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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영혼은 어디에 있는 걸까? 심장에서 펄떡이고 있는 걸까? 뇌에서 숨 쉬고 있는 걸까? 신체와 영혼, 둘은 분리될 수 있는 것일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나무』를 읽으면서 난 우리 영혼이 정말 뇌에 담겨질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의문의 끝은 신체와 영혼이 절대 분리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으로 마무리 지어졌었다. 마음이 아플 땐 몸이 먼저 아프기도 했고, 몸이 아플 땐 마음이 곧 우울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심귀연은 칸트와 데카르트의 인식론을 바탕으로 세계-에로-존재의 관계를 풀어 신체와 자유를 이야기한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자신의 실존(신체)으로 자유를 드러낸다는 것이 이 책의 요지이다. 메를로-퐁티는 칸트의 선험적 자아를 인간은 사유화된 자아가 아니라 신체화된 의식에 의해 행위하는 자아라고 반박하며,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문화 현상 중 하나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심귀연은 메를로-퐁티의 신체론을 공간과 시간에서의 의미로 풀어내기도 한다. 안경에 대한 실험을 예로 든 나의 신체가 내가 실존하는 공간이라는 설명에 비해 후설이나 사르트르의 논의를 가져와 설명한 시간성에 대한 논리는 모호해 보였다. 또 자유는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실현 가능하다는 결론은 결과적으로 사르트르와 대부분 겹쳐, 메를로-퐁티의 신체론이 큰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 같다. 반면에 세계가 지각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고, 신체를 통해 세계에 관여한다는 퐁티의 의견이나, 신체를 가짐으로써 내가 세계와, 타인과 연결되어 살아간다는 의견이 이채로웠다. 정리하자면 나는 나의 신체 곳곳을 한 번에 볼 수 없다. 오른손으로 왼손을 쓰다듬었을 때 그 때 나의 몸은 인식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온 몸으로 세계를 살고 있다. 우리가 정작 사랑을 할 때 사랑을 의식하지 못하고 사랑하는 주체에 의해 행해질 때 사랑을 말하는 것과 같다. 퐁티에게 주체는 신체와 구분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책은 나와 나의 신체에 대한 의미 있는 읽을거리였다. 메를로-퐁티의 신체론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글쓴이의 논리적인 전개와 세잔의 회화에까지 뻗친 그의 폭넓은 지식은 나를 매료시킨 이 책의 분명한 매력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