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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나이지만
책으로 읽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가끔은 찾아 읽는다. 영화 속 이야기를 알아야만 이해가 가는 책이라면
중간에 접게 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나도 언젠가는 영화를 좋아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읽어
나간다. 영화에 대한 책이라고 해서 전부 영화에 대한 이야기만 쓰여 있는 것은 아니기에..
올해 창비에서 진행한 연속특강 ‘지혜의 시대’에 영화감독이 강연자로 참석했다. 변영주가 그녀이다. 물론 나는 모르는 사람이다. 하긴 알고 있는 영화감독이 한, 두 명에 불과한 나로서는 대부분의
감독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녀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소외된 이들에게 주목하며 현대사회의 실상을 깊이
있게 탐구하는 감독이라고 한다. 이번 강연에서 그녀가 말하는 주제는 ‘영화로
더 나은 세상을 꿈꾸다’이지만 그녀가 주로 말한 것은 창작의 원칙과 태도에 대한 이야기였다.
창작이란 ‘나는 어떻게 살고자 하는가’라는 결기와 ‘나는 무엇을 사랑하는가’라는 태도로부터 시작된다고 믿는다는 저자는, 좋은 사회에서 좋은 영화가 만들어진다고 강조한다. 이는 어떤 사회에
좋은 영화가 없다는 것은 그만큼 좋은 담론이 생성되지 않는 그 사회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라고 한다. 영화에
대해 문외한인 나로서는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지는 어떤 영화가 좋은 영화인지, 아닌 지에 대해 알지 못하지만
영화제작이나 배급을 둘러싸고 이따금씩 벌어지는 갈등이나, 재미는 있지만 울림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 영화가
많은 것을 볼 때, 우리 사회에서 그다지 좋은 담론이 생성되지는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영화는 처음 발명된 시점부터 자본과 기술이
집약된 조건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이윤을 남기기 위해서는 국제적인 배급망이 필요했기에
처음부터 가진 자들의 담론에서 벗어날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기도 했다. 그러나 기술문명의 발달은
이런 영화를 막대한 자본과 고도의 기술력 없이도 제작이 가능하게 했고, 그렇게 지배담론 너머의 이야기로
만들어진 영화를 독립영화라 부른다고 한다. 이러한 독립영화 중에서도 다큐멘터리는 영화가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보아야 하는지를 명백하게 알려주는 장르이기 때문이라고 중요하다고 그녀는 말한다. 다큐멘터리에는
정교한 각본을 바탕으로 내레이터가 실제 주인공처럼 기능하는 설명적인 다큐멘터리, 감독이 카메라에 담고자
하는 대상과 오랜 시간 함께 지내면서 그들이 더 이상 카메라를 낯설어 하지 않을 때 그들의 모습을 담는 다이렉트 시네마, 시네마 베리터 등으로 구분하는데, 영화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재미는
형식을 염두에 두고 보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내가 영화와 영 안 친한 것은 아니란 걸 알게
된다. 다큐멘터리는 즐겨보고, 자주보는 편이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누가 영화에 대해 물으면 독립영화 팬이라고 말하기 위해서라도 그것들의 형식이 어떤 것인지부터 살피며
봐야겠다.
그녀는 한국영화산업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지
않는다. 공연윤리위원회의 사전심사와 검열, 외화쿼터제와 같은
예전의 웃지 못할 제도는 물론, 지금도 시행중인 상영등급부여제도가 어떻게 운영되고 악용될 수 있는지
등이 그것이다. 또한 특정배급사나 극장체인의 상영관 독과점등 한국영화산업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으며, 문제는 그것들을 관리할 어떤 원칙도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강연자는 영화이야기를 떠나 자신만의 창작에
대한 철학도 들려준다. 영화일을 하면서 내 문장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그녀는, 창작자는 자기 문장을 만들고 찾기 위해 마음 속 호수에서 물고기를 낚는 어부와 같다고 한다. 호수에는 그동안 자신이 접했던 인상적인 모든 것들이 섞여 있는데 그 중에서 자신에게 화두가 되는 것을 건져
올릴 때 창작이 시작된다며, 그런 자신만의 호수를 만들기 위해서는 영화 든, 소설이든 가리지 않고 폭식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야 비로소
자기 취향을 알게 되고, 그렇게 건져낸 문장이 쓰레기인지 아닌지를 분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호수에서 건져낸 문장으로 만든 영화를 본 이들이 더 좋은 세상을 만들었으면 한다는 강연자. 그녀가 만든 독립영화를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우선 그녀의 영화를 찾아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큐멘터리라 하니 거부감없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녀의 바람처럼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데 어떤 결기와 태도가 필요한지를 생각해 보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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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 인스타에 올라온 책 표지, 그리고 제목에 압도되었다. 내 머릿 속에도 있던 문구였다. 이별의 종류를 생각했고 죽음이라는 이별이 주는 공허가 얼마나 깊고 막막한 것인지를 일상에서 깨달았기 때문에 이런 문구가 저절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이렇게 누군가 책 제목으로 이고 나올지는 몰랐지만.
정혜신 선생님의 페북을 통해 남편 이명수 선생님의 심정지의 고비를 넘긴 소식을 본 적 있다. 두 분 모두 그 상황과 그 이후의 느낌에 대해 글을 올리셨기에 어떤 일이었는지는 알고 있었다. 이 책에서 그 사건을 언급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 남편이 죽음 직전까지 갔었기 때문에 평생을 죽음과 연관된 사람들을 만나온 정신과 의사인 정혜신 선생님도 충격이 컸을 것이다. 그 이후의 삶의 태도는 바뀌었다. 하루하루가 꽃다발 같은 시간이라고 했다.
