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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와 홍대용, 학문과 세상을 논하다-정조와 홍대용, 생각을 겨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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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와 홍대용, 생각을 겨루다'는 얼마전  박근혜 대통령이 구입했다고 해서 화제가 된 책이다. 지난 달 말,'우주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돌베개 刊)을 보고 홍대용이란 인물에 대해서 다시 보게 됐던 터라 이책이 화제가 된 것이 반가웠다. 홍대용은 대중들에게 알려진 것보다 훨씬 우리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고, 더 후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바로 '정조와 홍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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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와 홍대용, 생각을 겨루다'는 얼마전  박근혜 대통령이 구입했다고 해서 화제가 된 책이다. 지난 달 말,'우주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돌베개 刊)을 보고 홍대용이란 인물에 대해서 다시 보게 됐던 터라 이책이 화제가 된 것이 반가웠다. 홍대용은 대중들에게 알려진 것보다 훨씬 우리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고, 더 후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바로 '정조와 홍대용, 생각을 겨루다'를 읽기로 했다.

 

조선시대의 관점에서 보자면 제목처럼 만인지상 임금과 일개 신하가 감히 생각을 겨룬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을텐데, 이 책은 세자 익위사로 첫 관직에 나간 홍대용이 세손이던 정조와 아홉달에 걸쳐 열일곱번 서연(書筵)한 자리의 기록을 대화로 풀어낸 것이다.

지난 번에 말한바도 있지만, 안그래도 요즘 한문 번역, 고문에서 느껴지는 담박함이 점점 마음에 들고 있는데, 이 책에서 정조와 홍대용, 다른 신하가 나눈 대화에서는 격조와 품위가 느껴졌다고 할까. 더더욱 고전의 깊은 맛에 매혹돼가는 중이다.

1774년 12월 1일 경희궁 존현각에서 마련된 야대에서 처음 만난 정조와 홍대용,내 머리 속으로 경전의 내용을 두고 젊은 세손과 관록있는 신하들이 뜻을 새기고, 의미나 새겨둘 점을 교환하고, 질문하는 세손의 진지한 모습이 그려졌다.

 

서연의 내용을 보면 경전 대목에서 그치지 않았다. 세손의 질문을 통해 중국의 역사나, 조선의 사례, 민생, 관제, 군주로서 지켜야 할 덕목 등 화제는 전방위적으로 확산됐다. 세손의 의견과 홍대용의 견해 차이가 드러나기도 했다. 또 세손에게 지적해야 하는 경우도 생겼다.

서연을 통해 세손을 만나는 신하 입장에서는 미래 권력인 세손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은 욕심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훈계하는데  한계가 있을 수 있도 있는데, 홍대용은 에둘러 말하지 않았다. 세존이 어질고 밝지만 위엄과 중후함은 모자란 것 같다는 등의 직언도 서슴지 않고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세손과 홍대용의 서연으로 맺어진 인연은 길게 이루어지진 못했다. 1775년 영조가 승하하면서 정조가 보위를 잇게 됨으로써, 이들이 서로의 학문적,경세에 관련한 견해를 주고 받을 수 있는 기회는 끝이 난 것이다.

좀 더 일찍 정조와 홍대용이 서연으로 만나서 더 오래 더 깊게 생각을 교환했으면 더 풍성한 두 사람의 서연문답을 볼 수 있었을텐데..

 

홍대용은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사상가다. 그는 18세기 실천성을 잃어가는 조선 성리학에서 조선후기 성리학의 전인적인 학풍와 실천성에 가장 근접했던 인물이었다. 더욱이 그는 북학의 사상적 토대를 닦은 인물로, 조선 후기 사상에 엄청난 발자취를 남겼다고 할 수 있다.

 

'정조와 홍대용, 생각을 겨루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포근해졌다고 할까. 이 책의 저자는 홍대용 사상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은 학자이다. 홍대용 전문가답게 시종일관 호들갑떨지 않고 성실하고 차분하게 정조와 홍대용의 서연을 조곤조곤 전해주고 있다. 

이 책이 홍대용이 남긴 '계방일기'를 바탕으로 풀어간 것이었고 거기에 매 장마다 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논어, 연암집 등 1차 사료 위주로 참고문헌이 제시돼 있어서 신뢰감을 더해줬다. 요즘 1차 사료를 직접 보지 않고, 그 사료에 대한 저서를 읽고 자신의 견해를 풀어가는 필자들도 적지 않은데, 이렇게 정석적이고 학구적인 필자 덕에 책은 품격을 더할 수 있었을 것이다. 독자 입장에서는 지성적인 대화 자리에 귀 기울여 동참한 기분에 젖을 수 있었다. 뿌듯했다.

 

e****0 2013.07.10. 신고 공감 5 댓글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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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천하를 비추는 외로운 달이 되고자 한 임금 이야기
"온 천하를 비추는 외로운 달이 되고자 한 임금 이야기" 내용보기
조선시대 왕이 신하들과 함께 공부하는 것을 경연(經筵)이라 하고, 왕세자가 신하들과 함께 공부하는 것을 서연(書筵)이라 한다. 이 책은 조선후기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던 정조의 서연 내용을 담은 책이다. 정조가 즉위하기 전인 왕세자 시절, 서연을 담당하는 계방의 시직으로 임명된 홍대용이 약 300일 동안 정조의 서연에 참석해 나눈 문답을 기록한《계방일기》을 완역한 것이다.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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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이 신하들과 함께 공부하는 것을 경연(經筵)이라 하고, 왕세자가 신하들과 함께 공부하는 것을 서연(書筵)이라 한다. 이 책은 조선후기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던 정조의 서연 내용을 담은 책이다. 정조가 즉위하기 전인 왕세자 시절, 서연을 담당하는 계방의 시직으로 임명된 홍대용이 약 300일 동안 정조의 서연에 참석해 나눈 문답을 기록한《계방일기》을 완역한 것이다. 서연과정의 질의응답을 통해 임금 즉위를 얼마 남겨 놓지 않았던 정조의 고민과 생각을 살펴보고, 함께 서연에 참여한 실학자 홍대용의 인간됨과 가치관을 가늠할 수 있다.

