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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재학 당시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천주교 신부(神父)가 되는 게 꿈이었다. 개신교 신자인 나하고는 친하게 지낼만한 교집합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가까이 지낼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바로 ‘문학’에 대한 지향성 때문이었다. 대중가요와 패션, 축구가 전부이던 남고 교실에서 은따였던 우리는 서로를 단번에 알아보았는데, 선호하던 문학의 장르가 달라서 서로에게 더 매력을 느꼈던 것 같다. 소설을 좋아했던 나는 (수능에는 절대 나오지 않는) 알퐁스 도데, 기 드 모파상, 앙드레 지드 등의 작품을 그에게 소개시켜 주었는데, 그 친구는 ‘시’를 좋아해서 자신이 창작한 시를 나에게 수줍게(?) 보여주곤 했다. 그는 ‘시를 짓는 신부’가 되고 싶다고 했다.
‘페소아’의 시에 대한 감상 대신 과거에 대한 회상으로 (다소 엉뚱하게) 독후감을 시작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페소아의 시를 내가 평하는 것 자체가 주제 넘는 일이다. 둘째, 페소아의 시를 읽는 과정에서, 소설을 읽기만 했던 나와 달리 시를 직접 썼던 그 친구가 생각이 났다. (그 친구의 시의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꽤 근사했던 이미지만은 확실하게 기억난다.) 꽤 많은 책을 읽었으되 지금까지 읽은 시집은 손에 꼽을 만큼 적다. 그래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시인 듯, 시 아닌, 시 같은 페소아의 시를 보면서 상당히 당혹스러웠다. 시 한 편이 90장 가까이 되도록 끝날 줄을 모르거나, 자신의 이름으로는 떠오르는 시상(詩想)을 다 담을 수 없었는지 여러 개의 이명(異名)으로 모순되는 – 정확히는 정체성이 충돌되는 – 발화들, 그럼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뻔뻔함.(아니, 당당함.) 이것을 ‘시’라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전혀 시를 이해하지 못했다. 내 속의 파토스를 억지로 끄집어내어 감동받을 의도는 관두고, 다음으로는 철학적으로 접근해봤다. (철학적 사고방식은 아직 페소아를 논할 자격이 없다는 ‘알랭 바디우’의 말에 도전적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다.) 로고스를 건드리는 추상적인 보통명사(예를 들어 ‘자연’)들이 다른 시인들의 시에 비해 자주 등장하는 것이 조금은 신선하여 행간의 의미와 페소아의 의도를 분석해보려 시도하였으나, 그도 이내 관두었다. 페소아는 분명 자신의 시를 통해 그런 나의 태도를 꾸짖었다. “그저 존재할 뿐인 사물들에 대한 인간의 거짓말이 찾아온 거다.” 그래서 일단은 “사랑한다는 것은 순진함이요, 모든 순진함은 생각하지 않는 것”이라는 페소아의 명제를 받아들이고 그 다음부터는 사유하기를 멈췄다. 거기서 비롯되는 자유도 자유라면 나는 페소아를 읽는 내내 자유로웠다.(그 때 당시도, 지금도 자유롭고 싶다.)
