랑 때문에 죽임을 당했을까? 카르멘이 죽임을 당한 건 비단 사랑 때문이 아니다. 간결하고 무미건조해 보이는 메르메의 문체 너머로 보이는 것은 사회가 강요한 여성상에 거부하며 관습과 제도에서 벗어나려는, 자유를 추구하는 카르멘의 모습이 보인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어떤 시대에서도 통할 수 있는 주제를 통해 표현 된 것이 아닐까.
<콜롱바>는 '방데타'라는 친족에 의한 복수라는 코르시카라는 한 고장의 특수한 관습이 큰 주제가 된다. 이야기는 네빌 양과 그의 아버지가 우연히 오르소라는 중위가 함께 코르시카로 향하면서 시작된다. <카르멘>이 여주인공의 이름이었던 만큼 이번 이야기의 <콜롱바>역시 여자주인공의 이름이 아닐까 추측 할 수 있는데, 이는 맞다. 그러나 오르소의 여동생인 콜롱바는 오르소가 코르시카에 도착하고 나서야 등장한다. 그럼 이 콜롱바란 여인은 어떤 여인일까? 처음엔 마치 오르소가 자신의 아버지의 죽음을 복수 하기 위해 코르시카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진정한 복수를 꿈꾸는 사람은 그의 여동생 콜롱바다. 그녀는 오르소가 방데타를 단념한 것을 깨닫고 그가 복수에 불타오르도록 말의 귀를 자르는 장면에서는 그녀의 복수심이 얼마나 깊은지 깨닫게 된다. 그리고 콜롱바 내면에 감춰진, 인간 내면에 감춰진 모습 또한 발견 할 수 있어 전율까지 느낄 정도다. 그런데 왜 여성은 이러한 불같은 깊은 복수심을 품어서는 안 되는가? 못 품을 것이 없지 않은가. 문득 읽다가 자신 역시 콜롱바에게 기존에 가지고 있던 여성상을 강조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특히나 네빌 양 같은 여성스럽다고 불릴 수 있는 사람이 콜롱바와 함께 등장하니, 더 그럴 수 밖에. 여하튼 콜롱바의 작전대로 오르소는 복수를 하게 되고 그는 네빌 양과 결혼식까지 올린 뒤 잘 된다. 그러나 네빌 양의 아버지가 코르시카에서는 살고 싶지 않음을 표명하고 그들이 코르시카를 나와 살게 된 결말을 볼 때 메리메 역시 코르시카의 방데타라는 관습제도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렇게 작가 메리메는 사랑이라는 주제의 <카르멘>과 복수라는 주제의 <콜롱바>를 통해 사회의 관습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는 당당하고 매력적인 두 여성을 통해서 여성들에게 주어진 관념적인 것에 대해서 저항하는 것이다. 이국적이고 생소한 이야기에 낯설다가도 그 이면에 숨겨진 의미는 같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의 그 놀라움. <카르멘>과 <콜롱바> 두 여인을 만나 사회가 강요하는 여성상의 이면에 숨겨진 의미에 대해서 알아보는 건 어떨까. 아니, 사실 <카르멘>과 <콜롱바>는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다만서도.
|
|
우연과 반항의 삶을 통해 저는 더욱 내밀하게 그녀와 연결되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자유, 하고 싶은 걸 하는 거야. 나를 막다른 길로 몰지 마. 조심해.. 누군가 나한테 어떨 걸 금지하면 나는 그걸 금방 행동에 옮겨. 우리 사이는 이제 끝났어. 당신은 남편으로서 나를 죽일 권리가 있어. 하지만 카르멘은 언제나 자유로울 거야. 보헤미안으로 태어나서 보헤미안으로 죽을 거야. --------------------- 운명을 바꾸는 위험한 사랑의 유혹, 카르멘 카르멘은 통속적인 연애소설이 아니다. 순수한 청년 호세는 전형적 팜프파탈인 카르멘을 만나게 되면서 보헤미안적인 삶을 살아가게 된다. 줄거리 이면에 사랑이 존재하지만 감정묘사보다는 사건 위주로 서술되는 담담한 나레이션을 쫓아가다보면 결국 카르멘은 그저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여인이 아니라, 자유에 대한 아이콘임을 알게된다. 그 자유분방함 너머 자유로의 열정으로 인해 카르멘은 악인이라고 할 수 있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존재이다. 모든 금지된 것은 유혹이고 아름다움이라는 말이 있는 것 처럼, 일반적인 삶속에서 접하기 어려운 자유로운 영혼, 방랑적인 사고와 삶의 방식들은 그래서 더 매혹적이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카르멘을 읽으면서 노틀담의 꼽추의 에스메랄라다가 연상되었는데 집시여인, 보헤미안으로 대표되는 그녀들은 사랑의 유혹을 넘어선 자유에 대한 열망의 상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투우사의 노래, 하바네라로 유명한 오페라 카르멘과 메리메의 카르멘과의 연계관계가 궁금해져서 찾아보니 메르메의 카르멘이 원작소설이라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앞으로 오페라 카르멘의 노래를 들을때마다 카르멘이 호세에게 속삭였던 자유와 사랑에 대한 말들이 떠오를 것 같다. 기존의 규율과 법칙을 넘어선 무한한 가치에의 열망이 카르멘에게는 자유였다면 나에게는 무엇이 있을까 곱씹어 본다. |
