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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도자기 선진국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수천 년의 역사를 통해 진화해온 고유의 의식주가 있고, 그 정체성을 중심으로 찬란하고 남다른 생활 문화를 꽃피웠다. 그들의 도자기는 음식을 담는 식기의 기능뿐 아니라, 음식의 가치를 다양하게 표현하는 문화적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음식이 몸이라면 그릇은 옷이다. 옷이 날개인 것처럼 그릇 역시 날개가 될 수 있다. 그 날개를 펼쳐 세계로 날 수 있게 만드는 또 다른 동력은 고유한 가치를 가진 술이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식당이라는 고유의 건축물 안에서 자기들만의 차별화된 식사 예법에 따라 차려져 나온다. 다시 말해 식당은 생활 문화의 총체적 요소가 집약된 곳으로 문화 상품을 소비하고 감상하는 장소가 된다. 식당을 통해 그들의 생활 문화는 진화하고, 사회 전반으로 확대, 교류되면서 다양해지고, 풍요로워지면서 국민 의식을 향상시키고, 정체성으로 자리매김해 나간다. 나아가 식당은 자국민뿐만 아니라 세계 여행객에게 문화 체험관 역할을 충분히 해낸다. 동시에 바로 자국의 경제 기반이 되는 내수 경제를 이끌어가는 성장 동력의 핵심이 된다. 이것이 그동안 내가 뼈아프게 깨달은 식당의 기능이고 음식의 역할이다.
112
문화란 맥이 끊어지지 않고 살아 있을 때 비로소 현실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며, 지금 살아 있는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즐겨 사용할 수 있어야 문화란 이름을 붙일 수 있다. 박물관에 갇혀 있거나 찬장 깊숙이 묻혀 있는 것은 박제품일 뿐이다.
122
좁은 의미에서 문화는 문예와 예술이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문화는 법과 제도를 포함하는 사람들의 삶 자체이다. 문화는 언제나 상대적인 것이다. 원시인에게도 그들만의 문화가 있었고, 현대인에게도 고유의 문화가 있다. 동시대에도 이러한 차이는 존재한다. 더 발달하고 세련된 문화가 있고, 그렇지 못한 문화가 공존한다. 고급한 문화와 저급한 문화를 가르는 기준은 시대에 따라 다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강한 문화와 약한 문화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123-124
국가의 부는 문화 상품의 생산과 소비를 진작해 결국은 모든 구성원이 혜택을 받는다. 상류층의 고급문화가 단지 상류층의 호사와 유흥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까다롭고 섬세한 요구가 더욱 우수한 상품을 생산하게 만들고 결국 우수한 상품이 국제 교역에서 우위를 점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왕실이나 사회 지배층은 고급문화를 생산함으로써 국부를 증대시킬 책임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고급스럽고 강한 문화는 무역에서의 우위로 나타나고 그것이 곧 국력이 된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더 아름답고, 더 섬세하고, 더 강한 것을 추구한다. 그러나 새롭고 고급스러운 문화를 생산하지 못하는 나라는 남의 나라 물건이나 수입하는 소비국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143
존스홉킨스대학의 외교정책학 교수인 마이클 만델바움도 이렇게 지적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목격한 결과를 보고 변화하지. 듣기만 해서는 변화하지 않는다. 특히 자신과 동일한 누군가가 잘나가는 것을 보아야 변화한다.”
170
경제가 발전하고 시민계급의 경제력이 커지면서 과거 귀족만이 누리던 사치는 보편화되었다. 이런 보편화 과정은 다시 대중과 차별화되기를 원하는 귀족들의 새로운 사치에 대한 욕망을 부추긴다. 그러나 새로운 사치 역시 점차 시민층으로 확대되면서 보편화 과정을 거쳐 계속 진화해 나간다. 이것이 문화 발달의 상도이다. 문화는 정상에서 아래로 흘러오면서 새롭게 발전한다. 그걸 사치라고 비판하기에 앞서 그 흐름을 관찰하고 연구하면, 흐름 안에 바로 한 나라의 국부를 증진하는 성장 동력이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싫든 좋든 이 물결을 거스를 수 없다. 사치라고 매도하며 자국 문화의 가치를 높이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문화의 진화는 중단된다. 이렇게 되면 일상의 의식주 관련 제조업은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자국 문화를 견인하지는 않고 해외 명품 브랜드를 줄줄이 외워야만 고급문화를 향유하는 양 착각하는 건 문화적 자긍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174
사치의 욕구는 대중이 지배계급의 생활을 동경하고 부러워할 때 생긴다. 이 욕망은 끝 간 데를 모른다. 지배계급이 이 욕망을 조절할 수 있다면 그 나라는 분명히 싱가포르처럼 선진 대국이 될 것이다. 지배 계급이 이 욕망을 누리는 것은 좋다. 그 고급문화가 자연스럽게 아래 계층으로 흘러 내려가면 문화는 풍요로워지는 속성이 있다. 지금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식은 거의 모두 부강한 나라의 풍요로움 속에서 만들어졌다. 그렇지 못한 채 지배계급만이 고급문화를 독점하고 대중화되지 못하면 그 나라는 영원히 후진국에 머물 것이다.
