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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을 걷는 건, 화성을 걷는 것이다 김남일 난다/2018.9.19. sanbaram
수원은 정조 이산의 한과 꿈이 서린 곳이다. 수원 화성 그늘에서 나고 자란 저자가 50여 년을 격하고 화성과 주변을 돌아보며 쓴 <수원을 걷는 건 화성을 걷는 것이다>는 역사적 사실과 추억을 되짚어보는 에세이 집이다. 작가다운 꼼꼼함으로 기억과 상반된 것은 여러 가지 자료를 찾아가며 화성과 그 주변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고 있다. “조선시대 문화의 꽃이자 우리 민족 문화유산의 자랑인 수원화성은 1997년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되었다.(p.23)” 화성에는 동서남북 네 개의 문을 비롯하며 모두 열한 개의 문이 있으며, 성곽의 길이는 거의 6킬로미터에 이른다고 한마디로 소개하는 저자 김남일은 1957년 수원에서 태어났다. 1983년 <우리 세대의 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장편소설 <청년일기>, <국경>, <천재토끼 차상문>, 소설집 <일과 밥과 자유>, <천하무적>, <세상의 어떤 아침>, <산을 내려가는 법>, 산문집 <책> 등이 있다. 전태일문학상, 아름다운 작가상 등등의 상을 받았다.
먼저 화성을 한 바퀴 돌기 위해 팔달산을 오르며 남치와, 난파노래비, 그리고 벚꽃길, 서남암문, 그리고 새로 만들어진 통로와 그 밖에 있는 화장실을 소개한다. 고향에 있는 화성이었지만 어렸을 때는 화성을 돌지 않았다. 화성의 이름도 수원성이라 불렀다. 화성 복원사업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그렇게 수원성으로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에는 팔달산을 팔딱산이라고 하며 뛰놀던 남창초등학교를 내려다 보면서 회상에 젖는다. “2남 3녀 그의 5남매가 쪼르르 다닌 초등학교는 팔달산 자락에 터를 잡은 만큼 수원에서 그래도 먹고 산다는 집 자식들이 다니는 학교였다. 어린 그는 오만했다. 직선거리로 5백 미터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았고, 역사도 몇 배나 긴 신풍학교만 해도 시내 한복판에서 벌써 한 발짝 떨어졌다고 여겼다.(p.32)” 그런 판이니 매산, 세류, 영화, 연무, 고색 같은 학교는 숫제 촌 학교 취급을 하려고 들었다. 말 그대로 낫 놓고 기역자도 못쓰던 엄마가 악착같이 영동시장 양키시장 ‘사모님’들을 쫓아다닌 것도 그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노래비 앞에서 그의 발길은 늘 주춤했다. 난파 홍영우가 우리 근대음악의 선구자로서 높이 기려지면 질수록 그의 친일 이역 또한 부각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p.32)” 한때 항일운동에도 가담했으며, 우리의 자연과 민족 성서를 누구보다도 잘 표현했던 작곡가가 1930년대 종반부터는 전혀 다른 길을 걷는다. 춘원이나 육당, 혹은 <시일야방성대곡>의 장지연이 이미 보여준 바 있는 치욕의 길이었다. 1937년 이광수와 함께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온 난파는 국민총력조선연맹의 문화위원으로 활동하며 본격적인 친일 행적을 시작한다고 우리 역사의 질곡을 들춰낸다.