나는 친정 가족 다섯 중 두 명을 잃었다. 죽음에는 순서가 없다더니, 죽음에서 가장 멀 것 같은 사람부터 내 곁에서 사라졌다.
죽음이 주는 상처는 상상 그 이상이라는 말에 위안을 받았다. 아픈 척 하는 것 처럼 보이고, 나약해 보이는 것 같아 혼자 울거나 자다 깨서 울거나 생각하다가 울거나, 아무도 없을 땐 소리 내어 통곡하거나, 그런 울음들이 계획없이 쏟아질 땐 남이 볼까봐, 남이 알아챌까봐 얼른 울고 수습을 했다. 나에게, 너는 왜 그리 강하지 못하냐고, 니가 잘 한 게 뭐 있다고, 니가 조금만 신경 썼으면 이 지경에 이르렀겠냐며 나를 나무랐다. 스스로에게 다그치고 상처를 주었다. 남들이 상처 주기 전에 내가 먼저 상처를 내고 아물 듯 하면 면역력이 생겼다고, 이제 덤덤할 것이라 여겼다.
나는 착각했던 것이다. 내가 더 여물어가고 성숙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의문을 가졌다. 왜 사는 게 재미가 없고 남들은 웃는데 나는 웃기지도 않고, 저런 이야기 보거나 들으면 눈물이 나야하는데 왜 눈물도 나지 않을까. 공감력 하나만큼은 자부하던 사람인데. 내가 그만큼 단단해졌다는 의미일까? 이런 생각으로 스스로에게 설명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음 껏 슬퍼하지 못했고 내가 정신 차려야 남은 가족들을 돌볼 수 있다는 머릿 속 계산 때문이었다. 주변에서도 이제 니가 해야지 어쩌겠냐 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던 탓이었다.
참, 듣기 싫은 말이었다. 엄마도 그래서 속이 곪아터졌을 것이다. 오빠의 죽음 후 아빠의 급격한 건강 악화는 엄마 스스로를 다그치게 했을 것이다. 내가 정신 차려야 해, 죽은 아들은 죽은 거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해, 라며 스스로를 다그치고 끊임없이 움직였을 것이다. 당신의 몸과 마음에 입은 충격과 상처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겉으로 괜찮은 척, 남은 가족을 위로하느라 바빴을 것이다. 무럭무럭 암세포가 자라는 지도 모르고, 나중엔 온몸에 퍼졌어도, 오직 너희 아빠 어떡하니, 였다. 나는 엄마를 위로했어야 했다. 아픈 아빠만 신경쓸 게 아니라 아들을 잃은 엄마도 같은 수준의 위로를 했어야 했다. 그러고 보니, 나에게도 위로가 필요했고 분출이 필요했네.
。슬픔과 고통을 제대로 표출하지 못하고 통제하는 버릇이 가져오는 감정마비는 굉장히 큰 문제를 야기하고 끔찍한 일들을 연쇄적으로 불러옵니다.(55) 。죄의식이라는 건 합리적인 사고에 의해 작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까운 사람이 갑자기 목숨을 잃었을 때는 어떻게든 그 죽음을 막아야 했다는 무의식적인 결론을 내려놓고 자기에게 책임을 추궁합니다.(81) 。감정을 닫으면 바로 그때 휙 쓸려가게 됩니다. 고통을 피하려다 그 고통에 온전하게 수몰되는 겁니다. 큰 슬픔을 당했을 때 눈물 흘리며 슬퍼하고 죄의식을 느끼는 것은 참담한 재앙의 현장 속에서 널빤지 조각을 잡는 것과 같습니다. 살아 있다는, 살아갈 수 있다는 증거입니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 공감하며 한 인간으로 생생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합니다.(83)
나는 저 모든 과정을 겪었고 겪고 있다. 어떻게 알고 있을까, 정혜신 선생님이 만난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알게 된 것들이겠지. 더 큰 고통, 더 슬픈 고통, 더 아픈 고통이라는 등급은 없다. 각자의 고통과 슬픔은 있는 그대로 옳고 아프다. 나는 아직도 아프고 아직도 눈물이 나고 아직도 죄의식을 갖고 살아간다. 남은 가족에게 잘 해야한다는 머릿 속 뇌들이 외치는데 실제는 그렇지 못하다. 산 사람에게 더 잘 해야하는 게 당연한데 그게 되지 않는다. 죽은 사람들을 돌아보게 되고, 보고 싶어하고 그리움을 붙잡고 있다. 그래서 미안하다. 어떻게 해야할까 끊임없이 생각한다. 다행히 이 책에 명쾌한 답이 있다.
마음 껏 슬퍼하라.
