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화영 교수의 글쓰기에는 삶 속에서 돌연히 마주치고는 견갑골에 서늘한 느낌만을 남기고 또 다시 홀연히 사라지는 느낌을 찰라적으로 포착하는 아름다움에 대한 놀라운 반응성을 풍부히 함유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어쩌면 그는 번역 문학에 있어, 또 하나의 작은 이정표를 세웠던 영민한 감수성의 낭만주의자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뿐이다.(솔직히 나에게는 이 말이 얼마나 안타까운 비명인지 모른다) 그는 까뮈를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고, 많은 까뮈의 작품을 재번역하여 출간하였다. 그리고 이 책 역시 그의 일생의 테제였을지도 모를 까뮈의 연장선상 위에 놓여 있다. 이 책을 읽고, 그의 표현대로 "내 일생을 관통하는 감성과 사유의 풍경...반세기의 세월"동안의 지기였으며 스승이었던 까뮈는 그에게 있어 밥벌이의 수단이고 문화적 악세사리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강하게 든다. 까뮈로 인해 찾아간 알제리에서 그가 보았던 것은 "결혼-여름"에서 눈부시게 난무하던 북아프리카의 태양과 바다에 대한 까뮈식 가설(!)에 대한 확인 뿐이었다. 차라리 이런 종류의 확인이었다면, 프로 사진가를 보내 사진을 찍고, 에어콘이 나오는 사무실에 앉아 편집자가 까뮈의 텍스트와 비교 정합하는 작업의 결과물이 더 훌륭할 뻔 했다. 까뮈가 언급했던 "나는 나의 삶을 알제의 뜨거운 태양과 뒷골목의 가난과, 가난과 외로움때문에 실어증에 시달렸던 어머니의 침묵으로부터 배웠다"고 했던 까뮈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간 여러 언론을 통해 보여준 김화영 교수의 "반동적" 언행은 나로 하여금 "세계의 어느 구석에서, 한 노동자가 탱크 앞에서 맨주먹으로 자기는 노예가 아니라고 외치며 대항할 때, 우리들이 무관심하다면 우리들은 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라고 절규했던 까뮈를 너무나 자주 생각나게 하였다. 그의 한국 사회에 대한 현실인식은 냉정히 평가해 역사적 성찰의 결여로 인해 "지식인"으로서는 평균치 이하의 수준을 보였으며, 이러한 점은 그의 가슴에 얹혀있는 "까뮈" 상표의 훈장과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이책은 아쉽게도, 또한 작은 방에서 화폭에 씌여있는 작은 글씨를 들여다보며 "solidaire"라고 읽어야할지, "solitaire"라고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중얼거렸던 레토의 입을 빌렸던 까뮈가 무엇때문에 나치하의 지하신문 꽁바지의 편집장을 했었고, 때로는 페스트로, 거대권력으로, 신화로, 오해로, 세기말적 우울함으로 얼굴을 바뀌 "부조리"를 계속 표현했는지에 대한 본질적 이유와 김화영 교수의 세계관 사이의 상관계수가 거의 제로에 가깝다는 것을 증명하고 말았다. "김화영의 알제리 기행", 책의 제목에 저자의 이름이 들어간다는 것은 단순한 제목을 넘어 브랜드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장을 덮는 순간 이 브랜드는 함량미달임에 드러났다. 전체 텍스트의 1/3을 차지하는 카뮈의 인용, 별다른 의미를 붙이기 어려운 여정과 개인적 감상의 글들. 기본적인 구도도 잡혀있지 않은 것 같은 수준 미달의 컬러 사진들(컴퓨터 화면의 아이콘보다 조금 큰 크기의 사진을 보면서 사진의 수준 미달을 감추기 위한 편집자의 센스에 사실 박수를 보냈다), 결과적으로 적어도 이 책에서는 난 "김화영"이라는 브랜드에 사기를 당했다고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다. 글과 현실, 이 둘의 관계성을 정립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고, 이에 대한 정의는 고정된 것이 아니지만, 김화영 교수에게서는 너무나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사실 단순한 먹물쟁이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까뮈"는 먹물쟁이 이전에 바른 판단력을 갖고 있는 시민이었다. 나는 여전히 김화영 교수를 사랑한다. 그의 영민한 감수성과 찰라적인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그의 눈매를 여전히 사랑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여전히 온라인서점이나 대형서점이나 가면 그의 이름으로 나온 신간이 있나 그의 이름 석자 "김화영"으로 검색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또한 앞으로, 그의 1차적 번역물은 읽어도, 까뮈에 대한 그의 2차적 사고의 결과는 정중히 거절할 것이다. |