|
메리메는 작품 속 내내 카르멘을 여인의 육체속에 숨겨진 치명적인 악의 꽃으로 생각하지만, ![]()
|
|
이탈로 칼비노는 일찍이 ‘고전이란 무엇인가?’라는 따분한 질문에 대해 ‘처음 읽지만 언젠가 읽었던 것 같은 책이자 여러 번 읽지만 처음 읽는 것 같은 책’이라는 발랄한 답변을 내놓은 적이 있다. 그런데 이것은 소설 속의 등장인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여서, 때로 사람들은 책에서 만난 낯설고 기괴한 인물이 곁에서 알던 그 누군가인 것만 같은 기분에 빠진다. <카르멘>과 <콜롱바>를 읽으면서도 나는 어디선가 이런 여자를 만났던 것 같은, 그리고 이런 사랑을 경험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것이 바로 이 작품의 훌륭함이 아닐까? 그런 인물에게 매력을 느끼는지는 별개로 치더라도. |
|
프로스페르 메리메 - 카르멘
이 소설은 평범한 군인이었던 돈 호세가 카르멘이라는 집시 여인을 마주친 순간부터 그녀를 자신의 손으로 죽이는 순간까지, 짖궂은 사랑에 자신의 인생을 맡겨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 피부색은 균일하고 매끈했지만 구릿빛에 가까웠다. 눈은 사시였지만 멋지게 찢어져 있었다. 입술은 약간 도톰한 편이었으나 선이 분명했고, 껍질 벗긴 아몬드보다 더 새하얀 이가 드러나 있었다. 아마도 약간 굵은 머리칼은 까마귀 날개처럼 푸른 광택이 감도는 검은색이었으며 길고 윤이 났다.... 그녀는 각각의 결점에 장점을 결합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장점이 더욱 강렬하게 부각되었다. 그것은 기이하고도 야만적인 아름다움이었다. 처음 보고는 놀라지만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
집시 여자 카르멘에 대한 묘사다. 언뜻 보기에는 과연 수많은 남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만큼 미인이었을까 상상이 잘 되지 않지만 소설 속 '내'가 말한 것처럼 '기이하고도 야만적인 아름다움'을 가졌다는 사실에 흥미가 생긴다.
평범한 군인이었던 돈 호세는 집시 여인인 카르멘의 매력에 빠져 감옥으로 호송되는 그녀를 놓아주고 하사에서 졸병으로 강등된다. 그럼에도 그는 자유롭고 맹랑한 카르멘을 잊지 못하고 그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자신의 상관까지도 죽이고 만다. 결국 카르멘을 쫓아 군대를 이탈하여 밀수업자로 카르멘과 함께, 카르멘을 맴돌며 사는 삶을 선택한다. 어느 날 카르멘의 진짜 남편이 나타나자 아직도 잡히지 않은 카르멘의 사랑에 샘이 난 돈 호세는 그녀의 남편까지 죽인다. 그럼에도 여전히 카르멘의 사랑은 독차지할 수 없고, 그 잡히지 않는 사랑에 돈 호세는 끊임없이 그녀를 갈구한다. 그녀의 나쁜 행동에 증오심이 생기면서도 그것이 다시 사랑으로 바뀌어 버리는 그 이상 야릇한 유혹과 갈망. 결국에는 끝내 자유로운 삶과 사랑을 열망하는 그녀를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만다.
그녀가 제게 '꺼져버려.'라고 말할 때면 저는 차마 그녀를 떠나지 못합니다.
...
언제나 자유롭게 살기를 원하는 보헤미안 카르멘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녀를 잡고자 했던 돈 호세의 비극적인 행동은 어쩌면 그녀가 '보헤미안'이었기에 있을 수 있었던 제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의 우리도 충분히 경험하고 느끼는 본능적인 '사랑'의 한 단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을 만큼..' ' 은화를 던져버리고 싶을 만큼...''악마같은..' 이 같은 강한 어투로 그녀에게 증오심을 표현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그 만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사랑의 독 말이다.
|
‘카르멘(Carmen)'에 대해 들어보셨나요? 구체적인 내용은 모르더라도 들어봄직한 이름이죠. 무엇보다도 조르주 비제가 작곡한 오페라 ’카르멘‘으로 가장 유명합니다. 1875년 첫 공연 당시에는 상당한 비판을 받았으나, 현재는 오페라 하면 빠지지 않는 단골처럼 많이 무대에 오르는 작품입니다. 그런 ’카르멘‘은 사실 조르주 비제의 온전한 창작물은 아닙니다. 원작이 따로 있지요. 작가는 프로스페르 메리메, 작품 이름은 동명인 『카르멘』입니다. 메리메가 1845년 집필한 이 소설은 한글 번역으로 70여 쪽에 달하는 단편입니다. 이 『카르멘』을 이후 비제가 오페라로 각색하여 무대에 올린 것이지요. 그리고 흥미롭게도 원작보다 더 유명해진 것입니다.