 

《계방일기》는 서연의 풍경을 지극히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특색이 있다. 답변을 듣는 정조의 미세한 표정과 태도에서부터 잡담한 내용, 서연이 행해지는 방안의 풍경까지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또한 대화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정조가 홍대용의 자질을 시험하기 위한 질문도 찾아볼 수 있고, 정치적 속내가 담긴 영악한 질문이 나타나기도 한다. 물론 홍대용은 머지 않아 즉위하여 임금이 될 세손의 자질과 본심을 자세히 관찰하기도 한다.

 

서연내용 중 정조와 홍대용의 문답에 촛점을 두어 정리한 《계방일기》를 보면서 저자는 정조를 세상의 모든 강물을 비추는 밝은 달(萬川明月主人翁)에 비유하고 있다. 반면 홍대용은 거문고를 닮은 선비인 건곤일초정(乾坤一草亭)의 주인이라고 칭하고 있다. 경전에 대한 이해 뿐만 아니라 수학, 천문학, 음악등 여러분야에 대한 재능을 보였던 실학자 홍대용이 벼슬보다는 이용후생의 실질을 숭상한 인물이었음을 간접적으로 제시한다.

 

 당시 정조와 홍대용이 약 300일 동안 공부한 책은 율곡의《성학집요》 퇴계 이황이 주자의 편지를 추려 모아 편찬한《주서절요》였다고 한다. 조선 성리학의 양대 거두의 저서를 통해 조선의 선비들이 고민했던 생각의 실마리를 엿보는 것도 이 책을 보는 한 가지 재미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책의 내용에서 출발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통해 조선후기의 사회상과 정조의 개혁의식, 홍대용의 실학사상의 내용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크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이 어두워진 고요와 고독의 시간에 빛을 발하는 달, 달이 뜨면 모든 강물과 냇물에 골고루 빛을 비추는 밝은 달이 되고 싶었던 정조, 거문고를 타면서 자신을 참모습을 알아주는 종자기같은 임금을 바랐던 실학자 홍대용. 결국 달빛은 홀로 빛났고 거문고는 함께 울지 않았다. 이 책은 두 사람의 인생을 총해 자신이 추구하는 올바른 세상을 추구한 두 사람의 외로운 삶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c******4 2013.07.21. 신고 공감 4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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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을 통해 조선후기의 풍경을 엿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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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을 통해 조선후기의 풍경을 엿보다 조선왕조 오백년이 넘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스물일곱 명의 왕과 더불어 각 시대를 좌지우지했던 선비들 또한 부지기수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유독 관심이 가는 사람들이 있다. 조선의 르네상스로 일컬어지는 영, 정조 시대를 살았던 사람으로 변한 세상에서 사람을 살리는 학문을 하고자 했던 사람들이 그들이다. 소위 북학파나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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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을 통해 조선후기의 풍경을 엿보다

조선왕조 오백년이 넘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스물일곱 명의 왕과 더불어 각 시대를 좌지우지했던 선비들 또한 부지기수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유독 관심이 가는 사람들이 있다. 조선의 르네상스로 일컬어지는 영, 정조 시대를 살았던 사람으로 변한 세상에서 사람을 살리는 학문을 하고자 했던 사람들이 그들이다. 소위 북학파나 실학자로 불리기도 한 그 사람들에 대한 관심에서 조선의 역사 전반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홍대용으로 대표되는 실학자들로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등의 학문적 관심과 더불어 그들이 보여준 사람관계의 진수를 만나면서 현대에서 벌어지는 사람관계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북학파 또는 실학자의 좌장 역으로 홍대용의 역할은 지대한 것이다.

 

바로 그 사람, 홍대용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과학자, 수학자에서 천문학자 그리고 손꼽히는 거문고 연주자라는 단편적인 사실로 홍대용을 이야기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담헌집’,‘의산문답’이나 ‘건정동필담’, ‘계방일기’등으로 그의 저서를 접하기에는 일반인으로써는 벽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런 한계를 벗어나 홍대용에 대한 이해를 한층 높이며 더욱 정조가 왕위에 등극하기 전 왕세자 시절의 상황까지 알 수 있는 책이 출간되었다. 김도환의 ‘정조와 홍대용, 생각을 겨루다’가 그 책이다. 이 책은 저선 후기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왕, 학자군주, 개혁군주로 일컬어지는 정조의 왕세자 시절 서연의 풍경을 담은 책이다. 경연이 왕의 공부라고 한다면 서연은 왕세자의 공부를 말한다. 이 서연에 홍대용이 계방의 시직으로 참여하며 그가 기록한 ‘계방일기’를 번역한 것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저자 김도환이 새로운 시각이 돋보이는 책이다.

 

왕조국가에서 다음 왕으로 지명된 왕세자의 공부인 서연이 어떤 내용과 형식으로 이뤄지는지 충분히 알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왕세자와 홍대용의 대화는 군신간의 예의를 기반으로 하되 자신이 갖는 학문적 지향점에서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모습을 보며 학문하는 사람의 올바른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특히 이 책에서 주목되는 점은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정조의 왕위 등극 전의 역사적 배경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홍대용의 학문적 지향점이 무엇인지, 무엇이 그를 북학의 문을 연 장본인으로 불리게 되는지 알 수 있다. 홍대용의 계방일기에 그려지는 사연의 모습은 방 안 풍경, 세손의 표정, 잡담 같은 소소한 일까지 모두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어 마치 서연장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생동감이 함께한다.

 

노론의 맥을 잇는 정통 유학자이지만 북경을 방문하고 청나라의 학자들과 교류하며 북학의 선두주자이자 실용학문을 철저히 추구했던 홍대용과 왕세자이지만 자신의 자리가 늘 위태로운 일상을 살며 왕과 신하들 사이에서 갈등을 겪었던 정조의 시각이 결국에는 서로 각자 다른 길을 걷게 되는 이유가 된다. 어쩌면 정조의 왕위에 등극하며 정권에 참여하여 정책을 펼 수 도 있었을 텐데 그렇지 못한 모습을 보면서 조선후기를 바라보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써 몹시 아쉬운 점이기도 하다.

