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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리뷰대회 선정도서로 가치가 있는지 의심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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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문학동네의 상금 걸린 리뷰대회의 선정도서다. 이 말인 즉슨 사람들이 이 책을 선택한 이유가 흥미롭다거나 재미있을 것 같아서가 아니라 상금이 탐이 나서 선택하게 된다는 것이다. 난 과연 리뷰를 개최한 자들이 내 서평을 얼마나 공정하게 제대로 평가해줄까 싶어 출전했다. 하지만 책을 읽고 실망해서 참가를 포기할까 하다가 이런 대회로 인해 피해를 입을 미
"과연 리뷰대회 선정도서로 가치가 있는지 의심되는 책" 내용보기

 

 

 

이 책은 문학동네의 상금 걸린 리뷰대회의 선정도서다. 이 말인 즉슨 사람들이 이 책을 선택한 이유가 흥미롭다거나 재미있을 것 같아서가 아니라 상금이 탐이 나서 선택하게 된다는 것이다. 난 과연 리뷰를 개최한 자들이 내 서평을 얼마나 공정하게 제대로 평가해줄까 싶어 출전했다. 하지만 책을 읽고 실망해서 참가를 포기할까 하다가 이런 대회로 인해 피해를 입을 미래의 독자를 위해 이렇게 서평 아닌 서평을 작성하게 되었다.

 

이 책에 대해 내가 독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오직 하나뿐이다. 읽지 말라는 것이다. 상금 걸린 리뷰대회 도서로 선정되었으니 좋겠거니 생각했다면 틀렸으니 오해하지 말길 바란다. 이 책은 아무런 근거도 명분도 없이 그냥 리뷰대회 선정도서로 선택된 책이다. 그리고 이 책에 대한 리뷰가 많고 평가가 좋다고 해서 사봐야지 생각을 했다면 오판이니 그 생각을 버리기 바란다. 리뷰가 많고 평가가 좋은 건 리뷰대회에서 더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한 아부 내지 수작이니 속지 말길 바란다.

 

이 책은 질이 좋아서 리뷰대회 선정도서가 된 것이 아니다. 철저하게 마케팅 담당자의 선택에 의해 선정된 것이다. 다시 말해 독자들이 원해서 리뷰대회 선정도서로 선택된 것이 아니라 마케팅 담당자가 이 책을 띄우기위해 혹은 팔아먹기 위해 택한 것이다 이 말이다.

 

가끔 출판사들이 상금 걸린 리뷰대회를 여는 경우가 있다(문동 제외. 문동은 명분도 없이 수시로 열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들은 비난을 받을 이유가 없다. 그들에겐 나름 명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명분이라 함은 바로 많은 독자들이 읽어주고 찾아줘서 베스트셀러가 되었거나 스테디셀러가 되었다는 것으로 고객감사의 의미로 열었던 리뷰대회인만큼 비판할 이유가 없다. 창비의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 리뷰대회가 대표적인 경우다. 이 책은 인문서적임에도 불구하고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많은 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쳤다. 이런 도서는 얼마든지 리뷰대회가 열려도 된다. 독자에게 득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처럼 아무런 명분도 없이 상금 걸린 리뷰대회를 통해 주목시켜 책이나 좀 팔아보자는 식으로 연 대회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이런 대회를 여는 건 출판사의 자유지만 좋지도 않은 책을 포장해서 독자를 속이고 우롱하는 짓을 하는 건 결코 옳지도 않고 바람직한 일도 아니기 때문에 이따위의 리뷰대회는 더 이상 열리지 말아야 한다고 본다.

 

그저 책이나 팔아먹으려는 수작으로 상금 걸린 리뷰대회나 여는 것은 출판계에 득이 되기는커녕 독만 될 뿐이다. 이렇게 출판시장을 어지럽히고 독자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리뷰대회는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 여기에 휘둘려 출전하는 자들에게도 일부 책임이 있다. 자꾸 이런 대회에 참가를 해주니까 반성도 없이 계속해서 이 따위 대회를 계속해서 여는 것 아닌가 이 말이다. 독자들은 바보가 아니다. 상금 때문이 아니라 독자 스스로가 원해서 별 5개를 주고 싶게끔 만든 책이 아니라면 더 이상 이런 리뷰대회를 열지 말길 출판사측에 강력하게 요구하는 바이다. 이 책을 읽고 말고는 독자의 각자 판단에 맡기겠다.