메리메의 『카르멘』은 그리 복잡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페라 역시 메리메의 작품을 기초로 각색을 하였으나 크게 달라지진 않았습니다. 간단히 말해 ‘카르멘’이라는 한 집시와 그녀에게 빠져 비극을 맞게 되는 한 남자의 이야기지요.
작품은 액자식 구조를 취하고 있습니다. 고고학자인 ‘나’는 우연히 안내인과 협곡에 들어섭니다. 잠시 쉬기 위해서였죠. 그러나 이미 누군가 자리 잡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안내인은 경계하지만 ‘나’는 태연하게 총을 든 상대에게 시가와 음식을 권하며 친해집니다. 안내인은 낯선 남자가 강도일 것이라 생각하여 경계를 풀지 않습니다. 그리고 밤중 몰래 안내인이 이 남자를 신고하러 간 사이 ‘나’는 그에게 호의를 베풀어 미리 언지를 해주고, 남자는 고마워하며 도망갑니다. 그리고 이런 인연으로 후에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이 남자는 ‘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게 되는 것이지요. 바로 이 이야기가 『카르멘』의 주 서사가 됩니다. 남자의 이름은 돈호세 리사라벤고아입니다. 이름에 돈이 붙어있는 것으로 보아 남자는 귀족이었지만 어느 날의 싸움의 결과로 고향을 떠나야만 했지요. 직업 군인으로 하사가 된 돈호세는 원사를 바라보는 상황에서 세비야의 담배 공장 경비를 맡게 됩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그를 비극으로 이끌고 갈 카르멘을 만나게 되는 것이지요. 카르멘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카르멘에 대한 돈호세의 묘사가 여기 있습니다.
그녀는 붉은 치마를 입었는데 몹시 짧아서 구멍이 여럿 뚫린 흰색 비단 양말과, 불 빛깔의 리본이 달린 귀여운 붉은색 가죽 구두가 보였습니다. 어깨가 드러나도록 그녀는 만틸라를 벌리고 있었고, 커다란 아카시아 꽃다발을 블라우스 가장자리에 꽂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입 가장자리에도 아카시아 꽃을 물고 마치 코르도바 종마 사육장의 암망아지처럼 엉덩이를 일렁이며 걸어갔습니다.
처음에 돈호세는 카르멘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돈호세에게 그녀는 너무 선정적으로 보였기 때문일까요. 하지만 부르면 오지 않고 안 부르면 오는 고양이처럼 카르멘은 도리어 돈호세에게 다가옵니다.
그녀는 입에 물고 있던 아카시아 꽃을 엄지손가락으로 톡 튕겨서 정확히 제 미간을 향해 날렸습니다. 선생님, 그것은 마치 총알이 날아오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어디로 숨어야 할지를 몰랐고, 마치 널빤지처럼 미동도 않은 채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녀가 공장으로 들어갔을 때, 저는 제 발 사이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아카시아 꽃을 보았습니다. 제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동료들 모르게 그 꽃을 주워 들었고, 웃옷 속에 소중히 간직했습니다. 제 첫 번째 실수입니다!
그렇습니다. 카르멘은 미끼를 던졌고 돈호세는 미끼를 물어버렸죠. 이후 돈호세의 삶은 모두 카르멘 때문으로 흐르기 시작합니다. 그가 그녀의 아카시아 꽃을 간직하기 시작한 순간, 그가 살인을 저지른 카르멘을 일부러 놓아주게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된 것입니다. 그로 인해 감옥에 갇히게 된 돈호세의 승진에 대한 꿈은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리죠. 카르멘을 만나고부터 그의 인생은 완전히 어긋난 방향으로, 비극의 종착점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런 사실을 돈호세가 몰랐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카르멘은 누차 그에게 경고합니다. 자신이 유혹해놓고도 자신과 얽히면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하죠. 계속해서 미끼를 거두지 않고 돈호세 앞에 흔들면서도 미끼를 물면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카르멘입니다.
저는 그녀에게 언제 다시 볼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당신이 좀 덜 멍청해지면.” 그녀가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그러고는 진지한 어조로 덧붙였습니다. “그거 알아? 내가 당신을 약간 사랑하고 있는 것 같다는 거. 하지만 이건 지속될 수 없어. 개와 늑대는 오래가지 못해. 만약 당신이 이집트의 법을 받아들인다면 나는 아마도 기꺼이 당신 색시가 될 거야. 하지만 그건 바보짓이야.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쳇! 아저씨, 당신은 싸게 막는 거야. 당신은 악마를 만났어. 그래, 악마. 악마가 언제나 검은색인 건 아니야. 당신 목을 비틀지도 않았지. 나는 양모로 된 옷을 입었어. 하지만 내가 양인 건 아니잖아.
