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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든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는 나름의 철학이 있다. 그 철학을 100% 이해하거나 따라할 수는 없지만 작가의 생각을 읽는 건 즐겁다. 가끔 이해할 수 없는 작가의 표현을 이런 책을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일 수 있으니까. 이승우의 책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를 읽고 나서 다시 나의 눈에 들어온 책. ‘소설을 살다.’ 소설가들은 어떤 삶을 살고 어떤 삶 안에서 글감을 찾아갈까? 그들은 나와 다른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들. 하지만 소설가도 나와 똑같이 고민하고 의문을 갖고 글을 쓴다. 다만 그들은 나보다 많은 수첩에 글감에 대해 생각나는 대로 메모를 하고, 사회 현상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왜’ 그리고 ‘어떻게’를 생각한다.
나는 이승우 작가처럼 쓰고 싶어서 미칠 것 같은 마음이 들었던가? 예전에 나도 공모전을 준비한 적이 있다. 전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 공모전은 내가 글을 잘 써서 도전한 것은 아니다. 무슨 생각이 들어서였는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그냥 쓰고 싶었다. 나의 이야기를. 그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은 두근거림. 처음으로 6개월 동안 1000매를 썼고, 다 쓰고 나서는 많이 울었다. 왜 울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시간은 나에게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 이후 세상에 대해, 나에 대해 그리고 사람들에 대해 관대해졌다고나 할까 이승우 작가도 말한다. ‘나는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아주 작은 개인의 실존을 그리면서 내 자신 가슴이 너무 답답하여 자주 심호흡을 하곤 했다.’ 그때 이후로 나는 미치도록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요즈음은 뭔가에 도전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공모전에 도전한지 딱 10년.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그 느낌이 들지는 않지만 쓰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소설은 결국 내 안에 있는 그 무수히 많은 나, 내가 아닌, 그러나 결국 내가 아닐 수 없는 그 다른 많은 나들 가운데 어떤 나를 이끌어내어 세계와 만나게 하는 일일 것이다.’ (56) 나에게는 어떤 내가 숨어 있을까? 공모전에 도전하고자 했을 때는... 쓰고자 하는 내가 불쑥 찾아왔던 모양이다. 도전 후에는 다시 평소의 내가 되었고 요즈음 다시 그 무수히 많은 나 중, 또 다른 내가 고개를 드는 모양이다. 나는 어떤 나를 이 세계에 이끌어야 할까? 나는 무엇을 이 세계에 이끌어와 글을 써야 할까? 책을 읽으며 소설가의 고뇌와 생각 그리고 혼돈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기억할 것이 없는 사람은 소설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에는 묘하게 동의하게 된다. 기억하고 싶고 기억을 남기기 위해 우리는 소설을 쓰려하고 읽으려 하는 건지도 모르니까. 소설을 읽으면서 잊었던 기억들이 되살아나기도 하고, 몰랐던 사실을 알기도 하니까.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런 책을 읽다보면 내가 그 무게를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렇게 읽기만 하는 것인지도... 소설가도 여전히 힘들다. 두 번째 소설이 첫 번째 소설보다 쓰기가 쉬운 것도 아니고 세 번째 소설이 두 번째 소설보다 반드시 마음에 드는 것(135)도 아니니까. 어떤 소설이든 소설가에겐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다. 소설을 쓰는 그 당시에는 어떤 소설이든 새롭고 익숙해지지 않을 테니까. 아니 익숙해지는 순간 뻔한 소설이 나올지도 모르니까. 이승우 작가의 책을 참 좋아한다. 그래서 이승우 작가 말하는 소설에 대한 글이 좋았다. 다음에 이승우 작가의 책을 읽다보면 작가의 글에서 숨은 뜻을 발견하는데 보다 수월하지 않을까? 우리는 소설가는 아니지만 우리만의 소설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 내 인생의 어떤 소설을 쓰고 있는지. 생각해 보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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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한 마디로, 소설가 이승우님의 작가로 사셨던 삶에 대한 이야기, 즉 "소설가가 소설을 쓰면서 사는 삶"에 대한 이야기다. 벌써 이승우님이 글을 쓰신지 20년이 넘었다. 그 시간동안 꾸준하게 작품을 발표하셨고, 그 꾸준함과 성실함에 존경을 표한다. 이 책에도 나오지만, 한 편의 작품을 완성하였다 하여 그 다음 작품이 쉽게 써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작가님은 늘 따라다니는 창작의 고통을 인내하고 극복하여 좋은 작품들을 쓰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 속으로 좀 더 들어가 보자. 책을 읽기 전에도 난 늘 작가들의 삶은 늘 궁금하다.