| 여행이 내게 주는 목적은 무엇인가. 제일 큰 의미는 물론 새로운 만남에 대한 설렘 같은 것이 아닐까? 내 곁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것들을 보고 또 느낄 수 있다는 신선함이 여행 속에 담겨져 있을 것이다. 또 다른 목적은 내가 처해있는 현실에서 일탈하고픈 것도 작용하지 않을까? 우리네 삶이란 것이 나 아닌 다른 변수들에 의해 움직여 진다는 것은 편하기는 하지만 나만의 삶은 이미 없어져 버린 것이다. 뭔가 내가 내 삶의 주체가 되고 싶은 욕구를 늘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생활 속에 매몰되어 버린 나는 이미 내 삶의 객체가 되어 버렸다는 것을 늘 느끼고 있다. 이렇게 느낄 때에 특히 여행을 가고 싶다. 그 여행이 거창하지 않아도 상관은 없을 것이다. 서울 근교의 산사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고, 철지난 바닷가의 모래사장을 밟아보는 것도 좋으리라. 다만 기왕 가는 것, 좀 더 낯선 곳으로 가고픈 욕구가 더 크기에 외국으로 가보고 싶은 마음이 항상 내 속에서 솟아난다. 그렇다고 여행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행동으로 옮긴다는 것은 별개의 어려움이 있다. 내가 처해있는 현실은 이미 내가 하나의 부속품으로 있는 기계와 같아서, 내가 한 번 빠져버린다면 다른 부품이 내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나중에 돌아올 내 자리가 없어질 위험이 항시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한 번 떠난 다는 것은 기회비용을 발생할 수 있는 개연성이 있기에 더욱 간절히 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내 욕구 때문인지 올 해는 유난히 여행서적을 많이 읽었다. 즉 남의 눈을 통해, 다른 사람의 가치관을 통해 간접적으로 낯선 것과의 만남을 추구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책을 읽는 다는 것을 ‘차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최선의 선택은 물론 내가 직접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아프리카 동물을 보고 싶다면 직접 아프리카 초원으로 가서 보는 것은 최선의 선택이다. 그러나 이는 결코 쉽지 않은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동물원에 가서 아프리카 동물을 본다. 이것이 차선의 선택이라고 보여 진다. 내가 하고픈 것은 많지만 시간과 자금의 어려움 속에서 내게 허용된 것이 많지 않을 때 우리는 이런 차선책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독서는 이런 차선책으로 보여 진다. 책을 안 읽는 한국의 현실에서 보면 이것도 화려한 유희 아닌가. 이렇게 보면 책을 읽는 다는 것은 아주 행복한 것이다. 알제리! 정말 낯선 곳이다. 아프리카 북부 지중해에 면해 있는 나라라는 것은 알고 있으나 리비아, 튀니지, 모로코와 알제리를 지도상에서 찾아보라고 한다면 자신이 없다. 그 나라가 그 나라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 지도상에서는 찾지 못할 지라도 내가 알제리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몇 가지 있다. 프랑스의 축구 선수 ‘지네딘 지단’이 알제리 출신인 것을 알고 있다. 또 의사이자 인권운동가인 ‘프란츠 파농’이 알제리 독립전쟁에 관여했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으며 프랑스의 지적인 작가인 ‘자크 아탈리’ 역시 알제리에서 태어났다는 것도 안다. 