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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경영권을 위해...김상봉 교수님의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노동자 경영권을 위해...김상봉 교수님의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내용보기
지난 2006년 김상봉 교수님이 50을 바라보는 나이에 한창 피아노를 배우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언젠가 베토벤을 연주하기 위해서 어린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바이엘을 연습하고 있다는 그 분의 현재 소식은 어떨까 궁금했는데 묵직한 책이 나왔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물론 이 책 이전에도 교수님은 진지한 성찰의 결과물들을 꾸준히 내고 계셨었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노동자 경영권을 위해...김상봉 교수님의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내용보기

지난 2006년 김상봉 교수님이 50을 바라보는 나이에 한창 피아노를 배우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언젠가 베토벤을 연주하기 위해서 어린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바이엘을 연습하고 있다는 그 분의 현재 소식은 어떨까 궁금했는데 묵직한 책이 나왔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물론 이 책 이전에도 교수님은 진지한 성찰의 결과물들을 꾸준히 내고 계셨었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는 피아노 연주와는 질적으로 다르고 본질적으로 삶에 속한 주제를 다룬 책이다.

 

그 주제란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자본주의이다. 물론 이는 칸트를 전공한 철학자의 이력으로는 이례적인 관심일 수도 있지만 철학이 현존하는 질서 전체를 문제삼는 학문임을 감안하면 오히려 바람직스럽기까지 한 일이다. 김 교수님이 관심을 두는 것은 자본주의 그 중에서도 주식회사, 그 중에서도 노동자 경영권의 법제화이다. 물론 특정 대상에 국한되지 않는 철학을 전공한 학자로서 노동자 경영권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자본주의 적어도 우리나라 자본주의에 현저한 문제가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어서 씁쓸하다.

 

하기야 우리나라에 바람직한 부분이 얼마나 되겠는가... 경제학자 갤브레이스는 자본주의란 용어는 특히 유럽에서 소유주의 권력과 노동자들의 종속성을 거칠게 인정하는 표현인 데 비해 시장 체제라는 말은 자본가 권력의 불미스러운 역사를 감추는 표현이라는 주장을 한 바 있다. 갤브레이스의 지적만 보아도 현실은 이데올로기적이고 위선적임을 알 수 있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에서 김상봉 교수님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철학적 전언(傳言)을 주식회사야말로 존재의 집이라는 말로 바꾸어 논의를 펼쳐 나갔다.

 

김상봉 교수님의 작업은 ‘나는 철학자다’란 책에서 하이데거 철학이 지닌 비순수성과 정치적 지향성을 드러낸 피에르 부르디외의 작업을 연상하게 한다. 김상봉 교수님은 마르크스주의에서 자본주의의 비판과 극복의 단서를 구하는 학자라는 점에서 기대에 값하지만 생산수단의 국유화가 노동해방으로 이어진다고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합리적이다. 저자는 생산수단이 국유화되든 자본가에게 귀속되든 노동자가 공장의 주인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고 말한다.

 

노동자 경영권이란 단적으로 왜 노동자들이 사장을 뽑으면 안되는가, 라는 질문으로 요약된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기업 국가이다. 그것은 기업의 이윤 추구의 수단이 되어버린 국가를 말한다. 오늘날 우리를 짓누르는 경제적 양극화는 기업 국가의 필연적 결과이다. 명심해야 할 것은 기업은 필연적으로 사적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조직된 단체라는 사실이다. 저자에 의하면 오늘날 우리는 공화국의 시민으로서 자유롭지만 기업의 노동자로서는 노예라는 치명적 모순에 빠진 존재들이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대안으로 저자가 제시한 것이 노동자 경영권이다.

 

그것은 자본의 소유권과 기업 경영권의 분리를 전제한 개념이다. 저자는 세상의 모든 나쁜 것들은 보편성을 상실한 개별성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독점은 보편성을 상실한 개별성의 경제학적 표현이다. 노동자 경영을 통해 노동자가 관리하는 것은 잉여가치이다. 자본주의의 거주민인 우리는 언제나 미리 계획할 수 없는 새로운 결핍이나 욕망과 마주치는 존재이다. 이런 의미에서 시장은 근절할 수 없는 수동성의 장소이며 그런 까닭에 역설적으로 가장 근원적인 자유의 장소이다.(74 페이지)

 

기업이 국가를 자기에게 동화시키고 도구화해서도 안되지만 국가가 기업을 완벽하게 통제하려고 해서도 안된다고 말하는 저자는 균형과 상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저자는 자유와 소유를 불리불가능한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신자유주의자들은 아무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101 페이지) 마르크스 역시 소유에 집착했는데 마음 속으로는 은밀하게 자본주의적 소유를 부러워했으면서 자본주의를 타도하려 했기에 자본주의를 이길 수 없었다는 저자의 지적은 상당히 논쟁적이다.

 

저자는 자유는 소유가 아니라 스스로 형성하는 것을 기반으로 한다고 말한다. 같은 차원에서 저자는 노동자가 기업의 노예가 아니라 자유로운 주인이 되기 위해 반드시 기업을 소유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는데 이는 결국 노동자의 자유를 위해 필요한 것은 소유권이 아니라 경영권을 의미한다. 저자는 권력은 언제나 인격적인 만남에서 발생하는 현상이며 만남은 내가 사물적으로 소유할 수 없는 타인과의 관계이기에 권력은 오직 이 만남에 의해 정립되는 한에서만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자본주의의 근본 모순은 소유권과 경영권을 뒤섞어 버린 데서 비롯되며 사람들이 소유의 대상일 수 없듯 사람들의 모임인 기업 역시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주식회사에서 아무리 많은 주식을 가지고 있어도 기업을 지배할 수 있는 권리가 되어서는 안되며 경영권은 오직 그 기업의 노동자에게만 속해야만 한다고 분명히 말한다. 자본의 결합체로 간주되는 주식회사는 전형적인 물적 회사이다. 이는 자본 출자자와 회사의 경영진이 누구인지 여부가 주식회사의 실체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의미이다.

 

저자가 역점을 두어 설명하는 내용은 법적 권리 주체인 자연인에게 자기 이외의 다른 주인이 있는 것이 불합리한 일이듯 자유로운 인격체로 간주되는 주식회사가 회사법의 외부에 다른 주인을 두는 것 역시 불합리하다는 것이다.(147 페이지) 저자는 법인은 보편적 주체로서 사회 내에 존재하는 현실을 들어 (실재설에 대립하는) 의제설의 논리적 취약성을 논파(論破)한다. 주식 양도 자유의 원칙이 말해주는 것은 주주들은 그 자체로 회사와 아무런 필연적 관계를 갖지 않으며 주주란 익명적이고 비인격적이라는 사실이다.

 

문제는 주식회사가 자본의 결합체이지만 주인 없는 자본이란 있을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엄밀하게 말해 주식회사에서 소유와 경영이 분리될 수 밖에 없는 까닭은 주식이 너무 광범위하게 분산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주식회사의 본질상 주식의 소유와 기업의 경영권 사이에 아무런 필연적 관계도 없기 때문이다.(170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주식회사의 소유권이 명확하게 규정될 수 있는 것이었다면 경영권 역시 명확하게 규정되었을 것이며 굳이 소유권과 경영권이 분리된다고 말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저자의 논의는 소유권 자체가 어떤 근원적인 불안정 속에 있기 때문에 경영권 역시 동요에 처하게 된다는 말로 이어진다. 저자는 특정 주식회사의 주식을 모두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혼자 의결권을 행사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니 이 경우 회사를 소유한 것과 같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겠는가란 질문에 그것은 그렇게 간단히 동의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175 페이지) 저자는 주식을 모두 소유한다고 해서 주식회사를 소유할 수 없는 이유를 제시한다.

 

그것은 특정인이 몇 주의 주식을 소유하든 출자한 액수에 한해서 유한책임을 질 뿐인 것과 관계된다.(바로 이 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전적으로 출자하면서도 그것을 주식회사 형태로 창업하는 것이다.) 바로 이 유한책임(무책임성) 때문에 아무리 한 사람이 모든 주식을 소유해도 참된 의미에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주식회사는 자본의 결합체로 간주될 때에는 사물이지만 법인으로 간주될 때에는 권리와 의무의 주체인 인격체이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공유든 사유든 누가 다른 인격체를 자기의 소유물이라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주식회사가 누구의 것도 아니듯 경영권 역시 그 자체로 누구의 몫도 아니다. 저자는 그렇기에 경영권은 잔여청구권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잔여청구권은 잔여재산 청구권이 아니라 경영권이 주식회사의 이해당사자들 가운데 누구의 몫도 아니라는 의미에서 잔여적이라는 뜻이다. 저자는 분식회계로 파산한 엔론사의 범죄와 삼성 이건희 회장의 비자금을 함께 거론한다.(2007년 삼성 특검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이건희 회장의 비자금 액수는 4조 5,373억원이었다. 반면 엔론이 5년 동안 과대 계상한 액수는 6천억이다.)

 

저자에 의하면 한국의 재벌 총수들은 헨리 포드 같은 전제군주형 기업주인 동시에 엔론의 레이 회장처럼 주인을 속이는 것도 모자라 아예 주인의 재산을 도둑질하는 경영인들이다.(209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이건희 개인은 마치 자신의 회사인 것처럼 삼성을 지배하고 있다. 강조하지만 삼성은 주식회사이기에 이건희씨의 개인 회사일 수 없으며(212 페이지) 삼성그룹이라는 주식회사는 존재하지 않는다.(222 페이지) 이건희씨의 직함인 회장님이란 스스로 가져다 붙인 이름일 뿐으로 이건희씨는 삼성의 어떤 계열사와도 법적인 관계를 맺지 않은 것이다. 아니 맺을 수 없는 것이다.

 

저자는 이건희씨의 아들인 이재용씨가 단돈 41 억원으로 천문학적 자산 규모인 78개 기업군의 지배권을 차지한 것은 주식회사에는 처음부터 주인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221 페이지) 저자는 주식회사가 건강하게 발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사에 대한 소유권을 참칭(僭稱)하는 자들을 추방하고 경영권에 관한 합리적인 규칙을 정립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한다.(234 페이지)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은 주식회사도 생물종들의 다양성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국가에 따라 다양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관건은 상이한 주식회사 유형에 공통적으로 들어 있는 것은 공공성의 정신이라는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주인이 없기에 공공성의 원리에 따라 운영되어야 할 주식회사가 우리나라에서는 무주물(無主物)처럼 취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겨레신문이나 경향신문, 그리고 키친 아트의 경우 노동자들이 경영권을 행사하는 대표적 기업이다. 그런데 그들은 노동자가 아니라 주주 자격으로 경영권을 소유하고 있다.

 

현재 문제는 주주 경영권이 아무 문제없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투자 액수 외에는 아무런 책임을 질 필요가 없기에 마음 놓고 투자할 수 있는 주주들은 책임이 없는 자들로 자본의 대리인 또는 (주체가 아닌) 물체일 뿐이다. 주주 경영권이란 앞서 말한 무책임성 때문에 작동 불가능한 환상이며 창업주는 마치 주식회사를 개인 회사인 것처럼 운영하며 기업 경영의 실패에 대해 합당한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일반 주주들과 사회 전체에 피해를 입히고 전문 경영인 역시 주주와 창업주는 물론 온 세상을 다 속이고 제 잇속을 차리고 있다.

 

유의할 것은 경영이라는 말로부터 지배라는 개념을 연역해내고 그것을 전횡(專橫) 또는 전제(專制)로 생각하는 그릇된 연상 관계를 청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이다. 주식회사는 소유의 개념으로 보아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문제는 소유권으로부터 연역해낼 수 없는 경영권을 무엇으로부터 연역해낼 것인가이다.(262 페이지) 저자는 칸트를 전공한 철학자 답게 칸트의 유기체 개념을 언급한다. 칸트의 유기체론의 핵심은 전체가 자기 목적이듯 그 속의 개별자 역시 자기목적이라는 주장으로 요약가능하다. 저자가 제시하는 처방은 서로 주체성이다.

