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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에 대한 양심-칼뱅에 맞선 카스텔리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성서가 인류 역사상 가장 존엄한 책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마도 '사랑'의 기록이기 때문일 것이다. 멕시코 시인 옥타비오 파스는 시론집 [활과 리라]에서 사랑은 곧 타인의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고 했다. 타인을 향한 긍정적 의지, 다름 아닌 관용의 정신이 사랑의 가장 밑바탕이 되는 것. 자, 여기 신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강요하는 이와 인간에 대한 관용을 실천하는 이가 있다. 역사는 그동안 전자를 지나치게 부풀려 평가해온 반면, 후자는 철저히 외면한 채로 흘러왔었다. 종교개혁을 이끈 칼뱅과 칼뱅의 독선에 맞선 카스텔리오. 전기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수백 년 전 이야기를 마치 눈앞에서 우리 눈앞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건인양 폭력과 양심의 맞섬을 서술하고 있다. 더불어 역사가 어떻게 왜곡되는지도.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는 여러 분파로 나뉘어져 몹시 혼란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카톨릭에 반대하여 새로운 교단을 열기는 했지만 체제나 조직은 정비되지 않은 채였다. 이때 젊은 신학자 칼뱅은 [기독교 강요]라는 저서를 통해서 명성을 쌓아가기 시작했고 결국 구교에 대항하는 제네바 시의 종교국을 관장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자유로움과 질서 사이에는 갈등이 놓이게 마련이다. 칼뱅은 신교의 체제와 조직을 위해서 인간의 자유로움은 억제되어야 한다고 판단한다. 하나님의 위대함 앞에 폭력을 써서라도 인간을 작게 만들어야만 했던 칼뱅은 인간을 저항 없이 경건하고 순종하는 양떼로 만들고자 했다. 온갖 규칙과 조항으로 시민들의 행동을 제약하고, 그와 해석을 달리하는 몇몇 신학자들을 박해하는 데에도 주저함이 없었다. 의사이자 신학자인 미겔 세르베토를 화형시키는 데에 배후에서 조종하고 이를 반대했던 카스텔리오를 죽음의 문턱에까지 밀어넣는다. 사랑은 사라지고 광신만 남은 종교개혁자 칼뱅.
카스텔리오는 신의 질서보다 인간의 자유를 옹호하는 양심이었다. 그는 구교에 대항하여 칼뱅의 문하에 들어오지만 칼뱅의 독선적인 성격에 제네바시를 떠나고 만다. 이후 바젤 대학에서 그리스어를 가르치던 카스텔리오는 '이단'으로 몰아 변명의 여지도 주지 않은 채 '세르베토'를 살인한 칼뱅을 고발한다. '진리를 구하고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그것을 말하는 것은 절대로 범죄일 수 없다, 아무도 어떤 신념을 갖도록 강요해서는 안된다. 신념은 자유이다'라고 말했던 카스텔리오는 이단은 상대적인 차이이며, 세계는 단 한 가지가 아니라 수많은 진리들을 위한 공간을 갖고 있다는 주장을 통해 칼뱅의 독선을 당시 유럽의 종교계에 알리게 된다. 누구도 칼뱅의 신정에 맞설 수 없는 시대에 그는 목숨을 걸고 양심을 수호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단을 인정하는 관용, 곧 사랑의 정신.