이런 짤막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내가 이 책을 만났다. 이 책의 제목에 있는 김화영이라는 사람 때문이 아니라 ‘알제리’ 기행이라는 것 때문에 이 책은 내 눈에 확 들어왔다. 김화영이라는 이 책의 저자는 고려대 불문학교수로서 <알베르 카뮈론="">으로 프랑스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분이다. 그가 알제리로 문학기행을 간 것이 이 책의 주요한 내용이다. 그런데 불문학자가 문학기행을 하면 프랑스로 가야지 왜 알제리로 갔을까? 실상 나는 프랑스 작가들의 문학작품을 읽어본 지도 오래되었다. 최근에 읽어본 것들은 거의가 문학이 아니라 인문서적들이었다. 이런 내가 내 능력을 넘어서는 일을 저지른 것은 알제리라는 낯설움 때문이었다. 이 책에는 알베르 카뮈와 앙드레 지드가 나온다. 이 두 작가는 알제리에 거주하며 작품 활동을 했다는 것을 나는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이 책의 작가인 김화영씨는 바로 그들의 작품에 소개되어 있는 곳을 방문하며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상황, 두 작가에게 처해진 삶의 모습과 현재의 도시의 변한 상황을 비교해 내며 독자들에게 의미를 전달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나에게 내 능력을 넘어서는 일을 저질렀다는 생각을 가지게 했다. 왜냐하면 내가 이 두 작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두 사람의 책을 읽어본 경험이 고작 한 두 권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방인>도 <좁은문>도 읽어봤지만 내게 남아 있는 기억의 편린은 다만 그 책의 주인공들에 대한 약간의 느낌만이 남아있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까뮈와 지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독자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아마도 감흥이 더 깊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와 같이 두 작가에 대해 깊은 소양이 없는 독자들이라도 알제리라는 낯선 곳에 대한 아름다움과 지중해와 사막이 주는 또 다른 자극, 또 백인들이 사는 아프리카라는 의미는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또 크기가 크지는 않지만 많은 사진이 수록되어있어 카뮈나 지드의 문학에 조예가 없더라도 눈으로라도 즐길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을 읽고는 또 가보고 싶은 곳이 하나 추가되었다. 아! 떠나고 싶다.좁은문>이방인>알베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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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영의 알제리 기행』을 제대로 느끼려면 ‘알베르 카뮈’에 대해 제대로 알면 좋겠다. 기껏 읽은 책이라곤 『이방인』이 다 인 나는, 그 마저도 제대로 기억이 안 난다. 한국 최초로 알제리의 문학기행이 쓰고 싶었다는 저자는 그 바람만큼 멋진 기행문을 남겼다. 글 곳곳에 보이는 카뮈와 ‘앙드레 지드’의 글과 딱 맞는 장소들을 보니 나도 나중에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섭렵하여 저자처럼 문학기행 한번 꼭 가봐야겠다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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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라는 너무나 생소하고 낯선 나라에 오기로 결정을 하고 보니, 너무 아는 것이 없다. 어느 나라에 갈때건 아니면 다른 무엇을 할때라도 그것에 관한 지식이 그 결과나 경험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당연한 일. 일이 잘되게 하기 위해서라도 알제리에 대한최소한의 지식은 필요했다. 