<화성성역의궤>와 <원행을묘정리의궤>에는 장수가 서장대에서 지휘하는 성조식이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것을 통해 저자는 기록문화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또 감탄한다. “<화성성역의궤>는 화성에 대한 모든 것을 기록한 종합 건축 보고서였다. 전체 구성은 권수 1권, 본편 6권, 부편 3권 등 총 10권 8책으로 되어있다.(p.64)” 여기에는 축성과 관련해 오간 각종 공문서들은 물론, 공사를 언제 착수했고 언제 끝냈는지 하는 일정과 축성에 참여한 감독과 장인과 인부들의 인적 사항과 작업내용, 공사에 들어간 각종 비용과 인건비 지출 내역, 상량문이나 고유문 등 공사와 관련한 각종 의식에 사용한 의례문건, 그리고 건출물들과 그것들을 만드는 데 쓴 도구와 재료들의 그림까지 두루 기록되어 있다. 오늘 화성축성의 전모를 손금 보듯 상사히 되짚을 수 있게 된 것도 이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름 없는’백성의 이름을 일일이 불러주었다는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 우리는 정조의 애민정신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원행을묘정리의궤>는 특히 궁중 음식에 대한 귀중한 기록 유산이라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 때문에 황홀한 궁중 음식의 세계를 선보여 세계를 강타한 <대장금> 같은 한류 드라마도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p.148)” 원행에 쓰인 재정 또한 세세한 항목까지 기록으로 남겼는데, 이러한 기록은 예산을 절약하는 데에도 단단히 한몫을 한다. 그 결과 실제로 을묘원행에서는 예상했던 것보다 자금을 많이 남겨, 그 돈으로 제주도의 흉년을 진휼하거나 수원의 둔전 개발 등에 다시 사용할 수 있었다고 기록에 남은 사실까지 밝히고 있다.
“서문은 늘 그렇게 서 있어서 서문이다. 실은 화서문보다 공심돈이 더 유명하다. 공심돈은 안이 비어 있는 돈이라는 뜻인데, 돈 혹은 돈대는 성곽 주변을 감시하는 일종의 망루였다.(p.59)” 돈대는 남한산성이나 강화도에도 쌓은 바 있지만, 병사들이 높은 돈대를 오르내리는 일, 그것도 적의 눈에 띄지 않은 채 오르내리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고 한다. 공심돈은 안을 비우고 사다리나 계단을 설치해 그런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었다. 화성에는 공심돈이 모두 셋이지만, 흔히 이곳 서북공심돈을 대표로 꼽아 그저 공심돈이라는 대명사로 고유명사를 대신한다고 설명한다.
“방화수류정이 용두각임을 알지 못하는 토박이들 때문에 힘들게 찾은 기억을 살려 <용두각을 찾아서>의 작가 김소진 이야기부터 시작한다.(p.77)” 북암문 언저리에 황해도 피란민들의 움막집이 모여 있었다. 그 속에 피난민이었던 김소진 어머니가 살았던 때를 회상하면서 화성에서 가장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방화수류정과 용연. 화홍문의 일곱 개 수문을 배경으로한 멋진 풍경. 용연에 방화수류정이 잠긴 그림자를 보며 치매 걸린 아버지와의 추억을 되새긴다.
“동문은 도망가고, 서문은 서있고, 남문은 남아 있고, 북문은 부서졌다.(p.89)”는 말은 6.25가 끝난 후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늘 하던 말이었다. 장안문이 지금의 자리에 있게 된 사연을 소개한다. 원래 계획은 지금보다 동쪽으로 200여 미터 지점에 계획되었던 것을 채제공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조가 변경시킨 것이다. 화산에 있다가 사도세자의 묘를 천장할 때 이주해온 민가 200여 채에 피해를 주지 않게 하려는 배려 때문이었다고 한다. 서문인 화서문에 그만큼 가깝게 다가서게 되었다. 사실 화성 성곽이 반듯하게 원호를 그리지 않고 군데군데 삐뚤빼뚤한 것도 정조의 이런 애민정신이 발휘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종로 거리에 입색전(비단), 어물전, 목포전(무명과 목화), 염급 상전(소금과 각종 상), 미곡전(쌀), 유철전(놋쇠와 유기), 관곽전(관), 지혜전(종이와 신발) 등 여덟 종류의 시전을 설치했다.(p.121)“ 이는 서울의 육의전을 제외하면 전국에서 유일한 상성 시장이었다. 정조는 수원 부사 조심태의 건의를 받아들여 특히 수원 사람들 중에서 밑천이 좀 있고 장사 의욕과 능력을 지닌 이들에게 특권을 나눠주되, 국가에서 6만 5천 냥 이라는 거금을 무이자로 빌려주어 그들이 최대한 빨리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북수동 성당 앞 종로 사거리가 발 그 시전자리로서, 기록은 그곳을 ‘팔부자 거리’라고도 부른다고 설명한다.