 

서로 주체성이라는 개념은 경영자의 고통이 노동자의 고통이고 경영자의 기쁨이 노동자의 기쁨이라는 말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저자는 노동자들 역시 경영자들을 ‘너도 나‘라고 긍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294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주식회사에서 활동의 주체는 노동자들이기에 오직 노동자들만이 주식회사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주체일 수 있다(주체는 언제나 활동하는 주체이다.). 저자는 노동자 경영권의 법제화가 궁극의 목표이지만 유연한 최소한의 제안으로 만족하려 한다고 말한다.

 

노동자 경영권이란 결국 노동자 시민권의 확장이다. 긍지 높은 자유인으로서 책임지는 삶을 사는 것이다. 저자의 논의는 난해한 면과 관념적인 면을 일정 정도 지녔다. 하지만 논의는 시종 논리적이고 합리적이었다. 리뷰를 길게 쓰는 내 습관에 비추어도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의 리뷰는 이례적일 만큼 길다. 관련 책들을 참조, 인용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내 게으름 때문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책의 내용이 충분히 자족적이기 때문이었다. 워낙 전편이 중요한 개념들로 짜였기에 내용을 축약하는 데 한계가 있었음을 감안하더라도 글의 길이가 길어진 것은 내 정신의 번잡함을 증거한다.

 

길지만 지루하지 않게 읽히는 글을 쓴다는 평을 들은 바 있지만 그럼에도 군더더기 없는 리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지나친 것인지도 모르겠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는 저자의 다른 책들을 집중해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사변적 요소와 실증적 요소가, 현실적 면과 이상적 면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책이라는 찬사를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에 보낸다. 요약에 가까운 리뷰를 쓴 것은 내 내공이 미숙하기 때문이다. 저자와 출판사, 그리고 100인의 책마을 카페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린다.

m******1 2012.04.01. 신고 공감 2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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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에게 경영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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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총선이 끝났다. 총선에서 후보자들이 내건 많은 공약(空約) 중의 하나가 재벌개혁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혁할 것인지에 대한 내용은 없이 말만 거창하게 하고 있다. 아마 올해 연말의 대선에서도 마찬가지로 재벌개혁은 큰 이슈가 되지 않을까 한다. 우리 사회가 재벌의 독식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어느 정도의 합의가 되어 있다는 것을 반영하는 대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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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총선이 끝났다. 총선에서 후보자들이 내건 많은 공약(空約) 중의 하나가 재벌개혁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혁할 것인지에 대한 내용은 없이 말만 거창하게 하고 있다. 아마 올해 연말의 대선에서도 마찬가지로 재벌개혁은 큰 이슈가 되지 않을까 한다. 우리 사회가 재벌의 독식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어느 정도의 합의가 되어 있다는 것을 반영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희안하게도 사람들은 재벌에 대해 안좋은 시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삼성, LG같은 대기업에 들어가고 싶어 안달이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갑갑한 마음이었다.

 

얼마전 개최된 2012 다보스포럼에서는 신자유주의가 휩쓸고 지나간 세계적 불황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자본주의의 위기상황을 언급하면서 자본주의에 대한 반성이 있었다.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재 지구상 거의 모든 나라들이 자본주의를 채택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꽃은 주식회사다. 그런데 이런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근원적인 모순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자연히 주식회사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할 때다.

 

예전과 달리 오늘날 노동자들의 삶은 기업에 저당잡힌 것이나 마찬가지다. 근로자들의 권리가 많이 신장되었다고 하지만, 그에 반해 기업은 국경을 초월하면서 어느 한 곳에 정주하는 형태가 아니게 되면서 근로자들의 행동에 크게 제약을 받지 않으면서 자신들이 편한 곳으로 옮겨 다니며 기업을 운영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자본주의와 주식회사를 부정하고 완전히 새로운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지은이는 원칙적으로 경제적 이윤추구를 배제하지 않으면서 지금과 같은 기업경영과는 다른 어떤 방식을 통해 기업에 의한 노예적 예속을 막을 수 있을 것인지를 내재적으로 탐구해야 한다며, 정치에서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것처럼 기업의 경우도 지금과 같은 지배구조 그 자체를 해체하여 대대로 세습되는 왕국과도 같은 기업을 노동자들이 주인 되는 공화국으로 바꾸자고 주장한다. 지금처럼 기업이 국가보다 더 크고 강한 공동체가 되어 국가가 기업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없다면, 그리고 기업이 독재적 조직이어서 거기 속한 노동자들의 자유가 억압받고 노예상태로 전락한다면 기업의 지배구조를 민주적으로 바꾸어버리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6장에 걸쳐 먼저 자본주의의 변천에 따라 변해온 기업국가의 역사적 과정에 대해서 살펴보고, 자유와 소유 그리고 권력에 대한 근본 개념들의 새로운 규정을 하며, 주식회사의 소유권과 경영권에 대한 법학적 접근과 함께 독일, 미국, 한국, 일본 등 나라별 주식회사의 지배구조에 대해서 알아보고, 노동자 경영권의 근거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하며 마지막으로 새로운 시작을 위한 맺음말로 끝을 맺는다.

 

책은 기본적으로 사장을 노동자가 뽑으면 안 되는가에 대한 질문과 대답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오랜 시간 종교와도 같은 위력을 발휘해온 결과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가 주식회사의 주인이 누구냐고 물으면 당연한 듯이 주주들이 주인 아니냐고 반문하게 된다. 지은이는 교조와도 같은 주식회사의 주인이 주주라는 생각에 이의를 제기하고, 권리주체인 자연인에게 자기 이외의 다른 주인이 있다면 불합리한 일이듯이, 법적으로 인격이라고 인정되는 주식회사의 경우에도 회사법인 외부에 다른 주인이 있다면 이것 역시 불합리한 일이라며 주식회사에는 주인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노동자 경영권의 소극적 근거로 제시한다.

 

그리고 기업 공동체의 개념으로부터 노동자 경영권을 위한 적극적 근거를 이끌어내고 있다. 독일의 노사 공동결정제도나 일본의 종업원 중심의 회사운영은 단순히 법을 통해 강제된 제도가 아니라 그들의 오랜 역사적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자연스럽게 나온 제도로서 이들 나라에서는 실질적으로 노동자 경영권이라 부를 수 있는 제도나 관행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인천의 키친아트나 대구의 달구벌 버스회사처럼 망한 회사를 노동자들이 인수하여 살려낸 사례를 소개하면서 노동자 경영권의 근거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종국적으로는 노동자 경영권을 확립하기 위해 ‘주식회사의 이사는 종업원 총회에서 선임한다’라는 법 조항을 상법에 신설하자는 주장에까지 나아간다.

 

지은이는 기존 경제학자들이 체제 내의 경제운용에만 관심을 가질 뿐, 그 체제가 만들어내는 모순과 파행을 극복해야 할 필요성도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고, 시민단체 등 비판적 경제학자들의 경우도 한국식 주주자본주의가 지닌 모순의 핵심인 재벌의 기업경영권을 근원적으로 문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자본주의의 극복을 이야기해 온 진보진영도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괴로워할 뿐 자본주의를 극복할 대안에 대해서는 자신들의 목소리로 이야기한 바가 따로 없다며 비판한다.

 

현재 기업과 노동자의 관계는 단순한 계약관계 이상이다. 기업에서는 노동자들의 생활 전반을 관리․통제하고 있다. 기업이 노동자들에 대한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을 거머쥐고 있는 형세다. 그래서 지은이의 이야기는 신선하다. 기존의 경제학에서는 읽을 수 없었던 이야기들이다. 그렇다고 어렵지는 않다. 일반인들 누구라도 읽을 수 있는 눈높이로 쓰여져 있다. 철학자가 쓴 경제학에 관한 글이어서인지 우리의 삶과 생활을 성찰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되는 글인 것 같다.

 

지은이는 자본은 꿈꾸지 못하고 욕망하지 않으며 운동하지도 않는다. 욕망하는 자도, 운동하는 자도, 꿈꾸는 자도 우리들 인간이라고 하면서, 주식회사는 자본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욕망이 만들어 내고 우리들 자신이 스스로 갇혀버린 매트릭스라고 한다. 그렇다면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사람만이 희망이다”(본서 제303쪽 참조) 라는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철학자인 지은이의 경제학 이야기는 상당히 의미있게 들린다.

c*****1 2012.04.22.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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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전히 최종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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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                 자본주의 체제의 중심적인 열매 가운데 하나인 주식회사. 경제 발전에 여러 유익을 주기도 하지만, 내외적으로 많은 부작용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 사실. 저자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식회사의 경영자를 종업원들의 투표로 뽑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한다. 이 주장을 위한 철학적이고 법리적인 고민을 담고 있는 것이 이 책이다.(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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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         

 

     자본주의 체제의 중심적인 열매 가운데 하나인 주식회사. 경제 발전에 여러 유익을 주기도 하지만, 내외적으로 많은 부작용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 사실. 저자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식회사의 경영자를 종업원들의 투표로 뽑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한다. 이 주장을 위한 철학적이고 법리적인 고민을 담고 있는 것이 이 책이다.(노동이 소외가 아닌 참된 삶을 위한 수단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종업원들이 경영자를 선임하는 일이 왜 중요한지를 밝히고, 현행법상 주식회사의 소유권은 누구에게도 속해있지 않음을 드러내고 있다.)

 

 

 

2. 감상평 。。。。。。。        

 

     ‘주식회사의 이사는 종업원 총회에서 선임한다’는 책 전면의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언뜻 엉뚱해 보이는 이 주장이 왜 엉뚱한 것이 아니고 실제적으로 필요하며, 급진적으로 보이긴 하나 현행법률 아래서 결코 부당한 일이 아님을 보여주는 책의 내용을 읽어가다 보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철학자가 쓴 경제관련 책이라 그런지 모든 것을 돈으로 환원시켜버리는 식의 사유가 중심이 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결국 목표는 사람이 잘 사는 세상일진대 거기에 이르기 위한 과정에 대한 설명은 온통 숫자들만 등장하는 현실은 뭔가 어색하지 않은가.(심지어 숫자가 구체성이나 실현가능성을 보장해주는 것도 아니다!)

 

 

     만국의 노동자들의 만남, 나와 너가 만나 우리가 될 때 진정한 자유가 가능하다는 저자의 설명에 동의한다. 오늘날 우리들은 정말로 뿔뿔이 단절되어 있는 삶을 살고 있으니까. 정말로 통합적인 삶을 이루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냥 이렇게 뿔뿔이 찢어지다가 다같이 망하고 말 것만 같다는 우려가 든다.

 

     다만 나는 그 원인이 단지 자본주의나 신자유주의적인 경제체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계몽주의시대 이래로 꾸준히 영역을 넓혀온 (절대적) 이성주의, 과학(만능)주의와 같은 사조들에 기인한 것이라고 본다. 이 부분을 성찰하지 못한다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엔 어려움이 많지 않을까. 또 한편으로 저자가 주장하는 것 같은 ‘큰 공동체’를 사람들이 정말로 원하고, 아니 감당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책 전반에 걸쳐 노동자의 선택과 결정은 대체적으로 옳을 것(사회정의와 이익 모두에 부합한다는 의미에서)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는 느낌이 든다. 정말로 그럴까? 똑같은 노동자임에도 정규직 노조들은 여전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지원에 소극적인 게 사실이라는 점은, 그들의 선택이 늘 선(善)은 아닐 수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아닐까. 노동자들에게 경영자를 선출할 수 있는 권리를 주면 정말로 노동자 소외가 사라질까. 여기에 이 나라 정치 돌아가는 꼴을 보면, 투표권만으로 뭔가 바뀔 것 같지만도 않다는 우려도 든다.

 

 

     정말 그대로 내버려둬서는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 어떤 것도 완전하지 않고, 우리는 여전히 최종단계에 이르지 않았으니까. 우리에게 필요한건 만족이나 체념이 아니라 아직 도전이다. 그런 차원에서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인식하고 이를 사람 중심으로 개혁해보고자 하는 이런 실제적인 시도를 담고 있는 주장들은 더욱 널리 알려질 필요가 있다.