 

기록이 가지는 의미는 실로 크다. 이 책의 근거가 된 ‘계방일기’기 없었다면 정조의 왕세자 시절을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특히 서연의 일원으로 참여한 개인의 기록이기에 그 의의는 더 크다고 보인다. 하지만, 이런 기록물 역시 현대인이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 한계는 한자 문화권에 살면서도 이젠 잊혀져가는 한자로 기록된 문헌은 어느 외국어나 다름 없다. 하여 저자와 같은 학자들의 노력이 필요한 것인지 모르겠다. 저자의 번역과 더불어 새롭게 구성한 이 책과 같은 다양한 저작물이 독자들과 만나는 기회가 많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m*****8 2012.09.11. 신고 공감 1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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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와 홍대용, 생각을 겨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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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나 실학에 관한 대중 저술은 이미 지금까지 많이 나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꽤 매력이 있다.   첫째로, 홍대용은 이른바 ‘경세치용’을 중시한 대표적인 실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련 대중 저술이 그렇게 많이 나와 있다고 볼 수 없었는데, 이 책은 본격적인 대중저술로서 홍대용을 흥미롭게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이 책은 기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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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나 실학에 관한 대중 저술은 이미 지금까지 많이 나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꽤 매력이 있다.

 

첫째로, 홍대용은 이른바 경세치용을 중시한 대표적인 실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련 대중 저술이 그렇게 많이 나와 있다고 볼 수 없었는데, 이 책은 본격적인 대중저술로서 홍대용을 흥미롭게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이 책은 기본적으로 서연문답을 중심에 놓고, 그것을 전후한 역사적·학문적 배경에 대해서도 꼼꼼히 기록하고 있다. 이는 최근 몇 년 간 개혁군주인 정조와 실학자들이 활약한 정조시대를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부를 정도로 이른바 이 불었음에도, ‘실학의 거목이라 할 수 있는 홍대용과 어린 정조의 만남에 대해서는 주목도가 떨어진 측면에 대해 보완하고 있다.

 

셋째로, 이 책은 꽤 흥미진진한 구성과 문체를 가지고 있다. 저자가 밝히고 있듯이 사실 서연문답은 문답이 이루어지는 학문적 배경에 대한 설명 없이는 이해하기가 무척 어렵다. 오늘날의 독자들이 성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전제로 대화를 나누는 홍대용과 정조 두 사람의 생각을 따라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 책은 바로 그런 단점을 대화의 맥을 끊지 않으면서도 적절하게 그 대화가 이루어지는 배경에 대해 깔끔한 문체로 잘 설명하고 있다. ‘프롤로그’, ‘에필로그등을 포함하여 소설과 유사한 구성을 갖춘 것 역시 대중 역사 저술로서 매력이 된다.

 

넷째는 이 책이 역사 저술로서도 충실함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서연문답만으로는 자칫 이해가 어려울 수 있는 당대의 시대상황을 실록, 일성록등의 보충사료들을 적극 활용하여 장면마다 상세한 주석은 물론, 마지막에 보론을 통해서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위와 같은 장점들을 생각할 때, 이 책은 재미있으면서도 깊이를 갖춘 인문 대중저술에 목말라 있던 독자들이나, 평소에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독자들 모두가 한번쯤 일독할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

j******n 2012.04.05. 신고 공감 1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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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와 홍대용, 두 거성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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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와 홍대용, 생각을 겨루다’는 ‘홍대용 사상의 연구’로 박사가 된 김도환이 영조 50년 이후 9개월간(1774 - 1775)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종 8품직인 시직(侍直)을 맡았던 홍대용(洪大容; 1731 - 1783)의 서연(書筵) 대화집인 ‘계방일기(桂坊日記)’에 근거를 두고 관련 사료들을 참고해 지은 책이다.   서연은 조선시대의 왕세자 교육 시스템이고 계방(桂坊)은 세자를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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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와 홍대용, 생각을 겨루다’는 ‘홍대용 사상의 연구’로 박사가 된 김도환이 영조 50년 이후 9개월간(1774 - 1775)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종 8품직인 시직(侍直)을 맡았던 홍대용(洪大容; 1731 - 1783)의 서연(書筵) 대화집인 ‘계방일기(桂坊日記)’에 근거를 두고 관련 사료들을 참고해 지은 책이다.

 

서연은 조선시대의 왕세자 교육 시스템이고 계방(桂坊)은 세자를 호위하던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를 달리 이르는 말이다. 홍대용은 세자익위사가 호위직에서 서연에 드나드는 직으로 바뀜에 따라 (후에 정조가 되는) 세손인 이산(李?)과 만나게 되었다.

 

정조와 홍대용이 서연을 통해 만난 1774년은 정조의 즉위 2년전으로 이때 정조는 23세였고 홍대용은 44세였다.(홍대용은 세손에게는 아버지 사도세자보다 나이 많은 스승이었다. 홍대용; 1731년 생, 사도세자; 1735년생) 홍대용은 봄이 머무는 언덕이란 의미의 유춘오(留春塢)라는 별장의 주인공이었다.

 

이 별장에는 건곤일초정(乾坤一草亭)이란 현판이 달렸다. 사실 홍대용은 수학자였고 지구 자전설을 신봉한 과학자였으며 거문고 연주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예인이었다. 노론 명문가 출신의 홍대용은 실학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과거 공부에 큰 뜻을 두지 않았던 북학파의 인사였다.

 

홍대용이 관직에 오른 것은 시직이 음직(蔭職; 과거를 거치지 않고 조상 덕으로 오르는 관직)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홍대용 혼자 서연에 참여한 것은 아니다. 서열에 따라 홍대용은 한정유, 신재선 다음에 자리했다. 서연 시간은 둘로 나뉘었다. 경전 순서대로 읽는 법강(法講)과 간략하게 읽는 소대(召對)였다. “홍대용은 한 글자 한 글자 따지며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글을 보면 큰 줄기를 보고 그것의 실천을 중시했다.“(35 페이지) 홍대용은 세손이 오히려 질문을 하자 난감해 한다. 홍대용은 배우는 자의 병통 중 지나치게 자신하는 것보다 심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세손은 비록 그렇다 해도 초학(初學)도 명백하게 자신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옳지 않다고 말한들 무슨 해가 있겠는가?라 말한다.

 

서연은 중국의 고전들을 가지고 논하는 자리이기에 어쩔 수 없이 중국의 정치 사례들이 논의되었다. 물론 각자 처한 입장이 어느 정도는 반영되기 마련이었다. 홍대용은 세손에게 적대적인 외증조부 홍인한(세손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친정 작은 아버지)이 우의정이 되자 긴장한다.

