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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은 지가 오래 되었다.
내가 구입하는 책은 압도적으로 소설이 많은데, 서평단에 부지런히 응모하고 그 책을 우선하다 보니 정작 사놓은 책은 관심밖으로 밀려나 못 읽고 있는 책이 많다. '2018 봄- 여름' 은 작년 9월경에 구입해 읽기 시작했다 마무리를 못하고 있었다.
김봉곤 한편은 진즉 읽었고, 조남주 한편 겨우 읽다가, 오늘에야 김혜진과 정지돈을 한번에 마무리했다. 짧은데도, 재밌는데도 불구하고 서평단 의무 이행이 먼저다 보니 내 책은 읽지 못하는 아이러니, '서평단의 역습'이다.
김봉곤의 '시절과 기분' 은 역시나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주인공이 게이임을 자각하기 전 대학시절 좋아했던 여학생을 만나러 갔다 여전하게 뛰는 심장과 저릿한 감각에 슬퍼지지만 다시금 애인이 있는 현재로 돌아오기 위해 그 마음의 흔들림이 멈출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는 이야기다.
조남주의 '가출'은 갑자기 가출해버린 아버지를 찾기 위해 삼남매가 엄마집에 모이다 서로 요리하고 대화하면서 가족의 친밀감을 회복하는 이야기다. 결국 아버지를 찾지는 못하지만(딸이 아버지에게 준 카드사용 내역 문자 통보로 아버지의 안녕은 확인이 된다) 주말 가족모임은 정기적이 되고 그 만남을 통해 서로에 대해 더 이해하게 되는 이야기다.
김혜진의 '다른 기억'은 대학 신문사 주간을 하던 여교수가 비리혐의로 물러나게 되자 그를 좋게만 기억하는 너와 그런 너를 이해할 수 없는 나에 대한 이야기다. 너는 그녀를 바라보고 나는 너를 바라보는 관계, 너와 나의 성별은 나오지 않지만 좋은 것을 좋은 대로 두는 사람을 좋은 사람이길 포기하지 않는 너를 결국은 단념해야 했던 나의 사랑이야기로 읽었다.
정지돈의 '빛은 어디에서나 온다'는 1969년 일본에서 열렸던 만국박람회에 참가한 한국인 태순과 일본인 양코의 이야기로 주인공이 누구인지, 3인칭인지, 1인칭 소설인 지 종잡을 수 없다. 사랑이야기를 굳이 쓸 필요가 있냐는, 소설은 현실을 그리는 게 아니라 곧 현실이라는, 너무 무섭기 때문에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그의 소설이 오히려 미래에서 온 것만 같다. 이 <소설 보다> 시리즈는 '이 계절의 소설' 선정작을 묶은 단행본으로 각 계절의 리듬에 따라 젊은 작가들의 수작을 좀 더 빠르게 독자에게 선보이려는 단편소설집이다. 작품뒤에 작가와의 인터뷰를 실어 더 가깝게 작품에, 작가에게 다가갈 수 있게 해준다. 이미 계절은 놓쳐버렸지만, 가을과 겨울을 잽싸게 읽고, 바야흐로 흐드러진 '봄'을 맞이해야겠다. 지나버린 시절이지만 소설은 완벽하게 그 때를 소환하여 펼쳐놓는다. 3,500원이라는 굉장히 괜찮은 가격으로 이 시절의 우리를 가장 빨리 반영한, 현재와 호흡하는 작품들을 만날 수 있게 해 준 문학과 지성사에 감사하는 마음, 열렬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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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감정은 시간이 지나서야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아쉬워하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오히려 그 감정을 제대로 몰라서 다행은 아니었을까. 서툰 사랑이나 분노였더라면 말이다. 한 작가의 소설을 모은 단편집을 읽을 때 일정한 주제가 보인다.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작가가 쓰고 싶은 소설의 방향이 비슷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런 점에서 여러 작가의 소설을 모아 엮은 소설집은 매 소설마다 색다른 즐거움을 안겨준다. 테마 소설집을 제외하고 말이다.