 



p*********n 2012.07.18.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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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건 자본주의의 민낯, 경영권은 소유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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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 본질적 문제 중 하나는 절차상에 있어 봉건세력을 몰아내는 부르주아 혁명이 부재하였다는 사실이다. 사회의 기층(基層)에서부터 상층(上層)까지, 이른바 공공권과 소유권을 명확히 구별하지 못하는 현상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 북한의 권력 세습을 비판하면서도 재벌과 기업의 세습 소유권 상속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 제기도 하지 않을뿐더러 경영권이 곧 소유권이라 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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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 본질적 문제 중 하나는 절차상에 있어 봉건세력을 몰아내는 부르주아 혁명이 부재하였다는 사실이다. 사회의 기층(基層)에서부터 상층(上層)까지, 이른바 공공권과 소유권을 명확히 구별하지 못하는 현상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 북한의 권력 세습을 비판하면서도 재벌과 기업의 세습 소유권 상속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 제기도 하지 않을뿐더러 경영권이 곧 소유권이라 큰 착각을 이어간다. 이는 기업뿐만 아니라 모든 법인체(法人體) 특히 사학재단같이 아무도 소유할 수 없는 법적 인격체를 개인이나 가족의 소유물이라 여기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경영권을 소유권이라 착각한 무리는 창업자의 아들이, 또 손자가 그 권리를 당연히 물려받아도 되는 것이라 여긴다.

저자가 우리나라 자본주의의 본질적 문제라 여기는 부분은 기업과 같은 공공의 부를 미국이나 일본과 달리 공공성을 철저히 무시하고 창업자의 자손들이 최초 입사의 과정에서부터 아무런 제약도 없이 전무가 되고, 대표가 되고, 사장이 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봉건주의에 더 가깝다. 삼성, 한진, 한화, 롯데, LG , 이름만 대면 아는 기업과 재벌은 어느 한 곳도 예외 없이 혈통이 특권이 된다. 땀이 혈통을 만들지 못하고 가계도(家系圖)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은 우리 사회 자본주의의 건전성을 심각히 위협하며, 헌법 112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는 헌법 정신에 대한 위헌행위이다. 기업의 비민주성과 폐쇄성이 가진 또 하나의 문제는 그 구조가 사회 각 분야로 확산되어진다는 점이다. 특히 경제적 질서에 있어 세습적 권리가 인정되어 비민주성의 존속에 기여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김상봉 교수의 고민은 주식회사와 같은 기업의 소유권은 실상 경영자도, 주주(株主)도 가질 수 없기에 노동자들 또는 종업원들이 경영권의 주체일 수 있으며 스스로 사장을 선출할 수 있다는 철학적 기반을 찾고자 한다. 그래서 주주에게는 배당금이란 수익을, 노동자에게는 경영권을 확보해줌으로써 개인이나 집안의 소유물처럼 취급되어온 기업의 소유권에 공공성을 부여하고자 한다. 주식회사는 법인(法人), 즉 법에 따라 권리 능력이 부여되는, 법률상 권리와 의무의 주체이기에 철학적 기반과 국민적 동의만 있다면 법적 근거를 만드는 것에는 아무런 제약이 없음을 강조한다.

그는 본질적인 자유를 이야기한다. 국민은 국가의 주권자로서 억압받거나 제한받음이 없이 자유로워야 하며, 시민은 시민권이 완벽히 보장되는 자유인이어야 하고, 노동자 역시 스스로 자기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자본에 의한 인간의 예속으로 자기 결정권이 배제된다면 이는 노동자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며, 소수 집단이 주식회사를 경영을 넘어, 소유하며 제 이익을 위한 결정을 이어나간다면 이 역시 노동자의 자유를 엄격하게 제한하는 결과를 낳는다. “공장이나 기업 내에서 노동자 공동의 자기결정이 일상화된다면, 기업은 임금 노예들의 강제노동수용소가 아니라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와도 같은 자유 시민들의 삶의 공동체에 가까워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공장은 아테네 같은 폴리스가 되고 노동자는 그 폴리스의 주권자인 자유로운 시민이 될 것이다.” 그는 거짓 자유와 진짜 자유의 차이를 정말 담백하고 명쾌하게 해설한다.

그의 주장은 이상이 아니라 이미 독일에서는 현실이 되어 있다. 독일의 노사 공동결정제도(Mitbestimmung)는 말 그대로 기업의 중요한 의사결정을 기업의 이해 당사자들, 노동자와 주주, 그리고 은행이 공동으로 결정한다. 임금, 휴가, 노동시간과 같은 기본 결정에서부터 산업 재해나 직업병 등을 예방하기 위한 규칙을 제정하는 것, 심지어 해고까지도 공동결정 사항이다. 노동자 대표는 최소 에서 최대 ½까지 감독이사회에 참가한다. 감독이사회에 파견된 노동자 대표는 경영진에게 직접적인 영향력마저 행사할 수 있다. 그들에게 기업의 존재 이유는 이윤의 극대화가 아니라 기업의 공익성, 공공재로서의 가치, 그리고 노동자의 복지에 있는 것이다. 김상봉 교수가 가장 이상적인 주식회사의 모델로 추천하는 것은 오케스트라, 곧 교향악단이다. 서양의 많은 교향악단이 예전부터 주식회사였다. 그 교향악단의 가장 중요한 경영자는 바로 지휘자이지만, 적어도 세계 수준의 교향악단의 경우 오케스트라 지휘자는 단원들이 선출하는 것이 원칙이다. 만약 단원들과 지휘자의 음악적 견해와 생각이 달라 불화가 발생하였을 때 떠나야 하는 쪽은 당연히 단원이 아니라 지휘자이다.

민주화의 목적은 독점의 해소에 있다. 역사의 지칠 줄 모르는 물줄기와 민중의 의지는 정치 권력의 독점을 해소해나가고 있고, 최소한 절차와 과정상의 민주화를 우리는 상당히 이루었다. 하지만 여전히 기득권층이란 특별 계급을 통해 자신의 독점을 놓지 않으려는 괘씸한 집단들이 있다. 그중 대표적인 분야가 바로 경제에 있어서는 재벌, 사법 분야에서는 정치 검찰과 판사들이다. 그 배경에는 사실 학벌주의에 기초를 둔 엘리트주의가 자리 잡고 있긴 하지만, 앓던 이는 흔들리다 결국 빠지게 되어 있는 것처럼 사회적 모순이라는 질병에 걸린 세력들도 예외 없이 솎아지게 되어 있다.

우리 사회에는 주객전도된 현상이 참 많다. 국가와 법, 제도는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을 위해 존재해야 하고, 돈과 경제는 돈과 경제 자체가 아니라 사람에게 이바지하기 위함이 그 원래 목적이며, 기업은 그 기업이 속한 땅에서 공공의 인프라 구조를 사용하고 있는 한, 소수의 지배 집단이나 경영자나, 또는 기업만 먹여 살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와 소비자에게 그 이윤이 골고루 돌아갈 수 있게 하려고 존재하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만의 세계관과 가치 체계가 있고 그 세계관 속 주인공은 바로 자신이다. 하지만 그 세계관이 오직 자신의 이익과 관심사에만 집중되어 있다면 이는 필연적으로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는 올바른 세계관이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은 기업의 경영권에 대한 노동자 참여의 정당성을 언급함으로써, 그 세계관 구성에서 타인과의 연대, 공감, 감정이입이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d*****e 2021.07.15.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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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노동자가 경영진을 선출하는 것이 경제민주화 [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
"[서평] 노동자가 경영진을 선출하는 것이 경제민주화 [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 내용보기
12월 대통령 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큰 정책화두 중 하나가 '경제민주화'다. 경제민주화에 대한 대통령 후보들의 말과 행동에 언론과 사람들이 휩쓸려 다닌다. 경제민주화란 도대체 무엇일까? 정치민주화가 정치 영역에서 '주권재민'과 자유, 평등, 절차 공정성이라면, 경제민주화는 경제 영역에서 동일한 내용을 담보하는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 한국 대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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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대통령 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큰 정책화두 중 하나가 '경제민주화'다. 경제민주화에 대한 대통령 후보들의 말과 행동에 언론과 사람들이 휩쓸려 다닌다. 경제민주화란 도대체 무엇일까?
정치민주화가 정치 영역에서 '주권재민'과 자유, 평등, 절차 공정성이라면, 경제민주화는 경제 영역에서 동일한 내용을 담보하는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 한국 대선에서 거론되는 경제민주화는 추상적인 재벌개혁이나 사회적 안전망, 공정경제나 상생경제 수준일 뿐이다. 그렇다면 근본적으로 정치민주화 관점을 적용한 경제민주화란 무엇일까?
 
이 책과 로버트 달의 <경제 민주주의에 관하여>는 경제민주화의 본질 중의 하나인 주식회사 기업의 소유권과 경영권에 대해 문제제기한다.
저자는 원래 '서로주체성'에 관한 담론을 재기해 온 철학자이다. 그는 <학벌없는 사회>에서도 사람들의 주체성을 박탈하고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학벌체제를 폐지하기 위해 '학벌 없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한 바 있다.
이번 책에는 마찬가지 '서로주체성'이라는 철학적 개념에 근거하여 자본주의의 대표적인 기업 형태인 '주식회사'를 분석하였다.
 
저자는 "왜 경영자를 노동자가 직접 선출하면 안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야기를 꺼낸다. 한 국가의 구성원들이 대통령을 뽑듯이, 대학의 총장을 학교의 구성원들이 뽑듯이 회사 사장도 노동자들이 뽑으면 안되는가를 묻는다.
그는 개인기업은 기업주의 사적 소유재산이므로 그것의 운영권 역시 당연히 소유주 개인에게 속하는 것이 옳지만, 주식회사는 원래 주인이 없는 기업이므로 얼마든지 노동자들 또는 종업원들이 경영권의 주체일 수 있으며 스스로 사장을 선출할 수 있다는 논리를 제시한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저자는 노동자 경영권을 확립하기 위하여 '주식회사의 이사는 종업원 총회에서 선임한다'라는 법 조항을 상법애 신설하자고 주장한다.(대신 경영진을 감시할 감사는 주주총회에서 선임하는 것으로...)
 
"사적 소유와 사회적 소유 모두 '소유'를 기준으로 한다. ... 위대한 철학자들이 자유가 소유에 기초한다고 생각한 것은 자유를 선택의 문제로 오해했기 때문이다."(p.104) "하지만 자유는 근본에서 보자면 대상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스스로 형성하는데 존립한다" "자유는 자기가 하는 활동을 스스로 규정할 수 있는 능력과 권리를 의미한다."(p.105)
 
저자의 추론을 요약하면 이럴다. 저자는 자유와 소유에 대한 근본개념을 비판하면서 경영권을 다룬다. 자유의 전제가 소유는 아니다. 사람이 소유의 대상일 수 없듯이 권력도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주식회사 법인은 법에 의하여 경제 영역에서 사람과 같은 '인격'을 부여했기 때문에 특정인의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주주의 유한책임과 주식양도 자유의 원칙 등을 고려할 때 주주는 주식에 대한 소유권과 배당권을 가질 뿐 경영권을 가질 근거가 없다. 또한 국가마다 주식회사의 지배구조와 경영권 구조가 다르다. 경영권은 소유권이 아니라 권력에 해당하기 때문에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기업경영을 칸트의 유기체 개념으로 추론한다면 관료적이고 독재적인 기업조직은 기업의 구성원들의 서로주체성을 침해할 수 밖에 없다. 경영진을 종업원 총회에서 선출하는 것은 서로주체성 관점에서도 타당하다.
 