그래서 예스24를 뒤져보았으나, 알제리에 관한 여행책이라고는 딱 한권뿐. 그야 말로 정보가 아무것도 없었다. 그나마 그 한권 마저도 현재는 절판상태. 너무나 다행이게도 전자책이 있었다. 휴 아예모르는 것과 아무리 부족한 정보라도 조금 아는 것은 큰 차이가 있으니, 뭐 선택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일단 구입. 막상 책을 사고 보니, 그곳에 관한 여행 정보를 주기 보다는 알베르 까뮈에 빠진 불문학 교수인 저자가, 까뮈가 살았고 또 그의 문학세계의 주 무대이자 자양분인 알제리를 동경하여 직접 답사하며 그의 궤적을 좇는 그런 내용이다. 어느 정도 공감하려면 까뮈의 문학세계를 이해하고 알고 있어야 한다는 건데, 나는 그의 책을 한권도 읽지 않았다. 그나마 책이 그러하다는 것을 알고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이라는 책을 빌려오긴 했지만, 아직은 앞부분 밖에 보지 못했다. 뭐 어쨌거나 일정이 빡빡해서 아예 밖에는 나가보지도 못하는 실정이니 크게 중요하진 않겠으나.... 책을 읽으며 인상적이었던 부분 몇군데 옮겨본다. ----------------- 귀국하기 전, 나는 카뮈의 뿌리가 깊숙이 박혀 있는 곳, 죽은 자들의 몸이 갇혀 있던 옛 석관 속에 햇빛이 가득히 고이고 향일성 식물이 솟아올라 찬란한 꽃을 피우며 새로운 생명을 노래한다는 티파사에 가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건 나 혼자만의 꿈일 뿐이었다. 사납고 어려운 시절이었다. 우선 가장 무서운 것은 당시의 내 나라 정부였다. 프랑스에 유학을 갔으면 그곳에만 박혀 있으라는 것이었다. 간첩의 혐의를 받지 않고 그 밖의 다른 나라에 가려면 현지의 우리 대사관으로부터 이른바 '경유지 추가'라는 것을 받아야 한다. 그 다음에 상대방 국가의 입국비자를 받는 일이 당연히 기다리고 있다. 내가 입국하고자 하는 나라는 1962년 프랑스에서 독립한 이후 알제리 인민공화국이었다. 반면에 나는 '반공을 국시로 하는' 군사정권의 국민이었다. 현지에는 북한의 상주 대사관만이 개설되어 있었다. ----------------- ----------------- "침묵은 그것이 그늘에서 생긴 것이냐 햇빛에서 생긴 것이냐에 따라 그 질이 다르다. 우선 구베른느망 광장 위에 깃들이는 정오의 침묵이 있다. 광장가에 늘어선 나무 그늘에서는 아랍인들이 한 잔에 5수씩 받고 오렌지알을 까 넣은 써늘한 레몬주스를 판다. '시원해요, 시원해요'하고 그들이 외치는 소리가 인적 없는 광장을 가로질러 간다. 그 소리가 지나가고 나면 햇빛 아래로 침묵이 다시 내려앉는다. 상인들의 항아리 속에서 얼음이 뒤집혀지면서 내는 작은 소리까지 들린다. 그리고 또 오수의 침묵도 있다." 카뮈는 [알제의 여름]에서 이렇게 썼다. ----------------- ----------------- 알제리에는 아시아 사람이라곤 건설현장에 와서 일하는 중국인들뿐이라는 것이다. 이곳 아랍인 아이들은 나를 보면 그런 중국인으로 착각하는지 종종"아리바바!"라고 소리치며 지나가곤 한다. 그건 "도둑놈!"이란 뜻이다. ----------------- 잉? 알리바바는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에 나오는 그 사람이름 아닌가? 도둑놈이라는 뜻이 원래 있는건가? 궁금해서 알제리인에게 물어보니, 원래 사람이름이 맞는데, 중국인 건설 노동자들이 하도 물건을 훔쳐서 현지 사람들이 알리바바라고 부르기 시작했단다. 도둑놈이라고 ㅋㅋㅋ 그니까 중국인 도둑놈이라는 뜻도 있는 것. ----------------- 오늘날 이 유적의 곳곳에 널려 있는 손때묻은 돌기둥과 포석들은 옛 로마의 영화를 아직도 말해주고 있지만 구멍이 숭숭 뚫린 어떤 돌은 인간의 문명이 남긴 다듬어진 유적인지 발아래 투명한 바닷물 속에 널린 것과 다름없는 자연의 돌인지 분간키 어렵다. 오랜 옛날부터 인간은 자연을 자신들의 의지에 굴복시켜 스스로의 힘과 영화를 자랑하려는 듯 돌을 다듬어 궁전과 광장과 사원을 지었고 제국을 건설했었다. 그것을 문명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뒤 결국 승리하는 것은 호모 파베르의 힘이나 이성이 아니라 끈질기게 기다리는 자연의 힘이다. 폐허의 돌 틈에 만발한 보랏빛 엉겅퀴 꽃들은 그 자연의 승리를 사납고 아름답게 증언한다. 그래서 카뮈는 썼다. "폐허와 봄의 결혼 속에서 폐허는 다시금 돌들이 되어, 인간의 손길로 닦여진 저 반드러운 손때를 이제는 다 버리고 자연 속으로 되돌아와 있다. 