네,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슬픔에 직면하고 저 밑까지 가보지 않았다. 그러지 못했기에 장례식을 치를 때보다 더 아파하고 더 슬퍼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정혜신 선생님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 남편의 죽음 직전까지 간 경험을 빗대어 그 다음 답도 명쾌히 제시한다. "죽음을 위한 대비는 충분히 사랑하고 충분히 사랑받았다는 사실 외에는 없다는 것을요. 그것이 죽음에 대한 유일한 대비책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됐습니다."(119)
나는 의지한다. 친정 가족에서 한 가지 더 뻗은 내 이름으로 이어진 가족. 남편과 아이. 나는 그들에게 의지하고 그들을 통해 행복의 순간들을 걷고 있다. 그들이 보이지 않으면 불안하고 또 눈물이 솟는다. 앞으로의 나의 매일도 꽃다발 같은 시간들로 채워지면 좋겠다. 아직은 그러지 못하겠지. 조금은 더 슬픔에 직면해야할 것이다. 내 안을 보려하고 내 상처를 보듬으려 해야할 것이다. 직장으로 도피하고 일에 몰입하여 해결될 일이 아니란 걸, 몸으로 느끼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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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 출판사가 '지혜의 시대'란 묶음으로 다섯 권의 책을 펴냈다. '각자의 분야에서 자신만의 길을 개척한 우리 시대의 전문가'들에게 '이 시대를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지혜를 모색'하기 위한 출판이라고 한다. 김대식, 김현정, 노회찬, 변영주, 정혜신의 목소리를 활자로 들을 수 있는 책이다. '지혜의 시대'특강에서 저자들이 강의한 내용을 그대로 옮긴 후 청중의 질문에 답한 내용을 담았다. 다른 책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이 책은 출간 진행 중에 저자가 별세했기 때문에 맨 앞에 유시민 작가, 이정미 정의당 대표의 추도사가 있고, 뒷장에는 안재성 소설가가 정리한 고인의 약전이 덧붙여져있다. 고 노회찬 의원의 평소 생각이 그대로 정리된 내용이어서 새롭다기보다는 다시 한 번 더 되새기는 기분으로 읽었는데 요즘 하는 말 그대로 책을 읽는 내내 저자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음성지원'되는 경험을 했다.
저자는 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 써야하는 바쁜 국회의원의 입장에서 창비에 대한 애정으로 참여한 특강이었다고 먼저 밝혔다. 『창작과 비평』잡지를 등불 삼아 시대를 지나온 세대라면 그 출판사와 어떤 사적인 관련이 없어도 빚진 기분을 떨쳐낼 순 없을 것이다. 특강의 주제는 " 촛불시대, 정치는 우리 손으로"다. 세계가 기원전(B.C)을 비포 크리아스트라고 한다면 우리의 기원전은 비포 캔들이라는 우스개 말로 우리 정치의 현실과 그가 바라는 미래의 꿈을 시작한다. 저자는 시민의 촛불로 새 시대를 진행하고 있는 현재의 과제로 다음 세 가지를 이야기한다. "불평등을 평등으로, 불공정을 공정으로,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평화의 정착으로"
불공정의 해소는 검찰부터
공정한가 아니가에는 상대가 있다. 절대적인 것보다 상대적인 것에 우리는 훨씬 더 예민하다. 다른 사람은 다 먹는데 나 혼자 굶고 있다면 모두가 굶주린 상태보다 훨씬 더 비참할 것이다. 강원랜드 불법채용의 비리는 하나의 사건이지만 수많은 구직자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며 자신의 처지에 비애를 느끼게 했다. 강원랜드가 특별히 더 나쁜 것은 당시 취업자 100%가 불법이었다는 데 있다. 결과를 보지도 않을 인적성검사에 세금을 낭비하며 구직자들에게 절망을 안겨주었다는 건 다시 들어도 화가 난다. 쥐꼬리만한 권력이나 권한이 있으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자신의 이익을 위한 쪽으로 방향을 트는 사람들 앞에 '나쁜'이라는 수식어는 당연하다. 이 부분은 아래에서 올라 가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내려와야 할 과제고, 그래서 저자는 검찰 개혁을 말하고 있다.
일한 만큼 먹고 살 수 있는 나라
빈부 격차가 점점 더 많이 벌어지는 나라를 좋은 나라라고 할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잘 살면 그 만큼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것이 당연한데 많이 가진 사람일 수록 그 책임이 가벼운 사회 모습은 일그러질 수밖에 없다. 불평등을 '기회의 불균등'이라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수긍할 것이다. 여기에 저자는 경제위기를 살리는 것으로 우리 나라가 그동안 시행한 '낙수효과정책' 실패를 이야기한다. 위를 지원하면 맨 아래까지 그 혜택이 갈 거라고 기대했는데 '위기에서 살아난 강자들이 경제적 이익을 독식해'버렸다는 것이다. 정치인 모두가 경제민주화를 입에 담지만 세부 문제로 내려오면 입장을 바꾼다는 것도 바뀌지 않으면 안될 문제다. 그 사례를 재미있게 들어서 소개해본다.
독일과 우리나라의 국민소득을 비교해보면,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평균임금은 독일 노동자의 절반 수준입니다. 그렇다면 국회의원은 어떨까요? 우리나라 국회의원의 임금은 독일과 같습니다. 우리나라 정치가 독일과 같은 수준인지는 제쳐두고, 적어도 임금은 독일 국회의원과 비슷하게 받고 있습니다.(......)국회의원은 자기 월급을 자기가 정하는 직업입니다. 그간 자기 월금은 계속 올렸으면서, 최저임금을 올리는 데는 나라가 망할 것처럼 굴면서 벌벌 떨고 있지요.68쪽
경제적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시선으로 국정을 운영해야하며 적어도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자괴감을 느끼는 사회가 되어선 안된다는 내용으로 읽었다.
전쟁은 선택지가 아니다
나는 전쟁을 겪은 세대도 아니면서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난 적도 없다. 머리 위에 전쟁을 얹어두고 살았다는 것이 더 맞겠다. 이렇게 된데는 실제 우리의 상황이 그렇기도 하지만 전쟁을 이용한 정치가들의 전략도 있었다고 본다. 나는 2016년 어느 날 밤의 공포를 아직도 기억한다. 자다가 쿵쿵 거리는 소리에 벌떡 일어난 나는 얼이 빠져있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 밖을 내다보니 폭우가 퍼붓고 있었고 불안의 실체는 번개와 천둥이었지만 그 순간의공포는 이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 한창 방송의 소재가 전쟁이었다. 이것이 분단국가 국민 개인이 가지고 있는 전쟁 공포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을 해소하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 세금으로 먹고사는 모든 공직자들의 의무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평화를 위해 전쟁을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하는데 그 전쟁의 희생자가 자신이라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그래서 보수든 진보든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주장을 용인하지 말자는 저자의 주장에 나는 공감한다.