"권력은 사물적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 소유권이 아니라 정당성만이 권력의 문제인 것이다"(p.120)
"자본주의의 근본 모순은 다른 어디도 아니고 사물의 소유권과 경영권을 뒤섞어버린 데서 비롯된다"(p.130)
 
주식의 소유와 주식회사의 소유의 본질과 차이점, 경영권의 독자성과 특별함에 대한 저자의 철학적, 법적 해석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는 부분도 있다.
"법인 역시 그 자체로서는 인격이 아니지만 법에 의해 자연인과 마찬가지로 법적인 권리주체로서 인정된 인격이다"(p.151)
"엄밀하게 말하자면, 주식회사에서 소유와 경영이 분리될 수 밖에 없는 까닭은 주식이 너무 광범위하게 분산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주식회사의 본질상 주식의 소유와 기업의 경영권 사이에 아무런 필연적 관계도 없기 때문이다" "주식회사의 경우에는 소유권 자체가 어떤 근원적 불안정성 속에 있기 때문에 경영권 역시 동요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p.171)
"하나의 주식 속에 주식회사에 대한 어떤 소유권도 들어있지 않다."(p.175)
"주식회사의 주주는 주주의 유한책임의 원칙에 기대어 경영의 실패에 따른 무한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 바로 이 무책임성 때문에 주식회사는 아무리 한 사람이 모든 주식을 소유한다 하더라도 참된 의미에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p.177)
"주주들은 기업경영에 대해 관심도 책임도 없다. 오로지 배당과 주가상승만을 원한다. 불만이 있으면 처분하고 떠나면 그만이다. 그리고 이 무책임성이 주식회사의 본질적 특성이다. ..... 따라서 주주총회에서 선출되는 이사회는 주주들의 대표기관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주식회사는 법인으로서 소유의 주체는 될 수 있지만, 소유의 대상은 될 수 없다"(p.179)
 
저자가 자신의 논증을 하는 가운데 동의하기 어려운 대목도 적지 않다. 대부분 저자의 논증에 결정적인 하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내가 생각하지 못하는 결함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예를 들어 저자가 말한 '국가권력이 기업을 통제하지 못한다'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국가가 기업을 통제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근본에서 보자면 이처럼 기업이 세계화를 이끄는 주체인 까닭이다"(p.39) 국가권력이 기업을 통제하지 못하는 부분은 민주주의가 작동하느냐의 문제인데, 그렇다면 경제민주화도 노동자 경영권도 물거품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국가권력이 어떤 세력구도로 구성되어 있는지에 따라 다르다. 그 측면에서는 미국,영국과 유럽 국가가 다르고 한국과 일본이 다르다.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고 인간의 참된 '만남'을 방해하는 지배체제는 결국 자유를 열망하는 인간의 손에 해체될 수 밖에 없는 것이 역사의 엄연한 철칙이다"(p.41) '고대 로마제국 이후 중세 유럽의 종교권력의 장악은 역사의 필연'이라는 글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전형적으로 서구식 세계관과 역사관의 결정론적 함정이라 생각한다. 자유와 '만남'의 힘과 억압과 지배의 힘은 유동적이다. 지난 5천년간 인류의 역사는 지배세력이 거의 주도했고 가끔 자유와 '만남'이 주도했을 뿐이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집필하기 위해 대영도서관을 소유할 필요도, 멘델스존이 교향악을 작곡하기 위해 교향악단을 소유할 필요도 없다", "노동자가 기업의 노예가 아니라 기업의 자유로운 주인이 되기 위해 기업을 반드시 소유해야 할 필요는 없다"라는 표현도 동의하기 어렵다. 노동자가 자유를 위해 기업의 소유권이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과 마르크스, 멘델스존의 경우는 연결되지 않는다. 마르크스와 맨델스존은 노동자처럼 누구에게 구속, 통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도서관은 '이용'하는 것이고 교향악은 '관람'하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의 주장이 타당함과는 별개로 노동자 경영권의 현실적인 제약조건도 많을 것임을 느낀다. "자본가가 아무리 많은 주식을 소유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를 통해 노동자를 노예적으로 지배하는 권력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p.75)
그동안 자본가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수 백년 동안 이어져온 초과이윤 착취를 욕망해왔다. 그 욕망이 자본가와 자본주의, 주식회사를 자탱해 온 '본질'알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욕망을 구조적으로 차단한다면 자본가의 창업이나 자본주의 자체의 유지가 가능할까? 자본가는 기업을 설립하거나 기업에 투자하지 않을 우려도 있다. 소위 자본 파업이 성립될 수 있다. 이에 대한 대안은 무엇일까...
 
저자가 독일의 노사결정제도(직장평의회, 감독이사회), 미국의 주주자본주의, 일본의 종업원 중심주의와 한국의 재벌 자본주의를 비교한 대목이 있다. 독일과 미국은 제도적으로 운영되고 일본은 사회적 관습과 문화로 유지되고 있지만, 모두의 공통점은 '공공성'이다. 한국의 재벌 자본주의에는 손톱 만큼의 공공성의 흔적도 없다. 삶의 질이나 국가의 수준이 드러나는 것이라 무지 우울했다.
 
[ 2012년 10월 30일 ]
c****n 2012.10.30.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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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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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아니 어쩌면 그저 당연하게 기업은 그 소유주가 있어서 그들의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던 것 같다.조금 다른 얘기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예전에 한창 월드컵으로 온나라가 들끓고 있을 때의 일이 떠오른다. 나는 대한축구협회에서 우리나라 축구 발전을 위한 참다운 감독을 선출한다기보다는 조직 구성원들의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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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아니 어쩌면 그저 당연하게 기업은 그 소유주가 있어서 그들의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던 것 같다.
조금 다른 얘기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예전에 한창 월드컵으로 온나라가 들끓고 있을 때의 일이 떠오른다. 나는 대한축구협회에서 우리나라 축구 발전을 위한 참다운 감독을 선출한다기보다는 조직 구성원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축구대표팀 감독이라 해도 선수 선발 등의 제 권리를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다고 들었었다. 그러한 관행을 깰 수 있었던 것이 외국인 감독인 히딩크였고 그의 능력을 무시할수는 없지만 그에게 주어진 감독의 권리행사가 준 대표팀의 실력향상도 무시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대한축구협회가 국가의 공적인 기구도 아닌 사단법인이기 때문에 그들의 사조직이고 그들이 무엇을 하든 감독선출에 대해 가타부타 할 자격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과연 그것이 맞는 이야기일까 라는 의문만 갖고 잊고 있었다.
그리고 한번도 의문을 가져보지 않은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으며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주식회사의 주식지분을 가장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이 그 회사의 주인일까?

솔직히 말하자면, 책의 앞머리에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쓴 책인데 그들이 이해를 하지 못하는 책은 아무 소용이 없다며 이 세상의 누가 읽더라도 혹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해도 두세번 읽으면 바로 이해를 할 수 있는 글을 쓰려고 했다는 저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때만 해도 나는 이 책을 세번은 더 읽어야 이해를 하겠구나 싶은 마음이었다. 어쩌면 이 책을 읽는 동안 내 마음이 다른 것들을 신경쓰느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책장을 넘기고 있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곱씹는 음식의 참맛을 느끼게 되듯 글의 의미를 조금씩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해가 안되는 말이다 싶으면 곧바로 그에 대한 현실적인 이해를 도울 수 있는 예시를 설명해주고 있어 그리 어렵지도 않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이 책에 대해 설명할 자신이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으면서 아하, 라는 감탄을 하게 되지만 책에 대해 설명해주라고 하면 뭐라 한마디로 말할 수 없을것만 같다.
대신 엉뚱하게도 요즘의 드라마를 떠올리고 있다. 과거의 드라마는 기업경영권을 두고 선악의 대결을 하듯 경영주와 2인자들의 세다툼이 이어지다 결국 소액주주를 가진 직원들의 도움으로 주인공이 경영권을 지켜낸다는 내용이 주된 구도였다면 엊그제 끝난 드라마에서는 주인공이 경영권을 찾는 것과 전문경영인인 외부사장을 영입하는 정도가 아니라 직원들이 직접 그 모든것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질 수 있는 이사직을 맡을 수 있도록 한다는 내용이 나왔다. 물론 나는 드라마가 어느 정도의 현실반영이 있기는 하지만 기업과 관련해 비현실적인 내용이 더 많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조금은 신선하지 않은가. 대기업에 근무하는 오빠를 두고 올케는 평사원으로 시작해서 정말정말 잘 되면 이사까지 갈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전에 명퇴하는것이 추세라며 노후대책을 강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인데 드라마에서 직급과 관계없이 오래 근무하고 성실하며 평직원들의 신망이 높은 직원들중에 추천을 받아 이사진을 구성한다,라니. 그러고보면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물음은 드라마에서도 시작되고 있는것일까?

나의 이해수준은 그렇게 낮은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물음에 고민을 해 보고, 주식회사의 이사는 종업원 총회에서 선임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생각을 해보고 있다.
˝가만히 앉아 울분을 터뜨리거나 세상이 더럽다고 냉소할 것이 아니라, ... 주식회사의 노동자들이 해당 기업의 주인이 되도록 만들면 되지 않겠는가? ... 주식회사에 주인 같은 것은 없다. 의결권을 행사하는 주주들이 있을 뿐이고, 회사를 운영하는 경영진이 있을 뿐이다˝(221)






r***2 2012.04.11. 신고 공감 1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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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올해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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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봉 교수의 <도덕교육의 파시즘>이라는 책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은 이후, 이분의 책은 무조건 사서 본다. 이 책,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는 우리의 상식을 뒤엎는 개념이 많이 등장한다. 회사는 누구 거지? 회사가 사장님 거지 누구 거야! 우리는 흔히 자본주의란 바로 이런 것이라고 생각해왔지만, 그게 아.니.라.는. 거.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던 게 사실 정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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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봉 교수의 <도덕교육의 파시즘>이라는 책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은 이후,

이분의 책은 무조건 사서 본다.

이 책,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는 우리의 상식을 뒤엎는 개념이 많이 등장한다.

회사는 누구 거지?

회사가 사장님 거지 누구 거야!

우리는 흔히 자본주의란 바로 이런 것이라고 생각해왔지만,

그게 아.니.라.는. 거.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던 게 사실 정답도 아니라는 거.

우리나라에 이런 학자가 있다니, 얼마나 행운인가?

이 책은 재벌 해체 논쟁에서 가장 선두에 서 있을 책이다.

김상봉 교수가 앞으로 보여줄 행보도 굉장히 기대된다.

 

m*******k 2012.07.30.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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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기업, 그리고 우리를 돌아보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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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 대한 관심에 비해서 기업의 구조나 노동자의 문제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관심을 갖고 있던게 사실이었던 것 같다. 노동자의 파업같은 문제는 그저 기업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불변하는 경영자들의 횡포로 생각은 했었을지라도, 그에 대한 자세한 배경이나 원론적인 문제는 쉬이 찾아보지 않았었다. 그것은, 세상을 바꾸는 가장 큰 법적 테두리는 정치라는 확신이 지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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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 대한 관심에 비해서 기업의 구조나 노동자의 문제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관심을 갖고 있던게 사실이었던 것 같다. 노동자의 파업같은 문제는 그저 기업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불변하는 경영자들의 횡포로 생각은 했었을지라도, 그에 대한 자세한 배경이나 원론적인 문제는 쉬이 찾아보지 않았었다. 그것은, 세상을 바꾸는 가장 큰 법적 테두리는 정치라는 확신이 지배적이었던 이유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실상, 초국가적 기업이 국가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일은, 비단 무기산업과 관련된 미국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막대한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게 됬다.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거대 주식회사 집단 곧 재벌가문의 노예가 되어 있다." (236)

 

내가 다니는, 다닐 회사가 아니라고 아무런 관심도 갖고있지 않은것은 좁게는, 내 친구, 내 가족들이 속해있을 많은 기업의 횡포를 부정하는 것이며, 결국은 그것을 방치하는 것은 사회의 비극과 불합리함을 놔두는 것이니 썩은 정치를 두고보는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어떤 의미의 공공성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한국의 재벌 자본주의다." (235)

 

서두에서 말하고자 하는 결론을 이야기 하는 이 책은 어쩌면 회의적인 사람에겐 발길을 돌리게 할지 모른다. 하지만 근거들을 나열하다 마지막에 결론을 짓는게 아닌, 이미 지어진 결론을 증명하는 과정은 솔직함과 동시에 자신감마저 느껴진다. 아마 그간 저자의 준비가 철저했기 때문이리라. 그럼에도, "노동자에게 경영권을 돌려줘야 한다" 같은 슬로건에 대해 대부분은 코웃음을 칠 것이다. 기업은 누구의 것이냐는 질문에 열이면 열은 사장, 혹은 회장의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 대답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 나라의 가장 큰 기업은 대부분 회장이라는 직함을 갖고 있는 이들에 의해서 너무도 당연하게 좌우되고 있으니깐 말이다. 매스컴이 그렇게 비추고, 주변인들이 그렇게 바라보기때문에 우리는 아무 의심없이 모든 기업을 개인소유의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소규모 기업이나, 예전의 기업들은 그랬었다. 주식회사란게 생길때까진 말이다. 저자인 김상봉은 순수 개인의 자본과 설립, 운영, 그리고 무한책임으로 이어지는 그런 기업들의 경영권을 노동자의 것으로 빼앗자는 것이 아니다. 본래 주인이 없는 주식회사란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고, 자본을 가진 자가 경영을 하는게 아닌 구조의) 형태를 마치 개인의 것처럼 부리고, 부정이득을 취하는 구조가 너무 당연시 되고 있는 현실을 꼬집고 그것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저자가 준비한 논거들을 따라가면, 말미엔 가장 뚜렷한 대안이 제시된다.