183-184
현대인은 상품과 함께 그 상품의 이미지를 소비한다. 그들에게는 제품의 품질보다 어떤 상표를 소비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즉 인간은 소비를 통해 자신이 속한 집단의 정체성을 표현하고, 동시에 다른 집단과 차별성을 나타낸다. 따라서 명품 식당은 경제적 여유를 가진 소비자의 배타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 미국 사회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이 지적했듯이 현대인은 신분과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소비한다. 그리고 과시적 소비를 통해 사회적 지위를 확립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격이 비쌀수록 잘 팔리는 경향이 있다.
212-213
국내의 고급 식당이 잘되면 우선 농촌이 산다. 친환경 식자재를 재배하는 사람의 판로가 생긴다. 전통주를 빚는 사람이 안심하고 자부심에 차서 술을 생산할 수 있고, 식문화 관련 소품을 만드는 사람도 일자리가 생긴다.
나무 깎는 사람, 옻칠하는 사람, 도자기 만드는 사람, 금속 다루는 사람, 종이 만드는 사람, 유리공예 하는 사람, 염색하는 사람, 천 짜는 사람, 대나무 그릇 만드는 사람, 꽃 재배하는 사람, 배달하는 사람 등 수많은 사람들의 일자리가 생겨나고, 자연히 공예 문화가 발달한다. 결국 돈을 주고 상품을 사는 사람이 있어야 시장이 형성되니까 말이다. 그 시장이 바로 식당을 통해 활성화될 수 있다. 시장이 커지면 공예를 배우려는 지망자들이 늘어나고 가치 경쟁이 생겨 절로 명품이 탄생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 역시 자기들이 번 돈으로 기업이 생산한 제품을 살 수 있으니 내수 시장이 그만큼 커지고 활성화되는 것이다.
213-214
국내에서 만들어진 명품은 사치가 아닌 국익에 보탬이 되는 윤리적 투자이다. 다시 말해 가진 자들이 자기 나라의 고급문화를 소비해서 자국 문화의 품격을 높이는 것은 사치가 아니라 국익에 도움이 되는 호사이다. 바로 진정한 의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이다. 반면 우리 것을 외면하고 수입 양주와 명품만을 소비한다면 자존심을 잃은 행위라고 지탄받아도 할 말이 없다. 물론 국내 명품의 가치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수입 명품을 소비하는 것 또한 필요하다. 창조는 모방을 통해 잉태되고, 다양한 명품을 경험하는 것은 새로운 아이디어의 탄생을 위한 모태가 되기 때문이다. 수입 명품과 국내 명품이 함께 소비되어야 하고, 나아가 내수 시장을 위한 우리만의 창조적인 명품 또한 소비되어야 한다. 우리 문화를 발전시키는 해법은 아주 간단하다. 우리 모두가 남의 문화를 즐길 때 우리 문화도 함께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 의식주가 차지할 자리를 남의 것과 우리 것으로 잘 배분해서 채우자는 것이다.
220
자국 명품의 소비는 단순한 사치가 아니다. 자국의 명품 소비는 일상 식품 산업 생산의 다양성을 만들고 시장을 활성화하고 다양화한다. 그러지 못해 산업이 위축되고 단편화되면 상류층의 소비가 모두 수입 명품으로 집중된다. 이는 국내 생산력 향상을 저해하므로 절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여러 분야에서 다양하게 발전해야 한다. 명품 식당도, 대중식당도, 패스트푸드 식당도 모두 필요하다. 그래야만 각종 산업이 다양하게 골고루 발전할 수 있다. 농어촌이 부유한 나라야말로 문화 전쟁에서 진정한 승리자의 모습이다.
249-250
사회적 리더들에게 요구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은 “귀족적 지위는 의무를 갖는다”라는 의미이다. 부와 권력, 명성은 사회에 대한 책임과 함께해야 한다는 뜻으로 사용한다. 부와 권력과 명성을 가진 자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첩경은 바로 민족문화 산업에 투자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세계적인 명품과 고급문화를 충분히 경험했기 때문에 더욱 높은 차원의 문화를 견인할 수 있는 안목과 능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보다 앞선 문명을 누리는 다른 나라들의 역사를 보면 부를 축재한 개인이나 기업이 문화적 가치에 눈을 뜨고 문화 산업에 투자를 했기에 현재의 위치에 이를 수 있었다. 우리도 사회 지도층과 부유층이 앞장서서 우리 문화를 명품화하기 위해 그들의 문화력, 경제력, 조직력 등 축적된 힘을 기울여야 한다.
나는 이것이 우리 사회의 빈부, 이념, 계층 간의 갈등을 해소하는 지름길이라고 믿는다. 아울러 대기업과 중소기업 그리고 개인 사업자 간의 갈등을 해소하는 길이기도 하다. 그런 책임을 실천한 뒤에야 상류층이 누리는 부가 비로소 정당성을 얻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