 

이 책은 환생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쓸데없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했습니다. 그냥 단순히 주인공이 등장인물인 이브라함에게 들은 환생이야기와 자기 가족사로 이야기를 전개했으면 참 좋았을 것을 괜히 이슬람교를 비롯해서 다른 종교를 끌어들이는 바람에 내용을 아주 복잡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여기서 별 하나 감점.

이 책은 소설이지만 철학책에 더 가깝습니다. 소설은 교훈이 있든 재미가 있든 둘 중 최소한 한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책은 자꾸 쓸데없는 종교 얘기 혹은 십자군 얘기에 더 집중하면서 본래 취지를 잃었습니다. 이런 얘길 쓸 거면 인문서적 혹은 사회비판서를 쓸 것이지 왜 소설과 접목을 시킨 겁니까? 이 이야기를 읽고 과연 몇 명이나 재미있어 할 것 같습니까? 요즘 세상에 재미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이런 재미없는 얘기로 사람들을 끌어들인단 말입니까? 상금대회가 아니었으면 리뷰가 5개도 올라오지 않았을 겁니다. 그 이하 일수도 있고요. 여기서 별 하나 감점 추가.

십자군 얘길 끌어들여 미국을 은근히 비판하고 있는데 이건 사회비판서에서 나올 법한 소재입니다. 환생하고 사회비판하고 연계가 됩니까? 둘이 과연 무슨 상관이 있는 겁니까? 별 하나 또 감점

저자도 자신이 자꾸 독자가 잘 모르는 종교 이야기를 하는 것이 미안했던지 아주 자세하게 이슬람의 역사와 종교 그리고 기독교의 역사와 종교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이럴 바엔 차라리 종교서적으로 분류해서 책을 내지 소설로 왜 낸 겁니까? 이 책은 환생을 다룬 소설이라고 하기엔 종교색이 너무 짙고 너무 많이 나옵니다. 종교서적이라고 했으면 오히려 좋은 평가를 받았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책의 장르는 소설이죠. 그래서 별 하나 더 감점입니다.



d****3 2012.04.10. 신고 공감 12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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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이란 색다른 소재의 소설
"환생이란 색다른 소재의 소설" 내용보기
<유랑자>의 저자인 '정찬'은 등단한지 30년이 되었는데, 그동안 권력과 인간의 관계, 신과 구원의 문제 등 관념의 세계에 대한 내용의 글들로 선이 굵은 그런 소설을 써왔다고 한다.     그가 쓴 <광야>는 그동안 많은 소설가들의 문학적 소재가 되었던 '5월의 광주'를. <빌라도 예수>는 오랫동안 사람들에 의해서 형성된 '신약 이데올로기'를 뛰어 넘는 예수의 존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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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의 저자인 '정찬'은 등단한지 30년이 되었는데, 그동안 권력과 인간의 관계, 신과 구원의 문제 등 관념의 세계에 대한 내용의 글들로 선이 굵은 그런 소설을 써왔다고 한다.

 

 

그가 쓴 <광야>는 그동안 많은 소설가들의 문학적 소재가 되었던 '5월의 광주'를.

<빌라도 예수>는 오랫동안 사람들에 의해서 형성된 '신약 이데올로기'를 뛰어 넘는 예수의 존재를.

소설가는 그동안 독자들에게 쉽게 읽히는 책이라기 보다는 현대인들에게 무언가 큰 물음을 던지는 그런 작품들을 주로 썼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정찬'의 소설을 이번에 처음 읽게 되었다.

그동안 그가 썼던 <광야>, <빌라도 예수>, <베니스에서 죽다>가 어떤 책인지도 모른채.