저자는 이 세 가지 과제의 해결 방법으로 정치의 변화를 제시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불공정과 불평등과 전쟁의 폭력은 사라져야 한다. 이 변화의 방법으로 선거 제도 개편과 국민 참여를 이야기한다. 사실 현재의 정치 상황을 만든 것도 적극적 국민참여의 결과다.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평화의 시위가 정치를 바꿨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투표는 물론 사회 현상에 대한 강연에 관심을 갖고 듣는 것, 소신을 밝히는 댓글을 쓰고 청원에 찬성하는 것, 시민단체에 가입하거나 후원금을 내는 것도 참여에 해당한다. 촛불로 바뀐 세상을 더 좋게 하기 위해서, 나라다운 나라에 살기 위해서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에 가입해서 활동해보는 것이 무엇보다 좋은 참여가 될 것이라고 이끈다.
짧은 내용이고 새로울 것 없는 내용이지만 다시 읽어도 좋은 내용이었다. 좋은 나라에 살고 싶다는 꿈은 누구나 원하는 바다. 하지만 실제로 쉽게 다가오지 않기 때문에 "꿈"이라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렵다고 해서 꿈마저 꾸지 않는다면 어디에 마음을 붙이고 살 수 있겠는가. 그래서 언제나 꿈꾸는 일은 좋은 것이다. 그 꿈이 개인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라서 더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하며 읽었다. 읽는 동안 실현된 꿈을 상상해보는 것도 즐거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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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4차산업혁명이라는 말에 간혹 혼란을 느낀다. 4차산업이 무엇인가에 대해
말하는 사람마다 제 각각인 경우도 있고, 심지어는 정확한 개념도 없이 사용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가장 코미디 같은 경우는 작년 대선주자 토론회에서 나왔던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오래전일이라 세부적으로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확실하진 않지만, 기억속에 있는 것은 너나나나 할 것 없이 개념도 모르고 그냥 4차산업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아직도 남아있다. 그때는 방송을 보면서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웃어넘겼는데 그것은 아마 피부에 덜 와 닿았기 때문일 게다.
이 책 [4차 산업혁명에서 살아남기]는 창비에서 기획한 연속특강 ‘지혜의 시대’에 김대식 교수가 강연한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김대식 교수는 이 강연에서 ‘인공지능 시대와 우리의 미래’란 주제로 이야기했는데, 인공지능과 함께 따라오는 말이 4차산업이라고 말한다. 인공지능이라는 말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하다. 아마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바둑대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를 보고서 우리는 인공지능에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는데, 이는
우리가 상상하는 인공지능이 실현 가능한 인공지능을 훨씬 앞 질러가서 느끼는 두려움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강연에서 인공지능이 개발되어온
과정과 현재의 기술, 그리고 과학자들이 개발하려는 미래의 기술방향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인공지능 또는 로봇이라는 개념은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필요는 하지만
하기 싫은 일을 누군가에게 떠 넘기고 싶은 인간의 원초적 욕망이 로봇을 개발하게끔 이끌었지만, 많은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는 세상을 언어 또는 기호로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언어의 핵심은 내가 원하는 것을 타인이 대신하도록 제어하는 도구이기에, 생각의 해상도와 언어의 해상도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실수들을 저지르면서 과학자들은 규칙을 통해 세상을 기계에게 설명하는 대신 인간의 뇌를 모방하도록 하는 방법, 즉
딥러닝을 생각해냈다. 과거의 룰 기반 인공지능이 규칙을 입력해 데이터를 얻었다면, 최근의 딥러닝은 데이터를 입력하여 규칙을 얻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뇌가 규칙보다 경험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학습한다는 것을 이용한 것으로 이세돌 9단과 바둑대결을 벌인
알파고에 적용된 기술이기도 하다.
딥 러닝 덕에 기계가 세상을 알아보게
되면서 인간의 전문성을 학습하는 기계들이 등장했다고 한다. 알파고는 기계에게 바둑의 규칙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기보를 보여주었다면, 알파고제로는 기계에게 데이터를 주고 스스로 학습하도록 했다고
한다. 알파고가 알파고제로를 당해내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르겠다. 알파고제로에 이어 등장한 알파제로는 바둑뿐만 아니라 체스, 장기까지도
인간을 압도했다고 한다. 이는 알파제로가 전문성만이 아니라 범용성을 갖춘 것으로, 보편적인 학습을 하는 인공지능의 등장을 알려준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최근에
개발된 갠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실제데이터로 학습한 생성자를 이용함으로써 막대한 데이터를 입력할 필요조차도 없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은 어디까지 발전하게
될까? 인간의 머리안에 있는 뇌는 세상을 직접 경험하지 않는다. 감각기관을
통해 정보를 얻어 이것을 토대로 바깥을 해석할 뿐이다. 또한 우리 몸의 모든 세포가 재생되지만 신경세포는
평생 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평생 변하지 않는 인간의 뇌는 그 사람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술의 발달은 그런 뇌를 읽고, 또 뇌에
쓰기가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MRI와 광유전학이 바로 그것이다. 이처럼
뇌를 읽고 쓰는 것이 가능해지면, 그리고 이것이 인공지능과 결부된다면 언젠가는 인간이 육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것이 인간에게 득이 될지,
아닌지는 별개로 하고 말이다.