시를 짓는 신부가 꿈이었던 그 친구는 지금으로서는 연락은커녕 생사조차 알 수 없는 타인이 되어 버렸다. 함께였던 당시 그 친구에게 ‘너는 시를 쓰고 있으니, 이미 시인이 아냐?’라고 물었다. 그 친구는 이렇게 답했다.(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지만 뉘앙스를 최대한 비슷하게 재현하면 이렇다.) “시를 좋아해서 시를 쓸수록 시하고 멀어져. 하느님보다도 훨씬 까다로운 존재야.” 그 친구는 ‘신부’가 되는 것보다 ‘시인’이 되는 게 더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친구는 ‘신부’가 되었을까? ‘시인’이 되었을까? 아니면 꿈을 이루어 ‘시를 짓는 신부’가 되었을까? 언젠가 우연히 만날 수 있다면 페소아와의 만남을 주선하리라. (만약에 페소아를 알고 있다면, 그도 페소아와 마찬가지로 시인이 되는 건 욕망이 아니라 ‘내가 홀로 있는 방식’이라고 표현하려나?) “우리였던 둘, 그리고 인생 보편의 낯선 총합을 함께 묶어 주는.” 그 친구,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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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바람이 지나가는 걸 듣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바람이 지나가는 걸 듣는 것만으로도 태어날만한 가치가 있구나. (106쪽)
나는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를 자신의 가슴 안에 깃들어 사는 다중인격에 즐거워하고 괴로워했던 예술가라고 기억한다. 그의 산문집 《불안의 책》을 읽을 때 나는 좀 괴로웠었다. 어쩌면 이렇게 두꺼운 책을 어쩌면 이렇게 멋지게 쓴단 말인가. 하지만 이것은 천재의 일필휘지가 아니라 생의 모든 시간을 문장에 바친 '한 바보'의 일기였음을 한참 뒤에 깨달았었다.
생전에 그다지 박수를 받지 못했던 그였지만, 47살 이른 나이에 찾아온 죽음 뒤에는 바뀌었다. 그의 모든 것을 기꺼이 사랑할 각오가 되어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가 트렁크에 남긴 방대한 문장들 속을 헤매고 있는 것이다. 이런 내용을 알게 된 것은 《불안의 책》을 읽다가 알게 된 이탈리아 작가 안토니오 타부키의 책을 통해서 였다. 폐소아에 대한 글《사람들이 가득한 트렁크》는 타부키가 얼마나 페소아를 흠모하는지 알게 했다.
타부키와 같은 사람이 우리나라에도 있었다. 이 시선집을 번역한 역자도 페소아에 빠져 포루투갈어를 배우고 페소아가 간 길을 더듬으며 살고 있는 작가라고 한다. 덕분에 페소아의 시가 궁금했던 나 같은 독자들이 그의 시를 만날 수 있게 되었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이 책에는 페소아의 대표적 이명인 알베르투 카에이루와 리카르두 레이스, 그리고 페소아의 시들을 나눠 수록했다. 페소아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읽는다면 이게 어떤 상황인지 궁금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뒤에는 역자의 소개글이 상세하게 나와있다. 페소아가 어떤 사람인지, 그의 이명들은 어떤 역할을 하는지 페소아 폐인인 역자가 잘 설명해 놓았다. 이 소개글만 읽어도 궁금증이 풀릴 것이다. 혹시 더 궁금하면 자료를 찾아 인터넷을 검색하면 되고, 그러다보면 어느새 페소아에 푹 빠져있는 자신에 놀라게 될 것이다.
《불안의 책》이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은 이 책이 출간되자마자 2쇄를 찍었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앞의 책이 아니라면 페르난두 페소아라는 이름으로 출간 된 시집을 선뜻 구입할 사람이 많지 않았을 것 같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펴본 이 시집의 시들은 어땠을까.
나는 한 번도 양을 쳐 본 적 없지만, 쳐 본 것이나 다름없다. 내 영혼은 목동과도 같아서, 바람과 태양을 알고 계절들과 손잡고 다닌다
로 시작하는 <양 떼를 지키는 사람>은 무려 49장의 장시로 이뤄져 있지만 목동이 부르는 노래처럼 다정하게 응얼거리는 여운이 있어서 생의 질문에 순박한 답을 원할 때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첫 시인으로 소개된 알베르투 카에이루는 페소아의 이명들 중에서 가장 자연친화적 인물이라는 평을 듣는 것처럼 시들도 어렵지 않으면서 가슴 안에서 불어오는 허밍을 듣는 것처럼 아련한 맛이 있었다.
두번 째 시인인 리카르두 레이스는 의미를 찾기 어려워 해설을 찾아 읽어보았다. 페소아는 레이스를 "외과의사이자 시인이며 신고전주의 호라티우스주의자. 독학으로 그리스어를 배"운 인물로 만들었다. 레이스는 지성을 강조하고 감정을 피했기 때문인지 일반 독자들이 읽기에는 추상성이 강하다는 역자의 해설을 들으니 조금 이해가 되기도 한다. 이런 레이스의 시는 명확한 이미지 전달이나 해석을 하기 어려웠는데 그래도 마음을 붙잡는 구절들이 있었다. 예술을 어떻게 이해하며 다가갈 수 있겠는가.
