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의 법정 이야기는 그가 실제로 무엇을 했는지 세세한 사실들을 한데 모아놓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그가 누구인지를, 예수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이야기 입니다. 예수가 누구냐, 예수의 정체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복음서가 어떻게 답하는지를 볼 때, 예수의 눈앞에서 우리의 정체가 밝혀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보게 됩니다. 구약성서는 인간이 과연 하느님을 볼 수 있는지, 그리고 그분을 뵙고도 살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복음서의 재판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또 다른 질문을 제기합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보시더라도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겠냐고 말입니다.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좀 더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만족하는 ‘우리’ 혹은 ‘나’를 하느님께서 보실 때, 그 ‘우리’ 혹은 ‘나’는 결코 살 수 없습니다. 재판이 끝나면, 우리는 진리 앞에 무릎 꿇어야 합니다. 생명과 새로운 삶을 주는 유일한 힘인 그분의 손에 우리를 맡겨야 합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익숙하지 않은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신뢰는 우리가 사랑받고 있음을 깨닫고 이를 받아들일 때만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살아있는 진리는 우리의 응답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심판대에 선 그리스도 p.241 / 로완 윌리엄스] - 예수님은 심판대 앞에서 침묵 하심으로 세상의 권위를 향해 맞서신다. 세상을 향해 살기위해 살려달라고 울부짖지 않으신다. 그리고 침묵을 잠시 깨신다. 각자의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빌라도의 혹은 사제의 ’네가 정말 유대의 왕이냐’라는 질문에 ‘내가 바로 그다’라고 또는 ‘네가 말했다’라고 대답을 하신다. 예수님의 그 대답은 발을 딛고있는 땅 위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겠노라 꿈꿔온 결과의 대답 이였다. 우리가 얼마나 잘났고, 우리의 모습이 어떠한지 바라보는 세상의 기준을 전복시켜버리는 대답이다. 그렇게 세상의 권세 앞에서 마주하고 계신다. 그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것을 보이신다. 우리에게 보이신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이 땅 가운데 세우는 방법인 것이다. 우리가 세운 모든 기준을 십자가 앞에 두는 것, 자신의 이익을 위해 끊임없이 등 떠미는 세상앞에서 예수님의 관점으로 그것들을 바라보는 것. 우리의 나약함을 바라보는 것, 그렇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앞에 섰을 때 우리는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세상이 아닌 진리로서 우리를 마주하게 될 때에는 끔찍한 자신의 모습을 보게된다. 우리의 정체가 십자가를 마주하는 예수님 앞에서 까발리게 되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무력한 우리 자신을 보게되며 그분의 지혜와 완전하심 앞에서 우리는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게된다. 그리고 그런 우리를 다시 일으키신다. 저주를 끊어버리신다. 살라고 하신다. 사랑한다 하신다. 존재 자체로 사랑받는 자임을 신뢰하라고 하신다. 그 사랑이 얼마나 큰지 보게 하시는 것이다. 세상의 기준과는 절대로 부합될 수 없음을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은 보여주고 계시는 것이다. ‘로완 윌리엄스’의 심판대 앞에 선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를 그 심판대 앞으로 끌고와 심판대 앞에 있는 예수님을 보게 한다. 그의 완전하심 앞에 인간으로 자신 스스로가 부여한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연약하고 초라한것인지 보라고 십자가로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 그 십자가를 마주할 때 다시한번 우리는 느끼게 될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 사랑받는 존재구나.’ 라고 말이다.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있는 로완 윌리엄스의 책은 끊임없이 우리를 그 십자가 앞에 데려다 놓는다. 그저 꺼림직한 복음 앞에 우리를 데려다 놓음에 감사할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