츠바이크가 이 책을 쓸 무렵은 이탈리아가 이티오피아를 병합하고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강제 합병되기 직전이었다고 한다. 칼뱅의 독선적인 전체주의처럼 독일사회주의당 히틀러 역시 츠바이크의 책들을 국가와 민족을 보호하기 위해서 금서처분을 내린다. 어쩌면 히틀러의 전체주의에 대항하려는 츠바이크의 노력이 수백년 전 카스텔리오의 모습을 나타났을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어가면서 인간에게는 자유가 왜 필요하며 자유를 통해 인간다움이 보호받을 수 있다는 것도 더 분명히 알 것 같다. 더불어 자유에 대한 억압이 때로 가장 선한 모습으로 포장되어 다가온다는 사실도. [인상깊은구절] 우리의 세계는 단 한 가지가 아니라 수많은 진리들을 위한 공간을 갖고 있다. 사람들이 원하기만 하면 서로 나란히 모여 살 수 있다. '우리가 서로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의 신념을 판결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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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중학교 시절 교과서에 종교개혁자로 등장한 '칼빈'이라는 인물은 기독교인인 나에게는 늘 종교개혁의 상징으로 남아있었다. '칼빈'인지 '칼뱅'인지 그 이름을 같고도 싸울정도로 그 존재 자체에 상징적인 인물이 바로 '칼뱅'이다.
종교개혁의 상징이며, 기독교 강요를 썼고, 제네바를 거룩한 도시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였던 그에 대해 누구도 뭐라 말하지 않았다. 물론, 그 시대에 칼뱅과 맞섰던 몇몇 인물들이 있었기는 하였지만 대체로 그들은 '이단자'로 규정되어졌다.
그러나, 츠바이크의 이 책은 칼뱅과 맞섰던 '카스텔리오'를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칼뱅과 맞섰던 인물을 통해 칼빈에 대해 다시 바라볼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다. 이 시대에 칼뱅이라면 무조건적인 숭배의 경지에 있는것이 사실인데, 그에 대한 색다른 접근을 한 책이라 책을 읽는 순간순간 계속 흥미롭게 느껴졌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믿어왔던 어떤 인물에 대해 이렇게 전혀 다른 시각으로도 볼수 있다는 것이 재미있는 일이다. [인상깊은구절] 모든 독재의 얼굴은 어쩌면 이토록 똑같은가. 독재체제에 빌붙어 가기 이득을 챙기는 사람들의 모습은 또 어째서 이토록 같은가. 그리고 슬픈 일이지만 이른바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은 어째서 그토록 비겁하고 문약한 것인가. 사태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얼마 안되는 사람들은 겁먹고 움츠러들어 자기 한 목숨을 지탱하기에 급급하다. |
| 나는 인문학을 공부하는 학생이다. 그런데 얼마 전, 한 교수님으로부터 “인문학 공부는 아는 것을 모르게끔 만드는 것이다.” 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처음에는 ‘아는 것을 모르게 만들다니... 별 시답지 않은 소리를 다하시네...’하고 콧방귀를 뀌었었는데, 지금은 그 교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하게 되었다. 아니, 한 술 더 떠 ‘아는 것을 모르게 하는 공부야말로 참 된 공부다’ 라고 까지, 나는 그 말을 맹신하게 되었다. 만약 나의 얘기가 무슨 소린지 통 모르겠다면, 나는 이 책 ‘폭력에 대항한 양심’을 읽어볼 것을 권유하고 싶다. 정복자 칼뱅- 저 유명한 종교 개혁자 칼뱅을 정복자라고 한 데에 의아해 하는 사람도 있으리라. 그러나 이는 이 책이 고발하고자 하는 ‘우리가 아는 것’에 대한 첫 번째 대항이다. 칼뱅의 초상화를 본 사람이라면 그가 얼마나 ‘엄격주의자’였는지를 대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알프스산맥의 석회암 지형과 닮았다’고 한 저자의 말처럼 그의 얼굴에서는 그 어떤 감정도 찾아 볼 수 없다. 더욱이 그의 교리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이전의 어떤 기독교 해석보다 더욱 냉혹하고 불친절하고 기쁨을 모르는, 그 어떤 인간적인 것도 자리 잡을 수 없는 바위의 모습이었다. 