왜 소설 쓰기를 시작했을까? 그들의 유년시절은 어떠했을까? 소설을 쓸 때의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을까? 소설가들은 정말로 술을 많이 마시고 담배를 많이 피울까? 등등 궁금한 점이 많다. 문학을 하는 "예술인"들의 삶은 보통 사람들과 다를 것이고, 그 다름이 우리에게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는 것일 게다. 이러한 나의 궁금증을 어떻게 아셨는지 <소설을 살다>를 읽어 보면 그 질문들에 대하여 친절하게 알려 주신다.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나 그 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셨던 이야기, 작가가 되었던 과정과 왜 작가로 살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한 이야기, 창작 과정에서 어떻게 소재를 얻고 어떻게 형상화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 언제 창작을 하시고 하루의 일과는 어떠하신지에 이르기까지.. 책을 읽고 있으면 작가님이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차근차근 들려주시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 목소리가 감미로워서 고개를 끄덕이며 듣게 된다고나 할까..
세상엔 다양한 예술 장르가 있다지만, 내가 가장 최고로 뽑는 이들이 바로 글을 쓰는 작가이다. 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이들의 삶이 궁금하다면, 그리고 이승우님의 소설들이 어떠한 과정으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는지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읽으시길..
농담처럼 하는 말이지만, 나는 절필할 계획이 없다. 소설이 나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 아니라 (소설에게 무슨 결핍감이 있겠는가? 아니 설령 그렇다고 한들 내가 무슨 수로 소설을 충족시키겠는가?) 내가 소설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소설이 나를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소설은 내가 만든 집이지만, 그래서 그렇게 허술하지만, 그러나 나를 살게 하는 집이기도 하다. 나는 내 소설 안에서, 소설과 함께 산다. - 이승우, <소설을 살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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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성기, 정찬, 이승우 등 신학적 상상력을 모티프로 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좋아한다. 최재선의 [‘현대소설에 나타난 종말론 소고: 정찬의 ’종이날개‘, 조성기의 ’거대한 망상‘, 이승우의 ’그의 광야‘를 중심으로]나 장수익의 [인간의 존재 방식에 대한 두 가지 탐구: 이승우의 ’목련공원‘과 정찬의 ’세상의 저녁‘] 등의 글은 나의 선호가 어떤 원칙에 따른 것임을 입증하는 것일 수 있다. 이 가운데 내 눈에 띈 것은 ’지상의 노래‘로 2013년 제44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이승우 작가의 ’소설을 살다‘(2008년 출간)이다. 이는 그의 본격 창작방법론인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2006년 출간)의 후속편이라 할 수 있다. ’지상의 노래‘에 대해 “나에게 ‘지상의 노래’는 유폐(幽閉)된 상상력의 부적절함을 알리는 21세기의 사도신경으로 읽힌다. 종교신앙적 순수함이 필요하지만 그것은 현실에 뿌리를 둔 순수함이어야 하는 것이다.”란 글을 쓴 기억이 새롭다. 이승우 작가의 고향인 장흥은 이청준 작가와 한승원 작가의 고향이기도 하다. 