처음 접하는 작가의 소설은 평범치는 않다. 흔히 생각하지도 못했던 그런 이야기들이 줄줄 이어져 나온다.

 

 

시공간을 넘나들면서, 다양한 종교의 이야기를 넘나들면서.

예수의 이야기에서, 십자군이야기, 그리고 이라크 전쟁에서 한국의 무속까지.

0 세기에서 2000년대에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로.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불교, 무속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로.

종횡무진 이야기는 시공간을 넘나들며 펼쳐진다.

이 소설이 환생에 관한 이야기이기에, 전생과 환생을 넘나들면서 '전생의 시간'과 '현생의 시간'이 교차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판타지적 요소가 가미된 것이라고 해야할까? 아마도 전생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환생이란 판타지 일 수 밖에 없으니까.

이 소설은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한국으로 가려는 나에게 벽장 속의 물건이 눈에 들어오게 된다.

이브라힘의 이야기가 담긴 녹음기, 녹음의 내용을 정리하고 기록한 노트, '티베트 사자의 서'의 영역본.

이 세가지가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장치인 셈이다.

나는 폴란드계 유대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이다. 그런데, 어머니는 그가 4살이 되던 해에 한국으로 들어간 후에 자신이 죽었다고 아들에게 말해주기를 원하였기에 어머니의 존재를 모른채 살아가게 된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는 신내림을 받아서 무속인이 되어 살아갔던 것이다.

그래서 이 책 속에는 무속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들, 무속에서 행하는 굿에 대한 내용이 어떤 책에서도 읽을 수 없는 좋은 자료들로 담겨 있기도 하다.

그가 아랍인 청년인 이브라임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은 아비규환의 이라크 전쟁의 종군기자로 일하면서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만나게 된다.

그런데, 이브라임은 전생을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이기에 자신의 전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가 들려주는 전생에 관한 이야기는 한 번의 전생이 아닌, 여러 번의 전생을 기억하고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물론, 전생에서 이브라임과 나는 함께 존재하였다는 것이다.

" 그의 머릿속에는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생애들이 뚜렷한 경계없이 흐릿한 형태로 뒤셖여 있" 다 (p. 67)

이브라힘의 전생이야기는 십자군전쟁시대와 예수시대로 나뉘어지게 된다. 이브라힘과 나는 이 전쟁에서 함께 했었다. 이브라힘은 이집트 와지르 기록관, 나는 십자군 사제.

나는 이브라힘을 죽였던 사람이다. 그 바탕에는 예수라는 인물이 있으니.

십자군 전쟁의 이야기는 그들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못지 않게 그 전쟁의 학살 장면이 끔찍하리만큼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신이 원하기때문에 전쟁을 한다는 십자군들.  십자군 전쟁이 종교 전쟁이면서도 그 목적이 희석되었다는 것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지만, 이 책을 통해서 종교가 일을킬 수 있었던 전쟁의 폐해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준다.

그들이 얽힐 수 밖에 없었던 전생의 한 부분에 예수가 있었는데, 이브라힘은 예수시대의 전생도 기억을 한다. 그는 남자가 아닌 여자였다. 예수의 아이를 낳았던 여인.

예수의 일대기가 소설 속에 그려진다. 우리가 생각하는 위대한 신의 모습이 아닌 그런 예수의 모습으로.

물론, 이브라힘은 그가 하늘에서 온 존재임을 알지만, 다른 사람들은 예수의 기적을 확인하기를 원한다.

보고는 믿지만, 안 보고는 믿지 않겠다는 생각에서일까?

아니, 혜민 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에 나오는 한 문장처럼 " 믿음은 너무 과대평가되었고, 실천은 너무 과소평가되었" 다는데, 기독교인들이 이 글을 읽는다면 신성한 신을 이렇게 묘사했다고 문제삼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떤 종교인들에게는 신적 존재를 소설에 등장시키는 것까지도 거북스럽게 생각하기도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런 생각이 든다.