그런 그가 설교자로 제네바에 들어섰을 때, 제네바에서의 ‘기독교인의 자유’가 종말을 고했다는 것은 어쩌면 쉽게 유추해 볼 수 있으리라.【여기서 우리는 이 시대의 종교 개혁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즉, 이 시대의 종교 개혁이 과연 르네상스(휴머니즘)적인 것이었는가? 라고 되물어 볼 필요가 있는 것이 다. 이 책에서는 칼뱅의 개혁은 그야말로 새로운 것(칼뱅의 교리)에 또 다른 권위를 부여하 는 과정이었을 뿐이라는 관점을 고수하고 있다. 그러한 것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 바로 ‘정복자 칼뱅’이며, 그러한 칼뱅의 폭력은 이 책에서 아주 세밀히 묘사되고 있다.】 어쨌든 칼뱅은 그의 새 교리로 제네바를 장악했고, 거기에 권위와 권력을 쏟아 부었으며, 이윽고 그의 교리에 반하는 모든 것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탄압ㆍ저주하기 시작했다. 모든 독재자가 그러했듯이 이제 칼뱅에 의한 폭력이 시작된 것이다. 자유로운 양심 카스텔리오 -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이 카스텔리오라는 인물은 칼뱅의 독재와 폭력에 당당히 맞섰던 유일한 인문주의자, 자유로운 양심이었다. 그러나 카스텔리오의 정작 위대한 점은 그가 칼뱅의 독재에 대항했다는 데에서가 아니라, 바로 그의 이념 속에서 발견된다.(이 책의 훌륭한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이념은 이른바 자유와 관용의 이념이었던 것이다. 자유와 관용의 이념이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이념들이 바로 오늘날에까지도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아직도 수없이 많은 폭력과 독재가 우리들의 교육을 지배하고 있지 않은가!(학교의 교과서가 그러하고, 독단적인 교사들이 그러하고, 나아가 그러한 교육을 받은 학자, 지식인들이 그러하다) 그리고 그러한 폭력과 독재의 교육은 “자유는 안 된다. 개인이 철저히 대중 속에 녹아들도록 하자!” 라는 칼뱅의 독단과 또 얼마나 일치하고 있는가! 때문에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의 교육에서 꼭 필요한 것은 역시 자유와 관용 그 이상의 것이 될 수는 없으며, 나아가 그러한 자유와 관용은 모든 폭력에 대항하는 양심으로서, 오늘날까지도 살아있는 이념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이처럼 칼뱅과 카스텔리오를 통해 모든 폭력에 대항하는 그 어떤 양심을 독자들에게 촉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양심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바로 자유와 관용의 이념이다. 이제 다시 처음의 인문학 공부 얘기로 돌아가서, 인문학 공부, 나아가 그 어떤 학문을 공부하고 진리를 탐구하는 학생들에게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싶다. “아는 것을 모르게 하라” 곧, 그것이 칼뱅의 편에 서지 않고 카스텔리오의 편에 서는, 곧 자유로운 양심・자유 영혼의 목소리가 되는 것임에 틀림없으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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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살았던 시기 그리고 그가 직접 목도하고 체험했던 시대를 생각할 때, 역사 속의 한 광신과 독재를 준열하게 비판하는 작가의 목소리는 더욱 예사롭지 않은 울림을 갖는다. 저자의 목소리가 겨냥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역사 속의 한 인물인 칼뱅 개인이 아닐 것이다. 나치 정권하에 삶을 살았던 유태인으로서, 그리고 한 지식인으로서 츠바이크는 독재의 폭력성을 누구보다 가까이 체험하고 깊게 절망했음이 분명하다. 작품 속에서 독재자 칼뱅을 매섭게 비판하는 작가의 목소리는 따라서 자기 시대의 광신과 독재를 비판하는 츠바이크 개인의 열정적 목소리와 중첩되며, 그래서 이 책은 츠바이크의 어떤 작품보다 더욱 생생하고 긴박감이 넘친다. 세계사 시간에 한 페이지를 차지했던 위인 칼뱅의 새로운 면을 알게 된 것도 흥미롭지만, 칼뱅의 비판을 통해 보여지는 지상의 모든 광신과 독재에 대한 저자의 흔들림없는 비판과 단호한 거부감은 무엇보다 인상적이고 강렬하다. [인상깊은구절] "한 인간을 죽이는 것은 절대로 교리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냥 한 인간을 죽이는 것을 뜻할 뿐이다." 