이승우 작가는 가끔씩 고향 마을에 발걸음을 하고 그 뒷산에 누워 아버지의 산소에 성묘를 가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고향에 가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런 그도 나이가 들면서 고향과의 거리가 좁혀지는 것을 느낀다고 한다. 고향은 산천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이고 인연임을 분명하게 알 것 같다고 말하는 저자는 이청준 작가의 ’눈길‘을 떠올리게 한다. 저자는 빛나는 작품을 쓴 작가의 그림자 속으로 기꺼이 들어가려는 욕망으로 인해 작가가 되었음을 이야기 하며 자신으로 하여금 그렇게 하게 한 분이 바로 이청준 작가라고 고백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청준 작가의 ’소문의 벽‘이나 ’당신들의 천국‘은 저자가 데뷔작을 쓸 무렵 글이 막힐 때면 몇 번이고 들추어 보던 책이라고 한다. 사담(私談)이지만 이청준 작가의 작품들은 감상 욕구보다 평론을 하고 싶은 마음을 자극한다. 이승우 작가의 데뷔작은 ’에리직톤의 초상‘으로 저자가 그렇게 이청준 작가의 두 작품을 몇 번이고 들추어보던 것은 막막한 스물 한 살의 신학생이었던 시절의 일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의 글을 통해 우리는 작가의 세계관이 변함에 따라 단편 또는 중편이 장편으로 다시 쓰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저자는 지난 시절 가졌던 두 가지 기이한 바람을 이야기 한다. 이곳(고향)이 아니라면 어디나란 욕망(24 페이지)과 자신이 아니라면 누구라도 좋겠다는 욕망(45 페이지)이 그것이다. 그런 그가 자아의 내면은 동굴이라는 말을 한다. 그 동굴이란 안으로 들어갈수록 좁아지고 어두워지고 마침내는 그 안에 수인(囚人)처럼 갇히게 되는 곳이다. 이 규정은 ’지상의 노래‘의 분위기를 예시하는 진술이기도 하다. 빛나는 작품을 쓴 작가의 그림자 속으로 기꺼이 들어가려는 욕망으로 작가가 되었다는 저자는 원한과 적의 즉 세상에 대한 질시와 투기가 자신을 소설가로 만들었을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47 페이지) 자신의 소설을 일종의 허족(虛足)인지 모른다고 말하는 저자는 자신이 작가가 되고 나서 일기 쓰기를 중단한 것은 공개적으로 더욱 교묘하게 허구의 집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더 이상 일기에 매달릴 필요를 없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49 페이지) 소설이 자신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소설을 필요로 하기에 절필(絶筆)할 계획이 없다고 말하는 저자는 바로 자신의 소설 안에서 소설과 함께 사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49, 50 페이지) 저자는 작가를 노출 욕구와 은폐 욕구를 동시에 갖는 복잡한 존재로 정의한다. 이는 저자의 인간론인 ’사람은 혼돈‘이라는 말을 풀어 쓴 말인 듯 하다. 저자는 모든 소설은 본질적으로 자전적일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작가는 절대로 자기 이야기를 사실 그대로 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작가는 기억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기억하며 동시에 상상하고 왜곡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소설을 살다‘에는 저자가 창작에 쏟은 노고와 시대변화의 파고(波高)에 맞서 자기만의 글과 정체성을 정립하기 위해 고투한 기록이 빼곡하다. 절필하지 않겠다는 저자의 선언은 자기 무장의 표현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위대한 예술은 자연스러운 유출과정을 통과해 나오는 것이라 생각한다는 저자는 자신의 소설도 그러기를 바라며 그런 경지를 지향한다고 말한다.(105 페이지) 저자는 책의 죽음에 대해 짧지만 강렬하게 “책이 죽는다고? 책을 외면할 때 죽은 것은 인간’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말한다. 두 번째 소설이 첫 번째 소설보다 쓰기 쉬운 것도 아니고 세 번째 소설이 두 번째 소설보다 반드시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라고.