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 독서모임에서 한 분이 시를 낭독해 주셨을 때, 그 의미를 헤아리지 못하면서도 마음에 무언가 몽글몽글하니 맺히는 느낌이 좋아서 다음에는 시집을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오랜 시간 시는 내게 해독해야 할 암호로 존재했다. 하지만 정작 시를 듣고(혹은 읽고) 마음에 새기게 된 순간이란 비밀번호를 해독했을 때가 아니라 그저 시가 불러일으키는 감정에 폭 휘감기게 될 때였다. <사람은 모두 울고 난 얼굴>의 시인도 시는 그런 것이라고, 다정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작년 이맘 때쯤 밤마다 불면으로 고생하던 중에 잔잔한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잠을 청하는 방법을 시도하게 되었다. 밤 10시부터 2시간 동안 이어지는 라디오 kbs classic FM을 켜두고 스르륵 잠에 빠져들려던 계획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는데 그 까닭은 <당신의 밤과 음악>를 진행하는 이상협 아나운서의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밤 10시와 가장 잘 어울리는 목소리를 지닌 이상협 아나운서는 클래식음악 방송과는 안 맞는(?) 심드렁한 말투로 시니컬한 유머와 말장난을 구사한다. 송출되는 음악과 음악 사이에 그는 이따금 여러 시인들의 시를 읽어주었다. 일 년의 밤 동안 그의 목소리를 듣다가 그가 시집을 출간한 시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사람은 모두 울고 난 얼굴>은 시인 이상협의 첫 번째 시집이다. 지금 우는 중인 것도 아니고 울고 난 얼굴이라니, 그런데 울고 난 얼굴이 어떠한지 알 것만 같다. 가슴 아릿한 지진은 지나갔지만(견뎌냈지만) 울음의 여진이 아직도 남아있는 그런 표정을, 나도, 내가 아는 누구도 언젠가 꼭 지었던 것 같다. 그의 시를 찬찬히 읽어 내려가다 보면 바닥에서 울음이 찰랑인다. 그는 울음을 간직하고서 한 걸음 나아가는 사람이다. 자조하면서도 삶 속에서 계속 진동하는 사람. 울음이 진동되어. (그렇기에 KBS 파업에 앞장설 때, 시인이 광장에 나아가 다름아닌 윤동주의 시를 낭독한 일은 의미가 있다.)
아나운서는 자신의 말이 아닌 뉴스의 말을 전하는 사람이다. 전해야 했지만 전하지 못한 간극을 시로써 채워나가고 싶었다고 그는 말한다. 아나운서로 뉴스와 프로그램을 진행한 일, 리포터로서 세계 곳곳을 누빈 경험은 오직 그만이 쓸 수 있는 시의 세계를 열어주었다. 정작 그는 ‘그런 시’들이 개인적인 불행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다시는 ‘그런 시’를 쓰고 싶지 않다고 말하지만. 우리 모두 저마다 불행 한 점씩 씹으며 살아가지 않는가? <앵커> 속 무력한 시인의 모습이 거울 되어 나의 무력함을 비춘다. 그렇지만 당신의 불행과 나의 불행이 연결되어 서로의 불행을 덜어주는 것만 같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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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눈빛 밑줄 치려는 눈빛들, 심드렁히 그 문장은 나를 읽었다 그 여름 장례식장 죽은 건 그인데 내가 울 듯이 읽을 것처럼
그 봄 슬픔은 손끝에서 맺혔다 가리키는 바다 쪽에서 봄은 어김없었다 눈빛을 모을 수 없는 눈들 울음이 사람을 넘고 있었다 슬픔은 매번 오늘이어서 하루는 끝나지 못했다 귀신과 사람을 왕복하며 그들은 품에서 자라지 못한 자신을 꺼내었다 그걸 간판처럼 목에 내걸고 밀려다녔다 누적된 슬픔들이 서로를 당겼지만 각자 앓아야 하는 일이었다 사건과 소식은 각자 멀었다 뉴스를 하다 음소거된 나를 듣기도 했다. 첼란처럼 자기 언어를 증오했지만 나는 무사했다 그 봄엔 손가락으로 탕.탕.탕. 쏘는 놀이를 했지만 누구를 겨눌지 혼곤했다. 적이 많은 슬픔 슬.픔.슬.픔.슬.픔. 씹히고 닫힌 말이 아무 데나 굴러다녔다
*** 봄이 좀 가혹하다. 맑은 날씨와는 별개로 내 마음은 흐림의 연속 ; 거기다가 어쩔 수 없이 5월 달력에 적혀 있는 슬픈 일과 그 슬픔을 충분히 슬퍼할 겨를이 없을 정도의 바쁨으로 봄이 더 가혹해졌다. (실은 4계절 중 이제 내가 멀쩡해 지는 계절은 없는 것 같기도 하지만서도) 그나마 약간의 여유가 생기는 주말 가만히 집에 있다보니 이 봄, 마음 속에 있는 물길이 도무지 트이지 않을 것 같아 또 마음이 한없이 가라 앉았다. 잘 마시지도 않는 술을 마셔보기도 하고 걸어보기도 했지만 모두가 소용이 없는 일이다- 언제나 악착같음이 습관처럼 베여 있었는데 요즘은 어떤 일에도 악착을 떨지 않으며 포기해야 위안이 되는 사람처럼 뭘 해도 포기가 빠르고 아예 기대 자체를 하지도 않는다. 현실에서 잠깐 물러 서 있는 상태; 그렇게 종적을 감추고 싶은 봄, 그런 봄에 별 기대없이 이 시집을 꺼내어 읽다 울컥 ; 이상하게 시를 읽다 보니 어쩌면 나는 현실을 피하거나 무너지고 싶은 게 아니고 위로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울한 싯구가 많았지만 되려 그것이 내 안으로 들어와 담담한 위로가 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시집을 읽을 힘으로 다시 나로 살아내 보기로.
(처음에 별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은 이전에 유명세에 힘입어 아나운서들이 낸 에세이 같은 책들을 많이 사봤는데 하나같이 기대를 저 버렸기 때문에 이 책 역시 그냥 그러할 것이란 오해?아닌 오해를 했었는데 역시 그는 아나운서이기 이전에 시인이었다. 그저 시인이 쓴 시집으로 보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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