 

정조와 홍대용은 맹자의 불설지교회(不屑之敎誨; 상대방이 잘못이 있을 경우 그를 거절하고 만나주지 아니하여 그로 하여금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 부분에 공감한다.(屑; 달갑게 여기다.) 홍대용은 한 글자 한 글자 따지며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했지만 그에 걸맞게 홍대용은 진심으로 세손의 학문을 걱정했다.

 

세손이 ‘중용’이 말한 한 글 자 한 글자의 뜻에 너무 집착하거나 지나치게 분류하는 폐단에 빠질까 봐 걱정했다.(65 페이지) 홍대용은 자신의 견해를 밝히되 다른 이와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때는 그냥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다른 이가 스스로 부끄러워서 견해를 고친다면 그것이 곧 불설지교가 되는 것이고 견해를 고집한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각자 제 소견을 지키는 것이 되었다.(66 페이지)

 

홍대용은 확실히 박식한 사람이지만 정치가보다 학자의 풍모가 더 강한 사람이었다.(83 페이지) 홍대용도 주자 성리학자였다. 그는 격물치지가 없다는 이유에서 양명학을 인정하지 않았다. 홍대용은 격물치지 이후에 성의, 정심을 말했고 곧 등극할 처지의 세손은 격물, 치지, 성의, 정심이 완성되지 않았다고 치국, 평천하를 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 배우면서 한편으로 다스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세손은 주자(朱子)주의자 송시열 이야기를 꺼냈다. 이호(李淏)가 죽은 뒤 남송의 효종과 같은 묘호를 갖게 한 사람이고, 주자의 탄생지 우계(尤溪)를 모방해 우암(尤庵)이라는 호를 가진 사람이 송시열이다. 세손은 궁궐(창경궁)에서 태어나고 궁궐에서 자라 바깥 세상 이야기가 재미 있었던 것 같다.

 

송시열은 주자 계승의 명분을 장악한 한편 임진전쟁 당시 우리를 도운 명나라 황제인 신종(神宗)과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을 제사지내는 사당인 만동묘(萬東廟)를 세우게 해 명나라에 대한 의리, 북벌과 복수설치라는 명분도 수중에 넣었다. 이에 숙종도 대보단을 설치했다.

 

세손은 십년 동안 행해보고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문을 닫고 약속도 끊어버림이 가할 것이라는 송시열의 말을 빈말이라 했고 홍대용은 빈말이 아니라 답했다.(106, 107 페이지) 저자는 세손의 ‘빈말’ 운운을 외척 세력 제거의 명분을 얻기 위한 포석으로 보았다. 그리고 홍대용이 그것은 빈말이 아니라 말했지만 따지고 보면 그런 면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고 말한다.(118 페이지)

 

‘정조와 홍대용, 생각을 겨루다’는 정조 시대를 다룬 책이기에 정조와 사도세자, 영조, 홍국영과 혜경궁 홍씨, 홍봉한, 홍인한 등 풍산 홍씨 가문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온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閑中錄)’이 전하는 세간에 떠돌던 이야기가 하나 있다. 영조가 세손에게 어떤 책을 읽냐고 물었다. 세손이 ‘통감강목’ 4권이라고 답하자 영조가 안색이 변해 보던 책을 당장 가져오라고 호통을 쳤다. 세손이 읽고 있다고 답한 ‘통감강목’ 4권에는 측실(側室) 소생인 전한(前漢)의 문제(文帝) 이야기가 나온다. 영조가 안색이 변해 호통을 친 것은 자신이 무수리 출신의 어머니(숙빈 최씨)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왕의 명령을 받아 세손의 처소로 간 사람이 해당 책을 내놓으라고 하자 영민한 홍국영이 어떻게 알았는지 문제의 부분을 종이로 가리고 건넸다. 이에 영조는 과연 내 손자라고 하며 기뻐했다는 것이다. 세손은 홍국영에게 감사해 그대가 군사를 일으켜 대궐을 침범하지 않는 이상 무슨 죄를 지어도 용서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저자는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세손이 소대(召對)에서 통감강목을 다 읽은 것은 계사년(1773년) 8월 27일이고 홍국영이 춘방(春坊; 세자시강원)에 들어간 것은 그해 12월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종이로 가리고 있었다면 무슨 내용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이니 그것을 보고 임금이 기뻐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손이 홍국영에게 범궐(犯闕)의 죄가 아닌 이상 용서하겠다고 한 것도 의아하다는 것이다. 나는 홍국영이 아무리 영민해도 어떤 연유로 책을 가져오라고 했는지 알아차리고 문제가 되는 부분을 처리했다는 것은 너무 작위적이라 생각한다. 홍대용은 논어 한 구절을 상고할 일이 있는데 어느 부분인지 기억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정조에게 책을 읽으면서 먼저 자기 견해부터 세우려는 마음을 갖는 것은 생각이 이미 바깥으로 질주하는 것이라 하며 책을 저술하는 것은 본래 처음 배우는 자의 일이 아니라 말한다.

 

나는 상고할 구절이 있다는 말에 저술 운운하며 책을 저술하는 것은 본래 처음 배우는 자의 일이 아니라고 말한 홍대용의 처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는 신경전이라고 할 수도 있다. 즉 유비와 제갈량의 관계에서 세손은 황제인 유비의 입장을, 홍국영은 신하인 제갈량의 입장을 옹호한 것이다.

 

그런데 유비가 제갈량에게 ”만약 내 아들이 도와줄 만하면 도와주되 재주가 아닌 것 같으면 그대가 황제가 되어도 좋다.“고 말한 것을 보면 사정은 남다르다. 저자의 말대로 ”유비 같은 덕이 없으면 할 수 없는 말이고 제갈량 같은 충신이 아니면 들을 수도 없고 효과도 없는 말“(131 페이지)이 아닐 수 없다.

 

세손이 상고하려 한 책은 ‘논어’ 자한편이다. 세손이 손여(巽與)가 무슨 의미냐고 묻자 홍대용은 부드럽고 순하다는 의미로 군신(君臣)간의 대화를 예로 들어 말하자면 납약자유(納約自?)가 손여와 같은 것이라 답한다. 신하가 ‘임금에게 알기 쉬운 것(임금이 밝게 알고 있는 것)’부터 설명하여 차츰 깨닫도록 하는 것이 손여라고 답한 것이다.