(135 페이지) 소설의 대상은 늘 새롭기에 매번 처음 쓰는 것처럼 쓸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오래 쓰다 보면 일정한 노하우가 축적되지 않겠는가란 반론도 가능하다. 물론 저자가 말했듯 습관의 힘은 경계해야 한다.(138 페이지) 정신무장이라는 말을 했지만 저자는 강제 없이 장편을 쓰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해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158, 159 페이지) 인간 안에 신성의 빛과 악마의 어둠이 같이 있다는 전제하에 인간을 혼돈의 존재(55 페이지)로 설명하는 저자는 카프카의 소설들을 혼란으로 정의한다.(166 페이지) 그러나 혼돈은 양면적인 데서 오는 것이고 혼란은 미로 같은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카프카의) 혼란이 (양면적인 데서 오는) 혼돈과 관계 있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그것은 막막함의 정서와 관계된다. 카프카 문학의 주제는 아버지이다.(180 페이지) 저자는 카프카 이후 그로부터 자유로운 작가는 없으며 그의 모든 작품들 가운데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로부터 자유로운 작품도 없다고 말한다. 이런 사실들을 취합하면 아버지라는 권위와 체계, 법질서로부의 탈출이야말로 수많은 작가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가능하다. 카프카는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에서 글쓰기는 아버지로부터의 작별을 의도적으로 지연시키기 위한 방책이었다고 적었다. 카프카는, 끊임없이 사랑을 베풀었지만 억압적이었던 아버지로부터 벗어나려는 꿈을 끝내 이루지 못했고 편지도 부치지 못했다. 이런 카프카를 어찌 혼란의 정서를 지닌 작가로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카를라 라임메르트는 카프카의 글쓰기가 그의 아버지에게는 눈엣 가시 같았다고 말한다. 카프카의 글쓰기는 그의 아버지에게 용인할 수 없는 아들의 자립의 일환으로 보였기 때문이다.(2009년 생각의 나무 출간 ’카프카‘ 173 페이지) 카프카의 글쓰기는 그런 점에서 보면 불가능한 것에 관한 임시변통물의 차원으로 볼 수도 있다. 즉 신경증적인 것으로 해석될 법하다는 의미이다. 어떤 작가보다도 카프카 만큼 정신분석의 대상이 된 작가는 없다는 철학자 그렉 램버트의 말(’누가 들뢰즈와 가타리를 두려워 하는가‘ 42 페이지)은 그런 사정을 잘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카프카가 빈번하게 정신분석의 대상이 된 것을 공격한 사람들도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그들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신경증에서 가장 큰 잉여가치를 얻어내는 정신분석은 신경증을 판 값으로 연명한다고 말한다.(’소수집단의 문학을 위하여‘ 24 페이지) 카프카는 막스 브로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정신분석에 관한 저서들에 한 번 몰두해 보게나. 그러고 난 즉시 자네는 이전의 허기를 금방 느끼게 될 것이네.“란 말을 했다. 카프카의 영향을 이야기 했지만 저자는 이스마엘 카다레의 ’부서진 4월‘에 나오는 오로쉬 성(城)을 카프카의 ’성(城)’에 대한 하나의 주석인지 모른다고 말한다.(196, 197 페이지) 이승우 작가는 신학을 전공(서울신학대학, 연세대연합신학대학원)한 소설가이고 문예창작과 교수인 소설가이다. 그렉 램버트가 말한 대로 신학적 형식은 부정적 평가를 지닌다. 램버트는 정신분석과 마르크스주의를 언급하며 신학적 형식을 취하는 그들은 기표(법)의 초월성이든 기의(총체성)의 초월성이든 초월성의 신비주의를 신봉하고 있다고 지적한다.