 

"노동자들에게 경영권을 돌려주는" 대명제를 설명하기 위해 그는 예상되는, 그리고 실제로 있어왔던 수많은 반박들을 다시 반박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또한, 이 대명제를 실제로 이루는 방법이 단순 노동자가 회사를 운영하자는게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회사의 경영에 참여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사실상 이 책의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요약하는것은 내 수준에선 불가능하다. 저자가 한권의 책을 통해서, 일반인들이 갖고 있는 반발감이나, 상식에 대한 깨부숨의 근거를 설명하고 있는데, 그동안 생각지도 못했던 것을, 거기다 단 한번 읽어본 나로서는 이 책의 주장을 괜히 어설프게 열거하는 것은 오히려 독이 된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앞에 언급한것, 그리고 뒤에 언급하는 이야기들은 최소한 이책의 내용이 실현하기가 용이하진 않은 상황이라도, 허무맹랑한 것은 아니란 것을 조금이나마 이야기 하기 위해서이다. 만약 누군가가 이글을 읽고 허무맹랑함에 더 무게를 두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그리고 당연히) 이 글이 부족한 탓이다. 이 책을 읽는다면 '아직은 요원한 일'이라고 평가할수는 있겠으나 '불가능하다'란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는 말하지 못할 것이다.

 

어떤 법적인 논리와는 또 다르게 철저하게 경제, 기업, 정치생태를 논리적으로 파헤쳐야 할, 그리고 그랬을 것 같은 이 책의 내용들에 기본 밑바탕이 철학이라는 것에 나는 새삼 놀랐다. 경제학자, 혹은 기업인들이 '경영철학'이라고 함은 단순히 기업의 이익을 극대화 하기위한 어떤 구호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내게, 철학이란 어디에도 빠질 수 없고 빠져서도 안되는, 그리고 우리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고 생각했을때 다시 근본부터 되짚어 볼수 있는 유일무이한 열쇠라는 것도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이정도면 웬만하게 철학, 혹은 경제분야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충분히 조금만 시간을 들여 읽는다면 십분 이해할 수 있게끔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는것도 이 책의 장점이겠다.(아마 저자의 주장을 설득시키는 것이 쉽지가 않음을 저자또한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것은 실제적인 방법의 문제보단, 우리의 확고한 인식을 뒤집어야만 하는 문제니깐) 그럼에도 이 책이 철학을 바탕으로 했다고 해서, 철학으로 끝나는 것은 결코 아니란 것또한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겠다. 철학은 근본이념으로써 우리가 법이전에 갖춰야할 인식을 설명함에 바탕이 되는 것이지, 방법 그 자체는 철저히 현실적이며 논리적이다.

 

노동자와 경영자가 서로 단절된 홀로주체들이 아니라 더불어 보다 높은 하나 속에서 결속된 서로주체로서 '우리'라면, 경영자의 경영권 역시 타자로서 노동자에게 명령하는 권력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보편적 의지와 활동의 표현이며 실현이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 경영자가 노동자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남으로서 노동자들 위에 군림하는 권력자라면, 노동자들은 경영자 속에서 자기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며, 마찬가지로 경영자는 노동자들과 서로 주체성 속에서 '우리'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니, 이런 기업이 참된 공동체를 이룰 수는 없으리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292)

 

'철학, 자본주의를 뒤집다' 라는 부제는 전혀 틀린말이 아니다. 인간을 이롭게 하기위한 저자의 애정어린 철학의 시선을 바탕으로, 경제학자의 말을 빌리거나, 명료한 법의 해석을 통해서 결론을 이끌어 내는 과정은, 소설만을 많이 읽어오던 내가 차마 (소설보다) 쉽다고는 할수없지만, 예상보단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책이었다. 철학을 파헤치고 법을 분석함으로써 우리가 갖고있던 기업, 즉 주식회사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되짚고, 그것을 우리와는 다르게 접근하고 있는 해외의 사례를 분석하며, 나아가 우리가 철학적인 사고의 부분에서, 그리고 법적인 부분에서 어떻게 해결을 해나가야 할 것임을 제시하고 있는 이 책은 실제적으로 철학이 어떻게 현실의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는지 보여준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이 철저하게 경제와 사회에 관한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삼성은 이건희의 것'이라고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모두가 읽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이 든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오직 주식회사가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만이 주식회사를 두고 소유의 대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180)

 

위의 말처럼 명심해야 할 포인트 및 논리전개의 과정은 사실상 간단하다. '법인' , '주식회사'에 대한 정의를 다시 논리적으로 파헤침을 통해서, 소유권과 경영권을 분리시켜 생각하고, 주식회사란 것의 근본 성격과, 우리가 잘못 인식하고 방치하고 있는 재벌 기업들의 병폐를 인식하며, 나아가 경영자와 노동자가 도구를 부리는 자와 도구 그 자체로 전락하는 것이 아닌, 더 높은 하나를 이룩하기 위해서 나아가야 할 이상적인 방향과, 실질적인 법안을 살펴보는 과정이다.

 

끝으로 '주식회사의 이사는 종업원 총회에서 선임한다.' 라는 법률조항이 현실적으로 제시되어, 저자의 주장이 설득력을 가짐과는 별개로 나는 모든 이가 사실상 노동자인 세상에서 아래의 문장이야 말로 중요한 맥락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이것은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의 몫이요, 철학자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은 스스로 자기의 세계를 형성해 나갈 자유로운 노동자의 몫일 것이다." (310)

n******e 2012.04.13. 신고 공감 1 댓글 2
리뷰 총점 종이책
내가 왜 노동자들이 사장을 뽑으면 안되는가 라는 엉뚱한 질문을 던진 것은 그 무렵이었다
"내가 왜 노동자들이 사장을 뽑으면 안되는가 라는 엉뚱한 질문을 던진 것은 그 무렵이었다" 내용보기
머리를 한대 강하게 맞은 느낌이었다. 이런 생각을 나 혼자 한 게 아니라는 발견. 그리고 다소 감정적이었던 내 생각이, 어느 철학자에 의해 논리적이고 사변적으로 적혔다는 것, 그리고 그의 생각이 철학자가 몰리기 쉬운 사고 내에서의 운동이 아니라 실행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 등이 가장 큰 충격 영역이다.   월요일 출근 전 목욕탕에서 본 내 얼굴, 그리고 지하철을 타고 출
"내가 왜 노동자들이 사장을 뽑으면 안되는가 라는 엉뚱한 질문을 던진 것은 그 무렵이었다" 내용보기

머리를 한대 강하게 맞은 느낌이었다. 이런 생각을 나 혼자 한 게 아니라는 발견. 그리고 다소 감정적이었던 내 생각이, 어느 철학자에 의해 논리적이고 사변적으로 적혔다는 것, 그리고 그의 생각이 철학자가 몰리기 쉬운 사고 내에서의 운동이 아니라 실행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 등이 가장 큰 충격 영역이다.

 

월요일 출근 전 목욕탕에서 본 내 얼굴, 그리고 지하철을 타고 출근길에서 보는 직장인들의 얼굴을 보면 공통점이 있다. 어두운 모습, 색깔로 말하면 회색이다. 직장으로 가는 길이 왜 즐겁지 않을까? 내게 과거 즐거운 월요일 출근길이 있었나 생각해보면 기억이 나긴 한다. 졸업하고 처음으로 출근하던 날, 내가 즐겁게 하던 프로젝트에서의 출근길. 정리해보면 안해본 것에 대한 새로움이나 내가 주도권을 쥐고 있거나 그러려고 엎치락뒤치락 하는 그런 모습 속에서 주로 나타난다. 여기서 생각을 조금 발전시키면, 왜 내가 그런 우울함을 감수하면서 출근을 해야 할까? 나의 생존, 나의 사회 위치 유지를 위한 재화 획득,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 등을 위해서이다. 가장 우선적인 이유는 나와 내 가족의 생존 때문일 것이다. 국가가 우리를 지켜주지 못하니 나 스스로 나와 내 가족을 지켜야 하는 상황이고, 국가는 물론 사회, 회사도 이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다. 그런 노출된 약점을 회사는 놓치지 않고 있다. 그럼 우리가 적어도 1주일에 5일을 가는 일터라는 곳에서 우리는 누구인가? 타자인가 주체인가? 우리가 주체인 적이 있을까? 우리가 아니면 누가 주체라는 말인가? 국가는 우리가 타자화되도록 무엇을 했을까?

 

이제 전복이란 개념을 머릿속에서나마 실현해보자. 지금까지 피고용인이나 종업원으로 불리던 사람들이 이제 기업의 주인이 된다고 해보자. 주인이 되어서 스스로 의사결정을 하고, 그 이상의 능력이 필요한 부분은 우리가 전문경영인을 선출하거나 모셔다가 일을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조직원은 스스로의 운명에 대한 결정권을 갖고 동료간에 서로 주체가 되어 직장이라는 공동체 속에서 그것을 발현시킨다.

 

논의를 조금은 유치하게 전개해보면, 오늘날 기업이라는 집단은 국가보다 우위의 입장이 되었다. 삼성전자라는 특정 기업을 운운하지 않더라도 한국의 전경련이나 일본의 게이단렌 (한자로는 그게 그거지만), 미국의 기업집단을 보면 국가의 경계를 침범하거나 공공의 영역까지 사적 영역화를 전개시키고 있다. 구성원의 입장에서 보면, 국민은 국가에 대해 납세나 국방 등 일정한 의무를 지고 있으나 기본적으로는 국가에 대해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갖고 있다. 이때 권리와 의무가 균형을 이뤄야하는건지 (법이나 사회학으로서의 검토가 필요하겠다!) 모르겠으나 이러한 권리와 의무 관계는 이제 증폭된 국가로서의 기업에도 적용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기업의 종업원으로서 노동을 제공하고 임금을 받고 기업의 각종 조직 논리를 순응해야 하는 피고용인의 입장은, 국가의 권한을 대체하는 상황에 입각하려는 기업에 대해서 그 기업에 대한 권리행사를 해야 하고, 그 중 가장 적극적인 표현의 하나가 기업의 주인이 되는 것, 스스로의 자리를 되찾는 것(?)으로 생각된다.

새로운 권력체제로 자리매김하려는 자본권력은 만남을 통한 자유의 성장에 도움이 될지에 대해서는 저자의 회의적 의견에 동의한다. 새로운 운동이 반드시 앞서의 운동보다 더 자유를 고양시킨다는 보장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잠깐 옆길로 빠져보면, 그래서 동북아의 사유는 가보지 않았던 미래가 아닌 가봤던 과거를 가야 할 이상향으로 삼았을까?) 그래서 자본주의의 변종인 한국의 재벌체제에 대한 미래는 매우 부정적인 것으로 저자는 서술하고 있다.