증기기관으로 인한 1차 산업혁명과 전기로 인한 2차 산업혁명, 즉 1차 기계혁명이 완성되면서 기계는 인간의 육체노동을 대체했다. 정보기술로 인한 3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으로 인한 4차 산업혁명, 즉 2차
기계혁명이 완성된다면 아마 기계가 인간의 정신노동까지 대체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 때가 되면 사람들은
무엇을 할 수가 있을까? 저자는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정신노동마저 기계가 대신하는 것은 이미 바꿀 수
없는 미래이며, 언젠가는 인간보다 뛰어난 지능에 자율성까지 갖춘 강한 인공지능이 등장할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인공지능시대를 살아갈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공지능에 대해 우리는 이를 무시해서도, 무서워해서도 안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세돌 9단이 알파고와 대결에서 취한 전략이 무시전략이었고, 1차 산업혁명이후
일어난 러다이트 운동은 기계가 무서워서 막는 전략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우리는 기계에 대해 무시도 해보고, 무서워 파괴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은 아니었음이 판명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보다는 기계와 공존할 방법을 모색하고 기계와 협업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우리의 선택지라고 저자는 역설한다.
저자의 강연은 우리가 4차 산업혁명이 무엇인지, 인공지능이 무엇인지, 또 그것들이 함유하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모른 채, 그저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기 충분하다. 그렇다고 걱정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기계와 협업하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정치, 사회, 경제에 대한 제도를 정비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이 가는 이유이다. 인공지능으로 인한 2차 기계혁명이 완성되면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한편으로 두렵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대가 되기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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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뉴스의 홍수시대이다. 쉴 새없이 삐삐 거리는 알람 소리에 질려 단체 톡방은 무조건 알람을 꺼 놓고 있다. 톡방에서 나오자니 그렇고, 그렇다고 그대로 두고 보자니 말도 안되는
글들이 올라오기 일쑤이다. 대부분 무시하는 편이지만 간혹 실수(?)로
보게 되면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교묘한 가짜 뉴스들이다. 하긴 언론에서도 그럴 듯하게 편집을
하여 진실인양 내보내는 뉴스가 많은지라 달리 그들만 탓하기도 뭐하지만 말이다.
올해 창비에서 기획한 연속특강의 주제는
‘지혜의 시대’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혜가 필요하지 않은 시대는 없었지만, 현대처럼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날로 복잡해지는 시대에
지혜는 더욱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특히나 온갖 정보, 그
중에서도 범람하는 뉴스는 무엇이 옳은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라도 지혜가 절실하게 요구된다.
이 책 [뉴스로 세상을 움직이다]는 ‘지혜의
시대’ 연속특강에서 CBS 김현정 피디가 뉴스보는 노하우에
대해여 강연한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그녀는 2005년
CBS 라디오 뉴스쇼의 진행자로 출발한 이래 13년간 매일
아침 [김현정의 뉴스쇼]를 진행해오고 있다 한다. 아침에 라디오를 들을 일이 거의 없는지라 직접 뉴스쇼를 들어 본적은 없지만,
간혹 포털에 올라온 인터뷰 내용이 눈에 띄면 그때그때 읽는 편이다. 읽을 때마다 인터뷰이에게
묻는 질문이나 그 답변을 받아들이는 것이 다른 인터뷰어와 조금은 다르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지 싶다.
김현정 피디는 강연에서 뉴스를 듣고 읽는
독법을 알려주고 있다. 그녀 역시 뉴스에 관심이 없었지만 10여년간
시사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체득한 것이라고 한다. 그녀는 뉴스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뉴스의 프레임을
깨고 그 프레임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역설한다. 사실이 진실일 수는 없다고 말하는 그녀는, 카메라기자가 찍은 사진 한 장, 앵커가 전하는 말 한마디, 그리고 기자가 쓰는 기사 한 줄에도 언론사 혹은 기자가 정하는 프레임에 갇혀 있다고 한다. 사진은 단 한 컷만 프레임안으로 들어오고 기자는 그 한 장면으로 이야기하기에,
맥락에 대한 이해없이 그 한 장면만으로 모든 진실을 알 수 있다는 생각은 위험한 착각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그러한 프레임을 깨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선입견을 벗어 던지고 그것이 사실이지만 진실인지를 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마 가짜뉴스들이
전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들이 아닌가 싶다. 그들이 말하는 한 장의 사진, 한 줄의 기사는 사실이지만 진실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단순한
사실이 아닌 종합적인 진실에 다가갈 수 있도록 뉴스를 보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그녀는 강조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필요한 것이 좋은 언론을 찾는 것이라고 한다. 그녀가 말하는 좋은 언론이란 조금이라도 더
진실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언론, 당사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저널리스트, 선입견을 배제하고 균형 잡힌 보도를 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떠한 사건도 보도가 되지 않는다면 이슈화되거나
문제제기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기에 뉴스의 힘은 막중할 수밖에 없다. 또한 그 뉴스가 공정하게 보도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프레임에 갇혀 사실은 보되 진실을 알지 못할 수가 있다. 과거의 언론들이 보여주는 것이 그러했고, 그래서 기레기라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피디이지만 시사프로그램을 만들고 진행하는 그녀는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을, 가장 직접적으로 묻되, 가장 쉬운 언어로 전달한다’는 것이 모토라고 한다. 당사자의 목소리, 소외된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는 그녀. 그녀가 진행하는 뉴스쇼가 지금처럼, 아니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좋은 언론으로 거듭나길 기대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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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혜신을 처음 알게 된 것은 한 10년전쯤의 일이다. 어느 사이트인지는 잊어버렸지만 그곳에 "정혜신의 19홀의 남자"란
칼럼이 연재되고 있었다. 부부 사이 혹은 남자들의 성과 관련된 칼럼이었는데 비정기적으로 연재되었지만
매번 그 칼럼을 찾아 읽었던 것 같다. 당시의 느낌은 '아니
이 여자는 남자에 대해서 왜 이렇게 잘 알지...'가 아니었던가 싶다.