돈호세도 알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카르멘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요. 그녀는 위험하고, 그러니 그녀에게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요. 하지만 이미 그는 카르멘에게 빠져버렸습니다. 결국 그녀에 대한 질투로 살인까지 저지르게 되지요. 카르멘 때문에 위험에 빠진 그는, 카르멘 덕분에 위험을 모면하게 되고, 울며 겨자 먹기로 카르멘과 한 패가 되어버립니다. 울며 겨자 먹기라고 이야기하였지만 카르멘과 함께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돈호세는 기꺼이 그리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부터는 영원한 고통뿐입니다. 카르멘과 한 패가 되었지만 카르멘은 절대 누군가가 소유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돈호세는 카르멘을 자기만의 것으로 소유하고 싶어 하죠. 언제나 카르멘은 돈호세의 손아귀에서 도망치고, 돈호세는 그런 카르멘의 뒤를 쫓습니다. 카르멘의 남편이었던 가르시아를 죽이고, 카르멘과 함께 있는 모든 남자를 질투하죠.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돈호세의 광기가 짙어져가는 게 느껴집니다. 문제는 카르멘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알아, 그거?” 그녀가 제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남편이 되고 나서부터 난 당신을 덜 사랑해. 당신이 애인일 때보다 말이야. 난 괴롭힘 당하고 싶지 않아. 특히 명령은 질색이야. 내가 원하는 건 자유로운 것, 그리고 하고 싶은 걸 하는 거야. 나를 막다른 길로 몰지 마. 계속 짜증 나게 하면 착한 남자 하나를 골라서 당신이 애꾸눈에게 해준 것처럼 해주라고 할 거야.”
새로운 곳으로 떠나 완전히 새롭게 살아가자고 이야기해도 카르멘은 듣지 않습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이 어찌 바꿀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니까요. 사실 이쯤 되면 카르멘이 도망갈 법도 하지만, 카르멘은 도망가지 않습니다. 그녀는 돈호세가 위급한 순간에는 언제나 찾아와 그야말로 헌신적으로 돈호세를 위합니다. 도대체 뭘까요? 이 사랑은.
이윽고 비극이, 파국이 찾아옵니다. 카르멘의 자유로움을 더 이상 참지 못하는 돈호세는 그녀와 함께 죽으려 결심하죠. 카르멘도 알고 있습니다. 보헤미안인 그녀는 애초에 점을 치면서 수없이 그렇게 될 운명임을 알고 있었죠. 참으로 비극적인 사랑입니다.
“제발,” 제가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봐. 내 말 잘 들어! 모든 과거를 잊었어. 하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나를 파멸시킨 건 당신이야. 당신 때문에 나는 강도가 되고 사람을 죽였어. 카르멘! 나의 카르멘! 당신을 구하게 해줘. 당신과 함께 나를 구하게 해줘.” “호세,” 그녀가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나에게 불가능한 걸 요구하고 있어. 나는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그리고 그 때문에 나를 죽이려고 해. 나는 아직도 당신한테 얼마간의 거짓말을 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그러고 싶지가 않아. 우리 사이는 끝났어. 당신은 남편으로서 나를 죽일 권리가 있어. 하지만 카르멘은 언제나 자유로울 거야. 보헤미안으로 태어나서 보헤미안으로 죽을 거야.”
우리는 살면서 많은 것을 필요로 하고 원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죠. 그 어떤 것은 아무리 바라고 욕망하여도 결코 얻을 수 없습니다. 카르멘이 바로 그런 존재이지 않을까요? 그러니 사실 돈호세의 사랑은 이미 시작부터 결말이 정해진 비극이었습니다. 설령 알고 있었음에도 멈출 수 없었지만요.
카르멘은 불꽃같은 여자입니다. 그녀는 지치지 않고 끝없이 타오르는 존재죠. 그리고 불꽃이 꺼지지 않기 위해 태울 것을 찾아 탐욕적으로 돌아다닙니다. 그런 카르멘에게 접근하는 모든 남자는 마치 불나방 같습니다. 가까이할수록 자신이 파멸에 이를 것임을 알면서도 어느새 그녀 곁에 가지 않을 수 없는, 불로 뛰어드는 불나방.
『카르멘』을 읽노라면 돈호세의 마음을 알 것도 같습니다. 카르멘은 남성들에게는 마치 판타지 그 자체이죠. 비현실적인 그 달콤한 마법에 어떤 누가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녀와 같은 존재를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음은 아주 다행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아주 다행이겠습니다. 하지만 또 어찌 알겠습니까? 예상치 못한 그 어느 순간에 번개처럼 카르멘이라는 불꽃을 보게 될지. 소유할 수 없는 붉은 꽃, 『카르멘』이었습니다. |
|
스페인 사람들에 의하면, 한 여자를 아름답다고 할 때에는 적어도 서른 가지의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혹은 세 군데 신체 부위에 적용되는 열 개의 형용사에 따라 그 아름다움이 규정된다. 예를 들어 미인은 눈, 속눈썹, 눈썹, 이 세 가지가 검은 색이어여야 하고, 손가락, 입술, 머리카락, 이 세가지는 가늘어야 한다.
|
|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자문해 본 파스칼은 우리는 누구나가 한 여자를, 곧 사라지고 말 그녀의 아름다움 때문에 혹은 그녀가 잃어버릴 수 있는 그녀의 마음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 끝에, 갑작스레 "우리는 누구나 어떤 사람을 결코 사랑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성질들을 애호할 뿐이다."라고 결론을 맺습니다.