그렇다면 자본권력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철학자인 저자가 말씀하시는 내용은 다시금 현실론보다는 추상적인 화두로 시작한다. [현실 속에서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자본권력을 외부적으로 통제하겠다는 의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자본의 운동방식과 시장의 작동 방식, 그리고 기업의 경영이 외부적으로 어떻게 통제되어야 할지가 아니라 내부적으로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지 또 변화될 수 있을지에 대한 전망이다. 그 전망이 없다면 아무리 우리가 세계 공화국을 만들 수 있다 하더라도 그 나라 안에서 다시 노동자들의 국영기업의 노예, 국가의 노예 또는 당의 노예가 되란 법이 없으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기업의 이윤 추구 자체에 대해서는 보편성이 있고 정당하나 그 정당성을 벗어난 이윤의 사례로 독점이윤을 들고 있다. [정말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요, 참되며 또 좋은 것이다. 여기서 하나란 우리의 스승 함석헌이 말한 의미의 하나이다. 그것은 모든 씨앓들에게서 전형적으로 실현되는 하나, 곧 개별성의 하나인 동시에 보편성으로서의 하나, 또는 전체를 자기 속에서 실현하는 개별자다. 모든 개별적인 것들이 보편적인 존재의미를 가질 때 그것은 참되고 좋은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에 나쁜 것들은 어디서 오는가? 보편성을 상실한 개별성에서 온다. 경제학에서 말하자면 그것은 독점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 모두가 같이 나눌 수 있는 것은 좋은 것이다.] ‘보편성=개별성또는 보편성이란 전체 집합 하에서의 개별성이란 개념은, 저자가 스콜라 철학에서 가져와서 매우 종교적인 냄새가 짙고 개념화 작업에서 매우 위험한 사고가 나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기업의 이윤 특히 독점이윤에 적용시킨 시도의 참신함은 매우 높이 사고 싶다.

앞서의 독점은 노동자가 기업을 소유할 경우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는 기대를 절대적 신념으로 표현하고 있으나 이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이윤도 마찬가지다. 잉여가치가 모두를 위하여 공공적인 방식으로 관리되지 못하고 사사로이 횡령되고 독점될 때, 그것은 나쁜 것이 된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적 기업에서 문제가 되는 것도 이윤의 독점이다. 하지만 노동자 주권에 입각하여 경영되는 기업에서 잉여가치가 사사로이 독점되는 일은 일어날 수 없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모든 노동자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잉여가치가 모든 노동자들의 공동자산인 경우 그것 역시 다른 모든 존재자들처럼 좋은 것이 된다] 보기에 따라서는 매우 위험한 사고처럼 보인다. 독점 이윤 자체의 도덕적인 판단보다 그 귀속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서 좋은 것/ 나쁜 것으로 구분하는 것은 보편성을 잃은 가치판단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사사롭지 않은 독점이윤의 확보, 이런 일이 가능한건지, 가능하더라도 좋다 나쁘다의 대상으로서 가치 판단이 필요한 영역인가? 내가 보기엔 독점 이윤은 그 자체가 극복되더야 할 대상이 아닌가? 그 극복방법에 대해서는 심도깊은 논의와 성찰이 필요하지만 적어도 그 출발점으로서 본다면 독점이윤이 왜 발생했는지, 그 이윤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노동자 경영권이 달성되면 예상되는 선물(저자의 표현)이 세가지 존재한다. 1. 노동과 생산의 균형(차라리 독점 이윤에 대한 해법을 여기서 찾는 게 어떨까?) [자본주의 체제가 이런 균형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맹목적이고 무한정한 이윤 추구의 수렁 속으로 빠져드는 까닭은 그 경제가 자기가 아니라 남을 이윤추구의 도구로 삼아 착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죽든 말든 자본가는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이익을 더 내기 위해 그들을 착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잉여가치를 노동자들이 관리한다는 것은 그런 타자적 착취가 불가능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니, 자연스럽게 노동자의 생산활동과 일상의 삶 사이에 그리고 이윤과 노동 사이에 균형이 형성될 것이다.] 2. (논리의 과장과 비약이 보이는) 자연과 인간관계의 회복 [노동자가 더 이상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도구가 아니라 그 주체가 된다면, 노동자도 자연의 일부이며, 노동자의 생명도 온 생명의 일부이므로, 노동자의 생산활동 속에서 형성되는 생명과 노동의 균형이란 전체로 보자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자연상태 사이의 균형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노동자 경영권이 확립된다면 우리는 오늘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대기업에 의한 자연파괴가 서서히 줄어들어 자연과 인간의 생산활동 사이에 끝내 어떤 화해가 이루어지리라고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자기 땅에서 스스로 농사를 짓는 농부는 자연으로부터 언제나 더 많은 이익을 얻어내기 위해 애쓰면서도 자연과의 화해와 균형이 없이는 농사를 계속 짓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자연을 보호하기 위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자본주의 하에서 우리의 만남이 이뤄지는 시장이란 무엇인가? 시장은 결핍, 즉 우리의 욕구의 근원이 충족되기 위해 수동적 만남이 이뤄지는 장소이다. [시장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까닭은 그것이 수동성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모든 만남 속에는 수동성과 능동성의 계기가 공존한다. 이는 정치적 회합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같은 아고라라고 하더라도 군사적이거나 정치적인 회합의 경우 수동성은 언제나 간접적으로만 現前한다. 군사적이거나 정치적인 회의에서 일어나는 일은 오로지 공동의 판단 행위, 곧 생각의 활동이다. 칸트 식으로 말하자면 여기서 감성적 수동성이 아니라 지성의 자발성 만이 작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 교환이 이루어지는 시장에서는 감성적 수동성은 결코 말소되지 않고 생생하게 살아있다. 왜냐하면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욕망의 충족인데, 이 욕망의 충족이야말로 실은 수동성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나의 생각과 판단은 나의 욕망에 언제나 매여 있다. 무엇을 살까 판단하기 위해 나는 언제나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나의 욕망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욕망의 뿌리는 결핍이다. 그런데 내가 스스로 충족시킬 수 없는 이 결핍이야말로 나의 모든 수동성의 근거이다. 시장에서 경제적 교환을 통해 나는 타인의 결핍을 채워주는 대가로 나의 결핍을 채울 수 있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적 회합이 생각과 판단의 교환 곧 주체들의 능동성의 교환이라면, 경제적 시장은 수동성이 교환되는 장소이다.] 이러한 시장이 (앞서 말한) 보편성을 유지하지 못할 때 문제가 된다. 결국은 사람은 결코 수단이 아닌 목적이어야 하고, 설령 상품이나 자본이 인간관계에 매개체가 되더라도 거기서 관계가 수단으로 전락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그 시장에서 수동성을 서로 같이 나누려 하지않고 단지 남에게 일방적으로 전가시킬 때, 시장은 자유의 장소가 아니라 억압의 장소가 된다. 신자유주의자들이 정직하지 않은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시장은 우리가 서로 수동성을 공정하게 교환하고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는 장소일 때 자유의 장소가 된다. 그러나 시장에서 실현되는 경제적 자유란 것이 결과적으로 타인을 더욱 더 결핍 속에 빠뜨려 자기의 결핍을 채운다거나 자기의 자유를 항구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타인을 노예상태에 빠뜨림으로써 실현되는 것이라면, 그런 종류의 시장 경제를 가리켜 자유라고 부르는 것은 강도의 자유나 도둑질의 자유처럼 언어의 남용일 것이다.]

 

이처럼 문제가 산적한 보편적이지 못한 시장체제의 전환을 자본주의의 극복이라고 부른다면, 이는 보편적이지 못한 특정 시장체제에 대한 극복이지 자본주의 자체의 극복으로까지 변질시키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이처럼 자본주의의 극복이라는 것이 자본주의의 절대적이고 전면적인 부정이 아니라 특수하게 규정된 부정인 까닭에, 우리가 자본주의에서 무엇을 부정하느냐에 따라 똑같이 자본주의의 지옥을 벗어나는 길도 여러 갈래로 달라질 수 있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주의적 길을 통하지 않고서는 자본주의의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 강변하는 것은 특정한 종교를 믿음으로써만 하늘나라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치는 종교인들에게나 어울리는 독단적 아집일 수는 있을지 몰라도 사회과학자나 철학자가 지녀야 할 마음가짐이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종교인들조차 절대적 진리에 이르는 길이 다양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오늘날, 언필칭 과학적 진리를 탐구한다는 사람들이 자본주의의 극복을 위해 오직 하나의 길만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이 어떻게 용납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전복된 시장에서 노동자가 자율성을 갖고 보편성을 가진 존재가 되려면 기업의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필요하고, 경영권을 노동자가 갖자고 제안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모순은 삶을 위한 수단이어야 할 자본이 인간을 지배하는 권력이 되고 그 결과 삶의 실질적 목적이 되어버린다는 데 있다. 하지만 우리의 제안이 받아들여진다면, 이 모순은 사라진다. 노동자가 기업의 경영에 대한 최종적인 주권자가 되어 자기의 생산활동을 스스로 통제하고 형성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산출된 잉여가치를 스스로 관리할 수 있게 된다면, 더 이상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일은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편에서 보자면 노동자 주권에 입각한 기업경영이란 자본주의라는 지옥에서 탈출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그렇다면 자유는 소유에 기초하는 것일까? 저자는 여기서 형이상학적인 담론으로 들어간다. 현재 내가 볼 때 불가피한 논리적 접근이라고 생각에서 저자에 동의한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소유를 통해서만 자유를 확보하려 하는 까닭은 사람들이 자유가 무엇인지를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오해란 자유를 선택의 능력이나 권리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사람들 대다수는 식당에 가서 스스로 먹고 싶은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와 능력이 자유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아무리 어떤 음식을 선택한다 하더라도 그 음식을 소유하지 못한다면 선택은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자유는 선택에서 시작되지만 소유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이리하여 자유와 소유가 뗄 수 없이 짝을 짓게 된다. 그리고 나의 선택의 폭이 넓어지는 만큼 나의 자유의 폭도 넓어지고, 나의 소유가 확장되는 만큼 나의 자유도 확대된다. 만약 내가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다면, 나의 자유도 완전해질 것이다. 그리하여 나의 자유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소유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 시대에 이 욕구는 모든 것을 상품으로 만듦으로써 달성된다. 상품이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나의 자유는 내가 소유한 돈으로 환산되고 측정될 수 있다. 돈밖에 모르는 신자유주의자 속물들이 자유를 입에 올리는 것은 적잖이 역겨운 일이기는 하지만 전혀 논리가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자유를 선택의 능력이라 생각하면 결과적으로 돈이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다.] [그렇게 동료를 기계 부품으로도 모자라 적으로 만들어 놓고 그들을 다시 합쳐서 하나의 조직을 꾸리겠다는 기특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이른바 기업의 인사관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요즘은 비단 기업만이 아니라 기업을 닮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다른 사회 공동체들도 이런 식의 인사관리를 마치 대단히 선진적인 조직운영원리라도 된다는 듯이 흉내 내는 세상이 되었다. 이렇게 기계적인 것도 모자라 적대적인 조직 속에서 일하고 사는 것이 좋다면 그렇게 살면 될 것이다. 하지만 더는 그렇게 살 수 없다고 느낀다면, 이제는 기계적 조직이 아닌 무언가 인간적 조직의 원리를 찾아내야 할 것이다타자가 자기가 되고, 너도 내가 되지 않으면 서로 다른 부분들이 스스로 결합하여 하나의 체계적 조직을 형성할 수 없다. 이제 그렇게 하나를 이룬 유기적 조직은 외부와의 관계에서는 자기 목적적일 것이다마약 기업이 일종의 유기체라면, 유기체의 본재원리는 타자도 자기라는 그 상호성에 존립하는 것이므로, 하나의 기업은 자기목적으로 존재하면서도 시장이라는 생태계 내에서 다른 기업의 도구가 되고, 더 나아가 전체 사회를 위한 도구가 됨으로써 자기 자신을 보존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유기체와도 같은 기업조직 내에서 모든 구성원들 역시 기업을 위한 일방적 도구가 아니라 자기목적이겠지만, 그들은 다른 구성원들과 기업 전체를 위한 도구가 됨으로써 또한 자기 자신을 보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라는 개념의 발전사를 살펴보자. 그리스 시대에는 소수에게만 허용된 정치적 참여와 이를 통해 스스로의 삶을 형성하고 결정하는 능력과 자격이, 그리스도 교에서는 보편적이지만 정신적 자유에 머물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제약이라는 숙제는 근대가 맡게 된다. [그리하여 보편적이지만 내면적인 자유를 해방시켜 현실 속에서 실현되게 만드는 것은 근대적 정신의 몫이 되었다. 보편적 자유가 내면성에 머물지 않고 그리스에서처럼 다시 정치적인 권리가 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자유에 대한 새로운 기초를 제시하는 것이 철학적 과제로 주어졌을 때, 근대 철학자들은 하필 그것을 법적인 권리 그 가운데서도 소유의 권리를 통해 확립하려 했다. 이런 정신을 헤겔은 법철학에서 자유의 견지에서 본다면 자기 것으로서의 계산이야말로 자유의 으뜸가는 현실존재로서 본질적인 목적 그 자체라고 선명하게 요약했다. 로크에서 칸트를 거쳐 헤겔에 이르기까지 다른 면에서는 그리도 불화하던 철학자들이 소유권과 자유의 관계에 대해서는 마치 담합한 것처럼 일치를 이룬 것은 생각할수록 신기한 일이지만, 그 속사정이 어떻든 그것은 근대 철학에서 가장 유감스런 화해였다. 왜냐하면 철학자들이 자유가 재산권에 존립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자본주의가 낳은 모든 속물적 욕망에 철학적 위엄을 부여해주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재산권이야말로 자유의 기초라는 말은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하이예크나 프리드만 또는 노직 같은 자본주의적 선동가들의 상투적인 구호가 되었다.]

