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서씨는 진짜 사랑입니다. "작가가 되고 싶다는 사람을 본 적 있소?" "네. 그런 사람이 아주 많더군요." "그래요, 다들 작가가 되고 싶다고 하죠." "뭐 그런 것 같네요." "그럼 독자는 누가 하죠? 독자가 없다면 작가가 누구를 대상으로 글을 쓴단 말입니까? 배우는요? 관객이 없다면 배우가 무슨 소용입니까? 배우, 화가, 댄서, 코미디언, 심지어 평범한 일을 하는 평범한 사람도 다 나름대로 관객이 있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내가 하는 일이오. 나는 관객이자 목격자이자 뛰어난 감상자요. 그게 내가 하는 일이오. 하고싶은 일이기도 하고. 내 평생 뼈 빠지게 열심히 일했소. 이젠 그냥 흔들의자에 앉아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고 싶소. 그래도 내가 쓸모없다고 생각하진 않소. 오히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오." 인물 관계도 그림
사회 부적응자, 고립, 따돌림, 간섭하기 좋아하는 등의 관계에 문제를 안고 사는 사람들의 공동체의 이야기로부터 가족의 의미를 다시 정의해 본다. 아서 : 아내 놀라가 떠난 지 6개월. 한 평생 열심히 일했으니 나이 들어 편하게 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하는 유일한 일이라고는 아내의 무덤을 찾아가 점심을 먹고 안부와 날씨 등을 전하고 오는 것이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일이 자신에겐 가장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매일 가는 무덤가에서 어딘가 외롭고 우울해 보이는 소녀를 만나게 된다. 매디 : 태어나자마자 엄마가 죽었다. 엄마가 죽은 이후, 매디는 엄마가 있는 죽음이란 곳에 닿고 싶었다. 그녀가 생각하는 죽음은 살아있는 다른 이들의 죽음이란 의미와 달랐다. 엄마를 만나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의 바람이 담긴 곳이었다. 하지만, 아빠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빠에게 짐스러운 존재라는 죄책감 때문일까. 친구들과도 어울리지 못하고 따돌림을 받는다. 유일한 꿈은 빨리 집을 벗어나 독립하는 것,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17살의 나이로 임신을 하게 되지만, 상대 남자는 아이와 매디 둘 다 거부한다. 이미 닥친 일을 매디는 스스로 해결하고자 결정하고, 삶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루실 : 교사 출신 요리와 베이킹의 달인. 아서의 이웃으로 홀로 외롭고 지루한 날들의 삶이 이어지다가 첫사랑과의 인연이 다시 닿아 미래에 대한 약속으로 이어지고 황혼의 삶에 다시금 생기가 돌았다. 하지만, 갑자기 나타난 행복은 갑자기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다. 슬픔에 좌절을 겪지만 아서의 도움으로 이겨내기로 한다. 아서와 매디의 공통된 장소는 무덤이다. 두 사람의 태어난 시기는 다르지만, 만나게 된 무덤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었다. 아서는 무덤을 들여다보면 무덤 속 인물들의 사연을 들을 수 있었다. 각자 다른 사연들로 살아가고 직업이며 신분도 달랐지만, 모두 같은 땅에 묻혀 있기도 하다. 학교생활이 외로웠던 매디는 슬쩍 학교를 빠져나와 (매디의 엄마는 화장을 해서 무덤이 없지만) 무덤가에서 외로움을 달래기도 하고, 우울한 생각을 하기도 한다. 살아가는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할지 모르지만, 이 두 사람에게는 죽음이 무섭기만 한 곳은 아니다. 엄마가 있는 곳, 사랑하던 존재가 머물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요즘 흔하게 읽히는 흉흉하고 갈등과 복수와 분노가 담긴 이야기가 아닌 훈훈한 동화 같은 이야기'라는 소개말에 제목만 보고 바로 주문한 소설이다. "루실은 눈을 감았다. 아서와 매디가 금잔화 케이크를 먹고 또 뭐라고 했더라? 