탕녀인 딸들의 귀향을 위하여 대자연은 꽃들을 아낌없이 피워놓았다. 고대 광장의 포석들 사이로 향일성 식물들은 둥글고 흰 머리통을 쳐들어 올리고 붉은 제라늄들은 옛적엔 가옥이요 사원이요 공공광장이었던 자리에 그들의 붉은 피를 쏟아 붓는다. 많은 지식을 쌓아 어떤 이들이 신에 이르게 되듯이 기나긴 세월의 풍상을 거쳐 이 폐허는 어머니의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오늘에야 마침내 폐허가 과거를 떠나버렸으니 무너지게 마련인 사물의 중심으로 폐허를 다시 인도해주는 저 심원한 힘에 복종하는 것 이외에 다른 마음 쓸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티파사에서의 결혼], {결혼,여름} ----------------- ----------------- 그러나 그를 만나자 가장 궁금해진 것은 지금 이 나라 도처에서 새삼스런 관심의 표적이 된 '1945년 5월 8일 대학살'의 진상과 그에 대한 이 이중국적 신부의 의견이다. 61년 전 그날, 유럽에서는 나치 독일의 항복을 의미하는 휴전을 기뻐하고 있었다.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의 동부 콩스탕틴 지역에서도 '승리'를 축하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한편 그 지역 도시 세티프에서는 총독부에 의하여 해산된 알제리 인민당 당원들이 투옥된 당수 메살리 하지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에 나섰다. 8천에서 1만 명에 이르는 군중은 주로 흉년으로 기근에 시달리는 농촌에서 올라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금지된 알제리 국기를 흔들었고 이를 압수하려는 경찰과 군중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면서 유럽인 29명이 사망했다. 즉각 프랑스군은 경찰과 긴밀한 연락망을 갖춘 민병대의 지원을 받아 가혹한 보복작전을 개시했다. 알제리의 '광주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해군이 포격을 개시하고 18대의 전투기가 44개 알제리 마을을 초토로 만들었다. 육군 역시 무자비한 진압에 나셨다. 수도 알제에서 300킬로미터 떨어진 세티프, 54킬로미터 떨어진 겔마 등지에서 일어난 이 학살극의 첫 희생자는 알제리 국기를 들고 있던 보이 스카우트 소년 사알 부지드였다. 이는 10년 뒤에 시작될 알제리 독립 전쟁의 예고편인 동시에 알제리 역사의 전환점이었다. 어제 세티프에서는 2만 5천 명의 독립 알제리 사람들이 61년 전 시위대가 걸어갔던 그 길을 따라 걸었다. 세티프 출신으로 알제리가 낳은 가장 유명한 작가들 중의 하나인 카테브 야신은 당시 열여섯 살이었다. 그는 이렇게 증언한다. "도처에, 거리마다 시체가 즐비하게 널려있었다. 진압은 맹목적인 대학살극이었다." "당시 프랑스 군의 보복으로 사망한 알제리인의 수가 4만 5천 명에 달한다는데요.....?" 나의 질문에 대한 샤반느 신부의 대답은 신중하다. "피해자의 숫자에 대해서는 사람에 따라 의견차이가 커요. 사실 당시 상황으로 봐서 집계가 불가능했으니까요. 피해자의 수는 최대 1만 5천에서 2만 정도라는 추측이 옳을 것도 같아요."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아주 미묘하다. 2005년 2월 27일 세티프에서 알제리 주재 프랑스 대사는 프랑스가 자행한 '1945년 5월 8일 대학살'을 최초로 시인하면서 "그 사건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비극"이며 "그러한 과거를 똑바로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알제리는 양국관계가 바람직한 쪽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라고 인정하면서도 불충분하다고 했다. 이 같은 상황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 프랑스는 스스로의 과거사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 2005년 2월 23일, 프랑스 의회가 당시 본토로 귀환한 프랑스인들에게 감사하기 위하여 제정한 법은 프랑스의 해외, 특히 북아프리카 점령이 차지하는 '긍정적 역할'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도 최근에 와서 일제 강점기에 대하여 유사한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과거의 침략자들은 종종 식민지에 끼친 '개화'의 역할을 이런 식으로 자평하려 든다. 