근대의 자유에 대한 오해, 비틀어진 이해에 대해 저자는 스스로 바로잡기에 나선다. 이 주장은 결국 노동자의 경영권의 당위성으로 귀결지어진다. [하지만 정말로 자유는 소유에 기초하는가? 아니다. 이점에서 로크도 칸트도 헤겔도 거짓말을 한 것이다. 이 위대한 철학자들이 자유가 소유게 기초한다고 생각한 것은 자유를 선택의 문제로 오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유는 근본에서 보자면 대상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스스로 형성하는데 존립한다. 물론 인간은 자기를 형성하기 위해 반드시 외부적인 재료를 필요로 하는 유한한 존재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몸을 형성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먹어야 한다. 그런 것처럼 우리는 자기를 문화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형성하기 위해서도 무어신가 외적 대상을 소재로 사용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종종 그 외적 대상을 배타적으로 점유하거나 소유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조각가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대리석을 소유해야 하며, 구두장이가 구두를 만들기 위해서는 자기가 사용할 가죽을 먼저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자유를 위해 소유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마냥 틀린 생각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유가 자유이며, 소유의 확장이 자유의 확장이라는 주장으로 나아간다면, 이는 근거 없는 비약에 지나지 않는다노동자가 기업의 노예가 아니라 기업의 자유로운 주인이 되기 위해 기업을 반드시 소유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한가? 자유가 사물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형성하는 활동에 존립하는 한에서, 자유는 자기가 하는 활동을 스스로 규정할 수 있는 능력과 권리를 의미한다. 노동자의 경우라면 그 활동은 생산활동이다. 하지만 오늘날 대규모로 이루어지는 기업의 생산활동을 어떻게 노동자가 직접 스스로 규정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대규모 작업장에서의 협업은 피할 수 없이 지휘자를 요구한다. 마르크스는 이것이 노동자의 예속을 초래한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것은 천재들에게서 자주 볼 수 있는 성급함의 발로였을 것이다. 그는 대규모 작업장에서 자본가의 역할이 교향악단의 지휘자와도 같다고 생각했다기업에서 노동자의 자유도 마찬가지이다. 노동자들이 기업의 자유로운 시민이 되기 위해 기업을 소유해야 할 까닭은 없다. 자유는 활동에 존립한다. 그러나 소유 자체는 아직 활동이 아니므로 자유의 보증이 되지 못한다. 노동자의 자유는 오직 기업에서의 생산활동의 자발성과 주체성 속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를 위해 우리에게 요구되는 일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기업 내에서만 피할 수 없는 협업에서의 서로주체성 이다. 쉽게 말해 노동자들이 자기들의 생산활동을 근본에서 스스로 더불어 결정할 수 있을 때 그들의 자유는 실현되는 것이다. 물론 대규모 작업장에서 모든 노동자들이 만사를 회의를 통해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교향악단의 단원들이 지휘자를 스스로 선택하듯이 노동자들이 사장을 선출하고 기업 경영의 방향을 결정하는 일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면, 나라의 시민들이 자유로운 주권자이듯이 노동자들 역시 기업의 주권자가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노동자의 자유를 위해 요구되는 것은 기업의 소유권이 아니라 경영권이다.]

 

노동자의 자유는 권력이라는 외부 변수를 필연적으로 반영해야 한다. [사회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외적 구속력이 바로 권력이다. 인간이 자기의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이나 결단에 앞서 미리 주어진 공동체 속에서 태어나고 살 수밖에 없는 까닭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만남을 위한 자기 제한과 구속이 그 구체적 발생 과정의 거의 모든 면에서 자기 결단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적 힘을 매개로 하여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너와 나의 만남을 유지시켜주는 그 외부적 힘이 바로 권력인 것이다그러므로 권력은 반드시 제한된 범위 내에서 어떤 정해진 원칙에 따라 행사되어야 한다. 이것이 권력의 정당성을 위한 첫 번째 기준이다. 둘째로 모든 권력은 권력 행사의 대상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일 경우에만 정당성을 갖는다우리의 관심사에 관해서 보자면 권력이 사물적 소유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만 우리가 분명히 기억하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권력은 언제나 인격적 만남에서 발생하는 현상이요, 만남은 내가 사물적으로 소유할 수 없는 타인과의 관계로서, 권력은 오직 이 만남에 의해 만남을 위해 정립되는 한에서만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권력이 누구의 것이냐 또는 같은 말이지만 누구의 소유물이냐 하는 것을 물을 수는 없고, 오직 권력이 정당하냐 아니면 부당하냐 하는 것만을 문제 삼을 수 있을 뿐이다. 소유권이 아니라 정당성만이 권력의 문제인 것이다.]

기업의 지배라는 담론을 위해서는 경영권에 대한 세부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경영권이 하나의 권력인 한에서 법철학의 용어로 분류하자면, 물권이 아니라 인격권에 속한다. 원래 인격권은 인간이 사물로 간주되는 한에서 인간에 대한 권리를 의미한다. 여기서 사람이 사물로 간주되는 까닭은 타인의 권리 아래서 한 사람의 자유의지가 제한당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권력이 타인을 강제하고 타인에게 명령하는 권리인 한에서 그 권력 아래 있는 타인은 복종의 의무가 있는 것이며, 그런 한에서 타인의 권력 아래 있는 사람은 자기의 자유의지를 제한당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의지는 인격의 본질에 속하는 까닭에 제한된 범위 내에서 부정된다는 것은 사람이 권력의 지배권 내에서 사물로 간주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법학에서 보자면 경영권은 엄밀한 의미에서 법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권리는 아니다. 다만 고용에 관한 민법의 규정을 통해 유추하자면, 고용된 노동자에 대한 권력으로서 경영권이란 노동자에게 자기의 지휘와 명령에 복종할 것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경영권은 정치적 권력과 마찬가지로 동등한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권력이다. 그런데 이런 권력은 타인의 인격 전체가 아니라 반드시 타인의 일부를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잇는 권리이다. 그것은 대개 어떤 일을 위해 타인의 능력을, 즉 타인의 정신적 육체적 노동력을 도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권리이다. 하지만 그 일부가 타인의 인격과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는 까닭에 이런 권리는 사물에 대한 권리가 아니라 인격에 대한 권리이다. 그리고 타인이 행사하는 권력 아래 있는 사람은 적어도 그 권력행사의 대상으로서는 도구적 존재다. 이 권리가 무제한적으로 확장된다면, 이는 타인의 인격 자체를 완전히 도구화하고 사물화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것은 인간을 노예로 삼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과연 기업의 경영권 아래 종속하는 노동자의 노동에 대해서도 수단과 목적 사이의 이런 동일성이 성립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마 그렇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왜냐하면 적어도 지금 우리가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자본주의적 기업경영에 국한해서 보자면 노동의 목적은 잉여가치 또는 이윤을 산출하는 것인데, 이윤이나 잉여가치를 두고 모두를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근원적 동기는 사적 이익의 추구인바, 이런 사정은 기업경영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업 내에서 노동하는 노동자가 수단인 동시에 목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간단히 말해 기업의 경영권을 장악한 자본가가 자본주의적 경제 원리에 충실한 이기적 인간이라면, 그에게 노동자는 자기의 이윤추구를 위한 일방적인 수단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자기 자식이 반도체 생산 라인에서 일을 한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겠지만, 남의 자식은 동시에 목적이 아닌 한갓 수단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이 땅의 수많은 자본가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그들의 생명을 소진시켜 자기를 위한 이윤을 극대화시키려 하는 것이다. 이런 사정을 생각하면, 지금처럼 타인을 도구화하여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권력으로서 경영권이란 도덕적 관점에서 결코 정당한 권력이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누구도 타인을 한갓 자기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도구화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업이 노동자를 고용하고 그들에게 지배권을 행사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까닭은 사용자와 노동자 사이에서 맺어지는 고용계약이 서로에게 이로운 것으로서 자유의지에 의해 성립되는 대등한 계약이라는 허구적 이데올로기가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이데올로기가 진실이라면 노동자의 임금 총액이 회사의 이윤 총액에서 사용자에 대한 보수까지 포함하여 모든 생산비용을 제외한 액수와 같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잉여가치가 영임을 뜻할 것이니, 이런 조건이라면 어떤 기업주도 기업을 경영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기업주가 기업경영이라는 자기 역할에 대한 보수 이상의 아무런 잉여도 얻지 못한다면 그는 다른 회사에서 노동자로서 일하지 않고 굳이 기업을 경영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찾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경영의 동기는 자기가 투입한 유형무형의 모든 자산보다 더 큰 잉여가치를 얻어내는 데 있으니, 에둘러 말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만 약탈과 착취의 권리야 말로 기업경영의 동기인 것이다. 잉여가치는 말 그대로 자기가 투입하지 않은 어떤 것을 더 많이 얻어낼 때 비로소 발생하는 것인데, 기업가 자신이 모든 잉여를 산출하는 자가 아니라면 노동자 이외에 누가 그 잉여를 산출하겠는가?]

기업에 노동자가 고용되면서 경영권의 의미는 단순히 노동자의 업무를 효과적으로 진행하는데 그 사용이 제한받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오늘날 기업에서의 노동이란 단순히 자기 인격의 일부를 구성하는 노동력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삶 전체를 저당 잡히는 것이 되어버렸다는 데 문제의 심각함이 있다. 오늘날 경영권이란 기업에서 사용자가 특정한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단지 어떤 특정한 일을 수행할 것을 노동자에게 명령하고 지시할 수 있는 권리에 머물지 않고, 노동자의 삶 전체를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는 권리로 확장되었다. 그리하여 경영권은 실질적으로 노동자들을 노예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권력으로 탈바꿈해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런 권력을 어떤 면에서 정당하다 말할 수 있겠는가? 한편에서 그것은 인간을 도구화하고 수단화하여 마지막에는 사물화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부당한 권력이며, 다른 편에서 노동력을 판매하고 구매하는 계약이 겉으로는 자유롭고 대등한 계약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불공정한 계약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부당한 권력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을 통째로 노예화한다는 점에서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는 권력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다. 그것은 이처럼 부당하고 부도덕한 권력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적으로 소유된다는 데 있다. 앞에서 우리는 권력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했었다. 경영권이 권력인 한에서 그것 역시 사물적으로 사사로이 소유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마치 재산을 상속하듯이 삼성재벌은 벌써 3대째 경영권을 세습하고 있다. 이런 사정은 비단 삼성의 경우만이 아니라 이 나라의 다른 모든 크고 작은 기업의 경우에도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 즉 경영권을 당연히 사적으로 장악될 수 있는 것 또는 소유될 수 잇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논의의 출발점은 (어떤 특정 부류의) 인간의 욕구에 기인한다. 이전 체제에 비해 대규모 시장이 등장하고 거대 이윤을 보고 싶은 과한 욕구가 주식회사를 등장시키고 비대화를 유발하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수요를 키우고, 부풀어진 수요를 잡으려는 노력의 와중에 자본이 결집되나, 그 결집 과정에서 도덕성이나 정당성의 문제는 배제된다.