문학과지성사의 새로운 시도이자 기획이라 할 수 있는 『소설 보다: 봄-여름 2018』은 나쁘지 않았다. 네 편의 소설마다 각기 다른 평론가와 작가와의 인터뷰가 담겼다. 봄의 소설(김봉곤, 조남주)과 여름의 소설(김혜진, 정지돈)은 저마다의 개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김봉곤의 소설은 처음인 것 같다. 소설은 처음이지만 그가 쓰는 글에 대해 어느 정도 들었기에 큰 거부감은 없었다. 자신의 성 정체성을 정확히 알기 전에 만났던 여자친구와 다시 만나면서 게이 이전의 일상을 들려주는 「시절과 기분」은 잔잔하면서도 감성의 결이 느껴졌다. 소설에서 소설가로 등단한 ‘나’와 결혼해서 아이 엄마가 된 혜인과의 만남은 지극히 현실적인 모습처럼 보였지만 자신에 대해 고백 아닌 고백을 해야 하는 ‘나’에게는 조금 두렵고 떨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보통의 사람들이 그렇듯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한 추억을 꺼내다 보면 그저 별일 아닌 것처럼 돼버리기도 한다. 소설에서 혜인에게 자신의 책을 건네주는 ‘나’는 작가의 분신이라 할 수 있다.
조남주의 「가출」은 어떤 면에서 가장 보편적인 소설이다. 메모를 남기고 가출한 아버지 덕분에 가족들은 자주 모였고 아버지를 걱정하다 점점 편안한 시간을 보낸다. 아버지 때문에 먹지 못했던 청국장을 먹고 아버지를 이야기하면서 지난 시절을 돌아보고 꺼내볼 수 있으니까. 가출한 아버지에게 놀랄만한 사건은 벌어지지 않았고 가족들은 그들의 일상을 이어간다. 가장의 자리에 대해 생각해보고 내 아버지에 대해서도 떠올리게 되었다. 김혜진의 「다른 기억」은 학교 신문사의 주간 교수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보는 이야기다. 주간 교수가 파면당하면서 편집장이었던 이와 그의 친구인 화자인 ‘나’는 그 사태에 대해 다른 시선을 갖는다. 주간 교수가 남달리 아꼈던 편집장은 뭔가 잘못되었다고 믿었고 다른 이들은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편집장은 신문사를 떠났고 모두가 졸업한 후에 주간 교수를 만나 자리 역시 그러했다. 편집장이었던 ‘너’는 여전히 극진하게 선생님이라 대하지만 ‘나’는 그 자리를 빨리 떠나고만 싶다. 김혜진의 소설 속 ‘너’와 ‘나’는 가장 가깝고 내밀한 사이였지만 그래서 더 쉽게 멀어질 수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현실의 너와 내가 될 수 있기에 불현듯 어느 시절의 너와 내가 겹쳐졌다.
정지돈의 「빛은 어디에서나 온다」가장 난해하고 어려웠던 소설이다. 흔히 말하기를 지식 조합형 소설이라고 하는 종류의 소설이 아닌가 싶다. 1968년을 배경으로 한국에 온 앙코 씨와 이화여대 영문과에 다니는 정태순이 등장한다. 그 시대의 풍경과 오사카 만국 관람회를 통해 상상하던 미래를 현재의 정태순이 들려주는 형식의 소설이다. 어떤 부분은 기사처럼 읽히기도 했다. 소설과 다르게 김신식과 나눈 인터뷰에서 ‘일상에 관심이 없다’는 정지돈의 답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일상과 관심을 다르게 해석해야 하나 혼자 생각하기도 했다.
네 편의 소설을 읽으면서 어느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 아버지와 내가 나눈 말들에 대해, 연락할 수 있지만 연락을 하지 않는 동기와 친구들에 대해, 아련하게 그리운 어떤 사람에 대해, 돌이킬 수 없는 관계에 대해 말이다. 그리고 과거의 나는 지금의 나와 얼마나 다른지에 대해서도. 김봉곤의 이런 문장은 이 소설집을 관통하는 게 아닐까 싶다.