 

세손이 그러면 손우여지(遜于汝志)의 손(遜)과 뜻이 다른가? 묻자 홍대용은 글자는 다르나 뜻은 같은 것이라 말한다. 납약자유는 29번째 괘인 중수감(重水坎)괘에 나오는 구절이다. 앞서 세손이 책을 상고할 일이 있다고 했거니와 그것은 강연(講筵)에서 오고 간 좋은 이야기를 초기(抄記; 초록; 抄錄; 가려 뽑아 씀)하기 위한 것이었다.

 

저자는 세손이 척리(戚里)를 배제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보였다고 하며 청풍 김씨 김석주(金錫胄; 1634 - 1684)를 거론했다. ”숙종 때의 여러 환국(換局)에서 서인과 남인이 번갈아 정권을 잡았지만 남인을 끌어들여 서인을 칠 때에도, 서인을 끌어들여 남인을 칠 때에도 막후에서 움직인 것은 숙종의 외가인 청풍 김씨 김석주였다.

 

그는 이미 80세가 넘어 그냥 두어도 얼마 못 살 송시열에게 굳이 사약을 내리게 하여 그 자신이 서인이면서도 남인 정권을 세우게 하였고, 별로 가능할 것 같지도 않은 역모를 꾸며 남인을 일망타진하고 다시 서인 정권을 세우는 데도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갔다. 이로부터 서인과 남인은 서로 살부지수(殺父之讐)가 되어 화해할 수 없는 지경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또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서는 데에도 그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157 페이지)

 

저자는 홍계희가 경기도 관찰사로 있었을 때 일어난 일을 논한다. 나경언이 내시가 불궤(不軌)한 일을 도모한다는 말을 해 임금의 친국을 받았을 때의 일은 석연치 않기가 그지 없다. 나경언이 내시 이야기가 아닌 사도세자의 비행을 고발하는 내용을 폭로했기 때문이다. 몸수색 한번 하지 않은 잘못이 지적된 것이다.(162 페이지) 조용히 처리할 수 있는 일을 공공연하게 처리해 자존심 강한 임금이 적당히 넘어가지 않게 한 것이다.

 

세손은 한고조 유방(劉邦)을 중국 역대 임금 중 최고로 여겼다. 학문과 사대부의 풍모만 더한다면 이상적 군주인 요순에 필적하리라 생각했다. 한고조는 단점도 많았지만 너그러웠고 신하들에게 권한을 위임할 줄 알았다.(174 페이지) 한고조가 보인 이런 면모는 자신이 능력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세손은 머리가 좋고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어서 모든 일에 간섭하려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사실 세손은 자신을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 칭했다. 수많은 백성을 골고루 비춰주는 밝은 달을 자처한 것이다. 또한 군사(君師)를 지향했다.

 

홍대용이 이와 기가 있다면 함께 있는 것이요, 본디 선후를 구분할 수 없다고 말하자 세손은 그 말이 매우 좋다고, 그렇게 보아야 폐단이 없다고 말한다. 이에 홍대용은 그것은 자신의 독창적 생각이 아니라 주자의 것이라 답한다.(181, 182 페이지) 군사(君師)란 다스리는 자이면서 스승이라는 의미로 당위적 차원의 말이다.

 

세종과 정조 정도가 그에 맞는 역할을 했다. 다른 임금들은 능력면에서 모자라기도 했지만 중기 이후 양반 사대부 계층이 성리학 연구를 주도한 때문이기도 하다. 홍대용은 절문근사(切問近思)를 강조했다. 간절한 마음으로 묻고 가까운 곳부터 깊이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손은 홍대용이 청나라 사정에 훤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던지 개인적인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세손의 질문(북경에 가보았는가? 무슨 일로 갔는가?)에 홍대용은 승지를 지낸 숙부 홍억이 십 년 전인 을유년(영조 41년; 1765년)에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이 되었기에 자제비장으로 동행했다고 답했다. 홍대용은 유리창(琉璃廠) 이야기도 한다.

 

원, 명 시대에 자금성을 지을 때 소용된 유리기와 공장이었다가 자금성이 다 지어진 후 우리나라의 인사동과 같은 골동품과 책방 거리로 변신한 곳이다. 세손은 북경에 대해 일일이 물을 수 없어 일기를 썼는가, 물었고 홍대용은 기록하지 못했다고 거짓을 아뢰었다. 사실 홍대용이 쓴 연행록은 3대 연행록의 하나였다. 홍대용은 역외춘추론(域外春秋論)을 표방했다.

 

세계에 안과 밖이 없으니 내가 서 있는 땅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사상이다.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등이 홍대용을 지지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홍대용을 지탄했다. 양반도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홍대용은 그래서 연행 일기를 드러내놓을 수 없었다.

 

세손의 질문이 두서 없어 홍대용은 토막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 안에서나마 개혁적인 마인드를 드러냈다. 세손은 자신은 잘못이 있을 때마다 후회하지 않은 적이 없는데 다만 이 후회하고 자책하는 생각이 부단히 일어나 고민스럽다고 말했다.(216 페이지)

 

홍대용은 허물을 이미 고친 다음에는 자연 마음이 후련해지는 법인데 어찌하여 가슴 속에 남겨두고 뉘우칠 것이 있습니까?란 말을 한다. 세손은 도무지 무엇 하나 대충 알고 마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다. 모르는 것이야 모르겠지만 아는 것은 누구나 납득시킬 수 있을 만큼 훤히 알고 있었다. 그러니 세손의 물음이 홍대용에게 집중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222 페이지)

 

세손은 청나라에 빗대어 인사 문제며 궁방전 문제를 이야기했으나 실은 외척 세력을 줄일 계획을 털어놓은 것이나 다름 없었다.(225 페이지) 세손은 식체(食滯) 때문에 다주(茶珠)를 먹으며 서연을 행했다. 결국 그 때문에 차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다.