제 생각부터 말하자면, 저는 <카르멘>에 나오는 정열적인 사랑을 믿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사랑이라는 것은 이타적으로 시작해서 이기적으로 끝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카르멘>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모 평론가의 짧은 에세이였습니다. 그 글에서 평론가는 우리가 타인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 공감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에 관해 질문을 던집니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측면에 대해서 한정지어진 듯한 감이 있지만 어쨌든 우리가 공감한다는 것은 길들여지는 것일까요? 아니면 정말로 타인을 이해하게 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일까요? 라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마치 어린왕자와 여우의 질문처럼 말입니다.
사실 공감이란 문제, 바꾸어 말하면 이해라는 문제는 무척이나 중요하지만, 또 없어도 살아갈 수 있는 문제이기는 합니다. 오죽하면 시오랑은 그의 글에서, 과연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라며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타자에 관한 질문을 던집니다. 타인을 이해하려고 하면 할수록, 내 틀에 끼워 맞추게 되는 것이 현실적인 몸부림입니다. “네가 그럴 줄 몰랐어.”라는 싸움의 대사처럼 우리는 늘 공감과 친밀함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방을 규정하고,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옛날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의형제의 의식까지도, 그들이 서로 믿지 못하기 때문에 정하는 맹세라고 말하는 사람들까지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러한 현실적으로 보이는 문제들을 뚫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본질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이 문학의 역할이므로 나는 <카르멘>을 읽으며 많은 부분에서 공감을 하기로 했습니다.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의 관계처럼 말입니다. 언제나 나로 존재할 수 있으려면 너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만남을 전제로 합니다. 어떤 사물, 즉 타자가 나를 가늠하고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인 사물이나 수단, 위치는 절대로 나를 증명하지 못합니다. 오직 사람만이 근원적인 나의 모습을 찾고, 나를 나로 받아들여줄 수 있습니다. 부버의 말을 적절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부버는 “나는 너로 인하여 나가 되고 나가 되면서 나는 너라고 말한다”고 말합니다. 쉬운 말장난 같지만 정말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물론 너와 나라는 문제와 공감이라는 문제는 얼마든지 다른 특성을 가진 단어이므로, 둘을 같다라고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나와 너가 같은 것을 보고 있다는 것(흔히 결혼식 주례사에 자주 등장하는 이 말)의 실체를 확인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우리들의 삶의 영역만 따진다면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의 영역이라면, 어쩌면 <카르멘>에서 돈 호세가 매력적인 카르멘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의 인생이 타락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목메는 것은 자기 연민이나 카르멘에 대한 소유욕에서 나온 제스처일 수도 있습니다.
허나, 적어도 그가 소설 속에서 보여준 가능성은 도덕적, 윤리적 규범이 잣대 짓는 선과 악, 미와 추, 성과 속 등의 범위를 넘어 어떠한 이해관계나 배타적인 질투심 없이 상대방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동시에 의미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돈 호세의 행동을 보면서 카르멘에 대한 사랑을 그가 받아들이면서 감내해야만 했던 결과까지 탓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의 아이러니이며, 또한 인생을 모방한 소설의 아이러니이기 때문입니다. |
|