참되고 명료하다는 점에서 절대로 지워지지 않을, 가장 인간적인 장엄한 말이다. 카스텔리오는 마치 단단한 금속에 새겨넣은 것 같은 이 한 문장으로, 모든 시대에 걸쳐서 세계관 차이로 인해 이루어지는 박해에 판결을 내렸다. 한 인간을 제거한 일을 변명하기 위해서 그 어떤 논리적.윤리적.국가적.종교적 핑계를 댄다 해도, 그것은 살인을 했거나 명령한 사람에게 개인적인 책임을 면제시켜 주지 못한다. 인간의 피를 흘리는 것은 언제나 유죄이며, 절대로 세계관을 이유로 살인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진리는 퍼져나가는 것이지 강요되는 것이 아니다...(중략)...확신이란 개인적인 체험이고 사건이며, 그 확신을 소유한 개인 이외의 사람에게는 속하지 않는다. 확신은 단속되거나 훈련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어떤 가르침이 수없이 하나님을 들먹이고 성스러운 진리라고 스스로 주장하여도 하나님이 만들어낸 인간 생명의 성스러움을 파괴할 권리를 주장할 수는 없다. |
| 역사를 올바로 파악하기는 쉽지않다. 역사를 해석하는 역사가의 책임이 막중한 것도 그 까닭이다. 이 책은 현대 개신교의 아버지라 추앙받는 쟝칼벵과 동시대에 살았던 카스텔리오라는 학자의 이야기다. 왜곡된 역사를 배우며 자란 나같은 30대에게 충격을 주기에 충분한 역사소설이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칼벵의 신학적 엄밀함과 그의 고결한 인생에 대해 존경심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우리의 선조들에 의해 주입된 일종의 강한 신념이다. 이 책은 칼벵의 일생을 인간적인 측면에서 추적한다. 그가 신학의 원리를 완성하게된 동기와 그 과정들을 끈기있게 추적한다. 그의 결론은 칼벵도 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자기의 신념을 위해 남을 희생할 수 밖에 없었던 불완전한 인간말이다. 그런 사람을 추앙하고 존경하는 후대의 사람들에게 역사적 진실은 어쩌면 밝혀지지 말아야 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견디기 힘든 아픈일지라도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져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슈테판츄바이크 처럼 걸출한 역사소설가가 더 많이 등장하기를 바라고 싶다. |
| 내가 알고 있던 칼뱅은 뛰어난 기독교 교리서 '기독교 강요'를 저술하고, 제네바에서 개신교로 신정일치를 이끈 종교개혁가였다. 하지만 제목에서 풍기는 냄새를 보면 폭력은 칼뱅이고 그에 대항한 양심은 카스텔리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스테판 츠바이크라는 유명한 전기작가의 작품을 처음 접해보는 기회이기도 했다. 중심인물 2명이 있다. 칼뱅과 카스텔리오다. 둘다 종교개혁시기에 개신교를 지지한다. 칼뱅은 지지정도를 떠나 루터에서 시작한 종교개혁을 제네바에서 완성시킨자라고 할 수 있다. 칼뱅은 약간 독선적이기는 하지만 뛰어난 신학자이고 종교개혁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개신교중 칼뱅에 영향을 받은 장로교가 최대교파임을 보면, 그의 영향력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본 모습, 아니 다른 모습을 보게 된다는 것은 실로 내 지식에 반항적인 것이었다. 폭력으로 정권을 장악한 제네바의 개신교에 입성한 칼뱅은 그곳을 금욕주의로 다스리기 시작한다. 자신에게도 엄격하고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것을 강요하기 시작한다. 그 강요는 폭력이 수반된다. 심지어는 교회에서 졸았다고 감방행이고, 길거리에서 노래 불렀다고 도시에서 추방이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런 곳에서 살았다면... 비록 내가 개신교에 속해있지만 그것은 끔직하다. 아무런 자유도 없는곳. 그리고 다른 의견. 신학적인 의견, 칼뱅에 비판적인 의견을 낸다는 것은 죽음의 길로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르베토는 화형을 당하고 만다. 