 

세손은 북경에서는 어떤 차를 최고로 여기는가 물었다. 그러자 홍대용은 보이차를 최고로 친다고 답했다.(226 페이지) 세손은 자기는 원래 체증(滯症)이 없었는데 어릴 때 체증 있는 사람을 보고 마음속으로 몰래 부럽게 여겨 트림하면서 따라 했더니 최근에 실지로 체증이 생겨 아주 고생스럽다고 말했다. 이에 홍대용은 체증은 책 읽는 사람들이 많이 겪는 증세이며 독서에 가장 방해가 되니 몸을 잘 살피셔야 합니다라고 아뢰었다.(226, 227 페이지)

 

홍대용이 격물치지, 실심, 실학 등의 말을 아뢰었으나 세손은 그보다는 그의 학문적 배경이나 박학다식함에만 주목했다.(229, 230 페이지) 세손은 이단의 학문이라도 반드시 그 까닭을 밝힌 연후에 배척하여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홍대용은 세손의 논리는 옳은 듯 하지만 그것이 더욱 강한 압력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홍대용은 생각이 다르면 그저 내버려둘 뿐이었다.(234 페이지) 세손이 홍대용에게 과거를 그만 두었냐 물으니 홍대용은 그만 둔 지 4, 5년 되었다며 재주와 지식이 부족하고 더욱이 정문(程文; 과거 시험에 쓰이는 문장 형식)은 익히지도 못하였으니 기꺼이 스스로 그만둔 것이지 달리 고상한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라 답한다.(239 페이지)

 

세손은 "세손은 노론, 소론, 남인, 병판, 이판 등에 대해 알 필요가 없다."고 말한 홍인한을 제거할 생각을 한다. 홍인한은 삭탈관직된다. 사도세자가 죽자 임금은 세손을 효장세자에게 입적시켰다. 세손의 대리청정이 있은 지 3개월만에 임금이 승하했다.

 

세손은 경희궁 숭정문에서 즉위했다. 여동생을 임금(정조)의 후궁으로 들여보낸 뒤 원빈(元嬪)이라 하게 한 홍국영은 원빈이 죽자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 이인의 아들 상계군 이준의 이름을 이담으로, 작호를 완풍군(完?君)으로 고치게 하고는 죽은 원빈의 아들로 삼으려 했다. 완이라는 글자는 완산(完山)이니 임금의 고향인 전주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임금에게 자식이 없자 완풍군으로 하여금 임금의 뒤를 잇게 하려는 의도였다. 임금이 28세 밖에 되지 않았으니 자식을 낳을 가능성이 있음에도 그렇게 했으니 역적질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은 행위였다.(268 페이지) 홍국영이 관직에서 쫓겨나자 임금의 마음을 정확히 알 수 없었던 관료들은 홍국영을 구원하기 위한 상소를 올렸다.

 

홍국영이 후에 복귀할 수 있는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홍국영이 복귀할 경우 상소를 올리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269 페이지) 홍대용은 아까운 나이인 53세에 중풍으로 쓰러졌다.(273 페이지) 정조의 급선무는 행검(行檢; 점잖고 바른 몸가짐)을 닦는 일이었다. 붕당간의 다툼은 붕당간의 의리가 다른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 다툼을 없애려면 보편타당한 의리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280 페이지)

 

홍대용의 진가는 공평하게 보고 아울러 받아들임(‘공관병수; 公觀倂受’)와 큰 도로 함께 돌아감(‘동귀대도; 同歸大道’)에 있었다. 홍대용은 전인적 인격 수양은 아랑곳하지 않고 지나치게 수준 높은 논쟁에 몰입하거나 과거 시험 공부에 매달리는 시대상과 다른 독특한 모습을 보였다. 조선 후기를 통틀어 유학 본연의 전인적 학문, 실천적 학문에 가장 근접했던 인물은 단연 홍대용이었다.(289 페이지)

이달의 사락 m******1 2021.01.20.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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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었으면 배워야 하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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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책에서 이 책을 소개한 내용이 있어 구입을 했고, 다 읽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좀 걸렸다. 그리고 아무래도 좀 어려워서 일반 교양서로 읽기에는 부담스러운 느낌이다. 우연히 서평을 살펴보니 대통령 코스프레 중이신 여자사람께서도 작년엔가 이 책을 구입하셨다고 한다. 그런 줄 알았으면 사지 않았을 것을...서연문답. 제목 그대로 정조와 홍대용이 자신의 정치, 경제 등 여러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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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책에서 이 책을 소개한 내용이 있어 구입을 했고, 다 읽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좀 걸렸다. 그리고 아무래도 좀 어려워서 일반 교양서로 읽기에는 부담스러운 느낌이다. 우연히 서평을 살펴보니 대통령 코스프레 중이신 여자사람께서도 작년엔가 이 책을 구입하셨다고 한다. 그런 줄 알았으면 사지 않았을 것을...

서연문답. 제목 그대로 정조와 홍대용이 자신의 정치, 경제 등 여러 사상에 대해 토론하고 이야기한 바를 다듬어 정리했고, 지은이가 이를 해설한 책이다. 제목이 주는 느낌에 비해 본문의 내용이 어려워 읽는데 시간이 좀 걸렸지만, 읽고 나니 홍대용이라는 사람이 역사 교과서 등에서 다뤄지는 비중에 비해 대단히 능력이 있었던 사람이고, 또 그의 생각이 넓고 깊었으리라 짐작이 된다. 그리고 홍대용과 함께 생각을 책 제목 그대로 '겨루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생각을 나누면서, 자신의 생각의 폭을 넓혀가는 정조의 학문을 대하는 태도도 인상적이다. 

그리고...아무래도 대통령 코스프레 중이신 여자사람께서는 이 책을 사기만 하고 읽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자신의 생각과 체면만을 강요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긴 그분의 부족한 독서에 대해서는 이미 같은 무리의 이들조차 여러번 탄식에 탄식을 거듭하였으니, 이 책을 구입한 것은 어차피 다른 자리도 아니고 대통령 코스프레 중이시니 자기 돈 드는 것도 아니고 아마도 판공비 정도로 잡혀 있는 예산이 생각나서일지도 모르겠다. 


g******i 2014.09.18.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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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은 신하의 스승이 되기 위한 정조의 사고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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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영조치세의 왕세자였던 정조와 그의 서연을 담당하는 홍대용이, 약 300일 동안 정조의 서연에 참석해 나눈 문답을 기록한 「계방일기」의 첫 완역이라 한다. 지은이는 홍대용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전문가다. 경연은 왕의 공부, 서연은 왕세자의 공부다. 당대 최고의 지성들이 군신간의 예를 지키면서 문답을 통해 차기 왕으로서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정조와 홍대용은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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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영조치세의 왕세자였던 정조와 그의 서연을 담당하는 홍대용이, 약 300일 동안 정조의 서연에 참석해 나눈 문답을 기록한 「계방일기」의 첫 완역이라 한다. 지은이는 홍대용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전문가다. 경연은 왕의 공부, 서연은 왕세자의 공부다.