…날 감당 할 수 있는 남잘 찾아요 진짜 남자를 찾아요 말로만 남자다운 척 할 남자 말고 날 불안해 하지 않을 남잔 없나요 자신감이 넘쳐서 내가 나일 수 있게 자유롭게 두고 멀리서 바라보는… 오늘의 소원: 카르멘이 Bad Girl Good Girl 부르면서 춤 추는 것 보고 싶다. 생각해보면 클레오파트라도 있고 클림트의 유디트도 있었다. 카르멘 같은 매혹적인 여성이 처음인 건 아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카르멘한테 악녀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살로메 같은 여성을 들 수 있을 듯한데, 사실 난 카르멘을 악녀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소설 속에서 종종 카르멘은 이름 대신 “보헤미안 여자”라고 불리는데 그녀는 소속된 곳 없이 떠돌아다니는 집시 여성이다. 그녀는 “매혹”이란 성질을 온몸으로 내뿜는 존재이다. 도발적인 행동이나 거짓말은 거침없이 하고 그녀에게 누가 해를 입히려 하면 지지 않고 달려드는 여성이다. 순종적인 데가 없고 당당하게 행동하는 카르멘은 야성적인 매력이 있는 여인이다. 게다가 돈 호세가 처음 그녀와 대면하는 곳은 그녀가 동료 여인의 얼굴을 칼자국을 크게 내버리는 사건을 일으키는 시가 공장이다. 담배를 파는 곳, 중독성을 파는 곳. 그녀를 만나게 되는 장소부터가 심상치 않다. 야성적인 매력이라는 게 무슨 말인가? 야성이란 인간이 만들어낸 사회 체계 안에서는 이해도 설명도 가능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예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녀는 낯선 존재다. 낯설기만 하면 그래도 피하거나 무시하면 될텐데, 카르멘의 경우는 모른 척하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녀는 당당하기 때문이다. 사회 바깥에 존재한다면 소외된 약자라고 불러야 할 텐데, 카르멘에게 그 이름을 붙이려고 하면 그녀는 고양이처럼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것이다. 카르멘에게는 약자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패배감이랄까 소외감이랄까 여하튼 초라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미안하게 만드는 가여움이 없다. 그러기에는 그녀는 너무나도 자기 삶을 사랑하고 즐기고 있다. 오히려 사회 바깥에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뻐하고 그 안에 있는 자들을 절대로 부러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에게 자꾸 눈이 돌아간다. 카르멘의 진정한 매혹성은 당당하게 일탈하는 그 자신감이다. 우리가 규율을 만들어낸 이유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다. 남을 해하지 않는 만큼 스스로의 행복도 지킬 수 있어야 하기에 약속을 만들고 우리는 그것을 지킨다. 하지만 그 규율이 막상 집단 안에서 작동하는 방식은 결코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 규율은 집단 내에서 우월한 자와 뒤떨어진 자를 만들어내고 상하 관계를 만들어내며 중심부와 주변부를 구분한다. 하지만 여전히 그 안에 속해있는 인물들은 규율의 빛 바란 시작을 붙잡고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사회 밖, 그 무질서의 공간에서 그들은 살아낼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타고난 바대로 살지 않고 태어난 곳에 맞추어 자신을 억누르는 지점이 있다. 그러한 것을 누군가는 타협이라고 부르고 또 누군가는 억압이라고 부른다. 카르멘에게는 그러한 것이 없다. 적어도 돈 호세가 있는 사회에서 카르멘의 삶의 방식은 자유롭고, 자유롭다. 시골 마을 출신으로 군인으로 성공해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려고 한 호세는 사회의 방식에 잘 적응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 사회의 체계를 의심하지 않는 평범한 인물이다. 호세가 카르멘에게 매혹을 느낀 것도 카르멘이 가진 일탈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해방을 향한 욕구는 이런 식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그의 시도는 파멸로 끝난다. 그가 실패한 이유는 자신의 욕구가 시작하는 지점을 자기 자신 내부가 아닌 카르멘에게서 찾았다는 것이다. 타락의 이유를 카르멘에게 돌리고 여전히 기존 사회의 가치관을 버리지 못하고 그 잣대로만 카르멘을 재고 따지니 호세에게는 일탈이 자유는커녕 기존 사회로부터의 소외로 느껴질 뿐이다. 결국 진정한 해방을 겪지 못하고 여전히 기존 사회를 대변하고 마는 호세는 사회가 흔히 타자에게 그러하듯 카르멘에게 모든 죄를 뒤짚어 씌운다. 카르멘의 행동이 나쁜 것으로 느껴지는 것은, 카르멘이 마녀이기 때문이지, 카르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꾸만 옭아매는 자신 때문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한다. 그는 아마 자신이 카르멘에게 느끼는 불안함이 기존 사회를 향한 끊임없는 도발에 사회구성원들이 느끼는 불안감과 비슷하다는 사실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카르멘은 끊임 없이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은 “자유”라고 말한다. 자유를 속박하는 그것이 무엇이든 그녀는 거부한다. 심지어 그것이 사랑일지라도 그것이 그녀를 억압하는 무언가로 변한다면 그녀는 단호하게 안 된다고 선언할 줄 안다. 사랑조차 구속할 수 없는 그녀의 자유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하자면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란 말은 존재 그 자체를 수용해주고 그것을 변형시키려고 하거나 질타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가치판단으로 그것이 좋다, 나쁘다 판단하지 않는다는 소리다. 또한 “받아주는 것”이라는 말은 내버려두면 된다는 소리가 아니다. 무시나 방임이 아니라 자세히 들여다보고 보아주고 나서 그 이를 따뜻하게 웃으며 맞아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는 말이다. 바로 이것이 존재의 이해와 수용이다. 이성적인 이해가 아닐지도 모른다. 관념적인 이해도 아니다. 설명하려 들지 않는 것, 그 자체가 자유를 이해하는 일이다. 