나에게 있어서 무속인으로서의 어머니. 그래서 이 소설 속에는 무속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소개된다. 신내림을 받았기에 아들과 헤어져야 했던 어미. 그리고 무속의 길을 걸어야 했던 여인의 이야기.

 

 

이 책을 읽으면서 최면에 의해서 자신의 전생을 보았다고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끔은 재미로 들은 적은 있지만, 소설 속에서 들려주는 환생을 소재로 한 이야기.

시공간을 넘나들면서 이야기가 전개되기에, 소설의 스케일은 그만큼 클 수 밖에 없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서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을까?

이 소설은 "삶의 유랑'에 관한 입체적인 이야기라고 작가는 말한다. 그 이야기 속에서 '죽음'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는 모두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고, 그것이 환생이란 소재를 가지고 예수시대를, 십자군 시대를. 오늘날 무속인의 세계를 그려 보고 싶었던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다양한 종교들이 나오기도 하고, 깊이 있는 내용들이 나오기도 하기에 소설적 재미만을 생각하고 읽는다면 제대로 이 소설을 이해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을 읽으면서 여러 생을 사는 존재일지도 모르는 인간들이 지금 이 세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전생의 인연으로 맺어졌던 사람일 수도 있을 지모른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그러나, 환생이란 우리들에게 확실하게 잡히는 것이 없기에 그를 믿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냥 지나가는 생각에 불과한 뿐이다.

나 역시 환생을 믿지는 않지만, 우린 삶을 스쳐가는 유랑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n******5 2012.03.29. 신고 공감 3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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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또 다른 생의 시작이 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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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야말로 안식이라고 누가 이야기 했는가. 여기에 죽지 않는 존재가 있다. 그에게 죽음이란 다음 생으로 이어지는 통로에 불과하기에… 환생이라고 하는 종교적이기도 하고 미신적이기도 한 장치로 인해 그는 영원을 살아간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그가 죽는다고 해도 그는 어딘가 다른 공간의 “누군가”가 되어 다시 살아갈 것이다. 주인공인 ‘나’, 케이는 보통의 사람들이 으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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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야말로 안식이라고 누가 이야기 했는가. 여기에 죽지 않는 존재가 있다. 그에게 죽음이란 다음 생으로 이어지는 통로에 불과하기에… 환생이라고 하는 종교적이기도 하고 미신적이기도 한 장치로 인해 그는 영원을 살아간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그가 죽는다고 해도 그는 어딘가 다른 공간의 “누군가”가 되어 다시 살아갈 것이다.

주인공인 ‘나’, 케이는 보통의 사람들이 으레이 그러하듯이 환생을 믿지 않는 자이다. 객관적인 사실들을 쫓는 기자라고 하는 직업을 가졌기에 더 단단한 정신적인 무장을 한 그였지만, 종군기자로 일하던 시절 이라크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만난 이브라힘 이라는 청년을 만나면서 그 단단한 무장에 균열이 일어난다. 스스로를 죽지 않는 존재라고 말하던 청년 이브라힘. 그는 이라크 전쟁으로 죽었지만 녹음기에 담긴 그의 이야기는 ‘나’를 혼란으로 몰아넣는다. ‘환생’ - 아랍인 청년 이브라힘은 자신의 수많은 전생들을 기억한다고 한다. 한 전생에서 그와 ‘나’는 살인이라는 사건의 피해자와 가해자로 만난 적이 있다고 했다. 십자군 이야기의 한가운데에 있던 그들은 예수의 삶을 함께했던 여인으로서의 전생의 기억을 가진 이집트 와지르의 기록관과 십자군의 사제로 만나는데 십자군의 사제였던 ‘나’는 예수가 평범한 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는 진실을 숨기기 위해 이브라힘을 창으로 찌른다. 그것이 ‘나’와 이브라힘이 얽혀있는 전생. 그리고 그들은 현재 다시 만난 것이다. 우연처럼 그들이 다시 만난데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브라힘이 말하는 전생들은 그가 죽지 않는 존재임을 증명하기 위한 것으로 0세기에서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의 기나긴 시간을 존재해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전생들 중 일부를 공유하므로 인해 아마도 이 만남이 없었다면 결코 이해하지 못했을 자신의 친모와의 얽힘을 위한 시간의 안배가 아니었을까. ‘나’의 친모는 신내림을 받고 ‘나’의 시간에서 스스로 떨어져나갔지만 친모의 넋을 기리기 위한 넋굿을 통해서 무당의 몸을 빌린 어머니와 만나서 다시한번 ‘나’의 시간과 친모의 시간이 교차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짊어졌던 과거의 짐들, 친모에 대한 원망과 슬픔을 비로소 벗는다.