당대 최고의 지성들이 군신간의 예를 지키면서 문답을 통해 차기 왕으로서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정조와 홍대용은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서연문답을 보자, 영, 정조의 정책으로 알려진 탕평책, 이는 무엇을 위한 탕평인가?, 가르침을 거절하는 것도 가르침의 방법이다(불설지교), 척리를 척리로 제압(이이제이), 군사의 길이 아무래도 가장 핵심이지 않을까 싶다. 정조가 즉위 후, 신하들을 가르쳤다는 이야기가 드라마 속에서도 책에서도 자주 등장하는데, 임금이자 스승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사고를 해야하며, 행동을 해야하는가?, 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그 밖에 우암,송시열, 홍국영, 분서, 초여름밤의 꿈- 세손과 홍대용, 길을 달리하다라는 내용도 눈여겨 볼만하다.

보론으로 홍대용에 대한 소개가실려있다.


정통 유학자이자, 실용주의자 였던 홍대용과, 이후 조선의 르네상스기를 이룬 정조의 대담을 통해 그들의 서로 대비되고 때로는 합치하는 학문관과 정치관을 살펴볼 수 있다. 정조와 홍대용간의 탐색(스승으로서 학자로서 자질이 있는지를), 홍대용은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기 보다는 정론과 선비로서의 모습으로 대한다. 이 책에는 송시열, 홍국영,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외척들, 영조, 박지원 등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여 그 전후 시기의 역사도 다루고 있다. 철저히 사료에 근거해 고전과 역사, 인물을 재해석한 역사 인문서이다. 라는 취지의 출판사 책소개도 눈여겨 보자.

아무튼 이런 과정을 통해서 현안의 정치와 정책을 두고 군신간의 대화를 다룬 책이어서 흔치 않는 주제라 생각된다.

YES마니아 : 플래티넘 m****h 2021.06.29.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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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와 스승, 명군과 석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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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용이란 이름을 잘 모르는 분도 있을 지 모릅니다. 지전설을 주창한 분이죠. 서양 유럽에서도 지동설을 주장하면 호된 비판의 대상이 되거나, 목숨을 잃는 경우마저 생겼습니다. 하물며 완고한 주자의 세계관이 지배하던 조선에서, 아무리 영명한 군주이던 영조가 다스리던 시절이라고는 하나, 파격에 파격을 거듭한 우주관인 지전설을 주장하는 배포는 여간 인물이 아니고서는 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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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용이란 이름을 잘 모르는 분도 있을 지 모릅니다. 지전설을 주창한 분이죠. 서양 유럽에서도 지동설을 주장하면 호된 비판의 대상이 되거나, 목숨을 잃는 경우마저 생겼습니다. 하물며 완고한 주자의 세계관이 지배하던 조선에서, 아무리 영명한 군주이던 영조가 다스리던 시절이라고는 하나, 파격에 파격을 거듭한 우주관인 지전설을 주장하는 배포는 여간 인물이 아니고서는 쉽게 갖기 힘든 착상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홍대용은 동양인 중에서는 거의 최초로, 체계적인 논리에 내용을 실어서 지동설을 주장한 분입니다. 홍대용은 또한 연암 박지원의 절친한 벗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홍대용이 당대의 기준으로 아주 온건한 인사로는 보이지 않았을 텐데요. 영조는 과연 명군의 자질을 갖춘 대군주이어서인지, 세손 정조의 서연 자리에 이런 파격의 지성을 앉히기도 하여, 세자에게 앞선 안목과 넓고 밝은 지혜를 깨우치기도 했습니다. 영조의 업적이야 헬 수 없이 많지만, 이런 훌륭한 선생님을 일찌감치 불여 주어 후세의 명군을 미리부터 싹틔운 일 역시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쌓으신 치적으로 생각되는군요.


서연이라고 하면 공맹의 기초 사상과 고전의 강독이 주로 이루어졌겠거니 하는 예상을 했더랬습니다. 그런데 아니더군요. 홍담원은 무려 "탕평이란 무엇인가?", "붕당이란 무엇인가?' 같은, "시사성 강하고 민감한" 질문을, 어린 세손에게 던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탕평은 이 무렵 이미 영조(정조의 조부)에 의해, 야심찬 정책으로 이미 실시되고 있었죠. 그러나 그 실효성과 진정성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제기되고 있었고, 아무리 탕평의 시책을 편다 해도, 인사에서 그 호응이 제대로 나타나기가 어려웠습니다. 붕당의 뿌리가 워낙 깊었던 데다, 이인좌의 난으로 정통성 논란에 크게 휩싸인 영조로서는 사실 어떤 정책을 펴도 전폭적인 지지를 얻기는 어려웠으니까요.


이런 할아버지, 금상 전하의 아픈 곳을, 아직 나이 어린 세손에게 과감하게 질문하고, 그 참된 뜻을 깨닫게 한 담원의 크고 높은 뜻은, 우리로서 쉽게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요즘 아이들을 가르칠 때도, 정치적인 이야기는 삼가라고들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담원은 평범한 신분도 아닌 세손을 두고 이처럼 대담한 주제로 교습을 했던 것입니다. 중국 청조에서도, 이른바 진붕과 위붕을 가른 구양수의 논변을 두고, 강희제는 "그 자체가 위선이다."라며 통박을 한 적이 있습니다. 담원의 뜻은 비단 기술적, 자연 과학적 사항 뿐 아니라, 이런 정치윤리학에 이르기까지 거침 없는 정론을 전개했던 것입니다. 다름 아닌 차기 절대 권력자를 상대로요.

v*****7 2013.07.07.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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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군주 정조와 실학자 홍대용의 역사적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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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홍대용을 흠모하는 사람들은, 그가 일찌감치 스스로 과거를 그만두어 명예와 이익에 뜻을 끊고 한가로이 앉아 향을 사르고 거문고와 비파를 타며 세속 밖에서 놀고자 하였던 것만 알 뿐이다. 사람들은, 그가 세상 많은 사물의 이치를 종합하고 정리하여 나라 살림을 맡거나 먼 곳에 사신으로 갈 만한 사람이었고, 나라를 지킬 기이한 책략을 가진 사람이었음을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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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홍대용을 흠모하는 사람들은, 그가 일찌감치 스스로 과거를 그만두어 명예와 이익에 뜻을 끊고 한가로이 앉아 향을 사르고 거문고와 비파를 타며 세속 밖에서 놀고자 하였던 것만 알 뿐이다. 사람들은, 그가 세상 많은 사물의 이치를 종합하고 정리하여 나라 살림을 맡거나 먼 곳에 사신으로 갈 만한 사람이었고, 나라를 지킬 기이한 책략을 가진 사람이었음을 알지 못한다.”