슬픈 것과 사랑하는 것을 착각하지 말라고, 슬픈 것과 사랑하지 않는 것을 착각하지 말라고 생각했고, 아무래도 아무여도 좋은 일이라고도 잠시 생각했다. 상상만으로도 이미 나는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지만, 가능 세계를 그려보는 일이 예전만큼 즐겁지 않았다. 내가 된 나를 통과한 사람들, 슬픔과 불안에서만 찾아왔던 재미와 미(美) 역시 내키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시절과 기분」, 4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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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잘 이해하기 어려운 게 가족의 모임이었다. 누구네 집은 시시때때로 모이고, 무슨 날 안 오면 욕을 먹을 정도로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등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공감하기 어려웠다. 시간이 안 되면, 각자의 사정이 있으면 못 올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서로 얼굴 보고 좋은 시간 보내자고 만든 날이었을 텐데, 억지로 와서 좋을 게 뭐가 있을까 싶었다. 그러니 참석하고 싶은 사람만 참석하기, 부득이하게 참석이 어려울 때는 그런가 보다 하기. 그래야 서로에게 부담 없이, 서로 얼굴 보고 좋은 시간 보내고 화기애애하게 흩어지면서 다음 만남을 얘기할 수 있는 게 아닐까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렸던 우리들이 자라고 각자의 삶을 꾸리면서 함께 만날 수 있는 날은 점점 줄었다. 먹고 살기 바쁘고, 자식들의 스케줄에 맞추다 보니 애들이 먼저가 되었다. 한 번씩 가족들이 왔다 가면 서로 상처 주는 말들에 속상하기도 하지만, 엄마는 여럿이 모여 밥 한 끼 먹고 시끌벅적 사람 사는 소리가 난다고 좋아하신다.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각자의 삶이 먼저이고, 각자의 형편과 사정을 먼저 계산하고 만날 시간을 챙긴다.
이 소설집에서 유난히 마음에 들어오는 건 조남주의 「가출」이었다. 72세의 아버지가 갑자기 가출했다. 엄마는 그 소식을 거의 한 달이 다 되어서야 자식들에게 알린다. 전화 한 통에 엄마의 집으로 모인 자식들은 아버지의 가출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 출가나 실종도 아니고 가출이라니, 전혀 그런 낌새를 느끼지 못했던 터라 당황스럽기만 하다. 전형적인 가부장으로 군림했던 아버지, 자기 일이라며 집안의 모든 대소사를 직접 챙기고 관리했던 사람. 퇴직 후 집에 머물던 아버지는 편지 한 통을 남기고 사라졌다. 아버지의 과거 모습을 보면 전혀 상상할 수 없는 행동이다.
성인의 가출은 경찰에서도 심각하게 수사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가족은 수시로 모여 아버지의 가출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머리 맞대고 의논한다. 말이 의논이지, 각자의 생각을 얘기하다 보면 동의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한다. 그런 시간 속에 이상하게 보이는 한 가지. 아버지 문제로 세 남매가 엄마 집에 모일 때마다 엄마는 음식을 한다. 무슨 명절을 맞이하는 것처럼 큰 상을 차린다. 아버지를 걱정하며 모인 자식들은 그 음식 앞에서 침이 고인다. 맛있게 먹는다. 아버지 걱정 때문에 물 한 모금도 안 넘어갈 것 같은데, 그 맛있는 음식이 잘도 넘어간다. 그렇게 한번 두 번, 흩어져있던 자식들은 모인다. 평소 아버지 앞에서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엄마도 자기 의견을 또박또박 말한다. 우리 엄마가 이렇게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나? 주인공은 평소에 보지 못했던 엄마의 모습에 또 놀란다. 그리고 주인공과 아버지 사이에 있는 어떤 비밀. 아버지의 생사나 걱정을 덜어낼 수 있는 어떤 단서로 주인공은 아버지가 잘 드시고 어딘가에서 잘 지내고 계시는구나 하는 안도의 마음을 갖는다.