이 이야기들은 시간의 파이프라인을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무척 혼란스럽다. 게다가 환생이라는 장치를 통해서 예수, 십자군 이야기 그리고 이라크 전쟁 등 굵직한 역사적 사건을 소설 속으로 끌어들여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를 만들어낸다. 그 운명에 저항하고자 몸부림쳤던 ‘나’의 어머니도 있다. 그렇다보니 한번 읽어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그렇다고 두번읽어 이해할 수 있는 내용도 아니다. 하지만 마음으로는 느껴지는 것은 있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었다. 죽음이 모든 것의 종말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원초적인 물음. 환생은 그 물음에 대한 조심스럽게 말해보는 하나의 해답이리라.

나는 환생을 믿지 않는다. 종교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 환생이라고 하는 현상이 존재하기를 바라는 인간 중 하나이기는 하다. 왜냐하면 죽음이 삶의 끝이라면 그 허무를 향해 내달아야만하는 우리의 생이 얼마나 힘에 겨울 것이겠는가- 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 두려움을 이겨내고자 죽음 뒤의 세상인 ‘천국’이라는 곳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것이 정답일지는 알 수 없다.

이 책속에서 말하는 환생이라는 것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우리들은 모두 유랑자일 것이다. 끝나지 않는 시간 속을 떠돌 듯이 살아가는… 그리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서로 교차되는 순간만이 생에 대한 의미를 갖겠지. 원컨대 환생이라고 하는 것이 존재한다고 해도 이브라힘처럼 전생을 기억하는 일만은 절대 없기를 바라는 바이다.





n******5 2012.04.09.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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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의 끝엔 사랑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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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은 인간의 운명일지도 모른다. 우리 자신이 아버지에게서 어머니에게로,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던가. 그리고 내내 길 위에서 헤매지 않던가. 죽으면 유랑이 끝날까. 환생을 믿는다면 그렇지 않다고 답할 것이다. 몸은 죽어도 영혼은 유랑을 계속하는 것, 그것이 환생이므로. 정찬은 작가의 말에서 “저는 환생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부정하지도 않습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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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은 인간의 운명일지도 모른다. 우리 자신이 아버지에게서 어머니에게로,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던가. 그리고 내내 길 위에서 헤매지 않던가. 죽으면 유랑이 끝날까. 환생을 믿는다면 그렇지 않다고 답할 것이다. 몸은 죽어도 영혼은 유랑을 계속하는 것, 그것이 환생이므로. 정찬은 작가의 말에서 “저는 환생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부정하지도 않습니다.”라고 썼다. 나 역시 그러하다. 환생을 믿는 사람은 아니지만 부정하지도 않는다. 처음 만난 사람이 낯섦보단 익숙함이 느껴질 때, 그 익숙함이 편안함이 아닌 아픔일 때 이 사람과 내가 전생에 특별한 인연이 있었나,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유랑자』는 복잡한 이야기 구조를 가진 소설이다. 소설은 혼혈아이자 종군기자인 ‘나’가 샤먼(무당)이었던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과정에서 알게 되는 어머니(‘나’를 포함한 어머니의 넋으로 이어진 사람들)의 생(生)과 사(死)에 관한 이야기와 이브라힘이 화자가 되어 ‘나’에게 들려주는 전생과 전생이전의 전생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환생 이야기가 그러하듯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고 인물들의 과거와 현재가 얽힌다.