“차를 화성행궁 주차장에 대놓고 그 속으로 들어갔다. 거기 어디에서도 도립병원을 찾을 수 없었다. 도립병원 근처에 있던 경찰서도 흔적조차 없었다.(p.142)” 지금의 화성행궁 자리에 예전에는 도립병원과 경찰서, 그리고 신풍초등학교가 자리했었다. 이 모든 것이 우리 정신과 전통을 말살하려는 일제의 계획 이었던 것이다. 성빈센트병원이 생기기 전까지 도립병원은 수원에서 가장 큰 병원이었다. 간호사를 양성하는 전문학교까지 갖추고 있었다고 과거를 회상한다. 정조대왕의 어진을 모셨던 “화령전 앞에는 나혜석의 생가터를 알리는 비석이 하나 서있다. 바쁜 관광객들의 발길이 거기 머물 리 없다.(p.163)” 이혼한 후 고향에서 지친 심신을 달래던 나혜석에게 화령전을 붉게 뒤덮은 작약이 어찌 위안이 아니었으랴. 그 작약 역시 창경궁을 동물원과 벚꽃놀이 동산으로 만든 일제의 간계와 맞물린다는 해석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그는 가끔은 나혜석의 마음을 달랬을 오뉴월 그 흐드러진 작약을 보고 싶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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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을 걷는 건 화성을 걷는 것이다’는 수원에서 나고 자랐지만 60이 넘어서야 마침내 온전한 화성(華城) 일주를 시도하게 되었다는 김남일 작가의 책이다. 난다 출판사의 걸어본다 시리즈 17번째 책이다. 강석경의 경주, 허수경의 뮌스터, 배수아의 알타이, 한은형의 베를린 등이 관심을 끄는 가운데 김남일 작가의 책을 고른 것은 수원 화성(華城)에 대한 관심 때문이다.
책은 김남일 작가의 문학적 표현과 수원 화성과 정조(正租)에 대한 서술로 이루어졌다. 화성은 원래 수원성으로 불리던 곳이다. 화성에는 치(雉)가 있다. 꿩처럼 몸을 숨긴 채 적의 동태를 살필 수 있게 성곽 바깥에 철(凸: 볼록할 철)자 형태로 약간 돌출시켜 만든 구조물을 가리킨다.
저자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느낀 만큼 보인다는 말로 바꾸고 싶을 때가 있지만 어떻든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에 의문의 일패를 당한 느낌이라고 말했다. 나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도 맞지만 정감이 생겨야 알려는 노력을 기울인다는 점에서는 느낀 만큼 알려 하고 그런 만큼 보인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라 생각한다.
성곽의 낮은 담을 여장(女墻) 또는 타( ), 우리 말로는 성가퀴라 한다. 성가퀴에 세 개의 총 구멍이 있다. 가운데 구멍은 근총안, 양 옆 구멍은 원총안이다. 포루(砲樓)는 포를 쏘는 누각이다. 저자는 만일 카프카가 우리나라에 살았다면 다른 작품은 몰라도 결코 ‘성(城)’ 만큼은 쓰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 땅 어디에도 저 멀리 고딕체 글씨처럼 우뚝 솟은 성을 발견할 수 없었을 테니까.
조선의 성은 높이가 아니라 둘레와 길이로 권위를 주장한다. 저자는 우리의 성은 우뚝 솟은 성채가 아니라 상실을 또 다른 기의로 갖는다며 인조(仁祖) 이야기를 한다. 곤룡포 대신 하급관리의 남색 옷을 걸치고 정문이 아닌 서문으로 나선 인조는 “그들이 정한 법에 따라 몸이 묶이거나 관을 끄는 치욕만은 면할 수 있었다.” 몸이 묶이거나 관을 끄는 치욕이란 함벽여츤(銜璧如?)을 말한다. 손을 뒤로 묶이고 입에 구슬을 물고 관을 뒤집어 쓰는 치욕이다.
젊은 저자에게 성을 오르는 일은 폐허를 밟는 일이었다. 암문(暗門)은 벽돌로 쌓은 점이 특징이다. 포루(鋪樓)는 성가퀴를 앞으로 튀어나오게 쌓고 지붕을 덮은 부분이다. 치성(雉城)에 있는 군사를 보호할 목적으로 지은 것으로 포대를 설치하는 포루(砲壘)와 동음이의어다. 1795년 정조는 야간 훈련을 직접 참관했다. 야간 훈련시에는 매화(埋火) 즉 땅에 묻은 화약이 밤하늘에 치솟았다가 마치 매화꽃이 일시에 떨어지듯 떨어졌다.