아버지가 사라진 집안의 풍경이 낯설다. 엄마는 제법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고, 가족이 식사하고 나니 큰오빠와 작은오빠는 같이 설거지를 한다. 아이들은 할아버지가 서재로 꾸며놓은 방에서 뛰어놀면서 어지럽히기도 한다. 소리 질러가며 놀아도 누구 하나 제지하지 않는다. 어느 순간 모이는 날마다 음식을 만들었던 엄마는 음식 재료만 사다 놓거나 하기도 한다. 아버지가 계셨다면 일어날 수 없던 일들이 아버지의 부재로 실현됐다. 가부장적인 아버지가 그동안 집안에서 어떤 존재로 군림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버지를 걱정하며 고민하던 가족들도 시간이 흐를수록 아버지 걱정은 내려놓은 듯하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게 아니어도 어차피 아버지를 찾을 방법은 없었으니 가족들이 딱히 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전화기까지 두고 나간 사람을 찾을 방법이 쉽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이상하게도 아버지의 가출 원인은 찾지 못했다. 아무도 그 이유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소설은 진행된다. 결국,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일흔이 넘은 아버지의 가출이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한 그 가정의 풍경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가장이-, 남자가-, 이런 식의 생각과 말들이 그 가정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가족으로의 존중이 아닌 억압하는 가부장의 부재는 전혀 다른 세상을 만든다. 아버지가 사라진 이 가족의 모습처럼. 게다가 아버지가 사라지니 가족들은 편하게 모인다. 물론 일부러 시간 내서 와야 하겠지만, 어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서로 얼굴 보는 시간이 만들어진다. 한 사람의 부재가 만들어낸 이 평화롭고 자유로운 시간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가족 모임이 종종 있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만나서 편하고 기분 좋아야 모인다는 의미가 있을 것일 테니까. 우리 가족이 조금 더 자주 연락하고 조금 더 자주 만나게 된 것도 아버지의 부재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를 걱정하는 자식들이 더 자주 전화했고, 아버지 때문에 옴짝달싹 못 하던 엄마에게 이제는 시간이 생기니까 여기저기 같이 다니려고 하고, 아버지 기일을 챙긴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엄마를 보러 오는 명절 한 번 더 지내는 기분으로 챙기고. 그리고 조금은 더 웃을 일이 많아졌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본인이 원한 가출로 어딘가에서 먹고 자고 혼자인 삶을 즐기고 계시겠지만, 우리 아버지는 하늘에서 당신 없는 우리 가족을 지켜보고 있을 텐데. 궁금하긴 하다. 지금 우리 가족의 모습을 보고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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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야……진짜 돼지네." 그래 이거였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웃었다. 혜인의 새침함은 시간이 흐르며 타박되 었다는 걸, 우리가 이랬었다는 걸 나는 아주 오랜 시간 잊고 있었다. "그게 만나자마자 할 말이야?" 나는 다른 손으로 가방을 고쳐 쥐고 혜인을 마주 보았다. 그녀는 나프나프와 에고이스트를 지나, 나는 후부와 MLB를 지나, 우리 모두 클럽모나코쯤으로 왔구나 생각했다. 혜인의 크림색 원피스와 트린치코드가 맵시 있게 잘 어울렸다. - p.27 (김봉곤 "시절과 기분"에서)
2. 소설 『보다』는 문지문학상에서 엄선한 젊은 작가의 신작을 계절별로 내는 시리즈 문학 중의 하나이다. 이번 편은 봄-여름 편이다. 젊은 작가라 함은, 등단한지 10년 이하의 젊은 작가를 말하는 것이지, 나이가 젊은 작가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고로, 나도 소설가로 등단만 한다면, 젊은 작가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이다. 파릇파릇한 20대의 기분을 한껏 느낄 수 있다는 말. 생각하면 즐겁지만, 과정이 너무도 험난하다. 그래서 『보다』를 본다. 조금이라도 내게 감명을 주렴. 조금이라도 내게 희망을 주렴. 이렇게 어르고 달래면서 말이다.
총 네명의 작가에 대한 네명의 단편을 실었고, 작가와의 간단인터뷰도 실렸다. 책도 얇아서, 읽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 않는다. 단편이 주는 묘한 매력이란, 이야기가 이제 시작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어느새 끝나버려서 나를 당황시킨다는 것이다. 『보다』의 소설 네편은 그 정도가 더 심하다. 아주 짧은 단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을 다 읽고도 왠지 끝난 것 같지 않은, 왠지 소설에서의 삶이 계속될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형은 왜 그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해? 아버지 나이를 생각해봐. 진짜 갑자기 노망나서 나간 걸 수도 있다고. 우리가 모르는 돈 문제나 원한 문제가 있을 수도 있고 어쩌면 범죄에 연루된 걸 수도 있어." "부정적인 건 내가 아니라 너야 인마. 자꾸 재수 없는 소리 할래?" - P.67 (조남주 "가출"에서)
물론 삶이란 어느 지점에서는 멈추게 되어 있다. <가출>에서 아버지는 끝끝내 돌아오지 않지만, 그 돌아오지 않음이 절망이 아닌, 오히려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는 점에서, 소설 『보다』의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아마도 희망이지 않을까 싶다. 끝나도 끝나지 않는 삶처럼, 희망도 끝나지 않는 것 같이.