신들에게 유일하게 바라는 건
신들에게 유일하게 바라는 건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 나는 자유로울 거야 - 행운도 불행도 없이, 삶이라는 바람처럼 아무것도 아닌 공기 중에. 증오와 사랑은 똑같이 우리를 찾지, 양쪽 다, 각자 자기 식으로, 우리를 억누르지. 신이 아무것도 베풀지 않는 자 바로 그에게 자유가 있지.
마지막 3부는 페소아가 생전에 자신의 이름으로 출간한 첫 시집《메시지》에서 발췌한 내용을 싣고 있다. 그토록 많은 이명을 만들어 놓고 아무데도 넣지 못한 시들을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한 시들이라고 한다. 말년에 페소아는 자신이 만든 이명들이 다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명들의 존재는 평생 외로움과 맞서는 페소아 만의 방식이 아니었을까 싶다.
먼 이국의 시인이 두고 간 생각을 읽었다. 가끔 어떻게 살아야 좋을지 마음이 번잡할 때가 있다. 그러나 폭설로 내리는 눈송이처럼 많은 삶 중에 누가 조금 더 반짝이고 조금 더 컸다고 자랑할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이 순간인 것을. 이런 생각 끝에 정리하는 것은 삶이란 결국 최고점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 과정이 답이 아닐까 싶다. 페소아의 다중인격들 또한 한바탕 내리고 간 눈송이들. 지금은 녹아서 흔적도 없지만 그 흔적을 찾으려는 발굴가들이 있어 지금까지 부지런히 지속되고 있는 하나의 생, 하나의 눈송이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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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시는 사실 온전히 느끼기 어렵다. 게다가 이처럼 길게 쓰인 산문시라면... 그럼에도 이 시집에서 무언가를 느낄 수 있다. 일단 제목에서. 고독과 쓸쓸함, 그러면서도 강한 의지가 느껴지는 제목이다. 페르난도의 이 시집은 대부분 이런 식이다. 삶에 대해 미련은 없지만 애환은 있다. 삶에 대해 의지는 없지만 소명은 있다. 모순적인 의지 속에서, 느낄 수 없는 그의 의지를 느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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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그냥 생각나는대로 풀어헤친 느낌이 든다. 아주 뛰어난 더듬이가 있는 사람이거나 반쯤은 정신이 이상하다는 말을 들었을 그런 느낌의 시들. 글로 형이상학적 그림이 되어가는 것을 시에서 느끼게 해준 참신한 경험의 계기. 죽는 날에 그저 햇빛을 아직 볼 수 있어 좋다고 말하는 순수함 내가 그저 느끼거나 생각하는 장소일 뿐이라는 이질적인 깨달음을 느끼게 해준 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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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침묵의 간극을 기꺼이 즐기게 해주는 언어다. 침묵을 메워주는 듯 했으나 침묵과 하나가 되게 만들어준다. 미완성의 문장을 징검다리 지나듯 건너기도 하고, 뒤죽박죽 얽힌 표현을 동서남북 갸웃거라며 음미한다. 페소아는 그간 말로, 기록으로 정화되지 못한 자들의 허무한 슬픔을 기가 막힌 표현으로 어루만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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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책을 다 읽고 함께 사 봤어요. 초록색 표지와 본 핑크색 표지 중에 이 쪽에 제목이 더 끌려서 구입했습니다. 이슬아 작가가 김한민님을 인터뷰한 글을 보고 더 흥미가 생겨서 구입하게 된 탓도 있습니다. 시를 많이 읽은 편은 아니어서 읽는데 시간이 걸렸지만 뭔가 느껴지는 게 있어서 틈틈이 다시 읽어보고 있어요. 다시 읽을때마다 느껴지는 바가 있는 시집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