누군가의 자유를 인정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특히나 사랑하는 사람의 경우는 무시하려 해도 도저히 남일마냥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특히 그러하다.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좋은 부분부분만 따로 떼어서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 사람을 전체로서 또 그 존재 그 자체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만약 그 사람이 자신 앞에서 있는 자신을 그대로 내보이지 못하고 자기자신을 왜곡하거나 부정해야 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자유를 존중해주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호세는 카르멘에게 자기 식의 사랑만 강요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그 여인이 존재하길 원했고, 사회가 여인에게 요구하는 그 모든 규정을 그녀에게 갖다 대어 판단했다. 자꾸만 그녀의 자유를 억압하면서 그녀를 마녀로 몰아붙였다. 결국 카르멘과 호세의 사랑은 파멸로 갈 수밖에 없었다. 진정으로 자유를 추구했던 카르멘은 한번도 그에 굴하지 않았고 강한 저항에 부딪힌 호세의 억압성은 더욱 더 폭력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이 사랑에 잘못이 카르멘에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한다 말하는 카르멘의 말을 믿지 않고 그녀의 사랑을 의심한 건 호세였으며, 이 관계에서 우월성을 가진 것은 호세였기 때문이다. 카르멘의 사랑법을 카르멘의 언어로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 식의 사랑을 끝까지 요구했기 때문에 그는 결코 원하는 바를 가질 수 없는 운명이었다. 하지만 호세는 이 관계에서 결코 약자가 아니다. 그가 소설 내내 자신이 카르멘에게 질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지만, 잘 들여다보면 폭력을 행사하고 협박하며 결국 카르멘을 죽이는 인물은 바로 호세이다. 호세에게는 남성으로서 언제든지 카르멘을 제압할만한 물리적 힘이 있었고, 정절과 순종으로 대표되는 “올바른 여성”에 대한 사회적 가치관 역시 그의 뒤를 봐주고 있었다. 그러므로 호세가 카르멘을 “처단”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 받은 것처럼 행동하면서 사랑 때문에 그녀의 악마성을 참아낸다고 하지만 분명히 그 속에는 생물학적, 사회적으로 나타나는 남성의 우월성이 존재한다. 만약 자기의 아집을 버리고 카르멘을 바라보았더라면 카르멘의 사랑을 알아차릴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호세에게 그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다. “낯섬”을 마주쳤을 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로 반응한다고 한다. 비슷한 지점을 찾아 차이를 없애버리는 “동일화”와 아예 다른 것이라고 상정하고 더 이상의 이해가능성을 차단하는 “타자화”로 말이다. 전자 때문에 생겨난 마찰을 우리는 앞에서 보았다. 카르멘의 “사랑”이라는 말을 자기 식으로만 이해했던 호세가 만들어낸 비극이 그것이다. 하지만 “타자화”가 만들어내는 함정 역시 이 소설에 여전히 존재한다. 우리는 이 소설의 카르멘이 호세의 시점에서 그려진 인물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녀가 가진 거부할 수 없는 마력과 같은 매력은 호세의 시각에서 덧칠된 것일 수 있다. 실상 카르멘은 평범한 여인이었을 수도 있다. 단지 춤추고 꾸미는 것을 좋아하고 제멋대로이긴 하지만 여전히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여인이었을 수도 있다. 카르멘을 악마라든가 팜므 파탈이라든가 악녀라는 식의 이름을 붙이기 시작하면 거기서부터 그녀는 우리의 수용의 틀에서 벗어나는 이질적 존재가 되어 아무렇게나 말해도 좋을 타자가 되어버린다. 우리가 사회의 타자를 바라보는 방식도 이러한 잘못을 저지르기 쉽다. 우리 사회 바깥에도 여전히 사람은 존재한다는 것, 또 그러한 사람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우리는 진정으로 서로를 지킬 수 있는 안전하고 행복한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특히나 이러한 태도를 가지는 것은 사회 바깥이 아닌 사회 내부에서 별탈 없이 적응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회 안에서 별 탈 없이 살고 있다는 그 이유만으로 타자에 대해 우월적 힘을 가지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함부로 재단하고 처단할 수 있는 그런 힘 말이다. 호세가 카르멘을 죽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러한 힘 덕택이다. 카르멘을 이해하고자 하지 않았던 그의 행동은 그가 속했던 사회의 방식대로라면 정당화되기 때문에 호세는 카르멘을 죽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카르멘의 죽음 말고도 그는 도덕성이 부재했던 가르시아를 죽이고 - “그는 악당이야!”, 70p - 죄책감을 가지지 않는다.) 하지만 카르멘의 죽음은 그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마지막에 자백을 하는 것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정의의 심판에 자신을 맡긴 것이라고 보는 것은 곤란하다. 