 

어머니, ‘나’와 이브라힘, 기록관과 사제, 예수와 해방노예의 딸은 모두 참혹한 전쟁과 연결된다. ‘나’는 어머니의 장례식 참석하기 위해 짐을 챙기던 중, 이라크전쟁 중 어느 병원에서 만났던 이브라힘을 떠올린다. 이브라힘은 전쟁에서 피를 흘릴 때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고, ‘나’를 만나면서 고통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이브라힘과 ‘나’는 십자군전쟁 때 이집트의 총독의 기록관과 사제, ‘사실을 기록하는 자’와 ‘신을 믿는 자’였다. ‘나’의 어머니가 다른 이들의 고통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한국전쟁 당시 죽은 아이의 넋이 몸으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기록관 이브라힘은 숨어 십자군전쟁의 참상을 기록하다가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다. 예수의 시대 이브라힘은 해방노예의 딸이었고, 예수에게 구원과 사랑을 받은 여인이었다. 전쟁은 삶과 죽음에 대한 의문이 가장 많이 드는 시공간이자 인간의 내면과 바깥 모두에 천사와 악마가 공존하는 혼란의 시공간이다.

 

강희는 고통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고통의 근원을 알 필요가 있다고 했다. 환생은, 죽은 어머니와의 ‘재회’는 고통의 근원을 찾는 여행이었다. 나약한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아 강한 척하지만 얻는 건 마음의 병이다. ‘나’가 종군기자로 전쟁을 떠돈 것도 같은 이유였다. 내면에 자라지 않은 어른아이가 있었다. 고통(죽음)을 기억해야 하는 건 현재의 삶을 더 충실히 살기 위함이다.

 

“나의 기도는 당신을 용서하는 행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 마음의 상처를 씻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지금 상처를 씻지 않으면 미래의 어느 시간에는 내가 당신을 죽이게 될 것입니다. 상처가 지닌 독의 작용이지요. 그러니까 나의 기도는 당신을 위한 기도이면서 또한 나를 위한 기도이기도 합니다. 이런 기도를 할 수 있도록 한 당신에게 나는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335쪽)

 

‘나’는 강희를 만나고 어머니의 넋굿을 치르며, 아브라힘을 만나고 전생과 재회하며, 삶과 죽음을 유랑하며 삶의 진실을 만났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유랑에 지친 기록관과 사제를 치료한 사람은 예수를 닮은 의사였다. 어머니가 ‘나’를 버린 것은 ‘나’를 지키기 위해서였고, 강희가 고통스러웠던 것은 아이의 죽음이었고, 전생의 그녀였던 아브라힘이 죽지 못한 것은 아이 때문이었다. 몸의 죽음은 고통의 기억을 지우고, 망각은 어디서 생긴지 알 수 없는 의문의 상처를 만나게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의 생이 이어지고 있는 건 고통을 견딘 자들 덕분일 것이다. ‘나’를 혼혈아와 종군기자로 설정한 것은 존재에 대한 궁금증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어떤 마음을 품고 살아갈지를 생각하고 실천하라는 뜻이 아닐까.

 

『유랑자』는 신은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왜 착한 사람들이 고통받는가, 신은 왜 그들에게 기적을 보여주지 않는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삶이 고통인데 왜 살아야 하는가, 라는 생활인으로 사느라 외면했던 삶의 질문들을 다시금 내게 던진 소설이었다.