알제의 [엘 와탄]은 2005년 5월 8일자 특집에서 신랄하게 비판한다. "프랑스가 알제리를 개화시켰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에 거짓의 베일을 씌우는 짓이다. 점령에 좋은 점령, 나쁜 점령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점령하는 것이나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지배하는 것은 언제나 변함없이 타자의 부정인 것이다. '나쁜 것'은 지우고 '좋은 것'은 남기는 말이나 법이나 멋진 수사로 역사를 은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2005년 알제리 프랑스 양국은 친선조약 체결을 앞두고 있어서 알제리 당국은 세티프에서의 프랑스 대사의 발언이나 식민주의의 '긍정적 역할'과 관련된 법에 대하여 공식적인 코멘트는 하지 않았다. 고지식한 우리들의 기대와는 달리 세계사는 대개 이런 식으로 굴러간다. "젊은 기자 시절, 카뮈는 바로 그 사태가 벌어지게 될 카빌리를 찾아가 그곳 원주민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고발하는 르포 기사를 써서 프랑스 총독부의 미움을 산 적이 있었죠. 1939년 6월 <알제 레퓌블리켕>에 발표한 <카빌리의 비참>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바로 그것이죠. '이곳 주민의 50퍼센트가 풀과 나무뿌리로 연명하고 있다'고 쓰지 않았습니까? 그랬던 카뮈가 왜 그 참혹한 학살극에 대해서는 큰소리로 고발하지 않았죠?" "카뮈는 1945년 1월에 알제를 방문했지만 그 사태가 벌어진 5월에는 파리에 있었어요. 그리고 당시 파리에서는 이런 참혹한 사태의 진상에 대하여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죠. 그러나 후일 사실의 일부에 대한 소식을 접하자 카뮈는 프랑스인들이 '어처구니없는 우월감'에서 저지른 만행이라고 비판하면서 독일인들이 프랑스에 대하여 저지른 만행 역시 그런 가당찮은 '우월감'에서 나온 것이라고 지적했죠" ----------------- ----------------- 아파트라야 복도도 없이 서로 잇닿아 있는 방 두 개, 식당 하나가 전부인 공간, 거기에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열 평 남짓 해보이는 이 좁은 공간에 카뮈의 다섯, 혹은 여섯 식구가 살았었다. 매트리스보다 방이 더 좁아서 그 한 귀퉁이를 접어서 깔아야 했고 낮에는 벽에 기대 세워놓았다. 다섯 식구 중 둘이 듣기와 말하기가 온전치 못한 장애자였고 셋이 문맹이었다. 거기서 미래의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될 소년 알베르 카뮈가 성장했다. 카뮈는 본의 아니게 유서가 되고 만 미완의 소설 [최초의 인간]을 "이 책을 결코 읽지 못할 당신에게"바쳤다. "당신"이란 글을 읽을 줄 모르기에 자신의 아들이 무슨 글을 썼기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는지 "결코" 알지 못할 그의 어머니였다. ----------------- ----------------- 아침 9시가 좀 못되어 식사를 끝내고 우리는 남쪽으로 105킬로미터 떨어진 바트나 방향의 가도를 달린다. 대평원이다. 도로변의 넓은 밀밭가에 엉겅퀴꽃들과 야생 양귀비가 보라색, 붉은색 물감을 쏟아놓은 듯 황홀하다. 이렇게 넓은 들에 아무런 곡식도 갈지 않은 채 붉은 야생화의 바다로 남겨놓다니..... 그러고도 이 나라는농산물을 해외에서 수입한단다. ----------------- 우리네 생각의 방식과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이 이리도 많지. 산과 산의 끝없는 이어짐속에 평평한 땅이 그리운 우리들 맘엔 넓은 평지를 저렇게 놀리는 그들이 절대 이해되지 않으리라! 글로 읽는 나조차인데 실제로 봤음 어쨌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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