그보다는 결국엔 실패하고만 소유욕에 대한 절망감에서 비롯한 선택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 하다. 우리가 속한 사회는 여러 가지로 구성될 수 있다. 인간, 한국인, 여자, 대학생, 딸, 심지어 ‘나’라는 존재 그 자체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사회로 존재하고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그 수 많은 사회의 존재는 항상 타자의 존재 역시 내포하고 있다. (우리가 아닌 것을 배제함으로써 사회는 구성되는 거니까.) 카르멘은 언제나 어디서나 있는 셈이다. 그러니까 카르멘은 클레오파트라나 유디트로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이쁜 얼굴과 매혹적인 춤사위로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 수많은 카르멘을 어떻게 대해야할까? 그 수많은 카르멘에게 “파탈”이라는 파멸의 코드를 붙여주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다행히 여기 반가운 노래가 있다. Miss A의 Bad Girl Good Girl. 메리메가 죽은 지 오래이니 카르멘의 목소리로 카르멘의 이야기는 영원히 묻히고 말았지만 여기 이 시대에도 여전히 카르멘은 존재한다. 지금이라도 그녀의 노래를 들을 수 있음에 감사해야지. 입고 싶은 옷을 입고, 하고 싶은 머리 모양을 하고, 추고 싶은 춤을 추는 그녀를 도대체 누가 “Good Girl”이니 “Bad Girl”이니 판단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카르멘의 무덤에 십자가 대신 Bad Girl Good Girl을 틀어주면 카르멘이 무척이나 좋아할 것 같다. |
|
예전에 가끔 응접실에서 혼자 비제의 카르멘 L/P 를 크게 틀어 놓고 몽환적 감상에 빠져들곤 했다. 매력적인 여인의 감미로운 목소리와 절도 있는 플라멩코식 분절음은 그녀의 유혹에 빠져들기에 충분했고 그녀의 옷깃을 잡을 듯 말듯한 내 모습을 상상하며 얼마나 아름다운 여인인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녀의 유혹이 물씬 풍기는 부분은 바로 그 유명한 오페라 서곡 1막의 "하바네라" 이며 그 외 에도 2막의 투우사의 노래와 3막의 미카엘라의 노래 4막의 에스카미요의 노래는 오페라 아리 아 모음집에 단골 메뉴로 등장하곤 한다. 보헤미아인이자 집시인 카르멘은 담배공장에서 흉기를 휘두르고 출동한 군인 호세에게 체포된다. 그들의 운명적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카르멘의 유혹에 잠시 현혹된 호세는 그녀를 놓치게 되고 군법에 의거 영창과 계급 강등을 당하게 된다. 한편 호세의 연인 미카엘라는 호세의 어머니를 극진히 간호하며 그와의 사랑을 키워가는데 그녀의 마음은 그림으로 그려진다. 수감도중 카르멘의 선물을 받게된 호세는 그녀가 그를 사랑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선물은 카르멘의 조롱의 표시였던 것. 어느날 호세는 그녀와의 극적 재회를 이루지만 그가 알고 있는 그녀가 아님을 알게 되고 실망하게 된다. 그녀의 사랑은 대단히 이기적이고 기회주의 적인 사랑이었음을... 카르멘은 그의 상관인 수니가 중위와 지역 사령관인 대령과도 염문이 있었던 것이다. 우여 곡절 끝에 탈영을 하게된 호세는 짚시 패거리에 어울려 강도 행각을 하게 되고 카르멘 과의 관계를 유지하려 한다. 그러나, 카르멘의 덫에 빠져 몰살을 당하고 호세는 가까스로 구사 일생한다. 세비야 투우 축제에서 마지막으로 그녀를 설득해 보지만 결국 호세는 그녀를 죽이고 만다. 그리고 그녀의 마지막 애인인 유명한 투우사 에스카미요에게 죽음을 당한다. 책을 읽으면서 카르멘의 사랑에 대해 의문이 생겼다. 그녀는 정말 호세를 사랑하지 않았을까? 최소한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변절했음을 보여준다. - P 179 " 내 목숨이 단 하루가 남았다 해도, 아니 단 한 시간이 남았다 해도, 그 짧은 순간이 오직 당신과 함께여야만 주어진다고 하면 난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어." 그러나, 처음 무뚝뚝한 호세의 모습에 매력을 느끼고 유혹한 것은 바로 그녀 였다. 그녀의 직설적 사랑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P 175 난 내가 원하는 걸 갖기 위해선 어떤 짓도 할 여자란 걸. 난 남이 파괴되고 망가지는 게 두려워서 자신을 버리는 여자가 못 돼. 호세는 자신을 사랑하는 미카엘라를 버려두고 카르멘을 쫓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데 왜 남자들은 현모양처형 여자를 버리고 화려하고 섹시함을 갖춘 여우형 여자에게 더 이끌리는 것일까? 답을 구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얌전한 바스크 지방의 군인 호세와 떠돌이 생활에 익숙한 카르멘은 처음 부터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이었다. 그의 비참한 사랑의 결과에 대해 굳이 책임을 묻자면 불나방 같은 그녀의 농염한 자태에 분별력을 잃고 유혹당한 점을 들 수 있다. 미카엘라의 입장에서 보면 호세의 황당한 변절에 할 말이 없을 것임에도 그녀는 그와의 사랑을 지켰고 그의 모친을 극진히 봉양하기 까지 한다. 비제의 카르멘은 정열적인 스페인 투우와 화려한 플라멩고, 짚시들의 삶이 교차하면서 격동기 의 사랑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사랑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순수한 사랑과 가식적 사랑, 열정적인 사랑과 은근한 사랑, 비열한 사랑과 도전적인 사랑이 그것이다. 비제는 정열적인 카르멘을 통해 사랑의 군상, 사랑의 참 의미를 보여 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