 

 

YES마니아 : 로얄 m****6 2012.04.17. 신고 공감 1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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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당신, 우리는 모두 유랑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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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종종 삶은 여행이라 말한다.  저마다의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일 말이다. 그건 어쩌면 머물지 않고 어디론가 계속 가야하는 삶의 고단함을 달래기 위한 말인지도 모른다. 존재함과 동시에 부여된 삶이라는 짐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가볍게 느낄 수 있도록 말이다. 삶이 닿은 여행지가 언제나 멋지고 좋은 곳은 아니지만 때로 낯선 곳에서 낯익은 누군가와 마주하기도 하는데 우
"나와 당신, 우리는 모두 유랑자다" 내용보기

 우리는 종종 삶은 여행이라 말한다.  저마다의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일 말이다. 그건 어쩌면 머물지 않고 어디론가 계속 가야하는 삶의 고단함을 달래기 위한 말인지도 모른다. 존재함과 동시에 부여된 삶이라는 짐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가볍게 느낄 수 있도록 말이다. 삶이 닿은 여행지가 언제나 멋지고 좋은 곳은 아니지만 때로 낯선 곳에서 낯익은 누군가와 마주하기도 하는데 우리는 그 만남을 인연이라 하기도 한다. 데자뷰처럼 가물거리는 기억 속의 누군가를 만난다면, 그 존재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때문에 환생을 다룬 『유랑자』를 읽으면서 내 삶의 궤적을 떠올리며 나의 전생이었을 누군가를 한 눈에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치지는 않았을까 조바심이 난다.

 

 소설은 화자인 나, 케이가 어머니의 장례식을 위해 예루살렘에서 서울로 향하며 시작한다. 과거 자신을 버리고 무녀가 된 어머니를 용서할 수 없었지만 바그다드 전쟁터의 한 병원에서 만난 이브라힘가 들려주는 전생의 이야기를 통해 그녀의 생을 이해하게 된다.  케이는 이브람힘을 만난 기억이 없다. 그러나 이브라힘은 케이에게 기록관인 자신을 죽인 십자군 병사였다고 말한다. 거기다 그는 그 전의 생에서 예수를 사랑한 여자였다고 한다. 기록으로 역사로만 배웠던 사실들이 아닌 경험에 의한 전달로 생생하게 예수와 제자의 유랑을, 죽음이 낭자한 잔인한 십자군 전쟁을 묘사하는 이브라힘은 그 시대를 다 겪어온 듯 고요하고 차분하다. 

 

 원하지 않았던 무녀로의 삶을 살았던 어머니의 혼령을 위한 넋굿을 보면서 케이는 죽음이 갖는 의미에 대해 생각한다. 무녀의 몸을 빌어 고통 속에서 생을 살아온 어머니의 진심을 듣는 시간, 케이는 알 수 없는 전율을 느낀다. 아주 오래 전부터 연결된 어머니와 아들이라는 연이 아닌 그 이상이라는 걸 느낀 것이다.  소설은 전생과 현실을 드나들며 그들의 삶을 들려준다.  그러니까 이런 방식을 통해 우리는 이브라힘의 전생을 통해 무의식 속의 생과 마주하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소설을 읽는 동안 나의 전생과 현재의 생을 마주하지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환생을 다룬 소설 『유랑자』는 우리 모두의 생에 관한 이야기는 아닐까. 자신의 생을 부정하고 싶지만 부정할 수 없는 운명을 살고 있는 우리네 모습 말이다.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이 누군가의 전생이 아니며 누군가의 미래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는 이는 얼마나 될까. 그러니 우리는 정말 끝없는 생을 살고 있는 존재들은 아닐까. 소설 속 이브라힘의 말이 강하게 다가온다.

 

 ‘전생의 나는 과거의 존재가 아니었다. 지금의 나와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다. 예수 시대의 살았던 전생의 나와, 그로부터 천년이 더 지난 후에 살고 있는 내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은 모순이었다. 아니, 불가능했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신비로운 시간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었다. 그것은 일상의 시간과는 전혀 다른,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시간의 개념을 해체하고 무화해버리는 새로운 시간이었다.’ p. 99

 

 우리는 한 치 앞의 일도 모르면 산다. 먼 훗날 기억하지 못할 오늘을 산다. 주인공 케이처럼 혼혈아로, 두 어머니의 아들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죽음으로 둘러싸인 전쟁터를 마주하며 복잡하게 얽힌 삶을 살기도 한다. 그 안에서 이별을 하고 사랑을 하고 죽음을 경험한다. 어딘가를 향해 끝없는 유랑을 한다. 나로 존재하기 위해 나로 살아가기 위해 끝없는 유랑자의 길을 가는 이들에게 있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 우리는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나와 당신, 우리는 모두 유랑자다.