 

여기서 저자의 날카롭고 이 책의 핵심 내용이 등장한다. [생각하면 바로 여기에 자본주의 경제의 곤경이 있다. 즉 권력으로서 기업의 경영권을 사사로이 소유하는 것은 어떤 면으로 보든 정당하지 못하다는 것을 누구라도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스스로 깨달을 수 있지만, 기업이 사적으로 소유될 수 잇는 대상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면 아무리 부당하다 하더라도 경영권은 사적으로 소유될 수 있는 어떤 권력이 되어 버린 것이다. 자본주의적 경제체제가 야기하는 온갖 문제들에 대해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방식으로 근본 원인을 말해왔지만, 지금까지 자본주의의 병폐를 효과적으로 근절할 수 있는 처방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더도 덜도 아니고 그 모든 진단이 근본에서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내 편에서 보자면 자본주의의 근본 모순은 다른 어디도 아니고 사물의 소유권과 경영권을 뒤섞어버린 데서 비롯된다. 즉 소유할 수 있는 것과 소유할 수 없는 것을 구별 없이 뒤섞어서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자본주의 체계의 모순의 뿌리인 것이다. 사람이 소유할 수 잇는 것은 소유하고 소유할 수 없는 것은 소유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모순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런데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소유한다면 그로부터 모순이 발생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어찌 보면 저자는 자본주의의 출발점, 자본주의의 토대에 대해서 심각한 회의를 한다. 자본주의 체제와 이윤추구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개인의 소유권에 대해서 의심한다면 그건 자본주의 개념과 운영에 대한 저자의 철학적 모순이 아닐까? 물론 소유권에 대해서도 사적 소유가 가능한 영역을 구분하고 있지만, 사적 자치와 이윤 추구를 기본 토대로 한 주식회사가 주를 이루는 현대 자본주의와는 철학적으로 매우 배치한다고 생각된다. 달리 말하면, 자본주의라는 체제는 그만큼, 그 자체의 철학적 기반과 개념상의 완결성은 아직 결점이 존재하는 것이다. 물론 이전의 체제보다는 진보한 면이 있지만 인간, 그리고 인간의 노동을 다루는 점에서는 반성과 극복이라는 매우 어려운 숙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하며, 이 부분이 해결 안된다면 체제의 안정성에 결정적인 방해 요인으로 지속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노동자를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키고 참된 의미에서 기업의 시민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기업의 소유권을 자본가의 손에서 국가의 손으로 이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소유권과 기업의 지배권, 즉 경영권을 분리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본의 소유권과 당연하게 동일시되어 온 경영권을 그와 분리시켜 도리어 노동권과 동일한 것으로 결합해야 한다. 이를테면 주식회사에서 아무리 많은 주식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 기업을 지배할 수 있는 권리가 될 수 없으며, 경영권은 오로지 그 기업의 노동자에게 속해야만 한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인 것이다.]

 

주식회사에서 맺어지는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가 우연성에 기인한다는 재미있는 해석도 등장한다. [그런데 이처럼 주식회사가 자본의 결합체이고, 사람은 한갖 자본에 귀속하는 속성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주식회사에 관계하는 사람들과 주식회사의 결합관계가 다른 형태의 회사와 달리 본질적으로 우연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주식회사의 소유권이나 경영권에 대한 온갖 복잡한 물음은 모두 이 우연성으로부터 출발한다.] [주식회사가 법적 인격이라면 그것은 자연인의 인력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에게 귀속하는 소유물일 수 없고 오직 자기가 자기의 주인일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소유의 주체일 수는 있으나 어떤 경우에도 소유의 객체일 수는 없다. 이러 의미에서 주식회사는 독립된 법인격을 보유한다. 그리고 법인으로서 그것은 자립적이고 확장된 인격체로 간주되는 만큼, 또한 동시에 자유로운 인격체로 간주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식회사는 개인의 자유로운 능력이 확정되어 실현된 단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데 그 자유가 하필이면 재산능력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주식회사의 본질 속에 내재하고 있는 동요의 근원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떻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주식회사가 자유로운 인격체로 간주된다는 것은 그것이 자기 이외에 다른 주인을 갖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사실이다.

 

노동자가 아닌 주주가 경영권을 통해 참여하는 것은 가능할까? [주주들이 주식회사의 주인으로서 경영권을 행사할 수 있으려면, 다른 무엇보다 그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 기업을 경영한다는 것은 그것에 하나의 통일성을 부여하는 일이요, 이를 위해서는 경영의 주체가 먼저 통일성을 이루고 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동체는 사물이나 세포들의 모임이 아니라 의식적인 주체들이 하나를 이룬 모임이다. 주체는 고통받고, 욕구하며, 활동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그런 주체들이 모여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같이 고통 받고, 욕구 하며, 활동하는 서로 주체성이 요구된다. 하지만 주주들은 같이 고통받지도 않고, 욕구하지도 않으며, 같이 활동하지도 않는다. 물론 그들이 공동으로 원하는 것이 꼭 하나 있는데 그것이 주가 상승, 곧 주주가치의 극대화이다. 그러나 이것은 주주들이 어떤 특정한 기업의 경영을 위해 공동으로 참여할 아무런 이유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윤의 극대화를 위해서라면 각 주주는 자신의 투자 계획에 따라 언제라도 특정 기업의 주식을 처분하고 다른 주식을 살 수 있으므로 이윤극대화의 욕구는 서로 다른 주주들을 하나의 기업 경영을 위해 결속시켜 주는 동기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 방법론 차원에서 하나(너와 내가 모여 하나하나의 개체들보다 높은 하나)가 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렇다면 그 하나는 어떻게 의식되는가? 답은 이것이다. 반성적으로 의식된다는 것은 자기가 타자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조직 속에서 개별적 주체들을 결속시켜주는 보다 높은 하나가 개별적 주체들 사이에서 의식되기 위해서는 그 하나가 반드시 자기 자신이면서 동시에 대상적으로 타자화되어야 한다. 내가 나를 하나의 나로서 의식하는 것이 나를 타자화하고 대상적으로 의식하는 것을 필연적으로 수반하듯이, 우리가 보다 높은 하나로 고양된 자기를 의식할 경우에도 그 확장된 하나의 자기를 반성적으로 의식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하나는 사물적 하나가 아니라 인력적 하나이다. 너와 내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우리가 되었다면 그 우리라는 보편적 주체성을 구현하고 있는 구체적 인격이야말로 한 조직 내에서 구성원들이 확인할 수 있는 보다 높은 하나인 보편적 자기의 표현이자 실현인 것이다. 한 공동체 내에서 만약 이렇게 보편적 주체성을 구현하고 있는 구체적 인격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자기들이 서로주체성 속에서 보다 높은 하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반성적으로 자각할 수 없을 것이며, 이런 경우 설령 구성원들이 긴밀하게 희로애락을 나눈다 하더라도 그들이 하나됨은 그 결속력이 반감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 이제는 드디어 결론이다. 결론은 그간 말했던 노동자의 경영권 확보에 대한 정리이다. [이런 이념적 척도에서 보자면 노동자 경영권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경영자는 노동자 전체의 마음을 제 마음으로 삼고 노동자들은 경영자 속에서 전체로 하나된 자기를 발견하는 기업 조직이 참된 서로주체성을 실현한 이상적 기업이라면, 이런 공동체 속에서 경영자와 노동자의 분리는 나는 나이고 너는 너라는 홀로 주체들의 타자적 분열과 대립일 수 없다. 그것은 도리어 너도 나라는 자각 속에서 우리가 된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에서 자기를 발견하기 위해 마주 선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서로주체의 자기거리인 것이다. 노동자와 경영자가 서로 단절된 홀로 주체들이 아니라 더불어 보다 높은 하나 속에서 결속된 서로주체로서 우리라면, 경영자의경영권 역시 타자로서 노동자에게 명령하는 권력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보편적 의지와 활동의 표현이며 실현이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 경영자가 노동자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남으로서 노동자들 위에 군림하는 권력자라면, 노동자들은 경영자 속에서 자기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며, 마찬가지로 경영자는 노동자들과 서로주체성 속에서 우리가 될 수 없을 것이니, 이런 기업이 참된 공동체를 이루 수는 없으리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s*****s 2012.11.13.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신자유주의 대안, 그 안에 있다 - 노동자 경영권이라는 화두
"신자유주의 대안, 그 안에 있다 - 노동자 경영권이라는 화두" 내용보기
신자유주의는 우리 사회의 근본부터 파괴하고 있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IMF이후 한 때는 자신만 경쟁에서 이기면 잘 살 수 있을까 했다. 이제는 누구나 다 안다. 애초에 가진 사람이 아니면 무슨 짓을 해도 안된다는 것을..   대안이 필요하다. 본격적인 경제의 시발인 자본주의 속의 경제학자는 결코 이 대안을 내놓을 수 없다. 약간의 반성이 있을 뿐 대안 자체는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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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는 우리 사회의 근본부터 파괴하고 있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IMF이후 한 때는 자신만 경쟁에서 이기면 잘 살 수 있을까 했다. 이제는 누구나 다 안다. 애초에 가진 사람이 아니면 무슨 짓을 해도 안된다는 것을..

 

대안이 필요하다. 본격적인 경제의 시발인 자본주의 속의 경제학자는 결코 이 대안을 내놓을 수 없다. 약간의 반성이 있을 뿐 대안 자체는 모색해서도 모색할 수도 없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한 인문은 대안에 대한 갈증에 답을 해야 한다.

 

한 축은 마르크스다. 철학에서 출발한 마르크스는 인간중심의 철학을 기치로 자본주의를 분석해갔다. 자본주의 초기의 원시 축적의 모순을 목격한 그는 이에 대한 분석서로 <자본론>을 썼다. 하지만 국가자본주의화된 스탈린의 소련은 마르크스를 망쳤다. 왜곡된 국가의 수탈구조로 민중을 착취한 소수 관료집단이 새로운 '자본가'가 되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의 모순을 여전히 비판하지 못하지만 주류 경제학자들은 그냥 소련을 예로 들며 무시하게 되었다.  오류로 치부하고 싶어 역사적 왜곡을 진실인양 호도한다. 물론 이 역사적 왜곡을 벗어내도 여전히 국가자본주의로 가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는 남았다.

 

또 한 축은 장하준이다. <사다리 걷어차기>라는 탁월한 논문으로 출발한 그는 국가 주도 자본주의의 높은 성장율과 선진자본주의 국가와의 갈등에 대한 시선을 제공했다. 문제는 그의 주장이 과거지향이라는 것이다. 국가 중심의 원시축적을 강조하지만, 그것이 현재를 이야기 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재벌옹호론과 세계 질서에서 갑작스러운 이탈을 이야기하는 세계 반자본주의 연대보다 훨씬 이상적이면서 모순적인 주장을 할 수 밖에 없다.

 

세번째는 길위의 철학자 김상봉이다. 독일 유학시절부터 25년간 그의 뇌리에 남아있던 '왜 기업을 노동자가 경영하면 안되는가'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모두들 주주자본주의를 인정하고 이를 위해 공유재를 위한 확보를 이야기할 때, 그는 주주자본주의는 허구라고 이야기한다. 유명 오케스트라는 주주가 아니라 단원이 지휘자를 뽑는다. 또, 이건희가 가진 삼성의 주식은 그의 절대적인 소유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엔론의 경영자는 주주를 무시하며 전권을 휘둘렀다. 이런 현실적인 자본주의 주식회사의 실체성을 우리는 오랫동안 간과해 왔다. 직시하는 순간 우리는 대안의 가능성을 볼 수 있다. 키친아트가 노동자 중심의 회사로 크게 성장하는 것처럼.

 

그의 철학적 담론인 서로 주체성은 노동자의 경영권에 대한 철학적 근거를 제시한다. 인간의 착취를 끝내기 위해서는 모든 구성원이 주체적인 참여와 지배가 가능해야 한다. 임원이든 노동자이든,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본사 노동자이든 제3세계 하청노동자이든.

 

우리는 대안의 모색을 멈출 수 없다.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서 만나야 하고, 그 만남이 실천이 되어야 한다. 만남의 철학자 김상봉은 우리에게 만남의 대안을 제시했다. 경제학적으로 데이타가 부족하여도, 상법상 한 구절의 추가(경영자는 노동자가 선출한다)만으로 안된다고 세부적으로 문제제기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노동자 경영권은 자본주의 내에서 자본주의를 뒤집을 수 있는 맹아가 싹튼다는 오래된 명제의 새로운 확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a*****l 2012.03.24.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