연암 박지원이 쓴 담헌 홍대용(1731-1783)의 묘지명이다. 《담헌서》부록 <홍덕보 묘지명>에 실려 있다. 홍대용은 노론 낙론계열의 명문가 출신으로. 인조반정 때 정사공신에 오른 홍진도가 바로 그의 6대조다. 노론 산림의 중심지 석실서원에서 5촌 고모부가 되는 미호 김원행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홍대용은 무엇보다도 조선 후기 실학의 대명사인데 천문학, 수학, 음악과 같은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세자의 서연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춘방'이라 불리는 세자시강원과 '계방'이라 불리는 세자익위사가 있다.《계방일기桂坊日記》는 마흔 다섯살의 나이에 계방 정8품 시직에 임명된 홍대용이 경희궁 존현각에서 세손 시절의 정조와 나눈 문답을 기록한 책이다. 1774년(영조 50) 12월 1일부터 177년(영조 51) 8월 26일까지 9개월간 총 17차례에 걸친 정조의 서연에서 오고간 문답을 기록하고 있다. 춘방의 신료로는 한정유, 서유신, 신재선, 유의양, 홍국영 등이 등장한다. 홍대용의 다른 저작인《의산문답》과《건정동필담》과 더불어 홍대용의 사상과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텍스트다. 


《계방일기》를 통해 유학을 공부하는 기본 방법 외에도《중용》, 퇴계 이황의《주서절요》, 율곡 이이의《성학집요》, 《시경》에 대한 부분적인 해석과 함께, 명도 정호, 이천 정이, 왕안석, 사마광, 한고조 유방, 유안 등 역사적 인물에 대한 정조와 홍대용의 품평도 엿볼 수 있다. 또한 성리의 고담준론보다 격물치지와 이용후생에 전념한 홍대용의 실학사상의 윤곽을 그려낼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간절히 묻고 가까이 생각하여 일에 따라서 몸소 실천한다면 성리性理라는 것도 별다른 것이 아니라 곧 일용에 흩어져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 지식과 실천이 아울러 진보되면 한 근원이며 큰 근본인 성性과 천도天道를 활연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처음 배우는 사람이 자리에 앉아 성명性命이나 이야기하는 것은 유익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해로운 것입니다."(182-3쪽)


다들 잘 알다시피 청나라 문물을 배우는 '북학'의 길을 널리 홍보한 것이 홍대용의 북경 여행이었다. 홍대용은 1765년(영조 41) 신년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한 동지사겸사은사 일행을 따라 북경을 여행한 뒤 한문본 《담헌연기》와 한글본 《을병연행록》을 남겼다. 홍대용의 《담헌연기》는 김창업의《가재연행록》과 박지원의《열하일기》와 더불어 조선 후기 3대 연행기에 꼽힌다. 홍대용은 북경 유리창에서 절강성 출신으로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머물고 있던 엄성, 반정균, 육비 등 젊은 석학들과 만나게 되는데 이들과의 필담이 《건정동필담》으로 남아 있다. 중국인 엄성은 《일하제금합집》이란 책을 남겼는데 여기에 홍대용 일행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z***a 2012.09.17.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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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때문에 읽고 있었던 페르낭 브로델의《물질문명과 자본주의》와다가온 시험기간으로 마음이 피폐해질 무렵에 이 책을 읽었다.공부하다가 종종 읽은 것이기에 편하게 읽을 수 있었지만 역시 조금은 어려운 내용에각주도 - 적당한 수였지만 - 상당히 읽기가 귀찮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운 내용덕분인지 하루만에 일독할 수 있었다.두 가지 점에서 이 책이 와닿았는데, 먼저 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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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때문에 읽고 있었던 페르낭 브로델의《물질문명과 자본주의》와

다가온 시험기간으로 마음이 피폐해질 무렵에 이 책을 읽었다.


공부하다가 종종 읽은 것이기에 편하게 읽을 수 있었지만 역시 조금은 어려운 내용에

각주도 - 적당한 수였지만 - 상당히 읽기가 귀찮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운 내용덕분인지 하루만에 일독할 수 있었다.


두 가지 점에서 이 책이 와닿았는데, 먼저 홍대용이라는 인물 자체가 워낙 흥미롭다는 점이다.

더불어서 그러한 인물이 정조와 '생각을 겨루었다'라는 사실 역시 흥미로웠고

끊임없이 책을 읽을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한 것 같다.

흥미로운 내용과 함께 가독성 높은 글, 적절하게 나타나는 인용, 친절한 각주 등이 매력적인 것 같다.


한편 개인적인 차원에서 내 자신을 반성하게 해주었다는 점이다.

불설지교의 장에서 "곧이곧대로 말하여 따르게 하는 것이 원칙이고 부드럽게 말하는 것은 어쩔 수 없어서 하는 일이다" 라는 말은, 아닌 것에는 아닌 것이라고 말하는 나의 '모난' 성격을 되돌아보게금 한 것이다.

지금까지 "어쩔 수 없이"하는 것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 보았는데,

오히려 부드럽게 하지 않으면 곧이곧대로 말한 것의 의미가 퇴색되어 버린다는 점이다.

또 장난이지만 "상왕은 왕이 아니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후배들의 일에 간섭하던 나의 불찰이 떠올랐는데, 이 역시 책을 통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다.



처음에 이 책을 받아보았을 때, 흔하고 흔한 정조붐의 끝자락에 편승하려고 하는 책인지 의심스러웠지만, 그 내용을 보니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한 대화에서부터 조금은 어렵지만 생각해볼만한 형이상학적인 혹은 실천적인 문제들, 특히 필자 나름의 분석이 돋보였다.


다만, 초판이라 그런지 오탈자가 많고, 또 제목에 있어서 "겨루다"라는 점이 아쉽다. 단어 뜻 하나하나를 따지고 가는 것은 웃기는 일이지만, 정조와 홍대용은 생각을 나누었지 겨루지 않았다.

g******3 2012.04.15.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