r*********s 2012.04.10.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혼란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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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읽는 내내 혼란스러웠다. 전생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자못 흥미로웠지만 종교적인 배경이 깊어질수록 소설임에도 내가 가진 종교에 대한 되새김질을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장례를 위해 이스라엘에서 서울로 향하면서 어머니에 대한 추억이 펼쳐 지는듯 싶더니 아랍인 청년 이브라임의 녹음기를 통해 듣게 된 이야기는 더 복잡하고 미묘해진다.   낳아 준 어머니와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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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읽는 내내 혼란스러웠다. 전생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자못 흥미로웠지만 종교적인 배경이 깊어질수록 소설임에도 내가 가진 종교에 대한 되새김질을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장례를 위해 이스라엘에서 서울로 향하면서 어머니에 대한 추억이 펼쳐 지는듯 싶더니 아랍인 청년 이브라임의 녹음기를 통해 듣게 된 이야기는 더 복잡하고 미묘해진다.


  낳아 준 어머니와 길러준 어머니가 있는 주인공. 내림굿을 받은 어머니가 있는 주인공이라서 그런지 이브라임의 이야기 속에서 펼쳐진 환생이란 주제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가 모르고 있는 또 다른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일들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소설을 읽어가다, 점점 깊어지는 이브라임의 환생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머리가 아득해지고 혼란스러워졌다. 십자군 시대에도 살았고 이집트의 기록관이기도 했던 이브라임은 다른 두 시대를 모두 살았던 인물이었다. 그 가운데는 예수가 있었고 예수의 아이를 낳아 기른 여인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평범한 남자로 살아가고자했던 예수를 이야기하고 있다 보니 ‘소설은 소설로 받아들여야지.’ 하면서도 끝까지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내 믿음에 대한 불확신이 아닌 이런 내용을 과연 나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소화해내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내가 믿고 있는 신에 대해 갖지 않아도 될 상상력이 발휘되고 있어 소설로 치부해버리기엔 내내 마음에 걸리고 있었단 얘기다. 하지만 이런 부분이 걸린다고 해서 이 소설을 편견으로 가둘 수 없었다. 불편한 마음이 치우치지 않게 소설을 읽어가고 있었지만 혼란스러운 시간의 배열이 더 몽롱하게 했던 것 같다. 예수의 삶 이외에도 십자군 전쟁의 잔인함과 두개의 전생의 기억을 갖고 있는 이브라임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또한 현실로 돌아와서 ‘나’와 어머니와의 관계, 그 안에서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복잡다단한 삶의 연결 고리들이 소설의 제목과 꼭 맞아 독자를 유랑하게 만들기도 했다.


  어떤 식의 유랑이든 결국엔 누구나 유랑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오랜 시간의 틈을 두고 삶을 살아온 이브라임이나, 그런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나’와 독자인 나도 결국엔 다양한 의미로 유랑을 하고 있는 셈이 아닐까? 삶을 살아가면서 종종 느끼고 있는 고독과 불확실함에 대한 두려움과 존재여부에 대한 궁금증을 저자는 이토록 잔인하면서도 불편하게 소설로 써 내려간 것이 아닐까? 어쩌면 그 길고 긴 이야기의 끝이 용서와 그럼에도 사랑이 있어 살아갈 수 있다는 조금은 진부한 뜻이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할 여지는 광범위했지만 이 소설을 통해 내가 믿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종종 나를 넘어뜨릴 정도로 관통하는 존재에 대한 고독이 오히려 위로가 되었다고 하면 너무 비약적일까? 단호하게 ‘이러이러했다.’고 말할 수 없는 많은 여지를 남기는 소설이어서 여전히 혼란스럽다.

s****m 2016.05.03.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