3.
어떻게 할까? 어떻게 생각해? 묻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그게 선생님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할 거라는 동기들의 만류에도 너는 꿈쩍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 거라고 말했고 정말 그렇게 했다. 이튿날 아침, 대학 본부에 가서 정식으로 가서 이의를 제기하고 그날 저녁 신문사 입구 건물에 대자보를 붙였다. 밤새 컴퓨터 앞에 앉아 원고를 작성하고, 커다란 전지 위에 그 원고를 또박또박 써 내려가던 네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선생님이 신문사 주간으로서 학내에서 일어난 부당한 문제들에 관심을 갖고, 옳은 의견을 내고, 학생들의 권익을 위해 힘써온 사람이라는 내용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대자보를 왜 네멋대로 붙여? - P.103 (김혜진 "다른 기억" 에서)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듯이 나의 마음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수 있다면 어떨까. 언제부터인가, 점점 더 그러한 소통은 멀어지고 저마다 마음의 짐을 간직하고 사람과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다. 서로가 서로를 침범하지 않는 관계. 그러한 관계가 지금이 시대에서는 오히러 바른 관계다. <다른 기억>의 문제의식과는 달리.
선생님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모른 척할 수 있었더라면, 함께했던 사소한 기억을 떠올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좋기만 한 이야기를 떠들어댈 수 있었더라면. 아니, 네가 선생님에게 좋은 사람이길 포기할 수 있었더라면 뭔가 달라질 수 있었을까. 하지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오래전 어두운 캠퍼스에서 너와 마주 섰을 때 내렸던 것이었고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었다. - P.123 (김혜진 "다른 기억"에서)
4.
앙코 씨는 자기가 뭘 실수했나 당황하는 표정을 지으며 태순을 봤다. 태순의 눈이 뭔가 말하고 있었고 입꼬리가 실룩이는 것처럼 보였지만 태순은 가끔 그랬고 말하고 싶은 게 잔뜩 있지만 말하지 않는다는 걸 온몸으로 말했는데 그건 나도 그래, 너랑은 다르지만 나도 그래, 68혁명이 일어나고 야스다강당이 해방되고 멕시코 올림픽에서 검은 장갑 시위대가 행진하고 기동대가 투입되고 박살 난 도쿄대생들이 질질 끌려 나오는데 나는 여기서 뭐하지, 반도호텔과 삼성빌딩 사이에 서서 골목을 돌아 나오는 바람, 서울 시내의 골목을 휘젓고 튀어나온 젤리처럼 부드럽고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감상에 젖기나 하다니, 그렇지만 내가 서울에 살기로 한 것도 이 바람 때문인데, 베를린과 도쿄를 본뜬 서울의 건물들 사이를 거닐며 액화되는 공기의 흐름을 느끼면 안 되냐고 양코 씨는 생각했고 이쪽으로 가요, 오늘은 남산으로 가요, 라고 말했다. 양코 씨와 태순 모두 서울에 산 지 1년 넘도록 변변한 친구가 없었고 친구를 사귈 생각도 없었다. - p.136 (정지돈 "빛은 어디서에서나 온다"에서)
우연인지 필연지, 일부러 그랬는지, 모르고 그랬는지 『보다』의 네명의 작가는 남성 둘, 여성 둘로 이루어져 있다. 양성평등을 실천하듯, 계졀도 봄-여름. 가을과 겨울은 이제 곧 나오겠지. 친구를 사귈 생각은 안 하지만, 소설을 사귈 생각은 하곤 한다. 『보다』같이 짧으면서 강한 인상을 남기는 소설들은 더더군다나 잘 사귀어 볼 필요가 있겠다. 작가와의 간단 인터뷰가 작품마다 전부 있어서 더욱 더 신선한 시리즈다. 이 가을에 봄과 여름을 생각한다. 다가오는 미래이기도 하고, 또 지나간 과거이기도 한 계절의 단상은 그렇게 내게로 온다. 그 단상은 새벽부터 내게 와, 짧게 머물고 가다가 오랜 여운을 남긴다. 