아, 부드럽다고 했지. 금잔화 케이크를 맛보면 다들 깃털처럼 가볍고 부드럽다고 평했다. 달걀 흰자를 거품기로 끝없이 휘저은 다음 반죽을 넣어야 원하는 질감을 얻을 수 있다. 레시피에는 달걀흰자를 여섯 개 넣으라고 나오 있지만 실제로 만들다 보면 그때그때 달랐다. 그래서 루실은 늘 융통성을 발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케이크에 곁들이는 휘핑크림도 손수 만들었다. " 등장인물들은 소설 속에 나오는 금잔화 케이크 이야기처럼 포크로도 거를 수 없을 만큼 부드럽고 자상한 달콤한 이야기이다. 깃털처럼 가벼운 이야기일 수도 있다. 유대감이란 분리된 각자의 삶을 손수 거품기로 융통성을 발휘해 저어대며 공을 들여야 하는 거라고 말하는 것 같다. 다시 사랑을 만진다는 건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지 관계에서 오랫동안 멀어진 사람들이 서로의 슬픔을 연민 어린 손으로 보듬어주고, 함께 기뻐하고 혼자만의 고민을 하고 있는 존재에게 그동안 혼자 두어서 미안했다면서 무엇이든 기꺼이 동참해주겠다며 마음을 열어간다. 참견하기 좋아하고 소문을 옮기는 루실과 함께 지내면서 불편한 점을 서로 배려하는 모습이 인상 깊다. '엘리자베스 버그'라는 작가는 처음이다. 대부분 다정하고 좋은 이야기들로 소설을 쓰시는 작가인 듯하다. 외로운 세 사람이 함께 집에서 살면서 지내는 이야기는 요즘 보기 드물게 예상할 수 없는 '행복한 가족'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 중심에는 기꺼이 눈을 낮춰주는 할아버지 아서가 있지만, 나이보다 철이 들고 야무진 매디, 감성적인 로맨티시스트 루실의 역할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다. 지나치게 인공적이라서 감성만 자극하는 신파극이 아닐까 했는데, 담담하게 그려져 있다. 어두운 소설을 읽을 때와 달리 따뜻한 감동이 스며들어 흐뭇해지는 기분이 드는 것은 오랜만인 것 같다. 이렇게 따뜻한 온정을 베푸는 사람들이 현실에도 있을까 싶어, 아쉬운 마음에 씁쓸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인생은 정말 요지경 속이다. 시시콜콜 따지고 들면 머리가 돌아버릴지도 모른다. 이쪽으로 돌면 저런 일이 벌어지고, 저쪽으로 돌면 이런 일이 벌어진다. 딱 그 정도로만 생각하는 게 좋다. "매디? 혼자 있고 싶으면 방해하지 않으마.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잠깐 너랑 이야기하고 싶구나." 아서는 나이 든 사람답게 세상만사 급할 것 하나 없다는 듯 기다렸다. 방문을 쳐다보며 광택제를 새로 발라줄까 생각했다. 손바닥과 손등도 찬찬히 살펴봤다. 밖에서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도 귀를 기울였다. 멀리서 잔디 깎는 기계음이 들리자 보청기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점심에 뭘 먹을지도 궁리했다. 그렇게 한참 시간이 흘렀다. 아서가 다시 문틈으로 말했다. "오냐, 그럼 난 아래층에 내려가 있으마. 필요한 게 있으면 알려다오." "저는 할아버지처럼 아이들에게 실수하지 않을 자신이 없어요." "그건 나도 자신이 없단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저지르니까. 때로는 잠결에도 실수를 저지르잖니. 어쩔 수 없는 거란다. 실수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그게 중요하단다. 또 필요할 때는 얼른 사과하고." 나이듦에 대해 그저 황망하고 고독함으로부터 버텨내는 것이 용기가 아니라, 실수를 할 각오를 하더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낙관적 삶의 태도, 관계를 다시 시작할 수도있다는 용기(?), 배려에 대해서 배우게 되었다. 이렇게 다정한 위로를 건넬 줄 아는 트루 러브 씨의 느긋함을 배워 장착하고 싶단 생각을 했다. 물론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애처가 '트루 러브' 아서 씨의 이야기로 함께 사는 사람에 대한 배려라는 것을 배우게 된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