그 후에는 이상하게도 강연 집으로 만나기 시작했다. 재작년에 창비의 연속특강 ‘공부의 시대’에서도 [정혜신의
사람공부]란 강연집으로 만났는데, 올해도 강연 집으로 만났다.
정혜신은 강연집, 혹은 그가 저술한 책이 아니래도 각종 매체에서 종종 마주친다. 사회적
트라우마 피해자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곳엔 거의 어김없이 그녀가 있기 때문이다. 이 강연에서도 그녀는
자신이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의 트라우마 치유를 위해 안산에 만든 치유공간 '이웃'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죽음이라는 화두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신이
오랫동안 직간접적으로 경험해온 죽음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통에 대처하는 법을 알려주고 있다.
그녀는 고통을 치유하는 결정적인 방법은
내 상처의 내용 자체를 드러내고서 드러낸 상처에 대한 내 시선이나 태도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치유가 결정된다고 말한다. ‘슬픔 그
자체보다 더 힘든 것이 슬픔을 슬퍼하지 못하는 것’이라며,
‘충분히 슬퍼하지 못하면 결코 그
슬픔을 넘어설 수 없’음을 그녀는 강조한다. 그녀의
말을 읽어가면서 우리는 슬픔을 맞이한 사람들 혹은 자신의 슬픔에 대해 위로하고 치유하는 방법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울고 있는 내 곁에 이제
그만하라고 재촉하거나 비난하는 대신 함께 울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산 사람은 살아 야지, 남은
가족을 생각해 야지 같은 어쭙잖은 조언대신 내 눈물이 마를 때까지, 떠난 사람에 대해 더는 할 이야기가
없을 만큼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을 때까지 내 곁에서 산처럼 묵묵하고 바다처럼 먹먹하게 버텨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울고 싶을 때는 마음껏 울 수 있고, 웃고 싶을 땐 마음껏 웃을 수
있도록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가장 빠르고 단단하게 슬픔을 회복하고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33쪽)다고 그녀는 말한다. 우리는 흔히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위로를 건네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나
역시 내 딴 에는 그 사람을 생각해서 마음속으로 정성을 다해 위로를 한다고 하지만, 그 위로가 당사자의
슬픔을 제대로 헤아린 것이 아니란 걸 비로소 느낀다. 모든 고통은 개별적이고 주관적이다. 다른 고통과 비교하거나, 폄하하거나, 억누르는 대신 고통을 당한 사람이 제대로 슬퍼할 수 있도록 같이 울어줄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슬픔을 먼저 공감하는
것이 중요하단 생각이 든다.
또한 그런 고통이 나에게 닥친다 해도
충분히 슬퍼해야 함을 깨닫는다. 지금까지 그런 슬픔이 닥쳤을 때 나는 가족 때문에, 아니면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이 있다는 생각 때문에 나의 고통을 가능하면 억누르고 표현하지 않으려고 했다. 때때로 가슴이 답답하고 왠지 모를 막막함이 느껴진 것은 아마 내가 그 슬픔을 제대로 치유하지 않아서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까지도 함께 할 수 있는 마음, 그런 마음이 죽음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이고 현실감각이 있는 건강하고 온전한 삶을 사는 태도라는 그녀의 말이
가슴에 다가온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맞이한다. 그런 슬픔 앞에서 또 죽음이라는 이별 앞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인지를 생각해본다. 삶을 제대로 사는 것만큼이나 내가 제대로 살았다는 것을 조망하고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기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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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만 뜨면 미디어에서 4차 산업혁명, 4차 산업혁명 하지만 체감할 수 있는 것은 없고, 까마득한 미래 얘기 같이 느껴진다. 그래선지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책이 있어도 크게 관심이 안 간다. 아직은 나와 상관 없는 일일 거란 생각 때문이다. 물론 내가 체감하지 못한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지 않을 거란 생각을 하진 않는다. 미래에 대한 호기심은 막연하게나마 갖고 있다. 책장에 있는 4차 산업혁명이란 제목을 가진 책들이 눈에 띌 때마다 읽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고 생각만 하는 이유다.
궁금한 것 중 하나가 인공지능의 미래다. 인공지능이 바꾸어 놓을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내가 몸담고 있는 업계도 자동화가 가져올 변화는 직장인들의 주 관심 대상이다.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일을 인공지능이 대신할 거라는 전망 때문이다. 단순 반복적인 일은 기계가 대신하게 된다. 대부분 직장인들이 하는 일을 말이다. 미래에 사라질 직업에 대한 기사라도 보이면 관심 갖고 본다. 위안이라도 될까 싶어 봤다가 실망만 하게 된다. 인공지능은 나와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는 분명 위협적인 존재다.
4차 산업혁명을 대표할 인공지능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이 책 <4차 산업혁명에서 살아남기>가 이야기하고 있는 주제다. 사실 이 책은 인공지능을 이야기해서가 아니라 김대식 교수가 쓴 책이라 보게 됐다. 뇌과학자인 저자가 쓴 책들을 이미 몇 권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 방송 강연을 본 이후로 강의 내용에 매료되어 책을 사보게 됐다. 이 책 역시 저자의 책이라 망설임 없이 구입해 본 셈이다. 덕분에 인공지능에 대해, 그리고 미래 인공지능에 대해 좀 더 깊이 이해 할 수 있었다.