세트베토가 신학적으로 다르다고 해서 과연 그에게 화형을 시킬만한 권리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이러한 제네바에서 칼뱅에 비판적인 의견을 내놓는 다는 것은 정말 위험천만한 일이다. 양심을 가지고 있더라도 쉽게 드러낼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카스텔리오는 칼뱅이 잘 못되었다고 한다. 물론 그도 칼뱅과 신학적인 견해에서 조금 다른면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가 지적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 그의 폭력이다. 그의 독선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세르베토를 화형한 일에 관해서 그는 극렬히 반대한다. 칼뱅은 폭력으로 그리고 언제나 긴장을 풀지 않고 살아간다면, 그는 이 모든것을 온화함으로 맞선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양심적인 투쟁은. 폭력이 아니라. 책을 통해서 비판을 하는 것이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저서는 칼뱅에 대해 가치중립적이지 못한 문체로 계속된다. 하지만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츠바이크가 칼뱅에 비판을 가하는 것은 그의 폭력성이다. 그의 과도한 권위주의이다. 그의 신학을 잘못된 여부를 가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이 책을 썼을 당시가 개신교국가 독일이 나치치하에 있던 시기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가 왜 그렇게 폭력을 싫어했는지 알 수 있다. 나는 지금도 칼뱅이 믿은 기독교를 믿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진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칼뱅이 행한 폭력은 동의하지 않는다. 그를 보면 인간에게 버거운 권력이 주어질 때 얼마나 무서워 지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기독교의 진정한 사랑없이 오직 율법으로만 금욕으로만 치닫는 그를 보면 사랑없는 사람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 수 있다. 지금 그가 있던 스위스 제네바는 세계 최고의 자유국이다. 그리고 그의 사상이 전해진 영국과 미국, 네덜란드 또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가 가장 앞선 나라들이다. 츠바이크의 말처럼 극과 극은 통하는 것일까? 그가 잘못된 방법으로 종교개혁을 이끌었지만 결과적으로 우리는 그 혜택을 누리고 있고,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래서 역사는 무섭고, 진리는 무섭다. 그렇지만 자기만 의롭다 여기는 것은 더 무섭다. 그리고 역사의 진실을 알게 되는 것 또한 두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덮어두고 모른채 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이리저리 괴로운 일이다. |
| 슈테판 츠바이크의 소설은 자신이 말한 것과 같이, 자신의 양심에 따라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시대, 또는 인물에 관한 것이다. 또한 그것만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하리라 믿었다. 그리고 그것은 옳았다. 카스텔리오는 칼뱅의 이상세계건설의 잘못을 지적하고, 그것이 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지적했던 인물이다. 그로 그는 교회학교장을 떠나고 생계가 막혔지만 그런 것에 굴하지 않았다. 칼뱅은 더욱 제네바를 자신만의 국가로 만들고 있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뜻을 잘못 이해한 세상이었다. 자신과 뜻이 다른 사람은 누구든지 어떤 방법을 써서든지 처형을 했던 칼뱅.. 그 당시, 그의 잘못을 말하고 당당히 가벼운 육체를 버린 카스펠리오, 그의 영혼은 언제나 아름답게 울릴 것이다. 난 이 책을, 그 인물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글을 쓴 슈테판 츠바이크를 존경하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