화성의 남문은 팔달문, 북문은 장안문, 동문은 창용문, 서문은 화서문이다. 화홍문은 북쪽 수문이다. 화령전(華寧殿)은 순조가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고 제사 지내던 곳이다. 연무대는 병사들의 훈련장이다. 팔달산 정상의 화성장대를 서장대로 부르고 연무대를 동장대라 부른다. 정조가 장용영 군사들을 위해 만든 국영 농장인 둔전을 대유평 또는 대유둔이라 한다.
수원 사람들은 팔달산을 팔딱산이라 불렀다고 한다.(29 페이지) 그런 감각으로 저자는 서문은 늘 그렇게 서 있어 서문이라 말한다. 공심돈은 안이 비어 있는 돈(墩)이다. 돈은 성곽 주변을 감시하는 망루다. 화성에는 공심돈이 셋이지만 서북공심돈을 대표로 꼽아 그저 공심돈이라는 대명사로 고유명사를 대신한다. 1797년 정월 정조는 공심돈 앞에서 “우리 동국 역사상 최초의 건물이라. 마음껏 구경하라.”는 말을 했다.
동북각루로 지어진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은 화성에서 가장 빼어난 경치를 자랑한다. 예전 수원에서는 동문은 도망가고 서문은 서 있고 남문은 남아 있고 북문은 부서졌다고 말했다.(89 페이지) 정조는 북문인 장안문을 설계도와 다르게 200미터나 옮겨 쌓도록 했다. 화산(華山)에 있다가 사도세자의 묘를 천장할 때 이주해온 200여명의 백성들의 집을 피해 짓도록 한 것인데 이로 인해 화성은 성곽이 반듯하게 원호를 그리지 않고 군데군데 삐뚤빼뚤한 모양을 하고 있다.
반사(頒賜)는 임금이 물건을 내리는 것을 말한다. 정조는 흰떡, 수육, 부채, 척서단(滌暑丹), 솜옷, 털모자 등을 나누어 주었다.(滌: 씻을 척) 당시에 귀마개, 털옷 등은 아무나 가질 수 없었다. 정조는 즉위년에 그의 목숨을 노리는 자객들이 왕의 침전이자 서재인 존현각(尊賢閣)에 난입하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을 겪었다. 노론 영수 홍상범(洪相範)이 주도한 사건이었다. 홍상범에게 매수된 호위군관, 도성 무사들, 심지어 액정서(掖庭署) 소속들까지 가담했다.
후일 정조가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한 것은 이런 배경에 따른 것이다. 홍상범은 책형(?刑)으로 죽었다. 동북 공심돈은 서북공심돈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심을 적게 받지만 나선형 계단으로 인해 소라각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저자는 사회 과목 성적도 제법 좋은 편이었지만 행궁이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지조차 잘 몰랐고 가르쳐주는 이도 없었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화성행궁을 둘러보는 일은 기억과 기록 사이를 걷는 줄타기와 같다. 이때 기댈 수 있는 것이 ‘원행을묘정리의궤’다. 사도세자의 무덤은 수은묘에서 영우원으로, 영우원에서 현륭원으로 격상되었고, 고종(1899년)이 사도세자를 장조로 추존함에 따라 융릉으로 격상되었다.
을묘년은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회갑을 맞은 해이다. 사도(思悼)는 영조가 내린 시호다. 정조가 사도세자의 영우원을 수원 화산으로 옮긴 것은 1789년의 일이다. 정조는 현륭원 앞에서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고 애통해했다. 손으로 잔디와 흙을 움켜잡아 뜯다가 손톱이 상할 정도였다.
나혜석의 출생지는 화령전 인근 어디쯤이다. 저자는 나혜석의 단편 소설인 ‘경희’를 읽고 시대와 맞섰던 그녀의 당당한 불화에 감탄했다. ‘수원을 걷는 건 화성을 걷는 것이다’는 독특한 책이다. 작가 개인의 기억과 문학적 표현들과 화성과 정조에 대한 사실(史實)들이 어우러진 책이기 때문이다. 시간 내서 책에 언급된 이탈로 칼비노, 나혜석, 발터 벤야민 등에 대한 책을 읽으면 좋으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