삶의 희망을, 삶의 목표를 다시금 보듬어 본다. 오래 살지 않아도, 알차게는 살고 싶다는 소망, 그 소망이 나에게 열정의 불을 타오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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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게 읽은 소설들이다. 제목처럼 소설을 봤다고 해야 할까. 이상하게 어떤 부담도 없이 그렇게 읽었다. 좋았으니 좋은 리뷰를 써야 한다는 부담도 없었다. 이상하게 그랬다. 인터뷰 내용 중 기억하고 싶은 부분을 기록한다. 깁봉곤은 아주 섬세한 작가인 것 같다. 작고 세밀한 것을 놓치지 않고 담아내려 노력하는 모습이 보인다. 김혜진의 인터뷰는 내내 생각하게 만들었다. 가까워진다는 것과 조금 거리를 둔다는 것, 예전과 달리 변해버린 관계. 감정과 기분을 비교해보자면, 감정은 순간 아주 강렬하게 들이닥쳤다 사라지는 반면에 기분은 말씀대로 오래도록 열게 남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요.(…)감정 다음에 기분이 찾아온달까요. 강렬하고 짧았던 감정이 기분으로 천천히 변환된다고 바꾸어 말 할 수 있을 것도 같아요. 새파란 잉크가 물에 풀어지듯이요. (김봉곤)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건 그 사람이 나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 과정 같아요. 대체로 저는 늘 그 차이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편이고요. 그레서 그런 이야기들을 많이 쓰게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차이가 드러나는 순간들은 큰 사건이나 사안이 아니고, 사소하고 작고, 때로는 우리와 아무 상관 없는 일일 때도 있고요. 그런 일들이 결국 관계를 달라지게 하는 것 같아요. 그것 자체가 우리 관계를 바꾼다기보다는 그때 우리의 상황, 너의 기분, 나의 일상 같은 내밀하고 아주 사적이고 우연적인 요소들이 겹쳐져서 영향을 준다는 생각도 하고요. (김혜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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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설은 웬만해선 사지 않지만 이 책은 진입 장벽을 가볍게 부수었어요. 정말로 저렴한 가격, 손에 쏙 들어오는 아담한 판형, 세련된 디자인, 그리고 요즘 제일 핫한 젊은작가들의 감각적인 소설을 선별해 엮어주는 센스까지. 문학과지성사의 파격적인 결정에 박수를 보냅니다. 한 권의 무거운 책은 들고 다니기도 무겁고 읽다 보면 앞 내용도 까먹어 버리고요. ㅎㅎ 보다 가볍고 내용은 에스프레소처럼 진하고 맛있는 소설 몇 편이 훨씬 오래 기억에 남을 듯 해요. 특히 이 책에서는 조남주 작가님의 '가출'이 제일 기억에 남았습니다. 딱히 나쁜 아빠, 나쁜 남편은 아니었음에도 묘하게 가족을 구속하고 있던 아버지가 가출한 이후 묘하게 더 뭉치게 되고 더 화목해진 이 가족의 이야기가 통쾌하고 시원하더라구요. 김봉곤 작가님의 소설도 가볍고 세련된 필치가 한 편의 미니드라마 같았구요. 다음 소설 보다 시리즈도 상당히 기대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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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지난해의 봄여름을 배경으로 한다. 봄여름에는 작가들이 글을 덜 발표하나? 아니면 출판사에서 기대하는 글이 부족했나? 왜 묶었을까? 이런 하찮은 호기심을 가져 보기도 하고.
네 명의 작가가 나온다. 이 가운데 내가 알고 있는 이름은 조남주 한 사람이다. 작품도 넷 중에 조남주의 것만 들어온다. <82년생 김지영>보다 이 작품이 훨씬 마음에 든다. 냉랭하고 담백한 느낌이 좋다. 이번에는 더 기대하고 싶어진다.