인간 스스로 지구에 있어야 하는 존재가 되어야겠지요. 그래야 인공지능에게 우리는 부족하지만 열심히 지구에 보탬이 되는 존재가 되려고 노력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_(p.110)
얼마 전 스티븐 호킹 박사의 유고집 내용이 화제가 된 적 있다. 호킹 박사는 유전자 조작으로 탄생한 슈퍼 휴먼이 인간을 파괴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여기에 덧붙여 인공지능이 발전하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날 수 있다고 우려 했다고 한다.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었던 기계와 인간의 전쟁을 예고한 것처럼 말이다. 설마 그렇게까지? 하고 미심쩍은 생각이 든다면 이 책<4차 산업혁명에서 살아남기>를 읽으면 이해가 될 것 같다.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더 똑똑한 존재가 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지금 10대의 부모로서 자녀의 진로가 걱정입니다. 앞으로 어떤 직업이 주목을 받을 것이라는 예상이 있으신지요? _ (p.130)
이 책은 특강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그래서 Q&A 내용도 담고 있다. 내가 특강에 참석했더라도 이 질문을 했을 것 같다. 자녀들 미래를 걱정하는 부모 마음이니 말이다. 저자도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은 모른다고 한다. 아직까지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면서. 다만 어떤 일이든 뛰어난 소수만 살아남을 거라고 예측 한다. 어떤 분야에서건 손에 꼽힐 정도로 잘 한다면, 상위 1퍼센트에 들어갈 실력을 갖춘다면 더 나은 미래를 맞이할 것이라고 말이다.
부모로서 인공지능 시대를 맞이할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은 자녀들이 인생에서 무엇을 하기 원하는지 스스로 찾아내도록 돕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_(p.1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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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에서 매년 기획하는 연속특강에 참석하지는
못하지만 책으로 나오면 가능한 찾아서 읽는 편이다. 연속특강은 재작년 ‘공부의 시대’에 이어, 작년에는
‘정치의 시대’ 그리고 올해는 ‘지혜의 시대’란 주제를 가지고 열렸다고 한다. 이 책 [우리가 꿈꾸는 나라]는
고 노회찬의원의 강연으로 저자교정 중 노의원이 유명을 달리하여 유가족과 협의를 거쳐 출간하기로 했다고 한다.
노회찬의원은 자신의 강연 주제를 ‘촛불시대, 정치는 우리 손으로’라
정했다. 그는 우리는 지금 촛불혁명 이후의 전환기를 지나고 있으며 우리 앞에 당면한 과제들을 해결해야
비로소 전진할 수 있다고 진단한다. 촛불혁명은 불평등이 불공정으로 이어지는 현상이 수십년간 쌓인 상태에서
터진 국정농단 사건이 도화선이 되었다. 따라서 촛불혁명 이후의 과제는 당연히 평등, 공정, 평화를 이 땅에 정착시키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강원랜드의 불법채용 사건은 우리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불공정의 문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일 뿐이라고 말하는 노의원은, 우리나라에서 사법부를
신뢰한다는 비율이 27퍼센트에 불과하다며, 사법개혁, 검찰개혁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금은 대법원 사법
농단이 구체적으로 하나, 둘 밝혀 짐에 따라 그 수치가 더 줄어들었지 않나 싶다. 일반국민들은 사법부마저 권력과 자본 앞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보면서 정의가 무엇인지를 새삼스레 곱씹어 볼 따름이다.
‘불공정한 일들이란 결국 권력자, 강한자들이 더 많은 것을 탐하는 과정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사법부가 강자에게 관대했던 관행을 깨고 제대로 처벌하면
사회전체에 영향이 미칠 것입니다’(51쪽)라는 고 노회찬의원의 말이 아니래도 우리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나라이기를 바래 본다.
평등이란 사회적 격차의 해소, 해소할 수 없다면 적어도 그 격차를 완화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것은
경제민주화라는 단어에 집약되어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말로는 모두가 경제민주화를 외치지만 그것은 단지
말일 뿐이다. 경제분야에서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지금까지의 보수정권이 취한 정책은 낙수효과를 기대하는
것이었지만 오히려 양극화만 심화시킨 실패한 정책이 되고 말았다. 그는 낙수효과의 대칭점에 서 있는 것이
분수효과라며 소득주도성장이 그 예라고 말한다. 그렇게 볼 때 최저임금 인상은 강자와 약자가 공존할 수
있는 첫걸음이라는 것이다.
‘최저임금 문제가 대두되는
것도 결국 강자가 이익을 독점하여 분배가 이뤄지지 않는 구조가 오랫동안 이어져왔기 때문’(73쪽)이라는 노의원의 말은 최근 논란이 많은 최저임금 문제의 본질을 알려준다. ‘(국회의원들은) 그간 자기 월급을 계속 올렸으면서, 최저임금을 올리는 데는 나라가 망할 것처럼 굴면서 벌벌 떨고’(68쪽) 있는 것은 그들 역시 강자의 편을 드는 권력자라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지 않나 싶다.
