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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성경이 말하는 시대와 방식 안으로 들어가자고 제안하고 있다. 유대인을 신성시한다거나 표준으로 삼자고 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을 더 깊이 알고 살아내기 위해서 성경의 시대에서 사용된 언어와 문화, 삶의 맥락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의 우리는 2천년 전의 이스라엘로 돌아가지 못하나, 성경을 깊이 알고자 한다면, 그 시대를 알기 위한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는 원 청중의 관점을 파악해 더 많은 통찰과 영감을 구비하고 성경을 읽을 수 있다. … 유대인이 삶에 접근하는 방식을 이해하고자 시간 여행을 떠날 것이고, 그리하여 대체로 가려져 왔던 지혜를 재발견하며, 하나님 말씀을 깊이 있게 읽어 오늘날 우리 삶을 위한 통찰을 건져 올릴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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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한 발상으로 성경을 바라보는 저자의 관점은 나에게 매력적이었다. 우연히 읽었던 <랍비 예수, 제자도를 말하다>에서 나름 상큼한 충격을 입고 이 책을 펼쳐 들었다. 이 책을 통하여 저자는 히브리 사상과 서구 문화 사이의 차이점을 구분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런가? 처음 접했던 저자의 ‘랍비 예수 시리즈’ 중 하나인 <랍비 예수, 제자도를 말하다> 보다는 나에게 주는 임펙트가 부족했다. 나는 아직 서구화가 될 된 것인가? 하긴 서구화가 되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나는 엄연히 동양 문화권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고 아직은 ‘나’보다 ‘우리’라는 말을 더 자주 사용하는 사람 중의 하나이니까. 이 책은 크게 3부로 나누어져 있다. 그리고 부록으로 우리에게 유익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철저히 서구 문화의 일원으로서 저술한 책에서 그 내용을 100% 다 공감을 할 순 없지만, 그중에 나에게 다가온 몇 가지 사항을 간추려본다.
첫째, 1부의 제목과 유사한 새로운 눈으로 성경을 읽기다. 히브리어의 맥락에서, 히브리어의 어원을 생각하면서 성경 읽기를 강조하고 있다(p.64). 예수님은 철저히 유대인이었으니 당연히 그들의 언어를 사용하였으리라. 그래서 헬라어의 유산을 이어온 서구인들에게는 성경의 내용이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히브리어는 비유적이고 헬라어는 분석적이니까. 그러나 내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는 헬라어의 유산을 이어받은 언어가 아니라 성경 언어와 논리적인 차이를 크게 느끼지 못하고 읽었다. 다만 성경이 쓰인 시대적 여건과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약간의 차이를 느끼긴 했지만, 그 정도는 지금까지 해온 성경공부로 메꿀 수 있었다. 둘째, 성경이 주시는 말씀은 오직 나에게만 주시는 말씀인가(p.118)? 개인주의가 발달 되어 있는 서구 문화권에서는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히브리어 원전에 나와 있는 말씀에서 선포대상은 ‘네’가 아닌 ‘여러분’이다. 공동체에 주시는 말씀인 것이다. 물론 경우에 따라선 개인에게 다가가는 말씀인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공동체에 하는 말씀의 경우 우리에겐 비교적 쉽게 들릴 것이다. 우리 말에는 ‘우리’라는 단어가 아주 익숙하니까. 영어만 하더라도 ‘my home’이라고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우리 집’이라고 하지 않는가? 셋째, 족보 이야기이다. 필리핀에서 선교를 준비하던 선교사들이 빨리 말씀을 전하고 싶은 열심(?)에서 ‘낳고 낳고’를 빼고 성서를 번역한 다음 말씀을 전하였다. 그 결과 대상 부족으로부터 “예수님은 진짜 사람인가요?”라는 질문을 들었다고 기록되어있다(p.175). 그 부족에겐 ‘낳고 낳고’가 빠진 예수님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설화와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의 많은 건국 설화에서도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건국 시조가 많이 등장하지 않는가? ‘낳고 낳고’는 가족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공동체의 중요한 시작일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동양권의 많은 문화에서는 가족 중심의 공동체가 무엇보다 중요하였다. 내가 알기로는 서구권의 문화에서도 가족 중심 가문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어 이름에서도 가문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하는데. 어쨌든 오늘날에는 지극히 개인 중심으로 사회가 돌아가고 있다. 그렇기에 서구에서는 성경을 이해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지나 보다.
글을 마치려니 ‘룻’에 대한 생각이 난다. 역시 모든 책은 읽고 나면 생각의 지평을 넓혀주는 역할을 한다. 이방인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와 이스라엘의 역사에 편입되었지만 역시 이방인으로서 대접을 받았고 특히 ‘모압’부족이었다는 이유로 더욱 배척받았으리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모압’하면 출애굽 할 때 그들을 괴롭혔던 족속들로 기억되었을 것이고, 멸망하는 소돔에서 탈출한 ‘롯’과 그의 딸들의 부적절한 관계가 먼저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룻’ 그녀를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받아들여 당당하게 예수님의 구속사에까지 이름을 올렸으니 역시 이 세상 모든 피조물(인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심을 입었기 때문)이 회개할 때까지 기다려주신다는 그분의 위대하심에 감사할 뿐이다.다만 회개의 때가 너무 늦지 않길 바랄 뿐이다. 또한, 생각해보니 예수님의 지상 명령인 말씀을 땅끝까지 전하려면, 언어통역만 가지고서 부족하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진정한 말씀전달은 문화통역까지 곁들여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가 성서를 번역하면서 문화통역까지 하다 보면 말씀전달의 오류가 있을 것 같으니 문화통역은 전적으로 선교사님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로 후원만 해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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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인 로이스 티어베르그가 2부에서 예수님의 소통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문자가 아닌 이미지로 읽을 필요가 있으며, 개인이 아닌 공동체적 성경 읽기를 추천하는데 이 대목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유는 서구적 개인주의 자체가 매우 분주하고 경쟁 체제의 현대인들에게 적합한 삶의 양식으로 정착한지 오래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개인주의에 대해 반대를 하는 모양새를 자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는 개인주의적 성경 읽기와 묵상에 빠져 있다. 특히 개인 묵상의 경우 성경을 왜곡할 위험성이 다분히 많이 띤다. 성경은 개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시는 말씀이다. 개인에게 보낸 신약의 많은 편지도 개인용도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돌려보는 회람서신이다. 즉 개인에게 준 편지가 아니란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경은 개인이 읽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저자 로이스 티어베르그는 이러한 개인 성경 읽기 방식을 개인주의의 사이렌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