다른 세 사람의 글은 아직이다. 진득하게 읽혀지지 않는다. 그냥 이쯤에서 넘겨 버리고 싶군,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군, 그래도 이름을 남겨 두기는 해야겠군, 하는 정도로 그친다. 이제 나는 억지로 읽으려고 하지 않는다. 읽고 싶지 않은 글이나 잘 읽히지 않는 글은 죄채감을 덜어 내고서라도 치우려고 한다. 아예 안 읽겠다는 게 아니라 일단 열어 보기는 했으니, 그런 뒤에 물리치는 것이니 나도 할 말은 있는 셈이다. 읽고 싶은 글만 해도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연도를 밝히는 소설 모음집은 어떤 점에서 그 시대의 거울이 되기도 한다. 그 해에는 이런 고민이 있었다는 뜻이 되기도 할 테니. 바야흐로 성의 정체성을 드러내 놓고 고민하는 시대, 절대적일 줄 알았던 권력자를 바라보는 입장에 따라 차이가 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시대, 모든 독자가 이해해 주지 않더라도 내 글을 쓰고 싶다는 작가의 목소리가 당당하게 받아들여지는 시대라고 생각한다. 점점 더 마음에 드는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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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설을 자주 읽지만 단편집을 다 읽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번에 구매한 <소설 보다>는 네 편만 있어서 다 읽을 수 있었다. 가격도 착해서 다음에 가을- 겨울 편이 나오면 또 읽으려고 한다. 조남주의 <가출>을 제일 먼저 읽었는데 아버지가 가출했다란 문장이 처음이어서 신경숙 소설 <엄마를 부탁해>가 생각나기도 했다. 이번에도 잃어버린 아버지에 대한 사부곡(?)인가 짐작했는데 아니었다. 아버지는 자발적으로 집을 나가서 잘 지내고 있다. 가출한다고 메모를 남겼고 엄마는 남들보기가 부끄러워 바로 자식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왜 가출했을까. 그 이유가 궁금했지만 소설이 다 끝날 때가지 잘 모르겠다.(나만 모르는지도, ㅎ)아버지를 찾느라 수소문을 한다. 엄마랑 오빠들도 처음엔 아버지를 걱정하다가 그냥 잘 지낸다. 아버지가 처음부터 안 계셨던 것 같이 주말마다 엄마가 해주신 음식을 먹고 잘 지낸다. 조남주 작가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 소설을 썼다고 말했다. 소설을 다 읽고 거실에 계신 아빠가 만약 사라진다면(그럴리는 없겠지만) 어떨까. 무서울 것 같다. 걱정도 되고. 아님 소설처럼 엄마랑 남동생이랑 셋이서 잘 살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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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리뷰를 쓴 줄 알았는데 없다. 기억이 잘못된 건지 실제로 안 쓴 건지 잘 모르겠다. 그래도 한줄평은 남아 있다.
한국소설의 최전선, 네 명의 작가 모두 건필하길 바란다.
이 말은 그 당시의 내 진심이었을 텐데, 그 중에서도 김봉곤 작가를 염두에 두고 쓴 것 같다.
이 작가와 관련된 '사화'라고 할지의 전말은 잘 모르지만, 소설 자체로 보거나, 편집자로서 그가 썼던 글들의 일부를 접했던 바로서는 어떤 안타까움 같은 걸 느꼈다. 전적으로 본인의 실수나 잘못이었던 것인지 오해가 있었던 것인지, 타이밍의 문제인지는 알 수 없고, 현재 김봉곤 씨가 편집자로 계속 일을 하며 글을 쓰고 있는지 여부도 알 수 없으나, '재기'(라는 표현이 좀 이상하기는 하지만 달리 다른 표현을 못 찾겠다)할 수 있었으면 한다. 본인이 잘못한 바가 있다면 사과하면 되는 문제라 생각하고(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중요한 건 그 실수를 인정하는 것이고, 그 실수를 인정했다면 그걸 용인해주는 것도 사람들의 역할이자 몫이라고 생각한다), 글 쓰는 게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한다면, 소설가에게 그 일 자체를 못 하게 하는 건 지나치게 잔인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읽은지 꽤 오래 돼서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이렇게 네 편씩 실리던 때의 『소설 보다』가 현재보다 더 나았다. 소설가들의 면면도 조화롭다. 성별과 연령대를 감안한다면. 이 즈음의 『소설 보다』가 그립다고 하면 꼰대스러운 걸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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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든 가지고 다니며 읽기 좋은 컴팩트한 사이즈에 보기 편안한 편집, 그리고 기대를 배신하지 않는 작품구성에 늘 사게 되는 소설보다 시리즈. 세 편 모두 좋았습니다. 김혜진 작가님의 <다른 기억>을 읽을 때는 헉 어떻게 이런 소재를 소설화하셨지 그런데 너무 대박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읽었고 조남주 작가님의 <가출>은 뭔가 제가 처음에 기대한 얼렁뚱땅 갈등봉합식 결말이 아니었는데 그 점이 좋았어요. 어디선가 아빠가 잘 살거라고, 그 느슨하디 느슨한 연결망에 안심하는 딸의 이야기ㅠㅠ 좋았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