평화는 누가 뭐라해도 우리에게 있어 제일
시급한 문제이다. 그것은 다른 말로 어떠한 경우라도 한반도에서 전쟁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노의원은 그래서 한반도 비핵화가 최우선이라고 말한다. 70년동안
이어온 적대관계를 허물고 평화를 이 땅에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한발한발 나아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어느 누구라도 전쟁을 부추겨서는 안되고 정쟁의 도구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최근의 남북관계에 대한 여러가지 말들이 많은 것을 보면서 나는 대북 공작원이었다던 사람의 말을 떠올린다. 그는 이 땅에는 우리의 국익보다도 미국의 국익을 위해 일하는 검은 머리 외국인들이 많이 있다고 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한반도의 평화가 아니라 미국의 국익이라는 사실은 그들의 조국이 바로 미국이라는 말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노회찬의원은 공정, 평등, 평화라는 이러한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우선 정치부터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국회가 국민의 뜻을 제대로 대변할 수 있도록 선거제도를 개편해야 하고, 대통령에게 집중된 권한을 국회가 아니라 국민과 지방에 나누어 주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또한 세상을 바꾸는 원동력은 국민의 참여에서 비롯된다고 말하는 그는, 아무리
작은 참여라도 국민 대부분이 함께 한다면 정치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지난 7월
갑작스러운 노회찬의원의 영면소식은 많은 사람들을 충격에 몰아넣었다. 진영을 떠나 이 시대에 노회찬의원이
있어 우리는 그나마 정치에 희망을 가졌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그가 강연 말미에 했던 말이 가슴을 무겁게
짓누른다. 그가 기대했던 날이 빨리 우리에게 다가와 그에게도 전해지길 기원해본다.
‘광장에 모여 ‘이게 나라냐’라고 외쳤던 우리들이 당당하게 ‘이게 나라다’ ‘나라다운 나라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앞당겨 지기를 기대합니다.’(114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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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으로 죽음을 접하게 된 것은 고등학교 시절 같은 반 친구의 죽음이었다. 정상적인...이라는 표현 자체가 말이 안되지만, 일반적인 죽음은 아니었다. 어느 날 학교에 안 나왔고, 담임 선생님이 핼쓱한 얼굴로 반에 들어왔다가 나가셨고 소식을 들은 그 다음날부터 기자들이 반으로까지 들어왔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친구를 만난 고등학생에게는 이 모든 것이 그냥 충격이었다. 수근 수근대는 사람들의 소리도, 주변 사람들에게 잘못 말하지 말라는 학교의 단속도 몇 달 후 담임 선생님의 인터뷰를 앞 뒤 자르고 왜곡해서 붙여 내보낸 방송까지도 꽤 오랫동안 마음 속에 남아 있었다. 누군가의 죽음이 어느 사람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고통이고 슬픔인데 다른 사람에게는 이야깃거리이나 방송 콘텐츠의 자료 감으로 왜곡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무서웠고 갑자기 사라진 친구를 어떻게 보내야했는지도 잘 몰랐던 것 같다. 이것이 제대로 치유되지 시작한 것이 할아버지의 죽음 체험이다. 많이 사랑했던 할아버지를 노환으로 떠나보내면서 가족들이 함께 모이는 체험,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장례 문화들을 엿보는 기분 상대적으로 편안히 떠나신 할아버지와 그 준비를 어느 정도 하고 맞이한 가족들의 슬프고 마음 아프지만 어느 정도 받아들이는 모습, 서로 위로하고 다독이는 모습과 할아버지가 원하셨던 대로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마음 쓰던 부모님의 모습들... 죽음은 결코 슬프고 비참한 것만은 아니라는 우리 삶의 한 단면이기에 피할 수 없기에 잘 준비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실제로 체험한 것이다. 이것이 내 첫 죽음체험의 치료제가 되었다. 이 책은 나의 이런 체험들을 다시 기억나게 해 주었다. 함께 읽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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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슬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은 그래서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반드시 배워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뒤 슬픔에 대처하는 법입니다.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살면서 한 번은 반드시 직면하게 되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본문 p.31)
그러나 반드시 배워야 할, 누군가와 헤어진 뒤 슬픔에 대처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부모님도, 선생님도 그 누구도 가르쳐 준 적이 없으니 다른 누구에게 가르쳐 줄 수도 없다. 수많은 슬픔과 고통을 마주했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저자라면 가르쳐 줄 수 있지 않을까 감히 사랑했노라고 말 할 수는 없지만 내가 사랑으로 품어야 할 영혼을 이 세상에서 떠나보낸 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 책을 펼쳤다. 최근 몇 년 간 읽었던 그 어떤 책보다 전심으로, 정성을 다해 읽었다. 그만큼 간절했다. 인간 최고의 목표는 ‘행복’이라고 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아무래도 틀린 것 같다. 행복은 일시적 ‘결과’이지, ‘목표’는 아닌 것 같다. 지속되어 보이는 (것 같은) 행복도, 종국에는 무화(無化)의 다른 이름인 ‘죽음’에 이르게 된다. 잔인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유한한 생명이 무한한 무생물이 되는 것은 자연의 섭리지만 대부분의 죽음은 예고 없이 갑작스레 찾아온다. 그리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조차도) 죽음 자체를 원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나는 (그리고 우리는) 죽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렇게 죽음을 잊고 살아가다가 누군가의 ‘죽음이라는 이별 앞에서’ 무너져 내린다. 저자는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삶의 중심에 줄곧 죽음이 놓여 있던 시간’을 보낸 저자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에서부터 ‘제대로 이별하기’까지 ‘삶과 죽음이 홀가분하게 동거하는 삶’을 허심탄회하게 말해준다. 이 짧은 공간에 저자의 지혜를 다 소개할 수는 없다. 다만 이 책을 읽으면서 죽음에 가까워지는 시간을 보낸 것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는 감상을 남긴다.
“잠시 후에 영영 못 보는 상황이 될지라도 덜 아쉽고 덜 후회스러운 삶을 사는 것 외에 미래를 대비하는 다른 방도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중략)… 죽음을 위한 대비는 충분히 사랑하고 충분히 사랑받았다는 사실 외에는 없다는 것을요. 그것이 죽음에 대한 유일한 대비책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본문 p.118~119)
그래. 결국은 ‘사랑’이다. ‘죽음에 대한 준비’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온전히 떠나보낼 수 있는 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할 이유’도 모두 사랑에서 비롯되고 사랑으로 귀결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