(’누가 들뢰즈와 가타리를 두려워 하는가‘ 45 페이지) 스피노자는 성서를 더욱 놀랄만하고 영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이성과 본성에 대단히 모순되는 것으로 보이도록 성서를 해석하고 성서 속에 숨은 매우 깊은 비밀을 가정하려는 혼란과 모순에서 벗어나고 신학적 편견에서 자유롭고, 분별없는 인간의 생각을 거룩한 가르침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서는 확실한 자료에서 이끌어내 자연을 연구하는 해석처럼 성서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역사적 연구를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함을 역설한다.(책세상 출간 ’신학정치론‘ 32, 33 페이지) 이경재 교수는 신학 역시 인간의 언어적 상징세계를 벗어날 수 없는, 문예비평의 대상임을 주장하며 신학이 왜소화하고 사양화되면서 위대한 신학적 상징마저 은폐되어 가는 현대에서 문예비평은 신학이 자기 주장을 할 수 있는 훌륭한 통로라 말한다.(’현대문예비평과 신학‘ 11, 12 페이지) 이런 사정을 감안한다면 신학 또는 성서나 다른 신화에서 모티프를 얻어와 틀에 얽매이지 않는 인물과 상황을 설정하는 이승우 작가의 창작 유형은 우려할 바 아님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감상의 폭을 넓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문제는 그런 문제의식을 어떻게 현대적으로 구체화하는가일 것이다. 유익하고 유쾌한 독서였음을 고백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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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사무이라는 곳에 the library라는 리조트가 있다는 것을 정혜윤의 침대와 책(야시꾸리하면서 어려우면서, 다른 책을 읽고싶게 만드는 책)을 통해서 알게 된 순간, 나는 이미 정혜윤의 책을 좋아해버렸다. 그 리조트에 대한 글은 제일 첫페이지에 있었다. 그리고, 방콕옆에 있다고 하는 그 리조트를 사실 인테리어는 내 스타일이 아닌 매우 모던함에도 불구하고, 거길 가봤으면...하는 마음에 남편한테 이야기했다가 구박받을 만큼 나는 책을 좋아한다. 그런데, 말주변이 뛰어나지 않은 죄로, 집안에 물건을 여기저기 넣어놓은 죄로, 책을 그렇게 읽어대는 것 처럼 보이는데, 그다지 똑똑해보이지 않는다는 죄로, 남편은 나보고 왜 그렇게 책을 읽냐고 종종 물어본다. 물어본다기 보다는 너 뭣하러 써먹지도 못하면서... 라는 투가 은연중에 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좀 더 아름답고 와닿게 대신 해준 글이다.
책은 온 인류의 정신이 저장된 창고와 같다. 책을 뒤적이고 있으면 무언가가 살아나는 느낌을 받는다. 좋은 책들은 잠자고 있던 정신, 무뎌져 있던 감각, 흐릿해져 있던 열정 같은 것을 깨우고 벼리고 밝힌다. 독서가 무언가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면, 책에게든 책을 읽는 독자에게든, 그 둘 다에게든 문제가 있다. 내가 읽는 책이 내 안의 무엇인가를 불러일으킬 때, 깨우고, 벼리고, 밝힐 때 나는 살고 싶어진다. 불러일으키는 책은 좋은 책이다. p67 -이승우, 소설을 살다 : 삶에서 소설을 소설에서 삶을, 마음산책 (2008)- 그런데, 나 살아나는 느낌만 받고 무언가를 불러일으키지는 못한 것 같은데.... 20080729 휘연의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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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가 저무는 날 저녁에 아내와 나는 작은 술자리를 마련하고, 다음 해에 우리가 중점적으로 해야 할 구체적인 무언가를 결정하고는 한다. 지난해의 마지막 날 저녁에 아내는 내게 소설을 써보라고 했고, 내처 등단에 도전하라는 조금은 밑도 끝도 없는 주문을 하였는데, 어지간히 술이 들어간 후인, 해가 막 바뀌려는 참인 한밤중에 나는 덜컥 그 주문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나는 2008년 하반기가 몽땅 지나가도록 마치 마법에 걸린 사람처럼 이런저런 글감들을 찾아내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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